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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파이어폭스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모질라 재단과 모질라 코퍼레이션이 개발하는 자유 소프트웨어 웹 브라우저로 윈도우, 리눅스, macOS, 안드로이드 그리고 iOS 및 iPadOS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 브라우저는 2014년 2월 기준,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약 12%~22%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두 번째나 세 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웹 브라우저이다. 모질라에 따르면 전 세계 4억 5천만명 이상의 사용자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이란, 독일, 폴란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웹 브라우저로 각각 55%, 46%, 43%, 41%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웹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게코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며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다운로드 관리자 등이 있다. 그리고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엔진(대부분 지역에선 구글이 기본)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안드로이드 기준. 검색바를 길게 누르면 검색 엔진을 직접 추가할 수 있다.) 제3자가 만든 부가 기능으로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역사. 데이브 하얏트와 블레이크 로스는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를 모질라 프로젝트의 실험적인 분파로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넷스케이프의 후원에서 비롯된 상업적인 요구와 개발자들의 무분별한 기능 추가가 모질라 브라우저의 효용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모질라 스위트를 비대한 소프트웨어로 보았으며, 모질라 스위트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이 정제된 브라우저를 만들었다. 모질라 재단은 2003년 4월 3일에 개발의 초점을 모질라 스위트에서 파이어폭스(당시 피닉스)와 선더버드로 전환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0년 3월 22일, 윈도우 모바일 버전의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네이티브 프로그램 불허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여러 번 이름 변경을 겪었다. 원래는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피닉스 테크놀로지(Phoenix Technologies)와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여 이름을 변경하였다. 변경된 이름인 파이어버드(Firebird)는 파이어버드 자유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질라 재단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브라우저의 이름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모질라 파이어버드라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서버 개발자 커뮤니티 측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2004년 2월 9일 모질라 파이어폭스(줄여서 파이어폭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2004년 11월 9일 파이어폭스 1이 나오기까지 여러 버전이 발표되었다. 모질라 재단은 안정성과 보안 관련 문제점을 수정하여 2005년 11월 29일 첫 번째 주요 업데이트 버전인 파이어폭스 1.5를 출시하였으며, 파이어폭스 1.5.0.12를 끝으로 윈도우 95에 대한 공식 버전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6년 10월 24일에 파이어폭스 2를 발표하였다. 이 버전은 개선된 탭 브라우징 환경과 부가 기능 관리자, 개선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찾기 및 검색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엔진, 세션 복구 기능, 인라인 맞춤법 검사, 최초에 구글이 제공하는 확장 기능에 의해 기능이 제공되었고 나중에 프로그램 자체에 기능이 통합된 피싱 방지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2007년 겨울에는 파이어폭스 라이브 챗이 론칭되었다. 이는 작동 보증시간과 근무시간 이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이브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스템을 이용해 사용자가 자원봉사자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파이어폭스 2.0.0.20은 윈도우 NT 4.0, 윈도우 98과 윈도우 ME에서 수정없이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8년 6월 17일에는 34개월의 작업을 끝마치고 수천가지 기능이 개선된 파이어폭스 3을 출시했다. 파이어폭스 3은 웹 페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질라 게코 레이아웃 엔진 버전 1.9를 사용한다. 이 버전은 많은 버그를 수정하고, 표준 준수성을 향상시켰으며 새로운 웹 API들을 적용했다. 그 밖에 새로 디자인된 다운로드 관리자, 북마크와 방문 기록을 저장하는 새 "Places" 시스템과 각 운영 체제별로 독립된 테마가 새로운 기능으로 포함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마지막 버전은 3.0.19이다. 파이어폭스 3의 첫 번째 베타 버전은 개발 일정이 늘어지는 중에도 몇 개월 이른 2007년 11월 19일에 나왔고, 이어지는 2008년 봄에 몇 번의 베타 버전이 공개되는 끝에 6월에 최종 버전이 출시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코드네임은 그랜 파라디소(Gran Paradiso)이다. 파이어폭스 3은 출시 직후 24시간 동안 800만이 넘는 고유 다운로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11월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20%를 돌파했다. 이후 출시된 버전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파이어폭스 모바일. 2010년 1월 28일에는 노키아의 마에모 운영 체제로서 모바일용인 코드네임 페넥(Fennec)이 나왔다. 모바일 파이어폭스 1.0은 파이어폭스 3.6의 게코 레이아웃과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 개발. 2011년 4월 13일에 새로운 공개형 테스트 채널이 개설되었다. 명칭은 ‘오로라(Aurora)’로, 기존의 비공개형 테스트 채널(나이틀리, Nightly)과 공개형 테스트 채널(베타, Beta)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2017년 파이어폭스 및 모질라 재단은 오로라 프로젝트가 파이어폭스 베타(Beta)와 나이틀리(Nightly) 버전(채널)에 향후 흡수 및 중단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2017년 6월12일부터 파이어폭스 55버전을 기점으로 나이틀리 빌드가 비공개형 테스트의 주요 개발자 에디션 채널을 담당하게 된다. 나이틀리. 나이틀리(Nightly) 채널은 '홈 그로운 파이어폭스'(Home Grown Firefox)로 불리우는 애칭에서처럼 브라우저 빌드가 보다 대중화되고 개발자 에디션에 대한 사용자 접근 용이성을 목표로 하는 모질라의 기술력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나이틀리(Nightly)버전은 콘솔(터미널)을 통해 구동되는 방식에서 샌드박스(sandbox)를 통한 강화된 보안 기술 및 디버그 등의 실시간 모니터링과 기술보완의 피드백을 위한 로그 등이 제공되고 있다. 파이어폭스의 기능. 파이어폭스에서는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통합된 다운로드 관리자, 단축키,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 파이어폭스에서 사용자가 확장 기능 및 테마를 맞출 수도 있다. 2010년 5월 기준 모질라는 1억 5000만 개 이상의 부가 기능을 addons.mozilla.org(AMO)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 파이어폭스는 웹 개발자들을 위한 에러 콘솔 또는 DCM 검사 또는 파이어버그 부가 기능같은 개발 도구들을 제공한다. 웹 표준.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HTML, XML, XHTML, SVG 1.1 (일부), CSS3 (확장 포함, 일부), ECMAScript (자바스크립트), DOM, MathML, DTD, XSLT, XPath, PNG, APNG 이미지 등을 포함한 많은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 쪽의 저장소와 같은 WHATWG 그리고 캔버스 요소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 이스터에그. 모질라의 새 로고를 보면 본래의 회사명 'mozilla'를 일종의 도메인처럼 'moz://a'라 써 놓은 동태인데('i'는 ':'로, 'l' 2개는 '/'로 바꿔었다), 이를 실제 모질라 파이어폭스 도메인 창에 써 보면 최신버전의 Mozilla 선언문으로 이동된다. 성능. 2005년 12월, '인터넷 위크'(Internet Week) 지는 기사에서 많은 독자들이 파이어폭스 1.5의 메모리 사용량이 높다고 보고했다. 모질라 개발자들은 파이어폭스 1.5의 많은 메모리 사용량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새로 도입된 빠른 앞뒤로 기능 (FastBack) 때문이라고 밝혔다. 메모리 문제의 다른 알려진 문제는 구글 툴바와 애드블록 구버전 같이 잘못 동작하는 확장 기능, 구버전의 어도비 아크로뱃 리더같이 잘못 작동하는 플러그인 때문이다. PC 매거진이 파이어폭스 2, 오페라 9,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의 메모리 사용량을 비교했을 때, 그들은 파이어폭스가 나머지 두 브라우저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Softpedia는 파이어폭스 1.5가 다른 브라우저보다 시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는데, 이후의 속도 테스트에서 확인된다. IE6은 윈도우 XP에서 파이어폭스 1.5보다 더 부드럽게 실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구성요소가 시스템 시작시에 이미 로드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시스템 시작시에 파이어폭스의 구성 요소를 불러오는 프리로더가 만들어졌다. PC world와 Zimba가 2006에, 파이어폭스 2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한다고 했다. 파이어폭스 3은 모질라, Cybernet, Browser world가 수행한 실험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오페라 9.50 베타, 사파리 3.1 베타, 파이어폭스 2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했다. 2009년 중반, Betnews는 파이어폭스 3.5를 벤치마킹했고 이 때 파이어폭스는 윈도우 XP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거의 10배 더 빠르게 작동했다. 2010년 1월 Lifehacker는 파이어폭스 3.5, 3.6, 구글 크롬 4(안정 버전, 개발 버전), 사파라 4, 오페라(10.1 안정, 10.5 프리알파)의 성능을 비교했다. Lifehacker는 브라우저들이 페이지 로딩을 시작해서 마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시스템 시작 직후 및 한번 구동된 이후 둘 다) 측정을 했고, 탭 9개를 한번에 띄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질라의 Dromaeo 온라인 수트(애플의 SunSpider와 구글의 V8 테스트를 수행한 수트)를 이용해 자바스크립트 속도를 시험했고, 윈도우 7의 프로세스 매니저를 이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 3.5와 3.6은 시스템 시작 시에 각각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빠른 브라우저이고, 탭 9개를 여는 데에는 3.5가 세번째, 3.6이 여섯번 째로 빠른 브라우저, 3.5는 여섯 번째, 3.6은 다섯 번 째로 자바스크립트 테스트에서 빠른 브라우저라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또한 파이어폭스 3.5가 메모리 사용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은 파이어폭스 3.5라고 밝혔다. 2012년 2월, 톰의 하드웨어는 윈도우 7에서 크롬 17, 파이어폭스 10, 인터넷 익스플로러 9, 오페라 11.61, 사파리 5.1.2의 성능을 시험했다. 톰의 하드웨어는 테스트를 성능, 효율성, 안정성, 적합성의 네 범주로 요약했다. 성능 범주에서 그들은 HTML5, Java, 자바스크립트, DOM, CSS3, 플래시, 실버라이트, WebGL, 시작 시간과 로드 시간을 테스트했다. 성능 테스트에서 대부분의 범주에서 받아들일 만 하고 강력하다고 보여졌고, HTML5, HTML5 하드웨어 가속, 자바 부분에서 승리했으며 단지 CSS 성능에서만 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효율성 테스트에서, Tom's Hardware는 메모리 관리와 사용량을 테스트했다. 이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은 메모리 사용으로 동작하는 데에 있어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브라우저였다. 안정성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절한 페이지 로드에서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범주인 적합성에서, 파이어폭스는 자바스크립트와 HTML5에 강력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이 판별되었다. 결론적으로, Tom's Hardware는 파이어폭스를 윈도우 7을 위한 최고의 브라우저로 꼽았는데, 구글 크롬에 비해서 조금 더 좋은 것이다. 2013년 6월, Tom's Hardware는 다시 파이어폭스 22, 크롬 27, 오페라 12,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의 성능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는 대기시간, 자바스크립트 수행 시간, HTML5/CSS3 랜더링, 하드웨어 가속 성능을 측정하는 성능 분야에서 다른 브라우저에 비해서 조금 성능이 좋았다. 파이어폭스는 메모리 효율성, 안정성, 보안, 표준 적합성과 같은 비성능 분야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Toms's Hardware는 성능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를 안전한 승자로 결론지었다.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라이선스. 파이어폭스의 소스 코드는 자유 소프트웨어이고 대부분의 소스는 모질라 공용 라이선스(MPL)로 배포된다. 이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를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결과적으로 파이어폭스로부터 몇몇 대중적인 프로그램, Flock, Miro, Iceweasel, Songbird와 같은 프로그램이 파생되었다. 과거에는 파이어폭스는 단지 MPL 버전 1.1로만 배포되었다. 그래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라이선스가 허가한 약한 카피래프트에 대해 비판했다. 게다가 MPL 1.1로만 라이선스된 코드는 법적으로 GNU 일반 공용 허가서(GPL)과 호환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모질라는 파이어폭스 대부분을 MPL 1.1, GPL 2.0, LGPL 2.1로 삼중 라이선스로 배포하게 된다. 이 재라이선싱 때문에 개발자들은 용도에 따라 라이선스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cluding the possibility of proprietary derivative works) if they chose the MPL. However, on January 3, 2012, Mozilla released the GPL-compatible MPL 2.0, and with the release of Firefox 13 on June 5, 2012, Mozilla used it to replace the tri-licensing scheme. 비판과 문제점. 구동 시간. 대부분 파이어폭스가 구글 크롬이나 오페라보다 최초 로딩(Cold Start) 시간, 재 시작(Warm Start) 시간이 느리다는 지적을 한다. 다른 게코 기반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는 K-멜레온 같은 브라우저는 플랫폼에 종속적인 코드를 사용하여 파이어폭스보다 빠르게 불러들인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5에서 악화되었으며 파이어폭스 3.6에서 많이 개선이 되었다. 메모리 사용량. 2006년 이전까지는 파이어폭스가 빠른 앞으로/뒤로 기능, 잘못 동작하는 부가 기능과 플러그인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의 특성인 하나의 프로세서가 많은 페이지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있음에 따른 문제도 있다. 파이어폭스를 포함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는 프로세서 하나가 탭을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아주 많은 프로세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존에 여러 개의 프로세서로 관리되던 것이 하나의 프로세서로 합쳐짐에 따른 착시적인 현상으로, 멀티 탭 브라우징과 메모리 사용량은 관계가 없다. 단적인 예로 멀티 탭 브라우저라도 구글 크롬과 같이 탭마다 개별 프로세서를 생성하는 경우 그런 메모리가 비대한 프로세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점차적인 개선으로 인해 파이어폭스 5에서 메모리 관리 기능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특히 다중 탭을 사용하는 경우 뛰어난 메모리 관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웹사이트에서의 호환성. 대한민국에서는 먼저 확산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맞추어 웹 페이지가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ActiveX를 사용한 부가 서비스(보안, 저작권보호, 게임 런처 등)를 이용하기 힘들다.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2004년 웹 표준 포럼을 개설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토론 및 홍보 활동을 지속하였다. 운영자인 윤석찬의 주도로 반 액티브X 캠페인을 진행하며, 매년 웹 표준 가이드를 무료 제공하고, 김기창 교수와 함께 오픈 웹 소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9년 12월 알라딘, 2010년 1월 YES24 등 대한민국 내 유명 웹 기반 북스토어에서 오픈 웹을 기반으로 하는 파이어폭스 및 사파리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에 결제 가능한 서비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2010년 2월 YES24에서는 전자지불(PG)사의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호환성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렌더링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IE Tab 2, Coral IE Tab과 같은 부가 기능이 등장했고, 이 부가 기능을 설치하면 ActiveX나 전자 결제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제시한 부가 기능들이 파이어폭스의 창 안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어 있는 운영 체제에서만 작동하고 리눅스, 매킨토시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위의 부가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영구적인 해결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웹 표준 기반 HTML5 암호화 및 인증서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 W3C 웹 크립토그래피 API를 제안하여, 표준 활동이 시작되었다. 파이어폭스와 한국어 위키백과.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유니코드 지원 문제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초기의 한국어 위키백과의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미디어위키 소프트웨어의 개선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많은 윈도우 운영 체제 기반의 사용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어폭스는 일부 위키백과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브라우저로 Locationbar² 애드온은 주소창에서 유니코드가 글자로 보이지 않고 코드로 보이는 단점을 제거하여 위키백과 편집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이와 같은 확장 기능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코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에서 개선되어 유니코드를 글자 그대로 표현한다. 한글 입력 문제. 입력기에 의존한 파이어폭스는 사용하는 한글에 대한 키 입력 이벤트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MS 윈도우 사용자는 한글 입력이 무시된다. 일례로 위키백과에서는 검색의 자동완성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 질의어로 "위키백과"를 입력하는 동안 반응이 없으며 "위키백과 "와 같이 인식가능한 빈 공간이나 알파벳 등이 입력될 때 반응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웹 개발자는 다른 트릭을 써서 해결하고 있다. 동기화 데이터가 사라지는 현상. 파이어폭스의 동기화 서비스는 저장시킨 동기화 데이터가 아무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북마크 데이터를 동기화 기능으로 저장해둬도 시간이 지나면 동기화 로그인을 했을 때 데이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타 문제점. 기본 암호를 정하지 않는 이상, 설정에서 어떤 보안장치도 없이 저장된 암호를 볼 수 있다. 채널 빌드. 모질라 재단은 'Beta', 'Developer'(전 aurora), 'Nightly' 채널 등의 파이어폭스 개발자 빌드를 지원한다. 2015년 11월 기준으로, 파이어폭스 43이 Beta 채널에, 파이어폭스 44이 Developer 채널에, 파이어폭스 45가 Nightly 채널에 있다. 릴리즈 프로세스. 파이어폭스는 나이틀리 버전과 그 브렌치(branch)인 베타 버전 그리고 또다시 그 브렌치(branch)인 정식버전 순으로 어어지는 타임라인을 갖는 트레인 모델(Train Model)로 불리우는 지속성을 갖는 실용적인 릴리즈 프로세스를 가동하고 있다. 모바일. USB 플래시 드라이브같은 휴대용 기기에서 설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휴대용 버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PortableApps.com에서는 파이어폭스의 휴대용 버전을 제공한다. 확장 지원(ESR). 확장 지원 버전(Extended Support Release, ESR)은 대량으로 설치하는 기업 등을 위한 버전으로, 일반 정기 출시 버전과 달리 일 년 단위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성능 향상을 하면서 그 일 년 동안에는 정기적이고 보다 장기적으로 보안 갱신을 유지하는 LTS 의미도 갖는다. 빌드.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MS윈도우에서의 빌드시 비주얼스튜디오에서 크로미움과는 다르게 워크로드(Workloads) C++ 리소스 설정에서 테스크탑개발(Desktop development)뿐만아니라 게임개발(Game development) 자원을 요구하지만 개별구성요소(Individual components)에서는 ATL만 요구하고 MFC라이브러리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파이어폭스 퀀텀. 2017년 11월에 출시된 Firefox 57은 서보 구성 요소가 활성화된 초기 버전으로 잘알려져있다. Mozilla는 이것을 '파이어 폭스 퀀텀'(firefox quantum)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퀀텀은 러스트(Rust)와 함께 게코 엔진 및 파이어폭스의 핵심 구성요소이자 기본 레이어를 이루고 있다. 2021년 6월1일 파이어폭스 (퀀텀) 89.0 버전 릴리즈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한 CSS 병렬코어워킹이 구현된 Stylo 및 저전력 소비기술등의 게코(Gecko) 최적화 기술의 결정체를 표현하듯이 디자인면에서도 영감을 주는 플로우팅 탭(floating tab)등을 선보였다. 이는 사용자 경험과 성능 양 측면에서 미래기술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지속적 개선의 작업물로 평가받을수있다. 콘솔. 파이어폭스(Firefox)의 콘솔 터미널은 개발자 도구의 하나로 제공되며 디버그(debug)나 트레이서(tracer)등의 로그(log) 기능등에서 유용하다. 콘솔 창 오픈 단축키는 Ctrl + Shift + K를 제공한다. 위키백과 시각편집기와의 관계. 위키백과 베타 중 시각편집기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브라우저이다. 스크린샷. 파이어폭스 3 테마. 파이어폭스 3의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래에 보이는 네 개의 스크린샷이 각 운영 체제에서의 기본 인터페이스이다. 파이어폭스 로고. 파이이폭스 로고에 대한 역사적인 디자인 리소스뿐만 아니라 현재 로고 등 다양한 자료가 모질라 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브라우저 에디터. HTML5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의 특성상 <contenteditable>을 지원함으로 Data URI인 'data:text/html'을 통해서 편집기 구현이 가능하며 또한 보안 폴터인 다운로드 폴더에 저장이 가능하다. 다음은 HTML5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를 간단히 편집기로 사용하는 주소창에서의 명령어 집합을 보여준다. data:text/html , <html contenteditable> 추가 기능으로 인스펙터(Inspector,단축키 crtl+shift+c)는 소스코드 편집(Edit as HTML)기능을 브라우저 에디터상에서도 지원한다. 이러한 개발자 도구들(web developer tools)은 브라우저 에디터가 안정된 웹에디터(Web disign editor)나 리치텍스트(rich text editor)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모질라서. 모질라서(The book of Mozilla)는 이스터에그의 한종류로 성경의 기술양식을 취하고 있는 다소 서사적인 맥락의 표현 구절들의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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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350
언더그라운드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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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351
록 밴드 (비디오 게임)
《록 밴드》(Rock Band)은 하모닉스 뮤직 시스템이 개발해, EA 및 MTV 게임스가 출판하는 음악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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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352
베이스 기타
베이스 기타(, ), 또는 일렉 베이스는 현악기의 하나로, 보통 4개의 줄을 가지고 있으나, 5현, 6현, 그 이상도 있다. 전기 기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줄이 굵고 낮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다. 종류에 따라 프레시전 베이스, 재즈 베이스, 스타인버거 타입, 프렛레스 타입, 어쿠스틱 베이스 등이 있다. 취향에 따라 손가락, 또는 피크로 친다. 구조. 베이스는 크게 헤드와 넥, 바디로 나뉘어 있다. 헤드는 줄이 감기는 줄감개와, 넥 부분의 너트와 줄감개 사이에서 줄을 고정시켜주는 스트링가이드로 이루어져 있다. 줄감개는 줄의 팽팽함을 조절하는 헤드머신과 연결되어있어 튜닝시에 이용된다. 스트링 가이드는 종류에 따라 없는 경우도 있다. 넥은 헤드와 보디 사이에 위치한 부분으로 운지하는 부분이다. 줄들 사이사이에 운지할 수 있도록 줄과 닿는 프렛이 위치하고 있다. 일부 프렛과 프렛 사이에는 포지션마크가 있어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다. 너트는 헤드에서 넥으로 넘어오는 부분에 위치하는데 줄 간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디의 경우 줄에 관계되는 부분으로 브릿지와 픽업이 있고, 출력을 조절하는 볼륨노브와 톤노브가 있다. 볼륨 노브가 2개인 경우 위치에 따라 프론트볼륨 노브와 리어볼륨 노브로 나뉘는 경우도 있다. 액티브와 패시브 전환이 가능한 기타의 경우 패시브/액티브 전환 스위치도 같이 존재한다. 브릿지는 뒤쪽에서 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픽업의 경우 현의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부분인데, 핑거링 주법을 사용할 시에는 엄지 손가락을 올려놓게된다. 재즈 베이스와 같이 픽업이 두개로 나뉜 경우 헤드에 가까운쪽부터 프론트 픽업, 리어 픽업이라 한다. 그밖에 어깨끈(스트랩)을 고정하는 스트랩핀과 케이블을 연결하는 아웃풋잭, 줄의 끝부분이 고정되는 테일피스가 있다. 피크로부터 바디가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피크가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특징.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가 박자 맞추기를 담당하는 것처럼 밴드악기에서 박자를 담당하는 악기이다. 또한 베이스 기타는 음의 고저를 운지할 수 있음에도 합주할 때에는 드럼의 박자를 이끄는 리듬악기에 가깝기 때문에 박자감이 매우 중요하다. 음의 위치는 통기타와 일렉기타의 위쪽 4현과 동일하다. 또한 무게도 엄청나다. 일렉김준경보다 1kg정도 더 무겁다. 종류. 프레시젼 베이스/재즈 베이스. 픽업의 배열에 따라 나뉘는데 프레시전 베이스는 험버커 픽업, 즉 1,2번/3,4번줄의 픽업이 앞뒤로 바로 붙어있다. 때문에 볼륨 노브가 하나뿐이며 재즈베이스에 비해 다소 두껍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재즈 베이스는 이와 달리 픽업이 프런트 픽업과 리어 픽업으로 나뉘어 있으며 따라서 볼륨 노브 또한 2개이다. 두개의 픽업이 있기에 다양한 톤이 연출가능하다. 김준경 타입(헤드 리스). 김준경 타입이란 스타인버거사에서 나온 베이스를 가리키는 말로 헤드가 없는 특징을 가진다.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이 몹시 뛰어나다. 튜닝은 브릿지쪽에서 하는데 튜닝할 때 힘이 적게 들어간다는 장점이있다. 프렛리스 타입. 말그대로 프렛이 없는 베이스를 일컫는다. 프렛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의 어느정도 숙련을 필요로하며 슬라이딩을 할 때에 몹시 부드럽다. 하지만 프렛이 없기에 명확한 음을 내기 힘들다는 단점을 지닌다. 5현 베이스. 일반적인 베이스가 4현만을 사용하는 반면, 5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역시 일반 기타에서 위로부터 5줄까지의 음과 동일하다. 4현베이스 튜닝은 4현부터 E - A - D - G 인 반면 5현베이스 튜닝은 (5현기준으로) B - E - A - D - G이며 솔로를 지향하는 베이시스트들은 로우 B현 대신 E - A - D - G - C처럼 하이 C 현을 넣어 튜닝하기도 한다. 혹은 둘 모두를 넣기도 하는데, 이를 6현 베이스라 한다. 주법. 핑거 피킹 주법. 핑거 피킹 주법이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방법이다. 지문 부분을 이용해 누르는 느낌으로 연주하며 중지가 약지보다 길기에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여 자세를 잡는다.(불편하다면 굳이 기울일 필요는 없다.)(긴 손가락을 조금 구부려 길이를 맞추는 방법도 있다.) 피크 피킹 주법. 피크를 이용하는 주법으로 베이스 피크의 경우 기타 피크와는 달리 상당히 두께있는 피크를 사용한다. 위아래로 현에 닿게 연주하며 안정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핑거피킹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서 주로 록이나 메탈같은 음악에 많이 쓰인다. 슬랩 주법. 베이스 연주의 화룡점정인 주법.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주법으로 엄지의 경우 반동적으로 튕기듯하고 검지는 줄을 흡사 뜯는 느낌으로 연주한다. 빠른 속주가 가능하고 독특한 음색을 낸다. 그루브있는 음악을 연주하기 용이하다. 난이도가 비교적 높아 초보자들은 쉽게 따라하기 힘든 주법이다. 그 밖. 왼손만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머링, 폴링오프가 있다. 해머링은 넥부분의 현에 손가락을 찍듯이 눌러 음을 내는 방법으로 특정음을 낸 후에 해머링을 이용하여 높은 음을 곧바로 낼수있다. 폴링 오프는 이와 반대로, 가한 손가락으로 줄을 잡아당기듯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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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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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
록 음악()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형식이다. 록은 일반적으로 보컬, 리드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넷으로 구성되며, 강렬한 기타 혹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 대개 보컬, 전기 기타, 그리고 강한 백비트(록음악 특유의 강한비트)로 구성되며, 백비트는 색소폰과 같은 여러 종류의 악기들에 의한 스타일이 일반적이다. 록 음악은 젊음의 기쁨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젊은층이 가진 욕구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명칭 및 정의. 록은 1950년대 로큰롤(Rock and Roll)에서 비롯되었다. 록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 모호하다. 이 단어는 때때로 여러 장르들이 모호하게 섞여있는 것, 이를테면 소울, 헤비메탈 심지어는 힙합을 포함하는 것까지,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넓게 보자면 로큰롤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좁게 보면 로큰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징. 록 음악의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전기 기타를 중심으로 하며,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과 심벌이 포함된 드럼 킷을 사용한다. 피아노나 해몬드 오르간, 신시사이저와 같은 건반악기도 역시 자주 사용한다. 록 밴드는 일반적으로 보컬리스트, 리드 기타리스트, 리듬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둘에서 다섯 정도의 멤버로 구성된다. 이 일반적인 형태는 버디 홀리가 고안해냈고 비틀즈가 확립했다. 록 음악은 전통적으로는 백비트가 있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자주 사용한다. 록 음악은 스타일적으로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역사와 다른 장르의 요소의 잦은 유입 등의 이유로 록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힘들다. 역사. 록 음악은 처음 시작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록음악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을 때는 로큰롤이라고 불렀는데,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무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기성 세대는 이전에는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록음악의 뿌리였던 블루스에서 벗어나 간단히 록음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록음악은 음반사업 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정치 풍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과 결합 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오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히피 무브먼트, 모드 사조, 비트 사조 등이 있다. 장르의 변천사. 1940년대 재즈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대중에 멀어졌다. 재즈의 쇠퇴와 록의 도래 사이의 과도기 시절인 1950년 대 초반에는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가수로서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냇 킹 콜 등이 있었다.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기성 세대들이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면 비주류 계층인 흑인들은 블루스 음악을 즐겼으며 농촌의 백인들은 컨트리 송을 즐겼다. 블루스 음악은 스윙 재즈의 영향을 받아 곧 리듬 앤 블루스로 진화했다. 그리고 컨트리 송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는 달리 보통의 리듬 앤 블루스는 초기 로큰롤의 형태이다. 로큰롤은 백인 청소년에게 점점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가수는 주로 흑인이었다. 대표적으로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있었다. 이에 음반 제작자들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숨겨진 리듬 앤 블루스 명곡을 백인이 커버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들이 가수로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 빌 헤일리, 버디 홀리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장르를 로커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큰롤과 컨트리 송의 진화 형태인 힐빌리를 합친 말이다. 이런 음악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리버풀 등 항구 도시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로큰롤은 재즈와 결합하여 스키플 사운드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있었다. 주류가 로큰롤을 하였다면 언더그라운드 비주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하였다. 기존의 블루스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으로 이뤄진 컨트리 블루스와 델타 블루스 등이 있었다. 곧 미국이 발전을 하게 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블루스에도 전기 악기가 접목되어 일렉트릭 블루스가 되었는데 특히 시카고에서 인기를 끌어 시카고 블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음악은 로큰롤이 도래하기 이전 영국으로 전해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백인)들은 브리티시 블루스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알렉시스 코너와 존 메이올이 있었다. 로큰롤을 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 중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공연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그 다음 공격을 하여 성공을 했는데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한다. 뒤이어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5, 무디 블루스 등이 진출을 하였다. 이런 가수들은 모두 사조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음악 이외에도 브리티시 블루스를 하던 사람들도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수가 롤링스톤즈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기성 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비트 사조에 빠져들었고 곧 히피 무브먼트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마약을 하였는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하였다. 사이키델릭 록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포크 송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피트 시거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이 있었다. 한편 이런 식으로 미국식 사이키델릭 록이 마냥 외쳐대는 밴드였다면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은 예술적, 음악적인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밥 딜런이 포크 송과 로큰롤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크 록을 만들어냈다.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의 발전으로 곧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었고 브리티시 블루스의 영향으로 블루스 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블루스 록을 하던 밴드였던 크림은 하드 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결합시켜 하드 록을 더욱 발전시켰다. 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중요하다. 비화. 락의 시초는 블루스이며 1930년대 로버트존슨이 개발한 리듬이 시초가 된다. 하지만 로버트 존슨이 약혼녀에게 독살 당하고 그가 개발한 리듬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50년대 척베리 등과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의 리듬을 발전시켜 락앤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같은 락앤롤 뮤지션들의 노래는 젊은 이들을 크게 열광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기성 세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관습적으로 락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표적으로 락 이전에 존재했던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불허하여 그들이 하는 모든것은 매도되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음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에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이라고 매도되었다. 이때문에 재즈같은 경우는 어느정도 즐기는 백인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흑인들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즐기고 연주하는 백인들은 찾기 힘들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로버트 존슨의 일화중 미시시피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나 음악을 배웠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렇게 와전된 전설 역시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블루스에서 발전한 락앤롤을 백인들이 공연장에서 열렬히 부르자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열광을 한다. 클래식, 재즈, 스탠다드 팝 등 기존의 음악을 뒤로하고 락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 전까지는 없었으며, 음악을 들을 때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은 금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기성세대들에겐 젊은이들이 미친것으로 보였으며, 이러한 락은 기성세대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다. 락앤롤은 젊은이들을 악마의 유혹에 빠뜨리는 주적이 된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으론 기독교가 있었다. 1950년대 락앤롤 뮤지션인 제리 리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Great Balls of Fire』을 보면 기독교가 락앤롤을 얼마나 매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제리는 마지막에 "락앤롤이 악마의 음악이라면 나는 지옥에서도 피아노를 치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 락앤롤은 기독교 관습으로 인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흑인에 대한 차별이 줄고 젊은이들의 열광도 익숙해지며, 락은 성장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락에 대한 매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갈수록 퇴폐적인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락앤롤 밴드 비틀즈는 발라드 명곡 Yesterday를 발표해서 기성세대에게도 락앤롤을 한다고해서 다 천덕꾸러지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악동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는 온갖 성적인 발언과 추악한 행동으로 기성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다. 또한 1960년대 후반 샤이키델릭이 성행할 때, 샤이키델릭의 음악 성향상 마약의 복용은 흔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락은 매우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등이 이런 약물에 의해 사망한다. 또한 락은 대중음악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저항을 상징하는 포크 뮤지션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만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성적인 문제도 자주 일으켰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샤이키델릭, 포크등에 의해 히피문화가 발전하고 약물, 퇴폐성, 폭령성 등의 어두운 부분이 극에 다다른다. 기독교 계열에서 비판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락 뮤지션들중에 반-기독교 성향을 보이는 무신론자도 많을 뿐더러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욕을 잦게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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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
컵라면()은 컵 형태의 작은 용기에 포장된 라면이다. 역사. 1971년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개발하였다. 최초의 컵라면은 닛신 식품의 컵누들이었다.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 내 라면시장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 새로운 재품을 고민하던 중, 1971년 컵누들을 발명하게 되었다. 당시 해외 시장또한 겨냥하기 위해 라면 용기 안쪽에 포크를 함께 포장해서 팔던 것이 특징이었으며 일본 라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시 광고 내용은 ‘끓인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였으며 지금 현재에도 일본 컵라면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컵라면이 시판된 지 1년만에 아사마 산장 사건의 식량과 배고픔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1972년 3월 삼양식품에서 국내 첫 컵라면을 출시하였으며, 이후 1976년 컵라면 무인 판매기 5대를 명동 미스코시 백화점, 경희대입구, 삼양식품 체인점, 그랜드 제과, 이대 입구 등에 설치하였다. 이후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지에서도 컵라면 자판기를 추가하였다. 1982년 농심도 본격적으로 컵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하였으며, 이에 삼양은 쇠고기, 유부맛 컵라면 65g짜리와 쇠고기맛 대접면 86g짜리를 출시해 맞섰다. 1981년 후 일본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미니 컵라면을 출시했는데 일반 컵라면이 75g, 130엔 인데 비해 이 컵라면은 37g에 60엔으로 절반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당시에 1400 이르는 일본 컵라면 시장에서 10퍼센트에 가까운 매출을 차지했다. 1988년 봉지면에 비해 컵라면의 소금섭취량이 많다는 의견의 기사가 올라와 소비자 건강에 대한 우려를 내비추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컵라면은 이후에도 꾸준히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89년 일본의 닛산식품회사는 캔속에 물을 붓기만 하면 물이 자동으로 끓는 라면을 개발하였다. 1989년에는 봉지면과 컵라면에 들어가는 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겼다는 일명 '우지논란'이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한강공원 등지에서 컵라면을 판매 허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서의 라면을 즐기게 되었다. 1996년부터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컵라면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 1998년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기업에서는 끓는 물을 붓고 30분이 지나서부터 환경호르몬이 검출되는데 이 시간을 넘겨서 컵라면을 섭취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나라별 컵라면.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삼양식품에서 1972년 3월에 국내최초 용기면인 ‘컵라면’을 생산하였고, 농심사가 1981년 11월 국내 최초로 사발형태의 ‘사발면’을 개발하였다. 그 이후로 여러 종류의 컵라면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컵라면에는 농심의 '신라면', 오뚜기의 '진라면', 팔도의 '도시락'이 있다. 2012년부터 삼양에서 불닭볶음면이 출시되면서 한국에서는 매운 라면의 인기가 SNS를 통해 퍼졌다. 이에 컵라면으로도 출시되어 소비자들은 보다 편리한 컵라면을 소비하는 등 "큰컵불닭볶음면"이 유행하였다. 또한 매운맛에 도전하기 위해 삼각김밥, 치즈를 함께 먹는 레시피가 인터넷과 SNS 등에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라면들을 "섞어"먹는 새로운 방식이 시도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섞어먹기 편한 컵라면의 판매량이 증가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컵라면과 컵라면 내에서의 국물없는 비빔면 종류의 판매가 증가했다. 한국에서의 매운 컵라면이 유행하자 유튜브 등에서는 외국인의 한국 컵라면 체험 후기 등의 영상이 유행하였다. 10분 내외의 짧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 매운 컵라면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드러나는데 2017년 사스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동남아 지역에서의 불닭볶음면의 매출이 올라갔다. 중국. 중국 컵라면은 한국과 달리 일회용 젓가락이나 포크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액상 스프를 사용하고, 향신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맛의 컵라면이 있다. 매운맛의 라면도 있지만 매운 맛이 아닌 구수한 맛이 나는 컵라면도 있다.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라면인 '캉스푸 홍샤오니우로우미엔"은 중국 소비자 10명 중 5명이 먹는 라면회사라는 수식이 붙은 캉스푸에서 만든것이며 대한민국 온라인 매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일본.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닛신 돈베이 우동이 있다. 이 컵라면은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개발한 ‘닛신푸드’의 제품이다. 이 컵라면의 맛은 소고기와 유부 2가지 맛이 있는데 두 제품 모두 면발이 마치 대한민국의 칼국수처럼 굵고 납작하다. 일본의 컵라면에는 대한민국의 컵라면에 들어있는 건더기 양에 비해 풍부한 양의 건더기가 있다. 일본에는 컵라면 박물관이 있는데,이곳에서는 세계최초 치킨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의 생애를 영화로 상영하는 '모모후쿠 극장'과 치킨라면을 손수 만들어 볼 수 있는 '치킨라면 팩토리' 등 인스턴트 라면을 토대로한 다양한 전시와 활동들을 진행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 엔화약세 등의 이유로 젊은층에서의 일본여행이 유행하면서 일본 라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 중 닛신의 컵누들의 경우 세계 최장수 라면으로 독특한 광고로 유명세를 탔다. 닛신식품과 마루짱등이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특히 마루짱은 멕시코에서 컵라면의 대명사격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태국. 태국은 라면에서 신 맛이 난다. 또한, 태국에는 컵라면을 살 때 용기 안에 플라스틱 포크가 들어있기 때문에 따로 나무젓가락을 챙길 필요가 없다. 태국 라면의 가장 큰 특징은 향미유(향신료)가 있어 기호에 맞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며 분말 스프는 약간의 신 맛이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대한민국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태국의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가 있으며, 이 라면은 톰얌쿵의 맛을 끓여 먹는 라면으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톰얌쿵’이란 ‘세계 3대 수프’ 중에 하나이다. 태국어로 ‘톰’은 끓임, ‘얌’은 시큼한 맛, ‘쿵’은 새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는 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살린 라면이다. 실제로 수프의 색도 빨간색이 아니라 흰 우유를 부은듯한 오렌지색이다. 맛은 일반 라면 스프에 신 맛을 더하면 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2013년 세계 라면 협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한 명당 일 년에 평균 74.1개의 라면을, 인도네시아는 60.3개를 먹는다고 한다. 이런 열풍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1위의 라면 생산 업체 인도미(Indo mie)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라면은 대한민국에 비해 양이 적고 칼로리가 낮다. 수치로 비교해보면, 125g정도 하는 대한민국의 라면에 비해 인도네시아 라면의 무게는 67g~68g정도로 매우 작다. 1봉지를 섭취했을 때의 칼로리는 대한민국은 500kcal, 인도네시아는 340kcal로 현저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라면의 면은 대한민국과 다르게 두껍지 않고 얇다. 소스에는 카피르라임 잎이 들어 있는데, 이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남아의 음식에 들어가 음식 맛의 풍미를 살려준다. 공정 과정. 제조 공정. 라면의 제조 공정과 유사하며 마지막 포장 단계에서 봉지가 아닌 용기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용기. PSP 용기. 이 용기는 Polystyrene (폴리스티렌) 원료를 10~30배로 고발포하여 시트 내부에 공기층을 형성시킨 것으로 단층구조가 아닌 여러겹이 쌓여있는 구조이다. 액체나 기체에서의 열의 전도는 고체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열의 절연체인 공기가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최대한의 열손실을 방해하고자 한 것이다. 열손실이 적어야 용기안의 면이 익을 만한 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PSP 용기의 특성은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하여 여타 이물질이 묻어있는지를 쉽게 구분 할 수 있으며 국물이 배거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어떠한 이물질의 혼입을 막아주는 등 위생성이 양호하다. 단열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이 있는 라면 용기등에 매우 적합하며 선도유지성이 우수하고 수분증발 방지 등의 효과가 뛰어나다. 또한 충격에 강하여 상품의 운반 보관에 매우 유익하다. 경량성이 뛰어난것도 특징이다. PSP용기는 PS 수지를 5-15배 발포시킨 것으로 크기에 비해 매우 가볍다. 다른 용기보다 가벼우면서 내용물을 동일하게 담을 수 있어 운반이나 취급시 용이한 것이다. 또한 내용물이 용기의 표면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판매와 취급이 편리하며 회수 상태에 따라 원료나 연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종이 용기. PSP 용기가 환경호르몬의 발생 원인이라고 하여 친환경적이라고 주목받는 종이용기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종이용기는 PSP용기보다 개발시 용기 가격이 비싸지만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재활용이 가능하며 2중용기로서 단열효과가 좋아 취식시 안전성이 양호하다. 쉽게 파손되지 않고 내용물 보호에 유리하며 겉면 인쇄도 유리하다. 환경호르몬 논란. 1998년 6월 일본 국립의약품 위생 연구소에서 기존에 쓰이던 PSP (Polystyrene paper)의 재질로 만들어진 용기에서의 내분비계장애(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인 다이머(dimmer), 트리머(trimer) 용출 시험 결과를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 인용 보도하면서 환경호르몬 논란이 대두되었다. 1998년 4월 26일 동아일보에서 "컵라면 등 용기 생식기능 저하 물질 함유", 1998년 4월 26일 서울경제의 "라면 등 1회용 식기에 생식기능장애 환경호르몬 함유", 1998년 4월 26일 중앙일보의 "컵라면 용기에 환경호르몬 함유... 생식기능 저하될수도"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기사가 보도된 이후 주 소비층인 주부와 청소년층에서 불신감이 팽배해 졌다.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결과 PSP 용기 제조 시 다이머(dimer)와 트리머(trimer) 같은 물질은 환경호르몬 작용 즉, 내분비계 장애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또한 라면 용기의 안전성에 대해 많은 연구발표가 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을 보면 미국 산업화학독성연구소 로저맥클레란 대표는 컵라면 용기와 관련하여 환경호르몬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금물이고, 스틸렌다이머와 트리머에 대한 환경 호르몬 연구결과는 없으며, 자신도 전자레인지에 가열해 먹는다고(전자레인지용 용기로)하면서 안전한 물질임을 피력 한 바 있다. 나아가 일본 환경청은 폴리스틸렌을 내분비교란물질 목록 SPEED 98 개정판에서 삭제하였고, 유럽 아시아를 비롯 세계각국의 정부기관들에서도 사용을 승인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번 감소세로 이어진 판매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라면 업체에서는 용기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으며 PSP 용기에서 PP용기나 종이용기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펄프(주)는 컵라면 용기를 라면업체 빙그레와 현진제업과 공동으로 개발하였으며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PSP 용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2005년 농심의 경우 라면용기를 PSP 용기에서 전분발포용기로 교체하였다. 오뚜기의 경우, 독자 기술을 통해 발명한 친환경 용기를 활용,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해도 안전한 컵라면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7년 기준, 오뚜기는 진라면 2종을 시작으로 참깨라면, 진짬뽕까지 전자레인지용 용기를 확대 적용했으며, 나머지 컵라면의 용기도 전부 친환경 용기로 교체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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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볶이
라볶이는 라면 떡볶이의 줄임말로서, 떡볶이에 라면 면발을 얹은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 또는 라면 분말소스를 적당히 넣을 수도 있다. 일부 식당에서는 라면의 면발 대신 쫄면의 면이나 사리를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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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네티즌() 또는 누리꾼은 인터넷 통신망에 형성된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네티즌' 은 인터넷 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누리꾼' 이란 말이 방송에서 처음 사용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인 참여정부 집권 초반기부터였다. 어원 및 활용. 네티즌. 네티즌은 통신망을 뜻하는 'net'과 시민을 뜻하는 'citizen'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시민(citizen)은 자립성, 공공성, 능동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티즌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마이클 하우번(Michael Hauben)은 네티즌이란 용어가 단순히 통신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통칭하는 개념이 아닌 통신망에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가꾸어가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네티즌이라는 용어가 영어권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영어권보다는 중국이나 대한민국에서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 영향으로 영어권에서는 주로 아시아지역 누리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영어권에서는 사이버시티즌(cybercitizen)이라고도 하며, 인터넛(internaut: internet + astronaut)이라는 은어가 쓰이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누리꾼을 네티즌(ネチズン, netizen)이라 하지 않고, 넷 유저(ネットユ一ザ一, net user)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한민국 대형 신문사들이 일본어 서비스로 제공한 기사에서 "네티즌(ネチズン)"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 일본에서는 '네티즌'이라 하면 흔히 '대한민국의 누리꾼'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리꾼. 2004년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에서 네티즌을 순화한 단어로서, 세상을 뜻하는 '누리'와 전문인을 뜻하는 '꾼'의 파생어이다. 초기에는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순화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으나, 현재는 두 단어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누리망'으로, 홈페이지는 '누리집'으로 순화되었으나, "'누리꾼'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며 공식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다." 평가.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정보교환을 장점으로 본다. 익명을 사용하여 토론상대나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미성숙함도 이따금씩 지적받는다. 네티즌이란 용어가 중간에 방송을 통해 누리꾼이란 말로 변용, 사용되는 과정에서 일부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꾼' 이란 어미가 붙은 단어의 상징성으로 인해 네티즌이란 용어의 어감 폄하가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네티즌들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논란의 근원은 과연 사이버 상의 '민주시민' 이라 볼 수 있는 cybercitizen 을 '꾼' 이란 어미로 얕잡아 불러도 되는지에 대한 상징성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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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떡볶이는 떡면(얇은 가래떡)을 주재료로 하는 한국 요리이다. 일반적인 떡볶이는 밀떡, 쌀떡, 어묵, 채소, 고추장 등의 양념을 넣어 볶은 음식으로 한국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다. 고추장과 간장을 기본으로 양념할 수 있는데 전자가 가장 대표적인 형태다. 역사. 현대 한국에서 즐겨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한국 전쟁 직후에 개발된 음식이다. 이전에 궁중에서 먹던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다른 찜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한다. 흰떡을 탕무처럼 썰어 잠깐 볶는다. 다른 찜과 같은 재료가 모두 들어가지만 가루즙은 넣지 않는다"라는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으며, '주식시의(酒食是儀)'에서는 떡을 잘라 기름을 많이 두르고 쇠고기를 가늘게 썬 것과 함께 넣어 볶는다고 나와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궁중 떡볶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의 고추장 떡볶이는 1953년에 마복림(1921~2011)이 광희문 밖 개천을 복개한 서울 신당동 공터에서 길거리식당 음식으로 팔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음식점에서 가래떡을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떨어뜨렸는데 그 떡을 먹고 보니 맛이 좋아서 고추장떡볶이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연탄불 위에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MBC 표준FM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이란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골목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특징. 떡볶이는 고추장을 사용해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떡볶이와 간장을 사용하는 간장 떡볶이로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원래 궁중에서 발달한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워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운 맛이 아니었으며, ‘궁중 떡볶이’로 불린다. 보통 떡볶이 하면 연상되는 고추장 떡볶이는 대개 고추장과 설탕을 써서 매운 맛과 단 맛을 내는데 보통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등의 양념과 단 맛을 내는 설탕이나 물엿 등을 섞은 양념장에 떡을 섞은 뒤 졸여서 볶아낸다. 지역에 따라 여기에 케첩, 후추, 겨자 등의 재료를 첨가하여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한다. 또한 고추장 떡볶이 소스의 감칠맛을 내기 위하여 짜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카레와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떡은 떡면(떡볶이떡) 또는 가래떡을 사용하며 떡의 주재료가 쌀가루로 만들었냐 밀가루로 만들었냐에 따라 '밀떡볶이'와 '쌀떡볶이'로 나뉘기도 한다. 떡볶이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는 한국 전쟁 이후에 흔해진 밀가루로 만든 떡을 사용하였다. 이후 쌀가루로 만든 쌀떡볶이가 나온 이후에도 사용되는 곳이 많다. 밀떡볶이는 떡볶이 국물의 점도가 매우 높아지고, 쌀떡볶이는 오래 끓여도 탄력성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밀떡과 쌀떡을 섞어 판매하는 곳도 많다. 밀가루에 녹말가루를 섞어 만든 떡으로 만든 떡볶이도 있으며 더 쫄깃하고 잘 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색깔은 노란색인데 익히면 흰색에 가까워진다. 추가하는 양념의 종류에 따라서 치즈 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 짜장 떡볶이, 카레 떡볶이, 로제 떡볶이, 크림 떡볶이 등의 다양한 떡볶이가 있으며, 추가할 수 있는 양념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흔한 고추장 떡볶이 역시 배합과 양념에 따라 맛의 차이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분식점과 노점상에서 많이 판매하며 보통 떡볶이와 함께 다른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흔하다. 일반적으로 튀김류에 떡볶이 양념을 묻혀 먹기도 하며, 김밥과 순대와 곁들이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는 한식 세계화 과정에서 고급화와 다양화되고 조리법의 노하우 등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NFL 휴스턴 텍선스의 홈구장에서 미식축구구장 최초로 한국식 고추장 떡볶이를 판매하는 등 세계 각국에서도 떡볶이를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늘고 있다. 변형. 라볶이. 떡볶이 국물과 함께 미리 데쳐놓은 라면 사리를 넣어 조리한 음식. 떡볶이를 먹고 남은 국물을 쓰거나 떡볶이 국물을 처음부터 만들고 조리하기도 한다. 라면 사리 대신 우동과 쫄면 사리를 넣어 조리하기도 한다. 라볶이가 만들어진 이유는 한 여고생이 떡볶이에 라면사리를 갖고 와 그걸 가게 주인이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고 해서 라볶이를 만들게 되었다. 국물떡볶이. 국물 떡볶이는 일반적인 떡볶이 보다 국물이 많이 있는 떡볶이의 일종이다. 기름떡볶이. 기름떡볶이는 기름과 떡을 중심으로 국물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을 볶아놓은 후 고춧가루, 굴소스, 간장, 맛술 등을 배합한 양념과 미리 살짝 데쳐 놓은 떡볶이 떡을 넣어 볶는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공원 옆의 통인시장에서 판매한다. 처음 등장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0년대 초 통인동 부근의 옥인동 시장에서 통인시장보다 먼저 기름떡볶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간장과 고추장을 적게 넣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철판에서 볶아 먹는 방식이었다. 현재 통인시장에서 팔고 있는 기름떡볶이는 이전 방식에 비해 양념을 많이 넣는 편이다. 201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통인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시식한 바 있다. 간장떡볶이. 간장떡볶이는 간장을 주요 양념으로 해서 만든 떡볶이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치즈떡볶이. 치즈 떡볶이는 완성된 떡볶이 위에 치즈를 얹거나 떡 속에 치즈가 들어 있는 떡볶이를 말한다. 보통 분식집에서 판매되며,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위에 녹차가루, 허브가루, 깨, 파슬리 등을 뿌려 먹기도 한다. 카레떡볶이. 카레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카레 소스로 만든 것으로 카레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카레떡볶이의 카레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짜장떡볶이. 짜장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짜장 소스로 만든 것으로 짜장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짜장떡볶이의 짜장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즉석떡볶이. 즉석떡볶이는 테이블에 재료를 갖추고 손님이 직접 조리하여 먹는 떡볶이로 기본 재료인 양념, 떡, 어묵, 야채, 달걀, 튀김 등을 손님이 원하는대로 추가 및 배합할 수 있다. "떡볶이 뷔페"라고 하는 손님이 직접 재료를 골라 가져와 조리하는 곳도 있다. 떡꼬치. 떡꼬치는 떡을 꼬치에 끼워서 기름에 튀긴 후 양념 소스를 발라먹는 음식이다. 떡 이외에 소시지, 채소, 해산물, 고기 등을 같이 끼워넣는 변형도 있다. 떡꼬치가 등장한 시기는 80년대 중후반 즈음으로 보고 있었으며, 현재에는 노점상을 중심으로 팔리고 있다. 떡꼬치의 전신으로는 15세기 요리책에 나오는 "떡산적"이란 요리로 추측되고 있다. 까르보나라 떡볶이. 일명 크림떡볶이라고도 하는 까르보나라 떡볶이는 크림파스타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졌다. 기존의 떡볶이 특유의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대신하여 크림파스타에서 사용하는 크림소스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어묵 대신 베이컨을 넣는다. 로제떡볶이. 우유, 크림, 토마토 소스를 섞어 만든 로제 소스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떡볶이다. 떡 이외에 납작 당면, 베이컨, 소시지 등 다양한 토핑과 함께 먹을 수 있다. 최근 유튜브와 SNS를 통해 로제 소스를 활용한 음식들이 화제가 되고 있으며, 대다수의 떡볶이 프랜차이즈 브랜드에서 로제 떡볶이를 신메뉴로 출시하고 있다. 떡볶이 칼로리. 기본 떡볶이는 1인분 기준으로 약 260kcal이다. 엽기 떡볶이는 1통 기준으로 약 1500kcal이고, 엽떡로제떡볶이는 1통 기준으로 약 2600kcal이다. 또한 신전떡볶이는 1인분 기준으로 약 490kcal이고, 응급실떡볶이는 1통 기준으로 약 2600kcal이다. 배떡로제떡볶이는 1통 기준으로 약 2500kca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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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
분식(粉食)은 원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라면, 국수, 빵 등이 분식에 해당되었으나, 현재는 떡볶이, 김밥, 순대, 어묵, 라면, 닭강정과 같이 단가가 싸서 분식점 등에서 많이 조리·판매되는 음식들을 지칭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분식 장려정책.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에 정부에서 쌀 부족을 해결하려고 혼식(쌀과 잡곡을 섞어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장려하면서 발전했다. 분식점의 효시는 1961년 동성로에서 문을 연 미성당이고, 뒤이어 1963년 같은 상호의 미성당이 근처 남산초등학교 맞은편에 나타난다. 이 두 미성당이 마침내 지역의 분식 문화 전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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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
순대()는 한국의 음식으로, 돼지의 창자에 채소나 당면을 비롯한 각종 속을 채우고 선지로 맛과 색깔을 낸 후 수증기에 쪄내어 만든다.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인기 있는 분식이다. 유래. 춘추 시대 쓰인 《시경》의 〈대아〉 편에는 ‘갹(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송 대의 운서 《집운(集韻)》에 의하면 이것은 양의 창자에 고기와 내장을 채운 뒤 구운 음식이다. 또 500년대 북위의 농서 《제민요술》에는 양의 선지, 기름, 밀가루, 쌀밥을 섞은 뒤 갖은 양념을 하여 양의 대창에 넣고 삶아서 썰어 먹는 ‘양반장자해(羊盤腸雌解)’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순대가 한국에 전파된 유래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삼국 시대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양반장자해’가 전파되었고, 이를 먹었다는 설이다. 둘째로는 고려 말기에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피순대가 한국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일각에서는 순대는 돼지 창자에 채소와 쌀 따위를 넣어 먹는 칭기즈 칸 시대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인 ‘게데스(гэдэс)’가 전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게데스는 그러한 음식이 아니라 단지 몽골의 내장 요리의 총칭이며, 실제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은 동물의 내장을 말려 만든 주머니에 건조시킨 고기를 가루 내어 최대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 음식은 ‘보르츠(борц)’라고 하는 순대와 무관한 음식이다. 순대라는 말은 만주어로 순대를 뜻하는 ‘성기 두하(senggi-duha)’에서 유래하였는데, ‘성기’는 피를 뜻하며,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 1800년대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슌ᄃᆡ’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며, 이는 ‘성기 두하’가 축약된 말이다. 조리법. 순대의 껍질은 돼지 창자를 소금과 밀가루로 문질러 잡내를 없애서 만든다. 손질한 돼지 창자를 뒤집으면 깨끗한 면이 바깥으로 노출된다. 이 안에 두부, 숙주나물, 찹쌀과 각종 향신료와 함께 돼지피를 넣는다. 이렇게 만든 순대를 가마솥에 쪄낸다. 지역별 특색. 부산, 울산 및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는 막장(쌈장)에,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양념 소금에 찍어먹으며, 돼지 간이나 허파 등의 부산물과 함께 팔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 재료에 따라 오징어순대, 찹쌀순대 등이 있으며, 만든 지역에 따라 병천 순대, 아바이 순대 등이 있다. 충청도는 대게 새우젓과 먹으며, 광주 및 전북 전주, 완주 지방 등에서는 초장을 찍어 먹는다. 종류. 겉 재료에 따른 종류. 돼지 내장. 1830년의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도저장(饀猪腸)’이라 하여 돼지의 창자에 선지, 참기름, 콩나물, 후추 등을 섞은 것을 넣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으며, 이때 설탕[砂糖]으로 창자를 씻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를 다룬 조선 시대 최초의 기록이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도야지슌ᄃᆡ’라 하여 숙주, 미나리, 무, 배추김치, 두부, 생강, 마늘, 깨소금, 기름, 고춧가루, 후추 등을 돼지 선지와 섞은 것을 창자에 넣어 삶은 뒤 식혀 썰어 먹는 음식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순대는 돼지 내장에 속을 채워 만들며, 주로 소창을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창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 내장. 1600년대 말의 《주방문(酒方文)》에는 ‘팽우육법(烹牛肉法)’이라 하여 소의 대창에 선지, 밀가루, 매운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우장증방(牛腸蒸方)’이라 하여 소의 창자에 소고기, 갖은 양념, 유장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히고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 나와 있다. 1809년의 《규합총서》에는 소의 곱창에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 갖은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힌 뒤 사실상 마찬가지 방법으로 먹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중반의 《역주방문(曆酒方文)》에는 ‘우장증(牛腸蒸)’이라 하여 갖은 양념을 한 소의 살코기를 창자에 넣어 솥에 삶은 뒤 생강을 넣은 초장에 찍어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양 내장. 1800년대 중반의 《임원경제지》에는 ‘관장방’이라 하여 양의 창자에 양념과 유장을 섞은 선지를 넣어 찐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개 내장.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개의 창자에 개의 살코기,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장을 섞어 채운 뒤 시루에 삶아서 초와 겨자를 곁들여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어류. 1700년대의 《소문사설(謏聞事說)》에는 ‘어장증(魚腸蒸)’이라 하여 대구의 창자에 대구살을 넣고 찐 뒤 썰어 먹는 요리가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어교슌ᄃᆡ’라 하여 삶은 숙주와 미나리를 소고기와 함께 다진 뒤 두부를 섞어 갖은 양념을 하고, 이것을 잘 씻은 민어의 부레에 넣고 삶은 뒤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다. 함경도의 명태순대가 유명하다. 속 재료에 따른 종류. 당면순대. 당면순대는 당면이 주 재료인 순대이다. 해방 이후 순대는 고가의 음식이었으나, 1960년대 초반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양돈 사업을 육성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돼지 부속물과 창자의 가격이 많이 내렸고, 여기에 저렴한 당면을 주 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당면순대가 대중화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내장을 제거한 돼지고기의 일본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돼지 부속물이 많이 유통되었고, 이에 당면순대의 보급이 뒤따랐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당면순대의 90% 가량은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 찹쌀순대. 찹쌀순대는 찰순대라고도 한다. 찹쌀로 만든 당면을 사용한 순대, 또는 찹쌀밥을 속으로 사용한 순대를 뜻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연변의 순대는 거의 대부분 찹쌀밥을 넣고 만든다. 피순대. 피순대는 선지가 주 재료인 순대이다. 당면은 넣지 않으며, 선지, 채소, 다진 고기 등이 들어간다.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의 피순대가 유명하다. 지역에 따른 종류. 백암순대. 백암순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내장에 두부, 숙주와 콩나물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들며, 조선 시대에는 죽산군에서 주로 먹던 것이 우시장이 유명하던 백암 5일장으로 옮겨왔다. 병천순대. 병천순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소창에 선지, 들깨, 배추, 파, 고추, 찹쌀 등을 넣어 만들며, 1960년대 초반 병천 일대에 햄 공장이 생기면서 육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돼지 부산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순대를 파는 가게가 들어선 것이 시초이다. 아바이순대.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식 순대를 변형하여 돼지의 대창에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 배춧잎 등이 들어가는 순대로,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특산물이다. 청호동은 본래 모래 해변에 불과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1.4 후퇴 이후 함경남도의 실향민들이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흔히 1960년대 초반부터 아바이순대가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시기를 1990년대 초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암뽕순대. 암뽕순대는 돼지 막창으로 만든 순대와 새끼보(자궁, 암뽕)를 함께 내놓는 음식이다. 암뽕순대라는 말은 담양에서 순댓집을 운영하는 배서운이 암퇘지의 자궁이 봉우리와 모양이 유사한 점에서 착안하여 ‘암퇘지 봉우리’의 두문자어인 ‘암봉’으로 부르던 것이 경음화로 ‘암뽕’이 되었고, 1990년대 초반 〈고향의 아침〉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암뽕과 순대’가 ‘암뽕순대’로 소개되면서 전국에 퍼지게 된 이름이다. 용궁순대. 용궁순대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막창으로 만들며, 5일장인 용궁시장 인근에 많이 있던 돼지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하여 탄생하였다. 수애. 수애(수웨) 또는 돗수애(돝수웨)는 제주도의 순대이다. 선지에 메밀가루를 섞어 만들며, 원나라의 고려 침략기 때 몽골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지에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섞은 뒤 양의 내장에 채워 만드는 몽골식 피순대인 게데스 초스(гэдэс цус)와 유사하다. 관혼상제를 치르기 위하여 만드는 특별한 음식으로서, 퍽퍽하고 건조한 맛이 특징이다. 창자는 70~80 cm 길이로 잘라 장 속의 내용물을 훑어 제거하고, 안팎을 뒤집은 뒤 굵은소금으로 주물럭거리고 흐르는 물에 씻어 준비한다. 소는 돼지 피에 메밀가루 또는 명아주 가루나 보리가루를 넣고, 부추(겨울철에는 잔파), 빻은 마늘, 생강, 소금 등과 함께 섞어 만든다. 이때 수애에 넣는 소는 창자 한 근에 돼지피 두 사발, 메밀가루 한 사발 정도의 비율로 하여 집었을 때 흘러내릴 정도로 섞어 준비하고, 3분의 2 정도만 채우고 양 끝부분을 묶는다. 꼬챙이로 찌르면 핏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삶아서 식혀서 잘라 먹는다. 예식을 치르는 집의 남자 친척 중 돼지를 잡은 사람들이 소를 준비하여 내장의 속을 채우며, 삶는 것은 나머지 집안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수애는 창자의 부위에 따라 ᄌᆞᆫ배설수애, 훌근배설수애, 막창(창도름)수애로 나뉘는데, 두께가 두꺼우며 지방층이 있어 씹는 맛이 좋은 막창수애가 가장 고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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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뎅
오뎅()은 일본에서 기원한 요리로서, 여러 가지 어묵을 무, 곤약 등과 함께 국물에 삶아낸 요리이다. 어묵과 오뎅. 일본어 ‘오뎅’은 요리 자체를 부르는 말이지만 한국어권에서는 ‘오뎅’을 탕에 쓰이는 낱개의 어묵을 부르는 말로 쓰고, 탕 전체는 ‘오뎅탕’으로 부른다. 재료.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게 있지만, 공통으로 10재료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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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
어묵(, )은 생선의 살을 으깨어 소금과 밀가루, 녹말가루 등 부재료를 넣고 뭉친 후 익혀서 묵처럼 만든 음식이다. 찌거나 굽거나 튀겨 먹는다. 세계 각지에 여러 가지 어묵이 있는데, 한국식 어묵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나라별 어묵. 한국. 이름. 오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분식집에서 파는 어묵을 속어로 오뎅으로도 부르기도 하지만, 일본어의 오뎅은 어묵, 무, 곤약 등을 넣고 끓인 탕을 말하며, 이들은 어묵과 오뎅을 구별한다.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어묵과 일본의 가마보코는 차이가 있다. 역사. 어묵은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18세기 역관 이표가 쓴 요리책 《소문사설》에 可麻甫串(가마보곶)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문사설에 나오는 가마보곶의 제작 방법은 어묵과 달라, 이것이 어묵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한편 숙종 45년(1719년)의 《진연의궤》에 보면 "생선숙편"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를 한국식의 어묵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어묵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어묵공장은 부평동시장에서 시작한 동광식품(창업주 이상조)이다. 1953년에는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 온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삼진어묵을 설립한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 공장이다. 때마침 한국 전쟁이 발발해 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자 어묵 생산은 호황을 맞기 시작한다. 이즈음 동광식품과 삼진어묵의 공장장 출신이 합작해 영주동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게 된다. 1950년~1960년대에 미도, 환공, 삼진, 동광, 대원, 영진 등의 어묵 제조 공장이 생겨나며 어묵업계는 춘추전국 시대를 맞는다. 대기업 제품으로는 1985년 삼호 F&G에서 만들었다. 이 때 "어묵"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단, 어묵이라는 이름 자체는 신문 상으로는 1969년에 처음 등장한다. 1990년대 초에 소위 "부산어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마차에서 먹는 어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부산어묵은 앞의 부산어묵과는 달리 길쭉한 모양의 어묵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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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자바(Java, )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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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보통신대학교
한국정보통신대학교(韓國情報通信大學校,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에 설립된 IT계열 특성화 대학이다. 정보통신부 및 다수의 IT관련업체, ETRI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왔으나 2007년 10월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2009년 3월 1일, KAIST와 통합되면서 KAIST-ICC가 설립되었다. 본래는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로, 대학원 과정만 존재하였으나, 2002년에 공학부와 IT경영학부 등 학부 과정을 설립하여 한국정보통신대학교로 교명을 개정하였다. 학부생은 매년 120명 정도를 받아들였다.(공학부 90명, IT경영학부 30명) 대학원 외국인 비율은 10%를 훨씬 상회하며, 학부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정시모집의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개 영역 이상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에게 지원자격이 주어졌다(초기에는 전체등급 1등급이 지원 최소 자격이었다). 전공 전과목은 영어로 진행되며, 1년 3학기제를 도입, 3년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연차 이내의 학생에 한하여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6년 당시 학부생, 대학원생 총 학생수는 약 1500명 정도였다. 연혁. ICU-KAIST 통합. 2004년에 감사원은 정보통신부의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 사업’에 대한 감사에서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는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규정을 어기고 사립학교 형태의 ICU를 세워 기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지원하는 불합리성을 보였다'며 사립대인 ICU가 국가 기금인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에 의존해 설립되었다는 점이 형평성에 어긋나며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에 한나라당 김영선의원은 국회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7년도 예산안에는 KAIST와의 통합을 전제로 ICU에 대한 예산지원을 국회에서 승인하였으나 2008년도 예산안의 ICU 국비 지원안은 기획예산처에서 전액삭감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인수희망자 등의 후원자를 구하거나,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반대로 힘든 형편이고, 인수희망자도 없는 실정이라,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의 하나로 떠올랐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거듭 결정을 연기하고 있었고 일부 이사진과 총장이 통합에 반발하였다. 허 총장은 양교 통합과 관련, ICU 학부생의 96%가 KAIST와의 하향식 통합에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설문조사 결과를 이사회에 제출했다. 또한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양 대학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통합 논의가 중단되었으나, 2008년 4월에 정부가 KAIST-ICU 통합이 이뤄진다면 그간 ICU에 지원해오던 매년 75억의 예산을 3년간 지원하기로 약속하여 논의가 재개되었다. 2008년 5월 22일, 통합에 관한 MOU가 교환되어 통합이 기정사실화되었고, 2009년 1월 16일에는 한국과학기술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통합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ICU는 KAIST와 합병하여 KAIST ICC(IT Convergence Campus.KAIST 문지캠퍼스)로 바뀌었다. 통합 이후 기존 ICU 공학부는 KAIST 정보과학기술대학 정보통신공학과로 변경되었으며, 기존 ICU 공학부 재학생은 희망에 따라 KAIST 전산학과 또는 전기및전자공학과로 전과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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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단위계
국제단위계(國際單位系, , 약칭 SI)는 전류, 온도, 시간, 길이, 질량, 광도, 물질량을 전 세계에서 표준화된 도량형으로, MKS 단위계(Mètre-Kilogramme-Seconde)이라고도 불린다. 국제단위계는 각 국가별로 상이하게 적용하는 단위를 미터법을 기준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널리 쓰이는 도량형이며, 국제적인 교류나 산업 등에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단위인 만큼 반드시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단일화된 국제 단위계를 만드려는 노력으로 1960년 10월 제 11차 국제 도량형 총회(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에서 SI가 결정되었다. 이 당시 국제 단위계의 체계를 접두어, 유도 단위 및 추가 단위에 대해 확립하였다. SI단위는 7개의 기본 단위(미터(m), 킬로그램(kg), 초(s), 암페어(A), 켈빈(K), 몰(mol), 칸델라(cd)), 2개의 보조 단위(라디안(rad), 스테라디안(sr))와 이들로부터 유도되는 조합단위(19개)를 요소로 하는 일관성이 있는 단위의 집단이다. 이들 단위에 SI접두어(16개)를 붙여서 구성한다. 단위. 기본 단위. 국제단위계에서는 7개의 기본 단위가 정해져 있다. 이것을 SI 기본 단위(국제단위계 기본 단위)라고 한다. 유도 단위. 기본량이 아닌 물리량을 유도량이라고 하며 정의식(定義式)이나 실험식같이 물리량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식을 이용하여 기본량이나 이미 있는 유도량으로부터 유도된다. 이 유도량의 단위를 유도단위라고 한다. 유도단위는 대응하는 물리량 사이의 관계식에 따라 기본단위나 이미 정해진 유도단위에서 유도된다. 국제단위계의 유도 단위의 크기는 유도단위를 이끌어 낸 물리관계식에 관계없이 하나의 양에 관해 일치한다. 다만 단위의 명칭은 유도한 관계식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단위로 표시된 SI유도단위를 제외한 유도단위는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특별한 명칭과 기호」를 부여한다. 무차원 단위. 이 중에서 라디안과 스테라디안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단위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SI 접두어.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약칭 SI)에서 각 단위의 양의 크기를 쉽게 나타내기 위해 각 단위의 앞에 붙여 쓰는 접두어를 말한다. SI접두어는 각각 10의 거듭제곱(10n 또는 10-n)의 크기(인자)의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원래는 엑사 페타 테라 기가 메가 킬로 헥토 데카 데시 센티 밀리 마이크로 나노 피코 펨토 아토 등 16가지였으나, 1991년 10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제타, 요타, 젭토, 욕토 4가지를 추가하기로 결의하여 모두 20가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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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942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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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991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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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크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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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국회
제16대 대한민국 국회는 21세기 첫 대한민국 국회이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상 첫 원내교섭단체 양당체제로 2000년 6월 5일에 개원하였다. 임기. 4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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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다.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에 처음으로 도입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인 맥 OS에 대항하여, 당시 널리 쓰이던 MS-DOS에서 멀티태스킹과 GUI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응용 프로그램으로 처음 출시되었다. 현재 전 세계 90%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고 있으며, 서버용 운영 체제로도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윈도우 운영 체제의 경우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일반 사용자들에게 매우 익숙할뿐 아니라 호환되는 유명한 응용 프로그램이 많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보안 문제에서는 취약점이 많은 운영 체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글 표기. 영어 표기는 Windows이지만 한글로는 여러 가지 표기가 쓰이고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윈도, 윈도스, 윈도즈, 윈도우, 윈도우즈, 윈도우스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1995년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은 컴퓨터 운영 체제 이름인 'Windows 95'를 '윈도 95'로 정하면서 'Windows'의 한글 표기를 윈도로 확정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제품 이름을 한글로 옮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한국어 홈페이지에 있는 제품명은 모두 영문 이름 Window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필요에 따라 윈도우라는 한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출하된 제품의 포장에는 "한글 윈도우"로 표기되어 있으며, 공식 기술자료(KB)와 보도자료(Press) 등에도 "윈도우"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공식 표준어는 윈도지만, 통상 '윈도우'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버전. 윈도우 1.0부터 3.1x에 이르는 버전들은 운영 체제가 아닌, MS-DOS 하에서 동작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 간주된다. 초기 버전. Windows 초기버전은 배경화면도 없고 windows.exe같은 글자와 물론 시작버튼도 없었다. 그리고 명령어를 입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쓰기 불편해 초기버전은 명령어를 아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작동방식이 MS-DOS여서 일종의 소프트웨어이다. 윈도우 3.0과 3.1. 윈도우 3.0은 애플의 맥 OS와 UI가 매우 흡사하였다. 윈도우 95, 98, Me. 윈도우 95가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255자까지의 긴 파일 이름 지원, 플러그 앤 플레이를 통한 하드웨어 자동 설치 및 구성 등을 채용하면서 1995년 8월에 출시하였다. 순수 32비트 응용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고 윈도우 3.1에 비해 안정성을 높이고 몇 가지 기술을 향상시켰다. 윈도우 95의 OEM 서비스 릴리즈 (OSR) 버전이 몇 가지가 있으며 각기 서비스 팩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윈도우 98이 1998년 6월에 출시되었으며 SE 버전이 1999년 5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NT 계열. 최초의 NT 계열 운영 체제는 1993년에 나온 윈도우 NT 3.1이며 여기서 3.1이라는 숫자는 소비자용 윈도우 버전을 가리키며 뒤를 이어 1994년에 윈도우 NT 3.5, 1995년에 윈도우 NT 3.51, 1996년에 윈도우 NT 4.0, 2000년에 윈도우 2000이 출시되었다. 윈도우 2000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활성화를 포함하지 않는 마지막 NT 기반 윈도우이다. NT 4.0은 윈도우 95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처음 도입하였으며 윈도우 95의 내장 32비트 런타임을 처음으로 포함하였다. 과거 윈도우 ME로 인해 쓴맛을 본 MS가 윈도우 9x 커널의 한계를 깨달고 기업용 커널인 NT커널로 윈도우 XP를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출시하였다. 과거 윈도우 9x보다 훨씬더 안정적인데다 향상된 시스템 복원 기능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향상시켜 출시하였다.(틈새 시장에서는 태블릿 PC, 미디어 센터용으로 출시) 그 뒤에 윈도우 XP를 출시한지 1년 반이 지나 서버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서버 2003이 나왔다. 장기간의 개발 후 윈도우 비스타가 2006년 말에 출시되었으며 서버 제품으로 윈도우 서버 2008이 2008년 초에 출시되었다. 그 뒤에 2009년 7월 22일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의 RTM 버전이 공개되었다. 윈도우 7은 2009년 10월 22일에 공식 출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미국 현지시각) 윈도우 8.1이 공식 출시되었다. 윈도우 8.1은 윈도우 8 사용자들은 무료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현재 윈도우 10이 정식출시 하였으며 2015년 7월29일에 전세계에서 출시되었다. 64비트 운영 체제. 윈도우 NT에는 x86 기반 개인용 컴퓨터가 전문적인 세계를 차지하기 이전에 여러 플랫폼의 지원을 포함하였다. 당시 일부 제품이 64비트 프로세서였던 NT 3.1부터 4.0까지 파워PC, DEC 알파, MIPS R4000을 지원하였으나 운영 체제는 이들을 32비트 프로세서로 취급하였다. 인텔 아이테니엄 (IA-64)이 도입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지원하는 새로운 버전의 윈도우를 출시하였다.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와 윈도우 서버 2003이 x86 (32비트)가 주류인 시대에 출시되었다. 2005년 4월 25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x86-64 아키텍처를 위한 윈도우 XP 프로페셔널 x64 에디션과 윈도우 서버 2003 x64 에디션을 공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의 지원을 2005년에 중단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종 사용자 버전을 위한 x86, x64 에디션으로 처음 출시한 것이다. 윈도우 비스타는 아이테니엄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는다. 현대의 64비트 윈도우 계열은 AMD64/IA-64 버전의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을 이루며 아이테니엄과 x64 에디션도 존재한다. 윈도우 서버 2008 R2에는 32비트 버전이 없지만 윈도우 7에는 존재한다. 윈도우 CE. 윈도우 CE(윈도우 임베디드 콤팩트)는 위성 내비게이션과 일부 휴대 전화와 같은 소형 컴퓨터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윈도우 에디션이다. 윈도우 CE는 드림캐스트에서 세가의 사유 운영 체제와 더불어 채용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NT 커널 기반을 하는 소형 에디션인 윈도우 XP 임베디드나 윈도우 NT 4.0 임베디드와는 다른 것이다. 윈도우 XP. 윈도우 XP는 윈도우 2000의 뒤를 잇는 제품이며,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초의 소비자 지향 운영 체제이다. 'XP'라는 말은 "eXPerience" 중 "XP"를 따와서 만들었다. 2001년 8월 24일 출시되어 2014년 4월 8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XP의 후속작으로, 개인용 버전은 2007년 1월 30일에, 기업용 버전은 2006년 11월 30일에 발매되었다. 이때부터 에어로 테마가 시작되었다. 2017년 4월 11일에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7. 윈도우 비스타의 후속작으로, 2009년 10월 22일에 6가지 에디션의 소매 버전으로 대중에게 출시되었다. 윈도우 7은 윈도우 비스타에서 이루어 놓은 응용 프로그램 및 하드웨어 호환성을 개선함과 더불어 윈도우 계열의 중심적이고 점층적인 업그레이드에 집중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원래 에어로 효과가 있었지만 윈도우 7은 홈 프리미엄부터 시작됐다. 2020년 1월 14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8. 윈도우 7의 뒤를 이어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0년 10월 22일에 네덜란드의 블로그 엔트리에 "2년 뒤에 윈도우 8이 공개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2012년 6월 1일에 윈도우 8 릴리즈 프리뷰가 배포 되었고, 2012년 8월 1일에 윈도우 8 RTM이 MSDN, 테크넷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2012년 10월 26일 윈도우 8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버그가 많아 8.1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메트로 테마를 적용하였다. 또한 Windows 8부터는 윈도우 투 고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윈도우 8.1. 2013년 10월 17일 출시되었으며 윈도우 8의 기능 추가 및 핫픽스 롤업 통합 버전. 그 밖에 여러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윈도우 8 사용자들은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윈도우 10. 2014년 9월 30일에 윈도우 10 테크니컬 프리뷰가 공식 발표되었다. 윈도우 9를 건너뛰고 윈도우 10을 개발했던 것이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명칭을 윈도우 원(Windows One)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윈도우 1.0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윈도우 원(1)이 아닌 10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Windows 8.1 이후에 Windows 9가 출시되어야 하지만 Windows 98 등의 이전 버전의 Windows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Windows 10으로 즉시 업데이트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에 따라 Windows 8.1까지는 버전 코드가 NT 6.3이였던 것을 갑작스럽게 NT 10.0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에서 혼란이 있었다. ISS(Windows Server)에서 PHP 관련 소스 설정에서 이 때문에 설치에 약간의 트릭이 필요하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차세대 윈도우의 이름을 '윈도우 10'이라고 지은 이유는 "윈도우 10이 많은 혁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7월 29일 공식 발매를 시작하며 윈도우 7과 윈도우 8.1를 사용하는 모든 이용자에 한해서(비정품 이용자도 포함) 1년 간 무료로 윈도우 10으로 업데이트를 1년 후인 2016년 7월 29일까지 지원하였다. (추가 기능을 사용하는 윈도우에 한해 업그레이드 중이다.) 그리고 2017년 12월 31일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10 출시 이후 이 버전이 마지막 윈도우 버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윈도우 11. 윈도우 10이 마지막 OS라고 했지만, 그 계획은 철회되었으며, 윈도우 11이 출시되었다. 2021년 6월 16일에 Tom Warren에 의해 개발자 프리뷰 버전이 공개되었고 2021년 6월 24일에 공식 프리뷰 버전이 공개되었다. 2021년 10월 5일에 정식출시되었다. 개발이 중지된 윈도우 10X의 디자인을 일부 승계한 형식이다. 윈도우 투 고. Windows 8 Enterprise 버전 또는 Windows 8 이상의 Enterprise 버전에서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가 설치되지 않은 PC에 즉시 USB로 부팅할 수 있는 윈도우의 프리뷰와 비슷한 기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UWP(Windows 유니버셜 앱. Windows 10부터는 개선된 Windows Store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한다. )를 제외한 게임 및 다른 모든 Executable ( *.exe ) 파일을 실행할 수 있고 NX 실행비트를 지원한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 설치 디스크 이미지 내부에 있으며 윈도우 설치의 핵심 파일 및 시스템을 담고 있는 파일인 install.wim을 해석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USB에 덮어쓰며 진행된다. Windows 설치 과정과 동일하지만 하드디스크와 달리 포터블이므로 운영체제의 가벼움과 쉽게 액세스 등의 기능이 필요해졌다. 물론 Windows 7 또는 다른 운영체제에서도 일부 Windows To Go를 만들어 주는 일부 프로그램이 있다. 단, install.wim 파일이 필요하며 Windows의 정품 제품키가 필요하다. 먼저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에서 운영체제가 Windows To Go를 지원하는지 정보 파일을 확장하여 install.wim이 담고 있는 Windows의 정보를 가져온다. install.wim의 운영체제가 Windows 8 이하일 경우는 계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일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다음으로 Windows의 파일 확장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의 내부 파일을 해석하면서 USB에 파일을 확장(배치)해 나가는 구조이다. 완료되면 약 17GB 정도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최소 32GB의 USB에 설치해야 한다. 또한 Windows To Go의 경우 다른 리눅스 계열의 운영체제와 달리 커널이 없어 모든 작업은 USB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USB가 3.1 또는 3.0 이상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은 부팅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0으로 해본 결과 하루가 지났음에도 부팅이 완료되지 않았다) 역사.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기에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의 윈도우를 출시하였으며 이는 운영 체제가 아니었다. 1993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윈도우 NT를 운영 체제로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운영 체제로서의 윈도우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하나는 가정 사용자, 다른 하나는 기업과 전문 IT 사용자용이다. 이 두 운영 체제는 가정용 버전의 경우 게임이나 시각 효과가 더 많이 지원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 등의 기능을 빼는 한편, 전문가용 버전에서는 시각 효과를 제외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을 강화하였다. 첫 독립된 버전 윈도우 1.0은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 1985년 11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은 1987년 12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3에서는 서로 겹치는 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걸기도 했다. 윈도우 3.0은 1990년에 출시되자 첫 6개월 만에 2백만 부가 팔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UI 및 멀티태스킹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후 발표된 윈도우 3.1은 트루타입 글꼴을 지원하였는데, 영문 윈도우 3.0과 윈도우 3.1 사이에 발표된 한글 윈도우 3.0의 경우 영문 윈도우 3.1에 앞서 트루타입 글꼴이 적용되었다. 1993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NT를 내놓았다. 윈도우 NT는 전문가용 운영 체제로 인정되었고 실제로 네트워크용이었으며, 후에 출시된 윈도우 XP의 초석이 되었다.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표면적으로 윈도우 95는 도스를 포함하지만 도스 상에서 실행되지 않는 완전한 운영 체제가 되었으며, UI가 많이 변경되고 멀티태스킹 기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윈도우 95는 기본적으로 32비트 운영 체제였지만 16비트 하위 호환성을 유지하였다. 윈도우 3.1과의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GUI API 등에서 16비트 코드를 수용한 까닭에 성능과 안정성이 떨어졌다. 그런데 윈도우 95는 시작버튼이 들어간 컴퓨터라서 인기가 폭발했다. 1998년 6월 윈도우 98이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0을 탑재하는 등 크기가 커지면서 윈도우 95에 비해 느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1999년 윈도우 98 SE를 내놓으면서 많은 문제를 개선했다. 하지만 윈도우 98 SE는 자잘한 업데이트를 패치 받고는 2006년에 윈도우 98과 함께 지원 종료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전문가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2000을 2000년 2월에 내놓았다. 하지만 윈도우 98의 후속작은 윈도우 미였고 이는 2000년 9월에 나왔다. 윈도우 미는 유니버설 플러그 앤 플레이와 시스템 복원 등의 기능을 새로 추가했지만, 출시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윈도우 XP가 출시되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성이 부족했고 메모리 관리가 미흡하여 리소스 부족 문제를 자주 발생시켰다. 2001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XP를 출시하였다. 이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면서 윈도우 95 및 그 후계작의 사용자 편의성을 살렸다.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으로 나뉘어 출시되는데, 두 에디션은 완전하게 동일하며 단지 두 가지 기능만 다르다. 도메인에 가입하는 기능과 MUI를 지원하는 기능 이 두 가지 기능이 "홈 에디션"엔 빠져 있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3은 2008년 4월 21일 발표되었다.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이 2003년, 2004년, 2005년에 출시되었는데, 이는 DVD/TV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고, 프로그램 녹화 및 원격 조정을 지원한다. 업데이트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매년 새 버전이 출시되다가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면서 단종되었다. 2003년 4월, 윈도우 서버 2003이 출시되었다. 이는 윈도우 2000 서버 제품군에 비해서 새로운 기능과 강력한 보안을 내세우고 있다. 후속작으로 2005년 12월 윈도우 서버 2003 R2 버전을 출시했다. 윈도우 서버 2003 서비스 팩 2는 2007년 3월에 발표되었다. 2007년 1월 윈도우 비스타가 (코드네임 "롱혼") 출시되었다. 윈도우 비스타는 UAC 기능을 포함하여 윈도우 XP보다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고 미디어센터 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호환성 문제로 일부 국가에서 윈도우 XP 기반의 프로그램이 비스타에서 작동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일부 사용자들이 XP로 다운그레이드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08년 3월 윈도우 서버 2008은 윈도우 서버 2003의 후계작으로 개발이 완료되었으며 2008년 3월 20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가 2009년 10월, 비스타의 호환성 문제와 일부 기능을 개선하여, 윈도우 7을 출시했다. 2012년 10월,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한국 시각), 윈도우 8.1이 공개되었다. 공개 이후부터 기존 윈도우 8 정품 사용자는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윈도우 8.1에서는 Sound Recorder, Scan 등의 기본 앱이 추가되었고, 타일의 크기를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본래 윈도우 8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 표시줄의 시작 버튼이 다시 생겨났다. 2014년 9월 30일 공개되었으며 10월 2일(한국 시각 새벽 1시), 윈도우 10프리뷰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윈도우 95, 윈도우 98 등과 이름에러(프로그램이 윈도우 95, 윈도우 98을 윈도우 9까지만 인식을 하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임)를 줄이기 위해 9를 건너 뛰고 10이 되었다. 2015년 7월 29일, 윈도우 10 정식판이 출시되었다. 1년 간 무료 업그레이드를 제공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윈도우 10이 무료 업데이트 제공이 종료되었다. 2021년 10월 5일, 윈도우 11이 정식출시되었다. 클론 소프트웨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사용하지 않고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에뮬레이션으로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인식.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대한민국에서 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본사가 위치한 미국에서도 소비자들이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비싼 가격으로 출시하는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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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379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Microsoft Offic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윈도우, 맥용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묶음이다. 1989년에 맥용으로,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몇 가지 버전을 예로 들면 2007년 1월 30일에 윈도우 비스타와 동시에 출시된 윈도우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과 2008년 1월 15일에 출시된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이 있다. 이 버전들은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오피스 오픈 XML 포맷(.docx, .xlsx, .pptx 등)을 사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호환성 패키지를 설치하면 윈도우용 오피스 2000-오피스 2003, 맥용 오피스 2004 에서도 이 문서들을 보고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서비스 팩과 더불어 새로운 버전들이 업데이트되었으며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원노트는 대부분의 오피스 에디션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역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첫 버전은 1989년에 맥용으로 출시되었다. 또한 윈도우용은 1990년에 출시되었다. 맥 OS용 오피스의 역사. 오피스를 만들기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1.0을 1984년에 출시하고. 엑셀 1.0을 1985년에, 파워포인트 1.0을 1987년에 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를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포함하지 않는다. 구성. 주요 에디션. 서버 구성요소. 커뮤니케이터가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로 합쳐졌다. 지원. 2002년부터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원 수명(Support LifeCycles) 정책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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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OS
맥 OS(맥 오에스, Mac OS)는 애플이 매킨토시 용으로 개발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운영 체제이다. 처음에 이 운영 체제는 매킨토시에 포함된 이름 없는 운영 체제로 간단히 시스템 소프트웨어라고 불렸으나, 1997년 맥 OS 7.6의 출시와 함께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옛날 버전의 맥 OS는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에서만 호환되었다. 그 후 애플이 파워PC 기반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맥 OS는 파워PC용으로도 포팅되었다. 맥 OS 8.1은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모토로라 68040)에서 호환되는 마지막 버전이었으며, 맥 OS X는 파워PC만을 지원하다가 인텔 맥을 출시하면서 10.4.4 버전부터 인텔 프로세서용으로 포팅되었다. 10.6 스노 레퍼드부터는 파워PC 프로세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크게 나누어 전통적인 클래식(Classic) 시리즈(시스템 1.0 ~ 맥 OS 9)와 새로운 맥 OS X 이후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버전. 옛날의 매킨토시 시스템은 "시스템"과 "파인더"라는 두 가지 종류의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고. 두 소프트웨어는 버전 번호도 달랐다. 시스템 7.5.3은 맥 OS 로고를 포함한 첫 버전이고, 맥 OS 7.6부터는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파워PC G3 이전의 시스템은 중요한 부분을 모두 ROM에 저장했다. 원래는 하드 디스크가 없던 옛날의 매킨토시가 플로피 디스크의 한정된 저장 공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ROM에 저장했으나, 이 아키텍처는 완전한 그래픽 OS를 명령 줄 인터페이스나 텍스트 콘솔 없이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시동 오류도 사용자에게 그래픽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의 PC와는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장점을 낮은 수준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맥 OS는 코어 시스템을 ROM에 의존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애플 컴퓨터나 (저작권으로 보호된 애플의 ROM을 포함한) 라이선스된 클론만이 맥 OS를 구동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맥 OS는 다음 두 분류로 구별할 수 있다. 클래식 맥 OS. 클래식 맥 OS는 완전히 그래픽으로 구성되었으며, 명령 줄이 전혀 없는 운영 체제로, 쉬운 사용법과 협력형 멀티태스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주 제한된 메모리 관리와 보호된 메모리. 그리고 불안정한 운영 체제 확장 기능으로 비판을 받았다. 원래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파일 시스템(MFS)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파일 시스템은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지 못하며, 1985년에 바로 계층형 파일 시스템(HFS)로 대체되었다. HFS는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여 디렉터리 트리를 만들 수 있다. 두 파일 시스템은 서로 호환된다. 파워PC 버전의 맥 OS X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클래식 맥 OS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호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버전은 맥 OS 9#맥 OS 9.1 이후 버전을 돌릴 수 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응용 프로그램은 이 호환 모드에서 잘 돌아가지만 실제 하드웨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클래식 환경은 맥 OS 9가 x86 프로세서를 지원하지 않아 인텔 맥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 또한 맥 OS X 레퍼드부터는 지원이 중단되어 클래식 모드를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수많은 클래식 맥 OS 사용자들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사용자에게 덜 친숙하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또한 새로운 OS로 다시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기능, 같은 하드웨어에서도 클래식 맥 OS보다 느려졌다는 점, 드라이버와 응용 프로그램이 거의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 옛날 매킨토시로의 지원 중단도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출시 초기에는 많은 사용자들이 클래식 맥 OS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2005년 경에는 거의 모든 사용자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다. 2005년 6월, 스티브 잡스는 WWDC 2005에서 애플 컴퓨터는 파워PC 칩셋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이동할 것이며, 새로운 기기에 맥 OS 클래식의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콘퍼런스에서 잡스는 개발자 변환 키트를 제공하여 개발자들이 자신의 응용 프로그램이 인텔 맥에서 잘 돌아가는지 테스트 할 수 있게 했다. 2006년 1월에 애플은 첫 인텔 기반 매킨토시인 아이맥과 맥북 프로를 출시했다. 2006년 2월엔 맥 미니를 출시했으며, 2006년 5월에 맥북, 2006년 8월에 맥 프로로 모든 매킨토시를 인텔 프로세서 기반으로 바꿨다. macOS. macOS(맥 OS)는 애플의 가장 최신인 맥 OS 운영 체제다. 이전 이름은 OS X (오에스 텐)이었다. 이 버전은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맥 OS의 버전 10이지만, 기존 맥 OS와는 아주 많은 변화를 띄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맥 OS 9와 클래식 맥 OS의 다음 버전으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면서 가져온 NEXTSTEP과 마하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macOS는 BSD 코드 베이스를 사용한다. mac은 그동안 데스크톱용 릴리즈로 9번 출시되었다. 2016년 9월 20일에 공개한 macOS 10.12로 , macOS 시에라로 불리며 2017년에 WWDC에서 발표한 macOS 10.13로, macOS 하이시에라로 불린다(macOS 버전 대의 경우, 고양이과의 펫 네임을 별명으로 붙여 친숙함을 높이려 했는데, OS 10.8 마운틴 라이언을 시작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데스크톱용 버전과 같이 macOS은 8번의 서버용 릴리즈가 있었다. 첫 번째 릴리즈는 OS X 서버 1.0으로, 서버 버전은 당시의 데스크톱용 맥 OS(클래식 맥 OS)와 아키텍처가 완전히 달랐으며, 많은 서버 관리 도구를 탑재하고 있었다. macOS는 Xserve의 기본 운영 체제이다. 그리고 데스크톱용 버전과 다르게 패러럴즈 데스크톱과 같은 가상 머신에서도 돌아간다. macOS는 아이폰, 아이팟 터치, 아이패드, 애플 TV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iOS의 기초이다. 에뮬레이션. 68000. vMac, Basilisk II. Executer 등의 서드 파티 68000 에뮬레이터는 인텔 기반 PC에서 맥 OS를 로드할 수 있게 했다. 이 에뮬레이터들은 모토로라 68000 칩셋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때문에 맥 OS 8.1 이상의 버전은 파워PC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기에 에뮬레이트할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맥 ROM 이미지나 실제 맥 ROM 칩을 필요로 했다. 맥 ROM 이미지를 사용하는 에뮬레이터는 거의 100% 맥 OS 호환성을 유지하며 x86 프로세서에서도 아주 빠른 맥 OS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파워PC. PearPC라는 파워PC 에뮬레이터는 파워PC 프로세서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맥 OS X를 에뮬레이트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아직도 초기 개발 상태이고, 네이티브 파워PC 칩보다 속도가 아주 느리다. 맥을 파워PC에서 인텔 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애플은 사용자들이 파워PC 기반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돌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에뮬레이터 "로제타"를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로제타가 PearPC처럼 아주 느린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퍼포먼스는 예상외로 상당히 빨랐다. 또다른 파워PC 에뮬레이터로는 SheepShaver가 있으며, 원래는 BeOS를 파워PC 플랫폼에서 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이 에뮬레이터는 실제 파워PC 프로세서가 필요했으나, 후에 오픈 소스화 되면서 x86 프로세서용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에뮬레이터는 메모리 관리 장치를 에뮬레이트하지 않기 때문에 맥 OS 9.0.4 이후 버전은 에뮬레이트할 수 없다. 매킨토시 클론. 몇몇 컴퓨터 제조사들은 맥 OS를 구동할 수 있는 클론 컴퓨터를 만들어왔다. 대표적이 예로 파워 컴퓨팅, UMAX, 모토로라가 그래왔다. 이 버전은 클래식 맥 OS를 정상적으로 구동할 수 있다. 하지만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가 곧 클론 라이선싱 프로그램을 끝냈다. 2008년, 사이스타사가 499달러의 베어본 컴퓨터를 내놓았는데, 이 컴퓨터는 맥 OS X 10.5 레퍼드를 돌릴 수 있다. 사이스타는 이 컴퓨터를 오픈 맥이라 부르며, 애플은 현재 이 회사에 소송을 걸고, 판매한 모든 클론을 리콜한 후, 애플에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A/UX. 1988년에 애플은 첫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인 A/UX를 출시했다. 이 운영 체제는 당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가 아니었던 맥 OS를 기본 운영 체제로 사용하지 못했던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맥 OS X를 개발할 때 A/UX의 코드가 약간 쓰였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애플 컴퓨터가 유닉스 계열 워크스테이션에서 애플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다. 이 프로그램은 X 윈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파인더 스타일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에뮬레이트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3.0은 맥 시스템 7.5.3과 호환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SPARCstation과 HP의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98년 5월 14일 단종되었다. MkLinux. OSF와 애플 컴퓨터가 1996년 2월 리눅스를 파워PC 플랫폼으로 포팅하기 위해 시작한 오픈 소스 컴퓨터 운영 체제로, 1996년 WWDC에서 공개되었으며, 1998년 여름에 커뮤니티 중심의 MkLinux 개발자 단체가 개발을 맡기 시작하였다. 마이크로커널 리눅스 (MicroKernel Linux)의 줄임말이며, 마하 커널 3.0에 기반을 두고 있다. OSx86. 애플의 EULA에 위배되는 동시에 보증을 포기하는 행위지만, 애플 컴퓨터가 아닌 x86 컴퓨터에서 맥 OS X를 구동하는 것은 커널 수정, 커뮤니티 드라이버, 에뮬레이션 등으로 가능하다. 예로, PC-EFI는 애플 컴퓨터에 기본으로 있는 EFI를 에뮬레이트해서 비 애플 컴퓨터에 맥 OS X를 설치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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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OS
macOS(, 이전 명칭: OS X, 맥 OS X / Mac OS X)는 애플이 개발한 유닉스 기반 운영 체제이다. 최초의 유닉스인 AT&T 벨연구소 유닉스의 소스코드를 이어받은 유전적 유닉스에 속하며 동시에 유닉스 상표권을 소유하며 유닉스 표준을 만든 오픈그룹으로부터 유닉스 인증을 받아 기술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완벽하게 유닉스 기준을 충족한다. 때문에 애플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macOS를 UNIX로 설명한다. macOS는 현존하는 유일한 PC용 유닉스 운영체제이며 완전한 UNIX이기에 Unix-like라고 표기되지 않는다. Unix-like에 해당하는 리눅스는 UNIX가 아니며 별개 계통에 속한다. 2002년 4월부터 모든 매킨토시 컴퓨터에 적용되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1984년 1월부터 애플 컴퓨터를 이끌어 왔던 맥 OS의 마지막 고전 버전인 맥 OS 9의 뒤를 잇는다. OS X이라는 이 운영 체제의 예전 이름에 들어있는 "X"라는 글자는 알파벳 "X"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킨토시의 10번째 운영 체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 숫자 "10"을 뜻하는 것이다. 이 운영 체제는 애플이 1996년 12월에 인수한 NeXT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유닉스에 기반을 하고 있다. macOS는 전통적으로 매킨토시가 많이 사용되는 전자출판, 디자인, 멀티미디어 부문 등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1년 7월 20일에 OS X 라이언이 출시되었다. 기존에도 줄여서 OS X이라고 많이 표현했으나, OS X 마운틴 라이언 공개와 함께 기존 맥 OS X(Mac OS X)에서 '맥(Mac)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제거되었다. 2016년 6월 13일에 macOS 시에라 공개와 함께 제품명이 OS X에서 macOS로 변경되었다. 역사. 스티브 잡스가 설립한 넥스트사의 NeXTSTEP를 애플이 인수하여 다윈과 macOS를 개발하였다. 마하커널과 BSD를 기반으로 하는 macOS는 애플의 다윈 운영 체제 위에 아쿠아 그래픽 레이어와 응용 프로그램 레이어를 올렸고, 이를 위해 쿼츠, 코코아, 카본, 로제타등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였다. macOS의 아쿠아 인터페이스는 화제를 모았고, 여러 컴퓨터 산업 부문에 영향을 주었다. 버전. 맥 OS X 10.0 치타. 2001년 3월 24일 나온 맥 OS X 10.0 치타(Cheetah)는 최초로 나온 맥 OS X이다. 상용 프로그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실행 속도가 매우 느렸다. 베타 버전에 가까운 매우 불안정한 운영 체제로 10.1(Puma)가 나오자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맥 OS X 10.1 퓨마. 2001년 11월 25일 나온 맥 OS X 10.1 퓨마(Puma)는 치타의 무상 업그레이드 판이다. 퓨마는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거나 애플 스토어에서 무상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유상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 퓨마는 치타보다 응용 프로그램이 많이 포함되었으며, 3D 그래픽 성능이 향상되었고, DVD 재생 프로그램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프린터, 카메라, 저장장치 등의 장치 드라이버 지원이 확대되었고, 애플 스크립트가 강화되었다. 맥 OS X 10.2 재규어. 2002년 7월 24일 나온 맥 OS X 10.2 재규어(Jaguar)는 쿼츠 익스트림 기술과, 랑데뷰 네트워킹 기술(2005년 봉쥬르로 이름이 바뀜)을 지원했으며, iChat 인터넷 메신저와, 스팸메일 필터가 추가되었다. 또 코드네임을 마케팅과 광고에도 사용하였다. 맥 OS X 10.3 팬서. 2003년 10월 24일 나온 맥 OS X 10.3 팬더(Panther)는 기존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메탈룩 인터페이스를 채용했다. 팬더에서는 파인더가 개선되어 전반적인 실행 속도가 재규어에 비해 매우 빨라졌다. 재규어에서 사라졌던 꼬리표가 다시 부활했으며, 새로 추가된 엑스포제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과 창의 전환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에도 사용자 계정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기능과 사파리 웹 브라우저, 개발 도구인 Xcode가 추가되었고, 재규어부터 지원된 쿼츠 익스트림 기술은 팬서의 비주얼적인 면을 보다 향상시켰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3.9이다. 맥 OS X 10.4 타이거. 2004년 6월 28일에는 WWDC 2004를 통해 맥 OS X 10.4 타이거(Tiger)가 처음 모습을 공개하였다. 타이거에는 문서 파일의 내용과 메타데이터를 검색하는 스팟라이트, 주가 검색 등 간단한 작업을 백그라운드로 실행하는 대시보드, 일련의 작업 흐름을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오토메이터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코어 이미지(Core Image), 코어 비디오(Core Video), 코어 오디오(Core Audio) 기능이 추가되었고 64비트 지원이 강화되었다. 그 외에 iChat AV 3.0으로 4자간 화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파리 2.0에 RSS 리더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퀵타임이 업그레이드되어 H.264 코덱을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 계획과 인텔 프로세서용 맥 OS X이 발표되었다. 이후 2006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을 모두 지원하는 맥 OS X 10.4.4가 발표되었다. 10.4.4에서는 사파리나 메일 등 기본 포함된 프로그램들이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에서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유니버설 바이너리로 작성되었고, 파워피씨용으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실행시켜주는 로제타가 추가되었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4.11이다. 맥 OS X 10.5 레퍼드. 2006년 8월 7일 WWDC 06에서 공개되었고, 2007년 10월 26일부터 판매를 시작한 맥 오에스 텐의 버전이다. 레퍼드(Leopard)에서는 채팅 프로그램인 iChat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자동 백업 프로그램인 타임 머신, 가상 데스크톱인 스페이스, 오픈GL기반의 새로운 그래픽 기술인 코어 애니메이션의 탑재, 인텔 맥에서 윈도우를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부트 캠프의 정식 버전인 부트 캠프 2.0이 포함되었고, 파워피씨/인텔 프로세서, 32/64비트를 모두 지원한다.(완전한 유니버설 바이너리의 이주가 목적이었다.) 2007년 6월 11일 개최된 WWDC 07에서 새로워진 데스크톱, 개선된 파인더, 파일을 열지 않고도 내용을 보여주는 퀵룩 등 레퍼드의 주요 신기술이 발표되었다. 최종 버전은 10.5.8이며 OS X10.5는 단일 유닉스 규격(Single UNIX Specification)에 인증되었다. 맥 OS X 10.6 스노 레퍼드. 2008년 6월 9일 WWDC 08에서 맥 OS X의 차기 버전인 맥 OS X 10.6 스노 레퍼드(Snow Leopard)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전 까지의 맥 OS X의 판올림에서는 새로운 기능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진 것에 반해 이번 버전에는 성능 향상과 안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빠르고 안정적인 64bit 환경으로의 이주가 주 목적이다.) 참석한 개발자들에게 개발자 미리보기 버전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DVD OS X다, 인텔 프로세서가 장착된 맥에 설치가 가능하다. GPGPU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인 OpenCL, 다중 프로세서에서 병렬 프로그래밍을 위한 '그랜드 센트럴', 퀵타임 X, 16 TiB의 램 지원,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서버 2007 완벽 지원과 같은 기능 및 OS X의 거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 커널, 서브 시스템 및 드라이버(kext) 환경이 64비트로 전환되었다. 맥 OS X 10.7 라이언. 2010년 10월 20일 'Back to the Mac' 이벤트에서 맥 OS X 라이언의 프리뷰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판올림에서는 아이패드에 사용된 iOS의 여러 장점을 흡수하였다. 맥 앱 스토어가 지원되어 애플이 직접 응용 프로그램 유통을 맡게 되었다. '런치패드'와 풀 스크린 애플리케이션, '미션 컨트롤' 등의 향상된 인터페이스가 지원된다. 페이스타임을 지원하여, 페이스타임을 지원하는 디바이스와 영상통화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OS X 10.7 버전부터 별도의 서버판 OS X은 없어지며 소비자용 리테일버전에 서버기능이 통합된다. 2011년 7월 20일에 발매되었다. OS X 10.8 마운틴 라이언. 2012년 2월 16일 발표된 OS X 마운틴 라이언은 iOS 5의 일부 기능을 통합하였다. 아이클라우드를 바탕으로 한 공유 기능 확산, 메시지, 미리알림(reminder), 노트, 알림센터, 게임센터, 에어플레이 미러링, 게이트키퍼가 도입되었다. 2012년 7월 16일에 발매되었다. OS X 10.9 매버릭스. 애플은 2013년 6월 10일 WWDC 2013에서 OS X 10.9 매버릭스(Mavericks)를 공개했다. 새 지도 앱, 개선된 알림센터, 새 아이북스 앱을 포함한다. 또한 Finder의 Tag기능과 Multiple Display 기능을 지원하며, 2013년 10월 23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같은 날에 공개된 것은 맥 프로, iOS 7, 맥북 에어 등이다. OS X 10.10 요세미티. 애플은 2014년 6월 2일 WWDC 2014에서 OS X 10.10 요세미티(Yosemite)를 공개했다. 기존의 OS X의 유저 인터페이스였던 아쿠아를 제거하고 iOS 7에서 선보인 플랫한 디자인의 아이콘과 그 외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인터페이스 하단부의 독(Dock)이 맥 OS X Panther의 독처럼 입체적인 모양을 버리고 평면적인 사각형이되었다. 또한 메뉴 막대와 독의 색을 어둡게 하고 글자를 하얗게 한 반전 색상을 가진 다크 모드(Dark Mode)를 설정할 수 있게 하였다. 2014년 10월 16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OS X 10.11 엘카피탠. 2015년 6월 9일 WWDC 2015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30일에 발매되었다. Mac의 성능 향상, 보안 스택 강화, 풀 스크린에서 앱을 동시에 두 개 표시 할 수 있는 스크린 스플릿 기능, 시스템 폰트 추가 등이 포함되었다. Spotlight가 보다 구어체 검색에 대해서도 결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macOS 시에라. macOS 시에라(버젼 10.12)는 2016년 6월 30일 WWDC 2016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20일에 발매되었다. 이 버전부터 iOS와 watchOS, tvOS 등 애플의 다른 OS들과 같은 형식의 이름인 macO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버젼명인 10.12는 공식 명칭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HFS 포맷 대신 APFS가 실험적으로 도입되었으며, Siri가 처음으로 macOS에 도입되었으며 iOS, watchOS와의 보다 많은 연계 기능이 탑재되었다. Mac mini를 제외한 Late 2009 모델 이전의 Mac에서의 직접 인스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macOS 하이 시에라. macOS 하이 시에라(버젼 10.13)는 2017년 6월 5일 WWDC 2017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HFS+ 대신 APFS를 쓰도록 되었으며, 메탈 2와 더불어 HEVC 코덱을 OS단에서 지원한다. iMac (Late 2009, 27 or 21.5-inch) 모델까지는 'macOS 하이 시에라'로 업그레이드가 지원되나, 그 이전 모델 iMac(Early 2009, 24 or 21.5-inch)은 업그레이드를 지원하지 않는다. macOS 모하비. macOS 모하비(버젼 10.14)는 2018년 6월 4일 WWDC 2018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으며 2018년 9월 24일(현지시각) 정식 배포를 시작했다. 보안성 향상 및 FaceTime 최대 100명 영상통화 등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버전이다. iMac 2012년 이전모델은 'macOS 모하비'로의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는다. macOS 카탈리나. macOS 카탈리나(버젼 10.15)는 2019년 6월 4일 WWDC 2019에서 공개되었다. Sidecar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iPad를 Mac의 보조 디스플레이로 활용해서 작업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기능은 동일한 행사에서 새롭게 공개된 iPadOS 13 이상에서 지원한다. 또한 스크린 타임 기능이 추가되었다. 사용 시간을 모니터링하고, 다운타임 일정을 잡고, 앱과 웹사이트 사용 시간 제한을 모든 기기에 걸쳐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macOS 빅서. macOS 빅서(버젼 11.0)는 2020년 6월 22일 WWDC 2020에서 공개되었다. 맥 OS X 10.0 치타가 나온지 19년만에 메이저 버전이 11.0으로 업데이트되었다. UI가 전반적으로 리프레시되었고, 인텔 프로세서에서 Apple Silicon으로의 전환을 발표하며 ARM 아키텍처를 지원하는 최초의 맥 운영체제가 되었다. 전환에 따른 하위호환성을 지원하기 위해 로제타 2와 유니버설 2 등의 기술이 함께 발표되었다. macOS 몬터레이. macOS 몬터레이(버전 12.0)는 2021년 6월 8일 WWDC 2021에서 공개되었다. 메이저 버전은 12.0이다. macOS 벤투라. macOS 벤투라(버전 13.0)는 2022년 6월 6일 WWDC 2022에서 공개되었다. 메이저 버전은 13.0이다. 맥 앱 스토어. 맥 앱스토어는 iOS의 앱 스토어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iOS의 앱 스토어에는 있는 앱이 맥 앱 스토어에는 없을 수도 있다. 맥 앱 스토어에 올라오는 앱들은 모두 애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macOS의 보안기능인 게이트키퍼에 걸리지 않는다. 애플 실리콘 프로세서(M1, M2 등)를 탑재한 맥에서는 개발자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iOS 기반 앱들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언어. macOS는 다음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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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츠 (그래픽스 계층)
쿼츠(Quartz)는 macOS에 쓰이는 그래픽 기술의 일부로서, 코어 그래픽스 프레임워크인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의 일부이다. 코어 그래픽스와 합성 엔진에서 2차원 렌더링을 지원하며 명령을 그래픽 카드로 보낸다. 쿼츠는 "코어 그래픽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일반적인 용어로서 "쿼츠", "쿼츠 기술"이라는 용어는 거의 모든 부분의 OS X 그래픽 모델에서 컴포지터의 렌더링 계층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용도에서 이 용어는 코어 이미지와 코어 비디오도 아우르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애플이 제공하는 다양한 그래픽 기술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 쿼츠 2D는 주로 2차원 텍스트와 그래픽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가리킨다. 실행 중에 렌더링 및 앤티에일리어싱을 거쳐 2차원 그래픽스를 표현하여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아쿠아를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쿼츠는 하부 픽셀 정밀도로 문자열을 렌더링한다. 그래픽은 기본 동작 모드인, 더 전통적인 앤티에일리어싱에 제한되지만 이 기능을 끌 수 있다. OS X v10.4에서 애플은 쿼츠 2D 익스트림을 도입하였는데, 쿼츠 2D가 지원 GPU를 렌더링할 수 있게 한다. OS X 10.4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기본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비디오 다시 그리기나 커널 패닉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OS X v10.5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쿼츠GL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기능은 여전히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일부 상황에서 성능 저하를 일으키거나 비주얼 글리치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원하면 이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 별도 켜고 끌 수 있다. 쿼츠 컴포지터는 쿼츠 2D 및 기타 렌더러(오픈GL, 코어 이미지, 퀵타임 따위)가 사용하는 합성 엔진이다. OS X v10.2 이후로 쿼츠 컴포지터는 지원 그래픽 카드의 프로세서(GPU)를 이용하여 합성 성능을 개선한다. 이 기술은 쿼츠 익스트림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원 그래픽 카드와 함께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PDF의 이용. 쿼츠의 초기 개발자 문서에 따르면 쿼츠는 PDF를 이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쿼츠의 내부 이미징 모델은 PDF 오브젝트 그래프와 관련하여 PDF를 여러 장치에 쉽게 출력할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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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토시
매킨토시(, ) 혹은 줄여서 맥()은 애플이 디자인, 개발, 판매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제품 이름이다. 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매킨토시는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를 채용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윈도우 기반의 PC를 쓰고 있다. 매킨토시는 값이 비쌌으며 내부를 공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애플은 1980년대의 MS-D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사용하던 IBM 호환 PC 시장 점유율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애플은 1998년 성공적인 판매와 더불어 매킨토시 상표의 부활을 보여준 아이맥 데스크톱 모델로 다양한 수준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맥 시스템은 주로 가정과 교육,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그것들이 바로 앞서 설명한 일반 사용자용 모델인 아이맥과 맥 미니, 맥북 레티나와 맥북 에어 모델,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인 맥 프로, 맥북 프로 등이 있다. 맥 제품들은 하드웨어와 맥에 설치되는 모든 운영 체제를 함께 생산함으로써 사용이 쉽고 용이하게 수직적으로 통합되어있다. 이것은 다양한 제조사가 하드웨어를 만들고 또 각기 다른 제조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IBM 호환 PC와의 큰 차이점이다. 애플은 자사가 모두 맥 하드웨어를 생산하며 내부 시스템과 디자인, 가격을 모두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애플도 다른 회사의 구성품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재 매킨토시의 CPU는 인텔사의 x86 아키텍처이고 그 이전에는 AIM 연합의 PowerPC를 썼고, 그 이전에는 모토로라의 68k를 사용했다. 애플은 또한 맥에서 사용되는 운영 체제를 개발하는데 현재 최신 맥 운영 체제는 macOS 몬터레이이다. 현재의 인텔 기반 맥은 다른 PC 같이 리눅스, FreeBSD, 윈도우 같은 운영 체제를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컴퓨터에서는 원칙적으론 맥 OS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해킨토시와 같은 방법으로 우회 설치가 가능하다. 역사. 1979 ~ 1984년.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1970년대 후반,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이 쉽고 가격이 낮은 컴퓨터를 보급하고자 했던 애플 직원 제프 래스킨()이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 종류인 '매킨토시(Mcintosh)'로 이름을 짓고자 했으나 이미 그 이름을 쓰고 있던 오디오기기 회사 '매킨토시 래버러토리'와의 법률상 문제 때문에 철자를 'Macintosh'로 바꾸었다. 1979년 9월 래스킨은 프로젝트를 위해 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견본을 만들 엔지니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애플 리사팀(애플 리사 컴퓨터는 매킨토시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고급 사양으로 개발되고 있었다)의 멤버였던 빌 앳킨슨(Bill Atkinson)이 더 이전에 입사했던 서비스 기술자인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몇년 뒤, 래스킨은 최초의 매킨토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될 큰 규모의 개발팀을 모으게 된다. 구성원은 래스킨, 빌 앳킨슨(Bill Atkinson),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 크리스 에스피노사(Chris Espinosa), 조애나 호프먼(Joanna Hoffman), 조지 크로(George Crow), 브루스 혼(Bruce Horn), 제리 매넉(Jerry Manock), 수잔 케어, 앤디 허츠필드(Andy Hertzfeld) 그리고 대니얼 콧키(Daniel Kottke) 등이었다. 스미스의 첫 번째 매킨토시 보드는 래스킨이 디자인한 64 킬로바이트(KB) 램, 모토로라 6809E 마이크로프로세서, 256x256 해상도가 지원되는 흑백화면의 사양으로 설계되었다. 매킨토시 프로그래머인 버드 트리블(Bud Tribble)은 리사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돌리는 데 관심이 있어, 프로젝트의 지원 자금이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서도 스미스에게 애플 리사의 모토로라 680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맥에 장착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1980년 12월 스미스는 68000 프로세서를 장착할 뿐 아니라 속도도 5에서 8MHz로 끌어올린 기판 설계에 성공하였다. 이 보드는 또한 384x256 픽셀의 해상도를 지원했다. 스미스의 디자인은 리사보다 적은 개수의 램을 사용하여 생산단가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맥의 최종 디자인은 자체 내장형이었는데 다른 컴퓨터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큰 64Kb 롬에 퀵드로 그래픽 언어를 내장했고, 16개의 64Kb 램 칩을 연결한 128KB RAM을 장착했다. 메모리 슬롯이 없더라도 맥의 RAM은 공장에서 조립시 16개의 칩 슬롯을 256KB로 바꿔 납땜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512KB로 확장이 가능했다. 최종 생산품은 위의 견본 제품에서 9인치 화면과 512x342의 흑백 해상도로 수정되었다. 매킨토시의 구성은 애플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잡스의 관심을 끌었다. 리사보다 시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스티브 잡스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래스킨은 1981년 잡스와의 마찰로 프로젝트를 떠났고 마지막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래스킨보다 잡스의 요구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이때 잡스는 래스킨이 지은 매킨토시(macintosh)라는 이름까지 바이씨클(bicycle)로 바꾸려 하였으나 이는 취소되었다). 제록스 PARC사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잡스는 제록스 알토 컴퓨터를 관전하고 스몰토크 개발도구를 애플 주식옵션과 교환하는 협상을 위해 제록스 PARC사를 방문한다. 제록스는 세가지 기술을 시연했는데 결국 잡스는 액면가 100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양도하고 GUI 기술을 가져왔다. 리사와 매킨토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제록스 PARC사가 선보인 기술에 영향을 받아 매킨토시 개발진들의 자체 의견과 조합된 결과이다. 또한 잡스는 산업 디자이너인 하르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에게 매킨토시 개발에 참여하길 권고했고 결과적으로 디자인 언어인 스노 화이트(Snow White)가 탄생하였다. 초기 맥에는 너무 늦은 완료 시기였지만, 1980년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거의 모든 맥에 적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프로젝트에서의 잡스의 리더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CEO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와의 격렬한 대립 후, 1985년 분노를 머금고 사퇴한다.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NeXT)를 설립한 잡스는 1997년까지 애플로 복귀하지 않았다. 1984년. 매킨토시 128K는 1983년 10월에 언론에 소개됐고, 12월에 18쪽짜리 소책자와 함께 여러 잡지에 소개되었다. 매킨토시는 1984년에, 지금은 15,000,000달러의 거물이 된 리들리 스콧의 TV 광고인 “1984”에 소개되었다. 광고는 1984년 1월 거의 모든 미국인이 시청했던 슈퍼볼 VXIII의 3쿼터에 방송에 나갔는데, 지금은 “획기적 사건”과 “걸작”으로 불린다. 1984 광고에는 “동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매킨토시의 등장 (여자의 흰 상의에 피카소 풍의 그림으로 애플사의 매킨토시라고 그려져 있다)을 상징하기 위해 무명의 여자가 출연했다. 이 그림은 빅 브라더(Big Brother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커다란 화면에 얼굴만 보이는 독재자)에게 지배되는 미래를 그린 소설 1984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4 광고가 전파를 탄 이틀 뒤 매킨토시는 판매를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인터페이스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해 맥라이트(MacWrite)와 맥페인트(MacPaint) 두 가지의 응용 프로그램을 꾸러미로 제공했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맥 키노트 연설에서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미칠듯이 대단해!(Macintosh, Insanely great!)”라는 명언을 화면에 그리며 합성된 목소리로 소리까지 시연했다. 매킨토시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겐 너무 단순한 “장난감”으로 치부되었다. 그 까닭은 기계 전체가 GUI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프로그래머들에겐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 모드와 명령 방식으로 된 코드의 재작업을 의미했고, 이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에겐 큰 도전이므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소프트웨어 부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84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멀티플랜(MultiPlan, MS사의 초기 사무용 문서 프로그램)이 MS-DOS에서 독립했고 뒤따라 1985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되었다. 1985년에는 로터스 소프트웨어가 로터스 1-2-3의 성공을 잇는 IBM PC용 로터스 재즈(Lotus Jazz)를 출시하지만 큰 실패를 한다. 같은 해 애플은 매킨토시 오피스(Macintosh Office)를 레밍즈(Lemmings) 광고와 함께 출시하지만 매킨토시의 잠재적인 고객에게는 상당한 불명예를 안기며 성공하지 못했다. 1984년 11월 뉴스위크 경선 특별판에서 애플은 2,500,000달러를 들여 39쪽의 모든 광고란을 사들여 화제가 되었다. 애플은 또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에게는 24시간 동안 대여했다가 후에 매장에 돌려주는 매킨토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2.000,000명의 고객들이 참여하자 판매사들은 프로모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주문에 의한 매킨토시의 공급이 부족했고, 반납된 많은 제품들이 다시 팔지 못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 판매행사는 CEO인 John Sculley가 가격을 미화 1,995달러에서 2,495달러로 올리는 이유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을 위한 조정, 2007년엔 약 5,000달러로 조정.) 1985 ~ 1989년. 1985년, 맥과 애플의 레이저 프린터, 보스턴 소프트웨어(Boston Software)의 맥퍼블리셔(MacPublisher)와 앨더스 페이지메이커(Aldus PageMaker) 같은 맥에 특화된 제품들은 사용자로 하여금 문자와 그림을 배열하여 디자인, 미리 보기, 출력 등을 가능케 했다. - 이런 활동은 전자출판으로 알려지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전자출판은 유일하게 맥에서만 가능했으나, 결국 후에는 IBM PC 사용자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매크로미디어 프리핸드(Macromeida FreeHand), 쿼크익스프레스, 어도비 포토샵, 그리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들은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서의 맥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했고 전자출판 시장의 확장과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초기의 맥이 마주친 한계는 곧 사라졌다: 초기의 맥은 1984년의 다른 컴퓨터들과 비교해도 적은 메모리 용량이었고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도 부족하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1985년 10월, 애플은 맥의 메모리를 512kb로 늘렸지만, 128kb(매킨토시 128K)인 맥에서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부품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애플은 1986년 1월 10일 미화 2,600달러의 매킨토시 플러스를 발표했다. 4메가까지 확장 가능한 1메가바이트의 램을 장착했고, 하드 드라이브나 스캐너 등 최대 7개의 주변 장치까지 제어할 수 있는 가히 혁명적인 병렬 SCSI 인터페이스를 제공했다. 플로피 드라이브는 800kb까지 용량이 늘어났다. 맥 플러스(Mac Plus)는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고 1990년 10월 15일까지 생산되었다. 4년하고도 10개월 동안 판매된 셈인데, 이것은 애플 역사상 가장 긴 생명력이었다. 또 다른 사건도 남겼는데, 특히 느린 프로세서 속도와 그래픽 능력의 한계는 업무용 컴퓨터 시장에 맥의 진입을 막는 장애였다. 진화된 모토로라의 CPU는 좀 더 빠른 컴퓨터를 가능케 했고 1987년 애플은 모토로라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모토로라의 68020 16MHZ를 사용한 매킨토시 2를 소개했다. 매킨토시 2의 가장 큰 발전은 ROM에 내장돼 있는, 매킨토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퀵드로(QuickDraw) 언어로 표시되는 색채였다. 특히나 어떤 화면 크기라도 소화할 수 있고 어떤 색 깊이도 소화할 수 있으며 다중 화면을 지원하는 것은 퀵드로의 많은 혁신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매킨토시 2는 지금까지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확장 슬롯과 컬러 그래픽, 공개 아키텍처를 채용했고 애플의 다른 제품들과 확장 가능한 애플 2계열에 영향을 받은, IBM PC와는 다른 디자인은 매킨토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매킨토시 2는 하드 드라이브와 함께 꽤 시끄러웠던 송풍기(fan)이 달린 전원공급장치를 내장하고 있었다. 한 외부 개발사에서 냉각기의 온도를 인식해 송풍기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팔긴 했지만 소비자는 애플의 보증을 받을 수 없었다. 후에 매킨토시 컴퓨터는 좀 더 조용한 하드 드라이브와 전원공급장치를 채용했다. 1986년 9월 애플은 MPW라고도 불리는 매킨토시 프로그래머 웍샵에서 맥용 프로그램을 리사를 통한 개발 대신에 맥에서 개발하는 법을 소개했다. 1987년 애플은 HyperCard를 공개했고, 매킨토시에서 동시 다중작업을 가능케 하는 MultiFinder를 소개했다. 가을에는 모든 애플에 위 두 가지 제품이 꾸러미로 제공되었다. 매킨토시 2를 바로 뒤이어, 매킨토시 SE(Second Edition)가 출시됐는데 최초의 20MB 내장 하드 드라이브와 하나의 확장슬롯이 장착된 맥이었다. SE는 또한 제리 매넉과 테리 오야마의 최초 디자인을 향상시켰고 매킨토시 2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와 몇 개월 후 애플 IIGS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애플 데스크탑 박스 B) 마우스와 키보드를 공유했다. 1987년 애플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사업을 클라리스(Claris)로 분리한다. 클라리스는 애플에 쓰였던 몇몇 응용 프로그램의 코드와 법적 권리를 인수했다. 주요 제품은 MacWrite, MacPaint와 MacProject 등이다. 1980년대 후반에 클라리스는 몇몇 수정판 응용 프로그램을 출시하는데 MacPaint Pro, MacDraw Pro, MacWrite Pro 그리고 FileMaker Pro 같은 “프로(Pro)” 계열이었다. 완벽한 사무용 프로그램 한 벌을 만들고자 클라리스는 맥에 있던 Informix Wingz(업무용 문서 프로그램 )를 사들여 이름을 Claris Resolve로 바꾸고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Claris Impact를 추가했다. 1990년 초기에 오면서, 클라리스 프로그램들은 일반인 사용자들에게 판매되는 맥의 주요품목이 되었고,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1년, 클라리스는 곧 두 번째 인기상품이 되는 ClarisWorks를 출시한다. ClarisWorks는 버전 5.0이 나오면서 AppleWorks로 이름이 바뀐다. 매킨토시 포터블(Macintosh Portable )은 애플의 첫 번째 휴대용 맥이다.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생산했고 시스템 6과 시스템 7을 돌릴 수 있었다. 1988년, 애플은 애플에 저작권이 있는 GUI, 사각형의 창 모양, 화면 겹침 기능(Overlapping), 창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 등을 무단 사용한 혐의로 마이크로스프트사와 휴렛 패커드사를 고소했다. 4년 후 애플의 패배로 판결이 나고 후에 애플은 다시 항소했다. 애플은 이러한 행동때문에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FSF)을 비롯한 일부 단체로부터 치명타를 맞게 되는데,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애플이 GUI 기술을 독점하려 한다고 여겼고 7년 동안 매킨토시 환경에서 돌아가는 GUI 프로그램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1988년 새로운 모토로라 68030 프로세서와 함께 매인 보드에 MMU 내장을 포함해 내부가 향상된 매킨토시 IIx가 출시되었다. 1989년에 슬롯 개수를 줄인 버전으로 매킨토시 IIcx와 16 MHz 69030을 장착한 Mac SE가 뒤따라 출시되었다.(이름 짓는 규칙대로 가면 “SEx”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킨토시 SE/30라고 지었다.) 그해 후반에 25MHz의 속도로 동작하고 8MB 이상의 램을 지원하지만, 그 프로세서와는 다르게 “32-bit 비호환” ROM(32 bit 중의 8 bit만이 OS 레벨의 주소할당이 가능했다.)을 장착한 매킨토시 IIci는 “32-bit 호환”이 되는 최초의 맥이었다. 시스템 7은 32-bit 주소할당이 가능한 최초의 Mac OS였다. 애플은 또한 매킨토시 포터블도 소개했는데 16 MHz 68000 모델에 능동행렬평판화면(active matrix flat panel display)을 채용했고 어떤 모델은 역광화면(backlit)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다음해에 가격이 미화 9,900달러부터 시작된 매킨토시 IIfx가 베일을 벗었다. 이 제품은 40 MHZ의 빠른 68030 프로세서와는 별개로 더 빠른 메모리, I/O 연산에 할당되는 애플 2 에라 CPU(Apple II-era CPU) 같은 내부적으로 아주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990 ~ 1998년. 1990년 5월에 성능과 기능면에서 매킨토시 운영 체제에 버금가면서 가격은 더 싼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3.0(Microsoft Windows 3.0)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에 애플은 이전보다 가격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며 대응했다. 매킨토시 플러스(Macintosh Plus)의 주요 기능만으로 가격을 낮춘 매킨토시 클래식은 미화 999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2001년 초까지 결국 맥의 가격대는 올라갔다. 68020 CPU를 장착하고서 피자 상자 같이 특이한 가방에 들어가는 매킨토시 LC는 미화 1,800달러에 살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컬러 그래픽과 512 x 384 픽셀을 지원하면서 저렴한 가격의 새로운 모니터를 채용했다. 20 MHz IIci 제품에서 하나의 확장 슬롯만 넣은 매킨토시 IIsi는 미화 2,500달러였다. 이들 세 가지 제품은 모두 잘 팔렸지만, 애플의 순수익은 이전의 매킨토시 제품들보다 낮았다. 시스템 세븐(System 7)은 최초의 주요 판 올림이 이뤄진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1991년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시된 시스템 세븐은 32비트 코드로 재작성되어 나옴으로써, 컬러 그래픽 조작성과 메모리 주소 할당, 네트위킹이 강화되었고 협력적 다중작업(co-operative multitasking) 구현과 가상 메모리 기술까지 적용되어 나온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그해 후반에 애플은 속도가 더 향상된 모토로라 68040 프로세서를 최초로 채용한 매킨토시 쿼드라 700(Quadra 700)과 900을 선보였다. 이 제품들은 16 MHz 68030 CPU를 사용해 전년도 최고 인기 상품이기도 했던 매킨토시 클래식 2(Classic II)와 매킨토시 LC II의 개선판으로서 시장에 나왔다. 또한 이때에 매킨토시는 프락디자인(Frogdesign) 사에 비싼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며 사용하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를 버리고, Apple Industrial Desing Group을 설립하여 새 운영 체제에 사용될 언어를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에 휴대용 매킨토시(Macintosh Portable) 제품군은 소형화된 포터블 개념으로 나온 최초의 세 가지 파워북(PowerBook)-- 파워북 100과 16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40, 25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70으로 대체된다. 이 제품들은 키보드 아래쪽에 손바닥을 놓일 공간을 마련되고, 포인팅 장치(트랙볼)가 내장된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였다. 애플 매장에는 매킨토시 센트리스(Macintosh Centris)라 불린 쿼드라(Quadra) 계열의 중간쯤 되는 모델이 있었는데, 소비자들이 클래식 계열, LC 계열, II계열, Quadra 계열, 펄포마 계열, 센트리스 계열로 혼란스러워 해서 곧 쿼드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애플은 파워북 듀오 계열의 축소판 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제품은 사무실 등의 작업장에 쓰이는 기능성 도구 같은 제품이었는데 데스크톱용 기지국(Base Station)에 연결되는 용도였다. 이 제품은 1997년 초반까지 판매되었다. 1994년 5월, 차세대 파워북 계열인 파워북 500을 출시하는데 트랙패드(trackpad)라는 기발한 장치를 최초로 장착한 제품이다. 또한 1994년 애플은 AIM 연합, IBM, 모토로라가 개발했던 RISC 파워피씨(RISC PowerPC) 아키텍처에서 모토로라 CPU를 버렸다. 파워 매킨토시 계열은 새로운 칩을 사용한 첫 번째 제품으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데 9개월 만에 100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런 기술과 상업적인 성공에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은 윈도우 95 운영 체제와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하락시켰다. 이 두 제품은 IBM 호환 PC의 멀티미디어 기능과 동작 속도를 획기적으로 상승시켰지만 윈도 운영 체제의 GUI는 여전히 맥과 닮아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애플은 "매킨토시 호환 프로그램(Macintosh clone program)"을 시행했는데, 이 호환 제품들은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본체)에 애플의 시스템 7 운영 체제를 장착한 제품들이었다. 이 전략은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다소 높여주고 고객들에게는 더욱 싼 하드웨어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애플에게는 경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돌아오면서 버전 7.7로 알려진 다음 운영 체제의 이름을 맥 OS 8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애플이 다른 회사에 허용했던 저작권은 오직 시스템 7만 해당했으므로 결국 매킨토시 호환 제품의 생산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은 맥 호환 하드웨어 생산에 상당한 투자를 했던 모토로라사나 파워 컴퓨딩 사(Power Computing Corporation)에게는 치명적인 재정적 손실을 입혔다. 1998 ~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다음 해인 1998년 애플은 모든 구성품이 하나로 통합된 아이맥(iMac)을 선보인다. 반투명한 아이맥 케이스는 청록색에서 시작해 나중엔 여러 색깔로 생산됐는데, 1990년대 후반에 제품 디자이너인 홀마크(hallmark)가 고안한 것이다. 아이맥은 이전까지 애플의 표준 연결 방식인(그리고 거의 독자 기술이었던) SCSI나 ADB 같은 장치를 버리고 두 개의 USB 단자를 장착했다. 또한 아이맥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앴는데, 그 대신 CD-ROM을 장착했다. 아이맥은 139일 만에 80만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고, 그해 애플의 연간 매출은 미화 3억 9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던 1995년 이래 처음으로 순수익이 난 해였다.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은 파워 매킨토시(Power Macintosh)에도 적용됐고 연이어 나온 새로운 제품인 아이북(iBook)에도 적용되었다. 1999년 7월에 소개된 아이북은 애플의 첫 번째 일반인용 노트북 컴퓨터였다. 9월에 판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14만대의 선주문이 있었고 10월이 되면서는 아이맥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면서 인기를 끌었다. 애플은 연이어 큐브(Cube)나 교육 시장용 이맥(eMac), 전문가를 위한 파워북 G4(PowerBook G4) 랩탑 등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 최초의 아이맥은 G3 프로세서를 썼으나 G4를 거쳐 G5로 넘어가면서 제품 디자인도 흰색 플라스틱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현재의 아이맥은 알루미늄 케이스다. 2005년 1월 11일, 애플은 미화 499달러로 책정된 맥 미니(Mac Mini)를 출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가장 값이 싼 맥이다. 맥 OS는 9.2.2판까지 개선되어 나왔지만, 그것의 구식 아키텍처—몇 번 갱신이 되긴 했다. 예를 들면 파워 피씨 포트 중의 하나로 나노커널(nanokernel)이 추가됐고 Mac OS 8.6은 멀티프로세싱 서비스 2.0(Multiprocessing Services 2.0)을 지원하도록 수정되었다.-- 는 교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애플은 맥 OS 9을 완전히 재정비한 유닉스 계열 기반의 맥 OS X(Mac OS X)을 소개하는데 다윈(Darwin) 커널과 XNU를 사용하는 넥스트스텝(NEXTSTEP)을 토대로 하였다. 맥 OS X은 2000년 9월에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퍼블릭 베타로 공개되었다. 원하는 고객들은 미화 29.99달러에 애플의 이 새로운 운영 체제를 미리 체험하고 정품이 발매되기 전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2001년 3월 24일 Mac OS X의 첫 번째 버전인 10.0(별명은 치타)이 출시되었다. Mac OS X의 초기 버전에서는 이전의 OS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들을 클래식이라는 구성을 이용하여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애플은 Mac OS X의 10.5 버전인 레퍼드(Leopard)부터 클래식을 빼버렸다.] Mac OS X의 다음 버전들은 2001년 9월 25일 출시된 10.1 버전 "푸마"(Puma), 2002년 8월 24일 출시된 10.2 버전 "재규어"(Jaguar), 2003년 10월 24일 출시된 10.3 버전 "팬서"(Panther), 2005년 4월 29일에 출시된 "타이거"(Tiger), 2007년 10월 26일에 출시된 "레퍼드"(Leopard), 2009년 2월 28일에 출시된 "스노우 레오파드"(Snow Leopard), 2011년 7월 20일에 출시된 "라이온"(Lion)이다. 인텔 버전의 레퍼드는 오픈 그룹으로부터 유닉스 규격 인증을 받았다. 1991년에 CPU를 파워피씨 프로세서로 변경하면서 파워 매킨토시, 파워맥 G3, 파워맥 G4, 파워맥 G5가 출시되었고, 1998년에는 아이맥이 큰 성공을 거두며 애플의 부흥을 이끌었다. 2006년부터는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이 판매되고 있다. 매킨토시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역사를 두 번 바꾸었다. 매킨토시 128부터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하고 과감하게 5.25인치 드라이브를 버렸다. 또한 아이맥부터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없애고 CD롬 드라이브만 탑재함으로써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운영 체제. 시스템 (1 ~ 7.5). 매킨토시가 발표되었을 때 운영 체제는 '시스템'(System)으로 불렸다. 최초의 시스템은 GUI와 위지위그 등 당시 상황에서는 혁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없었다. 1987년 시스템 5.0으로 버전이 올라가면서 멀티파인더를 통해 협력형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 1991년에는 가상 메모리, 파일 공유를 지원하고 멀티미디어와 그래픽 지원이 강화된 시스템 7이 출시되었다. 시스템이라는 이름은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처음으로 지원한 7.5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맥 OS (7.6 ~ 9.2.2). 1997년 맥 OS 7.6이 발표되면서 명칭이 '맥 OS'(Mac OS)로 변경되었다. 곧이어 멀티스레드 파인더와 새로운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맥 OS 8이 발표되었다. 1999년 맥 OS의 마지막 메이저 버전인 맥 OS 9가 발표되었다. 2001년 초에 발표된 맥 OS X에는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맥 OS X으로 전환하는 동안 기존에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맥 OS 9는 2001년 12월에 발표된 9.2.2를 마지막으로 개발과 지원이 중단되었다. macOS (10.0 ~ ). 현재 매킨토시의 운영 체제는 macOS이다. 이것은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사를 인수하여 BSD 유닉스 계열 기반인 NeXTSTEP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것이며, 이때의 이름은 OS X(오에스 텐)이었다. OS X은 더이상 버전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운영 체제의 이름으로 사용하며, 메이저 버전을 내놓을 때 소숫점 밑의 버전만을 올리며, 코드명을 이용하여 이름붙인다. 치타, 퓨마, 재규어, 팬서, 타이거 등 고양이과 동물들의 이름으로 각 버전의 코드명을 지정하였고 10.9 매버릭스 이후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명을 사용하여 코드명을 지정하며, 재규어(10.2) 이후로는 코드명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10.12 버전의 시에라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macOS로 바꾸었으며, 현재 가장 최신의 운영 체제는 10.15 버전의 카탈리나이다. 대한민국에서의 매킨토시 사용. 대한민국에서 매킨토시는 전통적으로 북디자인, 음악, 영상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지금은 X86용으로도 나와 있지만, 초기에는 쿼크익스프레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레이저 프린터, 고품질 서체를 매킨토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출력을 쉽게 할 수 있어서 북디자인을 비롯한 디자인계에서는 맥이 널리 사용된다. 음악 분야에서도 로직 프로 등의 주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그램을 통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영상 분야에서는 애플의 멀티미디어 기술인 퀵타임을 기반으로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방송이나 영화 업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크로스 플랫폼 프로그램 개발 노력으로 제한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인텔 매킨토시가 등장하면서 매킨토시의 판매가 증가하였다. 매킨토시는 가격이 비싸다는 선입관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매킨토시의 가격이 동일 사양의 PC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OS X과 윈도를 함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국의 각종 포탈이나 커뮤니티 사이트, 온라인 게임 사이트, 인터넷 뱅킹이나 공공기관 등 공인 인증서를 사용하거나 액티브 엑스를 사용하는 사이트는 매킨토시에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가 국내 운영 체제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상황에서 인터넷 사용이 확산되면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윈도-인터넷익스플로러 환경만을 감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이를 방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액티브 엑스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고 웹에서의 평등한 접근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웹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반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윈도우10이 2015년 출시된 이후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매킨토시의 종류.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매킨토시는 크게 대상 사용자 유형에 따라 일반 사용자용과 전문 사용자용, 제품 유형에 따라 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 분류되어 크게 네 가지 제품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맥 미니, 맥북 에어와 서버인 XServe가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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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한국어(韓國語)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이다. 한국말, 조선어(朝鮮語), 조선말로도 불린다. 고려인의 강제 이주에 의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을 포함하여 일본, 미국, 중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베트남 등 세계 여러 지역에 한민족 인구가 거주하게 되면서 전 세계 각지에서 한국어가 사용 되고 있다. 2016년 1월 초 기준으로 한국어 사용 인구는 거의 대부분이 한반도와 둥베이 등지에 거주 중이며 약 8,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는 옛부터 몽골어, 터키어, 카자흐어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설을 한국의 주류 학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에 주변 언어와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고립어, 또는 제주어를 포함하는 독자적인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고립어 역시 다른 고립어와는 궤가 다르고 한국어족도 제주어를 방언으로 포함시킬지 언어로 포함시킬지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 논거가 부족하며 한국어의 계통은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주제로, 역사언어학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어의 여러 명칭. 한국어는 대한민국에서 쓰는 명칭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드는 사전의 이름은 《겨레말 큰사전》이다. 1994년부터 열리는 남북한 간의 한글과 한국어 컴퓨터 처리를 표준화하려는 학회명은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어를 '쵸센고(조선어)'라고 불렀으나, 근래에는 대한민국 국적 사람들이 쓰는 말을 '칸코쿠고'(한국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내의 교포 사회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로 갈라져 각각 표준어와 문화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NHK는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한국어 회화 명칭을 '칸코쿠고(한국어)', '쵸센고(조선어)' 대신 '한구루 코우자'(, 한글 강좌)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중립성을 고려하여 '칸코쿠ㆍ조센고(韓国・朝鮮語, 한국ㆍ조선어)', '코리아고'(, 코리아어)나 '카라노쿠니노코토바'(, 한나라말) 등의 명칭을 쓰지만 잘 사용하진 않는다. 다만 '코리아고(코리아어)'는 1977년 조치 대학이 처음으로 전공 학과를 개설한 이후 일부 대학교에서 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말을 조선어로 불렀으나, 대한민국에서 쓰는 말은 한국어로 부른다. 이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접한 관계에 따라 한국어를 주로 '챠오셴위(, 조선어)'라고 불렀으나, 1992년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 양국이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사회 각층 민간 생활 중에서 '한궈위(, 한국어)' 또는 '한위(, 한어)' 등의 명칭으로 쓰인다. 학술상으로는 문화어 계열 어휘를 많이 사용하지만, 베이징 대학, 베이징 외국어대학, 상하이 외국어대학 등을 비롯한 중국 거의 대부분의 한국어 학과에서는 학과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말의 뜻 조선어로 하고 강의 내용은 99.9% 이상 대한민국 서울 표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타이완은 한국어를 '한궈위()'나 '한위()'로 부른다. 베트남에서의 용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거의 유사하다. 현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 한자도 어느 정도 사용하던 베트남은 한국을 '쩨우띠엔'(, 朝鮮)이라고 불렀고, 대한민국은 '남쩨우띠엔'(, 南朝鮮, 남조선), 한국어는 '띠엥쩨우띠엔'(, 㗂朝鮮, 조선어)으로 불렀다. 한국에 관련된 일반 어휘는 문화어 계열의 어휘가 더 많이 쓰였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띠엥한'(, 㗂韓)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에는 한국어 문서의 제목이 '한국어'를 뜻하는 '띠엥한꾸억'(, 㗂韓國, 한국어)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한국어는 영어로 'Korean', 프랑스어로 'Coréen', 스페인어로는 'Coreano'로 불린다. 계통. 한국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설이 성립하여 있지 않다. 근대에 핀란드의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가 대어족 가설인 알타이어족설을 제시할 때 한국어를 포함한 것을 시작으로 예프게니 폴리바노프, 로이 앤드류 밀러 등 20세기 중반 많은 언어학자들에게서 해당 가설이 지지받았다. 또한 다양한 언어학자들에 의해 부여어족 가설로서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계설도 주장되었다. 한국어는 언어유형학적으로 어형변화가 많은 교착어이며 어형변화가 없고 문법적 관계가 어순에 의해 표시되는 고립어와 다르다. 한국어의 유래와 함께 그 발달 과정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중세 한국어 이전의 기록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고대 한국어의 기록이 한자로 쓰여 있어 그 해석에 따라 음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등이 연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고대 한반도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지명학적 흔적은 크게 유의미하다. 한국어가 만주 등 북방 지역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설은 퉁구스어족에서 고대 한국어의 흔적이 나타나고 역으로 한국어 음운에서도 고시베리아제어와의 접촉 흔적이 개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력하다. 한편 하위 계통으로서는 이기문 등이 정립한 한-부여 분류가 국내외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한-부여 분류는 고대 한반도 지역에서 사용된 언어의 분류로, 고구려어, 백제어를 포함하는 부여계 제어와 신라어를 포함하는 한계 제어로 이루어진다. 다만 학자에 따라 그 차이가 방언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이런 경우 이 분류는 편의상의 구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한편 크리스토퍼 벡위스는 부여계 언어가 신라어와 완전히 달랐으며 일본어와 연관되어 있다는 부여어족 가설을 주장하였으나 여러 오류가 지적되어 보통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알타이어족설. 한국어가 몽골어, 퉁구스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 제어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역사적으로 유력설로 지지받는다. 현대에는 형태, 음운의 유사성 때문에 편의상 '알타이 제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근거는 음운론에서 모음 조화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형태론에서 교착어이며 수와 격이 일치하는 통사론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은 그 수가 고립어설 등 다른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에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표적으로 러시아 학자 안나 디보(Anna Dybo), 독일학자 프레드릭 코르틀란트(Frederik Kortlandt), 독일 언어학자 칼 멩게스(Karl Heinrich Menges), 미국 언어학자 로이 앤드류 밀러(Roy Andrew Miller), 러시아 학자 니콜라스 폼페(Nicholas Poppe). 핀란드 태생 미국 언어학자 알렉시스 마나스터 (Alexis Manaster Ramer), 벨기어 언어학자 마르티너 로베이츠 (Martine Robbeets) 등이 있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한 것은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가 최초이자 대표적으로,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의 하나로 보는 입장에서는 한국어의 다음과 같은 속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이 가지는 전형적인 특성 외에 다른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어가 조기에 알타이조어에서 분리되었다는 가설을 성립하게 하였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임을 부정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중등교육에서는 알타이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은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르티너 로베이츠 등 일부 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우선적으로 묶고, 몽골어족, 퉁구스어족, 튀르크어족의 조사나 기초 어휘에서 서로 간의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며 대어족의 '극동아시아어족'이 성립한다는 가설을 새로이 주창하고 있다. 또한 마셜 엉거(J. Marshall Unger)는 한국어-일본어-퉁구스어의 공통 조어를 예측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는 알타이어족 가설의 재주장과 무관하지 않다. 고립어설. 몇몇 학자들은 한국어족을 고립어(language isolate)로 분류한다. 대표적으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알렉스 버라타 교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스테판 게오르크, 유타 대학교의 마우리시오 믹스코 교수가 고립어설을 지지한다. 한국어를 고립어로 분류하는 언어학자들은 알타이어족과 한국어의 공통 어휘가 적거나 재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립어는 외부 접촉이 적은 고립된 곳에서 매우 적은 화자들이 사용하는데, 한국어는 8천만 명 가까이 모국어로 사용하기에 고립어로 분류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한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 공통 어휘가 적다는 것은 일본어와 같이 한자를 차용어로 빌려 쓴 단어들이 있으며 현재 한국어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부여어족의 기록이 적기 때문에 부여어족의 기록이 더 발견되면 주장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한편, 유네스코 등 일부 단체나 학회에서는 표준어와 차이가 큰 제주 방언을 제주어로 분리하여 한국어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학자들은 한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알타이어족은 같은 어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사하지만 한국어의 경우 기초 어휘의 공통점이 적다고 말한다. 즉 칼 멩게스는 알타이어족은 단순히 SVO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이 일치하기 때문에 일치하는 공통 어휘만 많다면 인도유럽어족처럼 같은 어족으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티너 로베이츠는 한국이 중세에 한글을 발명했지만 근대까지 한자를 쓰며 소통하였고 많은 한국 고유어가 사라졌기 때문에 알타이어족의 공통 어휘가 많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 일본어와 한국어의 연관은 과거부터 여러 학자에 의해 지적된 것으로, 특히 문법이나 어휘의 유사성에서 창안된 설이다. 다만 고대 한국어 자료가 부족하여 둘 간의 실제 연관은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언어에서 중요한 1인칭에 주목했다. 일본 고어에서 1인칭은 나(己)라는 한자를 사용하며 나(な)라고 읽었는데 일본의 1인칭 고어가 한국어의 1인칭인 "나"와 동일하다. 일본어의 1인칭이 동일한 곳은 중국 남부나 북부가 아닌 한국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본 어휘 중 한국어에서 숫자 1을 뜻하는 "하나"와 일본어에서 최초, 처음을 뜻하는 “はな”(하나)가 같은 점이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일본어가 친족 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뿐이며, 만일 그렇다면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조몬시대 중기 이전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에 유사성이 있는 이유는 한국인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I. Beckwith)는 고구려어의 어휘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며 신라어를 포함하지 않는 부여어족의 성립을 주장하였으나 주류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재 소수설로 머물러 있다. 알렉산더 보빈은 부여어족의 근거로 들리는 지명 어휘의 일치는 한국어족 어휘가 아니며 고구려어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 남부에 잔존한 일본어족 언어의 흔적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비알타이어 기층설. 소수 가설 중 하나로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김방한은 비알타이어 기층설을 주장한다. 김방한은 한국어 기층에 원시 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비알타이어 기층이 있고, 그 위에 알타이어계 요소가 덮인 것이거나, 그 반대로 비알타이어가 알타이 기층에 덮여서 한국어의 뼈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원시 한반도어와 계통적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편의상 고시베리아어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니브히어(길랴크어)를 지목하였다. 이후 유하 얀후넨은 한국어와 니브흐어 간의 파열음 일치를 들어 고대에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기타. 한국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가설은 19세기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일부 언어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주된 논거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와 한국어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어순과 어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거의 대부분 부정되었다. 이외에 일부 어휘의 일치나 문법의 유사성을 근거로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족과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학설도 존재하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음운. 모음. 다음은 대한민국 표준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형태 음소론. 조사의 형태는 앞의 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은/는, 이/가, 을/를과 같이 음절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에서/서, 으로/로와 같이 음절이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은/는, 이/가, 을/를의 경우, 모음이 연쇄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음이 삽입되는 규칙적인 경우이나, 와/과, 으로/로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으로/로는 ㄹ 뒤에서 독특한 분포를 보인다. 와/과 역시 중세 한국어에서는 으로/로와 마찬가지로 ㄹ뒤에서 '와'가 쓰이는 독특한 분포를 보였으나 현대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와/과의 경우 이중모음/ㅘ/가 모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음 연쇄 환경이 아니고 사용 빈도에 따라 분포가 설명된다. 형태 음소론적 차이는 일부 동사에서도 관찰된다. 문법. 한국어는 어근과 접사 등 특정 표지가 붙음에 따라 단어의 기능이 결정되는 교착어로 분류된다. 특히 조사에 따라 문법적 격이 정해지며 이 때문에 고립어에 비해 어순이 비교적 유동적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SOV형 어순, 곧 주어-목적어-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반적인 경우 서술어는 반드시 문장의 끝에 위치하여야 한다. 조사는 문법적 격을 나타내는 격조사, 단어끼리 이어주는 접속조사, 특별한 의미를 가하는 보조사로 나뉘며, 조사가 붙는 체언이 개음절인지 폐음절인지에 따라 다른 조사가 붙기도 한다. 일례로, '사람'의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이'이나, '머리'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가'이다. 어미가 다양한 것이 특징적으로, 문장 내에서 기능이나 수식은 물론 미묘한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특히 주로 종결 어미나 선어말 어미에 따라 드러나는 낮춤말과 평어, 높임말의 복잡한 존비어 체계가 특징적으로, 화자 간에 존댓말(높임말)과 반말(낮춤말, 평어)에 대한 합의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어색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언어와 호칭 선택 문제 때문에 갈등과 권위적 상황이 유발되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용언은 동사와 형용사를 포함하는데, 둘의 어미 변화가 거의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다. 용언의 기본형은 모두 종결어미의 일종인 '-다'로 끝나는 것으로 취급되며, 그 기능에 따라 조금씩 변하나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다'로 끝나 문장의 끝을 암시하게 된다. 그 시제는 현재, 과거, 미래형으로 나뉘며, 이 또한 동사의 종류나 기능에 따라 다양한 어미로 나타난다. 어휘. 한국어의 어휘는 크게 고유어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로 분류된다. 고유어는 한국어의 기층을 형성하는 고유의 어휘로, 사용 빈도가 높은 일상어는 거의 대부분 고유어에 속한다. 음운적으로 ㄹ 소리로 시작되는 토착 어휘는 거의 없으며, 이는 알타이 제어의 음운론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어에 한자의 비율은 일반적으로 한자의 비율이 50%라고 하는 잘못된 설이 세간에 퍼져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가능한 한 많은 영어와 독일어인 현대어 낱말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예를 들어 Society=사회)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국어사전이 수록하는 한자어의 상당수는 한문 문장에만 용례가 있고, 한국어에서는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를 보면 우리말의 낱말 사용 비율은 토박이말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였다. 외래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한자외의 외국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가리킨다. 근대 이전에는 불경을 통하여 간접 차용된 산스크리트어(한자어 형태)를 비롯하여 몽골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차용어로 쓰였으며 (예를 들어 송골매), 일제강점기에는 영어와 독일어의 현대어를 한자로 차용하여 사용한 것들이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등 소수의 인도유럽어족의 어휘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으나 현재 사용 빈도는 매우 적다. 예를 들어 "Part time job"이라는 말을 일본에서 쓰던 독일어인 "아르바이트(Arbeit)"라고 부르며 원래의 아르바이트의 의미와 다르게 쓰인 말들이 있다. 현대에는 영어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영어로부터의 많은 차용어들이 쓰이고 있다. 문자.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된 문자 체계는 한자이다. 한문 유입 이후, 고유명사 표기 등 한국어 표기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으며, 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어순이 한문 어순이 아닌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되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여러 고안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임신서기석에 사용된 변칙한문체를 서기체 또는 의국체라고 한다. 단음절어이며 고립어인 한자는 다음절어이면서 교착어인 한국어의 표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 중에서 이두, 구결이 있었으며 향찰은 소멸하였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보다는 문어체의 한문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구어(한국어)와 문어(한문)의 이중 체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현재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 있었으나, 1940년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발견되면서 발성 기관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적고 있다. 한글을 이후 조선에서 소설이나 편지 등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국한문혼용)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 공식문자이고, 일부 한자어는 한자를 괄호에 넣어 병기하기도 하지만 한자의 사용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구 소련 지역에서는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가급적 한글로만 한국어를 표기한다.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는 여러 소수 민족 언어를 대상으로 한 로마자 표기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안을 승인했지만, 실제 로마자 표기안이 마련되어 생활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어 문자생활에서 로마자로 한글·한자를 대체하려던 방안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고유명사의 표기에 쓰는 현재의 로마자 표기 규범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로마자 두문자어 표기와 일부 고유 명사 표기에 로마자를 일부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방언. 한국어의 방언은 경기 방언, 영동 방언, 서북 방언,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동북 방언, 재미 한국어, 재중 한국어, 재일 한국어 등으로 나눈다. 경기 방언과 황해 방언, 강원 방언(영서 방언/영동 방언), 충청 방언을 중부 말로 합쳐 일컫기도 한다. 제주 방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방언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서울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표준어인 문화어는 분단 이전의 남한의 표준어에 기반을 두고 서북 방언의 어휘들을 추가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등 영어 사용 국가로의 이민이 늘어나면서 이민 2세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계 외국인들이 영어를 번역한 듯한 한국어(번역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어의 남북 간 차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약 80년 가까이 분단된 만큼 언어상의 특징도 소수의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서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는 없으며 소수의 단어를 빼고서는 모든 언어와 문법이 일치한다. 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건데기나 지팽이와 같이 'ㅣ'의 모음 역행 동화를 인정하는 경향이 크며,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두음 법칙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여자, 염원, 노동 대신 녀자, 념원, 로동과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문체나 구어체를 활용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어감이 강한 표현을 많이 쓴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찔리우다'와 같이 대한민국보다 보조용언을 겹쳐 쓰는 경우가 많으며, 접미사 '들'을 많이 쓰는 경향도 있다. 어휘 면에서는 특히 많은 차이를 보이며, 외래어 수용에 큰 거리낌이 없는 대한민국에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말다듬기로 고유어를 많이 사용한다. 외국어로서.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폴란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러시아 등지에서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국제적 위상의 확대와 한류 등의 문화적 영향력의 전파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과거에는 영어, 일본어 등 유럽, 미주 및 일본을 중심으로만 한국어 학습용 교재가 발간되었으나, 근래에는 한국어 학습 동기의 다변화와 국내 외국인 수의 증가로 중국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한국어 교재가 발간되고 있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이 발표한 '미국 국무부 외국어 직무수행 평가서'에 따르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와 더불어 한국어를 미국인이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superhard language)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 한국어의 여러 상이점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국어를 학문으로서 배운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국어 검정시험. 대한민국. 대한민국에는 현재 한국어 능력을 검정하기 위한 시험이 몇 가지 있다. 한국어능력시험(韓國語能力試驗,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 ; TOPIK), 국어능력인증시험(國語能力認證試驗, Test of Korean Language;TOKL), KBS 한국어능력시험(Korean Language Test) 등이 있다. 일본에서의 한국어 시험. 일본의 네 가지 한국어 시험 가운데 일본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험은 한글능력검정시험과 한국어능력시험이다. 한글능력검정시험을 뺀 나머지 모든 시험은 대한민국 표준어 시험이기 때문에 표준어가 기준이며, 이와 다른 문화어의 맞춤법이나 어법은 오답으로 처리된다. 이외 일본의 대학 입시 센터 시험에는 2002년부터 한국어가 포함되었다. 인터넷에서의 한국어. 한국어 문서가 전 세계 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에 4.1%로, 이는 영어(35.8%), 중국어(14.1%), 일본어(9.6%), 스페인어(9%), 독일어(7%)에 이어 전 세계 6위이다. 웹상에서의 한국어 사용 인구는 전 세계 75억여 명의 인구 중 약 1% 에 해당한다. 사용 빈도가 높은 낱말. 국립국어원은 지속적으로 사용 빈도가 높은 한국어 기초 어휘 관련 자료들을 연구 및 제공해 오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국어 낱말 단어를 수록한 "한국어 학습용 어휘" 6,000 낱말을 2004년 12월에 발표한 바 있으며 이후 이러한 자료를 세계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어기초사전을 통해 어휘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어의 어휘에 대한 사용 빈도 자료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학습 및 교육 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근거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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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르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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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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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한자(漢字)는 표어 문자의 하나로, 중국 대륙에서 발원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본토,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일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이다. 역사. 한자의 기원을 유추할 근거는 3,000년 전 사용된 금문과 3,300년 전 사용된 갑골문, 그리고 6,800년 전 사용된 도문인데, 일반으로 갑골문(甲骨文)을 한자의 기원인 글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비자나 여씨춘추와 같은 책을 보면, 한자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창힐은 상고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황제라는 설도 있고 황제의 사관이라는 설도 있다. 그 사람이 사물의 모양이나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자는 한 사람이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시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글자도 아니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1903년 은허에서 출토된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있다. 기원전 14세기 ~ 기원전 1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자는 당시 중대사를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 놓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 후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주문(籒文:大篆)을 만들었고 춘추 전국 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가 쓰이다가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문을 개량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한, 진의 옥리(獄吏) 정막(程邈)은 실무에 편리한 예서(隸書)를 지었고 한나라 때에는 이것을 계승한 한예(漢隸)가 문자로서 통용됐다. 춘추 전국 시대에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나 종(鐘)·정(鼎) 등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후한(後漢)에 이르러 왕차중(王次仲)은 한예를 간략화하여 해서(楷書)를 만들었고 이후 이것을 정서(正書)라 하여 표준 자체로 삼았다. 즉, 이사가 소전을 제정하여 문자 대혁신을 이룩한 후 300여 년이 경과하여 한자는 해서(楷書)로서 정립된 것이다. 목간과 죽간을 대체하여 필기구가 붓·먹·종이가 중심인 시대가 되자 해서가 중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모필(毛筆)로 쓰기에 편리한 초서(草書)와 행서(行書)가 나타났으며, 육조(六朝)와 당나라 때에는 서도(書道)가 문예의 일부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자의 역사, 특히 양식의 변천을 자형(字形)에 따라 고찰하면 갑골문자·금석문자·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 등 다섯 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해서 이후로는 오랜 시대에 걸쳐 변화한 흔적이 없다. 다만 서체(書體)로서 조형예술 성격을 띤 다양한 작풍이 나타났을 뿐이다. 한자의 제작 원리. 한자의 형성 과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육서(六書)라고 한다. 후한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한자를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등 여섯으로 나누어 한 설명이 현재 육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기초가 되었다. 한자 문화권.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은 2천년 이상 중국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을 펴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한글만을 쓰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성명(姓名), 학술용어,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축약어 등 한자어의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글을 쓴다. 현재는 중화권 국가들(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등)과 일본이 일상에서 한자를 사용한다. 한국.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한글을 쓰지만, 한국어의 단어 중 57% 정도가 한자어이며, 성명과 지명(地名)은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는 자주 쓰는 한자 1,800자를 지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의 90% 정도는 이들 한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학술 용어, 고문(古文) 해독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한자를 쓸 때는 거의 정체자로 쓴다. 일본. 일본어에서는 일본의 음절 문자인 가나와 함께 쓰인다. 일본의 한자는 1949년 일본 정부가 간략화한 신자체이며, 일본어 한자는 음독(音讀, 일본식 한자음)과 훈독(訓讀, 한자를 같은 뜻의 일본 고유어로 읽는 것)이 함께 쓰이므로 고유어도 한자로 나타낸다. 이 방식은 고유어를 보존하면서 음절 길이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자 읽기가 복잡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인명 등 고유명사나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한자 위에는 읽는 법을 다는 후리가나가 있다. 일본어에서 한자는 명사, 동사와 형용사의 어간 및 일부 부사에 쓰이고, 가나는 문법 기능을 나타내는 토씨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표기할 때에 주로 쓰인다.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대륙에서 중국어는 거의 간체자로 표기한다. (하지만 가끔씩은 외관상의 미를 위해 정체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외래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보통 정체자를 쓴다. 타이완. 타이완에서는 정체자를 써서 중국어를 표기한다. 한역. 다른 문자로 된 문헌을 한자로 번역하는 것을 한역(漢譯)이라고 한다. "한역"이라는 말은, 특히, 고대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특이한 한자. 실제로 한자는 제자 원리에 따라 무한히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있는 문자 중에서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기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니코드 5.0에 포함된 가장 복잡한 한자는 (수다스러울 절, U+2A6A5)로, 龍(용 룡)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고 16 × 4 = 64획이다. 이 한자는 조엘 벨라센(Joël Bellassen)(1989) 등에 따르면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어 한자 중 가장 복잡하며, 5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64획으로 (뜻 미상, 음은 정,八부 62획, U+2053B)이 있으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자는 興(일어날 흥)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다.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산시 성(섬서성)에서 유명한 면 음식인 뱡뱡몐을 가리키는 57획짜리 한자이지만 방언에서만 사용되는 문자로 취급되어 자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현대 한자 자전에 나오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코 막힐, 코를 킁킁거릴 낭)으로 36획이다. 이 밖에 일부 한자의 ‘고자’(古字)는 상당히 복잡한 경우가 있다. 그 예로 우레 뢰(雷)의 고자는 밭 전(田)이 가로로 4자, 그 밑으로 돌아올 회(回)가 가로로 4자 다시 밭 전이 4자로 된 것이 상하로 2개 있는 모양, 도합 128획이다. 그 이외에도 한국에서 만든 한자인 한국제 한자도 있다. 예로 논 답 (畓), 이름 돌 (乭) 등이 있다. 한국제 한자들은 중국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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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국회(大韓民國 國會,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 또는 대한민국 입법부는 대한민국 행정부와 대한민국 사법부와 함께 대한민국 중앙 정부를 구성한다.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 의회이며 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다. 본래 한국 제헌 헌법에서는 단원제,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제정된 제2호 헌법에서는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도록 제정되었으나 참의원의 구성이 늦어져 제2공화국 때에 비로소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 1963년부터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회가 부활하였으나 현재와 같이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어 구성되었다. 매년 9월 1일 정기 국회가 열리고 정기회·임시회의 100일 이내의 회기가 열린다. 이 기간에는 정치적 이슈가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경향이 있다. 구성과 조직. 현재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제2공화국 때에는 양원제를 채택하기도 하였는데, 민의원과 참의원을 두고 있었다. 직제. 각 상임위원회별로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있으며 수석전문위원은 차관보급으로 전문위원을 대표한다. 국회의 운영. 한국의 국회는 1년 동안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리는 미국, 영국 등의 의회와는 달리, 정기회·임시회의 회기로 열린다. 유신헌법 시절에는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1년 중 최고 150일까지만 열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82조). 현행 제도로는 연간 회기 일수 제한을 폐지하여 매일 국회가 열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제16대 국회의 경우, 본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임시국회가 5차례나 있었다. 즉 5달 동안 한 번도 본회의를 열지 않았다. 반면 미국 의회는 2년을 하나의 임기로 하여 전반 1년을 제1회기, 후반 1년을 제2회기라고 한다. 정기회 임시회의 구분이 없다. 대통령이 임시회 집회를 요구하는 일도 없다. 2년의 임기가 지나면, 하원은 전원, 상원은 1/3씩 단계적으로 선거를 하여 교체한다. 1년 내내 회기에 있고, 회기중에는 불체포특권이 있으므로, 사실상 의원은 임기 내내 불체포특권이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등이 연중회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제47조 국회의 권한. 입법에 관한 권한. 법률 제·개정권.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고 있으므로(제40조), 법률 제·개정권은 국회의 가장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헌법개정의 권한.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고(제128조 제1항), 대통령안과 국회의원안 모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이를 의결하며(제130조 제1항),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인다(제130조 제2항). 조약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제6조 제1항). 따라서 헌법은 중요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을 인정하고 있다(제60조 제1항). 재정에 관한 권한.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국가경비의 세입·세출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국회의 의결을 기초로 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재정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조세법률주의. 조세의 부과는 반드시 법률에 의거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여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법률로 정한다(제59조). 예산심의확정권. 정부는 회계년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년도 개시 90일 전에 국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국회는 회계년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제54조 제2항). 국회는 예산안의 심의에 있어서 정부예산안의 수정권은 가지고 있으나, 이 수정권은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전액의 삭감 또는 비목의 삭제에 그치는 것이 원칙이고,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금액의 증액 또는 새 비목의 설치는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이를 행할 수 있다(제57조). 예비비 의결과 지출승인권. 예비비는 총액으로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하며, 그 지출은 차기 국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한다(제55조 제2항). 기채동의권. 정부는 국채를 모집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국채에 대한 국회의 동의는 기채할 때마다 동의를 얻지 아니하고 연간의 예산총액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동의를 얻어도 된다.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에 대한 동의권.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이라 함은 국가가 1회계년도를 지나는 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채무를 부담하는 계약을 말한다. 결산심사권. 감사원은 세입·세출의 결산을 매년 검사하여 대통령과 다음 연도 국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제99조). 국회에서 의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 결과인 결산을 심사함으로써 국회의 재정에 관한 권한을 실효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 국회는 일반국정에 관하여 정부를 감시·비판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며, 이를 대정부 견제권 또는 정부통제에 관한 권한이라 한다. 국회의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으로는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 동의할 수 있는 임명동의권(제86조 제1항), 국무총리·국무위원출석요구권과 질문권(제62조 제2항),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권(제63조 제1항·제2항), 긴급재정경제명령과 긴급명령사후승인권(제76조 제3항), 계엄해제요구권(제77조 제5항), 선전포고와 국군해외파견·외국군 주류에 대한 동의권(제60조 제2항), 국정감사·조사권(제61조), 탄핵소추권(제65조) 등이다. 교섭단체. 국회에 20명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 교섭단체 제도의 목적은, 국회에서 일정한 정당에 소속하는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에 통합·조정하여 정파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의사 개진을 막는다는 단점도 상존한다. 단일정당으로 구성되지 않은 교섭단체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63년 6대 국회에서 13석의 민주당과 9석의 자유민주당과 2석의 국민의당이 공동교섭단체인 삼민회를 구성하였다. 2008년 18대 국회에서 18석의 자유선진당과 3석의 창조한국당이 공동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하였다. 2018년 20대 국회에서 14석의 민주평화당과 6석인 정의당이 공동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을 구성하였다. 2020년 20대 국회에서 18석의 민생당과 무소속 의원 4명이 공동교섭단체인 민주통합의원모임을 구성하였다. 국회 휘장. 1948년 이후 국회는 무궁화를 상징화한 꽃무늬 안에 한자 國(국)을 형상화해 삽입한 것을 휘장으로 사용해왔으나 한글이 아닌 한자를 국가 중요 기관의 휘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과, 동그란 테두리가 글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 國(국)이 아닌 或(혹)자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참의원은 휘장으로 한자 대신 한글 "국"을 삽입한 것을 채택한 바가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어 왔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14년 한자를 삭제하고 한글 "국회"를 삽입하는 새 휘장을 채택하는 안이 가결되었고, 현재 새로운 휘장을 사용하고 있다. 국회 입법정보서비스. 국민과 함께하는 스마트 국회를 목표로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의정환경을 조성하고 투명한 입법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열린 국회 서비스. 국민에게 국회의 현황과 의정활동을 신속하고 투명하게 제공하며, 입법과정에 국민의 편리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하여 아래의 정보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모바일 국회 서비스.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여 내 손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국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자국회. 국회의원의 효율적인 의정활동과 국회 직원의 편리한 업무수행을 지원하기 위하여 디지털본회의장시스템, 입안지원시스템, 의정자료전자유통시스템, e-의안시스템, 영상회의 시스템 등을 운영하고 있다. 비판. 몸싸움. 과거 대한민국 국회의 고질적 문제로 파행에 따른 몸싸움이 꼽혔다. 주요 법안들에서 여야가 갈등을 빚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러한 대립이 대화로 해결되지 못하고 강행 처리하려는 원내 다수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수 정당과 충돌로 몸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몸싸움은 1년에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으며, 각종 장비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물리적 충돌 방지와 관련한 법안이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여야간의 갈등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가 2012년 5월 제18대 국회 마지막 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몸싸움은 사라졌다. 허나, 2019년 12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안과 공직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안건에 국회선진화법을 무시한 채 국회에서 다시 몸싸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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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워드 프로세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주요 제품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83년 10월 25일 "Multi-Tool Word for Xenix systems"라는 이름으로 첫 출시되었다. 1983년에 MS-DOS용으로 워드1이라는 버전으로, 1985년에는 매킨토시용으로, 1989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rand()이라 치고 엔터 키를 누르면 도움말이 나온다. 기본 확장자. 워드의 파일 포맷은 오피스 오픈 XML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doc, .docx라는 확장자를 사용한다. 매킨토시용 제품. 워드 2004. OS X용으로 2004년에 출시되었다. 파워PC(PowerPC) 중앙 처리 장치에서 작동하도록 개발되었고, 인텔사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는 OS X의 로제타 기술로 워드 2004를 에뮬레이팅해 사용할 수 있다. 워드 2008. 2008년 1월에 로제타(Rosetta) 기술을 이용해 에뮬레이팅하지 않고도 인텔 중앙 처리 장치든 파워PC(PowerPC) 장치든 상관 없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유니버설 바이너리 버전으로 출시했다. 윈도우용 제품. 워드 2007. 워드 2007에 새로 나온 기능은 다음과 같다. 버전. MS-DOS용 버전: 매킨토시용 버전: 윈도우용 버전: SCO UNIX용 버전: OS/2용 버전: 점유율. 201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전세계적으로는 90%대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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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는 2004년 3월 12일에 국회에서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하에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을 대상으로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때 노무현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하였으며 노무현은 탄핵 소추 64일 만에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원인 및 경과. 2004년 3월 12일에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이에 동조하였으며,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탄핵 소추안 통과는 그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KBS, MBC, SBS 등 여러 방송사들은 탄핵 투표 당시 국회의 혼란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방영하였다.한편 전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 광화문 일대 등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를 벌였다. 2004년 5월 14일에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탄핵 소추안의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하며 지속적으로 충돌을 빚었다. 여론 및 탄핵 역풍. 탄핵안이 발의된 3월 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탄핵반대는 65.2% 찬성은 30.9%였지만 노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6%,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견은 30.1%로 엇갈렸다.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라고 밝혔다. 많은 국민이 당시 탄핵에 반발한 이른바 탄핵 역풍에 힙입어,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사실상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최초로 원내 과반을 차지하였다.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려 제4당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야당 내 탄핵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때 선봉자 역할을 한 '탄핵 5인방'이라 불리는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다. 총선 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삼보일배를 한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3김 가운데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추미애, 조순형과 친박연대로 복귀한 홍사덕은 차기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에 성공했으며 이를 근거로 탄핵에 대한 국민의 재평가가 내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조 전 대표의 당선으로 '탄핵 주역'이라는 멍에를 벗었다고 자평했다.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서 1명이 자살하고 1명은 분신하여 부상을 입었다. 심판. 2004년 3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심판을 시작했다. 소추위원 측과 피청구인 측 변호사, 그리고 그들이 요청한 증인들을 출석시켜 모두 7차례 변론을 진행하였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소추안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평가. 다수당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 등 다양하다. 이 사태는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못하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치게임을 벌였다며 정치불안과 국내 경제계의 충격과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 그에 따른 경제위기 등 파장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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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
촛불 집회( - 集會, )는 시민들이 광장 등에서 촛불을 들고 벌이는 집회이다. 주로 야간에 이루어진다. 세계 각 곳의 촛불 집회는 보통 비폭력 평화 시위의 상징이며, 침묵 시위의 형태를 띤다. 대표적인 것으로 1988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촛불 시위가 있다. 촛불시위는 시각적 효과가 크고, 일과를 끝낸 시민들의 참여가 용이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 대한민국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상 일몰 후에는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어 있음 문화행사 등을 예외로 하는 것을 이용해 문화제 등의 명목으로 촛불시위가 진행되었다. 문화제는 노래 등에 대한 대중공연의 형식이 가능하며 구호를 외치거나 피켓을 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이후 야간 집회 금지 사건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과 자정까지의 야간 시위 금지 위헌 결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야간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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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압사 사건
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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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구기 와 티옹오
응구기 와 티옹오( , 1938년 1월 5일 ~ )는 케냐의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이다. 응구기는 1938년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당시 "백인 고지()"로 불리는 고지대의 리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비옥한 고지대의 원래 주인이었다가 땅을 백인에게 빼앗긴 키쿠유 족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로 자라났다. (나중에 그는 영어와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름도 본명인 제임스 응구기에서 응구기 와 티옹오로 계명한다.) 캄팔라(현 우간다의 수도)의 마케레레 대학과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 사이의 강()', 한 알의 밀()'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식민지에서의 문화 충돌과 기독교의 역할, 영국의 키쿠유 족 등 아프리카인들 탄압, 식민 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반란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케냐 독립 이후로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강력히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77년에는 나는 원할 때 결혼하겠다()'라는 희곡의 정치권 풍자가 정권의 미움을 사 응구기는 대니얼 아랍 모이 당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수감 중에 그는 소설 피의 꽃잎()'를 집필하였다. 석방 후 1982년 케냐를 떠나 런던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1987년에는 대표작 마티가리(Matigari)'를 발표하였다. 후에 나이로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키쿠유어를 사용한 소설 집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에 발표된 '십자가의 악마(키쿠유어 : Caitaani muthara-Ini)'는 사상 최초의 키쿠유어 소설이다. 응구기는 참된 아프리카 문학은 아프리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부터는 뉴욕 대학(NYU)에서 비교문학과 공연학 교수로 있다.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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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율리시스(Ulyss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
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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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에서 2004년 5월 30일부터 4년 임기의 제17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이다. 2004년 4월 15일 목요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을 선출하였다. 선거 개요. 민주당 정권 2기 출범부터 시작해서 3김시대의 종식과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민주당-열린우리당 간의 분열, 제1야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김대중 정부의 4천억 불법 대북 송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를 시점으로부터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변경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도입했다. 지역구 선거구 조정. 서울특별시는 성동구,노원구 갑·을,송파구 갑·을은 선거구 인구수 초과으로 인해 각각 성동구 갑·을, 노원구 갑·을·병,송파구 갑·을·병으로 분구한다. 경기도는 수원시에 영통구가 신설되면서 수원시 팔달구에서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 영통구 선거구가 분구되었다. 안양시 동안구는 안양시 동안구 갑·을, 의정부시는 의정부시 갑·을,남양주시는 남양주시 갑·을,광명시는 광명시 갑·을으로 분구하였다. 화성시·오산시는 인구 증가되어서 화성시, 오산시의 단독 선거구로 분리한다. 반면 단독 선거구였던 이천시와 여주군은 선거구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이천시·여주군으로 통합하고 반면 연천군·포천군, 광주군, 과천시·의왕시는 포천시-연천군, 광주시, 의왕시·과천시으로 명칭변경을 한다. 인천광역시 계양구를 계양구 갑·을로 분구한다. 부산광역시 남구는 부산 남구 갑·을으로 분구하고 울산 남구는 울산 남구 갑·을으로 분리하고 경남는 김해시, 진주시를 각각 김해시 갑·을,진주시 갑·을으로 분리한다. 대신에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의령군·함안군, 함양군·거창군, 산청군·합천군이 의령군·함안군·합천군과 산청군·함양군·거창군으로 조정되었다. 대구광역시는 대구 동구, 대구 달서구 갑·을이 각각 대구 동구 갑·을,대구 달서구 갑·을·병으로 분리하게 된다. 경북은 단독선거구였던 구미시는 인구수 초과으로 인해 구미시 갑·을으로 분구되며 고령군·성주군과 칠곡군은 인구수 미달으로 인해 칠곡군·성주군·고령군으로 통폐합이 되었었다. 군위군·의성군, 봉화군·울진군, 청송군·영양군·영덕군은 군위군·의성군·청송군과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광주광역시는 서구가 서구 갑·을으로 분리되고 전라남도의 여수시는 인구 초과로 여수시 갑·을로 분구되었다. 반면, 나주시, 고흥군, 보성군·순군이 나주시·화순군, 고흥군·보성군으로 조정되었다. 전라북도는 전주시 완산구, 익산시는 인구수가 초과되어서 전주시 완산구 갑을,익산시 갑을으로 분구되었다. 반면 김제시, 완주군·임실군, 진안군·장수군·무주군이 김제시·완주군, 진안군·장수군·무주군·임실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충남는 부여군, 청양군·홍성군, 예산군이 부여군·청양군, 홍성군·예산군으로 구역 조정되었고, 논산시·금산군은 계룡시가 신설되면서 논산시·계룡시·금산군으로 선거구 명칭를 변경했다. 충북는 청주시 흥덕구가 인구수가 초과되어서 청주시 흥덕구 갑·을으로 분구했으며 진천군-괴산군-음성군은 증평군 신설으로 인해 증평군-진천군-괴산군-음성군으로 선거구 명칭를 변경했다. 강원는 태백시·정선군과 영월군·평창군이 선거구 인구수가 미달되어서 태백시·정선군·영월군·평창군으로 통폐합되었고, 속초시·고성군·양양군·인제군과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이 속초시·고성군·양양군과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으로 구역 조정되었다. 제주는 제주시,북제주군은 북제주군이 인구수 미달되어서 제주 지역의 일부를 편입해 와 제주시-북제주군 갑·을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반면 대전광역시의 변동 사항은 없다.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초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뒤처지던 지지도가 역전되어 2위로 올라섰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과 경합 내지는 근소한 차이로 1위로 올라서는 선전을 펼쳤다. 이에 일각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수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제1당은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이 나왔는데, 2004년 3월 12일에 터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에 힘입어 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하였고,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하고 여기에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정동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 사퇴 및 비례대표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총선 결과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16대 대선에서 대권 강력후보 이회창은 대선 2번째 도전에서 결국 패배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여 떠나고 야당 생활은 계속 이어 갔다. 그러나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새천년민주당, 자민련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였다. 이후 전당 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 의원을 제치고 총선에서의 승리를 공약한 박근혜 의원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근혜는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목표 개헌 저지선 100석 이상 확보 및 거여 견제론에 바탕하여 선거 운동을 펼쳤고,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원내 121석을 확보하여 선거 운동 기간 초기에 예상되었던 참패는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의석수 100석 미달하면 보수 우파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다. 허나 지역구 의석수 100석 가운데 60석 정도는 텃밭이던 영남권 지역으로, 비영남권 지역에선 서울 강남권, 강원, 경기 동남부 지역 중심으로 40석 밖에 못얻었다는 한계는 보였다. 사실 이것도 범여권이 분열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그리고 이후 한나라당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새로운 차기 대선주자로 떠오르며 본격적인 친이, 친박 계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權永吉) 대표의 지역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승리하였고, 13.0% 정당투표 득표율로 무려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공동으로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반발로 지지도가 급락하는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호남 지역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졌고, 이어진 당내 내분의 결과 추미애가 새천년민주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다. 추미애는 광주광역시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지지세 회복을 도모했지만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에서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전라남도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어 원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충청권에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고 이를 실현에 옮기려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연합이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데 대해 충청권의 민심은 냉랭했고 그 결과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충청남도에서 겨우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은 비례대표 순위 1번으로 등록하여 국회의원선거 10선 달성을 목표로 했지만 지역구 의석이 4석에 그치고 비례대표 득표 역시 2.8%로, "비례대표 득표율 3% 이상 또는 지역구 5석 이상"인 비례대표 의석 배분 규칙에 미달하여 원내 입성이 좌절되어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선거 결과. 비례대표 득표 결과. 국회의원 정당명부 비례대표 56석의 의석 배분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지역별 비례대표 득표. 열린우리당은 당초 170석, 많게는 200석까지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턱걸이하는데에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박근혜의 지도 아래 기사회생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데에 성공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중에선 최초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이 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경우, 4석을 얻는데 그쳤고 봉쇄조항을 넘기지 못함으로써 비례 1번이었던 김종필이 낙선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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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3번 (베토벤)
《교향곡 제3번 내림마장조, 작품 번호 55》(또한 영웅 교향곡이라는 부제로도 알려짐. ; )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세 번째 교향곡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베토벤의 혁신적인 중기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802부터 1804년에 걸쳐 쓰인 이것은 교향곡의 형식, 길이, 화성, 감정과 문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고, 더불어 첫 번째 낭만주의적 교향곡으로 간주된다. 작품의 초연은 1828년 3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에 의해 베토벤의 교향곡 중 첫 번째로 이루어졌다. 역사. 배경 및 작곡.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는 것을 의도로 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무급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럽의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아이디어는 1798년 빈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또는 베르나도트의 측근으로서 방문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헌정자 루돌프 크로이처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작곡가 자신의 것이었다. 리스의 설명처럼 베토벤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처럼 나폴레옹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804년 초 악보를 완성했을 때 그는 표지에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고 썼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원고를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 보나파르트는 베토벤과 단 1년 차이인,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감탄을 자아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거의 의식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운명 사이에서 수평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보나파르트의 모습으로 구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감탄했다. 베토벤은 빠르면 1789년에 영웅주의의 교향곡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펜을 들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1801년 자신의 청각 장애를 인식하고 난 후 그 해 여름 빈 기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예술만이 나를 붙잡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 단계에서 내면의 투쟁을 선언했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향곡의 작곡은 공식적으로 1803년 5월에 시작되었고 1804년 초에 완료되었다. 주된 작업 시기는 베토벤이 바덴바이빈과 되블링에서 보내던 1803년 여름(6월/10월) 즈음이다. 나폴레옹에의 헌정 철회.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웅" 교향곡이라는 부제는 원래 교향곡에 할당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베토벤은 그것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었으며, 1804년 경 빈에서 파리로 이동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잠시 후에 일어난 작곡가와 악보에 관한 일화에 관하여는 여러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제목을 너무 세게 지워서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 구멍이 뚫어졌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러뜨릴 정도의 힘을 가하여 펜으로 제목을 흐리게 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책상으로 뛰어올라가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잡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1838년의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스의 황제(1804년 5월 14일)로 선포한 것에 대한 그의 스승의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교향곡을 쓰면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대 집정관 시절의 보나파르트를 생각했다. 당시 베토벤은 그에 향한 큰 존경을 가졌고,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들과 비교했다. 나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가까운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테이블에서 이 교향곡을 보았는데, 원고를 아름답게 베껴 적었다. 제목 페이지 맨 위쪽에는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했고, 그는 이에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군! 이제 그도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을 탐닉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폭군이 될 것이다!" 베토벤은 테이블로 가서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쥐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 페이지는 다시 만들어야 했고, 교향곡은 "영웅" 교향곡이라는 다른 제목을 부여받았다.그러나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찢었다고 하는 일화는 리스의 회고록 이전에 1836년 3월 18일 런던 매거진 "The Musical World" ("음악계")의 기사와 베토벤과 개인적 연분이 없었던 에른스트 오르틀레프의 1836년 베토벤 소설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프랑스 혁명은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교향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인 프랑스 집정관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읽어야 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뜯어내었고 "Symphonia" ("영웅") 또는 "Sinfonia Eroica" ("영웅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있는 다른 페이지를 만들었다. 현존하는 사본의 악보에는 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흔적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문구가 나타난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된 "Intitolata Bonaparte" ("제목 보나파르트")가 있고, 두번째로 독일어로 된 "Geschriben auf Bonaparte" ( "보나파르트를 위해 씀")가 이탈리아어 부제 아래 네번 째 줄에 있다. 이것은 현재 빈의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악우회")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의 자필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연. 1804년 6월 9일 몇 달 동안 공연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획득한 로브코비츠 공작의 궁전에서 비공개로 초기 리허설과 사적 연주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부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수수료 청구서에 문서화되어 있으며, 영웅에서만 요구하는 세 번째 호른이 관련되어 있음이 명시되어 있다. 공작의 카펠마스터 안톤 브라니츠키가 제출한 1804년 6월 9일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은 두 번의 리허설을 위해 22명의 추가 음악가를 고용했음을 보여준다. 첫 공공 연주회는 1805년 4월 7일 안 데르 빈 극장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연주회에서는 그의 친구 프란츠 클레멘트가 주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출판 및 헌정. 1806년 10월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때, 베토벤은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 un grand'uomo"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탈리어어 부제가 부여되었다. 이 위대한 사람은 이상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보다 베토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웅주의 정신 그 자체였다. 헌정은 베토벤의 고귀한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이루어졌다. 의의. 이 작품은 고전주의 음악의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교향곡에 비해 길이는 2배에 가깝다. 첫 번째 악장은 (주제 제시부의 반복과 함께) 고전주의 교향곡과 거의 비슷하다. 주제적으로는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보다 더 많은 감정적 근거를 다루고 있으며 19세기 초 서양 예술 음악을 정의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과도기에서 중요한 이정표룰 세우고 있다. 두 번째 악장은 특히 장례식 행진 주제의 비참함에서부터 더 행복하고 중요한 주요 에피소드의 상대적 위안에 이르기까지 큰 감정적 범위를 보여준다. 피날레는 비슷한 감정적 범위를 보여주며 당시에는 들어 보지 못한 주제별 중요성이 부여된다. 초기 교향곡에서 피날레는 빠르고 산뜻한 결론이었다. 여기서의 피날레는 긴 변주와 푸가이다. 악기 편성. 작곡 당시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편성에서는 호른이 2개 또는 4개였지만, 이 곡은 호른이 3개인 편성을 택했다. 제3악장 트리오에서는 이 3개에 의한 연주가 이루어진다. 악장 구성. 연주 소요 시간은, 20세기 중반에는 제1악장의 반복을 포함하여 약 52분 정도의 연주 소요 시간이 많았지만(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20세기 후반부터 고대 음악의 융성에 의한 연주 양식의 역사적 고증의 진전에 따라 베토벤의 메트로놈 지정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 반복을 포함하여 42분부터 48분 정도의 연주가 늘고 있다. 제1악장의 거대한 전개부와 2전개부에 필적하는 코다, 제2악장에는 가곡풍 악장 대신 장송행진곡, 제3악장에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단 이는 《1번》과 《2번》에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는 론도풍 피날레 대신 변주곡이 배치된다. 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내림마장조, 3/4박자. 서주 격으로 두 번 꽝꽝 때려주고 시작하는데, 주제 두 개를 던져주는 것은 고전 시대와 마찬가지지만 그 주제를 주물러대는 전개부는 무려 200 마디를 훨씬 넘을 정도로 확장되어 있다. 길이만 길어진게 아니라 리듬의 파격, 불협화음, 잦은 조바꿈 등으로 거의 폭력적인 인상까지 주고 있다. 물론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몇몇 교향곡들의 전개부에서 다양한 조바꿈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대개 원 조성의 4도 혹은 5도권 이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고 이렇게까지 길고 터프한 전개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주제를 다시 내놓는 재현부나 마무리짓는 종결부도 기존의 것과 달리 많이 변화시키고 있다. 애초에 내림마장조는 신성한 것을 찬양하는 데나 쓰였던 장조인데 이를 인간을 위해 가지고 내려왔다는 데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1악장의 첫 번째 주제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나 좀 과하게 보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서도 그 단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여담으로 본 교향곡의 제1악장은 모차르트의 후기 3대 교향곡 중 하나인 《39번 교향곡》의 제1악장과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코다의 트럼펫 제1주제에 대해. 과거에는 일반 악보에서 코다의 655 마디부터의 주제를 트럼펫이 끝까지(662 마디까지) 불도록 한스 폰 뷜로에 의한 개편을 채택하는 지휘자가 많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본래의 원본 형태로 연주하는 식도 늘고 있다. 이 코다의 주제에 대해서는 원본에서는 트럼펫이 657 마디 3박 째부터 주제를 벗어나 B♭ 음을 연주한다(E♭ 관이므로 기보는 G 음). 당시의 트럼펫에서는 주제를 통해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사용하던 트럼펫의 자연 배음열에서도 658 마디가 높은 B♭ 음까지는 655 마디 시작시의 형식 그대로 2개의 트럼펫이 1옥타브 차이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은 가능하다. 659 마디부터 662 마디에 걸쳐서는 제2트럼펫의 음역에서는 배음열에 포함되지 않는 음이 많아 당시의 트럼펫으로는 불 수 없다. 제1트럼펫의 고음역에서는 659 마디 1박 째의 높은 F(기음은 D)는 배음 계열 음이므로 불 수 있고, 659 마디 3박 째의 높은 A♭(기음은 F)는 배음 계열 음에서는 A(기음은 F#)가 되어버리지만 입술의 피치 조정으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이 곡의 제2악장을 비롯해 자주 사용되는 소리이다. 다만 일본의 음악평론가 가네코 겐지는 "음정적으로 #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꺼려했을 가능성이 강하다"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제2악장이 "장송행진곡"으로 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자 첼리스트인 아르농쿠르는 트럼펫의 탈락을 "영웅의 추락(죽음)"로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덧붙여서 베렌라이터 신판에서는 브라이트코프 구전집에서 8분음표의 새김이었던 658 마디의 낮은 B♭ 음이 정서 악보를 기초로 하여 불기 위해 부점 2분음표로 바뀌고 있어, 658 마디까지는 1옥타브를 내려 주제를 불게 되므로 트럼펫이 선율 도중에 갑자기 탈락하는 양상은 되지 않는다. 겐지는 657 마디부터 658 마디에 걸친 높은 B♭ 음을 피하고, 그 후 주제가 아닌 낮은 B♭를 불게 한 것은 "영웅의 추락"이 아니라 단지 트럼펫의 고음의 날카로운 음색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440 마디부터 443 마디의 주제 연주에 있어서도, 트럼펫은 442 마디에서와 같이 멜로디 라인이 무너져 있다. 베토벤 교향곡 작품에서 이 높은 B♭ 음이 사용되는 것은 《6번 "전원 교향곡"》 4악장의 뇌우 장면, 85 마디와 《8번》 4악장의 330 마디부터 333 마디 뿐이다. 제2악장.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Marcia funebre: Adagio assai). 다단조, 2/4박자.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 이라고 달아놓았는데, 나폴레옹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층 달아오른 기분을 한번에 주저앉히는 효과를 보이는 무겁고 어두운 대목인데,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런 조용하고 어두운 정서를 유지하고 있으나 중간에는 다단조와 반대되는 조성인 다장조로 한층 밝아지게 되고, 후반에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강음을 시작으로 한, 결코 다크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매우 드라마틱한 악구가 등장한다. 느린 악장에 단조 조성을 사용하는 것은 이전에도 꽤 자주 볼 수 있던 시도였지만, 이 정도로 확장되고 비극적인 감정 이입을 시도한 예는 없었기 때문에 이것도 중요하다. 이 장송행진곡의 반주에서 등장하는 소위 "운명의 동기"는 이후 《5번》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5번》의 스케르초 악장이 1803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작품과도 무관하지는 않아보인다. 제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Scherzo: Allegro Vivace). 내림마장조, 3/4박자. 전작인 《2번》과 마찬가지로 스케르초인데, 템포가 훨씬 빨라져 4분음표 세 개가 한 박으로 취급되는 스피드를 보여준다. 중간 부분에서 호른 3개가 불리는 사냥 나팔식 악구가 튀어나오는 부분이라던지, 처음 부분이 다시 반복되는 대목에서 갑자기 박자를 확 바꿔 진행하는 부분 등도 꽤 신선한 대목이다. 제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Finale: Allegro Molto). 내림마장조, 2/4박자. 특이하게 주제 하나를 내놓고 여러 방법으로 가공하는 변주곡 형식을 썼는데, 그 주제가 예전 작품들에서 이미 여러 번 사용한 멜로디라서 재활용이 비교적 적었던 베토벤의 창작 방식상 꽤 이례적인 경우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냥 변주만 죽어라 하는 것도 아니고, 텐션을 주기 위해 푸게타(짧은 푸가)를 도입하거나 소나타 형식의 전개부 원리를 응용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보여준다. 각주. 주석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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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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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반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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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헤이그(, )는 네덜란드의 정부 소재지이다. ‘헤이그’는 영어식 이름이다. 네덜란드어로는 덴하흐( )라고 하며, 정식 명칭은 ‘백작가의 사유지’라는 뜻의 스흐라벤하허()이다. 네덜란드 서쪽 북해 연안에 있으며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역사.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백작 플로리스 4세가 사냥하는 곳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Hofvijver) 연못 쪽에 땅을 구입했을 때인 1230년경 시작했다. 1248년 네덜란드의 백작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것으로 예상한 윌리엄 2세가 사냥 터를 궁전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궁전이 완성되기 전인 1256년 죽었지만 그곳의 여러 부분이 그의 아들 플로리스 5세에 의해 마무리 되었고 그중 아직도 남아있는 '기사의 홀'을 뜻하는 Ridderzaal은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이다. 아직도 군주가 하는 연례 및 연설 등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사용 중이다. 행정. 네덜란드의 모든 정부 부서와 대법원, 그리고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이 헤이그에 있다. 헤이그에는 또 다음과 같은 여러 유엔 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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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열린우리黨, 약칭 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2003년 11월 11일에 결성,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었다.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당의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로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 시대적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수도 이전을 주장했으며, 2004년 주류정당들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2004년 총선을 통해 1988년 이래 최초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되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야당과의 충돌이 일었고, 2005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의 거부로 대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한길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호남기반의 민주당과 합당하자는 수많은 대통합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에 이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 · 합당되었다. 역사. 창당 과정. 2003년 7월 7일에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등 개혁파 의원 5명과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이종걸, 천정배 총 35명, 9월 23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덕규, 배기선, 10월 23일에 유선호, 오영식, 우상호, 채상현이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11월 1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규, 11월 3일에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하여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 속에 2003년 11월 11일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2004년 3월 8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승국과 3월 3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조성준이 3월 30일에 입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초 민주당을 깨서는 안 된다며 신당 창당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대부분의 민주당 내 친노 및 개혁파 세력이 탈당을 결심하자 결국 열린우리당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창당 초기.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하여 1위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9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표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3월 12일 한나라당 소속의 박관용 국회의장이 국회경비대를 동원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표결을 진행시킴으로써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연합하여 통과시킨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부정적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을 비판하고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 기각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리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같은 해 4월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그 해 5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중 3명만이 인용 의견을 내고, 5명이 기각, 1명이 각하 의견을 냄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한다고 판결하였다. 2004년 총선거~2005년. 한때 정동영 당 의장의 "60대 이상의 노인들은 투표 하면 안된다"는 노인 폄하발언 논란으로 제1당 달성이 어렵게 보이기도 하였으나,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의 비례대표 후보 사퇴 등 최선의 대응을 통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회 과반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권한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였고, 한나라당의 ‘도덕성’ 문제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 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천정배 의원이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121석의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에 완강하게 맞섰다.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내에 4대 개혁 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초, 당의장을 맡게 된 임채정 의원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선진사회협약 체결>을 제시하였으며 1월에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 4월 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장 취임직후 실시되었던 4월 재보궐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2005년 10월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겸임 선출하였다.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혁 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뿐만아니라 민주당, 민주노동당도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수석부대표는 "한나라당과 차라리 합당할 것을 권고한다"면서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선을 그었으며,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고 비판하였다. 8월 1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데 대하여 "지역주의 집착당임을 재확인해준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 대한 당내 호남권 일부 의원들의 반발과 관련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이날 상임중앙위원회의 직후 브리핑을 통해 "박 대표 회견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2006년. 2006년 1월 2일 정세균 의원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당의장을 사퇴함으로써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국민적 지지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원들은 어려운 당상황을 극복하고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하였다. 2006년 1월 당시, 한나라당은‘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앞에서 끊임 없는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당은 국회정상화 노력을 통하여 2006년 2월 임시국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지방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였다. 우리당은 결국 2006년 5월 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에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했으며, 정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리당은 지지자와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정치를 위한 최우선과제가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단결, 대통합신당의 건설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민주당과의 재통합, 시민사회 등 다양한 연대 등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대통합신당 건설을 앞당기고자 하는 고민속에 당의 일부는 탈당을 선언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1월 23일 최재천, 이계안, 1월 28일 천정배, 1월 30일 염동연, 2월 3일 정성호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였다. 2월 6일에는 소속 국회의원 23명 집단 탈당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의회 제2당으로 변모하였으며 2007년 6월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과 2007년 대선승리를 위한 전 당원의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하여 2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정세균 당의장을 선출하였다. 아직 낮은 국민지지도와 일부 의원들의 집단탈당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속에서 전당대회가 자칫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우리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모인 약 72%의 당원들이 참석하여 <대통합을 통한 2007년 대선승리>를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였으며, 이들에게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18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공식 의결하였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시민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2007년 8월 5일에 창당된 정당이다. 2007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하였다. 2007년 8월 21일 열린우리당 사수파 당원들로 구성된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합당수리 무효확인 가처분 및 본안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장에서 "우리당 당규에 따르면 전당대회 5일 전인 8월13일까지 대의원 명부를 확정하도록 돼있다"며 "그러나 당 지도부는 8월15일에 가서 재적 대의원 5천347명을 확정했고 다시 전대 당일인 18일 재적 대의원을 5천200명으로 임의 보고해 합당을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당 지도부가 우리당 당헌.당규를 명백하게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불법과 반칙으로 얼룩진 8.18 전대는 원천무효"라고 덧붙였다. 2007년 8월 30일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열린우리당이 추구한 정치.정당 개혁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당의 법통과 정통성을 온전히 승계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에 열린우리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를 등록했다"고 밝혔다. 계파. 주로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친노와 비노 실용파 친정,영진 성향의 친김근태, 중도보수 성향의 친고건계와 중진인 광장파 등이 있다. 2007년 들어 통합신당 움직임이 보이면서 대통합파와 당사수파로 분열하였다. 비판.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은 "영남 패권정당을 노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며 "만일 한나라당과의 연정이 성사된다면 과거 3당 합당 때처럼 호남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차라리 그럴바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선거제도 개편에는 동조하나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정부 부정. 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도청 문제를 가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격하시켜 DJ와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북송금특검으로 6·15 남북 공동선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구냉전세력인 한나라당에 팔아넘긴 천박한 인식이 있다”고 비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탈당파들과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했다. 호남 민심 이반. 민주당에 밀려 호남의 지지율이 낮아진 것은 국민의 정부를 부정하는 등의 호남 소외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국론 분열. 보수파들은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청산 등의 일련의 개혁이 국론분열시킨다"면서 "모든 국력을 경제와 안보 등의 현안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주장한다. 열린우리당을 분열과 실패의 상징으로 규정하며 탈당파, 국민중심당, 민주당원들은 反한나라당 대통합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해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친노세력과 당내 사수파는 "지역주의 야합"이라며 비판하며 열린우리당으로의 대통합을 요구했다. 역대 전당대회.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2003년 11월 11일, 우리당 창당대회는 모든 공직후보를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뽑고 지도부도 당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당헌을 채택한 뒤, 김원기, 이경숙, 이태일 창당준비위원장들을 공동 임시의장으로 추대했다. 열린우리당 제1차 전당대회. 2004년 1월 11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열린우리당 제2차 전당대회. 2005년 4월 2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문희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열린우리당 제3차 전당대회. 2006년 2월 18일, 우리당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70%, 당원 여론조사 30% 예비경선을 통해 8명으로 압축한 후보들에 대해 선거인단이 1인 3표로 투표한 결과, 정동영 전 의장을 비롯한 5명을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열린우리당 제4차 전당 대회. 2007년 2월 14일, 2/3에 가까운 소속 의원들의 탈당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세균 전 원내대표를 새 의장으로 추대하고, 추대된 지도부에 대통합신당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 2007년 8월 20일, 통합신당과 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는 열린우리당의 대통합민주신당 흡수합당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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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자유한국당(自由韓國黨, )은 1997년 11월 21일부터 2020년 2월 17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상징색은 빨간색이었으며 2020년 2월 17일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여러 정당들이 미래통합당(현재의 국민의힘)으로 통합되어 소멸되었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을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다. 한나라당은 대선 정국과 외환 위기로 혼란스러웠던 김영삼 정부에서 여당이었다가 자당 대선 후보 이회창이 한 달 후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이 되었다. 이후 영남권에서 반DJ 여론이 높아짐과 동시에 개혁에 앞장서서 이회창이 이끈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선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이 또 패배해서 야당 위치에 계속 있게 되었다. 박근혜가 이끈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악재로 작용하여 패배하였다. 그러나 박근혜가 이끈 2006년 지선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선에서 자당 대선 후보 이명박이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면서 다시 여당으로 자리잡았으며, 2008년 총선 때도 압승을 거두어 여대야소 정국을 형성하였다. 이후 촛불 시위와 2009년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자살 등 잇따라 당이 위기에 놓였으나, 박근혜가 이끈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자당 대선 후보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여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7년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가 탄핵이 되어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상당수 보수 유권자들이 이탈하면서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선에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를 제외하고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본래 한나라당 내에는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 곧 민주정의계(민정), 통일민주계(민주), 신민주공화계(공화)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많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민주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민주 계열은 2003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친박연대로, 또한 심대평과 같은 충청도 출신 보수 계열의 의원들이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이전까지의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꾸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제도권 보수정당 중에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미래통합당 출범 이전 원내 최장수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명칭을 쓰던 1997년부터 이어져 왔었다.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깊어지고,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한 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비박계의 동조로 가결된 이후 갈등이 커지면서, 비박계 29명이 이탈하여 바른정당, 친박계인 조원진이 이탈하여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 역사. 한나라당 출범 이전. 민주자유당 창당에서 민주계의 당권 장악.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허나 이것은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분당에서 한나라당의 출범까지.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면서 공화계의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상목, 박희태, 강재섭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한나라당 출범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 야당으로의 몰락과 이회창의 활약. 1997년 11월, 과거 대법관 시절부터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취지로서 소수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는 이회창이 이끄는 신한국당이 조순이 이끄는 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고 대선 직전에는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등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북한 인사와 접촉하여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총풍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총풍 사건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음).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과 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 대선 패배와 계속되는 야당 생활.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탄핵 역풍과 17대 총선 패배.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이회창이 대선 출마를 위해 총재직에서 물러나자 서청원이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서청원 대표 역시 차떼기 사건으로 사퇴하자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이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차떼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다수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도 노무현 대통령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민주당의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개혁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노무현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것이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10%대까지 추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서청원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킨 역풍으로 최병렬 대표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탄핵 기간에 국내 정당으로써는 최초로 한나라당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인터넷 한나라당 당원'을 모집한다. 인터넷 한나라당 당원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젊은 층에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당비 납부 의무는 없었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23일,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박근혜는 탄핵 역풍 속에서 한나라당을 구해내긴 했지만, 제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여당을 향한 압박에서 정권 교체까지.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대표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지지율 추락과 친이계의 몰락.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특히 서울에서 48석 가운데 40석을 차지했지만 충청지역에서 야권에게 패배했지만 일단 친여 성향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4개월 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선거 3개월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안보 이슈에 상당한 호재를 받았지만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최구식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수행비서관이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 선관위를 디도스로 공격한 데다가 야권연대 등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새누리당으로 개명과 정권 창출. 새누리당으로 개명.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었다. 19대 총선 승리와 정권 연장.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2017년 1월 바른정당이 출범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세월호 침몰 사고, 그리고 재보궐선거의 연전연승. 박근혜 취임 이후 새누리당은 계속해서 재보궐선거에서 연승했지만 2014년 4월 16일에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면서 위기에 몰렸고, 결국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패배했다. 다만 기초단체장 선거는 117곳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15명을 뽑는 다음 달 7.30 재보궐선거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에서 사상 처음 전남 곡성-순천 지역구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선되었다, 11명 당선되어 의석수 157석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이 강화되었다. 20대 총선에서 16년만에 여소야대 그리고 참패.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공천권 문제와 계파간의 갈등,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치·정책 방식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오히려 여당·대통령의 지지율는 정체되어 가고 심지어 공천을 받지 못한 이재오, 유승민, 주호영, 윤상현, 권은희, 류성걸, 강길부, 김태환 의원 등은 상향식 공천을 문제삼아 대거 탈당하고 심지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서울 용산구의 진영 의원도 역시 새누리당에서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송광호, 박상은, 조현룡, 심학봉 의원마저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의석수도 감소되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원내 의석수도 146석으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120~140석 정도 획득한다는 전망과 함께 수도권에서 야권에게 참패할 것이 예상되었고 심지어 영남권도 야당, 무소속 후보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패배를 예상했다. 결과는 그대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122석을 얻어 원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전국 유권자가 과반이 넘는 수도권에서 1여다야 구도 속에서 완패했으며 특히 서울에는 1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는 13대 총선 민주정의당이 세운 10석보다 못한 것으로, 최악의 성적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통적 강세 지역인 강남3구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7석을 모두 차지했는데 20대 총선에서는 3곳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내주고 경기도에서 60석 가운데 19석만을 차지하고 인천에서도 4석만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영남지역에서 전통 텃밭 대구·경북에서 대구에서 3곳에서 패배하고 부산에서 6곳에서 더민주, 무소속 후보에게 헌납하고 경남에서는 4곳과 울산 3곳에서도 야권·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호남권에서는 전남 순천시에서 이정현, 전북 전주시 을에서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누리당은 호남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반면 제주도에서 야당 후보에게 완패하며 3회 연속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논란 끝에 지도부가 사퇴하고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친박계는 탈당파의 복당에 반대했지만 개원 이후 6월 16일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소속 정당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던 강길부·유승민·안상수·윤상현의 복당을 승인했고 주호영·장제원·이철규의원에 대한 복당은 6월 23일에 승인했다. 그러나 조해진·류성걸·권은희 전 의원등 친유승민계 낙선자에 대한 복당은 승인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분당과 바른정당의 창당.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탈당자가 생기는 등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비박계와 일부 친박계는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거대야당과 동조했고, 국회에서 이들의 동조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친박계인 이정현 대표가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지 않았고, 이후 치뤄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친박계 정우택 의원이 선출되면서 비박계 의원 30여명이 2016년 12월 말 대거 탈당하여 보수 정당 사상 최초로 분당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12월 16일 의원총회에서 119표 중 62표를 얻은 친박계의 정우택이, 55표를 얻은 나경원을 누르고 원내대표가 되고, 이정현 대표가 사의를 밝혀 대표대행이 되었다. 이후 윤리위원 문제는 추가 인선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나 비상대책위원장 인선 문제로 비박계와 친박계가 대립하였다. 비박계는 유승민을 비대위 위원장으로 선임할 것을 요구했으나 친박계가 거부하였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5명은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21일 발표하였다. 2016년 12월 27일 비박계 29명이 탈당해 또 다른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을 결성한다.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 변경.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3월 31일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19대 대선 패배로 9년 5개월 만에 야당 생활 시작.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밀릴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적지 않은 격차로 2위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19대 대선 직전, 홍준표 대통령 후보의 당무 우선권 발동에 따라 옛 새누리당에서 탈당했던 바른정당 국회의원 12명과 2017년 1월에 탈당했던 정갑윤 의원까지 의원 13명이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면서 일단 개헌저지선 100석을 회복했고 보수층이 막판에 결집하는데 불구하고 결국 2위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대경권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 부울경에서 2위, 수도권에서 3위를 기록하는 등 처음 추세에 비해 선전하긴 했지만 호남권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2백만표 차이로 참패를 당했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558만표 차이로 패배하면서 지난 17대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집권여당 생활은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개표 초반쯤 자유한국당 당사를 찾아가서 기자회견을 통해 홍준표는 이번 대선 패배를 승복했고 자유한국당 복원하고 보수우파의 잃어버린 자존심를 일으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홍준표가 대선후보 자격으로 당헌 104조의 당무우선권에 따라 복당을 승인한 것과 친박의원 3인(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여 사면한 것에 대한 합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박계는 복당 승인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복당 조치와 친박 3인 사면을 추인했다.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2017년 말에는 홍준표 대표의 주도로 보수통합을 계속 추진해 11월 초 박근혜를 제명했고 11월 6일 바른정당 통합파 9명의 의원이 자유한국당 복당 계획을 밝혔다. 이중 8명의 의원은 11월 8일에 탈당을 하였고 11월 9일 자유한국당 당원자격심사회의의 결정으로 국회의원 8인과 지역위원장 그리고 지방의원등 기타 복당신청자들의 복당을 승인했다. 자유한국당은 남은 1명인 주호영의원의 복당도 승인할 예정이지만, 나머지 바른정당 국회의원들은 탈당 후 복당 신청을 해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친박계는 홍준표 대표가 이들의 복당을 받아들인 것에 반발하였다. 이후 홍준표의 성완종 리스트 재판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친홍준표계 바른정당 복당파 김성태가 결선투표 없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친홍계 바른정당 복당파가 완전히 당권을 잡았다. 한편 홍 대표는 복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바른정당을 탈당한 김세연 의원과 박인숙 의원을 받아들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 5곳과 경기·인천지역을 사수하고 서울을 탈환한다는 전력을 세워서 승리한다고 각오했지만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드루킹 게이트와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추행 스캔들으로 인해 악재가 발생되어 역전을 할 수 있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러나 대구 북구 갑 정태옥 의원의 특정 지역 비하 발언으로 악재가 발생하여 선거판세에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정태옥 의원은 자유한국당에서 탈당을 시키고 사태를 수습했지만 결국에는 대구·경북권을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역시 226명 중 53명만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 66곳 지역 가운데 4곳에서만 승리하여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기록하고 만다. 특히 수도권 빅3 가운데 완패하여 경기·인천을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심지어 부울경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23년만에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또한 동시에 치러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도 12곳 중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던 경북 김천에서 한국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겨우 방어하는 성공했지만 경북 김천을 제외한 11곳에서 모두 패배했다. 자유한국당의 역사상 최대 참패로 끝나면서 홍준표 대표는 사퇴하였고,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7월 11일에는 여의도에서 영등포동으로 당사를 옮겼다. 김성태 대행은 "여의도 당사의 15%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기존의 기득권과 잘못된 인식, 사고를 전부 여의도에 버려두고 여기서는 오로지 국민의 삶만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 정당으로 태어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당 체제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이회창, 김용옥, 이국종, 최장집 등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대위원장직을 고사하였다. 그러나 7월 16일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비대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김 비대위원장은 인적청산보다 가치와 비전 정립이 먼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기획주의에 입각해 기업을 간섭하는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에)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면서 시장자유 확대를 강조하였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국가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임명한 김대준 비대위원의 더불어민주당 당적 및 전과 논란이 발생했고, 김대준 비대위원은 사퇴하였다. 또한 인적청산 등에서도 소극적이고, 가치와 정책 재정립도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조사상으로도 지지율은 횡보 상태이며 원내 5당인 정의당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했다. 2018년 10월 1일, 전원책 변호사가 자유한국당 내 인적쇄신을 책임질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위원이 되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조강특위에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대규모 인적청산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당대회 개최 시기 등의 현안을 두고 전 위원과 당 비대위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결국 11월 9일 당 비대위는 전 위원에게 문자로 해촉을 통보했다. 2018년 말로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연이은 악재로 인하여 반대 급부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2019년 초 리얼미터 조사 결과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20% 후반을 기록했으며,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한 자리수까지 좁혔다. 그러나 친박계 김진태,김순례,이종명의원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망언으로 인해 큰 악재가 발생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뒤에는 30%대의 지지율도 회복하였다. 그리고 201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서 통영 고성 지역구에서 정점식 후보가 여유롭게 승리하고, 창원 성산에서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의 여영국 후보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선전했다. 지도부. 최고위원. 자유한국당은 과거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였으나 2016년 총선 참패 이후 지도체제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협의를 거쳐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의원 총회.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는 자유한국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원내대표는 심재철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김재원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 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박완수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에 있다. 기타. 야당 시절.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논란과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 친이, 친박계 갈등.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역대 전당대회. 한나라당 시기. 창당대회.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제1차 전당대회.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표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제2차 전당대회. 정권교체와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 패배 이후 4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여당으로 향함으로써 한 때 과반을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조순 총재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1998년 8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명예총재를 조순 총재를 대신할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제3차 전당대회. 2000년 5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총재를 총재로 재선출했다. 제4차 전당대회.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전국순회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 후보가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한나라당 역시 당원 50%, 국민 50% 총 500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순회경선을 실시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독주로 인해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경선 결과에 따라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그에 따라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해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3일 뒤 제1차 최고위원회의는 최고위원 최다득표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제5차 전당대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재검표 결과 선거 결과에 거의 변동이 없음에 따라 서청원 대표는 대선 패배와 대선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사퇴한다. 그 뒤, 2번의 대선 패배를 겪은 한나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에 따라 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2003년 6월 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따라 최병렬 전 서울시장을 대표로 선출했다. 제6차 전당대회. 2004년 2월 22일, 불법대선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역풍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퇴진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인한 역풍으로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3월 1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하고, 국민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부총재를 과도기 대표로 선출한다. 제7차 전당대회. 2004년 5월 19일 한나라당 당선자총회는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대의원 50%, 여론조사 30%, 인터넷 선거인단 20%가 1인2표로 각각 대표,최고위원을 뽑아 1~5위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1위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당헌당규를 개정한 뒤 투표에 들어가, 여론조사, 인터넷투표와 합산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한편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과 김영선 의원이 여론조사와 인터넷투표에서의 강세로 중진인 이강두, 이규택 의원을 꺾고 최고위원직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제8차 전당대회. 박근혜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권을 장악하려는 친이계의 이재오 전 원내총무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박계가 지원한 강재섭 전 원내대표의 대결이 되었다. 7월 11일, 1인 2표제로 대의원 70% 여론조사 30%를 반영한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강재섭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제9차 전당대회.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후보자 선출 선거.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고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를 압승으로 이끈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경선룰에 반발해 곧바로 탈당한 뒤, 후에 창당되는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한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가,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붉어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 8월 20일, 여론조사에서 크게 격차를 벌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제10차 전당대회. 2008년 7월 3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허태열 전 충북지사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1차 전당대회.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추인하고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국민 여론조사 30%를 합산한 투표 결과, 안상수 전 원내대표가 홍준표 전 원내대표와 나경원 전 원내부대표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2차 전당대회. 2011년 5월 8일, 안상수 지도부가 4.27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한나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6월 7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지도부 선출 경선에 70% 반영되는 선거인단을 대의원, 당원, 청년선거인단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7월 4일, 경선 결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홍준표 전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친박계 핵심 유승민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4차 전국위원회. 2011년 12월 7일, 10.26 재보선 패배와 뒤이은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하자,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했고, 이틀 뒤인 12월 9일 버티던 홍준표 대표마저 사퇴하자 지도부가 붕괴되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지도부 사퇴로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던 나경원 최고위원마저 12월 11일 사퇴하자 12월 19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박근혜 전 대표를 만장일치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제15차 전국위원회.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의결했다. 새누리당 시기. 제1차 전당대회.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제2차 전당대회.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은 경선을 통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제1차 전국위원회. 2012년 11월 6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제3차 전당대회.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제4차 전국위원회. 2016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정진석 대표권한대행의 추천으로 김용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되었으나 친박계의 반발로 5월 17일 전국위원회가 무산되면서 김용태 내정자는 사퇴하였다. 이후 6월 2일 다시 열린 전국위원회가 김희옥 동국대학교 총장을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제4차 전당대회.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들어선 새누리 혁신비상대책위원회는 7월 14일 5차 전국위원회를 통해 대표 권한을 강화하고 최고위원과 분리 선출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친박계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대표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비박계에서는 이에 맞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판론이 나왔으나 6월 28일,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불출마를 결정하자 7월 6일, 최경환 전 부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친박계는 서청원 전 대표를 추대하려 했고, 이에 나경원 전 최고위원이 출마를 고심하기도 했으나 7월 19일 서청원 전 대표 역시 불출마를 선언하자 다음날 나경원 전 최고위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친박계는 홍문종 전 사무총장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7월 27일 홍문종 전 사무총장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고, 막판에 출마를 고심하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역시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대표 경선에는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용태 전 혁신위원장 내정자와 한선교 의원 등이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된 친박계 측이 오히려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내 조직력이 강화되면서, 비박계에서는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고, 7월 29일, 정병국 의원과 김용태 의원이 여론조사를 통해 정병국 의원만이 후보로 등록했고, 8월 5일, 주호영 후보와 정병국 후보 간 여론조사를 통해 주호영 후보가 비박계 단일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비박계 대권주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친박계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적 멀어진 이주영 후보나 한선교 후보 대신 이정현 후보를 지원하면서, '오더 투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이정현 전 최고위원을 당대표으로 선출하였다. 제6차 전국위원회.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비대위원장에 인명진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제7차 전국위원회. 2017년 2월 13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개정을 의결했다. 자유한국당 시기. 제1차 전당대회.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3월 12일 자유한국당은 31일 전당대회를 개최해 여론조사 50%, 책임당원투표 50%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까지 진행된 후보 등록에는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김진태 의원,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안상수 의원, 원유철 전 원내대표, 조경태 의원,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용한 청년위원장이 등록했다. 2017년 3월 18일에 실시된 1차 컷오프에서는 김진, 신용한, 조경태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20일에 실시된 2차 컷오프에서는 안상수, 원유철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책임당원투표 50%, 여론조사 50%를 통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홍준표 후보를 선출하였다. 제2차 전당대회.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홍준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제3차 전국위원회. 2018년 6월 14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김성태 대표권한대행은 6월 24일 안상수 전 인천광역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비대위원장을 물색하였고, 김병준 전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었다. 7월 17일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제3차 전당대회. 2018년 11월 29일,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이 입당한 데 이어 2019년 1월 15일, 야권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입당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유력한 차기 대표로 대세론을 형성하자 1월 30일에는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홍준표 전 대표가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다. 2월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는 황교안 전 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해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진태 의원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2월 7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2월 27일부터로 발표되자 황교안 전 총리와 김진태 의원을 제외한 오세훈 전 시장, 홍준표 전 대표, 심재철 전 부의장, 안상수 전 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장관 등은 전당대회를 2주 이상 연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대위와 선관위가 27일 개최를 강행하자 결국 해당 후보 6명은 2월 10일 전당대회 보이콧을 선언한다. 결국 2월 12일 황교안 전 총리, 김진태 의원과 입장을 번복한 오세훈 전 시장만이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다. 2월 8일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및 폄하 논란이 확산되자 윤리위원회는 2월 14일 이종명 의원을 제명하고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후보로 등록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보해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김진태 후보의 막말에 이어 압도적인 지지율의 황교안 후보까지 '태블릿 PC 조작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 등 김진태 후보의 극우적인 주장에 동참하며 당이 극우화되어간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황교안 전 총리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제4차 전국위원회. 2020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 전국위는 신설 합당 추진에 대한 결정 권한을 당 최고위원회에 위임하기로 의결하였다. 논란.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에 대한 공약 논란.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이런 집권당에서의 사면 논의에 대해 1997년 8월 31일,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 이렇게 김대중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내세우자 경향신문은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김대중 후보를 대신해 대표 연설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집권 정치 보복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후보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아무런 전제 조건을 달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 그에 대응하여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곧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운 것에 대해 이인제도 경쟁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결국 이렇게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경쟁적으로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대선 이후 낙선한 이회창후보 측근도 "이회창쪽에서도 추석전 조기사면을 요구한 만큼 김대중당선자도 사면을 주장했으니 당연한조치"라고 평했고 낙선한 이인제후보쪽에서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이제는 국민대화합의 계기가 되어야 하고 매우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12월 21일, 김대중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과 협의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평가했다. 당시 사면에 대해 1997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정체성.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판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자 일부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회창 비리.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004년 2월 4일 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인터넷 여론 문제.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 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지난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직원에 따르면 2006년 지방 선거 때부터 한나라당에서 댓글과 공감 수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왔고,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여론 조작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활동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변경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4년 지방 선거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SNS 소통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상대 후보를 비판하는 뉴스를 확산시켰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으며 민주당의 댓글 조작 사건을 담당하던 드루킹 특검에도 이 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요구했다.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아고라에서 비판 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 한나라당과 국민 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성추행.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2014년 9월 전 국회의장이자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던 박희태 씨가 골프장에서 여성 캐디의 배를 찌르는 등의 성추행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 항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에서 기각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원심이 유지되었다. 날치기. 새누리당은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 돈봉투 사건. 2012년 총선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이후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 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 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십자군 선거운동. 2012년 12월 13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 여러대로 여론 조작 작업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해당 오피스텔 입구에는 선거 6일 전을 알리는 문구와 ‘President War Room(대통령 선거 상황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으며, 박근혜 대선 후보가 발행한 임명장과 SNS 미디어본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이 다량 발견됐다. 선관위 등에 따르면 이 사무실 대표 윤정훈은 2012년 대선 기간 새누리당‘국정홍보대책위원회’ 총괄팀장 겸 국민편익위원회 SNS미디어본부장을 맡았으며,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미등록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7명을 고용해 인터넷, SNS에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혀 졌다. 이들은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유리하고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글을 트위터에 게시하고 리트윗(공유)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당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당에서 돈을 들여 사무실을 차려주거나 지원한 사실이 없다.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한 것으로, 새누리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2012년 12월 14일 선거관리위원회는 ‘SNS 불법 선거운동’이 이뤄진 여의도 오피스텔의 임차 비용을 박근혜 대선 후보 선대위 권아무개 새누리당 국정홍보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아무개 새누리당 수석부위원장이 지급했다고 밝혔고, 특히 “직원들의 리트윗 활동 실적을 ‘박근혜 후보를 위한 가계부채특별위원회 SNS 활동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새누리당 가계부채특위 안상수 위원장에게 수시로 보고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윤정훈은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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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PDF(Portable Document Format, 이동가능 문서형식);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전자 문서 형식으로, 일반 문서 및 문자, 도형, 그림, 글꼴을 포함할 수 있다. PDF는 컴퓨터 환경에 관계없이 같은 표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장치 독립성 및 해상도 독립성을 가진다. PDF는 2008년에 ISO 32000 오픈 포맷으로 표준화되었으며 구현을 위해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는다. 역사. 1993년 어도비사 PDF 1.0버전과 어크로뱃 1.0 버전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초기 도입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도비사가 어도비 어크로뱃을 무료로 배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PDF의 초기 버전은 기능적으로 당시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외부로의 하이퍼링크가 지원되지 않았고, 파일 크기가 너무 커서 당시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운로드하거나 파일을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경쟁 파일 포맷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Envoy, Common Ground Digital Paper, Farallon Replica가 있다. 심지어 어도비사의 포스트스크립트(.ps)는 같은 회사의 PDF에 비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995년에는 AT&T Lab에서는 도서관의 도서나 각종 문서의 보관을 위해 새로운 파일 포맷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후 DuVu 프로젝트로 발전하여 .djv/.djvu 포맷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이 포맷은 e북이나 온라인 카탈로그, 이미지 파일 교환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어도비사는 어크로뱃 리더(현재의 어도비 리더)를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PDF 포맷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PDF는 온라인 상의 인쇄용 문서의 실질적 산업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징. 문서 형식이나 제작 기술에 독점적인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서 형식이 공개되어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In-Design 뿐 아니라 다양한 상용 프로그램 및 무료 프로그램에서 PDF를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서가 표현 가능하고, 암호화 및 압축 기술을 통해 내용의 변조가 어려우며, 사용권을 다양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지원 가능하다는 점이 다른 문서 형식과 비교될 수 있는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서 실용적인 가상 프린터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원 소프트웨어. 어도비 시스템즈에서는 PDF를 읽을 수 있는 어도비 리더 프로그램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리눅스 등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어도비사에서는 PDF 제작을 위한 어도비 어크로벳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 역시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PDF를 읽거나 또는 읽고 쓰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드롭박스, 원드라이브 등의 많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PDF 보기를 지원한다. 프라이버시. 다음은 PDF 포맷은 민감한 정보가 파일내에 남아있을수있다는 미디어위키의 알림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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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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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프로세서
워드 프로세서()는 각종 전자 문서를 읽고 고치거나 작성할 수 있는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또,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인기있던 독립형 사무 기기의 일종을 뜻하기도 하는데, 문서 편집을 위한 타자기에 자판 입력과 인쇄 기능을 더한 것이 특징이었다. 역사. 워드 프로세서는 2개의 천공 테이프 스테이션이 있고 하나의 테이프를 다른 테이프로 교체하는 것(한 테이프는 이름과 주소가 포함되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송신할 본문을 포함함)을 허용하는 Friden Flexowriter에서 파생되었다. 줄 바꿈 기능은 없었으나, 이 기능은 IBM의 Magnetic Tape Selectric Typewri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워드 프로세서의 특징. 문서 작성. 단순한 문서 편집기와는 달리 문서의 문단 모양, 글꼴 모양, 표 편집, 그림 삽입 등을 외양에 집중하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초기에는 한글, 영문 등 단어나 문장 입력과 간단한 편집에 집중되었으나 고급 사용자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전자출판에 응용하면서 교회 주보, 수학 문제지 등의 간단한 전자출판도 가능하게 되었다. 아래아한글의 경우 도스용 시절부터 일부 고급 사용자들이 한글과 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선전을 위해 발행하던 월간지였던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출판 노하우를 투고할 만큼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애용되었다. 대학생들에게는 1990년대부터 글을 쓰고 고치기 쉽기 때문에 널리 사랑받기 시작했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는 아래아한글과 워드로 숙제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는 등 널리 사랑받는 문서작성 프로그램이다. 단점. 하지만 워드 프로세서의 전자출판 기능은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전문적인 전자출판 프로그램에 비해 출력 기능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쿼크익스프레스의 경우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다양한 인쇄에 맞춘 망점 조절이 가능하지만, 워드 프로세서는 망점 조절 기능이 없다. 워드 프로세서 파일은 그림이 들어갈 경우 상대적으로 문서의 용량이 커지고, 워드 프로세서별 확장자나 형식이 달라 같은 제품임에도 버전별로 호환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는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로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 워드프로세서, 전열 방식의 프린터, 충전용 배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1983년 개발된 큐닉스 글마당이며,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개발되었다. 그외 대우전자에서 개발된 르모도 사용되었다. 기존의 타자기에 비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문서의 수정과 편집이 용이하고 별도의 출력도 가능하여 수동식 타자기를 대체할 사무용품으로 큰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전자식 타자기도 보급되었고, 곧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개인용 컴퓨터와 프린터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그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까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를 워드프로세서 실기시험 수검기종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 폐지되었고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도 전자식 타자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한글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현재. 현재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는 다음과 같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워드프로세서 점유율은 한/글이 2 정도를, MS 워드가 8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MS 워드가 90% 넘는 점유율을, 한/글은 0.4% 정도의 점유율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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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편집기
문서 편집기(文書編輯機) 또는 텍스트 에디터()는 단순한 문서 파일을 편집하기 위해 쓰이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진 형식이 아닌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형식의 파일을 읽고 간단한 조작으로 편집하여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중의 하나이다. 일반 텍스트 파일 vs. 워드 프로세서 파일. 텍스트 에디터로 생성된 일반 텍스트 파일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워드퍼펙트, 또는 OpenOffice.org와 같은 워드 프로세서로 생성된 문서 파일에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반 텍스트 파일은 파일에서 표현된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편집하고 나타낼 수 있다. '표시'할 수 없는 유일한 문자는 사용된 문자 집합의 제어문자이다; 실질적으로 줄바꿈, 탭 그리고 폼 피드(formfeed)를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요즘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 집합은 ASCII로 일반 텍스트 파일은 과거에 문서 작성을 할 때(예를 들면 구체적인 사용 설명, 혹은 사용 안내)보다, 프로그래밍과 구성을 하는데 더 자주 사용된다. 문서는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을 정의하는 것 이외에도 구체적인 파일 포맷 "제어 문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굵게, 기울임꼴, 글꼴, 열, 표 등의 기능을 활성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일반 페이지 포맷 기호들이 일단 바탕화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가장 간단한 워드 프로세서의 기본 화면에서 볼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일반 텍스트 파일을 편집하며 기본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작성 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작성해야 한다. 저장 형식을 지정할 때에, 특히 소스 코드, HTML, 그리고 구성, 제어 파일과 같이 특히 더 중요한 파일에는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프로그램을 초기값으로 그대로 둘경우, 파일은 "특수 문자"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파일이 의도하고자 했던 유틸리티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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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한/글 또는 아래아한글은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된 워드 프로세서이다. 제품 이름은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ㆍ를 쓴 ᄒᆞᆫ글로 표기하고, ‘HWP(Hangul(Hancom) Word Processor의 준말)’ 또는 아래아 한글 또는 한/글 로도 표기한다. 2014년 기준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이다. 도스용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는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유닉스, 리눅스 매킨토시와 안드로이드 및 아이폰용으로도 제작되고 있다. 한/글로 작성된 문서 파일은 파일 확장자로 .hwp를 갖고 있으며, .hwt로 저장하여 양식(Form)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2010년부터 HWP의 개방형문서포맷인 OWPML(Open Word Processor Markup Language)은 KS X 6101로 등록되어 있으며, 확장자로 .hwpx 또는 .owpml 을 지원한다. 역사. 1999년 이전. 한/글 1.0 ~ 2.1. 1989년 1.0, 1.1, 1.2, 1.3 출시.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이찬진은 1988년 가을 서울대 컴퓨터연구회에서 만난 김형집, 우원식, 김택진과 함께 아래아한글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베타 버전인 0.96판을 1989년 3월에 발표하였다. 베타버전인 0.96판은 5.25인치 360kb 디스켓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린터로 출력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0.96의 버그를 수정한 0.99도 발표했다. 최초의 상용버전인 1.0판이 1989년 4월 24일 출시되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한글 1.0 문서를 참조. 1989년 6월에는 주석 처리 기능, 금칙 처리 기능과 9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에서의 인쇄 품질이 향상된 1.1판이 출시됐다. 또한 1.0판에서는 설명서 대신 몇 장의 안내문만을 제공했던 것에 비해 1.1판 후반부터는 정식 설명서를 링 파일에 묶어 제공했다. (책자 형태로 되어 있는 정식 설명서의 날짜는 1989년 11월 27일로 되어 있다.) 한글과컴퓨터가 설립되기 전인, 1990년 1월 한/글의 1.20판이 출시되었다. 1.20판이 출시되기 전에도 1.11판등 버전업이 수시로 있었다 1.2판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다. 1990년 6월 300 DPI 레이저 프린터 해상도를 지원하는 한/글 1.2L이 출시되었다. 한/글 1.2판 이후로 한/글은 출력할 수 있는 해상도의 조건에 따라 레이저판, 도트판이 따로 나뉘었으며 30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레이저판은 14만 원, 18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도트판은 5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레이저판에는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프린터 포트에 꽂아야만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하드웨어 키(lock)가 들어 있었는데 후에 한/글 2.5가 출시되면서 제거되었다. 1990년 9월에는 글꼴 다운로드 인쇄 방식을 사용해 레이저 프린터에서의 인쇄 속도를 향상시키고, 그림 인쇄, SVGA 모니터 지원 기능이 추가된 한/글 1.3L이 출시되었다. 1990년 1.5 출시. 창업. 1990년 10월 이찬진이 한글과컴퓨터사를 열었으며, 한글문화원 사무실 내부에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정내권, 박흥호 등 외부 직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도트, 레이저용. 1990년 12월 20일에 1.5판이 도트판과 레이저판의 두 종류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도트판의 경우 5.25인치 2D(360KB) 플로피 디스크 다섯 장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당시 컴퓨터의 대부분이 하드 디스크가 없는 XT나 AT 기종이었기 때문에, 한자 사전을 쓰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고, 인쇄하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는 식으로 오늘날보다 훨씬 불편하게 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기능 추가. 이 외에도 다음의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1.51. 몇 가지 버그를 수정한 1.51판이 1991년 1월 출시되었다. 1.52. 1991년 11월 18일 텍스트 파일을 문단 단위로 읽는 기능과 플로터 파일을 인쇄하는 기능을 추가한 한/글 1.52판이 출시되었으며, 한/글 1.53D도 출시되었다. 이들 제품을 통해 한/글은 완성형보다 한글을 많이 쓸 수 있는 조합형 한글, 다양한 글꼴, 인쇄기를 이용한 깔끔한 인쇄를 쓸 수 있는 터라 한국인이 널리 사용하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표 기능이 없어서 선 그리기로 표를 그려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1992년 한/글 2.0이 개발되면서 기존 버전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었다. 김진섭은 책 만들기를 가르쳐주는 책인 《책 잘 만드는 책》에서 1990년대에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실례로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에서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와 손글씨로 학급신문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첨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대에게는 글을 깔끔하게 쓴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에게는 숙제를 깔끔하게 써서 낸다는 자부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앞선 문서 작성 도구였다. 1992년 2.0 출시. 1992년 7월 27일 한/글 2.0 전문용이, 9월 21일에 일반용이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레이저판과 도트판의 구분을 버리고, 일반용과 전문가용이라는 구분을 달고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문서 작성 기능만 갖추고 있던 한/글 1.52와는 달리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 출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기능들을 추가시켰다. 이 기능들은 IBM PC에서 한글을 지원하는 워드프로세서로서는 한/글 2.0이 최초로 구현한 기능들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추가한 2.0버전의 출시로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최고의 스타로서 한글과컴퓨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의 추가로 인해 디스켓의 장수도 이전 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하드 디스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전문가용 버전은 XT 컴퓨터에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업그레이드 수요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묵향 등 한/글용 외부 글꼴 패키지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글이 인기를 끌면서 IBM PC용 한글 글꼴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타자기 출력물과 별 차이 없는 품질로 전자 출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글 옛 버전과 달리, 수식 편집, 인화지 출력, 편집 가능 쪽수 확대, 윤곽선 글꼴, 다단 편집 등으로 기능을 강화한 한/글 2.0의 등장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간이 전자 출판이 IBM PC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수식 기능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수학 교재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93년 2.1 출시. 1993년 9월 한/글 2.1 버전이 출시되었으며, 전문가용, 일반용, 수검용, 꼬마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징. 이외에도 세세한 개선점들이 많았다. 멀티미디어와 윈도 환경의 보편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992년 4월 개발된 윈도우 3.1을 다음해인 1993년 6월 한글 윈도우 3.1로 내놓으면서 멀티미디어 PC/홈 PC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멀티미디어 PC의 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윈도우 3.1의 대대적인 보급이 한/글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글이 갓 2.1판을 출시하고 도스용 2.5판 개발에 들어갔을 즈음, 한글 윈도우 3.1에서 동작하는 즉, 윈도우의 장점을 살린 여러 가지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금성소프트의 윈워드,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5.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등이 등장하면서 윈도우용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3.0b 윈도용이 등장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업체들은 이미 윈도우 3.1용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한/글에서 불가능한 멀티태스킹(다중 작업), OLE(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든 개체의 삽입 수정), 3차원 글꼴 다듬기(글맵시/워드아트), 윈도우용 트루타입 글꼴(화면의 글꼴 모양과 인쇄한 글꼴 모양이 동일한 서체) 호환, 9개까지의 다중 문서 편집(한/글은 그때까지 2개의 문서만 동시에 열 수 있었음)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나름대로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즈음, 한글과컴퓨터는 여전히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5를 개발하면서 시간을 천천히 끌어갔다. 물론 윈도우용 한/글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속도나 안정성 측면에서 부족했던 윈도우 3.1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한/글 2.5 ~ 3.0b. 1994년 2.5 발표. 1994년 SEK 전시회에서 한/글 2.5가 발표됐다. 2.5판부터는 전문용/일반용 구분이 없어진 대신 2.1 전문용을 업그레이드 한 2.5 기본판이 12만원에 판매되면서 가격을 50% 정도 인하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사용자를 위해 한/글 2.5 구입자들에게는 윈도용 한/글 3.0 무료 교환쿠폰이 제공되었다. 또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한/글 2.5가 포함되었다. 한/글은 2.0 버전 이후부터 미국의 워드퍼펙트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능의 구현이나, 조판 방식 등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출시 전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가졌던 워드프로세서인 워드퍼펙트와의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윈도용 한/글 3.0이 몇 달 뒤 출시되었다. 1995년 3.0 발표. 모습. 한/글 3.0판 윈도용이 1995년 3월 출시되었다. 윈도용 한/글의 첫 출시는 윈도 95 출시와 함께 그 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윈도용 한/글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운영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 인터페이스, 독립 입출력 방식을 채택하였다. 윈도용 한/글 3.0은 윈도 3.1의 기본 프로그램 모양을 따르지 않고, 넥스트스텝과 윈도 95의 인터페이스를 혼합한 형태의 프로그램 모양을 선보였다. 한컴2바이트코드. 또한 완성형 한글 코드만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입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도스용 한/글의 입력 체계, 즉 조합형 한글 코드를 변형한 한컴 2바이트 코드를 사용으로써, 11,172자 현대 한글은 물론 옛 한글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조합형 한글 체계를 통한 한글의 완전한 표현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한/글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도스용 한/글의 글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단축키도 도스용 한/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도스용 한/글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기존 도스용 한/글의 문서를 아무런 손상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좋은 점과 나쁜 점. 이렇게 기존 도스용 한/글의 커널을 그대로 윈도용으로 컨버전한 한/글 3.0은 도스용 한/글의 장점 위에 멀티태스킹, OLE 기능, 윈도용 글꼴 및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 글맵시 기능 등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서 꼭 필요한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도스용 한/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글 3.0에는 버그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32비트 코드로 작성된 한/글 3.0이 16비트 운영체제인 윈도 3.1에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Win32s 런타임이 불안정했기 때문으로, 패치 버전인 한/글 3.0a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윈도 95가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가격. 가격은 기본팩이 12만원으로 책정되어 2.5와 동일했으며, 2.5의 확장팩 내용을 담은 추가 CD가 4만원의 가격으로 추가 인하되었다. 마지막 도스용 한/글인 한/글 3.0 발표. 그리고 도스용 한/글의 마지막 버전인 한/글 3.0이 1995년 6월 출시되었다. 한/글 3.0 도스용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가격은 기본팩 + CD-ROM이 12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되었으며, 개정판인 한글 3.01 도스용은 한/글 오피스 96에 포함되었다. 3.0b 발표. 윈도우 환경으로 이전.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된 뒤 1995년 11월 한글 윈도우 95가 출시된 직후, 도스용 한/글 3.0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최초의 윈도 버전인 3.0b가 출시되었다. 기본 내용은 도스용 한/글 3.0과 동일하지만 윈도 95에서도 실행이 가능해졌고, 여러 가지 버그가 수정되었으며,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이 추가되었다. 윈도 3.1에서의 한/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윈도 95에서는 대부분 해결됨으로써 이 때를 기점으로 한/글이 윈도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글 3.0b가 대중적인 성공을 얻고 난 후, 한/글은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 완전히 성격을 탈바꿈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6년 출시할 예정이었던 한/글 4.0(가칭) 도스용 개발을 취소하고, 더 이상의 도스용 버전 개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3.0b는 프로그램이 실행되면 가상 도스창이 열린 것처럼 상단 메뉴와 팝업창이 DOS용 제품과 거의 동일한 프로그램이 윈도우에서 열렸다. 당시 사용자들은 DOS환경을 켜서 실행시켜야 하는 복잡한 운영체제였던 윈도우 3.1x보다 눈과 손에 익어 상대적으로 단순한 DOS환경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였기에, 이 무늬만 윈도우용 같던 제품이 윈도우 95 기반에서는 후속 제품인 한/글 96 제품을 누르고 대세가 되어 윈도우 98이 대중화될 때까지 시장에서 계속 주력 제품이 된다. 윈도우 95보다 기술적으로는 불완전한 멀티테스킹 환경이던 윈도우 3.1x였으나, 3.0b제품 자체는 상당히 안정적이어서 도스용보다 사용하기에 불안하다는 제품은 아니었으며, 단순히 3.0b를 사용하기 위해서 윈도우 3.1x를 윈도우 95로 바꾸는 사례는 없었다. 공공 분야에도 DOS용 하나워드를 대체하는 행정 업무용 워드 프로그램으로 광범위하게 보급된다. 유닉스 기반으로 제품 출시.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으로 분류되는 IRIX 등에 몇가지 유닉스 기반 한/글 제품이 미지리서치에서 출시된다. X윈도우의 X마크와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한/글 마크가 등장하며 윈도우용 제품과 차별화된 한/글 표기가 미지리서치의 웹사이트에서 제품 설명과 제품명에서 등장하여 폭넓게 사용된다. 제품 설명 사진도 솔라리스 CDE환경에서 실행되는 모습이었다. 제품 설명은 솔라리스가 대부분이었으나 저렴함이 강점이던 리눅스용 제품이 제일 마지막으로 추가된다. 실행 환경이 컴퓨팅 능력은 월등한 고가의 워크스테이션이거나 서버 환경으로 완전히 다르다 보니, 윈도우용 제품만을 공급하던 한글과 컴퓨터 웹사이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기술적 이질감을 풍기는 미지리서치만의 제품 웹페이지였다. 최초 제품은 한글 3.0b제품이 기반은 아니지만 X윈도우 윈도우창 내에서 MS-DOS 응용 프로그램처럼 실행되는 윈도우용 제품과 메뉴 모양과 팝업 창, hwp파일 등에 모든 것이 완전히 동일한 형태였다. 윈도우 제품에서와 같이 역시나 모티프 기반으로 만들어진 그래픽 환경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느낌이었다. 윈도우 제품과 동일한 인쇄 창에서 출력 명령을 내리면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에서처럼 프린터 대기열이 아닌 유닉스 프린터 디바이스로 출력물이 전달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공략과 한/글 오피스. 윈도 95 출시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국내 기업체 공략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널리 쓰였던 로터스 1-2-3와 워드퍼펙트를 1990년부터 이겨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95 버전까지만 해도 한글판의 불완전한 번역과 잦은 버그, 한/글 문서와의 비호환 문제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7 버전에서부터 VBA를 이용한 특유의 확장성, 네트워크를 통한 다중 사용자의 작업 공유 기능, 강화된 도움말, 다량의 클립아트와 글꼴 번들, 여러 가지 사용자 편의 기능,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의 강화, 전 세계 문서 호환, 엑셀, 파워포인트와의 통합 등을 앞세워 점차 기업체를 중심으로 사용자 수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훈민정음 등도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미처 기업 시장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던 한글과컴퓨터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한글과컴퓨터도 한/글을 기반으로 한컴 오피스 스위트(Haancom Office Suite)를 출시했는데, 이 첫 주자는 한/글 3.0b의 초기판에 저가로 번들(한/글 3.0b 구입자에 한해 3만원의 가격에 판매)된 윈도용 로터스 1-2-3(스프레드시트)와 프리랜스 그래픽스(프레젠테이션 소프트웨어)였다. 물론 서로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패키지만 통합한 것인 만큼, 호환성에 약간에 문제가 있었고, 로터스 1-2-3, 프리랜스 그래픽스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버린 제품들이라 그 파급력이 덜했지만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한/글 96의 출시와 한글과컴퓨터의 부진. 한/글 프로 96.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6년 7월에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의 통합패키지로 선보인 한/글 프로 96과 한/글 오피스 96이 출시되었다. 한/글 프로 96은 기본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인터넷문서 편집,문서모음집인 문서마당 등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96을 기반으로, 주소록, 타자연습, 폼프로세서 틀마름이, 팩스 프로그램, 메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틸리티를 추가한 종합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한/글 오피스 96에는 이전에 선보였던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의 업그레이드 판이 포함되었다. 한/글 오피스 96. 하지만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과는 달리 기업체 판매를 목적으로 출시된 한/글 오피스 96은 포함된 로터스 1-2-3 5.0과 프리랜스 그래픽스 프로그램의 기능 미비로 인해, MS 오피스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로터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한/글 96간의 인터페이스 차이도 이용자의 불만을 샀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도 개인용 시장의 포화와 심각한 불법 복제 등의 영향으로 이전 수준의 성공을 거뒀을 뿐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되었다. 한/글을 제외하면 한/그림(그림 그리기), 한/아름, 한/맥 등 출시한 여러 제품이 모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진출한 인터넷 시장에서도 검색 엔진인 심마니를 빼고 별다른 실적을 낳지 못했다. 완성도. 한/글 96이 윈도우 95가 사용되던 시점에서는 일부 PC에서 아주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타이핑 중일 때 등에 상황에서 오류 메시지 조차 없이 갑자기 워드 프로세서 실행창이 닫히며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윈도우 95 관련 심각한 결함이 알려져서 이전 제품인 3.0b로 교체되며 확산이 번번히 저지되고, 윈도우 98SE 보급 시점에야 뒤늦게 비슷한 외관 때문에 한/글 97과 혼동되며 한동안 사용된다. 하지만 한/글 96은 프로그램 설치자와 프로그램 사용자 모두가 제품명을 정확히 확인하기 전에는 한/글 97로 많이 착각하고 사용하는 한/글 97처럼 쓰던 대용품이었다. 사용중에 한/글 96이라는 제품명이 확인되면 바로 삭제되고 한/글 97이 설치되고는 하였다. 한/글 97. 출시. 1996년 11월에는 한/글 96을 기반으로 중국어, 일본어 인터페이스 및 다국어 입력기를 채용한 한/글 국제판과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한 한/글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한/글 97을 탑재한 한컴홈 97과 한컴 오피스 97이 출시되었으나,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한컴에서는 한컴오피스 97을 대학생들을 위한 아카데믹 버전으로도 출시하는 등 사용자의 구매력에 맞추는 방식의 영업을 사용하였다. DOS용 워드프로세서 제품을 윈도우용으로 변경하여 출시한 제품으로 윈도우 기반으로 바꾸는데만 100억원이 개발비로 들었다고 유명하였다. 한/글 8.15. 1998년 6월에는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한/글 소스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기고, 더 이상의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하는 양해 각서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체결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용자의 반대 여론에 부딪친 한글과컴퓨터는 이 계약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한글지키기운동본부로부터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은 회사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지오이월드 대표이사였던 전하진이 신임 대표 이사로 선임되었다. MBC 뉴스데스크 취재에 따르면, 한/글 97 8.15 국제판에는 그리기 마당에 태극 문양과 지도를 빠져서, 오류가 발생되었다. 완성도. 한/글 97은 '실행 취소' 기능이 매우 취약했지만 역대 윈도용 한/글 시리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으며, 가장 높은 보급율을 보여준 제품이었다. 또한 매킨토시용으로도 개발되어 맥사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자 출판 종사자가 PC에서 작성된 원고 내용을 한/글 97로 작업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글 97은 출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그 예로 출판기획자 모민원씨는 《너희가 한/글 97을 아느냐?》(혜지원)을 초보자편과 활용편으로 출판하였다. 활용편에서는 편지지, 단행본, 생활정보지, 일기예보(한/글 97의 도형기능 사용), 잡지 만들기 등을 소개했다. 윈도우 95가 사용되던 시점에서는 일부 PC에서 아주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타이핑 중일 때 등에 상황에서 오류 메시지 조차 없이 갑자기 워드 프로세서 실행창이 닫히며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윈도우 95 관련 심각한 결함이 알려져서 이전 제품인 3.0b로 교체되며 확산이 번번히 저지되고, 윈도우 98SE 보급 시점에야 뒤늦게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한/글 97과 매우 비슷한 외관의 한/글 96 제품부터의 악명도 한몫하였다. 그리고 윈도우 XP 사용이 아주 저변화되고도 얼마후에야 점차 워디안이 아닌 후속 제품으로 한/글 97은 교체되게 된다. 후속 제품인 워디안에 관한 시장의 냉대로 인터넷 시대가 막 도래하던 시기에 토종 제품으로써 충성스런 고객들을 확보한 마지막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운영체제 단축키, 메뉴와 구분이 안되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구별되는, 과거 도스용 이전 한/글 제품의 답습이었으나 완전히 워드 작업 자체에만 최적화된 단축키와 메뉴 구성이었다. 메뉴 색상톤은 DOS제품때와 동일한 색상이었다. 편집 화면은 완전한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이었으나 메모장 같은 텍스트를 편집하는 느낌이 아닌 그림판 같은 인쇄물 자체를 편집하는 사용감을 3.0b버젼처럼 약간은 예전 DOS버젼 같이 잘 구현해 내었다. 워디안과의 호환성 문제. 후속 제품인 워디안이 출시되었는데도 한/글 97과의 호환성 문제와 커다란 인터페이스의 변화로 인해 한/글이 가지고 있던 독창적인 요소들을 상당수 잃게 되어 사용자로 하여금 한/글 97에서 신버전으로 교체를 꺼리게 하였고, 한/글 97 사용자들이 상위 버전인 워디안의 문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한/글 97 사용자를 위해 상위 버전의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무리한 변화와 호환 불능은 그 이전의 한/글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한/글 2.1과 한/글 2.5는 그리고 한/글 2.5과 한/글 3.0(도스용)는 인터페이스가 바뀌지 않아서 새로운 버전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윈도용 한/글 96문서를 글맵시등의 윈도 고유의 기능을 빼고는 한/글 3.0에서 읽었으므로 정보를 쉽게 주고받았다. 리눅스. 한/글 국제판을 통합한 한/글 97 기능 강화판도 출시되었고 한/글 815 버전 구입자들에게는 정가 19,800원, 처음 사용자에게는 60,000원에 판매되었다. 또한 리눅스 개발 업체인 미지리서치에서는 한/글 96을 리눅스용으로 포팅한 모티프 기반으로 제작한 한/글 for X R4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유닉스 운영체제 별로 제품이 공급되지 않고 리눅스용 제품만 출시한다. 다른 유닉스 운영체제에서도 충분히 실행 가능한 X윈도우 기술이 적용되었으나 리눅스 실행 파일만 포함한 rpm파일만 제공되었다. 데비안 배포본에서도 무리없이 설치가 가능하였다. 기능. 한/글 97에서 제공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2000년대. 한/글 워디안. 2000년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1 이후, 한/글 97까지는 커널 기반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파일의 호환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사용법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글 워디안은 모든 소스 코드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이전 버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한/글 97의 소스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 한글과컴퓨터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 워디안은 256단계의 다단계 되돌리기/반복(실행 취소) 기능을 지원하고, 변형 다단 편집, 표 서식 기능 강화, 엣센스 영한사전과 표준 국어 대사전을 삽입하는 등 커다란 개선 사항이 있었지만, 워디안에서 작성한 문서를 이전 버전에서 읽을 수 없는 문제, 이전 버전의 문서를 워디안에서 본래대로 읽을 수 없는 문제, 프로그램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었고, 바뀐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못한 사용자들이 여전히 한/글 97을 계속 사용하면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존 제품과는 많이 달라진 단축키였다. 그리고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나 메모장 제품 마냥 편집창에 글자들의 아랫 부분만 부분적으로 모두 지워져 보이는 기존 사용자들에게 권하기엔 좀 거슬리는 문제가 화면 출력 기능에서 생겨나 있었다. 한글과컴퓨터사에서는 한/글 워디안의 패치파일을 1개월에 1번씩 제공하는 등의 강행군으로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1729 빌드의 서비스 팩을 발표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잠복해 있었다. 한/글 2002. 2001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워디안을 기반으로 이전 버전 파일과의 호환성 문제 및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제품으로 나중에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향상시킨 한/글 2002 SE로 무상 업그레이드되었다. 한/글 2002판은 한/글 워디안 사용자들을 위해 업데이트 다운로드와 정품 CD가 무상 배포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비스타까지 설치/실행 가능하다. 이후 외국계 펀드와 당시 경영진과의 한글과컴퓨터사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한글과컴퓨터는 프라임산업개발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한/글 2004. XML 문서 원과 공개 키 기반 암호화, 스킨, 작업창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다. 한/글 2004와 함께 출시된 한컴오피스 2004는 국산 스프레드시트인 넥셀과 자체 개발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한컴 슬라이드 2004를 포함함으로써 토종 오피스 스위트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능 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비해 아직 부족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엑셀, 파워포인트와 사용법이 비슷하며, 파일 호환도 가능해 주목을 받았다. 한/글 2005. 협동 작업을 위한 버전 관리 기능, 메모 기능의 추가. XML로 작성된 한/글 서식과 ODBC의 연동, 표의 가로 세로 대칭 뒤집기, 아랍어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 한/글 2005는 itq 워드와 같은 컴퓨터 문서에 관한자격증 시험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윈도우용과 리눅스용이 함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컴퓨터 공간 용량 문제 때문에 2000년도부터 2011년도 당시에는 2002,2004,"2005",2007버전은 컴퓨터 실기 자격증 표준 소프트웨어로 잘 알려져 있다. 한/글 2006 for 맥. 한/글 2006 for 맥: 애플컴퓨터코리아의 기술 지원으로 OS X용이 2005년 출시되었다. 기존의 한/글이 가진 기능을 Mac OS X 환경에서 구현하였다. 트루타입과 한/글 전용 글꼴을 지원하며 지원 사양은 OS X 10.3/10.4 이상, 파워PC G4와 G5 (인텔은 로제타 기술로 실행되나, 속도가 느리고 512 MB 이상 메모리가 필요하다. 한/글 2014 for 맥: 2013년 12월 19일 OS X(10.4) 인텔CPU용으로 출시하였다. 한/글 2010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만들어지고, MAC UI를 충실히 따랐다. 한/글 2007. 선과 도형에 앤티에일리어스가 적용되었고, 반투명한 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이 향상되었고, 워터마크, 암호화 기능, 세로쓰기, 공인 인증서 암호화 기능, 개체 연결선, 개체 그림자 삽입 등 보안성이 향상되었다. 또한 추가로 ValuePack를 설치하면 다양한 기능과 더불어 PDF 문서를 쉽게 생성할 수 있는 무료 Haansoft PDF 문서 변환 드라이버를 설치할 수 있어 편리한 문서 변환 기능을 제공한다. 한/글 2008 for 리눅스. 한/글 2007을 기반으로 리눅스 사용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운영체제 특성의 차이로 인해 일부 동작이나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응용 프로그램 간 복사 및 붙이기나 ActiveX 및 윈도용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능은 제한된다. 게다가 문서 인쇄시 인쇄기의 드라이버에 따라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해당 인쇄기의 드라이버가 리눅스용 드라이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의 형태가 .rpm로 되어있기 때문에 rpm군의 패키지를 사용하지 않는 리눅스 배포판(특히 우분투)은 몇 가지 설정을 해야 했다. 2010년 이후. 한/글 2010. 2010년 3월 3일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010은 한/글 2007의 차기작으로 리본 메뉴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도입하였다. ODF문서를 읽어올수 있으며, 저장할 수 있고, MetaBlog API를 한글자체에서 적용하여 한글로 작성한 문서를 블로그로 업로드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기능도 추가되어 있다. 또한 한/글 2007에서 제공하던 Haansoft PDF의 명칭이 회사 이름의 영문 표기법이 바뀜에 따라 Hancom PDF로 바뀌었다. 2010년 6월 29일 HWP 문서의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다. 이로써 ISO 국제 표준 문서 형식인 ODF와 OOXML을 지원과 함께 표준화와 개방성 강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2010년 7월 29일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2010 기반의 한컴오피스를 볼 수 있는 한컴오피스 뷰어를 출시하였으며,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다. 또한 옛 한글 표현 방식으로 2008까지 써 오던 한양 PUA 코드를 버리고, 유니코드 표준인 첫가끝 코드를 사용한다. 시스템 내용 구성이 이전 2000 시리즈하고는 완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으로 구성을 했다.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었는데 차트에다가 복잡한 선을 그리는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어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공부 학생들한테 많은 비난을 샀다. 다만, 그림에 복잡한 선을 집어넣는 기능은 남아 있다. 아직까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아래아 한글 현역를 쓰고 있다. 한/글 2014. 2013년 10월 10일에 한컴 오피스 2014가 출시됐다. .hwpx 파일을 첫 적용하고 윈도 8용 터치 인터페이스 지원이 특징적이다. 한/글 NEO. 2016년 1월 26일에 한컴 오피스 NEO가 출시됐다. 지원하는 파일 형식이 많아졌다는게 특징이다. 2016이라는 연도 표시가 나오지 않으며, NEO로 대체하였다. 한/글 2018. 2017년 11월 2일에 한컴오피스 2018이 출시되었다. 한/글 2020. 2019년 10월 10일에 한컴오피스 2020이 출시되었다. 한/글 2022. 2021년 10월 8일에 한컴오피스 2022(버전 12.0)가 출시되었다. 한글뷰어. 한글과컴퓨터(한컴)에서는 2010년도를 전후해 이후 지속적으로 꾸준히 윈도우, 맥, 리눅스(페도라, 우분투), 안드로이드, 아이폰등 다양한 컴퓨터및 스마트폰등의 운영체제에서 한글을 열어볼 수 있는 한글뷰어를 무료로 제공해오고 있다. 한편 한글과 컴퓨터는 한/글 뷰어에서 전자문서인 PDF파일이나 SVG형식 포스트스크립트 등의 파일 형식으로의 인쇄출력을 지원해주고있다. 관련 제품. 한/글 815. 8·15광복을 기념하여 출시된 제품이다. 한/글 97에 기반한(R4) 제품으로, 제품이 담긴 CD와 함께 1년간의 사용권을 판매하였다. 이 제품에 포함된 한/글 97은 표 아이콘을 제공하는 등의 개선점이 있고 한/글 96 기반의 국제판도 함께 포함되었다. 넷 한/글. 매달 사용료(개인 월 2,500원)를 내고 인터넷에서 인증을 받아 사용하는 한/글 제품이다. 한/글 2002 SE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전, 클립아트, 일부 글꼴 데이터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이용할 수 있고, 원격 저장소(10MB)도 제공하였다. 다큐맨.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 작은 한/글 프로그램을 내장하여 USB를 연결할 수 있는 어느 PC에서나 한/글 작업이 가능하게 만든 제품이다. 한/셀. 넥스소프트 사가 개발한 스프레드시트 제품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비슷한 인터페이스와 사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한글과컴퓨터에 넥셀을 매각하였다. 엑셀의 일부 고급기능이 없는 대신 저가로 공급되어, 중소기업 등을 대상으로 인기를 끈 제품으로 현재 한컴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판매되고 있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넥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 한/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한/쇼. 한/쇼는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한 기능을 지닌 프레젠테이션 제품으로 한컴오피스 제품군의 하나이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한컴 슬라이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장점. 다양한 기능. 책 만들기. 다른 한글과컴퓨터 제품처럼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같은 외국 소프트웨어의 훌륭한 대체품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한/글로 워드 프로세싱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부 출판 기획자는 미적 감각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 위주의 전자 출판이나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 교재 편집 등에 활용하고 있다. 그 실례로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은 모민원 씨, 위형복 씨등의 고급 사용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한컴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는 한/글 2.1을 이용한 악보 만들기,문서 클리닉등의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 노하우들이 독자 기고등으로 실려서 출판 기획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외래어. 한/글은 일본어, 노르웨이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그리스어(헬라어), 독일어 등의 외래어를 쓸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인 정체자, 중국어 간체자 및 번체자, 일본 한자 및 가나 뿐만 아니라 구결 및 옛 한글(한양 사용자 정의) 지원 글꼴과 같이 배포한다. 또한 한/글에서는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말인 헬라어를 로마자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 연구를 위해 헬라어를 사용해야 하는 성서학자, 신학생, 기독교 성직자, 신학서적 기획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간이 전자 출판. 한/글은 사용자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급 사용자들은 한/글을 이용하여 단순한 전자 출판을 하기도 한다. 한/글을 이용하면 적절한 전자출판 항목으로는 1.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교재 2. 각주와 표가 많이 들어가는 논문 3. 교회 주보, 소식지처럼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표와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문서 4. 일본어 가나, 헬라어 등을 빠르게 입력해야 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외국어나 성서 교재등이 있다. 책 만드는데 유용한 기능들. 한/글은 스타일 기능 제공, 반복되는 글자나 그림을 넣을 수 있는 바탕쪽, 간단한 도형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 바탕쪽 기능은 한 개의 파일 내에서 페이지마다 들어가는 글자와 그림을 각 페이지마다 다르게 넣을 수 있는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페이지마다 들어가야 하는 글자나 그림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의 마스터 기능과 거의 비슷하다. 그외 자간, 행간 조절, 그림 위치 조정, 한글, 로마자, 숫자와 특수 문자에 맞춘 다른 글꼴 사용 및 자간 조절 등 간이 전자 출판에 필요한 기능들을 한/글에서는 세심하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글은 한글글꼴인 윤명조, 영문은 영문서체인 Garamond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글의 맞춤법 기능은 교정/교열의 수고를 일부 덜어준다. 물론 한/글의 맞춤법은 오자(誤字)를 고치는 수준의 기계적 맞춤법 기능이므로, 편집자는 원고를 인쇄하여 여러 번에 걸친 교정교열을 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글은 문서 작성을 위해 개발된 워드프로세서이기 때문에, 북 디자인, 카드, 달력, 편지지 등의 팬시(Fancy) 디자인에는 쿼크 익스프레스, 인디자인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가 더 적합하다. 공공기관에서 널리 사용. 한/글은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인 우체국에서 문서작성과 표계산을 할 때에 한/글과 한/셀을 사용한다. 옛한글 사용. 한/글의 강점은 옛한글을 한글자판을 옛한글 자판을 설정하면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옛한글로 쓴 중세국어 문서(훈민정음, 석보상절, 두시언해, 노걸대, 훈민정음 언해, 악장가사인 용비어천가 등의 고전시가), 고전소설과 근대소설 사이를 잇는 신소설 등을 연구하는 국어국문학자 및 학생들의 학문에 도움이 된다. 단점. 호환성 문제. 비록 HWP 형식이 한국 내부에서는 DOC, PDF, RTF 파일 대신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편이지만, 이 프로그램이 한국 밖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HWP 형식의 문서를 읽어들이지 못하며, 여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서의 내용이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글과컴퓨터 뷰어'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또 2010년 6월 29일 한/글 문서 파일형식(hwp)을 공개하였고, 개방형 문서포맷인 OWPML은 KS에 등록하여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네이버오피스나 MS-WORD에서 HWP파일을 지원한다. 한 때 파일 이름에 컴퓨터의 고유 코드 페이지(한국어 윈도의 경우 KS X 1001)에 없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오류를 표시하고 파일을 읽고 쓸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약자나 속자로 된 한자 이름이 포함된 파일). 이 문제는 한/글 2010 이상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클립보드를 이용한 작업에서 사용하는 데이터를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 인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근래에 들어 아래아 한글의 클립보드 데이터 호환성 문제에 많은 진전이 있었고, 아래아 한글 마크업 언어 체계의 정비 등을 통하여 호환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미흡한 전자 출판 기능. 한/글은 전자출판 소프트웨어에서 비한다면 인쇄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다.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에서 제공되는 CMYK 색조합 기능,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인쇄 방식에 따라 망점의 개수를 다르게 조정해 주는 망점 조정 기능 등이 한/글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 성능 저하. 한/글은 새로운 판이 출시될 수록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기타. ASV 파일 형식. ASV는 Auto Save File(자동 저장 파일)의 준말로, 한글 문서 작업 도중에 컴퓨터(혹은 프로그램이)가 갑자기 잘못된 종료가 되었을 경우에 자동으로 저장(백업)이 되는 파일이다. ASV형식의 파일은 잘못된 종료 이후 한/글 최초실행시에 자동으로 로드되며, 로드 즉시 삭제된다. 3.0b 부록 민중가요. 3.0b제품은 CD-ROM 1장으로 설치 프로그램이 제공되었다. CD-ROM은 PC에서 읽고 쓰는 형식이지만 일반 오디오CD 트랙을 PC에서 읽고 쓰는 데이터와 함께 제공할 수가 있었다. 3.0b제품 설치 CD가 그랬는데, PC에서는 CD-ROM으로 인식되었으나 오디오에 오디오CD처럼 넣으면 민중가요가 한 곡 감상이 가능하였다. 그 곡은 가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였다. 점유율. 2014년 기준 대한민국 내 점유율은 20% 정도이다. 전세계 점유율은 0.4%이다. 수출. 일본에도 수출한 적 있으나 매출이 좋지 않아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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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429
마이크로소프트 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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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아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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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케냐 공화국(, ) 또는 케냐(Kenya, )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 루오족, 칼렌진족, 캄바족, 키시족, 메루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백인, 인도인, 아랍인 등 비아프리카계 민족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는 5,221만 4,791명(세계 27위)이다. 역사.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 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있었다. 독립 전의 케냐.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다.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줘 두 열강 사이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 사태하에 있었다.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이끄는 케냐 아프리카 국민연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독립 정부 조직을 주도하게 되었다. 케냐의 독립.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1년 후 케냐타는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인민연맹(KPU, Kenya People's Union)이 정당 활동을 금지한 1969년 이후로는 KANU가 유일한 정당이었다. 케냐가 자유화 되기까지. 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선거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해 힘입어 재선되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들했다. 그러나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 무지개 연립(National Rainbow Coalition, NARC)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를 대표로 내세워 당선시켜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 무지개 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행정 구역. 케냐는 47개의 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리. 면적은 224,961 제곱마일, 혹은 582,646 Km2이며, 케냐는 마다카스카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6위로 면적이 넓다. 인도양 해변측은 낮은 평지가 있으며 내륙에는 고지대 산맥과 고원이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고지대는 거대한 단층 계곡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 서쪽에는 기름진 고원이 있다. 케냐 고지는 아프리카에서 하나의 가장 성공적인 농업지대이다. 고지에는 케냐의 가장 높은 지대가 있다(또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음) : 또한, 5,199미터인 케냐 산맥은, 빙하적 지형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확연히 다르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케냐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인 케냐 열곡에 의해 양분되며 이 열곡대에 의해 지진이 활발하다.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 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기후.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케냐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북반구 나라들과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6-8월은 겨울이다. 그러나 케냐의 겨울은 동북아시아의 겨울과 매우 다른 풍경이다.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날씨 또한 영하로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일교차가 매우 심해 새벽과 밤에는 매우 쌀쌀하게 느껴지며, 낮에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겨울 햇살은 뜨겁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차가워서 땀이 금세 마르고 겨울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기도 많이 없다. 그만큼 날씨가 상대적으로 더 쌀쌀하다는 것이다. 케냐는 적도에 있지만 연평균 기온이 16도이다. 정치. 케냐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직접 선거를 통해 뽑는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것은 물론 케냐의 7개 주 중 적어도 5개 주에서 표의 25% 이상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10년 개정된 케냐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효투표의 과반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47개 카운티의 절반 이상에서 최소 25%의 득표를 해야 한다. 부통령과 내각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한다. 국회를 붕게(Bunge)라고 부르며 단원제를 실시한다. 총 의석 수는 224석이다. 주민. 200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키쿠유족(17.15), 루햐족(13.83), 칼렌진족(12.87), 루오족(10.48), 캄바족(10.08), 케냐의 소말리족(6.18), 키시족(5.71), 미지켄다족(5.08), 메루족(4.29) 순으로 나타났다. 이외 백만명 이하인 민족들은 10.98%를 차지했다. 언어. 2010년 헌법 7조에는[국민어, 공식어, 기타 언어]는 “(1) 공화국의 국민어는 스와힐리어다. (2) 공화국의 공식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다. (3) 국가는 (a) 케냐 인민의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 보호하며 (b) 토착어, 케냐의 수화, 점자 및 장애인에게 접근가능한 다른 의사소통의 형식과 기술의 발전과 사용을 증진한다.”라고 명시했다. 국민어는 영어(national language)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암암리에 국가어(State language)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이고, 모든 영역에서 하위단계는 스와힐리어, 고위단계에서는 영어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법정의 경우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전용한다. 교육의 경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 스와힐리어가 영어를 누르고 상층부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논자들이 말하는 아프리카비관주의의 일면이다. 케냐는 독립 이후 영연방의 정회원국이다. 종교. 2009년 인구조사(2010년 8월 발간)에 따르면 기독교는 82.99%-그중 개신교(47.66), 로마 가톨릭(23.46), 기타(11.87)-, 이슬람교는 11.21%로 나타났다. 이외 극소수의 힌두교도와 정령신앙도 있다. 교육.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문맹률도 높다. 경제.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인근 국가들과 달리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서방 자본을 유치해 독립 이래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가 부패와 일부 수출품에 대한 의존 때문에 대니얼 아랍 모이 정부 시절에 경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경제 개혁의 실패로 IMF 원조가 몇 번 중단되기도 하였다. 2002년 새로 들어선 정부는 부패척결과 외국 원조의 확보에 노력을 치중하고 있으며, 케냐의 경제는 농업과 관광업에 의존한다. 산업. 주 산업은 의류산업이며 케냐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이다. 관광업. 한 해 3000억 원 이상이 관광업 수입이다. 기아문제.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케냐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1.9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볼 때,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7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아주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목할만한 수준이다. 문화. 많은 케냐인은 직접 조각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 장신구 등도 직접 만든다. 또한 모든 작품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재료를 자연에서 채취한다. 또한 케냐는 현재까지도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 육상 경기의 양대 산맥이자 최대의 라이벌로 불리며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중·장거리 달리기와 마라톤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축구는 현재까지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이 전무하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는 6번 출전했지만 그나마도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등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제 관계. 한국. 대한민국과 1964년 2월 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같은 해 나이로비에 주케냐 한국대사관이 설립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다. 현재 한국과 케냐는 대한항공직항편이 운항 중단으로 폐선되어 주로 중동지역을 경유해서 출입국을 한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나 사실상 남한의 우방국인 이 나라는 지금까지도 북한의 상주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88 서울 올림픽 때 케냐는 선수단과 임원을 서울로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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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우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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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맞춤법
한글 맞춤법( - 法)은 한국어의 맞춤법으로, 맞춤법은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역사. 조선 시대에는 연철이라 하여 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 예를 들면 '잡히다'를 소리나는 대로 '자피다'로 썼다.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말의 원형을 밝혀 쓰는 (잡-히-다) 방식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분단 이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분단 직후에도 계속 쓰이다가 도전을 받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안의 표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며 극단적인 형태주의의 조선어 신철자법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완화되었지만, 아직 북측의 철자법은 남한보다는 형태주의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953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기법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학계의 반대로 그러지 못한 것이다. 1980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을 내었고, 현재는 문교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에서 1988년 1월 19일 고시하여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는 규정을 따른다. 1988년 개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한자어에서는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였고(다만 두 음절로 된 6개 한자어만 예외로 사이시옷을 붙이기로 함), "가정란/가정난" 등으로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두음법칙 규정을 구체화하면서 "가정란"으로 적도록 하였다. 띄어쓰기 규정에서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씀도 허용하였고, 성과 이름은 붙여 쓰도록 하였다. 수를 표기할 때도 종전에는 십진법 단위로 띄어 쓰던 것을 만 단위로 띄어 쓰도록 하였다. 따라서 123456은 '십이만 삼천사백오십육'이다(종전에는 '십 이만 삼천 사백 오십 육'이라고 썼음). 현행 맞춤법의 구성. 한글 맞춤법은 6개의 장, 15개의 절, 57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문장 부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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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함수
수학에서 주기 함수(週期函數, )는 함숫값이 일정 주기마다 되풀이되는 함수이다. 일상적인 예로, 시계 시간은 시간에 대한 함수로서 주기 함수이다. 즉, 시계의 행동은 날마다 똑같다. 정의. 실수 함수. 0이 아닌 실수 formula_1 및 실수 부분 집합 formula_2 및 실수 함수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4를 주기 함수라고 하고, 실수 formula_5를 formula_4의 주기(週期, )라고 한다. 이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기본 주기.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 및 실수 formula_21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실수 formula_22를 formula_4의 기본 주기(基本週期, )라고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성질.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의 주기와 0의 집합을 formula_29로 적자. 즉, 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덧셈에 대하여 닫혀있다. 다시 말해, 따라서 formula_29는 덧셈에 대한 아벨 군을 이룬다. 기본 주기.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7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만약 주기 함수 formula_37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면, 상수 함수이거나, 아니면 모든 곳에서 불연속이다. 예. 실수를 그 소수 부분으로 대응시키는 함수 formula_4는 과 같이, 주기 함수이며, 그 기본 주기는 1이다. 삼각 함수는 모두 주기 함수이다. 사인 · 코사인 함수는 formula_45, 탄젠트 함수는 formula_46를 기본 주기로 한다. 상수 함수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실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디리클레 함수 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유리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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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즈 다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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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나이로비(Nairobi)는 케냐의 수도이다. '시원한 물'을 뜻하는 마사이어 '에와소 니이로비(Ewaso Nyirobi)' 또는 '엥카레나이로비(Enkarenairobi)'에서 현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이로비의 인구는 2백5십만에서 3백만 정도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해발 1700m로 이 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899년 몸바사와 캄팔라를 잇는 우간다 철도 건설을 위한 조달 기지로 세워진 것이 유래가 되어 20세기 초 전염병과 화재 이후 완전히 재건되어 오늘날의 대도시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고 1963년 케냐의 독립과 함께 케냐의 수도가 되었다. 1998년 8월 7일에는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 나이로비에서만 213명(미국인 12명 포함)이 사망했다. 미국 대사관이 나이로비 중심지에 있어 인명 피해가 특히 심했다. 1999년 2월 17일에는 터키의 쿠르드인 반군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주 나이로비 그리스 대사관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추방되었다. 행정. 나이로비에는 두 개의 유엔 기구가 소재해 있다. 대한민국 주케냐대사관은 1964년 나이로비에 설립되었으며 아프리카 주재 공관 중 가장 역사가 깊다. 교통. 나이로비의 공항은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이다. 예전에 주 공항이었던 윌슨 공항은 오늘날에는 주로 국내선용으로 쓰인다. 고속도로로는 대표적으로 티카와 나이로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인 티카 도로가 있다. 자연. 나이로비 시 안에는 특이하게도 야생동물 보호지인 나이로비 국립공원(Nairobi National Park)이 있어서 맹수들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사건, 사고. 2014년 5월 5일 급조폭발물이 티카 도로의 버스 안에서 터지면서 3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영향으로 버스에 큰 구멍이 난 후 전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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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부베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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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찰스 로버트 다윈(, , FRS,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릭 교수는 '다윈은 사람과(科)에 속한 두 종(種)이 서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바있다.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있다. 생애. 유년기.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 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 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 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학창시절. 청소년기. 그는 할아버지 에라스무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의대진학.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6세 때인 1825년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박물학과의 만남. 흑인 해방노예 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이때 배운 박제제작법은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의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수집을 자랑한 에딘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신학과 진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1831년에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부. 부친의 권유.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버지는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 고전, 수학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성공회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지만 찰스 다윈의 관심은 신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육촌 윌리엄 다윈 폭스와 함께 필수는 아니었던 박물학이나 곤충 채집에 심취했다. 폭스의 소개로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다윈은 학내에서 헨슬로가 만든 정원을 둘이서 자주 산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헨슬로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성직자이면서 지질학자였던 아담 세지윅에게 배워, 층서학에 평범하지 않는 재능을 발휘했다. 자연신학. 동시에 당시 다윈은 신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읽었고, 모든 생물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완벽한 형태로 창조했다고 하는 설을 납득하고 믿었다. 자연철학의 목적은 관찰을 기반으로 한 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기술한 존 허쉘의 새로운 책이나, 알렉산더 훔볼트의 과학적 탐험 여행 등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의에 자극되어 열대 지방에서 박물학을 배우기 위해서 졸업한 뒤 동년배들과 테네리페섬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그 준비 단계로 세지윅의 웨일스 지질 조사에 참가했다. 여행. 이때의 그의 취미는 음악이나 후에 잔인하다며 그만둔 사냥이었다. 입학을 했던 1827년 여름에는 조시아 2세와 그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엠마 웨지우드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 몇 주간 머물렀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륙 여행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일주를 허용하였고,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글호. 탐험 항로. 비글호 탑승. 다윈은 성공회 교회에서의 목회보다는 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세지위크 교수를 따라 북웨일스에 지질학 연구를 위해 여행했다. 헨슬로의 추천으로 1831년 12월 27일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이 이끄는 〈비글〉이라는 이름의 탐험선에 박물학자로서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원하는 선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선실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다윈은 피츠로이의 함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는 피츠로이가 의도한대로 거의 5년이나 지속되었고, 다윈은 그 시간 대부분을 육지에서 지질학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자연사 수집물을 수집하면서 보냈다. 그동안 비글호는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렸다. 견본수집. 그는 관찰한 것, 이론적 고찰을 꼼꼼히 기록했고, 가끔씩 견본들을 편지와 함께 가족들을 위해 잡지 사본을 캠브리지로 보냈다. 그는 지질학, 딱정벌레 수집, 해양 무척추동물에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초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위해 열심히 견본을 수집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겪게되는 반복적인 뱃멀미로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물학 노트는 조용한 휴식기간에 수집한 플랑크톤으로부터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의 각 섬, 그리고 섬의 해변과 내지에 사는 거북과 새들이 동일한 과에 속하는 종임에도 환경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그를 깊이 매료시켰다. 지질학 책을 읽다. 세인트 줄리안 항구의 첫 번째 정박에서, 다윈은 높은 화산바위 절벽의 흰띠가 조개껍질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피츠로이는 그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의 1권을 선물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융기와 침강을 한다는 육지의 균일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윈은 라이엘이 주장한 것을 목격하고, 지질학에 대해 이론화하고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된다. 브라질에서 다윈은 열대우림을 보고 기뻐했지만, 노예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대하는 노예제도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고대동물 화석 발견. 파타고니아에 있는 푼타아틀라에서는 절벽의 오래되지 않은 조개껍질 옆에서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날씨나 재해로 인한 변화의 징조없이 최근에 멸종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였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메가테리움(Megatherium) 곧 땅에서 나무뿌리를 먹으며 사는 늘보의 화석을 치아와 뼈장갑의 연관관계를 이용해서 밝혀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아르마딜로가 가지고 있는 장갑의 거대한 확장판처럼 보였다. 그 최초의 발견은 영국에 귀국했을 때 큰 흥미를 불러일어켰다. 그는 가우초(목동)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내륙으로 지질학을 탐사하며 화석을 더 수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혁명의 시기에 원주민이나 식민지 사람 모두를 바라보는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통찰을 가지게 했으며, 두가지 종류의 레아(남미 타조)가 분리되긴 했지만,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는 계단 모양의 널빤지 같은 평원과 해안에서 길러진 조개껍질을 목격했는데, 이것은 일련의 융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엘의 두 번째 권을 읽고, 종의 창조의 중심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발견과 라이엘의 부드러운 연속과 종의 멸종에 관한 개념에 도전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원주민과의 만남. 비글호에는 세 명의 파타고니아 원주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비글호의 항해에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이들이었다. 첫해에는 잉글랜드에서 보냈고, 이번 여행에서는 선교사로 참여하였다. 다윈은 이들이 정감있고, 문명화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친척들은 야생에서 길들인 동물들처럼 거칠고, 비참하고, 저급한 야만인들처럼 보았다. 다윈에게는 이들의 차이가 문명의 진보의 차이이지, 인종적 저능함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과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전통이 다른 것 뿐이지, 인종이 우열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반(反)진화론 기독교인들이 다윈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하여 인간과 유인원사이의 중간진화단계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고 철회했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과학자 친구들과는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수 없는 다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속되었고, 선교는 포기를 하고 만다. 지미 버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아내를 얻어 다른 원주민들처럼 살았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윈은 칠레에서 지진을 경험했고, 높은 파고에 휩쓸린 홍합층을 포함한 육지가 막 솟아올랐던 징후를 보았다.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 조개껍질과 모래 해변에 자라는 여러 화식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육지의 융기와 바다 섬의 침강 그리고 산호 보초 그들을 둘러싸 산호섬이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더 오래된 “창조의 중심”에 덧붙여진 야생에서 증거를 찾았고, 흉내지빠귀(mockingbird)가 칠레의 그것과 연관은 있지만, 섬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왔던 섬마다 약간씩 변종된 거북이 껍질 형태가 있다는 것을 총독에게 들었지만, 식용으로 잡은 거북이를 잡아먹은 후에도 그것들을 수집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대류 쥐캥거루와 오리너구리가 너무 특이해 보여 이 두가지가 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에보리진)들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이지만,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글호는 코코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사를 했으며, 그 조사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다윈의 일기를 보고서는 한권의 평가서로 합치자고 제안을 한다. 다윈의 저널은 결국 자연사에 대해 분리된 세 번째 권으로 다시 쓰여진다. 케이프타운에서 다윈과 피츠로이는 존 허셀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에 대한 찬사를 썼는데, “기적의 진행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자연”을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여는 대담한 숙고이자, 다른 것에 의해 멸종된 종의 대체”라고 찬사를 했다. 배가 고향을 향해 갈 때 다윈은 노트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흉내지빠귀, 거북, 포크랜드 제도의 여우가 옳다면, "종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그런 사실들”(such facts undermine the stability of Species)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would를 undermine 앞에 덧붙였다. (‘종의 안정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그런 사실들’로 번역된다.) 그는 이후 그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빛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1836년까지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나온 화석과 현생 생물과의 비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동물의 지리적 변이에서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한다. 진화론 연구.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스러우스베리에 있는 고향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캠브릿지로 서둘러 갔다. 헨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비글 호 항해기»로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곧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왕립외과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그의 저널을 다시 쓰기 위해 캠브릿지에서 숙박을 했다. 그는 최초의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조류의 표본에 대한 발표를 했다. 조류학자 존 굴드는 곧 다윈이 검은새 그로스-비크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를 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을 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맬더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티노도 그의 신념의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 굴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 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과 진화론.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을 수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부분은 당시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쪽 선조가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진화론의 찬반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그의 발표는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차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 <가축과 재배 식물의 변이>와 사람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인간의 유래>(1871) 등이 있다. 생애 후반. 기타.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그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유언.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 다윈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기고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심리학.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심리학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그의 예상대로 동물행동학과 진화심리학 등은 그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학문분야이다. 저서. Charles Darwin bibliography 기타. 자폐증. 영국일간지 더 타임스는 2009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 진화론을 창시한 다윈의 뛰어난 창의력은 자폐증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는 보도를 하였다. 더 타임스는 "다윈은 아마도 자폐증의 한 종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던 것 같다. 다윈의 독창성은 이 자폐증 증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교의 마이클 피츠제럴드 정신의학 교수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으로 다윈은 놀라운 집중력, 보통 사람 이상의 집요함,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미세한 부분을 보는 엄청난 능력, 한 과제에 평생 매달리는 끝없는 열정, 독창적 연구를 하는 독립적인 정신 등을 보유했다."고 설명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WHO의 ICD-11이나 미국의 DSM-5가 개정되며 삭제된 상태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2004년에 쓴 책 «Autism and Creativity: Is There a Link between Autism in Men and Exceptional Ability?»에서 다윈 외에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루이스 캐럴 등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신과 의사인 Sabina Dosani는 '피츠제럴드가 그들의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으며 전기작가도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피츠제럴드의 주장은, 당사자들을 면담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해당 인물들의 전기들 중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사례를 취사선택하여 내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의사과학"이라고 하였다. Mark Osteen은 자폐에 관한 컨퍼런스를 정리하여 낸 책 «Autism and Representation»에서 역시 피츠제럴드의 주장을 "비합리적"(absurd)이라고 비판한다. 한편 뛰어난 전문가가 되거나 창의성을 보이는 인물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윈가의 내력. 2010년 후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IBM이 후원하는 계통학 추적 프로젝트 따라 다윈의 고손자인 크리스 다윈의 DNA 추출하여 Y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다윈의 조상은 4만5천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이주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에 살다가 1만2천년 무렵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다윈의 유전자는 ’R1b’라는 집단으로 분류됐는데, 크로마뇽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샤가스병. 다윈은 비글호에 탑승해 여행하던 중, 남미에서 흡혈곤충에게 물려 샤가스병에 걸렸다고 한다. 말년의 편지. 다윈이 말년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한 편지가 무려 19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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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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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카프카의 삶. 가족.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꽤 부유층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정신적 폭력. 콘골드(1972)에 따르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로 그리고, 카프카 자신에 따르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 좋으며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만족감에 충만한,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과 지식을 갖춘 진짜 카프카'로 그린다. 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넷째 아들로 남부의 피세크(Pisek) 가까운 곳의 유대인 마을인 오섹(Osek)에서 프라하로 이주해, 외판원으로 몇 년간 일한 후, 액세서리를 파는 소매점을 열었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로, 소매점은 곧 15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성장한다. 그곳에서 헤르만 카프카는 포데브라디(Poděbrady)의 양조업자 야콥 뢰비(Jakob Löwy)의 딸 율리(1856-1943)와 결혼하였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 헤르만에게 아들 카프카는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에 불과했고,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던 헤르만은 틈만 나면 아들 카프카에게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 실제 교육학자 전용오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는 인간과 교육 강의에서 자녀에게 열등감을 심는 말인, 자녀에게 비교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 바 있으니, 카프카가 부친의 말 때문에 느꼈을 감정은 열등감과 수모감이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동생들. 카프카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만다. 여섯 살 때인 1889년에는 여동생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가, 또 1년 뒤에는 발레리(발리,1890-1942)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리(오틀라, 1892-1943)가 태어났지만,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 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육.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상인의 기질이 보이지 않자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휴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락 등 평생을 두고 교유하게 될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1901년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카렐 대학교)에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년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대인의 전통을 배우는 시간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대교 회당(시나고그, 신약성서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회당이 유대인 등의 종교적 공동체인 시나고그임.)가서 예배를 하는 종교 교육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지 광장(Stare Mesto)의 킨스키(Kinský) 궁전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직업. 1907년 11월 1일 그는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밥벌이(Brotberuf, 브로트베루프)라고 불렀다. 1908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죽기 2년 전인 1922년까지 그곳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에 무관심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직접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으며,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 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인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 등이 속한 그룹을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로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다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카프카는 공무 출장과 노동자들과의 접촉 등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통찰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년. 1912년 그의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있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종종 만났다. 두 번이나 약혼하기도 했지만 1917년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부터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 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음은 정설로 이해된다. 또 편두통, 불면증,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증도 있었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들이 나타났다. 그는 채식이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굶주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목은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졌고 1924년 6월 11일 지즈코프(Žižkov)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개인적인 면.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을 만큼 쓰는 것 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타계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대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대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화부', '단식광대',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 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들의 수사적 관습을 은근히 나타낸다. 카프카의 문학 세계.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문체.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따르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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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카 소렌스탐
안니카 쇠렌스탐( , 1970년 10월 9일 ~ )은 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록들을 남긴 골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톡홀름 출생으로, 12세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 유학 중이던 1992년에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93년에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1994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신인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95년에는 3승을 거둬 상금왕에 올랐다. 2003년 5월에는 여성 선수로는 58년 만에 미국 프로 골프(PGA) 투어에 초대받았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뱅크 오브 아메리칸 콜러니얼 (총상금 500만 달러)에 출전한 그녀는 2라운드 합계 5오버파 145타 96위에 머물러 컷 오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해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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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종종 영웅적인 인물로도 묘사된다. 음악의 성인(聖人) 즉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생애. 집안.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어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루트비히가 죽기 전에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일종의 음악적 부적으로 그의 손자 루트비히의 방에 걸려있었다. 루트비히는 같은 궁정에서 테너로 고용되어 노래를 불렀으며 때때로 부업으로 건반악기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던 외아들 요한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의 딸이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현재 본의 본슈트라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 세례를 받은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자신도 본인의 생일을 12월 16일로 여겨왔으나 직접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요한은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되어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형의 반대를 꺾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베토벤은 아버지 요한에게서 처음 음악을 배웠다. 흔히 어린 베토벤을 이야기할 때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하며 요한을 가혹한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적는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알아차리고, 같은 궁정 동료 등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베토벤의 교육을 맡겼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된 질 판 덴 에덴, 가족의 후원자인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베토벤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엄격한 교육 방침 안에서 종종 울기도 했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가 침대에서 자고있던 베토벤을 건반 앞으로 끌고가는 일도 있었다. 베토벤이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 요한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 볼프강과 딸 나넬을 어릴 때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것을 보고,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일곱살의 베토벤이 여섯살의 "신동"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에서의 생활1780–1792. 베토벤의 교사.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출판작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가 출판된다. 베토벤은 1782년부터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하다가 1784년부터 궁정 예배당에서 임금을 받는 직원으로 일했다. 1783년에 출판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선제후"(Kurfürst)라는 부제로 불린다.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같은 해에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임금 약간을 지불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히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에 돈을 대주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이 시기 앞으로 도움이 될 될 여러 인연을 만들었다.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가문도 그 중 하난데, 그곳에서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이닝로부터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앞으로 평생 친구가 될 폰 브로이닝 가문의 약혼자인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도 이 시기 만났다. 폰 브로이닝 집안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던 차에 또다른 가정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 손님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이 본에서 사는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궁정악단. 1785–90년에는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것은 그의 초기 출판물이 끌었던 미지근한 반응과 베토벤 가족의 지속적인 문제 때문일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1795년 빈을 처음 방문한 동안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궁정에서 알콜중독의 결과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을 가족 부양을 위해 베토벤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고, 가르치는 일과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가족의 수입에 더 기여했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 글루크, 파이시엘로의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인 요세프 라이하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작곡가, 플루티스트,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톤 라이하와도 친구가 되었다. 1790년부터 1792년까지 베토벤은 성장 범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음)을 작곡했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일련의 변주곡에서 그의 교향곡 3번과 유사한 주제를 확인했다. 베토벤이 그의 첫 번째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마도 네페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1790년 본의 문학 협회는 선제후에 의해 요제프 2세의 사망 기념으로 칸타타, WoO 87을 의뢰하고, 이후 레오폴드 2세의 신성로마 황제 즉위 축하 기념으로 추가로 칸타타, WoO 88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황제 칸타타는 그 당시에 연주된 적이 없었으며 1880년대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에 의해 "하나부터 열까지 베토벤", 그리고 그의 음악이 고전주의의 전통과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양식의 예언자로 묘사될 때까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남아있었다. 베토벤은 아마도 1790년 말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을 시기의 크리스마스 무렵 본에 들렀을 때 처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들은 1년 반 후인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본에서 다시 만났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곡(《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과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하이든에게 보여준다. 하이든은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베토벤은 고데스베르크의 무도회에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했다. 그 당시 베토벤은 나이든 스승과 함께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발트슈타인은 베토벤이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당신은 오랫동안 좌절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빈으로 갈 것입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빈 – 초기1792–1802. 하이든과의 만남. 베토벤은 1792년 11월 프랑스에서 전쟁이 퍼졌다는 소문이 있는 가운데 선제후의 도움으로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그는 빈에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최근 사망한 모차르트의 후계자라는 널리 퍼진 감정에 대해, 그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고 뚜렷하게 모차르트적 풍미를 가진 작품을 쓰면서 화답했다. 그는 즉시 작곡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와 연주에 전념했다.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서 그는 대위법을 마스터 하려고 했다. 그는 또한 이그나츠 슈판치히 밑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이 시기의 초기에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주로 이탈리아 성악 작곡 형식에 대하여 이따금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적어도 1802년까지, 그리고 아마도 1809년까지 계속되었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베토벤은 선제후에 의해 본으로 귀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는 도리어 빈에 남는 것을 선택했고, 요한 알브레흐츠베르거 및 다른 스승들과 함께 대위법 공부를 계속 했다. 여하튼, 이 시기까지 1794년 10월에 그랬던 것처럼, 본이 프랑스로 넘어가서 사실상 급료나 복귀의 필요성 없이 베토벤을 남겨둘 것이라는 것이 그의 고용주들에게는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 활동.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유명세를 타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음악적 성숙. 베토벤은 1798년과 1800년 사이에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작의 요청으로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을 작곡했다. 그것들은 1801년에 출판되었고 역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그는 1799년에 그의 생애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였던 칠중주, Op. 20을 완성했다. 1800년과 1803년에 그는 교향곡 1번과 2번의 초연으로 하이든, 모차르트에 이어 젊은 작곡가 세대 중 가장 중요한 세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멜로디, 음악적 발전, 변조 및 조화의 사용, 감정의 묘사는 모두 그를 그의 영향으로부터 차별화 시켰고, 그의 초기 작품들 중 일부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생겨났던 영향을 고조시켰다. 그의 첫 교향곡의 초연을 위해 1800년 4월 2일 부르크 극장을 고용하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칠중주, 교향곡 1번, 그리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후자의 세 작품은 모두 미발표)을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일반음악신문"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이 "오랜만에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표현한 이 연주회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이 굳이 독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1800년 말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사로부터 많은 수요가 있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 Op. 16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피아노와 목관 5중주)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임), 무치오 클레멘티(, 1752–1832)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그의 초기 작품들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의 것들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이 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교습. 1799년 5월 헝가리 귀족인 안나 브룬스비크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작은 딸 요제피네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요제피네는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베토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요제프 다임 백작과 얼마후 혼인을 했다(베토벤은 이후에도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다.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 요제피네와 베토벤은 다시 인연을 이어 나가지만, 역시나 브룬스비크 가족의 압력으로 그들의 관계는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1801년 후반에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가족을 통해 젊은 백작부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를 만났다. 그는 1801년 1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줄리에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신분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서 그것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1802년 그는 현재 일반적으로 "월광 소나타"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Op. 27-2를 출판했다. 이 소나타는 줄리에타에게 헌정되었다. 그에게는 그 밖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를 가르쳤는데, 작곡가가 된 리스는 베토벤이 사망한 지 11년 후, 어린 시절 친구에 관한 중요하고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억들을 모아놓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전기적 노트"Biographische Notizen über Ludwig van Beethoven"》를 프란츠 베겔러와 함께 공동으로 썼다. 후에 스스로 유명한 음악 교사가 된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도 있다. 음악 사업. 1801년 봄 그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 43》을 완성,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고 같은 해 빈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프로테우스 신화를 음악적,철학적으로 신비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연주되었고,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 버렸다. 1802년 이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스파가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에 작곡된 작품에 대해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하는 것 외에도 카스파는 베토벤이 이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베토벤의 선호에 반하여) 형에게 그의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거나 개작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순순히 응하고 있는데, 이유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그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적' 시기1802–1812. 난청.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영웅적' 양식.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이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런 인정만으로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가 1808년 12월에 조직하여 널리 광고된 대규모 자선 공연의 초연에는 교향곡 5번과 6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미사곡 C 장조, 소프라노를 위한 셰나와 아리아, "아! 못 믿을 이여", 합창 환상곡 c 단조 등에서 발췌한 것이 포함되었다. (체르니와 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를 포함한) 많은 청중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습이 부족했고, 많은 중단과 시작이 수반되었으며, 환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베토벤이 음악가들에게 "나쁜 연주, 잘못된 연주, 또 다시!"라고 외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재정적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808년 가을, 왕립극장에서의 자리를 거절당한 후, 베토벤은 카셀 궁정의 카펠마이스터라는 좋은 급료를 받는 자리를 당시 웨스트팔렌 왕이었던 나폴레옹의 세 번째(막내)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었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Georg Ludwig Kinsky, 1882-1951) 백작, 그리고 로브코비츠 공작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 만이 베토벤에게 합의된 날짜에 주기로 한 연금에 대한 자신의 몫을 지속적으로 지불하였다. 장교직 복무로 소환된 킨스키 공작은 1812년 11월 말에서 떨어진 후 사망하였다. 로브코비츠 공작은 그의 연주실을 만들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였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산,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그는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빈에서 도망쳐야 했다. 베토벤은 다시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는 몹시 괴로워하며 가난하게 죽었다. 베토벤은 법률에 의지하였고, 1815년에 그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빈에 도의 건강이 악화된 것과 함께 베토벤의 출판사는 이 기간 동안 현저하게 줄어든 생산량을 설명한다. 올해의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에는 "현악 사중주 10번" E♭ 장조, Op. 74 ("하프"), 그리고 요제피네의 언니인 테레제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24번", F# 장조, Op. 78 ("테레제를 위하여”) 등이 있다. 괴테. 1809년 말에 베토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희곡 에그몬트의 부수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받았다. 1810년에 등장한 결과물(Op. 84, 서곡과 9개의 악곡으로 구성됨)은 베토벤의 "영웅적" 양식에 잘 들어맞았고, 베토벤이 괴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괴테의 시 세 편을 설정으로 하여 노래를 만들었다(Op. 83). 괴테의 친구이자 안토니 브렌타노의 사촌인 베티나 브렌타노(Bettina von Arnim, 본명: 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1785–1859)로부터도 시인에 대해서 배웠다(또한 이때 베티나는 베토벤에 관하여도 괴테에게 글을 썼다). 비슷한 맥락의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사중주 세리오소"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현악 사중주 11번" F 단조, Op. 95와 "대공 삼중주"라는 별칭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후원자 루돌프에게 헌정한 "피아노 삼중주 7번" B♭ 장조, Op. 97이 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불멸의 연인.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베토벤보다 열 살 아래인 안토니 브렌타노는 베토벤의 가족 소개를 제공했던 베티나 브렌타노의 이복 동생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였다. 안토니는 베토벤과 짧은 시기 동안(1811-1812년) 바람을 피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토니는 1812년 말에 남편과 함께 빈을 떠나 베토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또는 그와 서신 왕래가 분명했다). 말년에 그녀는 베토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친절하게 말했다. 찬사1813–1822. 가족 문제. 1813년 초 베토벤은 어려운 감정적 시기를 겪은 것 같았고 그의 작곡의 결과도 떨어졌다. 그의 개인적 모습도 퇴화되었다—일반적으로 깔끔했었다—공공장소에서의 그의 태도, 특히 식사할 때 그의 태도가 그랬다. 가족 문제가 이것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베토벤은 1812년 10월 말에 그의 둘째 동생 요한을 방문했다. 그는 요한이 이미 사생아를 가졌던 테레제 오버마이어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기를 바랬다. 그는 요한에게 관계를 끝내도록 설득할 수 없었고 지역 시민 및 종교 당국에 호소했지만 요한과 테레제는 11월 8일에 결혼했다. 그의 동생 카스파의 결핵으로 인한 질병과 궁극적인 죽음은 점점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카스파는 한동안 아팠다. 1813년에 베토벤은 그에게 1500 플로린을 빌려 주었고 그 상환금은 결국 복잡한 법적 조치로 이어졌다. 1815년 11월 15일에 카스파가 사망한 후 베토벤은 당시 아홉살이었던 아들 카를의 양육권을 놓고 카스파의 아내 요한나와 오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베토벤은 카스파에 대한 성공적인 지원으로 소년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지명되는 것에 성공했었다. 카스파의 유언장에 대한 늦은 유언 보충서로 그와 요한나는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 베토벤은 1816년 1월에 조카를 양육권에서 빼내는데 성공했고, 1818년에 그를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안 다시 카를 주변의 법적 절차에 몰두했다. 귀족 계급(the nobility), 란트법(Landrechte)에 대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베토벤은 자신이 고귀한 출생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1818년 12월 18일에 빈의 민사관으로 사건이 옮겨져 단독 후견인 자격을 잃었다. 그는 1820년에 격렬한 법적 투쟁 끝에 양육권을 되찾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카를이 위압적인 태도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조카의 삶에 자주 간섭했다. 전후의 빈. 1813년 6월 베토벤은 마침내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769–1852)이 이끄는 연합에 의한 비토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중요한 작곡을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 받았다. 발명가 요한 네포묵 멜젤(Johann Nepomuk Mälzel, 1772–1838)은 그의 기계 오케스트라 팬하몬니콘의 행사를 기념하는 작품을 쓰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큰 밴드를 위한 작곡을 썼기 때문에 멜젤이 만든 기계로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대안으로 베토벤은 오케스트라를 위해 교향곡을 다시 작성, 첫 번째 부분에서 추가 작업을 하고 작품 이름을 웰링턴의 승전(Op. 91, "전쟁 교향곡"이라고도 함)으로 변경했다. 이것은 12월 8일에 그의 일곱 번째 교향곡, Op. 92와 함께 전쟁 피해자를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12월 12일에 반복되었다. 오케스트라에는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와 도메니코 드라고네티(Domenico Dragonetti, 1763–1846)를 포함하여 당시 빈에 있었던 여러 유명하고 떠오르는 음악가가 포함되었다. 그 작품은 1814년 1월과 2월에 베토벤의 연주회에서 반복되는 공연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연주회는 베토벤이 그의 경력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사망 당시 그의 재산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될 은행 주식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베토벤의 새로운 인기로 인해 피델리오의 부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개정판은 빈에서 7월에 개막했을 때 호평을 받았으며 다음 해에도 그 곳에서 자주 상연되었다. 베토벤의 출판사인 아르타리아(Artaria)는 스무살의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오페라의 피아노 악보를 준비하도록 의뢰했으며,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끝났습니다!"라고 새겼다 – 베토벤은 "오 남자, 그대 스스로를 도우라."를 추가했다. 그해 여름, 베토벤은 5년 만에 처음으로 피아노 소나타(27번 e 단조, Op. 90)를 작곡했다. 그는 또한 1814년 11월에 시작된 빈 의회에 온 많은 국가 원수들과 외교관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애국적인 분위기에서 음악을 제작한 많은 작곡가들 중 한 명이었는데, 메이너드 솔로몬은 Op. 136의 영광의 순간과 이와 유사한 합창 작품들에 대해, "베토벤의 인기를 넓혔지만, 진지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814년 4월과 5월에 그의 대공 삼중주에서 연주한 베토벤은 독주자로서 마지막으로 공개 출연했다. 작곡가 루이스 슈포어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피아노는 음정이 좋지 않았고, 베토벤은 그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술가의 미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매우 슬펐다." 1814년부터 베토벤은 멜젤에 의해 디자인 된 나팔형-보청기를 사용하였다(이 중 다수는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1815년의 Op. 94는 시 "희망에 부쳐"("An die Hoffnung")의 표현력 있는 두 번째 설정을 포함하고 있다. 1805년 Op. 32의 첫 번째 설정(요제피네 브룬스비크를 위한 선물)과 비교하면, "훨씬 더 극적이고 ... 전체 정신은 오페라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작품 외에도 그는 두 개의 첼로 소나타(Op. 101-1,2)와 몇 개의 작은 작품을 시작했지만, 여섯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포기했다.(희망에 부쳐, Op. 32) 중단. 1815년과 1819년 사이에 베토벤의 생산량은 다시 그의 성숙한 삶에서 유일무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 원인 중의 하나가 1816년 10월부터 1년 이상 앓았던 긴 병("염증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전기 작가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Elliott Solomon, 1930–2020) 은 이것이 그의 조카 카를과 관련된 현재 진행중인 법적 문제들, 그리고 베토벤이 현재의 음악적 경향과 점점 더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초자연적인 독일 낭만주의의 발전에 공감하지 않고(슈포어, 하인리히 마르슈너,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에서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순환형식에 대해 작은 양식과 서정적 분위기의 소품으로 임박하고 있는 낭만주의의 파편화에 저항했고, 바흐, 헨델 및 팔레스트리나에 대한 연구로 향했다. 1817년 멜젤이 새로 개발한 메트로놈에 대한 베토벤의 지지를 구하고 얻었을 때 옛 인연이 갱신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완성한 몇 가지 주요 작품으로는 1818년의 "하머클라비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29번", Op. 106과 알로이스 야이텔레스의 시를 설정으로 고전주의의 레파토리에 연가곡을 도입한 1816년의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 98이 포함된다. 1818년에 그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의 일부가 될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 1818년 초에 베토벤의 건강이 좋아졌고, 열한살인 그의 조카 카를은 1월에 그와 함께 움직였다(카를의 어머니가 1년 안에 그를 법정에서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곧 베토벤의 청력은 다시 심각하게 악화되어 베토벤과 그의 대화 상대자들은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 공책에 글을 써야했다. 이 "필담장"(筆談帳)은 이 시기 이후 그의 생애에 대한 풍부한 기록 자료이다. 여기에는 음악, 비즈니스 및 개인 생활에 대한 토론이 포함된다. 그것들은 또한 그의 접촉에 대한, 그리고 그가 의도한 그의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조사, 그리고 음악 예술에 대한 그의 의견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그의 가계 관리는 다소 개선되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도왔던 호텔 주인 여자 나네테 슈트라이허(Nanette Streicher, 1789–1833)는 계속해서 약간의 지원을 제공했고 마침내 숙련된 요리사를 찾았다. 영국에서 베토벤이 행했던 존경심에 대한 감사의 후기는 그 해 소유주인 토마스 브로드우드(Thomas Broadwood)가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발표해 베토벤이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열 필하모닉 협회가 제안한 그 해의 런던 방문을 단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활. 광범위한 서신과 로비활동을 포함하는 카를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법적 투쟁으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1819년에 베토벤의 주요 작곡 프로젝트를 촉발시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올로모우츠(현 체코) 대주교로서 루돌프 대공이 추기경-대주교로 승진했다는 발표였는데, 이것은 1820년 3월 루돌프의 올로모우에서의 취임을 위해 "장엄미사", Op. 123을 촉발시켰다. 다른 하나는 출판인 안토니오 디아벨리(Antonio Diabelli, 1781–1858)가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체르니, 여덟 살의 프란츠 리스트 등 50명의 비엔나 작곡가를 초청하여 그가 제공한 주제에 대한 각 변주곡을 작곡하도록 한 것이다. 그가 제공한 주제에 각각. 베토벤은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1819년 중반까지 이미 서른세 개의 "디아벨리 변주곡", Op. 120이 될 스무개의 변주곡을 완성했다. 이 두 작업 중 어느 것도 몇 년 동안 완료될 예정이 작품이 아니었다. 1819년의 중요한 헌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40개의 변주곡을 작곡한 루돌프 대공 주제로 쓰여진 G 장조 피아노곡 "오 희망(O Hoffnung)", WoO 200이었다. 1818년에 대공이 40개의 변주곡을 썼을 때 "오 희망, 당신이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우리의 고통을 달래주길 바랍니다"(O Hoffnung, du stählst die Herzen, du milderst die Schmerzen)라는 원고의 문구들을 바탕으로 베토벤은 그의 제자를 위한 노래 주제를 작곡했다. 다음 세기에 가장 친숙한 모습 중 하나였던 오늘날의 페르디난트 시몬(Ferdinand Schimon, 1797–1852)의 베토벤 초상화는 예술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쉰들러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그 특별한 모습의 표현에서, 장엄한 이마 ... 단단히 닫혀진 입과 껍질 모양의 턱, ... 다른 어떤 그림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 루돌프를 위한 미사곡을 집필하겠다는 베토벤의 다음 해 결심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의 동기가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교도로 태어났지만 그가 자란 본에 있는 궁정에서 행한 종교의 형태는 메이너드 솔로몬의 말에 따르면 "교회와 합리주의 사이에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을 허용하는 타협 이데올로기"였다. 베토벤의 일기(1812년과 1818년 사이에 가끔 간간히 간직한 일기)는 인도, 이집트, 동양의 종교 철학과 리그베다의 저술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1821년 7월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개인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 내 가장 깊은 마음을 보시고 인간으로서 가장 양심적으로, 그리고 모든 경우에 인류, 하느님, 그리고 자연이 내게 부여하는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엄미사의 스케치 중 하나에서 그는 "내면과 외면의 평화를 위한 간청"을 썼다. 베토벤의 위상은 1819년/1820년과 1820년/1821년 시즌에 연주자 프란츠 시버 게바우어(Franz Xaver Gebauer, 1784–1822)가 빈에서 행했던 일련의 연주회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교향곡 8곡 모두 연주되었으며 여기에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와 미사곡 C 장조가 더해졌다. 출판인 모리츠 슐레진저(Moritz Adolf Schlesinger, 1798–1871)가 베토벤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19년이었다. 그 결과 슐레진저는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 곡과 마지막 사중주를 확보하게 되었다; 베토벤에게 있어 슐레진저가 끌리는 것 중 하나는 독일과 프랑스에 출판 시설을 가지고 있고, 저작권 침해 문제가 생길 경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영국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이 1820년에 슐레진저와 계약한 세 개의 소나타 중 첫 번째 소나타는 소나타 당 30 두카트(미사 완료 지연)로 그해 말 출판사에게 발송되었다("피아노 소나타 30번", Op. 109, 안토니 브렌타노의 딸 막시밀리안에게 헌정됨). 1821년 초, 베토벤은 류머티즘과 황달에 시달리는 건강 상태가 다시 한 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슐레진저에게 약속한 나머지 피아노 소나타("31번", Op. 110은 12월에 출판됨)와 미사곡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 1822년 초 베토벤은 결혼한 그의 형제 요한과 화해하기를 원했다. 1812년의 요한의 결혼은 그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제 요한은 (당시의 대화책에서 목격된 바와 같이) 단골 방문객이 되었고, 그의 작품 중 일부의 일부의 소유권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등 그의 사업상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또한 반대편인 카를의 승인에는 비록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소득을 지원하는 것을 포함하여 조카의 어머니와 화해를 구했다. 1822년 말 두 번의 수수료가 베토벤의 재정 전망을 향상시켰다. 11월 런던 필 하모닉 협회는 교향곡을 위한 커미션을 제안했다. 그는 그가 작업하고 있는 교향곡 9번의 적절한 보금자리로서 기쁘게 받아들였다. 또한 1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갈리친(Nikolai Borisovich Galitzin, 1794–1866) 공작은 베토벤에게 현악 사중주 세 개를 요청하며 원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베토벤이 당시 그와 함께 살던 조카 카를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각 사중주 당 50 듀카드의 높은 수준으로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다. 1840년, 베토벤의 초기에 관하여 최고의 영향력 있는(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이 된 안톤 쉰들러는, 1822년 동안 작곡가의 무보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그가 1814년부터 베토벤 서클의 일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쿠퍼는 "베토벤은 그의 도움을 크게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를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제안했다. 마지막 해1823–1827. 1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작품에 대한 빈의 수용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1822년에 방문한 독일의 음악평론가 요한 프리드리히 로흘리츠(Johann Friedrich Rochlitz, 1769–1842)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나의 음악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 "피델리오" 그들은 그것을 줄 수 없으며 듣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교향곡: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내 협주곡: 누구나 자신이 만든 재료만을 갈고 갑니다. 독주곡: 그것들은 오래 전에 유행에서 벗어났고 여기의 유행이 모든 것입니다. 기껏해야 슈판치히는 가끔 사중주를 파헤칩니다." 따라서 그는 베를린에서 미사곡과 교향곡 9번을 초연하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 그의 빈 추종자들이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지역 공연을 준비해달라고 간청했다. 베토벤이 승리했고 교향곡은 1824년 5월 7일에 "장엄미사" 섹션과 함께 처음으로 연주되어 캐른트너토르테아트르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베토벤은 공연의 비트 타임 동안 지휘자 미카엘 움라우프(Michael Umlauf, 1781–1842) 옆에 서 있었다. 움라우프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인 것을 배려한 콘트랄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 1803–1877)와 오케스트라에게 그를 무시하라고 경고했지만, 청각장애 때문에 베토벤이 목격하기 전까지 뒤따른 박수조차 알지 못했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게 된 베토벤은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는 공명함을 눈으로 확인,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은 "지치지 않는 천재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고 표현했고, 카를 체르니는 교향곡에 대해 "너무 신선하고 활기차며 정말 젊은 정신을 들이마셨다 ... 그는 때때로 확실히 낡은 가발이 머리를 흔들도록 이끌었지만, 이 독창적인 사람의 머리에서는 언제나처럼 많은 힘과 혁신, 그리고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고 기록했다. 공연은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기 때문에 베토벤에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하지는 못했다. 5월 24일에 프로듀서가 그에게 최소한의 수수료를 보장한 두 번째 공연은 참석률이 낮았다. 조카 카를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 나라로 입국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베토벤의 마지막 공개 공연이었다. 베토벤은 쉰들러가 부정 행위를 하거나 티켓 영수증을 잘못 관리했다고 여겼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해 졌다. 1826년에 두 사람은 화해를 했음에도, 결국 베토벤의 비서는 쉰들러에서 카를 홀츠(슈판치히 사중주단의 두 번째 바이올린 연주자)로 교체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사망.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 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사인(死因)과 건강에 대해. 만성 복통이나 설사는 일생의 골칫거리였다. 사후에 실시된 부검에서 간, 신장, 비장 외에도 많은 내장에 손상이 보였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정설은 없다. 최근 베토벤의 모발에서 통상의 100배 가까운 납이 검출되어 눈길을 끌었다. 납은 청각이나 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중금속이다. 청각 장애에 대해. 베토벤의 난청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796년 경부터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베토벤은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귀경화증(귀硬化症) 설. 전음성(伝音性)의 난청. 중이(中耳)의 이소골(耳小骨)의 "망치 · 다듬이 · 등자" 중 등자뼈가 경화되어, 진동을 전달하지 못하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병. 현대에 와서는 수술로 개선된다. 베토벤의 난청이 귀경화증인 논거(論據)로, 베토벤이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도 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제자에게 "거기는 이상해!"라고 주의를 준 일화를 들 수 있다. 이는 귀경화증 특유의 사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게 되지만 피아노의 고음부 진동은 약간 느낄 수 있는 성질로 보인다. 또 베토벤은 치아와 피아노 건반을 스틱으로 연결함으로써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일화도 이 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꼽힌다(고도난청 이상은 감음성 난청이며 골도음(骨导音) 이용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의학적 분석으로는 이들 증상으로부터 도출된 가상 오디오그램과 실제 귀경화증 및 페이젯병의 현미경 사진과의 비교 등에서 이과 의사의 다수의견이 귀경화증이라는 논문이 있어 유력설이 되고 있다. 또한 귀경화증이라면 전음성 난청으로, 고도 난청이나 전농이 되는 것은 드물며, 현대의 의학 분류에서는 고작 중도난청(中度難聴)으로 생각된다. 선천성 매독 설. "증발성 연고를 몸에 칠했다"(수은의 가능성, 당시 매독의 치료법 중 하나)고 하는 기술이 있어 논거로 삼고 있다. 나중에 베토벤의 모발을 분석한 결과 수은이 검출되지 않았고, 게다가 매독은 현기증을 병발하는데도 그런 말이 없어 선천성 매독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납 중독 설. 성인의 낮은 수준의 납에 대한 계속적인 피폭으로 청각장애를 발생시킨다는 것은 박성균 외 논문 등에서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전농(全聾)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귀결될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전술한 박성균 외 논문에서는, 30dB 정도가 경도난청(軽度難聴)이다(단, 이 청력이라고 하면, 리스트를 칭찬했다는 등의 베토벤의 행동에 설명이 붙는다). 베토벤이 어떤 경위로 납에 오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다음과 같다.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2003년 8월 1일 방송분)에서도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백만불 미스터리는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을 납중독으로 추정했다. 메테르니히 정부 대책 설. 실제로는 베토벤이 전농(全聾)이 아니었다는 설이다. 21세기의 현대에서는, 베토벤이 그 자유주의적 주장으로 메테르니히 정권 하에서는 반체제 분자로 여겨지고 있던 것을 들어, 난청이었다고 해도 전농까지는 악화되지 않고, 도청을 막기 위해서 필담(筆談)장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그 연장으로서 "베토벤은 암호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가설에 기초한 "비밀첩보원 베토벤"이라는 서적도 출판되었다. 이 설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베토벤 말년의 1823년 4월 13일, 데뷔 직후인 리스트의 연주에 임해 그를 높게 평가한 에피소드가 남아 있지만, 귀경화증에 의한 난청이라면 몰라도 전농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지적이나, "하녀에게 계란을 던졌다"라고 하는 류의 유명한 일화도, 이것은 "하녀로 변장한 스파이"에의 정당방위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완전실청 및 청각장애를 앓았던 작곡가들로는 윌리엄 보이스와 가브리엘 포레가 있지만, 이들의 작곡 활동은 그 후 저조한 모습을 보인 데 비해 베토벤은 그 사이에 많은 중요작을 썼다는 점도 지적된다. 예술관. 동시대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E. T. A 호프만은 베토벤의 예술을 칭송하며, 자신들의 낭만주의 진영에 베토벤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베토벤은 당시 낭만주의의 형식적인 통일감을 무시한, 감상과 감정 표현으로 대표되는 예술과는 거리를 두었다. 베토벤이 주목한 것은 동시대의 문학에서는 괴테와 실러, 또 그 이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들의 것이며, 본업인 음악에서는 바흐, 헨델과 모차르트 등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이 "전위"였는가의 여부는 많은 음악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린다. "베토벤은 전위가 아니다"라고 단언한 하라 히로시는 당시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변주곡 등의 구조 모델을 준수하고 발안한 새로운 장르라는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메트로놈의 활용", "모국어에 의한 속도 표시", "피아노의 구조 개선과 음역의 확장", "악곡의 대규모화", "대담한 관현악 편곡", "연주 불가능에의 도전", "소음의 도입"(전쟁 교향곡) 등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외양, 사생활, 성격. 안톤 쉰들러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베토벤의 신장은 168 cm로, 당시의 일반 서양인 남성으로는 평균 이상이었으며, 신체는 근육질에 건장한 편이었다. 순수 백인으로서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천연두 반흔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초상화와 동상, 라이프 마스크와 근래에 밝혀진 다양한 여성 관계 등을 볼 때 용모가 미남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정은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눈빛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많은 숭배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옷을 차려 입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 체르니는 처음 베토벤을 만났을 때 로빈슨 크루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에서 부스스 곤두선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방 안은 난잡한 반면, 목욕과 빨래를 선호하는 등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결벽증처럼 손을 집요하게 씻는 버릇도 있었다. 또한 생애 최소 60회 이상 이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빵과 날달걀을 넣고 푹 삶은 수프와 생선, 고기, 마카로니 앤드 치즈를 좋아했다. 또 와인을 즐겼고, 브랜드는 값싼 토커이 포도주를 선호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커피는 한 잔을 끓일 때마다 60알의 원두를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은 모순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 반대인 측면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사귐성 있게 친절하고 순진하면서도, 엄격하고 냉혹하며 무도할 정도의 행동을 하는 등 기분의 흔들림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빈에서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경애받고 있었고, 그것은 성대한 장례식과 다수의 참석자를 그린 서화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토벤 괴짜설은 메테르니히 정권에 의한 유언비어라는 견해도 있다 사상. 학자들에 의하면, 베토벤은 가톨릭 교도였지만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종교적 작곡가로 분류되는 바흐, 브루크너 등과는 달리 제도적 그리스도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와 플라톤 등의 고대 그리스 사상에 공감하여 괴테나 실러에게서도 나타나는 범신론적인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10번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와 그리스 세계의 융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 2부에서 시도한 것인데, 베토벤의 생존 동안에는 1부만 발표되었고 2부는 베토벤 사후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종교관은 결국 교향곡 9번과 장엄미사 등의 후기 작품에서 궁극적 보편성과의 우주적 합일이라는 결론을 보았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등 인도 철학에도 심취했고, 철학자 칸트의 사상도 언급하며 칸트의 강의에 출석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었다. 정치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고, 자유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에서는 반체제 분자로 보여지기도 했다. 천문학에 관한 책들도 깊이 있게 읽고 있었던 그는, 본 대학에서 청강생 자격으로서의 수강이나 베게너 가문에서 교육을 받은 것 이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당한 교양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음악가에 대한 영향 평가. 베토벤의 음악계에 대한 기여는 매우 컸고, 그 이후의 음악가는 크든 작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가들은 궁중이나 유력 귀족을 섬겼으며, 작품들은 공식 및 사적 행사에 있어서의 기회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베토벤은 그런 후원자와의 주종 관계 및 그 주종 관계에 따른 음악을 거부하고 대중을 향한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가의 효시가 되었다. 음악가=예술가임을 공언한 그의 태도 표명, 또 한 편의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창작이었다는 것은 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자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특히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시와 음악의 융합"이라는 이념에 촉발되어, 낭만주의 음악의 급선봉으로서 그 이념을 더욱 밀고 나아가 악곡을 탄생시켰다. 또 그 표현을 위해 풍부한 관현악법으로 음향 효과를 증대시켰고, 베토벤을 이용한 고전적 화성법을 해체하고,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혁신적 화성으로 조성을 확대했다. 반면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에 살면서 바그너파와 선을 긋고, 어디까지나 베토벤의 견고한 구성과 극적인 전개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 형식의 구축이라는 측면을 이어받아 낭만주의 시대 속에서 음악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유지했다. 그러나 선율이나 화성 등 음악 자체에 넘치는 서정성은 낭만주의 이외의 누구도 아니었다. 또한 이 고전주의 형식에서의 극적인 전개와 구성이라는 측면은 브람스 뿐 아니라 드보르자크와 차이콥스키, 그리고 20세기에는 쇤베르크, 벨러,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라헨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음악. 세 개의 시기. 역사가 윌리엄 드랩킨은 이르면 1818년에 한 작가가 베토벤 작품의 세 개의 시기 분할을 제안했으며 그러한 분할은 (종종 시기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날짜나 저작물을 채택하지만) 결국 안톤 펠릭스 쉰들러, 프랑수와-요셉 페티스와 빌헬름 폰 렌즈를 시작으로 모든 베토벤 전기 작가가 채택한 관습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중에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구조 내에서 하위 기간을 식별하려고 했다. 단점은 일반적으로 네 번째 기간, 즉 작업이 덜 고려되는 본에서의 초기 기간을 생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범주의 작업에 대해 수년에 걸친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의 차별적 발전을 무시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는 지속적인 발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진행으로 베토벤의 생애 내내 쓰여졌다; 교향곡이 모두 선형적인 진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모든 유형의 작품에서, 아마도 세 개의 기간으로 그룹화 되는 "현악 사중주"(1801-1802년의 Op. 18, 1806-1814년의 Op. 59, 74 및 95, 그리고 1824년부터의 오늘날 '후기'로 알려진 사중주)는 이 분류에 가장 깔끔하게 들어맞는다. 드랩킨은 "이제 우리는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 프로그램 노트, 녹음과 함께 쓰인 에세이, 모든 베토벤 연주회가 있는 한, 우리가 별개의 양식적 기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본 1782 - 1792. 1785년까지 베토벤이 쓴 열 개의 초기 작품을 포함하여 약 40개의 작품은 베토벤이 본에서 살았던 해부터 살아 남았다. 베토벤은 1785년에서 1790년 사이에 작곡을 거의 포기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출판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적 반응의 결과 일 것이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영향력 있는 "Musikalischer Almanack" ("음악적 연감")의 1784년 리뷰는 베토벤의 노력을 랭크 초보자의 노력과 비교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면밀히 모델링 한 1785년의 "초기 피아노 사중주 세 개", WoO 36는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한 그의 의존성을 보여준다. 베토벤 자신은 본 시기의 작품들에 Op.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나중에 그의 경력에 사용할 목적으로 재작업을 위해 비축한 것이다. 예를 들어, 1805년 빈에서 출판된 여덟 개의 노래, Op. 52의 몇몇 곡들은 본 시절 쓰여진 것들이고, 1796년 빈에서 작곡되고 출판된 현악 오중주 E 장조, Op. 4는 1792년 쓰여진 관악 팔중주를 재구성 한 것이다. 찰스 로젠은 본이 빈에 비하면 산만한 곳이라고 지적한다. 로젠은 당시의 베토벤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성숙한 작품을 잘 알지 못했을 것 같았고, 오히려 그의 초기 스타일이 훔멜이나 클레멘티의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커먼은 본 단계에서의 베토벤은 소나타 스타일의 그의 작품보다 오히려 그의 성악곡으로 더 유명하다고 제안한다. 그는 1792년 빈으로 이주하여 그가 알려지게 된 장르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길을 열었다. 첫 번째 시기. 전통적인 "첫 번째 시기"는 1792년 베토벤이 빈에 도착한 후 시작된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본에서 보다는 작곡을 덜 한 것 같고, 그의 피아노 삼중주, Op. 1은 1795년에야 출판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빈 양식"(오늘 날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나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을 익혀 그 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1795년부터 1800년까지의 그의 작품은 표준보다 규모가 크다(예를 들어 3악장이 아닌 4악장으로 소나타를 쓴다); 전형적으로 그는 미뉴에트와 트리오 보다는 스케르초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종종 극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극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며 템포와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을 포함한다. 하이든이 Op. 1의 세 번째 삼중주가 청중들이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점차 작품의 범위와 야망을 넓혔다. 초기의 중요한 곡으로는 두 개의 교향곡 (1번에서 2번까지: 2번부터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의 도입이 시도됨),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 18 세트 (1번에서 6번까지), 첫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2번까지), 그리고 첫 열네 개의 피아노 소나타 (1번에서 12번까지, 그리고 19번과 20번) 등이 있다. 중기. 그의 중간의 (영웅적) 시기는 잠식하는 청각 장애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위기가 닥친 직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당시의 위기를 빈 고전주의 형식을 재발견함으로써 탈출하고 있다. 즉, 빈 고전파 두 선배보다 소재로서의 동기의 발전과 전개 · 변용을 철저히 중시하고, 형식적 · 구성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이후 코다의 확장 등 고전주의 형식의 확대에 성공했다. 중기에는 영웅주의와 투쟁을 표현하는 대규모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중기의 작품에는 여섯 개의 교향곡 (3번에서 8번까지), 마지막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5번까지 ), 삼중 협주곡 및 바이올린 협주곡, 5개의 현악 사중주 (7번에서 9번까지 3개의 "라주모프스키"와 10번 "하프", 11번 "세리오조"), 여러 피아노 소나타 (16번에서 18번, 그리고 21번에서 27번까지),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포함된다. 교향곡 부문에서는, 기존 소나타 형식의 비약적 확대 ("3번"), 선율의 바탕이 되는 동기와 리듬의 철저한 조작 ("5번", "7번"), 표제 음악의 시도 ("6번"), 악장의 연결 시도 ("5번", "6번"), 5악장 형식 시도 (6번) 등 혁신적인 기법이 창조되어 지고, 그 작품들은 고전주의의 양식미와 낭만주의를 지극히 높은 차원에서 양립시키며, 음악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 5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어둠→밝음"(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른다)이라는 도식은 극성 구성의 규범이 되어, 이후 낭만주의의 많은 작품이 이를 추종했다. 이러한 베토벤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연주 인원의 증가와 연결됐고, 그 인원수로 만들어진, 삶을 고무하는 듯한 강음이나 흐느끼는 듯한 약음은 많은 음악가를 자극했다. "중기"는 때때로 "영웅적" 작곡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베토벤 학문에서 점점 더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용어는 중기의 대체 이름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중기 전체를 설명하는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교향곡 3번과 5번과 같은 일부 작품은 "영웅적"으로 설명하기 쉽지만 그의 교향곡 6번 ("전원")이나 그의 피아노 소나타 24번과 같은 다른 작품은 그렇지 않다. 후기. 베토벤의 후기는 1810-1819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청력 저하로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과 맞물려, 동생 카스파의 사망, 그리고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위한 법적 투쟁과 카를에 대한 기대와 집착으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서 두 번째 위기를 겪게 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바흐와 헨델의 작품을 포함하여 오래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으며(특히 호모포니의 전성기였던 당시의 바흐의 유산인 대위법, 즉, 폴리포니를 연구하였고, 그의 중기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대위법을 대대적으로 도입시키고자 함), 이후의 결과물로부터 첫 번째 시도로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 중에는 푸가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서곡 "헌당식" (1822년)는 이러한 영향을 통합하려는 초기 작업이었다. "후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는 이 시기에 그는 거의 10년 만에 가장 먼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건반으로 돌아왔다. 후기 작품에는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28번에서 32번까지)와 "디아 벨리 변주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마지막 두 개의 소나타 (4번에서 5번까지), 후기 현악 사중주 (대푸가와 12번에서 16번까지), 그리고 매우 큰 세력을 위한 두 개의 작품: 장엄미사와 교향곡 9번 등이 포함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지적인 깊이, 형식적인 혁신, 강렬하고 매우 개인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현악 사중주 14번", Op. 131에는 7개의 연결된 악장이 있다. 9번째 교향곡은 2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하고 있고, 3악장에서는 일반 교향곡의 악장에서 완서악장으로의 교체를 이루고 있으며, 4악장에서는 독창 · 합창을 포함한 성악을 사용, 지금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 악기. 베토벤이 젊은 시절 주로 사용했던 피아노 중 하나는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이 제작한 것인데, 발트슈타인 백작이 선물한 것으로 여겨진다. 1786년부터는 슈타인의 사위인 요한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와 전속 계약을 맺었음을 시사하는 근거들이 있다. 1796년 11월 19일 베토벤은 슈트라이허에게 “어제 전날 당신의 포르테 피아노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갖고 싶어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슈트라이허는 슈타인의 사업을 남겨둔채 1803년에 자신만의 기업을 설립하는데, 베토벤은 슈트레이허의 제품을 계속 이용한다.하고 1817년에는 특별히 그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글도 남긴다. 이외에는 칼 체르니가 회상 한 바와 같이, 1801년에 월터 피아노를 두었다. 1802년에는 월터에게 친구 즈메스칼(Zmeskall)에게 선물할 피아노 포르테를 주문제작하기도 했다. 1803년에는 에라르 그랜드 피아노를 받았다. 에라르 피아노는 음의 지속시간이 특별히 긴 것이 특징으로, 베토벤은 이 피아노를 갖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작곡을 시작한다. 그러나 1810년에는 더 이상 그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1824년에 동생 요한에게 선물로 주었다. 1818년에는 토마스 브로드우드로부터 브로드우드사()의 피아노를 선물로 받았다. 이 선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긴 했지만 음이 살짝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는 베토벤의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베토벤은 피아노의 음량을 키우기 위해 피아노를 개조할 방법을 알아보기도 하였다.1827년 베토벤이 사망 할 때까지 슈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있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악기는 4중 그라프 피아노였다. 베토벤은 이 6 ½ 옥타브 피아노를 받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후에 이 피아노는 윔머 가문에 팔렸다가 1889년에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게 인수되었다. 유산. 본의 베토벤 기념비는 1845년 8월 탄생 75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언스트 율리우스 하넬의 제작으로 뮌스터광장(Münsterplatz)에 설치, 공개되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첫 작곡가 동상이었다. 제막과 함께 열린 음악 축제는 본 베토벤할레의 매우 성급한 건축을 위한 자극제였다(프란츠 리스트의 촉구에 따라 한 달 이내에 설계 및 제작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베토벤 기념비가 1880년 5월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조각가 카스파 폰 춤부슈의 제작으로 베토벤광장(Beethovenplatz)에 설치, 공개되었다(흉상은 앞선 1812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설치, 공개되었다. 이것은 조각가 프란츠 클라인에 의해 제작되었다). 본 중앙에는 그의 출생지인 베토벤하우스라는 박물관이 있다. 같은 도시에서 1845년부터 음악축제인 베토벤페스트가 개최되었다. 이 축제는 처음에는 비정기적 이었으나 2007년부터 매년 조직되었다. 이라 브릴러 베토벤 연구센터는 박물관, 연구센터, 그리고 이 삶과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강의 및 공연의 호스트 역할을 한다. 그의 음악은 두 개의 보이저 탐사선과 함께 우주 공간으로 보내진 지구의 이미지, 일반적인 소리, 언어 및 음악의 광범위한 샘플을 포함하는 축음기 음반, 보이저 금제 음반에 두 번 등장한다. 수성에서 세 번째로 큰 분화구, 베토벤은 주소행성대 1815 베토벤이 그러하듯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조각가 아놀트 푀르스터가 제작한 베토벤의 7피트 주조 청동상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퍼싱 스퀘어 역에 설치, 공개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시자인 윌리엄 앤드류스 클라크 주니어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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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칸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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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판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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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 , , , )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영어 명칭인 비엔나()로도 알려져 있다. 다뉴브강이 도시 내부를 흐르며 인구는 약 190여만 명이고 대도시권 광역 인구는 약 230여만 명이다. (2020년 1월 12일 기준) 역사. 원시 시대부터 빈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15년 쯤에 로마군이 경계선을 세워 “빈도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게르만족이 거기를 차지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이 빈을 통치하였다. 독일 황제군이 900년대 후반에 빈을 정복하였고, 1150년에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주요 관저가 되었다.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리로서 번영하였다.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전성기 시절엔 인구 250만을 넘나드는 대도시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두 번이나 빈을 공략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빈에서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경, 빈은 다소 고색창연하기는 하지만 우아한 대도시로 비쳐졌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은 바로크 스타일의 여러 교회를 보듬고 있었다. 법원 건물은 화려와 우울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접시 오른쪽에 은제 식기를 놓고 스페인 식으로 식사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나치 독일군이 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세는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1953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의 점령 아래 있었다. 그래서 인구가 급격히 줄며 빈에 사람들이 여유로워 졌다.인구가 195만명 정도였는데 170만명 정도까지 줄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선포했다. 1990년대 중반에 오스트리아는 EU에 가입했지만 나토같은 연맹은 가입하지 않았다. 주민.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이 대부분이며, 소수의 체코인, 헝가리인, 독일인(원래 독일에 살던 사람들)도 살고 있다. 문화. 시내에는 슈테판 대성당 등 각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는 교회와 쇤브룬궁,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벨베데레궁, 호프부르크 등 문화 시설이 많다. 이처럼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인 동시에, 다뉴브 강변에는 오스트리아 유수의 공업지대가 펼쳐져 있다. 또한 음악의 도시로도 알려졌으며, 베토벤을 비롯한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그리고 말러 등의 음악가들이 여기서 활약을 하였다.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빈 소년 합창단이 유명하다. 2011년에는 빈 카페하우스 문화가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관광지. 1996년, "쇤브룬궁과 정원 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2001년에 시내 중심시 및 그 이 등록대상에 추가되어,에는 이 "빈 역사 지구"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몇 가지 역사적인 건물, 성 슈테판 성당 및 문화 기관을 포함한다. 국제 기구. 유엔 빈 사무국을 비롯하여 빈에 본부가 있는 국제 기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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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강
다뉴브강(, ) 또는 도나우강(, )은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루마니아 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860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다뉴브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강과 브리가흐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철문(鐵門, Iron Gates)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게 된다. 흑해에 가까워지면서 다뉴브강은 도브루자 구릉지대를 만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흑해로 유입한다. 강 하구에서는 세 개의 주요 분류로 나뉘면서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그 면적은 약 5,000km2이다. 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 운하가 1992년 건설된 이후 다뉴브강은 북해의 로테르담으로부터 흑해의 술리나까지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3500km 수로의 일부가 되었다. 다뉴브강으로 운송된 화물량은 1987년에 1950년 수준의 13.3배인 9천 180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 시기에 있었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과정에서 세르비아 교량 3곳이 파괴되어 다뉴브강 운행이 한동안 힘들어졌다가 2002년 그 잔해가 모두 치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명한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가 있다. 명칭과 어원. 다뉴브강은 인도유럽조어 "다누" (*dānu)에서 유래한, 원시 유럽 강의 이름이다. 동일한 어근에서 만들어진 다른 강에는 두나이강, 치비나/다우가바강, 돈강, 도네츠강, 드네프르강, 드네스트르강, 지스나강, 타나강/데아트누강, 투오니강이 있다. 베다어에서, "다누"는 "흐르는, 떨어지다"를 뜻하며, 아베스타어에서는 같은 단어가 "강"을 의미한다. 리그베다에서 다누는 “강의 수로를 막는 용”인 브리트라의 어머니로 한번 등장하기도 했다. 핀란드어로 다뉴브강을 뜻하는 토나바는 스웨덴어, 독일어 명칭인 도나우강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사미어 명칭인 데아트누는 “거대한 강”을 뜻한다. 아베스타어의 경우처럼, 스키타이어의 다누가 “강”에 대한 총칭어일 가능성이 있다. 다나프리스(Danapris)와 다나스티우스(Danastius)에서 전래한 드네프르강과 드네스트르강은 각각 스키타이어 다누 아파라 (*dānu apara, "먼 강")과 다누 나즈디야 (*dānu nazdya, "가까운 강")에서 지속된 것으로 가정한다. 다뉴브강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스트로스"()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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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비엔나는 여러가지의 뜻이 있다. 1.먹는 비엔나 소시지 2.백앤아 남매튜브 팬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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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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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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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델브로 집합
망델브로 집합()은 브누아 망델브로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정의. 망델브로 집합은 다음 점화식으로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c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이를 복소수를 사용하지 않고 정의하려면 모든 복소수를 실수부와 허수부로 나누면 된다. 만약 zn을 (xn,yn)로, c를 (a,b)로 바꾸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가 된다. 이 집합의 이름은 이를 고안한 프랑스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의 이름을 따라서 만들었졌는데, 원래 독일어(또는 이디시어) 이름대로 '만델브로트' 집합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망델브로 집합 표기로 f(z) = z2 + c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함수로 표현하면 f(z) = z2 + c가 된다. 집합을 그리는 방법. 망델브로 집합을 실제로 그릴 때에는 점화식에 따라 zn을 계산하면서 수열이 발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대수적으로 검사하게 된다. zn의 절댓값이 2보다 크다면(즉, xn2+yn2>22이라면) zn은 발산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때의 c는 망델브로 집합에 속해 있지 않는다. 이 때의 2라는 값은 발산하는 수열의 계산을 미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며, 경계값이라고 부른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 안에 속해 있는 점의 경우 zn은 발산하지 않으므로 무한히 계산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n값 이후에 계산을 멈추어야만 한다. 무한히 계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론적인 망델브로 집합이 아닌 이에 근사한 집합만 얻을 수밖에 없다. 수학적인 의미에서 망델브로 집합을 그린다면 집합 안의 부분과 밖의 부분 두 가지만 의미가 있으며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져도 충분하다. 하지만 많은 프랙탈 생성 소프트웨어에서는 처음으로 경계값을 벗어난 zn의 n값에 따라 망델브로 집합 바깥의 영역을 다른 색으로 칠한다. 예를 들어 가장 빨리 발산하는 점은 어두운 녹색으로, 그리고 발산속도가 느려질수록 더욱더 밝은 녹색으로 칠하면 이론적으로 발산속도가 늦어질수록 그 c값은 망델브로 집합에 가깝다는 뜻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망델브로 집합에 색을 입히는 방법에 따라서 예술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한 프랙탈 예술도 있다. 성질. 자기 유사성.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지닌다. 차원. 망델브로 집합의 경계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 자체도 물론 2차원이다.) 쥘리아 집합과의 관계.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Julia set)의 일종의 "지도"가 된다. 망델브로가 그려지는 복소 평면의 각 점이 쥘리아 집합의 초기값과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있는데, 망델브로 집합 내부의 점에 대응하는 쥘리아 집합은 연결 공간인 반면, 바깥의 점들은 연결 공간이 아닌 쥘리아 집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망델브로 집합의 변형. 복소수의 다른 점화식으로 정의되는 다른 프랙탈의 경우도 망델브로 집합에 대응되는 것과 쥘리아 집합에 대응되는 것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종종 해당되는 프랙탈의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으로 정의되고 "피닉스 집합(phoenix set)"이라고 불리는 프랙탈의 경우, 우리는 x와 y의 초기치를 (x1,y1)=(x0,y0)=(0,0)으로 놓고 "피닉스의 망델브로 집합Mandel-type phoenix"을 그릴 수 있고 임의의 c값에 대해서 "피닉스의 쥘리아 집합Julia-type phoenix"을 그릴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합에서도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지도"가 되며 망델브로 집합의 안의 점에 대응되는 쥘리아 집합은 connected이며 바깥의 점에 대응되는 것은 disconnected인 성질이 보존된다. 한 개의 변수 c 대신 여러 개의 변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완전한 지도가 되기 위해서 2차원 이상의 차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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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아 집합
쥘리아 집합()은 가스통 쥘리아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정의. 쥘리아 집합은 주어진 복소수 c에 대해서 다음 점화식에 따라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z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위의 점화식은 만델브로 집합의 것과 같지만, 만델브로 집합은 z0=0+0i일 때 z를 발산하지 않게 하는 c의 집합이라는 점이 다르다. 즉, z와 c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쥘리아 집합은 만델브로 집합과 동일하게 자기유사성을 가지며 가까운 두 점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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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수도(首都)는 한 국가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말한다. 수도에는 대부분 중앙정부가 소재해, 국가원수 등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거점으로 두는 도시이다. 다만 중앙 정부의 소재와는 별도로 그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도시가 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국가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수도가 있기도 하며, 수도에 실제 행정부가 위치하지 않거나, 주요 국가 기관이 여러 도시에 나뉘어 위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부는 프리토리아에, 입법부는 케이프타운에,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있다. 네덜란드의 헌법은 암스테르담을 수도로서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정부와 최고 법원은 헤이그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 현재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서울이 수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충청남도 연기군 등(현 세종특별자치시)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 하였으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후로도 행정 수도 이전 계획은 계속 추진되고 있다. 수도에 대한 고유어 표현은 '서울'이다. 그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어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은 '쇠[鐵]-벌[源]'이나 '설[새: 新, 金]-벌[땅: 羅, 城]'의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를 '(shovl)'이라고 읽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서울을 '徐蔚'로 음차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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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라지바
쿠마라지바() 구마라습, 구마라십, 구마라집, : 344~413)은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의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게 유명하며, 그의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약력.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번역.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쿠마라지바와 김만중. 쿠마라지바는 번역에 대해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으며, 한역에 대해서도 "천축의 풍습은 문채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조선 중기의 문인 서포 김만중은 쿠마라지바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가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음성언어)에서 시작해 글과 노래(즉 시각언어)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여진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당시의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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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행동학
동물행동학(動物行動學, ethology)은 20세기 초엽에 동물학의 한 연구 분야로 시작되었다. 동물의 행동, 행태, 습성 뿐 아니라 진화, 유전, 학습, 환경 등의 관찰을 통하여 동물행동에 대해 이해하려 하는 학문이다. 일반 대중 및 학계에 동물행동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학자로는 1973년 동물 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생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헌(Nikolaas Tinbergen)과 오스트리아 생물학자들인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들 수 있다. 동물행동학의 연구분야.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행동의 인과관계 분석, 행동의 생존값, 행동의 개체발생 및 계통 발생 검토, 네 가지의 큰 과제로 나뉜다. 유전학, 생리학, 신경생물학 등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동물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여러 최첨단 장비와 수학적 통계 분석이 수반되어야 하는 정밀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동물행동학에서는 행동의 정밀한 관찰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개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관찰은 충분치 않다. '우리 개는 초당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걷고 있다. 머리는 어깨 관절 높이와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이 풀린 듯 귀가 옆으로 40도 각도로 쳐져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와 같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해야한다. 동물은 아주 짧은 동안에도 많은 수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이러한 많은 수의 행동들을 관찰해야 하는 학문이 동물행동학이다. 행동. 본능은 동물행동학의 가장 근본적인 관찰대상이며, 동물행동학은 이외에도 생태학적인 관점뿐만아니라 진화에 발달에 영향을 주는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두는 사회행동과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다루기도 한다. 한편 비교심리학(Comparative psychology)은 인간과 여러 동물의 행동을 비교ㆍ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도 교차 학문으로 이에해당한다. 이것은 동물 심리학같은 맥락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적응주의적 접근방법. 적응주의적 접근방법 또는 진화적 접근방법은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다. 주로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행동이 적합도가 집단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유전형질인지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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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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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이다. 생애. 어린 시절.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1885년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카트린 엘렌 생테스()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청년기.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신을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신이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이 해, 그의 첫 책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다. 문학가로서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좌익 성향의 지식인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와 사실상 절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카뮈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는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고 연극들을 번역에 집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사회 활동.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알제리 문제.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사망. 카뮈는 상스(sens)에서의 자동차 사고로 Villeblevin의 작은 마을에 있는 Le Grand Fossard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1960년 1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다. 카뮈가 전철로 여행을 떠나려 했음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전철 대신에 자동차로 떠났다. 동시에 카뮈는 젊은 시절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카뮈가 소련 체제와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것으로 인한 의도적 암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카뮈는 평소 자신이 사랑하여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인 루르마랭(Lourmarin)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카뮈 사후, 두 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다. 카뮈의 문학 및 철학.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부조리.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작품 목록. 전집. 김화영이 번역하고 책세상에서 출간된 카뮈의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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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뤼붕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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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드쿤 퀴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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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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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Sérgio Vieira de Mello,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출신 유엔 외교관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인 지 멜루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그는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하면서 캄보디아, 동티모르,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분쟁조정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특별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2003년 8월 19일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차랑 폭탄테러에 의해 사망하였다. 테러에 희생되기 전 그는 일부에 의해 코피 아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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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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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
미하엘 안드레아스 헬무트 엔데(, 1929년 11월 12일 ~ 1995년 8월 28일)는 독일의 작가이다. 바이에른주의 최남단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 근처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문학으로 유명하다. 뮌헨의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1973년 동화소설 《모모》를 발표하여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엔데의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의 재고가 판매되고 약 40종류 언어로 번역되었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시에 사로잡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전세계에 수천만의 독자를 가진 엔데에 대해 세계의 언론들은 동화와 환상소설을 통해 금전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작품으로는 <기관차 대여행>, <모모>, <끝없는 이야기>,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마법학교>, <냄비와 국자 전쟁> 등이 있다. 주요 작품. 《Lirum Larum Willi Warum: Eine lustige Unsinngeschichte für kleine Warumfrager》 《Die Schattennähmaschine》 《Das Gauklermärchen (The Juggler's Tale)》 《Written with Erhard Eppler and Hanne Tächl - Phantasie/Kultur/Politik: Protokoll eines Gesprächs (Fantasy/Culture/Politics: transcript of a conversation)》 《Die Ballade von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Der Spiegel im Spiegel (1986) (Translated into English by J. Maxwell Brownjohn as Mirror in the Mirror: a labyrinth in 1986)》 《Filemon Faltenreich》 《Der Goggolori (1984)》 《Wrote the libretto for Die Jagd nach dem Schlarg》 《Die Vollmondlegende (1989) (The Legend of the Full Moon)》 《Der lange Weg nach Santa Cruz (The Long Road to Santa Cruz)》 《Der Rattenfänger)》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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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파이어아벤트
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 1924년 1월 13일 ~ 1994년 2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이다. UC 버클리에서 철학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 과학철학에 크게 공헌했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였으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종류의 지식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생애. 폴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43년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동부 전선에서 척추에 유탄을 맞았고,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1947년에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가서 칼 포퍼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뒤에 포퍼의 과학관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955년 이후 1990년까지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ETH 취리히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마지막엔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의 두 군데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 1990년에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스스로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의 러커토시 임레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이 계획은 1974년 러커토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방법에 반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1991년 학계에서 은퇴한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상. 과학철학.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정해진 방법론이야말로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과학적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파이어아벤트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이성적 요소가 아닌 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갈릴레오 등의 과학사적 사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노력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귀납을 강조하는 논리실증주의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각된 칼 포퍼의 반증주의 양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관찰이나 반증주의적 논박 모두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경계 조건을 설정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로 보았다. 라카토쉬 임레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 자체의 모호함이 자신이 주창한 아나키즘적 과학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파이어아벤트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중세 기독교,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교조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과학의 억압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의 발전을 인문사회적 결과로 해석하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민주적 상대주의. 그는 과학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의 확보는 과학의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과학주의에 반대한다. 즉, 과학주의가 권력과 손을 잡고 행정과 교육과 정치 등 인간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허용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는 ‘민주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유일하게 참되다고 생각 한 종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듯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과학의 속박에서 이 사회를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어아벤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이다. 비판. 만약 과학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포퍼 등 기존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인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주요 저작. 이 책은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근대 이후 서구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이며, 과학이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는 상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과학이나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비교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는 파이어아벤트의 결론은 고유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은 논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기 때문에 몇가지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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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12신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 또는 도데카테온(, dōdeka, "열둘" + θεοί, theoi, "신들")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 판테온의 주역 열두 신을 말한다. 숫자 12는 고대 바빌론에서 통용되던 12천문성좌도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포스 12신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 신화에 정착되었으며,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최초로 이 열두 신을 신전에 봉정하였다. 이들에 대한 종교 의식이 처음으로 언급된 고대 문헌은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호메로스 찬가이다. 예술과 시에 표현된 고전적인 구성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는 별개로 로마 신화의 구성은 유피테르, 유노, 넵투누스, 케레스, 미네르바, 아폴로, 디아나, 마르스, 베누스, 메르쿠리우스, 불카누스, 베스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고대에는 이 숫자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이 쉽게 바뀌는 유동성을 띄었다. 기원전 400년 경 헤로도토스는 도데카테온을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론, 알페이오스, 크로노스, 레아, 카리테스로 구성하였다. 근대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헤로도로스의 열두 신을 따랐다. 헤로도토스는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헤라클레스를 포함시켰다. 루키아노스 또한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는데,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두 신은 설명하지 않았다. 코스 섬에서는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으며,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는 제외하였다. 그러나 핀다로스, 아폴로도로스, 헤로도로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헤라클레스를 열두 신이 아닌 숭배의 대상 중 한 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올림포스 열두 신을 일 년의 열두 달과 연관지으며, 마지막 달에는 하데스와 죽음의 영혼의 영광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가 하데스를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구성에는 점차 제외되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열두 신을 황도 12궁과 함께 나열하였으며, 이 구성에서 헤스티아는 제외하였다. 헤스티아를 대신하여 디오니소스가 열두 신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헤베, 헬리오스,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열두 신에 포함되기도 한다. 에로스는 다른 열두 신, 특히 그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와 나란히 묘사되어 있기도 하는데, 올림포스 열두 신 중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가 형제들과 함께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는 모두 한 형제이며,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자녀이다. 일부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를 헤라 혼자서 낳은 것으로 설명한다. 이밖에 제우스로부터 태어났지만 다른 신을 수행하거나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 않았다. 올림포스 12신 구성. 다른 정의. 다음은 고전 올림포스 12신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다른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 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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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음악 듣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생애.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하였지만, 한 달만에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2020) 이후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조반니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연주 시합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를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였고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 중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든 삶을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몰두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의 음악적 특징.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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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180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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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94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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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인(단수: , 복수: ) 또는 유태인(猶太人), 유다인은 히브리 민족에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민족성과 종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인데 이는 유대교가 유대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은 보통 유대인 사회 내에서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주류 유대교에서 개종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이에 해당된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 민족은 고대 가나안의 족장이던 아브라함에게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요셉 대에 이르러 이집트로 이주하였다가 노예민족이 되었으며, 출애굽을 거쳐 가나안에 다시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유다 지역은 이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갔으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 진출하였고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동화되지 않은채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 중세에도 다수가 동화되지 않고 차별을 겪었는데, 이로 인해 천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금융, 상업, 무역 등에 종사하게 되어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근대에 와서도 차별은 잔존하였고 유럽 정치의 극단화의 끝에 나치 독일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일어나 유럽 유대인의 과반수가 죽고 남은 대부분은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으로 대량이주하게 되었다. 현대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도 스스로를 유대 국가로 규정하므로 귀환법에 의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역사. 고대.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의 가계는 기원전 18세기경에 가나안과 그 주변 지역에 살았던 성서 속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 부인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 라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이집트의 고관이었던 요셉과 고센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파라오가 초청하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이들 족장들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후 모세의 지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보통 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탈출 시기를 기원전 13세기로 본다. 다시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게 된 히브리인들은 고대에 두 번 독립국가를 수립하였다. 첫번째 시기는 판관 시대와 이후 이어지는 연합 왕국 시대로, 사울, 다윗, 솔로몬을 거친 후 그 영토는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 의해 멸망하였고 기원전 587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남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기원전 586년엔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이 끝났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하는 기원전 333년까지 제국에서 평화로운 지역에 속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다시 기원전 140년에서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의 외경 중 '마카비 상, 하'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중세 유럽. 유대인들은 유럽 곳곳에 퍼져 살게 되었으나 이들에게 허용된 직종은 한정되어 있었다. 중세에 기독교인들은 높은 이자와 관련된 금융활동을 죄악시하여 엄금하였기 때문에 대신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비롯하여 금융과 무역에 관련된 직업을 도맡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포도주를 만들었다. 이들에 대한 반감인 반유대주의는 역사적 뿌리가 깊어, 유럽에서 최초의 반유대 폭동은 11세기에 발생하였고 1182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 주로 거주하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서서히 동유럽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15세기 경 폴란드에 받아들여지게 된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최대 규모의 디아스포라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홀로코스트 직전까지도 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역이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서부 등지에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근대. 18세기부터 프랑스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계몽시대로 불리는 여러 자유 사상의 영향으로 유대인의 해방과 사회적 지위 상승이 이루어져 특별세금이나 게토 거주 등의 의무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아슈케나즈 유대인 인구가 독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편 이와 함께 독일 등 중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움직임 역시 증가하면서 중유럽의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중심으로 '궁극적인 귀환'을 추구하는 시오니즘이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대인 대학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많은 국가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발흥하여 파시즘 성향의 정부들이 잇따라 집권하였고, 그 중 대부분이 반유대주의를 내걸면서 유대인들은 명시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주도로 이루어진 홀로코스트 정책으로 인해 유럽 유대인 인구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전 유럽에 존재했던 약 8백만 유대인들 중 약 6백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 인구와 학살당한 인구 모두 절대다수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폴란드에 존재했던 330만 유대인 중 3백만 명(91%)의 폴란드 출신 유대인과 110만 명 중 90만명의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82%)들이 희생당했다. 슬라브 민족,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와 발칸반도 출신 유대인들은 50~90%가 학살당했다. 아슈케나즈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었다. 생존한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유럽 밖의 이스라엘,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들 국가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유대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약 1천 8백만 명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약 1천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약 14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약 580만 명, 이스라엘에 약 6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소련의 경우 홀로코스트의 탄압을 피해서 자국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을 만주까지 도피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에 따라 그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40만 명, 라틴 아메리카는 약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되며,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이고, 그 다음이 영국이다. 그 외,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이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재이주해 온다. 유대인의 분파.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스파라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이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스파라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과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스파라딤과 아슈케나짐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슈케나짐이 압도적이다.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스파라딤계이다. 기타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 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 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 마사미 등은 아슈케나짐이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멸망 후 동유럽·중앙유럽으로 흩어져 아슈케나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슈케나짐 중에는 백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 2005년 유럽 유전체 학술지에 따르면 최근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중국의 유대인.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 유대인(開封猶太人) 또는 이츠러예(一赐乐业, 일사락업)인으로 불렸다. '이츠러예'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는데, 명나라가 건국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 내 통혼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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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에르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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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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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소프트웨어
시스템 소프트웨어(system software, )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컴퓨터 하드웨어를 동작,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컴퓨터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대한 일반 용어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응용 소프트웨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메모리에서 하드 디스크로 데이터를 전송한다든지 문자열을 디스플레이 장치로 출력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한다. 시스템 소프트웨어에는 로더, 운영 체제, 장치 드라이버, 프로그래밍 도구, 컴파일러, 어셈블러, 링커, 유틸리티 등이 포함한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C 런타임 라이브러리는 보통 시스템의 일부로 여기지만, 오픈GL이나 데이터베이스 라이브러리의 경우는 명확하지 않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집적 회로의 비휘발성 기억 장소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보통 펌웨어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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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부아지에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공직자이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면서 심각한 가렴주구와 폭정으로 프랑스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혐의를 받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오르며 생을 마감했다. 초년 (1743~1775). 유년 및 청년기.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 고등법원의 법률 고문으로 일하던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인 에밀리에 라부아지에 사이의 첫째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리에 라부아지에는 딸을 한 명 더 낳은 뒤 1749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 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바람으로, 1754년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그들에 기대에 부응하여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가졌다.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하였고,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라부아지에는 왕의 정원에서 베르나르 데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과학적 활동. 초기 연구. 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 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물에서 흙으로의 변화.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 연소 연구. 1772년 11월 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 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하였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실험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이후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세금 징수원.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딸인 마리안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안은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라부아지에는 많은 돈을 벌어 최고의 과학 장비를 사들일 수 있었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활동기 (1775~1789). 과학적 활동. 새로운 연소 이론. 산소 연구. 1775년 5월 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셸레와 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물의 조성.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이론의 제시.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 평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하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반응에 적용되었으며 호흡·발효·부패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도입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수많은 새로운 산·염기·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원소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화학 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화학적 명명법.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열 연구.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의 협력하에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어떤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출입하는 열은 상태 변화를 역으로 진행할 경우 열 출입 역시 반대로 되고 그 양은 같다는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제시하였다. 1783년에 라플라스와 함께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라부아지에는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물질 입자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체를 온도와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액체 또는 고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생물학 연구.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서도 연구하였고, 이에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5년 10월 13일의 실험을 통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熱)에 관한 논문인 〈열에 관한 보고서〉("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생체 내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생명체가 들이마신 산소는 일종의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고, 발생한 열은 혈액을 통해서 몸 전체로 공급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체내에서 일어나는 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라부아지에는 반응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파악하였다. 반응은 허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물질 대사를 통해서 생명체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 공직에서의 활동. 튀르고와 네케르.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가 튀르고가 해임하고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 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 고위공직자 생활.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Gazette de France")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혁명 직전. 1788년 4월 16일 라부아지에는 할인 은행()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1776년에 튀르고가 설립한 이 은행은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배타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지폐를 발행하는 것 역시 주 업무였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하어 있어서 자크 네케르가 복직한 8월 말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케르는 할인 은행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사들은 이를 승낙하였다. 라부아지에도 또한, 재정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을 국영화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의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했지만,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여전히 국가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하여 갔으며, 의회는 은행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영화에 비협조적이었고, 이와 함께 프랑스의 경제 역시 심하게 악화하여 갔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간에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788년 여름, 그는 네케르에게 보내는 논문을 통해서 삼부회를 개최할 때 그 대표를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역에서부터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각의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혁명 정국 (1789~1794). 활동. 1789년 7월에 라부아지에의 경력은 최고에 달했다. 그는 학문과 공직 양쪽 모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활동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당시 라부아지에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8월 6일에 그는 코뮌의 대표자로서 화난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생루이에 있는 화약고를 찾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프랑스 혁명은 점점 진행되어 갔다. 1790년 5월 8일 국회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하였다. 비록 국제적인 협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일의 진행을 보고하는 일 역시 그가 맡았다. 1793년 1월에는 질량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라부아지에는 많이 활약하여 1791년 12월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 1792년 1월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에서 조직한 기술 및 교역 고문 위원회에 참석하였으며,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의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1791년 3월 20일 헌법제정국민의회는 라부아지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봉직해온 세금 징수 조합을 해체하였으며, 그 대신 국가에서 관장하는 징세 기관이 도입되었다. 라부아지에는 기관의 장으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선정되지 못하였다. 생물학 연구. 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여, 열이 호흡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사형. 라부아지에는 혁명 중에도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792년 8월 15일 그는 화약국장에서 물러나면서 병기창에 있는 자신의 집과 연구소도 옮겨야 했다. 게다가 1793년 8월 8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793년 9월, 세금 징수 조합의 청산이 빠르게 진행되기를 원했던 국민 공회는 전직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인이었던 앙투안 뒤팽에게 전직 세금 징수원들의 처리를 맡겼다. 1793년 11월 24일, 국민 공회의 의원인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체포를 발의하였고, 이는 국민 공회를 통과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1월 28일 그의 장인인 자크 폴즈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 1794년 5월 2일, 뒤팽이 제안한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처분안이 혁명법원으로 넘겨졌으며, 라부아지에는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월 5일 뒤팽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결국 5월 8일 기소된 32명 중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로 결론지어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자크 폴즈와 함께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사후. 마리안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의 사형 직후, 집행관이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의 모든 책, 기자재 등의 목록을 작성해 갔고, 5월 30일 이를 몰수하였다. 거의 모든 라부아지에의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라부아지에의 부인인 마리안 라부아지에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녀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 결국 6월 14일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으나 남편과는 달리 사형은 면하고 8월 17일에 풀려났다. 12월 10일, 전직 세금 징수원의 사형 이후 매우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의 이야기가 담긴 "Le cri dis familles"가 출판되자 사형을 주도한 앙투안 뒤팽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95년 마리안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몇몇 유족이 뒤팽에게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그 결과 1796년 4월 그녀는 공식적으로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805년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하였고, 1836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재평가.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되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1795년 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라부아지에에 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관한 업적을 기술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796년 8월 2일 두 번째 장례식이 치러졌고 이는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3,000명이 장례식에 참여하였으며, 라부아지에에 관한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의 사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듀폰.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테일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 미국에 이민하여 듀폰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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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2507
언론
언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2508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508
언론사 목록
다음은 언론사(言論社)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