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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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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7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4번째(윤년일 경우 195번째) 날에 해당한다.
1765
3333223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65
7월 14일
7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5번째(윤년일 경우 196번째) 날에 해당한다.
1766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66
7월 15일
7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6번째(윤년일 경우 197번째) 날에 해당한다.
1767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67
7월 16일
7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7번째(윤년일 경우 198번째) 날에 해당한다.
1768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68
7월 17일
7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8번째(윤년일 경우 199번째) 날에 해당한다.
1769
3335611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69
7월 18일
7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9번째(윤년일 경우 200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0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0
7월 19일
7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0번째(윤년일 경우 201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1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1
7월 20일
7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1번째(윤년일 경우 202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2
8259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2
7월 21일
7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2번째(윤년일 경우 203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3
1986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3
7월 22일
7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3번째(윤년일 경우 204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4
3331743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4
7월 23일
7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4번째(윤년일 경우 205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5
3304812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5
7월 24일
7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5번째(윤년일 경우 206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6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6
7월 25일
7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6번째(윤년일 경우 207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7
8259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7
7월 26일
7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7번째(윤년일 경우 208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8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8
7월 27일
7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8번째(윤년일 경우 209번째) 날에 해당한다.
1779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79
7월 28일
7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9번째(윤년일 경우 210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0
3309187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0
7월 29일
7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0번째(윤년일 경우 211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1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1
7월 30일
7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1번째(윤년일 경우 212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2
331262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2
7월 31일
7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2번째(윤년일 경우 213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7월의 마지막 날이다.
1783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3
5월 3일
5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3번째(윤년일 경우 124번째), 뒤에서부터는 243번째 날에 해당한다. 학생날이 법정 공휴일 이다
1784
327041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4
5월 4일
5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4번째(윤년일 경우 125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5
3272198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5
5월 5일
5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5번째(윤년일 경우 126번째), 뒤에서부터는 241번째 날에 해당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어린이날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문화. 2020481384년 -[네버렌드]]가없어졌다
1786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6
5월 6일
5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6번째(윤년일 경우 127번째), 뒤에서부터는 240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7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7
5월 7일
5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7번째(윤년일 경우 128번째)날에 해당한다.
1788
3263712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8
5월 8일
5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8번째(윤년일 경우 129번째), 뒤에서부터는 238번째 날에 해당한다.
1789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89
5월 9일
5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9번째(윤년일 경우 130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0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0
5월 10일
5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0번째(윤년일 경우 131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1
326188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1
5월 11일
5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1번째(윤년일 경우 132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2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2
5월 12일
5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2번째(윤년일 경우 133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3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3
5월 13일
5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3번째(윤년일 경우 134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4
3317658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4
5월 14일
5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4번째(윤년일 경우 135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5
3270412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5
5월 15일
5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5번째(윤년일 경우 136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6
3338804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6
5월 16일
5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6번째(윤년일 경우 137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 2021년 - 이근혜와 최인규 가 연애를 시작했다.
1797
66951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7
5월 17일
5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7번째(윤년일 경우 138번째) 날에 해당한다.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이기도 하다.
1798
1986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8
5월 18일
5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8번째(윤년일 경우 139번째) 날에 해당한다.
1799
326767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799
5월 19일
5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9번째(윤년일 경우 140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0
3280181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0
5월 20일
5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0번째(윤년일 경우 141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1
753120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1
5월 21일
5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1번째(윤년일 경우 142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2
71415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2
5월 22일
5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2번째(윤년일 경우 143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3
71415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3
5월 23일
5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3번째(윤년일 경우 144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4
3331570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4
5월 24일
5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4번째(윤년일 경우 145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5
3336527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5
5월 25일
5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5번째(윤년일 경우 146번째) 날에 해당한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금영주의 생일이다.
1806
3286263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6
5월 26일
5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6번째(윤년일 경우 147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7
1986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7
5월 27일
5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7번째(윤년일 경우 148번째) 날에 해당한다.
1808
33308167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8
5월 28일
5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8번째(윤년일 경우 149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1945년 나치독일이 멸망했다
1809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09
5월 29일
5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9번째(윤년일 경우 150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0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0
5월 30일
5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0번째(윤년일 경우 151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1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1
6월 2일
6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3번째(윤년일 경우 154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2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2
6월 3일
6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4번째(윤년일 경우 155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3
3275763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3
6월 4일
6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5번째(윤년일 경우 156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4
3277528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4
6월 5일
6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6번째(윤년일 경우 157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5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5
6월 6일
6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7번째(윤년일 경우 158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6
19860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6
6월 7일
6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8번째(윤년일 경우 159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7
3299888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7
6월 8일
6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9번째(윤년일 경우 160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8
3279366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8
6월 9일
6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0번째(윤년일 경우 161번째) 날에 해당한다.
1819
3279843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19
6월 10일
6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1번째(윤년일 경우 162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0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0
6월 11일
6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2번째(윤년일 경우 163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1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1
6월 12일
6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3번째(윤년일 경우 164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2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2
6월 13일
6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4번째(윤년일 경우 165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3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3
6월 14일
6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5번째(윤년일 경우 166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4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4
6월 15일
6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6번째(윤년일 경우 167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5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5
6월 16일
6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7번째(윤년일 경우 168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6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6
6월 17일
6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8번째(윤년일 경우 169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7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7
6월 18일
6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9번째(윤년일 경우 170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8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8
6월 19일
6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0번째(윤년일 경우 171번째) 날에 해당한다.
1829
3275244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29
6월 20일
6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1번째(윤년일 경우 172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0
3288483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0
6월 21일
6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2번째(윤년일 경우 173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1
65024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1
6월 22일
6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3번째(윤년일 경우 174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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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2
6월 23일
6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4번째(윤년일 경우 175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3
30799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3
6월 24일
6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5번째(윤년일 경우 176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4
730148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4
6월 26일
6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7번째(윤년일 경우 178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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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5
6월 27일
6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8번째(윤년일 경우 179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6
69663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6
6월 28일
6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9번째(윤년일 경우 180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7
333464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7
6월 29일
6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0번째(윤년일 경우 181번째) 날에 해당한다.
1839
529523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39
조용기
조용기(趙鏞基, 1936년 2월 14일 ~ 2021년 9월 14일)는 대한민국의 개신교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목사이다.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였고, 원로목사로 재직중 2021년 9월 14일, 1년여에 걸친 뇌출혈로 투병중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함안이며, 울산 출신이다. 사상 및 철학. “산속에 호수가 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때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달 그림자, 별 그림자가 없다. 그런데 호수가 조용해지면 그림자가 보인다. 달 그림자가 생기고, 별 그림자가 생긴다. 인간도 호수와 같다. 자기 자신을 믿을 때는 달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자기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성실’이 ‘경건’으로 바뀐다. 그때 신앙이 생긴다. 왜 그렇겠나. 내 인생의 짐은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실을 지나 경건으로 마음을 열겠습니다. 그게 신앙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건 기독교가 가진 독선이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뜻대로 사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셨다. 미안한 말이지만 무책임한 말을 하는 목사님들이 있다. 생각해보라. 누가 천국에 살겠는가. 예수님 마음이 있는 사람이 천국에 사는 거다. 그럼 누가 지옥에 살겠는가. 예수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지옥에 사는 거다.”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런데 그 대목이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가장 후대에 기록된 복음서다. 가톨릭은 이 일화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성탄이 되면 교황이 사람들의 발을 씻어준다. 반면 개신교는 발 씻는 의식을 별로 행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만큼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의 발 씻는 일화는 사실일까, 아닐까. 이것만 따지고 있으면 종교가 교리가 된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1억 원을 주시면서 ‘이걸 나 위해 써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처음에는 거절하지 싶다. ‘저는 그 귀한 돈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그래도 ‘아니야, 네가 맡아서 써’라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싶다. 그래도 예배당 짓는 데는 그 돈을 쓰지 않을 거다.” 영산 조용기. 그와 동시에 그는 학교 근처의 미군 기지에 자주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였던 병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영어를 빨리 익혔고, 육군 기지 사령관의 통역이 되었고, 또한 학교 교장의 통역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목사로 부르시는 것을 감지한 조씨는 미국 전도사 켄 타이즈의 통역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56년 서울 순복음성경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던 중 장모이자 측근이 된 최자실을 만났다. 1958년 3월에 졸업했다. 영산 조용기 원로목사는 한국과 세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영적 거장이다. 그는 세계 최대의 교회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이끌어 오셨으며 세계를 100여 차례를 돌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50년이 넘도록 목회생활을 감당하고 있으며, 오산리 최자실 금식 기도원과 한세대학교, 엘림복지타운, 국민일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미자립농어촌교회 돕기, NGO 사역과, 사랑과 행복 나눔 재단을 설립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섬기고 있다. 영산을 통해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영적 사업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러한 큰 교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가 제시하는 4차원의 영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산은 4차원의 영성에 가장 기초되는 생각, 믿음, 꿈, 말의 네 가지 요소를 통하여 영성훈련을 해 나갈 때 우리의 인생이 변화 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세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보이는 세계인 3차원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영산은 늘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충만함을 통해서 그는 선교사역과 치유사역과 전인구원과 봉사의 사역을 잘 감당하며 교회를 확장시켜 왔다. 이 글에서는 4차원의 영성에 대한 이해와, 4차원의 영성의 구체적 요소를 살펴보며 그것이 교회성장에 끼친 영향력을 다루었다. 특히, 4차원의 영성의 신앙관을 통한 교회성장의 중심계기와 십자가 영성의 확립, 기도의 중요성과 설교와 말씀에 대한 내용과 성령 충만, 치유, 선교, 전인구원, 사회봉사, 역동적 예배 등등 영산의 영성과 신앙관이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기술하였다. 아무쪼록 종교 다원주의와 세속화가 밀려오는 이 시대에, 영산의 영성을 닮고 익히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키는 주의 일꾼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한다. 예전에 옥한흠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안수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려고 미국으로 가려 하는데 눈앞에 성령의 은혜가 있다는 음성을 듣고 저를 찾아 왔다는 겁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한데 자신은 사람을 회개 감화시키는 은사를 갖고 싶다고 해요. 둘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옥 목사님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제가 장례식장에 가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사명과 은사를 받도록 전력을 기울인다면 한국교회와 세계는 달라질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초청설교 링크 교회성장과 설교특징. 1973년 8월 19일 주일예배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6-10) 여의도성전 완공 첫 예배를 드렸다. 1973년 3월 3일, 한국방송공사 KBS(한국방송공사) 건설된후 KBS에 설교자료가 송출되기도 했다. 1981년 4월 26일 : 마산 MBC-TV(채널13)에서도 5시부터 5시 30분까지 매주일 주일 예배 실황과 조용기 목사 설교 말씀 방영. 1981년 1월 15일 : 조용기 목사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주강사로 초청 -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40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축하식에 초청된 조용기 목사가 출국, 19일에는 특별초대인사를 위한 만찬회에 참석하고 20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저녁 8시부터 세계에서 손꼽히는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모인 가운데서 말씀을 증거하고 21일 종교 지도자들만을 위하여 백악관에서 열린 특별모임에 참석했음. 조용기 목사님 설교듣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은과금 내게 없거니와 내게있는 것 내게주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요한복음 1:50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네가 믿느냐? 너는 이보다 더 큰 일도 볼 것이다.' 하시고 성도가 예배할 때 교회는 생명력을 얻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원기를 회복하여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성장하는 교회의 예배는 항상 역동적이며,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이 아닌,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따라서 예배에 성공해야 교회가 성장 할 수 있다. 1) 긍정적인 기대감의 고취 영산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긍정적인 기대감으로 항상 고취되어 있다. 그들은 일주일 동한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이겨 나가면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다. 이들의 기대감을 영산은 예배를 통해서 충족시켜주고 있다. 영산의 예배는 항상 긍정적인 사고들로 가득 차 있다. 즉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구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의 트레이트마크처럼 되어있다. 사실 이러한 긍정적인 정신과 기대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 복음성가의 찬양영산의 예배 특징은 복음성가의 도입에 있다. "2) 복음성가의 찬양영산의 예배 특징은 복음성가의 도입에 있다"' 사실 1970년대의 한국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복음성가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복음성가의 전통예배 도입에 있어서 배타적이었다. 단지 CCC나 YM같은 선교회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에서의 사용은 보편적이었지만 교회에서의 사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산은 과감히 복음성가를 주일예배 시간에 도입하였다. 지금도 주일예배 전 강대 앞에서 찬양팀에 의해서 복음성가가 활발하게 활용된다. 복음성가의 예배 도입은 복음의 상황화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CCM을 통해서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구도예배에 참여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복음성가의 예배 활용의 긍정적 요소를 살펴보면, 예배의 분위기를 찬양을 통해서 축제화 함이다. 찬양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영광을 돌리다.”인데, 이는 찬양의 두 가지 방향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찬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칭찬하거나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복음성가를 통한 찬양은 활기찬 축제 분위기 속에서 노래, 외침, 말, 악기, 연주, 춤 , 손을 높이 드는 것, 손뼉을 치는 것, 기뻐 뛰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게 된다.복음성가중 새 찬송가 편성 308장 내평생 살아온길(김성혜 작곡 조용기 작사) 복음성가중 새 찬송가 편성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김성혜 작곡 조용기 작사). 3) 성경 중심의 단순성의 설교 영산의 설교는 성경 중심적이며 단순한 설교가 특징이다. 영산 설교의 특징은 무엇 보 명성훈, 『교회성장의 영적차원』(서울 : 서울 말씀사, 1997), 214-27. 다도 복음을 단순하게 선포하는데 있다. 이 말은 교리적인 설교나 강해적인 설교가 아니라는 말 은 아니다. 그는 복음의 역사적 사실과 아울러 적용에 있어서는 현재적 실제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산은 예배 때에 설교를 통한 메시지의 선포는 중심성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감동적인 찬양과 기도와 설교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훌륭한 예술 작품은 될 수 있어도 예배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용기,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서울 : 서울서적, 1994), 207. 기록된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과 가르치심 및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속 사업과 다시 오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예배의 메시지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오랫동안 영산의 교회성장을 연구한 명성훈은 영산의 설교의 중심성에 관하여 ”성경에 기초한 설교이다. 이는 영산이 생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항상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4) 신유와 축복의 기도 영산 예배의 특징 가운데 신유의 기도를 빼 놓을 수 없다. 영산은 설교를 마치고 기도의 시간에 신유의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부여하고 있다. 영산의 이러한 사역은 성경의 신유 사건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과 함께 예수님의 신유 명령이 시대를 초원하여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영산은 마가복음 16:15-18을 인용하면서 이는 “병 고침의 사역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통해서 이 일이 계속 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조용기, 『치료하시는 예수님』 (서울 : 서울말씀사, 2005), 257. 영산은 신유 기도를 하실 때에 환자의 모습과 상태를 하나님이 보여주심을 통해서 선포하게 된다고 한다. 필자가 참여한 예배를 통해서도 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영산이 선포한 신유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를 받고 있음을 수 없이 목격하였다. 영산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를 통해서 축복의 삶을 살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설교란 희망을 공급해 주어 성도들로 하여금 현실을 이기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목회자가 지적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할 일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비참한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결국 성도들의 마음을 채워 주는 설교가 가장 핵심이다. 설교는 목회자의 문제와 다시 한 번 연결 된다. 조용기 목사는 교회가 성장되지 않는 원인의 80%가 목회자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조용기, 『설교는 나의인생』(서울 : 서울말씀사, 2005), 62. 주의 종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꿈과 희망을 전해 주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그리고 그들의 갈급한 영혼과 마음의 필요를 채워주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소망으로 이끌어 준다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에는 설교자의 삶의 성설성이 묻어 있어야 한다. 5) 복음의 초대를 통한 결신기도 영산의 예배는 항상 불신자들을 복음에의 초대로 요구하는 기도가 있다. 헌금시간 이전에 교회에 처음 출석하였거나, 아직까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초청의 시간을 갖는다. 그는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라고 강하게 요청한 다음 기도를 통해서 복음에의 초청을 하고 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저를 씻어 주시옵소서. 저를 위하여 죽으시고 저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 구주로 모셔 드립니다. 지금부터 천국 갈 때까지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저의 아버지가 되시고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이 구원에의 초청 기도는 매주 예배시간마다 계속되고 있다. 6) 화상을 통한 예배의 동시성 영산 예배의 특징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본 성전에서 서울의 수도권 지성전으로 연결되는 FGTV 채널을 통해서 동시에 중계되는 예배를 들 수 있다. 이는 서울의 중심부인 여의도에 직접 오지 않고도 지성전과 독립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한정된 장소에 수많은 성도들이 운집하는 데에서 오는 교통의 불편함, 예배 모임장소의 한계성, 효과적인 시간사용 그리고 예배참여에의 비용의 절감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직접 영산과 대면할 수 없는 것과 통합적인 예배 역동성의 결여이다. 실제로 2008년 5월 50년의 성역을 마치고 주일 대예배의 2부와 3부 예배를 후임 담임목사 이영훈 목사에게 위임한 이후에 영산의 설교를 계속 듣고 싶어 하는 성도들의 요구에 의해서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생애. 조용기는 1936년 2월 14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울산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아버지 조두천과 어머니 김복선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산공업고등학교 재학 중인 17세이던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인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다가 고향 울산 진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며 부산으로 통원 치료를 받았다.1956년 서울로 올라와서 순복음 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같은 학교에서 만난 최자실 목사의 딸 김성혜와 1965년 3월 1일 결혼하였고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조용기 목사는 20세에 대조동 천막촌에서 최자실 전도사와 공동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교인 약 78만 명에 이르는, 세계 개신교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당회장 목사로 목회했다. 일본어, 영어에 능숙하며, 해외에서의 오순절교회 선교활동을 통해 개신교 선교에 공헌했다. 2008년 5월, 당회장 목사로서의 임기를 마쳤고,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목사로서 활동하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제2대 당회장에 이영훈 목사를 압도적인 지지율로 선출했다. 조용기목사는 2021년 9월 14일, 1년여에 걸친 뇌출혈로 투병중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회 활동. 조용기목사는 일어, 영어에 능숙해 해외에서의 오순절교회 선교활동을 통해 개신교 선교에 공헌했다. 그의 나이 20세에 불광동 천막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여, 현재는 교인 약 81만명에 이르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위임목사로 목회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조용기 목사가 속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헌법에 따르면 담임 목사의 정년은 70세이며, 교회가 원할 경우 75세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는 2006년 2월 14일로 정년을 맞게 되었는데, 교회가 정년 연장을 압도적인 찬성률(99.7%)로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년 퇴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2006년 1월1일 첫 예배에서 조용기 목사는 성도들의 줄기찬 요구를 차마 떨치지 못했다며 은퇴를 번복하고 목회활동을 좀 더 이어나간다고 밝혔다. 평소 반공을 지론으로 삼았으나 최근들어 대북관이 변화하여 북한에 인도적 지원에 나서 , 2007년 평양에 조용기 심장병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미국 뉴욕시가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의 뉴욕성회를 기념해 5월 18일(현지시간)을 '조용기 목사의 날'로 제정했다 “한반도 평화는 시대적 요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이 주도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한반도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앞으로 있을 북·미회담이 좋은 결과를 도출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평양심장병원 공사가 재개되고 올 연말이 되기 전에 준공식을 개최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꿈과 희망이긴 하지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조용기 원로목사가 총재, 이영훈 위임목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교회 산하 기관으로, 지난 2007년 9월과 10월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계약서, 합의서를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조용기심장병원’을 착공했다. 2021년 6월 25일 조용기심장병원이 북한에서 완공되었다. 심병장환자및 북한선교를 위해 조용기 목사는 수고했다. “돌아가신 모친께서는 생전에 매주 토요일이면 전화를 주셨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다. 너는 겸손해라. 기도하고 주님께 맡겨라.’ 그렇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다. 목회자는 그저 심부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성도로 부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이 목회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이 구원받게 하고 예수 닮은 사람으로 바꿔놓는 게 목회다. 이는 평생 사역이다.” “평양심장병원 건축 재개가 확정되면 이른 시일 내 북한을 방문해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근로자들도 격려하고자 한다. 아울러 진정한 통일을 원한다면 넓은 마음과 포용,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말하고 싶다. 남북관계가 평화롭기 위해선 서로 배려하며 상호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 남북이 끝까지 적국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반도 평화는 요원할 뿐이다. 체제와 사상이 달라도 그들은 같은 민족이다.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하나가 돼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비판. 2008년 이영훈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조 목사는 은퇴했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의 행보. 박노자 교수는, 조용기 목사가 ‘민족의 중흥’과 보조를 맞춘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고 ‘기독교인들의 총화안보와 반공궐기’를 이끌고 ‘해방신학, 혁명신학, 흑인신학’을 ‘악마적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보았고, 유신 독재를 지지하면서 반공 담론 대중화의 일익을 담당했다고 비판했다. 시사저널과의 갈등. 2004년 시사저널은 조용기 목사의 비리, 사생활, 베데스다 대학 세금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시사저널은 수 조원대에 이르는 순복음교회 재산과 한해 1천 7백억 원에 달하는 헌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순복음교회는 시사저널을 상대로 30억원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순복음교회 신도 수백여 명이 시사저널 사옥과 사장 자택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기복신앙 비판.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의 축복을 받으며 영혼이 잘 된다는 소위 삼박자축복론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비판의견도 있다. 사도 성 요한이 말한 “나는 사랑하는 그대가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어 나가기를 빕니다. 또 그대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도 건강하기를 빕니다”라는 문장은 사도 요한 당시 서신작성자들의 보편적 문구에 불과한데 이를 조용기 목사가 기복신앙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소식. 여의도순복음 교회 측은 “북측 요청으로 이영훈 담임목사와 북한 조선병원협회 관계자들이 지난달 중국에서 만나 의향서를 교환하고 건축 재개에 합의했다"며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가 호전돼 북한에 물자가 들어갈 수 있게 되면 공사가 재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2007년 평양에 연면적 2만여㎡에 지하 1층, 지상 7층 등 총 260병상 규모의 병원 건립에 합의한 뒤 건설을 시작했다. 세계일보 링크 CGI는 90여개국 2만여 목회자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과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에서 1000여명의 목회자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조용기 목사는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부흥하고, 성령은 긍정적인 사람과 일하신다”며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교회 부흥은 힘들다고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조 목사는 또, “교회는 꿈꾸는 사람이 있으면 부흥한다”며 “밥 로저스 목사는 꿈꾸는 사람으로, 미국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도 그에게 꿈꾸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조언한다”며 “나는 작은 천막교회에서 성도 5명으로 시작했지만 세계 최대교회를 세우는 꿈을 꾼 결과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500개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를 세우고, 신문사를 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평양 조용기목사심장병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2021.11.20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대북 지원 사업에 대한 제재 면제 신청을 승인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 평양에 평양심장전문병원(조용기심장병원)을 건설 중이다. 평양심장전문병원은 총 공사비 200억원이 투입돼 7층, 260개 병상 규모로 지어진다. 이를 주도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심장병 무료 수술사역을 수십년간 진행해 왔고 북한 동포들에게도 심장병 치료 사역을 하기 위해 시작했다.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보낸 10월 28일자 서한에서 “안보리 결의 2397호 25항에 따라 평양심장병원을 통해 북한 내 취약 계층의 중증 질환 치료 사업 등 ‘여의도순복음재단(YGMF)’의 대북 인도적 지원 활동에 대한 제재 면제를 승인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의료 장비부터 건축 자재까지 1,254개 물품을 북한에 반입할 수 있게 됐다. 유엔의 제재 면제 서한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측은 “병원이 완공되면 남측 의료진과 전문 인력 뿐 아니라 목회자까지 상주하며 의료혜택과 함께 치유목회 사역을 펼칠 계획”이라고 전했다. 후임자. 투표결과는 총 933표 중 이영훈 목사가 435표, 최○○ 목사가 285표, 고경환 목사가 204표 하용달 목사 기권 순이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31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제22대 대표회장에 선출됐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한기총부터 새롭게 개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합과 일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동성애·이슬람 등 전통문화를 무너뜨리고, 기독교 존립을 어렵게 하는 풍토를 막아 내야 한다. 한기총이 세워진 목적에 따라 개혁 정신 입장을 굳건히 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고, 사회에 소금과 빛 역할을 감당하겠다.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단들 뿌리 뽑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1840
70365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40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로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 이론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그의 질량-에너지 등가식 formula_1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으로 불린다. 그의 작업은 과학 철학에 미친 영향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21년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으로 양자 이론 발전의 중추적인 단계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지적 업적과 독창성은 "아인슈타인"이 "천재"와 동의어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때때로 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묘사되는 해인 1905년에 아인슈타인은 기적의 해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광전효과 이론의 개요를 설명하고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고 특수 상대성이론을 도입하고 질량-에너지 등가성을 입증했다. 아인슈타인은 고전역학의 법칙이 더 이상 전자기장의 법칙과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특수 상대성이론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다음 그는 이론을 중력장으로 확장했다; 그는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중력 이론을 소개했다. 1917년에 그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적용하여 우주의 구조를 모델링했다. 그는 통계역학과 양자 이론의 문제를 계속 다루었고, 이는 입자 이론과 분자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빛의 열적 특성과 빛의 광자 이론의 기초가 된 복사의 양자 이론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는 경력의 후반부에서 두 번의 궁극적으로 실패한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 양자역학에 대한 그의 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반대하면서 양자역학이 발전한 것에 반대했다. 둘째, 중력의 기하학적 이론을 전자기학을 포함하여 일반화함으로써 통일장 이론을 고안하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현대 물리학의 주류에서 점점 더 고립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제국에서 태어났지만 1895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이듬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시민으로서)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다. 1897년, 17세의 나이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수학 및 물리학 교직 과정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했다. 1901년에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여 평생 유지했으며, 1903년 그는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서 정규직을 확보했다. 1905년에, 그는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4년에, 아인슈타인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와 훔볼트 대학교에 합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이번에는 프로이센인으로 다시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33년, 아인슈타인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했다. 아인슈타인은 새로 선출된 나치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미국에 정착하여 1940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그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잠재적인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경고하고 미국이 유사한 연구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동맹국을 지지했지만 일반적으로 핵무기 아이디어를 비난했다. 생애와 경력. 어린 시절과 교육.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제국의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울름에서 세속적인 아슈케나즈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세일즈맨이자 엔지니어인 헤르만 아인슈타인Hermann Einstein과 파울린 코흐Pauline Koch였다. 1880년에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했고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와 그의 삼촌인 야콥Jakob은 직류를 기반으로 전기 장비를 제조하는 회사인 전기기술 공장 J. 아인슈타인 회사(Elektrotechnische Fabrik J. Einstein & Cie)를 설립했다. 초등학교. 알베르트는 5세부터 3년 동안 뮌헨에 있는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녔다. 8세에 그는 루이트폴트 김나지움(Luitpold Gymnasium)-지금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나지움(Albert Einstein Gymnasium)으로 알려짐-으로 옮겨져 7년 후 독일 제국을 떠날 때까지 고급 초등 및 중등 학교 교육을 받았다. 이탈리아 이민. 1894년 헤르만과 야콥의 회사는 장비를 직류(DC) 표준에서 보다 효율적인 교류(AC) 표준으로 변환할 자본이 부족하여 뮌헨 시에 전기 조명을 공급하려는 입찰에서 실패했다. 손실은 뮌헨 공장의 매각이 불가피했다. 업무를 찾아서, 아인슈타인 가족은 처음에는 밀라노로, 몇 달 후에는 파비아로,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가족이 파비아로 이사했을 때 당시 15세였던 아인슈타인은 뮌헨에 머물면서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전기 공학을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당국과 충돌하고 학교의 통제와 교수법을 분개했다. 그는 나중에 엄격한 암기에서 학습 정신과 창의적 사고가 사라졌다고 썼다. 1894년 12월 말, 그는 파비아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의사의 진단서를 사용하여 그를 보내도록 학교를 설득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그는 "자기장에서 에테르 상태에 대한 조사"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를 썼다. 수학. 아인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났고 동료들보다 몇 년 앞서 수학적 수준에 도달했다. 12세의 아인슈타인은 한 여름 동안 대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을 독학으로 배웠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12세에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을 발견했다. 가족 가정 교사인 막스 탈무드Max Talmud는 12세의 아인슈타인에게 기하학 교과서를 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책 전체를 공부했다. 그 후 그는 고등 수학에 전념했다 ... 곧 그의 수학적 천재성의 비상은 너무 높아서 따라갈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기하학과 대수학에 대한 그의 열정으로 인해 12세 소년은 자연을 "수학적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12세에 미적분학을 독학하기 시작했으며 14세 때 그는 "적분 및 미적분학을 마스터했다"고 말했다. 13세에 철학(과 음악)에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접하게 되었다. 칸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되었고 그의 가정교사가 말하기를: "당시 그는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평범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칸트의 저술이 그에게 분명해 보인 듯했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1895년, 16세의 나이로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나중에 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ETH) 입학 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시험의 일반 부분에서 요구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물리학과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다. 폴리테크닉 학교 교장의 조언에 따라 그는 1895년과 1896년 스위스 아라우에 있는 아르고비안 칸토날 학교(김나지움)에 다니며 중등 교육을 마쳤다. 요스트 빈텔러Jost Winteler 교수의 가족과 함께 숙박하는 동안 그는 윈텔러의 딸인 마리Marie와 사랑에 빠졌다. 알베르트의 여동생 마야Maja는 나중에 윈텔러의 아들 파울Paul과 결혼했다. 1896년 1월 아버지의 승인을 받아 아인슈타인은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독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1896년 9월, 그는 1-6의 등급에서 물리학 및 수학 과목에서 최고 6등급을 포함하여 대부분 좋은 성적으로 스위스 마투라(Matura)에 합격했다. 17세에 그는 연방 폴리테크닉 학교에서 4년제 수학 및 물리학 교육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한 살 연상인 마리 윈텔러는 선생 직을 위해 스위스의 올스베르그(Olsberg)로 이사했다. 아인슈타인의 미래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라는 이름의 20세 세르비아인도 같은 해 폴리테크닉 학교에 등록했다. 그녀는 교사 디플로마 과정의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 있는 6명의 학생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인슈타인과 마리치의 우정은 로맨스로 발전했고 둘 다 관심을 가진 학과-외 물리학에 관한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데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녀와 함께 공부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썼다. 1900년에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시험에 합격하고 연방 교육 학위를 받았다. 마리치가 기적의 해 논문으로 알려진 그의 랜드마크 1905년 논문들 이전에 아인슈타인과 협력했을 수 있으며 몇 가지 개념을 함께 개발했음을 나타내는 목격자 증언과 여러 서한들이 수년에 걸쳐 있지만, 이 문제를 연구한 일부 물리학 역사가들은 그녀가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결혼과 자녀. 이인슈타인과 마리치 사이의 초기 서신은 1987년에 발견되어 출판되었으며, 그 결과 부부에는 마리치가 부모와 함께 머물고 있던 노비사드에서 1902년 초에 태어난 "리제를Lieserl"이라는 딸이 있음이 밝혀졌다. 마리치는 실명과 운명이 알려지지 않은 아이 없이 스위스로 돌아왔다. 1903년 9월 아인슈타인의 편지 내용은 그 소녀가 입양을 포기했거나 유아기에 성홍열로 사망했음을 시사한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1903년 1월에 결혼했다. 1904년 5월에 그들의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아들 에두아르트Eduard는 1910년 7월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1914년 4월 베를린으로 이사했지만 마리치는 이전에 가까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주요 낭만적 매력은 이제 그의 사촌 엘사 뢰벤탈Elsa Löwentha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들과 함께 취리히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모계에서 그의 첫 번째 사촌이었고 부계로는 두 번째 사촌이었다. 그들은 1919년 2월 14일에 이혼했고, 5년 동안 떨어져 살았다. 이혼 합의의 일환으로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노벨상 상금을 주기로 동의했다. 2015년에 공개된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초기 연인인 마리 윈텔러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과 그녀에 대한 강한 감정에 대해 썼다. 그는 1910년에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쓰기를: "나는 매 순간마다 진심 어린 사랑으로 당신을 생각하고,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너무 불행합니다." 그는 마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잘못된 사랑"과 "잃어버린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인슈타인은 1912년부터 그녀와 관계를 가진 후, 1919년에 엘사 뢰벤탈과 결혼했다. 그들은 1933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엘사는 1935년에 심장 및 신장 문제 진단을 받았고, 1936년 12월에 사망했다. 1923년, 아인슈타인은 절친한 친구 한스 뮈삼Hans Mühsam의 조카인 베티 노이만Betty Neumann이라는 비서와 사랑에 빠졌다. 2006년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발표한 한 권의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마가레테 레바흐Margarete Lebach(금발의 오스트리아인), 에스텔라 카체넬렌보겐Estella Katzenellenbogen(플로리스트 사업의 부유한 소유자), 토니 멘델Toni Mendel(부자 유태인 과부)와 에델 미카노프스키Ethel Michanowski(베를린 사교계 명사) 등 6명의 여자와 엘사와 결혼한 상태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선물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나중에, 그의 두 번째 아내 엘사가 사망한 후, 아인슈타인은 마르가리타 코넨코바Margarita Konenkova와 잠시 관계에 있었다. 코넨코바는 유명한 러시아 조각가 세르게이 코넨코브Sergei Konenkov(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의 청동 흉상을 만든)와 결혼한 러시아 스파이였다. 아인슈타인의 아들 에두아르트는 약 20세에 쇠약을 앓았고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돌보았고 그는 또한 여러 기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그녀가 사망한 후 영구적으로 수용되었다. 특허국 사무소. 1900년에 졸업한 후 아인슈타인은 거의 2년 동안 교직을 구하며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고, 1901년 2월에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의학적 이유로 징집되지 않았다. 마르셀 그로스만Marcel Grossmann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는 베른의 스위스 특허국 사무소에서 보조 심사관 - 레벨 III로 취직했다. 아인슈타인은 자갈 선별기 및 전기-기계적 동기화 타자기를 포함한 다양한 장치에 대한 특허 출원들을 평가했다. 1903년 스위스 특허청에서 그의 직위는 영구적이 되었지만, 그는 "기계 기술을 완전히 마스터"할 때까지 승진하지 못했다. 특허청에서의 그의 작업 대부분은 전기 신호의 전송과 시간의 전기-기계적 동기화에 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두 가지 기술적 문제는 결국 아인슈타인이 빛의 본질과 공간과 시간의 근본적인 연결에 대한 급진적인 결론을 내리게 한 사고 실험에서 두드러지게 나터난다. 베른에서 만난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아인슈타인은 1902년 자조적으로 명명한 "올림피아 아카데미(The Olympia Academy)"라는 이름의 소규모 토론 그룹을 시작했는데, 이 그룹은 과학과 철학을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다. 때때로 그들은 주의 깊게 들었지만 참여하지 않은 마리치와 합류했다. 그들의 독서에는 앙리 푸앵카레, 에른스트 마하 및 데이비드 흄의 저술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그의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견해에 영향을 끼쳤다. 첫번째 과학 논문들. 1900년 아인슈타인의 논문 "모세관 현상으로부터의 결론(Folgerungen aus den Capillaritätserscheinungen)"이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 저널에 게재되었다. 1905년 4월 30일, 아인슈타인은 프로-포르마(pro-forma) 지도교수 역할의 실험 물리학 교수인 알프레드 클라이너와 함께 그의 논문을 완성했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은 "분자 크기의 새로운 결정(A New Determination of Molecular Dimensions)"이라는 학위논문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05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불리는 해에, 그는 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이론, 질량과 애너지의 등가성에 관한 기적의 해 논문들을 발표했는데, 그것들은 26세의 나이에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교수 경력. 1908년까지, 그는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았고 또한 베른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취리히 대학에서 전기역학과 상대성 원리에 대한 강의를 한 후 알프레드 클라이너는 그를 이론물리학 교수직에 추천했다. 아인슈타인은 1909년에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은 1911년 4월 프라하에 있는 독일 찰스 페르디난트 대학교(Charles-Ferdinand University)의 정교수가 되었는데,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받아들였다.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그는 11개의 과학 저술을 썼으며 그 중 5개는 복사 수학과 고체 양자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1912년 7월, 그는 취리히에 있는 모교로 돌아갔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취리히 ETH에서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분석 역학과 열역학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수학자이자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과 함께 연속체 역학, 열의 분자 이론 그리고 중력 문제를 연구했다. 1914년 10월에 "93인의 성명서"-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국주의와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수의 저명한 독일 지식인이 서명한 문서-가 출판되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그 내용을 반박하고 평화적인 "유럽인들에게의 성명서(Manifesto to the Europeans)"에 서명한 몇 안 되는 독일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1913년 7월 3일 그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막스 플랑크와 발터 네른스트는 다음 주 취리히에서 그를 방문하여 아카데미에 합류하도록 설득하고 곧 설립될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for Physics)의 소장직을 추가로 제안했다. 아카데미 회원에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유급 급여와 강의 의무가 없는 교수직이 포함되었다. 그는 7월 24일 공식적으로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으로 이사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또한 그가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한 사촌 엘사 근처에 살 것이라는 전망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4년 4월 1일에 아카데미와 그렇게 베를린 대학교에 합류했다. 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연구소는 1917년 10월 1일에 아인슈타인이 소장으로서 설립되었다.1916년 아인슈타인은 독일 물리학회(German Physical Society)(1916-1918)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일반 상대성이론을 사용하여 만든 계산에 따르면 태양의 중력에 의해 다른 별의 빛은 구부러져야 한다. 1919년 아서 에딩턴 경은 1919년 5월 29일 일식 동안 그 예측을 확인했다. 이러한 관측은 국제 언론에 발표되어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유력 신문 《더 타임즈 (The Times)》는 "과학의 혁명 - 우주의 새로운 이론 - 전복된 뉴턴적 사상"이라는 배너 헤드라인을 인쇄했다. 1920년에 그는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 1922년에 그는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일반 상대성이론은 여전히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수상이유서에도 기재된 광전 연구를 '설명'으로 취급하지 않고 단지 '법칙의 발견'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는 광자의 개념이 1924년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에 의한 플랑크 스펙트럼(planck Spectrum)이 도출이 될 때까지는 기이한 것으로 여겨져서 여전히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ForMemRS)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또한 1925년에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1921–1922: 해외 여행. 아인슈타인은 1921년 4월 2일 처음으로 뉴욕시를 방문하여 존 프랜시스 하일런John Francis Hylan 시장의 공식 환영을 받은 후 3주간의 강의와 리셉션을 가졌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여러 차례 강의를 했으며 워싱턴에서는 백악관을 방문할 때 미국 과학 어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대표자들과 동행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홀대인 자작의 손님으로서 런던에서 저명한 과학자, 지식인, 정치인을 만났고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또한 1921년 7월에 "미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My First Impression of the U.S.A.)"이라는 에세이를 출판했는데,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에서 자신의 인상을 발표한 알렉시 드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의 몇 가지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일부 관찰에 의하여 놀랐던 것이 분명하다. "방문객을 놀라게 한 것은 삶에 대한 즐겁고 긍정적인 태도이다 ... 미국인은 친절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낙관적이고 또한 시기하지 않는다." 1922년, 그는 싱가포르, 실론, 일본을 방문하여 수천 명의 일본인에게 일련의 강의를 하며 6개월간의 소풍 및 연설 여행의 일환으로 아시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여행했다. 첫 공개 강연을 마친 후,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황궁에서 황제와 황후를 만났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일본인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겸손하고 총명하며 사려 깊고 예술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1922~23년 아시아를 방문한 자신의 여행 일기에서 그는, 2018년에 재발견되었을 때 외국인 혐오 및 인종 차별적 판단으로 묘사되었던, 중국, 일본 및 인도 사람들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표현한다. 아인슈타인은 극동 여행으로 인해 1922년 12월 스톡홀름 시상식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직접 받을 수 없었다. 대신 만찬 연설은 독일 외교관이 진행했는데, 그는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 평화주의자이자 활동가라고 칭송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12일 동안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는데, 그의 그 지역의 유일한 방문이었다. 그는 영국 고등판무관 허버트 새뮤얼 경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포 경례를 받는 등 물리학자라기보다는 마치 국가원수처럼 환영받았다. 리셉션에서 그 건물은 그를 보고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인슈타인은 청중과의 대화에서, 유대 민족이 세계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행복을 표현했다. 아인슈타인은 1923년 2주 동안 스페인을 방문하여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을 잠깐 만났고 알폰소 13세로부터 스페인 과학 아카데미(Spanish Academy of Sciences)의 회원이라는 디플로마를 받았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아인슈타인은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의 국제 지적 협력 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1923~1924년에 몇 달 동안 중단됨)의 일원이었으며, 이는 과학자, 연구원, 교사, 예술가 및 지식인 사이의 국제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원래 스위스 대표로 봉사할 예정이던 사무총장 에릭 드러먼드는 가톨릭 활동가인 오스카 할레키Oskar Halecki와 주세페 모타Giuseppe Motta의 설득으로 대신 그를 독일 대표로 임명하여 곤자그 드 레이놀드Gonzague de Reynold가 스위스 대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전통주의 가톨릭을 승진시켰다. 가치. 아인슈타인의 전 물리학 교수 헨드릭 로런츠와 폴란드 화학자 마리 퀴리도 위원회 위원이었다. 1925: 남아메리카 방문. 1925년 3월과 4월에 아인슈타인은 남미를 방문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약 한 달, 우루과이에서 일주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방문은 훌리오 레이 목사Julio Rey Pastor, 야곱 라웁Jakob Laub, 레오폴도 루고네스Leopoldo Lugones를 포함한 여러 아르헨티나 학자들의 지원을 받아 호르헤 더클라우트Jorge Duclout(1856-1927)과 마우리시오 니렌슈타인Mauricio Nirenstein(1877-1935)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아내의 방문은 아르헨티나에서는 아르헨티나-독일 문화원(Argentine-Germanic Cultural Institution)의 소액 기부와 함께 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평의회(Council)와 아르헨티나 히브리어 협회(Asociación Hebraica Argentina)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1930–1931: 미국 여행. 1930년 12월,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원래는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2개월간의 방문이었다. 첫 번째 미국 여행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은 후, 그와 그의 주선자들은 그의 사생활 보호를 목표로 했다. 상을 받거나 공개적으로 연설하라는 전보와 초대가 쇄도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뉴욕에 도착한 후 아인슈타인은 차이나타운,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 편집자들과의 오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의 카르멘 공연 등 다양한 장소와 행사로 안내되어 도착하자마자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지미 워커Jimmy Walker 시장으로부터 도시의 열쇠를 받았고 아인슈타인을 "정신의 지배자"라고 묘사한 컬럼비아 대학교의 총장을 만났다.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의 목사인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아인슈타인에게 교회를 안내하고 입구에 서 있는 교회가 아인슈타인을 위해 만든 실물 크기의 동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욕에 머무는 동안, 하누카 축제 기간 동안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000명의 군중과 합류했다. 다음으로 아인슈타인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칼텍 총장과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밀리컨을 만났다. 아인슈타인이 뚜렷한 평화주의자이고 밀리컨은 "애국적인 군국주의에 대한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와의 우정은 "어색했다". 칼텍(Caltech)의 학생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종종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로 유명한 작가 업턴 싱클레어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과 친구가 되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수장인 칼 램믈Carl Laemmle은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스튜디오를 안내하고 그를 채플린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채플린이 아인슈타인과 그의 아내 엘사를 저녁 식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초대하는 즉석 접촉을 가졌다. 채플린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이 그의 "비범한 지적 에너지"가 나오는 "매우 감정적인 기질"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 (City Lights)》는 며칠 후 할리우드에서 초연될 예정이었고 채플린은 아인슈타인과 엘사를 특별 게스트로 초대했다. 아인슈타인의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은 이것을 "축복의 새 시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채플린은 나중에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그의 집에 있는 아인슈타인을 방문하여 그의 "소박한 작은 아파트"와 그의 이론을 쓰기 시작했던 피아노를 회상했다. 채플린은 그것이 "나치에 의해 점화용 나무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33: 미국으로의 이주. 1933년 2월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새 총리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의 집권으로 독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1933년 초 미국 대학에 있는 동안 그는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교에서 세 번째 2개월간 방문 교수직을 맡았다. 1933년 2월과 3월에 게슈타포는 베를린에 있는 그의 가족 아파트를 반복해서 습격했다. 그와 그의 아내 앨사는 3월에 유럽으로 돌아갔고 여행 중에 독일 의회가 3월 23일 전권 위임법를 통과시켜 히틀러 정부를 '사실상' 법적 독재 정권으로 전환시켰고 그들이 배를린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들은 그들의 오두막이 나치에 의해 습격당했고 아인슈타인의 개인 범선이 압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 28일 벨기에 앤트워프에 도착한 아인슈타인은 즉시 독일 영사관으로 가서 여권을 양도하고 공식적으로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다. 나치는 나중에 그의 배를 팔고 그의 오두막을 히틀러 청소년단 캠프로 개조했다. 난민 신분. 1933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독일 정부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여 유태인이 공직에 있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음을 발견했다. 역사가인 제럴드 홀턴Gerald Holton은 어떻게 "동료들이 거의 들리지 않는 항의를 제기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 과학자들이 갑자기 대학 직위를 포기하고 그들이 고용된 기관 목록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는가를 기술한다. 한 달 후, 아인슈타인의 저술은 나치 책 불태우기에서 독일 학생회(German Student Union)의 표적이 된 서적들 중 하나였으며 나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유대인 지식주의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한 독일 잡지는 그를 적의 목록에 포함시켰다. 독일 정권은 "아직 교수형에 처하지 않음"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그의 머리에 현상금 5,000달러를 제안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미 이주한 물리학자 친구인 막스 보른에게 보낸 후속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들의 잔인함과 비겁함의 정도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그는 책 불태우기를 "대중 계몽을 기피하고" 또한 "세상 무엇보다 지적 독립을 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감정 폭발"이라고 묘사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영구적인 집이 없었고 어디서 살고 일할지 확신할 수 없었으며, 또한 여전히 독일에 있는 수많은 다른 과학자들의 운명에 대해 똑같이 걱정했다. 그는 벨기에의 데 한(De Haan)에서 집을 빌렸고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살았다. 1933년 7월 말, 그는 이전 몇 년 동안 아인슈타인과 친구가 된 영국 해군 장교 올리버 로커-램슨Oliver Locker-Lampson 사령관의 개인적인 초청으로 약 6주간 영국에 갔다. 로커-램슨은 노퍽 로턴(Norfolk, Roughton) 교구에 있는 로턴 히스(Roughton Heath)의 목조 오두막에 있는 크로머Cromer 집 근처에 머물도록 그를 초대했다. 아인슈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로커 램슨은 두 명의 경호원을 그의 외딴 오두막에서 지켜보게 했다. 1933년 7월 24일 《데일리 해랄드 (Daily Herald)》에 엽총을 들고 아인슈타인을 지키는 사진이 실렸다. 로커-램슨은 아인슈타인을 집으로 데려가 윈스턴 처칠을 만났고 나중에는 오스틴 체임벌린과 로이드 조지 전 총리를 만났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과학자들을 독일에서 내보내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영국 역사가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처칠이 즉시 대응했고 그의 친구 물리학자 프레데릭 린데만Frederick Lindemann을 독일로 보내 유대인 과학자를 찾아 영국 대학에 배치했다고 지적했다. 처칠은 나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몰아낸 결과로 "기술적 표준"이 낮아져서 연합군의 기술이 앞서게 된 것을 관찰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터키 수상 이스메트 이뇌뉘를 포함한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연락하여 1933년 9월 실직한 독일계 유대인 과학자들을 배치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의 편지의 결과로 터키에 초청된 유대인들은 결국 "구원된 개인 1,000명"을 넘어섰다. 로커-램슨은 또한 영국 시민권을 아인슈타인에게 연장하기 위한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일으키고 있는 위기를 설명하는 공개석상에서 여러 번 등장했다. 그의 연설 중 하나에서 그는 독일의 유대인 대우를 비난하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 시민권을 거부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시민권을 증진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연설에서 그는 아인슈타인을 영국에서 임시 쉼터를 제공받아야 하는 "세계의 시민"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두 법안 모두 실패했고, 아인슈타인은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로부터의 초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상주 학자resident scholar가 되었다.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상주 학자. 1933년 10월,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돌아와 나치 독일을 탈출한 과학자들의 피난처가 된 것으로 알려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 대학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유대인 할당량(Jewish quotas) 때문에 유대인 교수나 학생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아직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1931년 5월과 1933년 6월 사이에 3개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고 5년제 학생을 제안한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대학에서 제안받았지만, 1935년, 미국에 영구적으로 남기로 하며 또한 시민권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아인슈타인의 고등연구소와의 제휴는 195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새로운 연구소에서 (존 폰 노이만 및 쿠르트 괴델과 함께) 처음으로 선택된 4명 중 한 명이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곧 괴델과 친밀한 우정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일을 의논하면서 함께 긴 산책을 하곤 했다. 그의 조수인 브루리아 카우프만Bruria Kaufman은 나중에 물리학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개발하고 또한 양자 물리학에 대한 수용된 해석을 논박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맨해튼 계획. 1939년에 망명한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를 포함한 헝가리 과학자 그룹이 워싱턴에 진행 중인 나치 원자폭탄 연구에 대해 경고하려고 시도했다. 그룹의 경고는 과소평가되었다.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는 에드워드 텔러와 유진 위그너와 같은 다른 난민들과 함께 "독일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미국인들에게 경고하고 히틀러가 그러한 무기에 의지할 것 이상일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을 그들의 책임으로 여겼다. 미국이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39년 7월, 실라르드와 위그너는 아인슈타인을 방문하여 평화주의자인 아인슈타인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그는 실라르드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관심을 갖고 자체적인 핵무기 연구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이 서한은 "거의 틀림없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직전에 핵무기에 대한 진지한 조사를 실시하기 위한 핵심 자극제"라고 믿어진다. 편지 외에도 아인슈타인은 벨기에 왕실 및 벨기에 여왕 어머니와의 인맥을 이용하여 백악관 집무실에 개인 사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편지와 루즈벨트와의 만남의 결과로서 미국이 맨해튼 계획를 시작하기 위해 "막대한 물질적, 재정적, 과학적 자원"을 사용하여 폭탄 개발을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에게 "전쟁은 질병이었다 ... [그리고] 그는 전쟁에 대한 저항을 요구했다."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그가 그의 평화주의 원칙에 어긋났다고 주장한다. 죽기 1년 전인 1954년, 아인슈타인은 그의 오랜 친구 라이너스 폴링에게 말하기를, "나는 인생에서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 것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했을 때였는데; 그러나 독일인이 그들을 만들 위험이 있다는 몇 가지 정당성-독일인이 그것들을 만들 위험이 았었다 ..." 1955년에 아인슈타인과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한 10명의 다른 지식인과 과학자는 핵무기의 위험을 강조하는 한 선언문에 서명했다. 미국시민권. 아인슈타인은 1940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 연구 연구소에서 경력을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유럽과 비교할 때 미국 문화의 능력주의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는 사회적 장벽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인정했고, 그 결과, 개인이 더 창의적으로 격려받았으며, 이는 그가 자신의 조기 교육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특성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 있는 전미 유색인종 발전 협회(NAACP)에 가입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인종차별을 미국의 "최악의 질병"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참여의 일환으로 그는 민권 운동가 W. E. B. 듀보이스와 교신했고 1951년 재판에서 그를 위하여 증언할 준비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듀보이스의 증인이 되겠다고 제안했을 때 판사는 사건을 기각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아인슈타인은 역사적으로 흑인 대학이었던 펜실베니아의 링컨 대학교을 방문하여 명예 학위를 받았다. 링컨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대학 학위를 수여한 최초의 대학이어서; 졸업생으로는 랭스턴 휴스와 서굿 마셜이 포함된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연설하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침묵할 생각이 없다"고 덧붙였다. 프린스턴의 한 거주자는 아인슈타인이 한때 흑인 학생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지불한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아인슈타인은 "내 자신이 유대인이므로, 아마도 흑인들이 차별의 희생자로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삶. 시온주의자를 도운 이유. 아인슈타인은 1925년에 개교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설립을 도운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며, 최초의 이사회 중 한사람이었다. 그 이전인 1921년에 그는 생화학자이자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 회장인 하임 바이츠만으로부터 계획된 대학을 위한 기금 마련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또한 초기 프로그램에 대해 다양한 제안을 제출했다. 그 중 미개발 토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먼저 농업 연구소를 만들 것을 조언했다. 그는 화학 연구소와 미생물학 연구소가 국가 발전의 3분의 1을 저해하고 있는 "악"이라고 불렀던 말라리아와 같은 다양한 진행 중인 전염병과 싸우기 위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동양학 연구소의 설립은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제공되는 언어 과정을 포함하는 국가와 역사적 기념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위하여 중요했다. 아인슈타인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1948년에 이스라엘로서 그의 도움 없이 세워질 독립된 유대 국가의 창설에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은 알리야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 아랍인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견해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대다수의 유대인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은 시온주의 운동(Zionist movement)에서는 그 역할이 미미했다. 하임 바이츠만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52년 11월 재임 중 사망하고 에즈리엘 칼레바흐Ezriel Carlebach의 재촉으로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인슈타인에게 이스라엘의 대통령직을 제안했는데, 이는 가장 존중받는 직위였다. 이 제안은 워싱턴 주재 이스라엘 대사인 아바 에반Abba Eban이 제시했으며, 그는 제안이 "유대인이 그 아들들에게 안식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존경심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거부했고, 자신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그것을 수락할 수 없는 것이 "당장은 슬프고 부끄럽다"고 답신에 썼다. 음악의 사랑. 아인슈타인은 어린 나이에 음악의 감상을 발전시켰다. 그의 후기 잡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음악 속에서 생각한다. 나는 음악 속에서 백일몽을 꾼다. 나는 음악의 관점에서 내 삶을 본다 ... 나는 인생에서 대부분의 기쁨을 음악으로부터 얻는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꽤 잘 치셨고 아들이 바이올린을 배우기를 원했으며, 아들에게 음악에 대한 사랑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화에 동화되도록 도왔다. 지휘자 레온 보스타인Leon Botstein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5세 때 연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 나이에는 그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가 13살이 되었을 때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발견하고 모차르트의 작곡에 매료되어 음악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인슈타인은 "체계적으로 연습한 적" 없이 스스로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랑은 의무감보다 더 나은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17세 때 그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던 중 아라우에서 학교 시험관에게 들었다. 심사관은 나중에 그의 연주가 "놀랍고 '위대한 통찰력'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보스타인은 쓰기를, 시험관을 놀라게 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과 부족했던 자질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음악은 이 학생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 이후로 음악은 아인슈타인의 삶에서 중추적이고 영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자신이 전문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이 실내악을 함께 연주한 사람들 중에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있었고 그는 개인 청중과 친구들을 위해 연주했다. 실내악은 베른, 취리히, 베를린에 살면서 막스 플랑크와 그의 아들과 함께 연주하는 동안 그의 사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모차르트 작품의 쾨헬 번호 1937년 판의 편집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판은 먼 관계였을지도 모르는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에 의해 준비되었다. 1931년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연구하는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졸너Zoellner 가족 음악원을 방문하여 졸너 사중주단Zoellner Quartet 단원들과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작품 일부를 연주했다. 생애의 마지막 부근에, 젊은 줄리어드 사중주단Juilliard Quartet이 프린스턴에서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그 사중주단은 "아인슈타인의 정합과 억양의 수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치적 견해. 1918년 아인슈타인은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민주당의 창당원 중 한 명이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견해는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는 "왜 사회주의인가?"와 같은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볼셰비키에 대한 그의 견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1925년에 그는 '잘 규제된 정부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그들의 통치를 '인류 역사의 비극이자 공포의 체제'라고 불렀다. 그는 나중에 보다 균형 잡힌 견해를 채택하여 그들의 방법을 비판했지만 칭찬했는데, 이는 1929년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한 그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의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인류 양심의 수호자이자 재건자이다. " 아인슈타인은 종종 물리학이나 수학 이론과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 판단과 의견을 제시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세계 연방의 틀에서 민족 국가의 힘을 견제하는 민주적 세계 정부의 아이디어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다른 그는 "나는 인간이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끔찍한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다른 가능한 방법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세계 정부를 지지한다."라고 썼다. FBI는 1932년에 아인슈타인에 대한 비밀 문서를 작성했으며 그가 사망할 당시 그의 FBI 파일 길이는 1,427페이지였다.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주고 받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간디를 "다음 세대를 위한 롤 모델"로 묘사했다. 최초의 관계는 1931년 9월 27일 윌프리드 이스라엘Wilfrid Israel이 인도 손님 V. A. 순다람V. A. Sundaram을 데리고 카푸트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친구 아인슈타인을 만났을 때 이루어졌다. 순다람은 간디의 제자이자 특사였는데, 윌프리드 이스라엘은 1925년 인도에서 인도 지도자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다. 방문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간디에게 짧은 편지를 썼고 그 편지에 간디는 곧바로 답했다. 결국 아인슈타인과 간디는 바라던 대로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은 윌프리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졌다. 종교적 및 철학적 견해. 아인슈타인은 다양한 원본 저작물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적 견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에 나오는 비인격적인 범신론적 신에 대해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개인 신을 믿지 않았고, 그 견해를 순진하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불가지론자, 또는 "깊이 종교적인 비신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내세를 믿느냐는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아니요. 그리고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인슈타인은 주로 영국과 미국 양국의 비종교적 휴머니스트 및 윤리 문화(Ethical Culture) 그룹과 제휴했다. 그는 뉴욕 제일 휴머니스트 협회(First Humanist Society of New York) 자문 위원회에서 봉사했으며, 영국에서 《신 휴머니스트 (New Humanist)》를 출판하는 합리주의자 협회(Rationalist Association)의 명예 준회원이었다. 뉴욕 윤리 문화 협회(New York Society for Ethical Culture) 창립 75주년을 맞아서, 그는 윤리적 문화라는 개념이 종교적 이상주의에서 가장 가치 있고 영속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개념을 구현했다고 천명했다. 그는 "'윤리적 문화'가 없으면 인류의 구원도 없다"고 말했다. 1954년 1월 3일자 철학자 에릭 거트킨드Eric Gutkind에게 보낸 독일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에게 신이란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의 표현이자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성경은 영예롭지만 여전히 유치한 원시적인 전설의 모음집이다. 아무리 미묘하게 (나를 위해) 이것을 바꿀 수 있더라도 해석이 없다. ... 나에게 유대교는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가장 유치한 미신의 화신이다. 그리고 내가 기꺼이 속해 있고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는 유대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 나는 그들에 대해 '선택'된 것을 볼 수 없다. 사망. 1955년 4월 17일, 아인슈타인은 1948년 루돌프 니센Rudolph Nissen에 의해 외과적으로 보강되었던 복부대동맥류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을 경험했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7주년을 기념하는 텔레비전 출연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연설의 초안을 병원에 가지고 갔지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원할 때 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무미건조하다. 내 몫을 다했다, 갈 때가 됐다. 우아하게 하겠다"며 수술을 거부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펜 메디신 프린스턴 병원(Penn Medicine Princeton Medical Center)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거의 마지막까지 일을 계속했다. 부검하는 동안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인 토머스 스톨츠 하비Thomas Stoltz Harvey는 미래의 신경과학이 무엇이 아인슈타인을 그렇게 지능적으로 만들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족의 허락 없이 보존을 위해 아인슈타인의 뇌를 적출했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뉴저지 주 트렌턴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흩어져 있다. 1965년 12월 13일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기념 강연에서 핵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는 거의 완전히 세련됨이 없었고, 완전히 세속적이지 않았습니다. ... 그에게는 항상 어린아이와 같은 동시에 매우 완고한 놀라운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개인 기록 보관소, 도서관 및 지적 자산을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 기증했다. 과학적 경력. 아인슈타인은 평생동안 수백 권의 책과 논문을 출판했다. 그는 300편 이상의 과학 논문과 150편의 비과학 논문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학과 기록 보관소는 30,000개 이상의 고유 문서로 구성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의 지적 업적과 독창성은 "아인슈타인"이라는 단어를 "천재"와 동의어로 만들었다. 그는 혼자서 한 작업 외에도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아인슈타인 냉장고등을 포함한 추가 프로젝트에서 다른 과학자들과 협력했다. 1905 - 기적의 해 논문들. 기적의 해(Annus Mirabilis) 논문들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 과학 저널에 발표한 광전 효과(양자 이론을 일으켰음),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이론 그리고 E = mc2에 관한 4편의 논문들이다. 이 네 작업들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에 크게 기여했으며 공간, 시간 및 물질에 대한 관점을 변경했다. 그 4편의 논문들은: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양(양자)으로만 교환된다고 제안하여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해결했다. 이 아이디어는 양자 이론의 초기 개발에 중추적이었다. 통계 물리학의 적용을 뒷받침하는 원자론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설명했다. 빛의 속도는 관찰자의 운동과 무관하다는 경험적 증거에 기반한 분석 결과 역학에 변화를 도입하여 전기 및 자기에 대한 맥스웰 방정식을 역학의 법칙과 조화시켰다. "빛 전달 에테르"의 개념을 믿지 않았다.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 'E = mc2' (그리고 암시적으로 중력이 빛을 "구부리는" 능력), "정지 에너지"의 존재, 핵 에너지의 기초. 통계 역학. 열역학적 요동과 통계 물리학. 1900년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제출된 아인슈타의 첫 번째 논문은 모세관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1901년에 "Folgerungen aus den Capillaritätserscheinunge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모세관 현상으로부터의 결론"으로 번역된다. 그가 1902-1903년에 발표한 두 개의 논문(열역학)은 통계적 관점에서 원자 현상을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이 논문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1905년 논문의 기초가 되었으며, 브라운 운동이 분자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03년과 1904년에 그의 연구는 주로 유한 원자 크기가 확산 현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임계 유백광의 이론. 아인슈타인은 임계점에서 유체의 밀도 변화를 다루면서 열역학적 요동 문제로 되돌아갔다. 일반적으로 밀도 요동은 밀도에 대한 자유 에너지의 2차 도함수에 의해 제어된다. 임계점에서 이 도함수는 0이므로 큰 요동이 발생한다. 밀도 요동의 효과는 모든 파장의 빛이 산란되어 유체가 유백색(milky white)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과 관련시켰는데, 이는 요동 크기가 파장보다 훨씬 작을 때 발생하며 하늘이 파란색인 이유를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은 밀도 요동의 처리로부터 임계 유백광(critical opalescence)을 정량적으로 도출했으며, 그 효과와 레일리 산란이 어떻게 물질의 원자적 구성에서 비롯되는지 보여주었다. 특수 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의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은 1905년 6월 30일에 접수되어 같은 해 9월 26일에 출판되었다. 그것은 역학 법칙에 변화를 도입함으로써 맥스웰 방정식(전기 및 자기 법칙)과 뉴턴 역학 법칙 사이의 충돌을 조정했다. 관찰적으로는,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고속(물체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곳)에서 가장 분명하다. 이 논문에서 발전된 이론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와 이 작업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만 출판하기로 한 결정은 서로의 몫인 것 같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관찰자의 프레임에서 측정할 때 움직이는 물체에 의해 운반되는 시계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고 물체 자체가 운동 방향으로 수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논문은 또한 당시 물리학의 주요 이론적 실체 중 하나인 에테르에 대한 아이디어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질량-에너지 등가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방정식의 결과로 'E = mc^2'을 생성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1905년 연구는 수년 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막스 플랑크를 비롯한 주요 물리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아인슈타인은 원래 운동학(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연구)의 관점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을 구성했다. 1908년,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기하학적 용어로 시공간 이론으로 재해석했다. 아인슈타인은 1915년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민코프스키의 형식주의를 채택했다. 일반 상대성이론. 일반 상대성이론과 등가 원리. 일반 상대성이론(GR)은 1907년에서 1915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개발한 중력 이론이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질량 사이의 관측된 중력 인력은 질량에 의한 시공간의 뒤틀림에 기인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현대 천체물리학의 필수 도구로 발전했다. 그것은 중력 인력이 너무 강해 빛조차 빠져 나갈 수 없는 우주 영역인 블랙홀에 대한 현재 이해의 토대를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말했듯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개발한 이유는 특수 상대성이론 내에서 관성적 운동의 선호가 만족스럽지 않은 반면, 처음부터 운동 상태(심지어 가속된 상태라도)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더 만족스러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907년 그는 특수 상대성에서 가속도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 "상대성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자유 낙하는 실제로 관성 운동이며 자유 낙하하는 관찰자에게는 특수 상대성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등가 원리라고 한다. 같은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또한 중력 시간지연, 중력 적색편이 및 빛의 휘어짐 현상을 예측했다. 1911년, 아인슈타인은 1907년 기사를 확장한 "중력이 빛의 전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On the Influence of Gravitation on the Propagation of Light)"이라는 또 다른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무거운 물체에 의한 빛의 굴절 정도를 추정했다. 따라서 일반 상대성 이론의 이론적 예측은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테스트될 수 있었다. 중력파. 1916년, 아인슈타인은 파동으로 전파되는 시공간의 곡률에 잔물결이 발생하여 소스에서 바깥쪽으로 이동하여 중력 복사로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중력파를 예측했다. 중력파의 존재는 중력의 물리적 상호 작용의 유한 전파 속도 개념을 가져오는 로런츠 공변성으로 인해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가능하다. 대조적으로, 중력의 물리적 상호 작용이 무한한 속도로 전파된다고 가정하는 뉴톤적 중력 이론에서는 중력파가 존재할 수 없다. 중력파에 대한 최초의 간접적인 탐지는 1970년대에 밀접하게 공전하는 한 쌍의 중성자별 PSR B1913+16의 관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궤도 주기의 붕괴에 대한 설명이 중력파를 방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예측은 2016년 2월 11일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의 연구원들이 중력파에 대한 최초의 관측을 발표했을 때 확인되었다. 예측 후 거의 100년이 지난 2015년 9월 14일 지구에서 감지되었다. 구멍 논쟁 및 초안 이론. 일반 상대성이론을 개발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이론의 게이지 불변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일반 상대론적 장 이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 논증을 공식화했다. 그는 완전히 일반적으로 공변하는 텐서 방정식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일반 선형 변환에서만 불변하는 방정식을 찾았다. 1913년 6월, Entwurf('초안') 이론은 이러한 조사의 결과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반 상대성이론보다 덜 우아하고 더 어려운 이론의 스케치였으며, 추가 게이지 고정 조건으로 보완된 운동 방정식과 함께 한다. 2년 이상의 집중적인 연구 끝에 아인슈타인은 구멍 논쟁(hole argument)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1915년 11월 그 이론을 폐기했다. 물리적 우주론. 1917년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우주 전체의 구조에 적용했다. 그는 일반 장방정식이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동적인 우주를 예측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동적 우주에 대한 관측 증거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이론이 정적 우주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인 우주 상수를 장방정식에 도입했다. 수정된 장방정식은 이 시대에 마하Mach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해에 따라 닫힌 곡률의 정적 우주를 예측했다. 이 모형은 아인슈타인 세계 또는 아인슈타인의 정적 우주(Einstein's static universe)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9년 에드윈 허블이 성운의 후퇴를 발견한 후,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정적 모형을 포기하고 우주의 두 가지 동적 모델인 1931년의 프리드만-아인슈타인 우주(Friedmann–Einstein universe)와 1932년의 아인슈타인-드 시터 우주(Einstein–de Sitter universe)를 제안했다. 이 각각의 모형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 상수가 "어쨌든 이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우주 상수를 폐기했다. 많은 아인슈타인 전기에서 아인슈타인은 만년에 우주 상수를 그의 "가장 큰 실수"로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천체물리학자 마리오 리비오Mario Livio는 최근 이 주장이 과장된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3년 말 아일랜드 물리학자 코맥 오레이피어타이Cormac O'Raifeartaigh가 이끄는 팀은 허블이 성운의 후퇴를 관측한 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정상우주론을 고려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1931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지금까지 간과된 원고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 상수와 관련된 과정인 물질의 지속적인 생성으로 인해 물질의 밀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팽창하는 우주 모델을 탐구했다.그가 논문에서 언급했듯이 "다음으로는, 나는 허블의 [원문대로] 사실을 설명할 수 있고 밀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한 방정식 (1)에 대한 해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 "물리적으로 제한된 부피를 고려한다면, 물질의 입자는 계속해서 떠나갈 것이다. 밀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질의 입자가 공간으로부터 부피에 지속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호일Hoyle, 본디Bondi 및 골드Gold보다 수년 전에 팽창하는 우주의 정상-상태 모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정상 상태 모델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그 아이디어를 빠르게 포기했다. 에너지 운동량과 유사텐서. 일반 상대성은 동적 시공간을 포함하므로 보존된 에너지와 운동량을 식별하는 방법을 확인하기 어렵다. 뇌터 정리를 통해 이러한 양은 불변성을 갖는 라그랑지언에서 결정되지만 일반 공변성은 병진translation 불변성을 게이지 대칭의 무엇으로 만든다. 일반 상대성에서 파생된 에너지와 운동량은 뇌터의 처방에 의해 이러한 이유로 실제 텐서를 만들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중력장은 좌표 선택에 의해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그는 비-공변non-covariant 에너지 운동량 유사텐서pseudotensor가 사실 중력장에서 에너지 운동량 분포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이 접근 방식은 레프 란다우 및 예프게니 립시츠Evgeny Lifshitz 및 기타 사람들에 의해 반향되어 표준이 되었다. 유사텐서와 같은 비-공변 객체의 사용은 1917년 에르빈 슈뢰딩거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심하게 비판되었다. 웜홀. 1935년에 아인슈타인은 나단 로젠Nathan Rosen과 협력하여 종종 아인슈타인-로젠 다리(Einstein–Rosen bridges)라고 불리는 웜홀wormhole의 모형을 만들었다. 그의 동기는 "중력장이 기본 입자의 구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Do Gravitational Fields play an Important Role in the Constitution of the Elementary Particles?)"라는 논문에 요약된 프로그램에 따라 중력장 방정식의 해로 전하를 가진 소립자를 모델링하는 것이었다. 이 해는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을 잘라내어 붙여 두 패치patch 사이에 다리를 만든다. 웜홀의 한쪽 끝이 양전하를 띠면 다른 쪽 끝은 음전하를 띠게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한 쌍의 입자와 반입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카르탕 이론. 스피닝하는spinning 점 입자를 일반 상대성에 통합하기 위해 아핀affine 연결은 비틀림이라고 하는 비대칭 부분을 포함하도록 일반화될 팔요가 있다. 이 수정은 1920년대에 아인슈타인과 카르탕Cartan에 의해 이루어졌다. 운동의 방정식. 일반 상대성이론에는 공간이 어떻게 휘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아인슈타인 정방정식이라는 기본 법칙이 있다. 입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측지선 방정식은 아인슈타인 장방정식에서 파생될 수 있다. 일반 상대성의 방정식은 비선형이므로 블랙홀과 같은 순수한 중력장으로 구성된, 한 블랙홀과 같은, 에너지 덩어리는 새로운 법칙이 아니라 아인슈타인 장방정식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블랙홀과 같은 특이 해(singular solution)의 경로는 일반 상대성 자체의 측지선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것은 각운동량이 없는 점 같은pointlike 물체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 인펠트Infeld과 호프만Hoffmann에 의해서, 회전하는 물체에 대해서는 로이 커Roy Kerr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구 양자 이론. 광자와 에너지 양자. 1905년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빛 자체가 국부적인 입자(양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아인슈타인의 빛 양자는 막스 플랑크와 닐스 보어를 포함한 모든 물리학자들에 의해 거의 보편적으로 거부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오로지 1919년 로버트 밀리컨의 광전 효과에 대한 상세한 실험과 콤프턴 산란 측정과 더불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인슈타인은 주파수 "f"의 각 파동은 각각 에너지가 "hf" 인 광자의 집합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다. 그는 입자가 파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아이디어가 특정의 실험 결과, 특히 광전 효과를 설명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양자화된 원자 진동. 1907년, 아인슈타인은 격자 구조 속의 각 원자가 독립적인 조화 진동자인 물질 모형을 제안했다. 아인슈타인 모형에서는 각 원자는 독립적으로 진동한다-각 발진기에 대해 동일한 간격의 양자화된 상태의 시리즈이다. 아인슈타인은 실제 진동의 주파수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의 비열(specific heat)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특별히 분명한 증명이었기 때문에 이 이론을 제안했다. 피터 디바이는 이 모형을 개선했다. 단열 원리 및 작용-각 변수. 1910년대 전반에 걸쳐 양자역학은 다양한 시스템을 포괄하도록 범위가 확장되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핵을 발견하고 전자가 행성처럼 공전한다고 제안한 후, 닐스 보어는 플랑크가 도입하고 아인슈타인이 개발한 동일한 양자역학적 가정이 원자에서 전자의 이산 운동(discrete motion)과 원소 주기율표를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발전을 빌헬름 빈이 1898년 주장한 것과 연결함으로써 공헌했다. 빈은 열평형 상태의 단열적 불변성(adiabatic invariance)가설을 통해 서로 다른 온도의 모든 흑체 곡선이 단순한 전환 과정(simple shifting process)을 통해 서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1911년에 동일한 단열 원리가 기계적 운동에서 양자화되는 양이 단열적 불변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아르놀트 좀머펠트는 이 단열적 불변을 고전역학의 작용 변수(action variables)와 동일시했다.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1924년, 아인슈타인은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로부터 빛이 구별할 수 없는 입자의 가스로 이해될 수 있다고 가정한 계산 방법에 기반한 통계 모형에 대한 설명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보스의 통계가 제안된 빛 입자뿐만 아니라 일부 원자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보스의 논문 번역본을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제출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그 모형과 그 함축을 설명하는 자신의 기사들을 발표했는데, 그중 하나가 일부 입자가 매우 낮은 온도에서 나타나야 하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현상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에릭 얼린 코넬과 칼 위먼이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의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천체물리학 실험실 공동연구소(JILA) 연구소에서 제작한 초냉각 장비를 사용하여 실험적으로 이러한 응축수가 생성되었다.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는 지금 모든 보손의 집합의 동작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스케치는 라이덴 대학교 도서관의 아인슈타인 아카이브(Einstein Archive)에서 볼 수 있다. 파동-입자 이중성. 특허청 사무소는 1906년 아인슈타인을 기술 심사관 2급으로 승진시켰지만 그는 학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8년에 그는 베른 대학교의 프리바트도젠트(Privatdozent)가 되었다. "Über die Entwicklung unserer Anschauungen über das Wesen und die Konstitution der Strahlung("복사의 구성과 에센스에 대한 우리 견해의 발전")에서, 빛의 양자화, 그리고 1909년의이전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막스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가 잘 정의된 운동량을 가져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독립적인 점같은 입자로 작용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광자 개념(광자라는 이름은 1926년 길버트 뉴턴 루이스에 의해 나중에 소개되었지만)을 소개하고 양자역학에서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복사의 파동 입자 이중성을 물리학이 새롭고 통합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그의 확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로 보았다. 영점 에너지.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완성된 일련의 작업에서 플랑크는 자신의 1900년 양자 이론을 재구성하고 "두 번째 양자 이론"에서 영점 에너지(zero-point energy)의 개념을 도입했다. 곧 이 아이디어는 아인슈타인과 그의 조수 오토 슈테른의 관심을 끌었다. 회전하는 이원자 분자의 에너지에 영점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수소 기체의 이론적인 비열을 실험 데이터와 비교했다. 숫자는 잘 맞았다. 그러나, 연구 결과를 발표한 후, 그들은 영점 에너지 개념의 정확성에 대해 더 이상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즉시 지지를 철회했다. 자극 방출. 1917년 상대성이론에 대한 연구의 정점에 있던 아인슈타인은 메이저(maser)와 레이저(laser)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과정인 자극 방출(stimulated emission)의 가능성을 제안한 논문을 《물리 저널Physikalische Zeitschrift》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n개 광자를 가진 모드로의 빛의 방출은 빈 모드로의 빛의 방출과 비교하여 통계적으로 향상된다면 빛의 흡수 및 방출 통계가 오직 플랑크의 분포 법칙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원자 전이(atomic transitions)의 통계에 간단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논문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양자역학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질파. 아인슈타인은 루이 드 브로이의 작업을 발견하고 그의 아이디어를 지지했는데,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주요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드 브로이 파동에 대한 파동 방정식을 제시했는데, 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역학의 해밀턴-야코비 방정식이다. 이 논문은 1926년 슈뢰딩거의 연구에 영감을 줄 것이다. 양자역학. 양자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반대.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에 관한 1905년 논문을 시작으로 양자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물리학자들의 수용에도 불구하고 1925년 이후에 진화해온 현대 양자역학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양자역학의 무작위성이 결정주의의 결과라기 보다는 근본적인 것이라는 것에 회의적이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생이 마칠 때까지,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고 계속 주장했다. 보어 대 아인슈타인.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양자역학에 관한 일련의 공개적 논쟁으로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과학 철학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기억된다. 그들의 논쟁은 양자역학에 대한 이후 양자역학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역설. 1935년, 아인슈타인은 "EPR 논문"에서 양자역학, 특히 그 완전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다. 사고 실험에서, 그는 두 입자가 상호 작용하여 속성이 강한 상관 관계를 갖도록 고려했다. 두 입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한 입자의 정확한 위치 측정은 다른 입자의 위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여; 마찬가지로 한 입자의 정확한 운동량 측정은 다른 입자를 방해할 필요 없이 다른 입자의 운동량에 대한 똑같이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국소적 실재론(local realism)의 개념을 고려할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1) 다른 입자가 이러한 특성을 이미 결정했거나, 혹은 (2) 첫 번째 입자를 측정하는 과정이 두 번째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현실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아인슈타인은 이 두 번째 가능성(대중적으로는 "원거리의 놀라운spooky 작용"이라 불림)을 거부했다. 국소적 실재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은 양자역학의 정확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불완전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물리적 원리로서, 1982년의 아스펙의 실험(Aspect's experiment)은 존 스튜어트 벨이 1964년에 기술한 벨의 정리를 확인했을 때 국소적 실재론은 잘못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실험과 후속 실험의 결과는 양자 물리학이 "입자가 분리된 후 서로 통신할 수 없는 연결되지 않은 독립적인 유사-고전적 개체로 간주되는" 모든 버전의 물리학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국소적 실재론에 대해 틀렸지만, 그의 반대되는 것들, 양자 얽힘 상태의 비정상적인 특성에 대한 명확한 예측은 EPR 논문이 《피지컬 리뷰》에 게재된 상위 10개 논문 중 하나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양자 정보 이론의 발전의 주축으로서 간주된다. 통일장 이론. 일반 상대성에 대한 연구에 이어,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학을 단일 실체의 측면으로 포함하기 위해 자신의 중력 이론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했다. 1950년, 그는 "일반화된 중력 이론에 대해서"이라는 제목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논문에서 자신의 "통일장 이론"을 기술했다. 이 작업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그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통일 프로젝트는 강한 그리고 약한 핵력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 몇 년까지 잘 이해되지도 않았다. 주류 물리학은 통합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접근 방식을 오랫동안 무시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모든 것의 이론을 위한 현대적 탐구, 특히 기하학적 장이 통합된 양자-역학 환경에서 나타나는 끈 이론에 동기를 부여했다. 기타 연구. 아인슈타인은 실패했고 또한 포기한 다른 조사들을 수행했다. 이들은 힘, 초전도 및 기타 연구와 관련이 있다. 다른 과학자들과의 협동. 장기간의 공동 연구자 레오폴트 인펠트, 나단 로젠Nathan Rosen, 피터 버그만Peter Bergmann 등과의 공동 작업에 더해서, 아인슈타인은 다양한 과학자와 일회성 공동 작업을 수행했다. 아인슈타인-드 하스 실험. 아인슈타인과 드 하스De Haas는 자화가 오늘날 스핀이라고 알려진 전자의 운동으로 인한 것임을 증명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비틀림 진자(torson pendulum)에 매달린 철봉의 자화를 역전시켰다. 그들은 자화가 변화함에 따라 전자의 각운동량이 변하기 때문에 이것이 막대를 회전시킨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실험은 전자와 관련된 각운동량이 작기 때문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지만, 어떤 종류의 전자 운동이 자화를 담당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립했다. 슈뢰딩거 기체 모델. 아인슈타인은 에르빈 슈뢰딩거에게 한 상자를 고려함으로써 보스-아인슈타인 가스의 통계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런 다음 상자에 있는 입자의 가능한 양자 운동 각각에 독립 고조파 진동자를 연결한다. 이 진동자를 양자화하면 각 레벨은 정수 점유 숫자를 갖게 되는데, 그 숫자가 그 안에 있는 입자의 수가 될 것이다. 이 공식은 두번째 양자화의 한 형태이지만, 현대 양자역학보다 앞선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것을 적용하여 반고전적semiclassical 이상기체의 열역학적 특성을 도출했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이름을 공동 저자로 추가할 것을 권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초대를 거절했다. 아인슈타인 냉장고. 1926년, 아인슈타인과 그의 전 제자인 실라르드 레오는 아인슈타인 냉장고를 공동 발명(1930년 특허)했다. 이 흡수식 냉장고는 움직이는 부분이 없고 열만 입력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1930년 11월 11일, 미국 특허 1,781,541은 냉장고에 대해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 레오에게 부여되었다. 그들의 발명품은 즉시 상업적 생산에 투입되지 않았으며, 가장 유망한 특허는 스웨덴 회사인 일렉트로룩스(Electrolux)에 의해 취득되었다. 비과학적 유산. 여행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아내 엘사와 입양한 딸 마르고트Margot과 일제Ilse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 기증된 서류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고트 아인슈타인은 개인 편지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그녀가 사망한 후 20년(그녀는 1986년에 사망)이 될 때까지는 공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히브리 대학의 알버트 아인슈타인 기록보관소의 바바라 울프Barbara Wolff는 영국방송공사(BBC)에 1912년에서 1955년 사이에 작성된 개인 서신이 약 3,500페이지가 있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퍼블리시티권은 2015년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에서 소송이 제기됐다. 법원은 처음에 권리가 만료되었다고 판결했지만, 그 판결은 즉시 항소되었고 나중에 결정이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해당 소송에서 당사자 간의 근본적인 청구는 궁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이 권리는 집행 가능하며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가 그 권리의 배타적 대표자이다. 로저 리치먼 에이전시(Roger Richman Agency)의 뒤를 이은 코비스(Corbis)는 대학의 대리인으로서 그의 이름과 관련 이미지의 사용을 허가한다. 대중문화에서. 아인슈타인은 1919년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의 확인을 시작으로 가장 유명한 중 하나가 되었다. 일반 대중은 그의 연구에 대한 이해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인정받고 칭송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기간에 《더 뉴요커The New Yorker》는 "도시 이야기(Talk of the Town)" 특집에서 아인슈타인이 미국에서 너무 유명해서 거리에서 아인슈타인이 "그 이론"을 설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단될 것이라고 말하는 삽화를 출판했다. 그는 마침내 끊임없는 문의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 냈다. 그는 질문자들에게 "죄송해요, 미안! 항상 나는 아인슈타인 교수로 착각된다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많은 소설, 영화, 연극 및 음악 작품의 주제이거나 영감을 받아 왔다. 그는 정신이 없는 교수를 묘사할 때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다. 그의 표현력이 풍부한 얼굴과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널리 모방되고 과장되었다. 《타임Time》의 프레데릭 골든Frederic Golden은 아인슈타인이 "만화 작가의 꿈이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썼다. 많은 인기 있는 인용들이 종종 그에게 잘못 귀속된다. 수상과 서훈.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상과 서훈을 받았으며 1922년에는 "이론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21년의 지명자 중 누구도 알프레드 노벨이 설정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1921년도 상은 이월되어 1922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수여되었다. 출판물. 과학적. —————— (1995) [1954]. "Ideas and Opinions". New York: Three River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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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programming language)는 컴퓨터 시스템을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형식언어이다. 고급 언어일수록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 곧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가리키는 때가 많고, 이때에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하지 않고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델파이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오브젝트 파스칼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일 뿐이지만, 델파이를 별개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보는 때가 더 많다. 역사. 최초의 컴퓨터는 종종 프로그래밍 언어의 도움 없이 프로그래밍되었는데, 이는 프로그램들을 절대적인 기계어로 작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0진이나 이진 형태의 프로그램들은 천공 카드나 자기 테이프로부터 읽거나 컴퓨터 프론트 패널의 스위치를 켜고 끔으로써 불러들였다. 절대적인 기계어는 나중에 1세대 프로그래밍 언어(1GL)로 명칭이 정해졌다. 다음 단계로 이른바 2세대 프로그래밍 언어(2GL), 곧 어셈블리어가 개발되었으며 여전히 특정 컴퓨터의 명령어 집합 구조와 밀접하게 관계되었다. 프로그램을 훨씬 더 인간이 읽기 쉽게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주소 계산 시 따분하고 오류가 발생할 경향이 있는 프로그래머를 안심시켜 주었다.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즉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3GL)는 1950년대에 작성되었다. 컴퓨터용으로 설계될 초기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는 Plankalkül였으며, 콘라트 추제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Z3용으로 개발될 것이었다. 그러나 1998년, 2000년까지 구현되지 않았다. 4세대 프로그래밍 언어(4GL)는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보다 내부 컴퓨터 하드웨어의 상세한 부분을 더 고급적으로 추상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5세대 프로그래밍 언어(5GL)는 프로그래머가 작성한 알고리즘을 이용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주어지는 제약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언어이다. A언어부터 C언어까지. C언어의 C는 약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역사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통상 A언어부터 B언어, C언어 순으로 발전해 왔다고 일컬어진다. 구조. 컴퓨터 프로그램은 데이터(data)와 명령어(instruction),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데이터는 일련의 바이트 형식으로 저장된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이런 바이트들을 유용한 형태로 정리한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데이터를 다음과 같이 선언(declaration)할 수 있다. int MyData; // 정수형 데이터 이와 같이 선언하면, 컴퓨터 메모리의 한 영역을 'MyData'라는 이름의 정수(integer) 타입으로 저장한다. 메모리의 어느 영역에 데이터를 저장할 것인가는 컴파일러가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는 컴파일러의 내부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몰라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MyData'는 간단한 변수(variable)이고, 한 개의 정수만 변수에 담을 수 있다. 여러 개의 변수를 만들고 싶으면 아주 간단하게 배열(array)을 만들 수 있다. int MyArray[100]; // 100개의 정수형 변수 선언 소프트웨어 공학의 발달로 보다 복잡한 자료형들이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사각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형을 정의한다고 하자. 한 사각형을 정의하려면 너비, 높이, 색과 같은 여러 정보가 동시에 필요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변수나 배열의 선언만으로는 이런 정보들을 잘 정의하기가 어렵다. C 언어와 같은 고급 언어(high-level language)는 보다 정교한 자료형의 선언을 지원하여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의 데이터 선언들을 한데 엮은 새로운 자료형을 만들 수 있다. struct rectangle { int width; // 사각형의 너비를 픽셀 단위로 저장 int height; // 사각형의 높이를 픽셀 단위로 저장 color_type color; // 사각형의 색 정보를 저장 이러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에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 컴퓨터는 현재 실행하고 있는 지시의 내용과 다음에 실행할 지시의 위치만 알고 있다. 컴퓨터 언어는 컴퓨터의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하는 초기의 어셈블리와 같은 언어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는 C 언어와 같은 고급 언어(high-level language)로 발전되어 왔다. 프로그램 언어가 상위 레벨로 발전될수록 프로그램은 좀 더 인간의 언어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에 따라 프로그램 언어의 학습과 프로그램의 구현이 보다 수월해진다. 프로그래머는 상위 레벨의 지시문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하면 컴파일러가 이 지시문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기계어로 번역한다. 지시문들을 한데 묶어 놓은 것들을 함수(function)이라 한다. 함수는 특정한 동작을 일반적인 형태로 정의해 놓은 지시문의 집합이다. 똑같은 동작이 필요하면 지시문을 다시 작성할 필요없이 함수의 매개변수를 이용하여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 언어는 검색, 정렬, 입출력에 관련된 다양하고 풍부한 표준 함수(standard functions)들을 제공한다. 이런 표준 함수가 제공되는 덕분에 사용자는 해당 함수를 만드는 데 드는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 연결된 함수들을 한데 묶어 놓은 것은 모듈(module)이라 하고, 모듈들의 상호 연결로 하나의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듈들을 재사용할 수 있게 모아둔 것을 라이브러리라 한다. 예. 한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언어(OOP)인 자바스크립트에서 사용되는 기초적인 문법의 개념으로는 속성과 메쏘드를 갖는 객체(오브젝트) 개념이 있으며, 변수 선언, 함수 정의, 연산자 그리고 제어문 등을 주요하게 들수 있다.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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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유럽(, , , )은 대륙 중 하나로, 우랄산맥과 캅카스산맥, 우랄강, 카스피해, 흑해와 에게해의 물길을 분수령으로 하여 아시아와 구분한 지역을 일컫는다. 북쪽으로는 북극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동남쪽으로는 흑해와 그와 비롯한 물길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과거의 고전 고대 시대의 개념으로서 이해하기에는 모호하므로, 자연지리학으로서의 유럽은 문화와 정치적 요소를 포함하여 정의한다. 유럽은 10,180,000 km2 또는 지구 표면의 2%, 육지의 약6.8% 지역으로 표현된다. 유럽은 약 50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과 인구로서 러시아가 가장 크고, 바티칸 시국이 가장 작다. 인구는 많은 편이며, 아시아의 각 지역들과 아프리카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다. 세계 인구의 약 11% 인 7억 3천 9백만 명이다. 유럽은 서구 문화의 기원이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 비롯하고 있다. 15세기 이후부터 세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펼쳤으며, 식민주의를 시작하였다. 16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아메리카, 대부분의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였다. 대영 제국은 산업혁명을 시작하여 경제, 문화, 사회의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어원. ‘유럽’이란 이름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에우로페()에서 왔다. 에우로페는 페니키아의 공주로, 제우스가 하얀 황소로 둔갑하여 크레타섬으로 유괴해 미노스, 라다만튀스, 사르페돈을 낳았다. 호메로스가 쓴 문헌에서 에우로페는 크레테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왕으로 나오지, 지명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후대에 '에우로페'는 그리스 중북부를 일컫게 되며, 기원전 500년경에 그 의미는 북쪽 땅으로 확대된다. 에우로페()의 어원설 중 하나에 따르면 이 이름은 그리스어로 넓다를 뜻하는 eur-와 눈을 뜻하는 op- 또는 opt-가 결합하여 넓게 보는, 시각의 넓음을 뜻하는 Eurṓpē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넓다는 말은 재구성된 원형 인도-유럽 종교에서 지구를 이르는 별칭적인 형용사이다. 다른 설에서는 이 말이 사실 아카드어 낱말 erubu(내려가다, 해 지다)나 그 동계어인 페니키아어 낱말 ereb(저녁, 서쪽), 아랍 마그레브, 히브리어 낱말 ma'ariv 등 셈어 낱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음운론적으로 에우로페라는 이름과 다른 셈어 형태의 낱말 사이에 연관성이 적다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의 세계 주요 언어에서도 이 지역을 일컬을 때 에우로페에서 파생된 말을 쓰고 있다. 가령 중국어에서는 음차어 歐羅巴()의 축약어인 歐를 써서 歐洲라 부른다. 한편 일부 튀르크어족에서는 Avrupa 또는 Evropa라는 공식 명칭이 있으나 일상적으로는 Frengistan(프랑크인의 땅)이라 부른다. 역사. 선사 시대. 유럽에서 최초로 거주한 사람과는 기원전 180만년에 조지아에 거주했던 호모 에렉투스이다. 기원전 15만년에 등장하여 기원전 2만 8천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 또한 유럽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과로 여겨진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가축을 기르고 농작물을 재배했으며 도구를 만들 정도로 진화했다. 특히 기원전 7,000년경부터는 발칸반도, 지중해 연안, 도나우강 유역, 라인강 유역에 사람이 거주했고 기원전 4,5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 사이에 신석기 문명이 서유럽과 북유럽 등으로 확산되었다. 기원전 3,200년경부터 유럽에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그리스 크레타에서 일어난 미노아 문명은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여겨진다. 미노아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고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철기 시대를 맞게 된다. 고대.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철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역사 분야에서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서사시 분야에서는 호메로스, 희곡 분야에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의학 분야에서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과학 분야에서는 피타고라스,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가 유럽의 문화에 기여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라고 부르는 도시 국가가 설립되었는데 아테네는 세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국가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고대 로마는 법률, 정치, 언어, 기술, 건축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룩했다. 기원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로마 제국은 기원후 180년까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는 유럽의 평화, 번영, 정치적 안정을 맞았다.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330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꿈)으로 옮겼다. 392년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해졌고 395년에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만다. 중세 전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고트인, 반달족, 훈족, 프랑크인, 앵글인, 색슨인, 슬라브족, 아바르족, 불가르인, 바이킹, 페체네그인, 쿠만인, 헝가리인과 같은 수많은 민족들의 전쟁과 이주가 진행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 재통일된 로마 제국임을 표명했다. 특히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유럽의 법률에 큰 영향을 끼친 로마법 대전을 제정했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수복하기도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하기아 소피아를 건립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옛 서로마 제국의 영역을 지배했는데 프랑크인의 왕이었던 클로도베쿠스 1세는 프랑크인을 하나로 통일했다.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국왕은 서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800년에는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843년에 체결된 베르됭 조약, 879년에 체결된 메르센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3개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96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했다. 동유럽, 중앙유럽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들, 슬라브족 국가들이 등장했는데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키예프 공국, 불가리아 제1제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세 중기와 후기. 1054년에 일어난 동서 교회의 분열을 계기로 기독교는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정교회, 옛 서로마 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로 분열되었다. 1066년에는 노르만인이 프랑스를 정복했다. 1095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교 세력이 장악한 예루살렘, 거룩한 땅을 탈환하기 위한 차원에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침공하면서 크게 파괴되었다. 14세기에는 극심한 대기근, 흑사병의 확산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서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차원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1378년부터 1417년까지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 사이에서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근대.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 분야에서는 고전 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가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예술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다. 종교 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전개하면서 교회의 힘이 약화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15세기에는 포르투갈, 스페인이 신대륙을 탐험하면서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1492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동양으로 가는 해양 항로를 발견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또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에 나서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과학 분야에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18세기와 19세기.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는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을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귀족정, 성직자들의 권력 독점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민들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주의의 종식과 자유주의의 등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세력을 확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전파했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몰락하고 만다. 1815년에는 유럽의 5대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빈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유럽 내에서의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한편 유럽의 정치 질서를 반동주의, 보수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성격을 가졌다. 유럽 내에서 반동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반감은 1848년 혁명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유럽 내에서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도시의 빠른 성장, 생산량 증가, 인구 증가, 일자리 증가, 경제·사회 분야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20세기와 현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삼국 협상(프랑스, 러시아, 영국) 진영과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진영 사이에 일어난 치열한 전쟁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차르 체제가 종식되었고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중대한 제재 조치를 부과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 독립한 국가들이 형성되면서 유럽 국가 간의 경계선도 새로 확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럽에서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919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22년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에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989년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유럽의 지역 구분. 유럽의 일반적 정의는 지리 또는 정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유럽. 때때로 와 가 포함되기도 한다. 지리. 유럽은 유라시아 서쪽의 1/5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유라시아 전체 면적의 19.2%에 달한다. 유럽은 다른 대륙에 비해 대륙과 접하고 있는 해안선의 비율이 더 높은 편이다. 유럽의 해상 경계선은 북쪽으로는 북극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의 지형은 비교적 작은 지역 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남쪽 지역은 산악 지대가 많은 반면 북쪽 지역은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카르파티아산맥을 거쳐 언덕이 많은 고지대를 지나 넓고 낮은 북쪽 평원으로 내려간다. 동쪽에 위치한 넓은 저지대는 유럽 대평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는 북독일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고지대는 영국과 아일랜드섬의 서부 지역에서 노르웨이의 피오르 지대까지 뻗어 있다. 이베리아반도와 이탈리아반도와 같은 하위 지역은 중앙유럽 본토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복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고원, 강, 계곡과 같은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다수의 분지는 일반적인 경향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지만 아이슬란드, 영국, 아일랜드와 같은 지역은 특별한 경우이다. 전자는 그 자체로 유럽의 일부로 간주되는 북쪽 바다에 있는 육지이고 후자는 해수면이 상승하여 그들을 고립시킬 때까지 한때 본토와 결합되었던 고지대 지역이다. 기후. 유럽은 주로 온대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인해 같은 위도에 위치한 전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온화하다. 멕시코 만류는 유럽의 중앙 난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유럽의 기후를 다른 곳보다 더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멕시코 만류는 유럽 해안에 따뜻한 물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대서양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부는 편서풍을 따뜻하게 한다. 유럽의 기후는 크게 건조 기후, 온대 기후, 냉대 기후, 한대 기후로 나뉜다. 북서유럽은 서안 해양성 기후(비가 많이 온다. 영화 킹스맨에서 등장인물들이 우산을 쓰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쉽다), 중앙유럽, 동유럽은 대륙성 기후, 남유럽은 지중해성 기후를 띠고 있다. 그 외에 이베리아반도 내륙 일부 지방은 스텝 기후, 스칸디나비아반도는 타이가 기후,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 해안은 툰드라 기후, 알프스 산맥 지대는 고산 기후를 띤다. 식생.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까지는 지중해에서 북극해에 이를 정도로 유럽의 약 80~90%가 삼림으로 뒤덮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곳곳에서 삼림 벌채와 목초지의 확장이 진행되었고 인류가 거주하면서 유럽의 식생 또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유럽의 식생은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기후대마다 서로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서안 해양성 기후 지대에는 느릅나무, 너도밤나무, 갈참나무, 박달나무와 같은 낙엽 활엽수가 많은 편이며 지중해성 기후 지대에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코르크나무와 같은 상록 활엽수가 많은 편이다. 유럽 내륙 지대에는 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합림이 분포하고 있고 타이가, 툰드라 지대에는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 가문비나무와 같은 상록 침엽수가 분포하고 있다. 정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유럽은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여러 분야에서 동서 진영으로 갈라졌다. 1947년에는 미국이 마셜 플랜에 따른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시행했고 1949년에는 소련이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함께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를 결성했다. 1949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소련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결성했고 1955년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는 1948년에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이후부터 비동맹 운동의 맹주 역할을 했다. 1952년에는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이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를 결성했고 1958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를 결성했다. 이들 기구는 1967년을 기해 단일 기구로 통합되었고 1993년에 출범한 유럽 연합(EU)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9년 혁명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1991년 냉전 종식을 계기로 경제 경제상호원조회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해체되었다. 유럽 연합은 유럽 27개국이 가입한 국가 연합으로서 정치·경제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외에 유럽 연합에 가입한 19개국은 유로존에 소속되어 있으며 유럽 26개국은 국경 통행이 자유로운 솅겐 지역에 소속되어 있다. 그 외에 유럽에는 유럽 평의회, 독립 국가 연합, 유럽 안보 협력 기구, 발트 의회, 북유럽 이사회, 비셰그라드 그룹과 같은 기구가 존재한다. 언어. 유럽에서는 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군, 스칸디나비아 남부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 파생된 게르만어군, 슬라브족이 사용하던 언어에서 파생된 슬라브어파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슬라브어파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원어민이 분포하는 어파로서 중앙유럽, 동유럽, 동남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로망스어군은 남유럽, 서유럽, 동유럽에 위치한 루마니아, 몰도바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게르만어군은 브리튼 제도(영국, 아일랜드), 북유럽에서 널리 사용된다. 그 외에 발트어파(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켈트어파(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웨일스어, 콘월어, 맨어, 브르타뉴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알바니아어가 존재한다. 튀르크어족(튀르키예어, 아제르바이잔어, 타타르어, 크림 타타르어, 바시키르어, 추바시어 등)은 동유럽, 동남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랄어족(핀란드어, 헝가리어, 에스토니아어, 우드무르트어, 마리어, 에르자어, 코미어 등)은 핀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카르트벨리어족(조지아어 등)은 조지아에서 널리 사용된다. 몰타어는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이고 바스크어는 유럽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에서 드물게 고립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문화. 유럽의 문화는 세계의 음악, 미술, 건축, 문학, 영화, 과학, 철학, 종교, 패션, 요리, 스포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문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종교. 유럽에서 종교는 역사적으로 예술, 문화, 철학, 법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기독교인데, 유럽에 거주하는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76.2%에 달한다. 유럽의 기독교는 종파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으로 나뉜다. 기독교는 4세기 후반에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서양 문화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이슬람교로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신자의 비율은 6%에 달한다.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신자는 터키,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아제르바이잔, 러시아와 같이 발칸반도, 동유럽에 분포하고 있다. 유럽에 분포하고 있는 소수 종교로는 유대교, 불교, 힌두교, 현대 이교 등이 있다. 유럽은 세속주의 영향이 비교적 강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불가지론, 무신론을 표방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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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도시)
과테말라(, )는 과테말라의 수도로 과테말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완전한 이름은 누에바과테말라데라아순시온()이며 줄여서 갸떼(Guate)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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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宗敎)는 초월적, 선험적 또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나 문화적 체계(cultural system)를 말한다. 종교인들은 주로 초월적인 대상,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 사람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종교는 인간과 비롯한 존재의 우주적 질서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 인본주의를 비롯한 근현대 철학에서 많은 학자가 종교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비판하였으나 심리학적으로는 종교가 삶의 불확실성을 줄여주고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효과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종교의 어원. 종교(宗敎)는 본래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불교용어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능가경에서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Siddhanta Desana를 종교로 한역한 용어였다. 한편, '신과 인간을 잇는다.'를 의미하는 religion을 종교로 해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상신(示)을 모시고 제사하는 종갓집(宀)에 사용되는 '으뜸 종(宗)'에 '가르칠 교(敎)'를 사용한다. 즉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동양적 어원. 종(宗)은 죽은 내 조상(祖上)과 현재 살아있는 내 성씨(姓氏) 가족(家族) 전체를 의미하는 글자로, 면(宀)집, 시(示)보일, 부모가 살아있을 때 자녀들 문제를 해결해줬고, 가족 문제를 죽은 부모가 도와주길 바라는 것이 제사로, 말뚝에 제물을 걸어 놓으면 죽은 부모 신(神)귀신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적장자(嫡長子)인 종손(宗孫)이 사는 조상 제사를 지내는 집을 의미한다. 교(敎)는 효(爻)점괘, 자(子)아들, 복(攵)칠, 점친 결과를 아들에게 때려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정확한 의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100% 일치하는 혈족(血族)인 대종(大宗) 성(姓)의 적장자(嫡長子)를 중심으로, 아버지는 일치하고 어머니 혈통은 다르지만 한지붕 아래서 시(豕)돼지 키우면서 함께 사는 가족(家族)인 수많은 후처(後妻) 소종(小宗) 씨(氏) 적장자(嫡長子) 소종가(小宗家)들이 연합한 것이 국가(國家)로, 가족(家族) 문제를 구성원이 함께 논의 해법 찾는 과정에서, 의견이 상충되고 양쪽 말이 모두 일리가 있어 한쪽 손을 들어 주기 어려울때, 군대 권력을 가진 왕이자 조상 제사를 모시는 사제인 적장자(嫡長子)가 점친 공정한 결과를 결정하면 가족들이 복종하는 것이 자기 부모를 믿는 신앙(神仰)이다. 종(宗)은 가족 혈통 계보의 중심인 종손(宗孫), 보통 종손인 적장자(嫡長子)가 살고 가족 전체가 제사를 지내는 종가(宗家), 적장자(嫡長子)의 적처(嫡妻)를 의미하는 종부(宗婦), 성(姓) 혈족의 원뿌리를 의미하는 대종(大宗), 가족 성(姓)에서 씨(氏)로 독립한 소종(小宗) 글자들 쓰임새에서, 죽은 부모를 중심으로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처 큰아들 계보를 의미하는 적(嫡)정실은, 여(女)계집, 적(啇)밑둥 합성어로, 적(啇)은 제(帝)임금, 'ㅂ' 제사 그릇이 합쳐진 글자로, 적장자(嫡長子)의 성씨(姓氏) 조상 제사를 모시는 여자를 의미한다. 종교(宗敎)는 가족 공동체인 국가의 중심인 왕의 공정한 가르침이고, 신앙(神仰)은 가족(家族) 성씨(姓氏) 조상 죽은 부모를 믿고 적장자인 왕의 공정한 결정을 따르는 것이다. 종(宗)은 성씨 글자가 사용된 상(商)나라 왕실 자성(子姓)이 수천년전 상나라 때부터 쓰였고, 많은 대종 성씨들이 5천년 이상 됐기 때문에, 불교 도래보다 훨씬 이전부터 쓰인 개념으로 혈연 가족에 대한 믿음이다. 서양적 어원. 종교(religion)라는 라틴어 어원 렐리기오(religio)는 2개의 어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치체로(고전 라틴어로는 키케로, 교회라틴어로는 치체로 Cicero,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Deorum Natura), 2, 28, 72)와 연결하여 라틴어 리레게(relego, 숭배하다)에서 왔다고 한다. Re(다시)가 레고(lego, 읽다, read)와 합하여 ‘다시 읽다’, ‘반복 음미하다’, ‘주의깊이 관찰하다’(go over again, consider carefully)의 의미로 신에게 예배하는 것과 관계된 것들을 지속적으로 살피는 것이다. 즉 신을 혹은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Divinae Institutiones, 4, 28)와 연결하여 re(다시)가 리가레(ligare, to bind, 묶다)와 합해 ‘다시 묶다’가 되었다는 견해이다.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 견해를 따랐다. 즉 하나님께로 다시 결합하여(to reconnect) 하나님께 대한 경외(reverence for God, the fear of God)가 되었다. 정의. 종교와 관련하여 그 종교에 귀의하여 우러나오는 경건한 마음은 종교심(宗敎心)이나 신심(信心), 신앙(信仰), 불심(佛心)이라 하며, 종교적 신앙에 따르는 마음가짐은 종교의식(宗敎意識)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전례 또는 예전이라고 부르는 종교 의례(宗敎儀禮)는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을 예배하기 위한 여러 예식(Ceremonial: 의식에서의 성직자와 청중의 상징적인 행동과 시각적, 청각적인 상징)과 순서(Order: 고정된 순서), 의식(Ritual: 말이나 노래같은 음성을 표현되는 문서화된 의식과 기도문)을 가리키며 종교 의식(宗敎儀式)이라고도 한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경건은 종교를 낳는다고 한다,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순수하며 참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이라고 한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성경에 규정된 예배를 수반한다. (기독교강요, 1:2:2) 종교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 종교는 고대로부터 신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와서 종교는 신과의 관점보다는 인간의 내재적 요소 속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 학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지, 정, 의, 도덕, 이성 등 각각 하나를 강조하며 설명한다.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 일반적으로 종교는 아래와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단과 같은 분파적 집단들은 다음의 요소들을 결여하고 왜곡시키고 있다. 세계의 종교. 인류의 종교적 발전은 평행하게 시대를 따라 흘러왔다. 아직도 고등문화 속에 남아 있는 자연민족의 신앙은 그 후에 일어난 보다 높은 종교의 막연한 근저가 되었다. 마적 외포(魔的畏怖), 무격적(巫覡的)인 신빙(神憑), 마적 열광과 황홀한 춤과 원시적 신비, 그리고 주술적이고 신성한 행사 등의 감정을 비롯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정령신앙(精靈信仰)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儀禮), 영혼숭배와 토테미즘(totemism), 요술사와 주술사, 복술·점술, 청정(淸淨)과 부정(不淨), 유치한 행위나 신성한 행위, 원시적 금욕, 공희(供犧)의 신비, 주물숭배(呪物崇拜) 등의 표상, 그리고 자연주술과 모든 자연의 주적 영화(呪的靈化) 등의 표상은 종교 이전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서서히 나타난 것에는 숭고한 신성, 신들의 숭배, 제사제도, 의례와 신전과 제사, 신성한 집단과 풍습 등의 표상이 있고, 또, 이런 표상에 속한 것으로서 신화, 우주에 관한 계도적(系圖的)인 의례의 우화(寓話), 신화적인 원시적 사변(思辨) 등이 보여주는 넓은 상상의 활동세계가 전개된다. 이런 모든 요소는 서로 매우 다르나 전혀 개별적으로 연락 없이 집합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관련하고 집결하여 하나의 그물을 이룩하고 있기도 하여, 어떤 기후나 토지에도 놀랄 만큼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유사성이 참으로 그 근본에는 통일적이고 합일적인 인간심리 일반의 기능이 있음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자연적 신앙의 뒤를 이어 선종교(先宗敎)라고 부를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으로의 전이과정이 있다. 이 전이는 서양 및 그것을 규정하는 그리스 문화에 나타났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에 이르는 중요한 기간에 신학이 신화학(神話學)으로부터, 그리고 로고스(logos)가 신화(mythos)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신들에 관한 지식을 뜻했던 신학은 점차로 신에 관한 지식이 되는 동시에 형이상학의 최고점이 되기도 했다. 신앙은 신을 마적 외포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물리학과 신비사상의 요소를 결합시킨 우주론이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크세노파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물리학은 모두 우주론적인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점점 신화적인 요소를 극복 내지 배제하고 나아가서는 신들의 세계를 신적인 것의 이념(Theion)에 종합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와 신성(神性)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신들은 그리스 비극작가(悲劇作家)들에게는 세계와 습관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힘이었으며, 본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생각에서만 의의를 갖고 있던 신이란 표현은 절대적 신성이란 이념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대적인 평행은 극동의 문화인 속에 있다. 피타고라스가 교단(敎團)을 창시한 것이 기원전 약 530년이었는데, 중국의 공자는 약 470년에 죽었고 공자와 동시대의 선배에 노자(老子)가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 시대는 이들보다 이전에 3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동양의 발전이 서양의 그것과 다른 독자성과 개별성을 보여주나 그 차이는 동일한 종속(種屬) 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얕은 신화적 단계의 극복이나 종교의 확연한 도덕화나 절대자에로의 정진(精進)이 있었다. 공자가 합리주의로 흐른 데 비해서 노자는 '도덕'으로 기울어졌다. 서양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유신론이 공자의 이론에 필적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노자의 도(道) 사상과 맞먹는다. 노자나 공자는 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플라톤에서 인정되는 내적 신비의 빛을 말했다. 이스라엘도 이 세기에 여호와의 자연신화를 깨고 유일신을 찾았다. 엘리야(Elijah)로부터 제이 이사야(Isaiah)와 에스겔(Ezekiel)에 이르는 동안 종족적 종교로부터 개인적인 주관적 종교에로의 전이(轉移)가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종교개혁 준비와 그 성과는 기원전 약 800년부터 큐로스왕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악마신앙과 다신교의 안개를 걷고 예언자적 신신앙(神信仰)과 도덕적 상반의 별견(瞥見)과 역사의 조만간의 종말에 관한 순수한 종교가 출현했다. 이 시대에 평행해서 고대인도는 혼돈된 공희(供犧)에서 바루나(Varuna) 신앙을 성립시켰다. 더욱이 우파니샤드 경전의 내용은 그리스 신학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불타(佛陀) 시대에 일어난, 일체의 잡다(雜多)는 감각의 가상(假象)이며 무지(無知)에 지나지 않지만, 진지(眞智)는 운동·변화·성질(性質) 없이 시공(時空) 이외에 '제2자가 없는 유일자(唯一者)' 위에 나타난다는 사변(思辨)은 크세노파네스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 직관에 의한 신비적 몰아(神秘的沒我)의 특유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세계에서 그 사변(思辨)과 함께 실천적 종교생활이 발전하였다. 높은 관념의 발전보다 높은 종교에 한걸음 다가섰다. 구제(救濟)·해방(解放)·해탈(解脫)의 깊은 종교적 삼매(三昧)와 금욕적 실천과 생활태도에서의 세간(世間)과 자연적 존재양식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사이비 종교. 사이비 종교란 일반적인 종교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전통적인 기존의 종교적 내용을 교주나 특정한 교리를 과장하여 주관적으로 변형시킨 형태이다. 기존 종교와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이유는 가정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고 그 단체에 속한 신자들에게 해를 많이 끼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의 피해로 생명을 잃기도 하고 많은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법의 의한 엄격한 처벌이 요구된다. 이는 종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이끄는 곳은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사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아주 다른 것으로 공자의 말에서 유래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이단이 있다. 이단(異端)은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道)를 말한다. 종교와 윤리. 종교에 명시된 종교적 교훈들은 윤리적 교훈과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종교적 교훈은 반드시 윤리적 교훈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적 교훈이 오히려 폭력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하기도하나, 좀 더 사실적으로는 종교적 교훈을 곧 윤리적 교훈으로 치환함과 동시에 폭력적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 니체는 인간이 만든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신은 종교에서 믿는 신이나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칸트는 3대 비판서에서 신이란 도덕률 혹은 도덕원리일뿐이라고 일축한다. 니체는 원래 존재하던 절대 법칙들, 규범들을 비판하며 부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며, 전통적인 규범들은 생의 활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의 겸손, 순종, 섬김, 봉사와 같은 가치들은 단지 노예 도덕인 것이다. 종교의 폭력성 혹은 베타성이 특히 기독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기독교 신자는 대체로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의 문화인류학자 프레이저는 기독교가 어떤 신화적 발전 단계를 거치며 성장해왔는지 설명한다. 그의 《황금가지》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 주제인 '살해되는 신'은 전세계 어디에나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주제라고 주장한다. 그뿐아니라 기독교가 가진 성찬, 세례, 예배 개념 등도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종교라도 전체에 주체가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무신론의 입장에서, 종교는 단지 발전된 신화일 뿐이며,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길로 보인다. 그래서 현대의 무신론 혹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는, 인간 자신이 그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힘든 순간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다시 그 주체성을 회복하는 정도에서만 종교의 역할은 머물러야 한다고 보며, 더 나아가 종교적 교훈은 없으며, 그것은 인간 주체가 판단할 일이라는 것이다. 종교 통계. 경제력. 2008년 Pew Research Center에 의하면 부유한 국가에 거주할수록 사람들이 삶에서 종교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학력. 2016년 퓨리서치센터가 아시아(35개국), 유럽(36개국), 남아메리카(30개국), 중동 및 북아프리카(12개국), 북아메리카(2개국), 아프리카(36개국) 등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국제표준교육분류법 자료와 퓨리서치센터의 종교별 인구 통계 자료 등을 종합해 발표한 '세계 종교와 교육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종교 신자 중 6억8000만 명(19%)이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비신자가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학교에 다닌 기간은 평균 8년6개월이지만 신자가 정규 교육을 받은 기간은 7년6개월이었다. 종교별로 정규 교육기간은 유대교가 13년 4개월로 가장 높고 기독교 9년3개월, 불교 7년11개월,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각각 5년7개월이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이스라엘, 서유럽 지역의 신자들은 정규 교육을 받은 기간이 긴 반면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등의 신자들 교육 수준은 낮았다. 미국 내 신자 중 대학 졸업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힌두교로 77%로 가장 높았고 다음이 유니테리안(67%), 유대교(59%), 미국성공회(56%), 미국장로교 및 불교(각각 47%), 연합감리교회(46%), 무슬림(39%), 장로교(PCA·33%),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33%),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28%), 오순절교단(13%) 등이었다. 심리.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정신과 미나 와이스먼 교수 연구팀은 "종교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뇌피질이 더 두껍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종교가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결과라고 주장했다.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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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1863
워싱턴 D.C.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다. 정식 명칭은 컬럼비아구()이다.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미국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행정 구역이다. 좁지만, 국제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있는 세계 도시이며, 금융 센터로서도 중요성이 높다. 수도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된 계획도시다. 워싱턴 D.C.는 포토맥 강의 동쪽 유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포토맥 강을 경계로 버지니아와 접하고 그 이외 방향으로는 메릴랜드에 둘러싸여 있다. 1790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프랑스의 피에르 샤를 랑팡을 초청하여 새 수도의 설계를 의뢰하였다. 현재 잘 정비한 시원한 거리는 피에르 랑팡의 설계를 골격으로 하여 이어받은 것이다. 인구는 약 70만 명인데, 주변 교외 지역에서 드나드는 통근자를 고려하면 주중 인구는 백만이 넘는다. 컬럼비아 구역을 포괄하는 워싱턴 대도시권의 인구는 약 620만 명으로, 미국의 대도시권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이다. 미합중국 헌법 제1조에서 주와 다른 연방 구역을 규정하여 이곳을 영속적인 국가 수도로 삼고 있다. 수많은 국가 기념물과 박물관과 더불어 미국 연방 정부의 3부의 중심 관청이 모두 이 곳에 있다. 워싱턴 D.C에는 174개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은행, 국제 통화 기금, 미주 기구, 아메리카간 개발 은행, 범아메리카 의료 기구의 본부가 있다. 무역 협회, 로비 단체, 직능 단체 등 여러 기관의 본부도 이곳에 있다. 워싱턴 D.C는 원래 컬럼비아 영역의 개별 지자체였으나, 1871년 의회법으로 도시와 이 영토를 컬럼비아 구역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합병하였다. 워싱턴 D.C의 법적 명칭이 '컬럼비아 구역'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워싱턴이라는 명칭은 미국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워싱턴 기념탑(555피트, 약 169.3m)의 높이 이상으로 건축물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어, 뉴욕과는 달리 초고층 건물이 드물다. 백악관, 펜타곤, 연방 의사당 등 미국의 주요 정부 기관들이 소재해 있다. 역사. 17세기 초 유럽인들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알곤 퀴안 어를 쓰는 피스캐터웨이 (코노이라고도 함) 부족들이 포토맥 강 주변에 살고 있었다. 1600년대 후반에 백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와서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749년에 백인 정착민들은 이 지역에 첫 번째 도시이며 버지니아 식민지가 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이 당시 미국은 수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뉴욕, 필라델피아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가 수도의 역할을 했었다. 1783년 의회는 영구적인 미국의 수도를 설치할 것을 의결했다. 주마다 자기 주에 수도를 두고 싶어 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790년 재정 장관인 알랙산더의 노력으로 이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미국의 수도는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땅에 설치하기로 제안하여 모든 주의 동의를 얻어냈다. 1790년 7월 9일, 의회는 포토맥강가에 미국의 수도 설립을 승인하는 거주법을 통과시켰다. 정확한 위치는 7월 16일 법안을 서명한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워싱턴은 1791년 포토맥강 가의 땅을 수도구역으로 정했는데 지금의 워싱턴 DC 구역을 포함하여 포토맥강 서쪽의 30평방마일의 땅도 포함했었다. 메릴랜드 주와 강서쪽의 버지니아 주에서 해당 되는 땅을 연방정부에 기증하여 사각형 모양으로 된 각면이 16km (10마일)되며 면적은 259km (100평방마일)에 해당되는 수도 구역이 정해지게 되었다. 연방정부가 임시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DC로 옮긴것은 1800년이다. 이때 도시 인구는 고작 8,000명에 불과했다. 1814년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워싱턴 DC는 영국군에 의해 점령 당했고 의사당과 백악관을 포함한 많은 정부청사가 불타버렸다. 1819년 소실되었던 정부청사는 모두 복구되었다. 의회는 워싱턴 DC의 도시 관리를 대통령의 권한 밑에 두었으나 1802년 시민이 시정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고 1820년에는 시장을 선거로 뽑게 됐다. 그러나 의회 의원이나 대통령 선거권은 시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도시의 발전. 1840년 당시의 도시인구는 약 5만 명으로 도시로서의 성장은 저조했으나 남북전쟁(1861-1865) 때에 인구가 6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전쟁 중에는 북군의 부대가 대거 주둔하여 남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많은 사람이 북군을 돕고 수도를 지키는 일을 도우려고 워싱턴 DC로 이주해왔고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서 인구가 급증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의 35만 명의 인구가 전쟁이 끝나는 1918년에는 45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의회는 워싱턴DC의 도시개발을 위해 도시 정부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871년 도시를 관리할 지사를 대통령이 임명했으나 1874년에 의회는 도시 운영을 대통령이 임명한 행정관 세 사람에게 맡기도록 법을 개정했다. 워싱턴 DC는 미국에서 유일하게도 도시를 운영할 대표를 시민이 투표로 뽑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은 또다시 워싱턴 DC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후 1930년 경제공황은 직업을 잃은 실업자로 전국의 도시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워싱턴 DC만은 예외였다. 연방정부는 이때 전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기 때문에 1930년에서 1940년 사이에 인구가 48만5천 명에서 66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1950년에 와서 도시 인구는 80만 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 후로는 도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도시 주변 인구가 급증해서 광역 인구는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1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워싱턴 DC 인구는 흑인의 인구가 늘어났고 주변 도시는 백인 인구가 급증했다. 워싱턴 시민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가 의회에 반영되어 1964년 헌법개정이 통과되어 처음으로 워싱턴 시민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1973년 시정부 위원선거를 할 수 있도록 의회는 법 개정을 했다. 100년 만에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도시 경관. 워싱턴 D.C.는 계획 도시이다. 워싱턴 도시 계획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라파예트 장군의 군사 공학자로 식민지에 최초로 도착한 프랑스 태생의 건축가, 공학자, 도시 계획가 피에르 샤를 랑팡이 주로 맡았다. 1791년 워싱턴 대통령은 랑팡에게 새 수도 배치 설계를 의뢰한다. 랑팡의 계획은 바로크식 도시 계획을 본보기로 삼아 사각형과 원형을 중심으로 넓은 가로 뻗어나가 개방 공간과 탁트인 경관을 보이는 방식이었다. 랑팡은 도시 계획에 세세한 일까지 고집스레 간섭하여 수도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워싱턴이 임명한 세 위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1792년 3월 워싱턴 대통령은 랑팡을 해임하였다. 그리하여 랑팡과 함께 도시 측량 작업을 함께 하던 앤드루 엘리컷이 도시 계획을 완성하였다. 엘리컷은 가로 형태 등 당초 계획에 수정을 가하기는 하였지만, 랑팡은 워싱턴 시의 전체 설계를 맡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워싱턴 시는 오늘날 북쪽 플로리다 가와 서쪽 록 크릭(Rock Creek), 동쪽 애너코스티아 강(Anacostia River)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들어 랑팡이 의도한 수도의 탁트인 공원과 장대한 국가 기념물의 경관은 빈민가나 아무렇게나 들어선 건물, 내셔널 몰(National Mall)의 기차역 때문에 어지러워졌다. 1900년 의회는 상원의원 제임스 맥밀런이 이끄는 합동 위원회를 꾸려 워싱턴의 국가 의식 핵심부를 꾸미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맥밀런 계획은 1901년에 완성되었다. 이 계획에는 의사당 마당과 내셔널 몰의 경관을 새로이 바꾸고, 새로운 연방 관청 건물과 기념물을 건설하며, 빈민가를 철거하고 새로운 공원 체제를 세우는 것 등이 있었다. 위원회의 건축가들은 도시의 원래 배치를 보존하였고, 이들의 작업은 랑팡이 의도한 설계를 장대하게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899년 12층짜리 카이로 아파트 건물(Cairo Apartment Building)이 들어서자 의회는 건물 고도 제한법(Heights of Buildings Act)을 통과하여 어느 건물도 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은 1910년에 개정되어 건물 고도를 인접 가로의 폭에서 6.1m를 더한 높이 이상으로 건설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오늘날 워싱턴 시의 건물 윤곽선(skyline)은 낮고 넓게 퍼진 모양새를 갖추어, 워싱턴 시가 "복잡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거리에 "낮고 편리한" 건물들이 있는 "미국의 파리"가 되길 바라던 토머스 제퍼슨의 뜻을 따르고 있다. 그러하여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는 구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그러나 도시의 확산 현상으로 교통 및 주택 문제를 이유로 워싱턴의 고도 제한은 비난을 받았다. 구역의 고도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해 시내와 가까운 곳의 높은 건물은 포토맥 강에서 버지니아주의 로슬린쪽에 건설되곤 한다. 컬럼비아 구역은 넓이가 제각각인 4개의 지구(quadrant)로 나뉘는데, 북서 지구(Northwest), 북동 지구(Northeast), 남동 지구(Southeast), 남서 지구(Southwest)가 바로 그것이다. 네 지구의 경계선은 미국 의회 의사당이 기준이다. 모든 도로 이름에는 지구 이름의 약자가 붙어 그 도로가 속한 지구를 표시한다. 워싱턴 시에서는 대부분 모든 거리가 격자 모양으로 뻗어있으며, 동서 방향 거리 이름에는 글자가 붙고, (가령 C Street SW) 남북 방향 거리 이름에는 숫자가 붙는다. (가령 4th Street NW)). 또 원형 교차점에서 대각선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이름은 우선 미국의 주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미국의 50개 주 모든 이름으로 도로명이 있으며, 푸에르토 리코와 컬럼비아 구역의 이름을 지닌 대로도 있다. 워싱턴의 어떤 가로는 특히 눈에 띄는데, 가령 펜실베이니아 거리(Pennsylvania Avenue)는 백악관과 미국 의회의사당을 이어주며, K 거리(K Street)는 여러 로비 단체의 건물을 잇고 있다. 워싱턴에는 174개국 외국 대사관이 있으며, 이 가운데 59개는 매사추세츠 거리(Massachusetts Avenue)에 있는데 이 거리는 비공식적으로 대사관길(Embassy Row)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 명소. 내셔널 몰은 워싱턴 시내에 있는 넓은 개방형 공원으로 동쪽의 미국 국회 의사당과 서쪽의 링컨 기념관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내셔널 몰의 공원은 종종 정치 시위, 음악회, 축제, 대통령 취임식등의 장소로 이용된다. 내셔널 몰의 중앙에는 169m 높이의 워싱턴 기념탑이 있다.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박물관이 모여 있고 서쪽에는 기념관이나 기념비등이 모여 있다. 워싱턴 기념탑에서 북쪽에는 프레지던트공원과 접해있고 백악관이 북쪽 끝에 있다. 워싱턴 기념탑은 서쪽편 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서 바라볼때 그 사이에 있는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연못물에 기념탑이 반사되어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리플렉팅 풀과 기념탑 사이에는 제2차 세계 대전 기념관이 있다. 내셔널 몰의 서쪽에 있는 명소중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오는 곳은 링컨 기념관으로 매년 약 6 백만명의 방문객이 찾아 온다. 링컨 기념관 앞에서 보면 좌우로 베트남 용사 기념비와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가 있다. 한국전 기념비에는 스테인레스강으로 만든 19 군인병사의 조각상이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인 비석도 있다. 워싱턴 기념탐 남쪽에 타이달베이신(Tidal Basin)이라고 하는 반 인공 호수가 포토맥강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주변에는 벚꽃 나무가 줄 지어 있다. 프랭클린 델라 노 루즈 벨트 기념관, 조지 메이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관 및 D.C.1차 세계대전 기념관이 호수 주변에 있다. 내셔널 몰의 북쪽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은 독립 선언, 헌법 및 권리 장전등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며 미국 역사에 중요한 수천 개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미국 의회 도서관은 국회 의사당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 억 4,400 만 권이 넘는 책, 원고 및 기타 자료를 소장하고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다. 박물관.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션(Smithsonian Institution)은 1846년 미 연방정부가 설립한 교육 재단으로 워싱턴 DC에 있는 여러 박물관 및 미술관을 관리하고 있다. 스미스 소니언은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고 운영되고 있으며 스미스 소니언에 속한 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이며 주요 박물관은 아래와 같다. 내셔널몰(National Mall)의 북쪽에 있다. 지구를 주제로하는 모든것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스미스소니안에 속하지 않는 주요박물관으로 아래와 같은 주요한 박물관이 워싱턴 DC에 있다. 예술. 워싱턴 D.C.는 미국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공연 예술을 위해 세워진 존 F. 케네디 센터(John F. Kennedy Center)에는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 및 워싱턴바레가 공연하고 있다. 케네디 센터 명예상(Kennedy Center Honors)은 매년 미국 문화 생활에 크게 기여한 공연 예술 분야의 예술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었던 역사적 장소인 포드 극장 (Ford 's Theatre)은 박물관으로 뿐만 아니라 공연 장소로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캐피틀힐 근처에 있는 머린 배랰스(Marine Barracks)에는 미 해병 군악대가 있다. 이 군악대는 1798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단체이다. 미국의 행진곡 작곡자로 이름난 워싱턴 출신인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가 1880년부터 1892년까지 해병 군악대를 이끌었다. 1925년에는 해군 군악대가 설립되어 워싱턴 해군 야드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도시내에 있는 공식 행사와 연주회에 자주 연주하고 있다. 경제와 사회. 시가지는 포토맥강에 접하여 대서양과 수상 유통이 편리하나 주요 교통은 철도와 비행기를 이용한다. 이 도시는 전형적인 정치도시로서, 취업인구의 태반은 정부기관 또는 그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3차산업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인종차별이 없는 연방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흑인이 증가하여, 시민의 과반수는 흑인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자치제와는 달리, 연방직할이기 때문에 시장(市長)이 없었고, 시민은 종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에서도 선거권이 없었으나, 1962년부터 대통령 선거권을 얻게 되었으며(실제로 1964년부터 행사), 또한 1967년부터 정부가 임명하는 시장을 갖게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후 연방정부의 역할이 늘어남에 따라 워싱턴도 확대되어, 20세기 초에는 30만 명 정도였던 것이 1975년에는 72만이 되었다. 건축. 워싱턴의 건축은 대단히 다양하다. 2007년 미국 건축학회(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가 선정한 "미국인이 좋아하는 건축" 순위에서 상위 10위 건물 가운데 여섯 곳이 컬럼비아 구역에 있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여섯 건물과 워싱턴의 여러 유명한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조지 왕 시대 풍(Georgian Architecture), 고딕, 현대 양식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 제2제국 양식의 옛 행정부 청사나 미국 의회 도서관과 같은 예외적인 건물도 있다. 워싱턴 시내에서 바깥으로 가면 건축 양식은 더욱 다양해진다. 오래된 건물에는 앤 여왕 시대 건축 양식, 샤토 양식, 리차드슨식 로마네스크, 조지 왕 시대 재현 양식, 보자르, 또 여러 가지 빅토리아 양식 등이 나타난다. 줄지어 선 미국식 집합 주택(Rowhouse)도 이 지역에서 특히 눈에 띄는데, 이런 건물은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발달하여 전형적으로 연방 건축 양식과 후기 빅토리아풍을 따른 것이다. 조지타운은 워싱턴 시를 건설하기 전에 생긴 곳으로, 컬럼비아 구역의 가장 오래된 건축을 보인다. 조지타운의 옛 석조 주택(Old Stone House)는 1765년에 건설되어 이 도시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근처의 가옥 대부분은 1870년대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당대 후기 빅토리아 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789년에 개교한 조지타운 대학교는 주변 건축보다 더욱 특별하며, 로마네스크풍과 고딕 재현 양식이 섞인 특징을 보인다. 로널드 레이건 건물은 컬럼비아 구역에서 가장 큰 건물로, 총면적이 약 288,000 제곱미터에 이른다.워싱턴 DC는 뉴욕보다 건물들이 낮은데 그 이유는 워싱턴 기념탑보다 더 높은 탑을 세우지 못하도록 미국법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치. 워싱턴 D.C는 대통령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공화당이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다. 대통령 선거마다 민주당 후보가 9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승리하며, 2016년 대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이 지역에서 92.8%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교육. 1789년에 창립한 예수회 사립 대학인 조지타운 대학교와 1821년에 창립한 사립대학 조지 워싱턴 대학교와 연합감리회교회에서 설립한 아메리칸 대학교가 있다. 워싱턴 대학이 워싱턴 DC에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워싱턴 주와 다른 특별 자치구이다. 스포츠. 워싱턴 D.C.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워싱턴 내셔널스, NBA 농구의 워싱턴 위저즈, NFL 풋볼의 워싱턴 커맨더스, NHL 아이스하키의 워싱턴 캐피털스, 메이저 리그 사커의 D.C. 유나이티드, WNBA 여자농구의 워싱턴 미스틱스가 있다. 자매 도시. 워싱턴 D.C.에는 12개의 자매 도시가 있다. 파리는 코뮌의 자매 도시 정책에 따라 파트너 도시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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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극(演劇) 또는 극(劇)은 배우가 무대 장치조명음악 등의 도움을 받아 연출자의 지도 아래 각본에 의해서 연기를 하여 관객에게 보이는 종합 예술이다. 연기의 내용은 액션 (인물에 의해서 연기되는 사건)으로서 통일되며, 액션은 몇 개의 막(幕)으로 구분되고, 막은 다시 몇 개의 장(場)으로 세분되어 하나의 극을 형성하고 있다. 구성으로서는 발단상승부정점하강부종결 (또는 파국)의 5부로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일치의 설이 취해져서 시간장소플롯의 통일이 필수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극은 비극희극으로 대별되고, 이와는 달리 비희극(悲喜劇)사극(史劇)시극(詩劇)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비극은 후에 표현형식은 변했으나 항상 영원적인 것, 즉 생사자유필연죄신 등을 테마로 하고 있다. 희극은 비극의 영원적근원적인 것에 대해서 일시적현세(現世)적인 것, 즉 인간의 성정(性情)이나 행위의 모순약점 또는 사회의 병폐 등을 테마로 하고, 전체적으로 명랑 경쾌한 기분이 충만하고 있다. 희극 중 단순한 것은 보드빌 (대중 연극)이나 소극(笑劇)이라 불린다. 서설. 연극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태어나서 인류멸망과 함께 죽어갈 공동운명을 지니고 있다. 연극이란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연극의 큰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연극은 다른 어떤 문화적 산물에 못지않게 역사적·지역적·민족적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숨쉬고 있는 동안 연극은 밤낮에 따라 죽음과 부활을 반복할 것이다. '자정에 죽은 연극은 솟아오르는 태양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함은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연극도 계속된다는 뜻 이외에, 일단 끝난 공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되 다시 상연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태어난 연극은 전날 자정에 죽은 연극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다만 내용이 같을 따름이다. 연극은 육안으로 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함은 연극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시나 소설이 활자화되어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연극은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사라져 버리고 오직 상연대본과 프로그램, 무대사진, 평론 그리고 그 공연을 본 관객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연극이 순간적인 시간예술임에도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살아 있는 인간, 즉 배우가 인간의 체험을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모방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어떠한 과거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현재'시간에서 진행되게 마련이며, 관객은 과거를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들)의 행위를 모방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 햄릿의 이 말은 연극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많은 석학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모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으나, 모든 예술에 있어서 그렇듯이 고전적 해석은 타당한 바탕을 이룬다고 하겠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결국 연극이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모방한다는 뜻이다. 원래 드라마는 희랍어의 행위·행동에 해당하는 말로서, 행동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가 인간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이 바로 연극의 이념이다. 이와 같은 모방론은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의 예술관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역시 프랑스의 보마르셰도 졸라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연극이란 한낱 인생의 축도(縮圖)에 불과하다. 이들은 '미러 오브 네이처(Mirror of nature)'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무릇 예술가는 많은 소재 가운데서 어떤 특수한 부분을 선택한다. 따라서 선택은 기계적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창조력을 필요로 한다. 선택은 기교로서의 '아트(art)'와 예술가로서의 '아트'가 합쳐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극은 소재의 선택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대사 속에 무한한 의미를 암시할 수 있는 전달력을 작가가 지닐 일이다. 극작가는 아티스트(artist)여야 한다. 한 걸음 나아가 모방론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해석이 있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원칙은, 예술은 모방이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모방설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다. 가령 <크롬웰>의 서문에서 말한 위고의 견해로는, 거울이 편편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가 있는 포커싱 미러(focusing mirror)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약한 빛이 강해지고 불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극이란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술 구실을 하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사르세이(Sarcey)나 에델린(Hedelin)의 이론 역시 위고(Hugo)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발전적인 견해이다. 에델린의 "연극이란 있었던 사건 그대로를 상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상연해야 한다"는 이론은 극작가의 사상과 철학에까지 언급한 것이 된다. 사실 고전적 이론으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문학은 당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전제는 모방설에 대한 졸라나 보마르셰의 해석에 대해서 수정을 가하게 만든다. 당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는 이론을 부연하는 또 하나의 이론을 브륀티에르의 연극론에서도 볼 수 있으니, 연극은 어떤 목표를 향해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그려야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의지란 당위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의지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고전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연극은 제 나름의 길을 걸어오고, 또 걸어갈 것이지만, 그들의 연극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건 간에 인류역사가 변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 역시 많은 변화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 막이 내려, 죽어버린 연극이 내일 다시 되살아날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연극은 인간의 기다림 속에서 영원히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연극의 구성 요소. 연극의 3요소는 관객, 배우, 무대, 그리고 연극의 4요소라 할 때는 관객, 배우, 무대, 희곡이라고 정의한다. 많은 전공자도 헷갈리는 것이 바로 연극 3요소이다. 그러나 연극 3요소는 배우, 관객 그리고 무대이다. 4요소로 늘릴 경우 희곡이 포함된다. 이 공연 텍스트가 없으면 연극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연극은 배우와 관객의 존재만으로도 성립된다. 현대에 와서 연극은 배우와 관객만 있어도 (장소 특정적 공연 또는 수행적 퍼포먼스 등) 공연될 수 있다. 즉, 수행하는 몸으로서 배우와 관객이 있는 곳이 곧 무대가 된다. 그 무대에서는 굳이 희곡이 없어도 연극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의 3요소를 설명할 때 희곡을 넣는 건 80~90년대 텍스트 기반의 재현주의 연극이 성행할 때 잘못 알려진 상식 중 하나임으로 반드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연극의 요소를 이런 식으로 구분짓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연극은 배우, 관객, 희곡 이외에도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대사. 드라마에는 보충 설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드라마의 대사는 간결, 명료하면서도 그 대사 중에 시간, 장소, 상황, 인물 들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다 모아야하는 부담이 있다. 드라마의 대사는 자연스럽게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등장 인물들의 태도, 견해, 성격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극작가는 토론, 논쟁, 물음 등의 대사 형식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행동을 추측하고 예견케하며 그에 대한 복선을 까는 역할도 해야 한다. 소설 작가는 소설 속의 내레이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지만 극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다만 서로 맞물려 짜여진 대사를 통해 이야기의 결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행동. 행동이란 등장 인물들이 취하는 액션(상단 참조)들의 그 실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특정 행동을 명시하기도 하나 많은 부분은 연출자와 배우에게 담당되어있다. 희곡을 '읽을 때'에는 관객 (독자)가 스스로 연출자가 되어 상상의 무대 위에서 배우를 움직이고 그들에게 대사에 맞는 제스처를 부여해야 하지만, 배우들이 직접 연기를 하는 극중에서는 대사와 행동에 유의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기반으로 극을 올바르게 즐기면 된다. 소설의 기법이 드라마에 차용되기 이전인 19세기 전반 이전에 쓰여진 희곡의 경우 희곡에 무대 지시 사항이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대사 속에 암시되어있는 행동에 유념하며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이야기.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가는 주요한 이유는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름다운 대사나 고상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이다. 드라마에도 간혹 회상의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축으로 한다. 극적 행동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만 그저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극작가에 의해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외에 플롯의 역동적 구성을 위해서는 ‘왜 어떤 일이 일어날까’하는 점이 필수적이다. 인물. 많은 경우에 우리가 문학에서 느끼는 흥미는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 관한 것이다. 드라마는 살아있는 배우들에 의해 작품 속의 인물들이 표현되는 점에서 인물들은 관객들의 주요한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다. 등장 인물에는 주인공과 주인공과 맞서는 인물이 있다. 주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을 구별하는 손쉬운 방법은 대사의 길이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차이는 주인공의 경우 복잡한 동기와 과거를 지닌, 충분히 개성화된 인물임에 반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은 이렇다할 개성이 부여되지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이 간단명료하게 정의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예는 거의 없다. 주인공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비록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름과 외모이다. 예컨대 「오셀로」에서 이야고를 부르거나 그에 대해 언급할 때면 ‘정직한’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성격 부여의 또 다른 방법은 한 개인의 행동 양식이다. 어떤 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행동 동기를 방백이나 독백을 통하여 밝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 중에 사투리, 어휘의 선택, 문법 등 모든 것이 합해져서 한 인물의 과거와 지성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물이 다른 인물들에게 보이는 반응이나 다른 인물들이 그 인물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에서도 성격이 드러난다.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 지나칠 정도로 일관성 있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사실성이 희박해 보인다. 아마도 문학 작품 속에서 훌륭한 성격 설정이라 함은 수긍은 가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복잡 미묘하고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이기조차 한다. 휴극일. 연극을 쉬는 것을 '휴극'이라고 한다. 휴극일은 연극에 따라서 다른 요일에 휴극하는 것도 있지만, 보통 연극은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월요일에 쉰다.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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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제우스(, Zeus) 혹은 유피테르(), 주피터()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이다. 로마 신화의 유피테르와 동일시된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아들이며 포세이돈,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번개와 독수리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긴 수염이 나 있는 강인하고 위엄있는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상체는 나신이며, 한쪽 손에는 번개 혹은 홀(笏)을 들고 있다. 제우스는 번개나 비 같은 기상 현상을 주재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며, 왕권 및 사회적 위계질서를 보장하기도 한다. 또한 호색한이기도 한 그는 헤라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여신이나 인간 여성 그리고 님프들과 차례대로 어울리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제우스의 이러한 호색한적 측면은 우주 만물은 주신의 힘과 질서와 정의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우주에 주신의 힘과 질서와 정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화에 나오는 이름난 영웅들은 대부분 제우스의 후손들(또는 사생아들)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제우스와 헤라 사이의 적자들보다 제우스의 사생아들이 그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인 헤파이스토스는 손재주는 모든 신들 중 가장 뛰어나며 착하였던 반면 못생긴데다가 절름발이였으며, 아레스는 전쟁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성급하였다. 이에 비해 헤라클레스는 모든 신들 중 가장 힘에 세었으며, 아폴론은 멋지고 지혜가 많았던 데다가 예술과 예언에 능하였으며, (우라노스에게서 태어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고)제우스에게서 태어난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미모가 뛰어났으며,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지혜가 있었다. 신화. 탄생. 제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불길한 예언을 들었다.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 자신도 아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이었다.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크로노스는 아내인 레아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족족 삼켜버렸다. 자식을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레아는 한 명이라도 구하고자 여섯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 아이 대신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 돌덩이의 이름이 바로 이다. 그리고 진짜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에게 맡겼다. 그렇게 제우스는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유년기. 레아는 제우스를 숨기기 위해 가이아의 조언에 따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크레타섬의 깊은 숲 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쿠레테스라 불리는 정령들이 아기를 안전하게 지키게 했다. 정령들은 칼을 부딪치고 청동 방패들을 요란하게 두드리면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감추었다. 이런 식으로 레아는 제우스가 성장해 어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아말테이아라는 염소(또는 님프)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하루는 아말테이아의 뿔을 가지고 놀다가 부러뜨렸다고 전해진다. 이에 미안해진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의 부러진 뿔을 풍요의 뿔로 만들어 주었다. 나중에 제우스는 아말테이아가 죽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녀를 하늘로 올려보내 염소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티탄족과의 싸움(티타노마키아). 어른이 된 제우스는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하고 신들의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우선 동료를 모으기 위해 아버지가 삼킨 형제들과 누이들을 되찾고자 그는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레아는 제우스로부터 구토제를 받고 남편인 크로노스에게 자신이 직접 담근 술이라며 속이고, 레아에게서 받은 구토제를 마신 크로노스는 예전에 삼킨 모든 자식과 돌을 토해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 그들이었다.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인 퀴클로페스 형제와 헤카톤케이르 형제의 도움까지 받고 막판에 자신의 아들인 헤파이스토스가 자신의 삼촌들인 퀴클로페스들과 같이 벼락을 발명하여 이 벼락이라는 무기까지 얻게 된 올림포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어 티탄 12신들을 대지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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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국기
독일의 국기()는 독일의 국색인 검은색, 빨간색, 금색() 3색의 가로 줄무늬가 같은 비율로 배치된 삼색기이다. 이 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였던 1919년에 처음 국기로 지정되었다. 별칭은 연방기()이다. 독일 연방 시대에 처음 등장한 흑적금 삼색기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독일의 군인들이 입었던 금색 단추, 빨간색 장식이 달린 검은 제복에서 유래되었다. 흑적금 삼색기는 1817년에 예나에서 결성된 학우회에서 암호 역할을 했고 1832년에 일어난 군중들의 시위에서 다시 등장했다. 1848년 독일 혁명을 계기로 수립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이 삼색기를 민주적인 통일 독일 국가의 기로 제안했지만 국기로서의 사용은 지속되지 않았다.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일 제국이 붕괴되면서 흑적금 삼색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로 지정되었으나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라졌다. 1945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연방기는 1949년에 서독과 동독 쌍방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서독과 동독은 1959년까지 똑같은 국기를 사용했으나 동독은 1959년부터 국장을 추가한 국기를 사용했다.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서독과 동독이 재통일됨으로써 흑적금 삼색 연방기는 재통일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독일의 국기가 항상 흑적금 삼색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을 맹주로 하여 형성된 북독일 연방은 검은색, 하얀색, 빨간색 삼색기를 국기로 지정했는데 이는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을 계기로 형성된 독일 제국의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은 1933년부터 1935년까지 흑백적 삼색기를 다시 국기로 사용했고 1935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흑적금과 흑백적 삼색은 독일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사용되는 흑적금 삼색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성립된 민주공화국과 관련이 있으며 독일의 단결과 자유를 상징한다. 이 자유란 독일이라는 국가의 자유 뿐 아니라 독일 국민의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 흑적금 삼색은 극우와 극좌 진영에 대하여 민주주의, 중도주의, 공화주의를 표방한 정당의 색깔이었다. 사회민주당, 중앙당, 민주당의 당원들이 좌익과 우익의 극단분자들로부터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결성한 준군사조직인 흑적금 국기단()은 그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 사람들에게 공화국과 그 국기,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려 했다. 기원. 독일과 흑적금 삼색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흑적금 삼색기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 유럽에서 성립된 반동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운동의 상징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흑적금 삼색을 독일 연방의 공식 색으로 선언했다. 아마도 빨간색은 한자 동맹을, 금색과 검은색은 당시 남부 독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의 일부로 간주됨)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8년 제정된 기의 색채 조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설에는 카를스바트 결의에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에 의해 금지된 급진 대학생 단체인 부르셴샤프트의 색이라고 하는데 이들 색상은 요하네스 브람스가 대학 축전 서곡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트 다니엘 폰 빈처의 시 〈예나 학생 동맹의 해산에 관하여〉(Zur Auflösung der Jenaer Burschenschaft)에도 등장한다. 또다른 주장으로는 나폴레옹 정복군에게 맞서 저항한 대학생 단체인 뤼초프 자유군단의 제복(금색 단추에 빨간색 안단이 달린 검은색 옷이 다수였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한다. 이 해석들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흑적금 삼색은 이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의 국가색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당시에 재도입되어 대체로 사회적 자유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기의 변형. 민간기. 검정, 빨강, 금색 3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로만 구성된 독일의 국기 또는 연방기()는 1949년에 제정되어 독일(서독 시절 포함)의 헌법 역할을 하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을 통해 도입되었다. 이후에 정부기와 군기가 새로 생기면서 단순한 삼색기는 현재 독일의 민간기와 상선기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비연방 당국이 연방 정부와의 연결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주들은 독일의 국기와 주기를 함께 사용한다. 정부기. 독일의 정부기는 공식적으로 연방당국직무기() 또는 연방직무기()로 알려져 있다. 1950년에 도입된 정부기는 민간기 가운데에 연방방패()가 추가된 디자인인데, 방패는 검은색과 금색 줄무늬 너비의 1/5까지 덮는다. 연방방패는 독일의 국장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국장과의 차이점은 독수리와 방패의 모양이 다른 것인데 연방방패는 바닥이 둥글지만 국장의 방패는 바닥이 뾰족하다. 독일의 연방직무기는 연방 정부 당국에서만 사용될 수 있고 민간인이 사용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벌금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연방직무기와 비슷하게 생긴 기(예를 들어 연방방패 대신에 독일의 국장이 들어있는 디자인)의 개인적인 사용은 눈감아 주고 있는데 그러한 기는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세로기. 일반적인 가로기 이외에도 독일의 많은 공공 건물들은 세로기를 사용한다. 독일의 많은 시청들은 국기와 함께 시기를 게양하는데 그 이유는 독일의 많은 시기들이 세로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로기의 비율은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1996년에는 정부기를 세로로 배치한 디자인이 제정되었다. 정부기를 세로로 게양할 때에는 연방방패가 기의 중앙에 위치하고 검은색과 금색 띠 너비의 1/5 가량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현수막처럼 게양할 때에는 오른쪽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검은색 줄무늬가 왼쪽, 금색 줄무늬가 오른쪽을 향하도록 게양해야 한다. 세로 방향의 깃대에 게양할 때에는 검은색 줄무늬가 깃대와 접하고 있어야 한다. 군기. 독일 연방방위군()은 연방 정부에 소속된 조직이기 때문에 연방직무기는 육상 전투에서도 사용된다. 1956년에는 해군 함미기인 연방해군직무기()가 제정되었다. 이 기는 연방직무기의 오른쪽 끝 부분이 제비 꼬리 모양으로 갈라진 모양을 띠고 있다. 이 함미기는 함수기로도 사용된다. 디자인. 독일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22조는 독일의 국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연방기는 검은색, 빨간색, 금색이다. (Die Bundesflagge ist schwarz-rot-gold.) 1950년에 공개된 서독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연방기는 너비가 동일한 3개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가로세로비는 3:5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사용된 삼색기의 비율은 2:3이었다. 독일의 국기에 사용되는 색인 “검정-빨강-금색”이 색상 체계에서 정확히 어떤 색인지에 대해서는 국기 제정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독일 연방내각은 1999년 6월 2일에 독일 정부 브랜드 디자인을 도입하면서 독일의 국기에 사용되는 공식적인 사양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색상. 기학에서는 금색과 노란색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 문장학에서도 둘 다 ‘오르’(Or, 프랑스어로 ‘금’이라는 뜻)라고 한다. 하지만 독일의 국기에서는 금색과 노란색이 구별된다. 이는 독일의 국기에 사용되는 색은 금색이지, 노란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흑적금 삼색기가 국기로 채택되던 당시에 보수파, 왕당파, 극우파 진영에서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들 색상을 “검은색-빨간색-누렁색”(), 심지어 “검은색-빨간색-겨자색”(), “검은색-빨간색-똥색”()이라고 부르면서 공격했다.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제국 시절인 1918년 이전에 사용되었던 흑백적 삼색이 재도입되었는데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과거 왕당파들과 마찬가지로 선전 과정에서 흑적금 삼색을 비하·경멸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1959년 11월 16일에 독일 연방사법재판소()가 독일의 국기 색을 “검은색-빨간색-노란색”이라고 부르는 행동이 나치 시절에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상징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이라고 판결함으로써 금색이 아닌 노란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1968년에는 독일의 문장학자인 아르놀트 라보프(Arnold Rabbow)는 “독일의 국가색은 검은색-빨간색-노란색이지만 독일인들은 검은색-빨간색-금색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국기 게양일. 독일에는 국기를 게양하는 날()이 많다. 2005년 3월 22일에 제정된 독일의 연방 법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날짜에 공공 건물에서 반드시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 이날 모두가 공휴일인 것은 아닌데 공휴일은 5월 1일과 10월 3일뿐이다. 일부 주에서는 특정 주별 기념일 이외에 독일 연방하원 및 유럽 의회 선거일에 국기를 게양하기도 한다. 독일의 대통령이나 그 외의 유명한 정치인이 사망한 날과 같은 경우에도 공공장소에서 조기 형태로 기를 게양하며 이는 독일 연방내무부의 재량에 따라 선포할 수 있다. 조기를 게양해야 할 때는 세로 방향으로 게양된 기는 내리지 않는다. 대신 깃대 꼭대기나(기둥에 걸려 있는 경우) 기와 들보가 만나는 양쪽 끝(현수막처럼 걸려 있는 경우)에 검은 리본을 달아서 애도를 표한다. 역사. 중세. 신성 로마 제국(800년/962년 ~ 1806년)은 국기가 없었지만 검은색과 금색은 신성 로마 황제의 색으로 사용되었다. 황실기는 금색 바탕에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디자인을 띠고 있었는데 13세기 말에는 독수리의 발톱과 부리가 빨간색으로 칠해졌다. 15세기부터 쌍두 독수리가 사용되었다.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1778년 5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하인리히 9세를 새로 만들어진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이때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이 채택한 국기는 오늘날의 독일 땅에 속한 독립국이 흑적금 삼색기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을 다스린 로이스 가문이 사용한 깃발은 오늘날 독일의 국기가 3:5 비율인 것과 달리 정사각형에 가까운 4:5 비율이었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1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합스부르크가에 속해 있던 신성 로마 황제인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사유 영지였던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국기에서 따온 검은색과 금색 줄무늬를 띠고 있었다. 1806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프란츠 2세는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고 그 뒤로도 검은색과 금색은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국기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빨간색과 하얀색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을 때에 흑금 황실기와 함께 군기가 게양되었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기”로 알려진 이 기는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십자가가 그져져 있었는데 덴마크의 국기와 비슷한 편이고 잉글랜드의 국기와는 색 배치가 반대인 점이 특징이다. 빨간색과 하얀색은 13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한자 동맹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다. 한자 동맹에 소속된 무역선은 적백 삼각기를 달았고 가맹 도시들은 빨간색과 하얀색을 상징 색으로 채택했다. 오늘날에도 함부르크, 브레멘과 같이 한자 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도시에서 빨간색과 하얀색을 찾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예하 공국들과 대공국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들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에 합류했다. 라인 동맹에 가맹한 여러 제후국들이 자기들만의 기를 사용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에 동맹은 자체적인 기가 없었다. 대신 프랑스의 파랑-하양-빨강 삼색기,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황제기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독일의 저항은 검은색, 빨간색, 금색으로 상징되었다. 이 조합의 기원은 프로이센군의 의용군인 뤼초프 자유군단의 제복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부대들의 제복은 검은색에 빨간색 안감과 금색 단추가 달려 있었다. 흑적금 삼색은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군복에 이 색을 차용한 것은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자유군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옷을 각자 조달해야 했는데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금색 단추들은 찾기 쉬웠고 부대에 소속된 창기병들은 빨간색과 검은색 깃을 사용했다. 삼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독일 각지에서 모인 뤼초프 자유군단의 구성원들은 주로 대학생과 지식인들이었고 뤼초프 자유군단과 삼색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독일 연방. 1815년에서 1816년에 걸쳐 열린 빈 회의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남아 있던 모든 독일계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독일 연방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사라진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기 위해 탄생한 독일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를 연방 의장으로 추대했다. 연방은 자체적인 기가 없었지만 종종 흑적금 삼색기가 독일 연방의 기로 혼동되기도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뤼초프 자유군단의 퇴역 군인들은 1815년 6월에 예나에서 우어부르셴샤프트(; “원조 학우회”) 형제단을 설립했다. 예나 우어부르셴샤프트는 자유군단의 제복 색을 따서 빨간색, 검은색, 빨간색을 띤 가로 줄무늬 가운데에 금색 참나무 가지가 그려져 있고 금색 테두리를 두른 기를 채택했다. 유명한 체조 선수이자 부르셴샤프트(; “학우회”) 설립자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은 학우회를 위해 흑적금 삼색기를 제안했다. 몇몇 구성원들은 그 색상들이 자유의 빨간색이나 전쟁의 피로 장식된 황실의 흑금색의 부활이라고 해석했다. 보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이 색상들이 노예 상태를 의미하는 검은 밤, 자유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 자유의 금빛 새벽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뤼초프 자유군단에서 복무했던 메클렌부르크의 안톤 프롭슈탄(Anton Probsthan)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친척인 예나의 아말리 니치케(Amalie Nitschke) 양이 부르셴샤프트 설립 당시에 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를 위해 사라진 비밀 결사체인 반달리아(Vandalia)의 흑적금 3색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뤼초프 자유군단에서 복무했던 학생들이 여러 독일계 국가에서 모였었기 때문에 통일 독일 국가에 대한 구상은 이후에 연방 전역에서 형성된 우어부르셴샤프트와 유사한 부르셴샤프트 사이에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817년 10월 18일에는 라이프치히 전투 4주년을 맞아 연방 전역에서 모인 학우회 조합원들과 대학생들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현재의 튀링겐 자유주)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모여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 국가를 요구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축제라 불린 이 행사에서 예나 우르부르셴샤프트의 금적흑 삼색기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때문에 검정-빨강-금색 조합은 결국 통일 독일 국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상 유지를 원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1819년에 카를스바트 결의를 통해 모든 학생 조직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부르셴샤프트들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1832년 5월에는 약 30,000명의 군중들이 함바흐 축제에서 자유, 통일, 공민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바르트부르크 축제 이후에 검은색, 빨간색, 금색 조합은 이미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정착했고 함바흐 축제에서 이들 색을 가진 기들이 일제히 휘날렸다. 축제를 묘사한 현대의 그림들은 주로 금적흑 삼색기(현대 독일의 국기를 뒤집은 형태)를 묘사하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들은 흑적금 삼색기들이다. 당시 함바흐 성에서 내걸렸던 “최초의 깃발”()은 현재 함바흐 성에 영구 보존되어 있는데 흑적금 삼색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의 빨간색 띠 부분에는 “독일의 재탄생”()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다. 1848년 혁명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년 독일 혁명 기간 동안에 많은 혁명가들이 삼색기를 휘날리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오랜 숙고 끝에 국가 의회가 구성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검정-빨강-금색을 독일의 국가색으로 공식 선언하고 흑적금 삼색기를 독일의 상선기로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해군기 역시 같은 색상을 사용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1849년 5월부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1850년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붕괴되고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을 맡은 독일 연방이 복원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삼색기를 포함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움직임들을 억압했다.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미래의 독일 국가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독일 문제는 독일의 통일 운동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를 맹주로 하는 거대한 제국을 수립하자는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게르만 민족이 거주하는 국가·지역끼리만 통합하자는 소독일주의가 대립하게 된다. 독일 연방 내에서 양강 체제를 형성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간의 경쟁은 1866년에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전쟁 기간 동안에 오스트리아를 지지한 남독일 국가들의 군인들이 흑적금 삼색기를 사용했다. 전쟁 결과 프로이센 왕국을 맹주로 하는 북독일 연합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면서 소독일주의에 따른 독일의 통일을 위한 길로 나아가게 된다.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 (1867년 ~ 1918년). 프로이센은 1866년 8월에 북독일 연방 조약을 체결하고 1867년에 북독일 연방 헌법을 비준함으로써 독일 연방의 비공식적인 계승자인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이 연합체는 맹주인 프로이센과 21개의 북독일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해운업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 정체성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에 새로운 연방이 어떤 기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북독일 연방의 국제 해운 활동은 사실상 프로이센과 과거 한자 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도시 국가인 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가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돌프 죄트비어(Adolf Soetbeer) 함부르크 상공회의소 서기는 1866년에 프로이센의 색인 검은색과 하얀색, 한자 동맹의 색인 빨간색과 하얀색을 결합한 기를 제안했다. 이듬해에 제정된 북독일 연방 헌법은 흑백적 가로 줄무늬 삼색기를 상선기와 해군기로 채택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 국왕은 색상 선택에 만족했는데 빨간색과 하얀색은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다. 기에서 금색이 사라진 것 또한 새로운 독일 국가가 검은색과 금색을 상징색으로 정했던 오스트리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계기로 남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을 맹주로 하는 북독일 연방과의 동맹을 통해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을 이끌어냈고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의 황제 칭호를 받게 된다. 독일 제국 헌법은 검정, 하양, 빨강을 국가색으로 정했고 1892년에 제정된 조례는 북독일 연방에서 사용했던 삼색기를 독일 제국의 공식적인 국기로 지정했다. 흑백적 삼색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에 독일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독일의 국기로 남아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 ~ 1933년). 1918년에 있었던 독일 공화국의 선포와 그 이후에 일어난 11월 혁명에 이어 1919년 8월에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19세기에 있었던 반독재 운동과 신생 민주 공화국 사이의 연속성을 위해 1919년에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에 옛 흑적금 삼색기가 독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 발데크 후국을 비롯한 자그마한 독일계 제후국들과 발데크 후국을 계승한 공화국인 발데크 자유주 역시 기의 비율과 색 배치의 순서는 달라도 약 140년 전인 1778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 흑적금 삼색을 유지했다. 상선기에는 독일 제국 시절에 사용된 국기인 흑백적 삼색기가 유지되었으나 왼쪽 구석에 새로운 흑적금 삼색기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국기의 변화는 많은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들은 새로운 국기를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결과에 따른 굴욕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독일 국가방위군()은 독일 제국 시대의 군기를 사용하는 일이 더 많았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예전의 색상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는데 왕당파와 극우주의자들은 새로운 국기를 다양한 멸칭(앞 부분의 색상 문단 참조)으로 비하하면서 반대 목소리를 훨씬 더 높였다. 결국 1922년에 타협안으로서 재외 공관용에 한하여 옛 흑백적 삼색기가 재도입되었다. 독일 제국의 상징은 곧 왕당파와 국가주의자들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선병사동맹 철모단을 비롯한 왕당파 국가주의 단체에서 사용되었다. 독일 제국 시절에 사용된 군기인 국가전쟁기() 역시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국가인민당(왼쪽 포스터 참조)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등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한 많은 국가주의 정당들은 제국 색상을 상징색으로 사용했으며 이것은 현대 독일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 국민민주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4년 2월 24일에 바이마르 대연정을 구성한 3개 정당(중앙당, 민주당, 사회민주당)의 당원들과 노동조합원들이 마그데부르크에 모여 흑적금 국기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의 목적은 극좌와 극우 양쪽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받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단체를 통하여 흑적금 삼색기는 독일 민주주의의 상징일 뿐 아니라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국기단의 초대 주석인 오토 회슬링의 말로 대표되는데 회슬링은 국기단의 임무를 “만자문과 소비에트의 별에 대한 투쟁”이라고 묘사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국가사회주의자들 간의 폭력적인 갈등이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급격한 경제 불황, 극심한 초인플레이션, 공화국의 부패에 직면하여 독일인들 사이의 양극화는 계속하여 심화되었다. 결국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국 총리()가 되었고 나치의 권력 장악()이 일어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나치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 1945년). 1933년 1월 30일에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흑적금 삼색기는 신속히 폐기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같은 해 3월 12일에 2개의 법적 국기를 제정했는데 하나는 독일 제국 시절에 사용된 흑백적 삼색기를 재도입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기였다. 독일국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고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과 총리를 합친 총통()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1935년 9월 15일을 기해 나치당의 당기만이 독일의 유일한 국기로 지정되면서 2개의 국기 사용이 종료되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SS 브레멘 사건”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1935년 7월 26일에 나치당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미국 뉴욕에 정박 중이던 독일 상선 SS 브레멘(SS Bremen)에 난입하여 깃대에 걸려 있던 나치당기를 내려서 찢어버린 다음에 허드슨강에 던져 버린 사건을 의미한다. 이에 미국 주재 독일 대사관이 항의하자 미국 공무원들은 독일의 국기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손상된 것은 일개 정당의 상징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의 연례 당대회에서 새로운 국기법이 발표되었는데 헤르만 괴링은 흑백적 삼색기는 지나간 시절의 상징이며 “반동분자들”이 사용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당의 당기 디자인은 히틀러가 당의 지도자가 되기(1921년 7월 21일) 약 1년 전인 1920년 중반에 제안했는데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검은색 하켄크로이츠(만자문)가 그려져 있는 디자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나치당의 당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했다. 먼저 독일 제국 시절에 사용했던 국기와 같은 색을 사용해야 한다. 히틀러의 의견에 따르면 이들 색상은 “영광스러운 과거와 독일 민족의 영광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존경받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운 기는 … 거대한 포스터와 같은 효율성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수천 가지 경우에서 매우 눈에 띄는 엠블럼이야말로 운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제1요인”이기 때문이다. 나치당의 선전에서는 기가 상징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빨간색은 사회를, 하얀색은 운동의 국가적 사고를, 하켄크로이츠는 유대인에 대한 아리안 민족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의 디자인이 제안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히틀러가 직접 만든 디자인이었다. 하얀색 동그라미가 중앙에서 벗어난 디자인을 가진 하켄크로이츠기는 독일에 선적의 민간 선박의 상선기로 사용되었다가 전쟁해군(,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해군을 부르던 명칭)의 선수기로도 사용되었다. 해상에서 사용된 하켄크로이츠기는 앞면의 무늬가 뒷면에 그대로 비쳐 보였기 때문에 뒷면은 하켄크로이츠가 왼쪽을 바라보았다. 한편 국기는 양면 모두 하켄크로이츠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기가 사용되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나치당은 하켄크로이츠기에 피의 기()를 닿게 함으로써 하켄크로이츠기를 “성스럽게” 만들곤 했다. 피의 기는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이 1923년에 실패한 뮌헨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 사용한 하켄크로이츠기를 가리킨다. 이 의식은 뉘른베르크 전당대회가 열릴 때마다 행해졌는데 1938년에 열린 마지막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이후에도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에 연합국 통제위원회에 의해 제정된 첫 번째 법은 모든 나치 상징을 폐지하고 이와 관련된 법들을 모두 폐지했다. 그 이후 몇몇 국가에서는 하켄크로이츠기를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특히 독일에서는 하켄크로이츠기를 수입하거나 전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1945년 ~ 1949년).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점령된 독일 지역은 연합군의 분할 통치하에 놓였다. 이 당시에는 비록 독일 정부도 독일의 국기도 없었지만 독일의 선박들은 국제법에 따라 소속 국가를 알리는 상선기를 게양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결국 연합국 통제위원회는 국제 신호기에서 C를 상징하는 찰리(Charlie)에서 파생된 C-삼각기()로 알려진 기를 지정했는데 이 기는 끝 부분이 제비 꼬리 모양을 띠고 있었다. 위원회는 이 기에 대해 “어떠한 국적의 군함이나 상선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점령된 일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E를 상징하는 신호기에서 파생되어 끝 부분이 제비 꼬리 모양을 띤 기를 사용했다. 오데르-나이세선 서쪽에 위치한 독일의 주들은 연합군의 점령 지역을 따라 재편성되었고 새로운 주 정부들이 수립되었다. 1946년에는 미국 점령 지역 내에서 옛 뷔르템베르크주와 바덴 공화국의 북부 절반이 뷔르템베르크바덴주로 통합되었다. 뷔르템베르크바덴주는 검정-빨강-금색 삼색기를 주기로 채택했다. 이러한 색상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사용된 삼색기가 아니라 빨강-검정으로 구성된 뷔르템베르크주의 기에 금색을 추가한 간단한 양식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덴주의 주기는 빨강-노랑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색상 선택이 두 기의 조합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뷔르템베르크바덴주는 1952년에 현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일부가 되었으며 주기는 검정-금색으로 선정되었다. 전후에 만들어진 2개의 다른 주인 라인란트팔츠주(프랑스 점령 지역), 니더작센주(영국 점령 지역)은 주기에 문장을 덧붙인 검정-빨강-금색 삼색기를 공통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2개 주는 다른 주들의 일부분에서 분리되어 새로 형성된 주였는데 이전의 주에서 가져올 색상 조합이 없었다. 따라서 흑적금 삼색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흑적금 삼색은 이전의 어느 주와도 특별히 관련이 없었고 옛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를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독일 분단 시기 (1949년 ~ 1989년).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면서 1948년 3월에 영국, 프랑스, 미국 3개 서방 연합국은 회담을 가져 그들의 점령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흔히 서독으로 알려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수립을 승인했다. 한편 동부에 위치한 소련의 점령 지역도 흔히 동독으로 알려진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서독이 새 헌법을 만들 준비를 하는 동안에 1948년 8월에 헤렌킴제에서 국가 상징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동독과 재통일하기 전까지는 국기를 만들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국기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움직임은 1946년 11월에 동독의 독일 통일사회당(SED, 통사당)이 헌법을 제안하면서 가속화되었는데 여기서 독일 공화국을 나타내는 색상인 흑적금 삼색을 국기로 하기로 결정했다. 서독의 새로운 국기에 대한 많은 제안이 올라왔지만 최종 경선에는 흑적금 삼색을 사용한 서로 다른 2가지 디자인으로 좁혀졌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사민당)은 옛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를 재도입하자고 주장했고 반대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DU, 기민련/CSU, 기사련) 및 독일당 등 보수주의 정당은 의회 위원회(Parlamentarischer Rat)의 위원이자 훗날 독일의 총리를 역임한 콘라트 아데나워의 조언자였던 어니스트 비르머가 제안한 디자인을 지지했다. 비르머의 제안은 그의 형제이자 7·20 음모에 관여했던 요제프 비르머가 1944년에 만든 “저항기” 디자인의 변형으로, 흑적금 삼색의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있는 기였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새로운 서독 정부 사이의 연속성을 주창하기 위해 최종적으로는 삼색기가 결정되었다. 1949년 5월 23일에 독일(서독)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흑적금 삼색기가 서독의 공식적인 국기가 되었다. 1955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르 보호령이 서독에 합병할지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자르는 1947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분리된 이후에 파란색-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진 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르가 서독의 일부가 되면서 1956년 7월 9일에 흑적금 삼색기에 이날 새로 만들어진 자를란트주의 문장이 그려진 기를 주기로 채택했다. 이 기는 1957년 1월 1일에 서독의 자를란트주로 편입되면서 공식적인 주기가 되었다. 1946년에는 소련 점령 지역에서 흑적금 삼색기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1948년에 열린 제2차 독일 인민 대표 회의에서 옛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2년 동안 소련에서 운영하던 독일의 반나치즘 조직인 자유 독일 국민위원회가 사용했던 색을 기반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1949년에는 동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가 흑적금 삼색기를 1949년 10월 7일에 창설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국기로 제안했고 동독 헌법 또한 이를 채택했다.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서독과 동독의 국기는 동일했다. 1959년 10월 1일에는 동독 정부가 흑적금 삼색기에 동독의 국장을 추가한 국기로 바꾸었다. 서독에서는 이러한 국기의 변화가 2개의 독일 국가를 분리시키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서독과 서베를린에서는 바뀐 동독의 국기를 보여주는 것을 “국기 분리”()라고 부르면서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간주했고 1960년대 말까지 이러한 행위를 금지시켰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서독과 동독은 동계 올림픽과 하계 올림픽에서 올림픽 독일 연합 선수단이라는 단일팀으로 참여했다. 1959년에 동독의 국기가 바뀐 이후에 어느 쪽도 상대방 국가의 국기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타협하여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흑적금 삼색기를 구성하는 빨간색 가로 줄무늬에 올림픽 상징 가운데 하나인 5개의 하얀색 고리를 덧댄 새로운 기를 사용했다. 동독과 서독은 1968년부터 갈라져 출전했으나 두 팀 모두 같은 독일 올림픽기를 사용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독과 동독이 서로 각각의 국기를 사용하였다. 1989년 ~ 현재. 1989년 11월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많은 동독 국민들은 1956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한 헝가리 국민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처형 당시의 루마니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국기에 그려져 있던 국장을 잘라냈다. 동독의 국기에서 국장을 잘라내는 광범위한 행동은 순수한 흑적금 삼색기가 민주적인 통일 독일의 상징임을 암시했다. 마침내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동독 지역이 서독에 흡수되어 소멸되면서 흑적금 삼색기는 재통일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1998년에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독재 정권 재평가 재단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옛 동독 체제의 결과를 조사하는 것에 대한 독일 연방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을 목적으로 했다. 이 단체의 로고는 옛 동독의 국기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문장을 제거한 형태를 띠고 있다. 독일 제국 시대에 사용된 옛 흑백적 삼색기는 독일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적인 군주제 국가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군주주의자, 독일의 귀족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옛 국기의 이러한 쓰임은 극우주의 진영에 가려져 존재감이 미미하다. 독일에서는 앞서 언급한 만자문, 번갯불 모양을 띤 룬 문자를 비롯한 친위대(SS) 휘장을 비롯한 나치 정권과 관련된 상징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극우주의 진영에서는 나치당이 1935년에 금지시켰던 옛 삼색기를 대신 사용하고 있다. 독일에서 출시되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비디오 게임에서는 나치당과 관련된 기가 1933년 이전의 바이마르 시대에 사용된 국기 또는 현재의 삼색기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에서는 국기와 그 외의 국가 상징의 사용 빈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대부분 상대적으로 낮았는데 이는 나치당의 국수주의 성향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국기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는 시민, 특별한 행사를 주최하는 공식 당국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바이에른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와 같은 일부 주 또는 바덴, 프랑켄과 같은 역사적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국기 대신 지역의 기를 널리 사용한다. 독일에서 개최된 2006년 FIFA 월드컵 동안에 국기의 대중적인 사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독일의 국기가 인기를 끌었을 때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처음에는 놀라움과 불안감에 뒤섞여 환영했다. 독일의 국기를 흔드는 행동과 국가적 자부심이 나치당과 관련된 과거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수십년이 넘는 공포는 대회가 끝난 이후에 독일인과 비독일인 모두에 의해 사라졌다. 많은 독일인들이 해당 대회에서 자국의 국기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기는 대회가 끝난 이후에 사라졌으며 때로는 정부의 결정으로 인해 사라졌다. 독일이 브라질에서 개최된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독일의 국기 사용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이후에는 독일의 국기 색상 표시가 정기적으로 주요 스포츠 경기 기간으로 제한되었다.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페기다), 독일을 위한 대안을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일의 국기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보여주면서 독일의 국기는 다시 일상 생활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주류 사회는 여전히 이들 색상의 사용에 조심스럽다.
1949
223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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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는 중앙유럽과 남유럽에 있는 나라로 알프스 산맥 끝부분과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서남쪽으로는 아드리아 해, 남동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북동쪽으로는 헝가리,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슬로베니아는 게르만, 라틴, 슬라브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천년 가까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주변 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슬로베니아 영토의 40% 가량은 산지나 고원 등 고지대로 국토 내륙 지방에 자리 잡고 있으며 크로아티아 등 주변 국가와 함께 발칸반도라는 삼각형 모양의 반도에 속한 국가 중의 하나이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트리글라우산이다. 인구 대다수는 공용어인 슬로베니아어를 쓰며, 그 밖 지역 공용어로 헝가리어와 이탈리아어가 있다. 슬로베니아는 유럽 연합, 유로존, 솅겐 조약,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유럽 평의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유네스코, 세계 무역 기구,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유엔 가입국이다. 역사. 서기 1000년경부터 아드리아 해 연안을 통제해온 베네치아 공화국에 저항하기 위해 주변의 크로아티아·달마티아와 함께 1102년 헝가리 왕을 군주로 받아들였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고 1919년,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예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였으나 1991년에 독립했다. 2004년 3월 29일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2004년 5월 1일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2007년 1월 1일에는 유로를 공식 통화로 지정했다. 현재는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 2008년 9월 22일에 슬로베니아는 총선에서 중도좌파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승리했다. 지리와 기후. 슬로베니아는 알프스 산맥, 판노니아 평원이 있으며, 가장 높은 산은 트리글라우산으로 높이는 2,864m이다. 일부 지역이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으나, 이 지역을 제외하면 내륙국이나 다름없다. 국토 전체의 보통 해발 고도는 해발 557m 이상이다. 거의 국가 절반 이상이 숲이다. 이 때문에 슬로베니아는 유럽 대륙에서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장 많은 숲을 보유한 국가이다. 해안가는 지중해성기후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 대륙 내부와 알프스 인근 지역에서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운 양상을 보인다. 평균 기온은 1월에 -2도, 7월에 영상 21도이다. 해안가의 평균 강수량은 1,000mm이고 알프스 인근에는 3,500mm 이상의 비가 내린다. 행정구역.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슬로베니아는 193개의 시(자치체)가 있다. 그중에서 특히 인구가 많은 11개의 시는, 특별시에 속해있다. 인구와 주민. 주민은 슬로베니아인이 89%, 남슬라브계(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 등)이 10%, 기타(헝가리인이나 이탈리아인, 체코인, 알바니아인, 독일인, 기타)는 0.5%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4년 현재 (Eurostat 추정) 1.22명으로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적다. 2005년 현재 천명당출산율은 8.8명, 천명당사망율은 9.2명이다. 언어. 언어는 슬로베니아어가 공용어이다. 제 2 언어로 영어가 보급되어 있다.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도 쓰인다. 한편, 슬로베니아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종교.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다. 약간의 개신교, 세르비아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도교, 힌두교 등도 있다. 가톨릭의 비율은 2002년 센서스에 따르면 57.8%이다. 가장 최근의 2005년 Eurobarometer Poll에 따르면 37%의 슬로베니아인이 "신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으며, 46%는 "일종의 영혼이나 생명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16%는 "영혼이나 신, 생명력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외 관계. 대한민국은 1992년 슬로베니아를 승인했으며 동년 11월에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으며 슬로베니아는 대한민국 공관을 주일본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수도인 류블라냐에 코트라사무소가 상주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년에 수교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 슬로베니아는 B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하였다. (A, B, C, D조는 대한민국, E, F, G, H조는 일본) 이 나라는 아직 한국과의 직항편을 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제 3국을 경유해서 슬로베니아에 가야 한다. 1102년에 슬로베니아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와 함께 헝가리의 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받아들였다. 예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예전엔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던 공화국의 하나였지만,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에 10일 전쟁이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분쟁과 10일 전쟁의 영향으로 세르비아와는 안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에 러시아와 수교를 했다. 미국과 유럽 연합과의 관계가 강하지만,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미국, 유럽 연합과의 관계가 매우 강하며, 2004년에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그리고 공식 통화도 이후 유로로 바꿨다. 국기. 슬로베니아의 국기는 슬로바키아의 국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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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나선
이중 나선(二重螺線)은 두 개의 서로 대칭인 나선이 같은 축 방향으로 놓여있는 모양이다. DNA가 이중 나선 구조라는 것은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처음으로 발견했다.
1960
61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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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
리니지(lineage)는 영어로 “혈통” 또는 “계보”란 뜻이다.
1967
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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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RSS()는 뉴스나 블로그 사이트에서 주로 사용하는 콘텐츠 표현 방식이다. 웹 사이트 관리자는 RSS 형식으로 웹 사이트 내용을 보여 준다. 이 정보를 받는 사람은 다른 형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RSS 리더에는 웹기반형과 설치형이 있다. 웹기반형 리더는 간단한 계정등록으로 어디에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RSS가 등장하기 전에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해당 사이트를 직접 방문하여야 했으나, RSS 관련 프로그램(혹은 서비스)을 이용하여 자동 수집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사용자는 각각의 사이트 방문 없이 최신 정보들만 골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또한 RSS는 팟캐스팅과 같은 미디어 배포의 용도로도 사용된다. RSS 2.0의 〈enclosure〉태그 내에 MP3 나 MOV 등의 미디어 파일을 첨부하여 배포하면, 팟캐스팅 클라이언트를 이용해 파일을 내려 받아 감상할 수 있다. RSS 2.0은 공식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선언되었으며, 하버드 대학교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 여러 표준. RSS는 XML 기반의 표준이며, 여러 표준들이 존재한다. 표준들은 크게 RDF (또는 RSS 1.*)과 RSS 2.* 로 나뉜다. Rss 2.0에서의 활용 예. <?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제목</title> <link>주소/</link> <description>설명 (짤막하게)</description> <item> <title>제목</title> <link>주소/글 주소</link> <description>글 내용 전체(또는 일부)</description> <pubDate>시간</pubDate> <guid>주소/글 주소</guid> </item> <item> <title>제목</title> <link>주소/글 주소</link> <description>글 내용</description> <pubDate>시간과 날짜</pubDate> <guid>주소/글 주소</guid> </item> </channel> </rss> 아톰과의 비교. RSS와 아톰 모두 모든 주요 피드 리더가 널리 지원하고 있다. 아톰보다 더 일찍 피드리더 기능이 도입되면서 RSS가 널리 이용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러나 아톰은 라이선스가 덜 제한적이고 IANA 등록 MIME 타입, XML 이름공간, 상대 URI 지원, RELAX NG 지원과 같이 RSS에 비해 몇 가지 이점이 있다. 기술적으로 아톰은 이 둘 사이에서 더 진보화된 신디케이션으로 간주된다. 아래의 표는 아톰과 동일한 RSS 요소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1991
66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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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21세기(21世紀, )는 2001년 1월 1일부터 2100년 12월 31일까지를 말하며, 제3천년기의 첫 번째 세기이기도 하다. 개요. 21세기 초기는 산업사회의 끝자락으로 세계경제와 제3세계 소비주의, 정부에 대한 불신, 테러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 등이 부상하는 시기로 대표된다. 2010년대 초 아랍의 봄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로 아랍 세계에는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빚었기도 하였다. 또한 지난 세기말에 비롯된 '디지털 혁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시기 언저리에 태어난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자라면서 세기초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반면 종교의 경우 2010년 기준으로 무종교 인구가 11억 명에 도달하면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사적인 관점에서 21세기의 근본적인 시작점을 1991년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 해는 단기 20세기의 끝으로,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이 초강대국에 등극하는 한편, 중국이 성장기에 돌입하고, 브릭스 국가들이 국제정치와 경제스펙트럼에서 균형 확대를 목표로 하던 해였기 때문이다. 디지털 통신기술이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과다사용을 비롯한 우려도 확산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인구 비중은 전세계 인구의 80%에 달하며, 2010년에는 개인용 컴퓨터를 소지한 사람이 33%, 2016년에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46%로 추산됐다. 특징. 21세기는 20세기 후반에 태동되었던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로, 인류가 일상생활에서 상시 디지털과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모바일 세상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모바일 체계가 구축된 건 2010년대부터로, 애플의 아이폰을 기점으로 촉발된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시발점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여 점차 대중화되어 갔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디지털 시장은 각 분야별로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휴대전화였던 피쳐폰은 기술적 한계로 기존의 디지털 시장 전체를 흡수하는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2000년대까지는 스마트폰 이전의 디지털 시장과 아날로그 매체가 대중들에게 사용되었으나, 2010년대에 들어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를 필두로 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며 모바일 시스템 체계가 구축, 디지털 매체의 완전한 시장 장악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디지털 시장과 아날로그 매체는 인류의 삶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인류가 스마트폰을 통해 상시 디지털 매체,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는 모바일 시대가 개막했다. 2010년대부터 시작된 모바일 서비스의 발달은 2020년대에 들어 메타버스,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 인간의 역할까지 디지털 기술이 대체되는 고도의 컴퓨터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컴퓨터과학의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교육과 일상생활 역시 발전된 모바일 문화에 맞춰 변화하였다. 특히 2020년대에 들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 현상으로, 교육계에서는 비대면 수업과 교육문화의 도입이 이루어졌으며 팬데믹이 장기화됨에 따라 하나의 교육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일상생활 역시 이전까지는 구상 단계로만 여겨졌던 재택근무와 비대면 교육, 비대면 근무 등이 코로나-19 팬데믹에 맞춰 모두 일괄 도입되었으며 이는 대면 없이도 행정적인 업무 처리가 가능할 만큼 디지털, 모바일 문화가 발전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러한 비대면 교육의 여파로, 성장중인 청소년들이 겪을 인간관계 형성의 어려움과 소통문제 등이 부작용으로 언급되며 교육계는 이에 따른 방안을 연구중에 있다. 21세기 시대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대표적인 세대는 Z세대와 알파 세대가 있다. 이들 세대 중에서도 Z세대의 후반 세대인 2000년대 중반 ~ 후반에 태어난 세대는 아날로그 매체를 포함한 스마트폰 이전 시대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세대로 분류되고 있으며, 알파 세대는 2010년대생부터 2020년대 중반생까지를 포함한다. 이 중 알파 세대의 경우 전원 21세기 도중에 출생한 세대이다. 시대상. 21세기의 첫 시대였던 2000년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디지털 매체와 아날로그 매체의 혼용기로, 스마트폰과 모바일 문화가 대중화된 2010년대 이후와는 매우 다른 시대상을 띄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점유율이 비등했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앞섰으나 여전히 아날로그 매체의 대중성도 높았었다. 아날로그 매체는 2000년대 후반까지 대중들에게 사용되었으나, 2010년대 이후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함께 인류의 삶에서 퇴장한다. 한편 디지털 매체는 빠른 발전 속도를 기록, 점점 기존의 아날로그 매체에 맞서 시장 점유율을 넓혀나갔으며 스마트폰의 대중화 이전까지 아날로그 매체와 함께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디지털 매체로는 DVD, PMP, MP3 플레이어, 전자사전, DMB, 초고속인터넷, 2G/3G, 피쳐폰, 집전화, UMPC, 디지털 카메라, USB 등이 있으며 2000년대까지 사용되었던 아날로그 매체는 필름카메라, 비디오테이프, 카세트테이프, 아날로그 캠코더, 영상 테이프, 필름영화 등이 있다. 2000년대는 1990년대 중~후반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인터넷과 상시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이며, 피쳐폰은 기술적 한계로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해 완전한 디지털화는 이루지 못했다.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었다. 스마트폰은 1992년 IBM에서 처음 개발한 이래 2002년 블랙베리 등 여러 모델이 발매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세상을 완전 디지털화시키고 모바일 문화의 진입점을 제시한 현대적 스마트폰의 기준은 2007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애플의 아이폰이다. 2010년대부터 아이폰과 삼성전자의 갤럭시가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류의 완전한 디지털화와 모바일 문화의 정착이 이루어졌다. 스마트폰은 모바일 운영체계에 탑재되어 기존의 전자시장을 전부 스마트폰 안에 포함시킨 일종의 소형 컴퓨터 기술이었으며 이로 인해 인류는 작은 휴대용 기기 하나로 모두 디지털 매체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맞게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스마트폰 대중화 이전의 디지털 시장은 몰락을 맞이하였으며 아날로그 매체 역시 시장에서 완전히 도태되었다. 2020년대는 2010년대에 대중화된 모바일 문화가 다시 한번 고도의 발전을 맞고 있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기존 모바일 문화에서 한층 더 나아가 고도의 컴퓨터과학 기술이 발달, 메타버스와 인공지능 등이 인류의 삶에 생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알파 세대의 시대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모바일 문화에 익숙한 세대는 여가를 포함 일상생활 전체를 모바일 문화와 함께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기성 세대에게 미래 공상으로 여겨지던 일들도 이들에게는 일상이자 놀이이다.
1997
499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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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철도역 목록
대한민국의 철도역 목록은 대한민국의 철도역 및 도시철도역을 정리한 목록이다.
1999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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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역
오봉역(Obong station, 五峯驛)은 경기도 의왕시 이동에 있는 남부화물기지선의 화물역이다. 근처에 있는 오봉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역 구조. 2면 20선의 구조로, 역사로부터 9개의 측선, 2개의 상부본선, 상본선, 하본선, 2개의 하부본선, 5개의 측선이 있으며 상본선과 하본선의 양쪽으로 쌍섬식 승강장이 있다. 그 외에 제1컨테이너기지에 8개선, 제2컨테이너기지에 3개선, 양회기지에 12개선, 2개의 인상선(역 구내에서 환차를 위해 쓰이는 선로), 2개의 수차선(수리 대상 열차용 선로) 등이 있다.
2000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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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트랙백()은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주요 기능 중 한 가지로서, 간단히 역방향 연결 고리를 자동적으로 생성해 주는 기능을 말한다. 즉, 이 기능을 사용하며 A포스트에서 B포스트로 정보를 보내면 B포스트에 A포스트로 연결되는 고리가 자동으로 생기는데, 이런 과정을 트랙백이라고 부른다. 트랙백 기능은 블로그 이외에 위키위키나 뉴스 사이트에서 제공하기도 한다. 트랙백은 철저한 1인 미디어를 지향하는 블로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어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자신의 블로그에 써 넣은 후 트랙백을 주고 받으면 원래의 글 아래 자신의 블로그에 쓴 해당 글로 가는 연결 고리가 붙게 된다. 표준. 트랙백 표준은 2002년 Movable Type 블로깅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식스 어파트(Six Apart)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다른 블로깅 도구들도 이를 구현해 왔다. 식스 어파트는 2006년 2월에 트랙백 프로토콜을 향상시키기 위해 워킹 그룹을 출범하였으며, IETF는 이를 표준으로 등록하였다. 단점. 일부 개인이나 회사들은 트랙백을 사용하여 스팸 링크를 넣을 수 있는 특성에 대해 지적해 왔다. 댓글 스팸과는 달리 트랙백 스팸 필터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었다. 현재의 블로그 도구들은 트랙백 스팸도 처리할 수 있지만 일부 블로거들은 트랙백 스팸 때문에 트랙백 기능을 막아 두기도 한다.
2002
333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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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약칭 베트남(, )은 동남아시아의 국가이다. 주요 도시로는 하노이, 호찌민시, 다낭, 하이퐁, 호이안, 사파, 후에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동해(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면적은 약 33만 341km2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최근 인구 통계에서는 9,649만 명으로 조사되어,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나라의 명칭인 비엣남()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하였던 옛 베트남 왕조인 남월()의 명칭을 거꾸로 쓴 것이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이며, 최대 도시는 호찌민시이다. 정부형태는 사회주의 공화제이며 공산당이 유일당이다.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으며, 이러한 영토 확장은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명칭. 베트남의 국명 비엣남(Việt Nam 越南, 월남)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월, 越, Việt)은 백월(Bách Việt, 百越)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빈끼엠의 시 삼짱찐(Sấm Trạng Trình, 讖狀程, 섬상정)이다. 이후 비엣남은 점차 베트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어, 1905년 베트남의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월남의 식민지화에 대해 나눈 대담은 《월남망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비엣남은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한국어권에서는 윁남과 베트남이라는 표기가 쓰이고 있는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는 1965년까지 비에트남과 베트남으로 불렸으나, 이 중 베트남이라는 표현이 관습상 용례로 인정되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반해 문화어에서는 이곳의 언어에 대해 윁남어란 표현을 사용한다. 역사. 선사 시대. 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가 살아왔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네시아 제도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석기 문화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베트남의 건국신화인 락롱꿘, 어우꺼 신화는 약 4,500년 전 락롱꾸언()과 어우꺼()가 결혼하여 많은 베트남 부족들의 선조가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베트남에 세워진 최초의 문명은 동선 문화이다. 동선 문화는 기원전 300년 경 청동기 문명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며 베트남 북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여러 곳을 지배하였다. 마강과 홍강 유역에서 기원전 1200년 경의 습식 벼농사와 정교하게 만든 북과 같은 청동 주물들이 발견되었다. 동선 문화의 청동 무기, 도구, 북과 같은 유물들을 만든 청동 주물 기술은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선 문화는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고, 홍방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문랑, , 文郎)을 세웠다. 기원전 257년 홍방 왕조가 무너지고 툭판 왕조가 세워졌으며, 툭판 왕조는 다시 기원전 208년 남비엣에게 멸망당하였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의 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111년부터 1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베트남은 중국 왕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쯩 자매와 바찌에우와 같은 산발적인 독립운동은 짧은 기간 성공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무력에 곧 진압되었다. 중세.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吳權)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그러나 응오 왕조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딘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베트남에서는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 호 왕조와 같은 왕조들이 그 뒤를 이었다. 호 왕조는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이어진 명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하였고, 베트남은 역사상 네 번째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근대. 1418년 농민들을 규합하여 독립 전쟁을 벌인 후 레 태조는 명나라를 축출하고 1428년 대월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후 레 왕조는 잠시 막 왕조에게 멸망하기도 하였으나 부흥 운동에 성공하여 1778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흥 운동 이후의 후 레 왕조는 사실상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두 가문인 찐 주와 응우옌 주의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었다. 1777년 격화되는 농민 항쟁을 막지 못한 후 레 왕조는 결국 멸망하고 떠이선 왕조가 세워졌다. 후 레 왕조가 멸망한 후 남부 실권자였던 응우옌 주는 떠이선 왕조를 격파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의 2대 황제 민망제가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강점하였다. 현대. 항불전쟁.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을 결성하였다. 일본의 통치는 최소 40만 명이 착취로 인하여 사망할 정도로 베트남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 제국은 동북아와 달리 동남아를 개발할 생각이 없었고 베트남의 경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이라는 자작극을 벌여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5년 베트남의 전 지역을 점령하므로써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후 시대.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자연 환경. 지리.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km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해에 연해 있으며 최대 너비는 약 650km로 이 길이는 라오스와 맞닿은 북부 국경에서 통킹 만에 이르는 거리이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 지대, 홍강 삼각주, 안남산맥, 해안 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기후. 열대 계절풍으로 5월부터 10월까지는 많은 비를 몰고 오며,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 건조기간이 된다. 북부 일부 지역은 사계절이 나타나고 습도가 90%의 비중을 차지한다. 남부 지방은 일년 내내 건조하고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중부 지방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과 가장 습한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산악 지방은 삼각주나 해안 저지대보다 대체로 기온이 낮고 비가 더 많이 온다. 정치. 옛 월맹은 1969년 호찌민이 세상을 떠난 뒤 쯔엉찐 국민의회 상임위 주석, 레주언 베트남 공산당 제1서기, 팜반동 총리 등 3인을 중심으로 집단지도 체제를 채택했다. 구 월맹은 월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월남 임시혁명정부와 함께 1여 년간의 남북통일 준비작업을 끝내고 1976년 4월 25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최고 권력기구인 492석의 남북단일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로 인구 10만 명당 1석을 기준으로 하는 배분원칙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249석, 남베트남에서 243석을 선출했다. 남북 베트남의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이 참가한 총선은 남북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전국의 노동자·농민·여성·산악부족 및 그 밖의 소수인종에서 선정한 후보자 중에서 국민의회 대표들을 선출했으며 야당후보는 없었다.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남북 베트남 단일 국민의회는 1976년 7월 역사적인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였다. 수도는 하노이로 정하는 한편 초대 주석으로 구 월맹의 마지막 주석 똔득탕을, 그리고 2명의 부주석으로는 응우옌르엉방 및 응우옌흐우토를 선출하였다. 또한 옛 월남 수도 사이공을 호찌민시로 개칭하고 국기는 종래의 월맹기였던 〈금성홍기〉(金星紅旗)를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국민의회는 통일 베트남의 새 헌법을 마련할 36명의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는 동시 새 헌법이 공포될 때까지 1959년도 월맹 헌법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입법기관으로 국민의회가 있고 각 성(省)에 각급 인민회의가 있다. 단원제이며 임기는 5년, 매년 2회 소집된다. 주석, 부주석과 간부의원 15명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인 입법기능을 행사한다. 1991년 6월 제7차 당대회에서 도이모이 건의에 중심 역할을 해온 도므어이가 총서기로 선출됐으며, 동 8월의 내각개편에서 개혁파인 보반끼엣 총리로 선출됐다. 1996년 6월의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도 ‘도이모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2001년 4월 농득마잉 서기장이 취임했다. 행정 구역. 베트남의 행정 구역은 63개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인 하노이를 포함하여 껀터, 다낭, 하이퐁, 호치민은 성과 같은 급의 직할시이다. 베트남 정부는 가끔씩 지방을 8개의 지역으로 구분짓는다. 이러한 지방 구분은 항상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대체 분류로 가능하다. 사법. 베트남 사법부의 최정점에는 상소심과 사법심사를 담당하는 최고인민법원 ()이 있다. 최고인민법원은 베트남 의회에 보고를 하는데, 의회는 사법부의 예산을 통제하고 대통령이 제안한 최고인민법원 판사 후보와 대검찰청 검사 후보를 확정한다. 대검찰청은 체포영장을 발부하는데, 때로는 소급적용을 하기도 한다. 최고인민법원 산하에, 지방법원과 군사법원, 행정, 경제, 노동법원이 있다. 지방법원은 제1심을 관할하는 법원이다. 국방부는 군사법원을 관할하는데, 일반법원과 같은 절차를 적용한다. 군 판사와 담당 직원들은 국방부와 최고인민법원이 선출하는데 감독책임은 최고인민법원에게만 있다. 헌법에는 판사와 담당 직원(행정 능력이 떨어짐)들의 독립성을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 국무부는 베트남의 사법부의 독립성이 부족하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베트남 공산당이 판사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공산당은 국가나 당의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할 만한 판결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색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향상할 목적으로, 정부는 지방법원을 법무부에서 최고인민법원으로 2002년 9월에 이관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앞서 말한 목적이 실제로 이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베트남 사법부는 또한 법조인의 부족과 초보적인 재판절차로 인하여 방해받고 있다. 사형 집행은 부패 또는 마약밀매 사건의 경우 자주 집행되고 있다. 베트남의 형법은 전통적인 유교 사상, 나폴레옹 법전 그리고 호치민 사상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일본이 베트남과 협력하여 베트남의 법제를 정비하고 법률가 양성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구축하여 지원한 사업은 현재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대외 관계. 2007년 12월 기준, 베트남은 172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미국과는 1975년 이후 계속되어 왔던 대 베트남 금수조치가 1994년 2월 해제되고, 1995년 1월 양국간에 상호연락사무소가 개설된 데 이어 동 7월 11일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또 1995년 1월 독일과 정치·경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동 4월에는 오스트리아와 4개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대한민국과는 1992년 수교했다. 수단과는 1969년 8월 26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편 유엔 등 국제기구들에 대한 외교도 활발히하여 1976년 9월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에 가입했으며 1995년 7월에는 아세안(ASEAN)의 7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군사. 베트남의 군사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국경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다. 1950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열강에 승리를 거두었고, 캄보디아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군사력을 증명하였다.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지만 국방비가 없어서 힘든 상황이다. 베트남 해군은 킬로급 잠수함 등을 운용 중이다. UAV 연구제작 프로젝트에서 5종의 UAV를 개발하였고 대량 양산에 들어갈 것이다. 경제. 베트남은 정부개발원조와 외국투자가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경제 기반이 무너져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986년 "도이 머이"라는 슬로건 하에 실용주의적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말부터, 외국인의 재산 투자를 보호하는 여러 법이 개정되었고, 1990년대에는 ASEAN 등 국제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개혁 기간동안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률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침체기가 되었다. 세계금융위기로 일시적으로 추락하였던 GDP의 성장율은 2009년 5.3%, 2010년 6%(예상)로 안정적인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의 GDP는 1446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1700달러이다. 중국의 인건비가 상승기조에 있는 점 때문에, 새로운 투자대상국으로서 근년에 주목되고 있다. 이리하여, WTO가입이 정부에 의하여 중요한 목표가 되어 2007년 1월에, 마침내 WTO에 가입하였다. NEXT11과 VISTA의 일원으로서도 손꼽히고 지금 이후부터 한층 경제의 발전이 예상되고 있다. 노동인구의 66%가 농업 등 제1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근년에는 제2차, 제3차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관광업의 신장세가 특히 현저하여, 중요한 외화획득원이 되고 있다. 베트남은 쌀, 후추, 커피의 세계 3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대한민국과의 무역도 활발하다. 베트남은 중화인민공화국, 태국 등과 더불어 미래에 매우 유망한 나라 중 하나이다. 경제사. 1975년에 공산화 통일된 베트남은 오랜 전쟁 탓에 국토는 황폐하고 공산주의 이식 실패에 따라 경제 기반이 무너져 베트남 국민들의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북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석탄·목재·해산물·차 등이었고, 석탄·철광석·인회석·크롬·주석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남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쌀·고무·새우·차 등이었다. 1980년에는 태풍으로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가 발생해 베트남 경제가 타격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계획경제 작업을 중지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 《도이 머이》를 추진하여 실행하였다. 1992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부분적인 혼합경제제도를 도입하는 실용주의 경제정책 《도이 머이》를 실행하여 중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개혁, 개방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제4차 5개년 계획 (1987년~1992년)의 골간으로 1992년까지 2,300만 톤의 식량 생산, 5년간 70%의 수출증대를 선정하는 등 경제의 개방화를 적극 추진했다. 1992년 12월 《외국인 투자법》 이 공표되었고, 1993년에는 《토지법》이 개정되어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이 인정되었다. 다만 토지의 소유권은 공적인 의미에서 계속 국가가 보유하는 것으로 하였다. 1994년에는 《파산법》 이 발효되었고, 2000년 1월에는 기업법이 발효되었다. 1996년의 베트남 공산당 제8회 대회에서는 2020년까지는 공업국으로 진입한다는 목표로, "공업화와 현대화"를 2대 전략으로 하는 정치보고를 채택하였다. 또한 1995년 ASEAN 및 AFTA 가입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APEC에 가입하였고, 2000년 7월에는 베트남-미국 무역협정에 서명하였다. 2000년 7월에는 호치민시에 최초로 〈증권거래센터〉가 개설되었으며, 2005년에 하노이로 확대 개설되었다. 2007년 1월에는 WTO에 정식으로 가입되었고, 2008년 12월에는 베트남-일본 경제연대협정(EPA)에 공식 서명을 하였다. 《도이 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 경제는 1992년 이래 연평균 8%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1995년, 1996년에도 9% 이상의 고속성장을 지속했다. 2008년의 GDP 성장률은 6.23%로 최저 성장을 기록하였고, 2009년은 5%로 하향조정하였으나,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현재는 옛날의 가난에서 크게 벗어났으며 빠르게 경제 발전을 하고 있지만 빠른 경제 발전의 후유증도 같이 겪고 있다. 2004년부터 빠르게 물가가 상승하여, 2008년에는 22.97%로 최고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베트남 동화의 평가절하 등으로 인플레이션율이 2008년 25%를 초과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하였다. 토지의 사유화 및 농지의 전용이 가능해진 이후 골프장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이 크게 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 기준 베트남의 골프장 개발 허가 수는 140여 곳에 달한다. 경작지 감소와 그에 따른 고용 감소를 우려한 베트남 정부는 2008년 이후 농지 전용 억제 정책을 펴고 있다. 산업. 베트남의 주요 산업은 2008년 GDP 기준으로 39.91%를 차지하는 제조, 건설업 즉, 2차 산업이며, 농림, 수산업의 1차 산업은 21.99%에 이른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38.10%로 높은 성장률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노동인구의 53.9%가 농림, 수산업에 종사를 하며 이들은 쌀, 고무, 사탕수수, 커피, 열대 과일 등과 새우 등의 수산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메콩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국민의 주식인 동시에 수출품목의 대종을 이루었다. 1992년 자급을 달성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을 이어 3대 쌀 생산국이다. 남부에서는 2년 7모작이 이뤄지며, 세계 2위 쌀 수출국이기도 하다. 그 외에 커피와 차, 향신료도 유명하다. 커피는 현재 브라질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생산량(99만톤, 2003년)에 달하고 있다. 대부분이 인스탄트 커피, 캔과 펫트병에 들어가는 청량음료, 제과 용도로 사용되는 값이 싼 로브스타 종(카네포라 종)인데, 레귤러 커피에 사용되는 고급품인 아라비카 종의 재배도 시작되고 있다. 또한 현지에서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아 프랑스의 방식을 따른 베트남 커피가 음용되고 있다. 베트남은 석탄, 석유를 중심으로 한 동력자원, 주석을 중심으로 한 광물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다. 북부 하롱(홍게이)에서 산출되는 석탄은 상질의 무연탄으로, 19세기말부터 홍게이탄으로서 채굴이 시작되었다. 2003년 시점의 채굴량은 1670만톤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서방 세계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석유개발을 통해 산유국이 되어 1660만톤의 원유를 생산한다. 천연가스의 채취량은 126천조 줄이다. 광물자원은, 북부 삼각주 주위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생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제4위의 주석(4000톤, 세계 점유율 1.5%, 2005년)이다. 아연, 금, 크롬, 철, 납, 인도 산출된다. 주요한 수출품목은 원유, 의류, 농수산물이다. 수출품목의 제1위는 석유로서, 2002년 시점에는 수출총액의 19.6%를 차지하였다. 쌀은 450만톤(2008년)을 수출함으로써 타이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었으나, 현재는 수출 일부 제한 조치를 하고 있다. 커피는 2008년 2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한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며, 후추는 2008년을 기준으로 115만톤을 수출하여 세계 1위의 수출국이기도 하다. 유통업. 베트남 유통업태는 특히 도시지역에서 과거 몇 년 동안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부터 현대화된 수퍼마켓과 쇼핑센터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수입상품의 취급확대를 촉진하고 있다. 1999년 2개의 대형수퍼마켓에서 2004년에는 전국적으로 85개가 넘는 현대화된 수퍼마켓이 운영되고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한국은 2008년을 기준으로 9위의 수출국이며, 5위의 수입국이자, 6위의 교역국이기도 하다. 2008년을 기준으로 투자국 순위로는 4대 투자국이며, 베트남에 투자건수는 총 9,494건이며, 총 등록액은 1,320억 달러였다. 서비스업. 2009년 말 현재 베트남의 전화 가입자수는 모두 1억3천40만여명으로 이 가운데 85%가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로 집계됐으며, 비엣텔 등 일부 선도 회사들은 매년 30% 이상의 높은 신장세를 보여왔다. 정보통신부는 2009년 8월, 8번째 서비스업체로 인도차이나 텔레콤에 대해 사업허가를 승인했고, 2010년 6월에는 VTC가 정부로부터 이통 서비스 허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베트남 이동통신 시장은 비나폰, 모비폰, 비엣텔, S-Fone 등 선발 4개업체들과 EVN텔레콤, 베트남모빌, 비라인, 인도차이나텔레콤, VTC 등 후발 5개사들 간에 치열한 고객확보 경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교통. 베트남의 현대적 교통 체계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수확한 농산물울 운송할 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 전쟁의 결과 파괴된 교통 체계를 재건하고 현대화하였다. 가장 일반적인 교통 수단은 도로 운송이며, 도시 간 이동에 일반 시외버스와 오픈 투어 버스(Open tour bus)를 이용할 수 있다. 2,654km의 단선 철도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연결이 되며 하노이와 호찌민시 간을 연결하는 철로가 중요하다. 베트남의 차량은 우측통행을 하며 2륜차가 매우 많다. 사회. 베트남은 2006년 '5대 부정부패'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교통부 고위 관리들이 외국의 자금을 지원받아 도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PMU18)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700만달러를 사적으로 유용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교통부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 베트남 교통경찰과 토지 등록 사무소, 세관 및 세무서에서도 흔히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주민. 베트남의 인구는 약 8,162만(2003년)으로, 그 90%가 베트남인이다. 그 밖에 타이인·중국인·크메르인 등이 있으며 산악지대에는 미오·랭이·몬타냐 등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베트남 정부가 공인하는 민족의 수가 54개에 이른다. 최대 민족은 킨족(京族) 또는 비엣족(越族)으로 보통 베트남인이라고 할 때 다수종족인 이 킨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킨족은 베트남 전체의 86.2%를 차지한다. 므엉족과 같은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킨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국토의 2/3를 덮고 있는 산악지대에서 발견된다. 킨족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체(政體)를 거친 북부인과 남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치, 경제적 대립의식을 갖고 있다. 각각의 소수민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참족과 같이 역사상 독립국가였다가 베트남에 흡수된 민족도 있고,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산간지역에서 생활을 하는 민족도 있다. 호아족과 크메르 크롬은 저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킨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은 몽족, 다오족, 따이족, 그리고 눙족이 있다. 1978년에서 1979년에 45만명의 중국계 소수 민족이 베트남을 떠났다. 아울러, 근래 대한민국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서 한인동포의 수도 비례적으로 급증하여 베트남 정부가 2012년 기준으로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13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다. 언어.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꾸옥 응으()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15세기 말에 한자와 비슷한 문자인 쯔놈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용은 한문에 익숙한 일부 지식인층에 국한되었고,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끊어졌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꾸옥 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자에 거부감을 표시하던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근대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나 쯔놈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여 로마자의 편의성을 인정하고, 이후 로마자를 베트남어의 새 문자로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한자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베트남은 55종에 달하는 언어의 다양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다시 6, 7개 정도의 언어 집단으로 나뉜다. 외국어로는 영어를 가장 많이 선호하며, 일부 엘리트 층들은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한다. 현재 프랑스어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 및 프랑스어의 쇠퇴 등으로 인해 거의 감소 추세에 있지만,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교육. 초등교육은 5년제의 의무교육이다. 중등교육은 전기 4년제, 후기 3년제이다. 베트남의 대학에는 국가대학(총리 직할 학교), 국립대학(지방종합대학), 전문대학(교육훈련성, 후생성, 문과정보성, 인민위원회 등의 소관), 민립 대학이 있으며, 1학기 등록금이 현재 600만동인 약 30만원 선이다. 문화. 지방의 문화차이. 중국 남부 지방과의 오랜 교류로 인하여, 베트남 문화를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재정적 책임이다. 베트남에서 교육과 자수성가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베트남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베트남이 오늘날의 영역으로 통합된 것은 근대의 일로, 그 전에는 유교 및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부와 베트남의 주 종족인 킨 족외에 인종적으로 말레이계에 속하는 참파인의 국가였던 참파가 있었던 중부문화권,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남부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북부, 중부, 남부의 차이는 언어 및 풍속,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중국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베트남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개념은 없고,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 공산주의 시대에 베트남의 문화적 삶은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와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십 년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은 차단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의 문화를 음미하고 공유하는 것이 강조되었었다. 1990년대 이래로, 베트남은 일본, 유럽, 미국의 문화와 미디어에 대폭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똥똥베트남에는 1945년 9월 2일에 미국하노이에서 설립된 국영방송국인 베트남의 소리가 있다. 이름. 베트남인의 이름은 성, 가운데 이름, 그리고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씨 제도는 중국에서 도입된 것이다. 한자가 폐지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베트남인은 소수이지만, 이름 뒤에는 한자의 의미가 숨어 있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문학. 18세기의 작가 응우옌 주에 의해 저술된 대서사시 쭈엔 끼에우는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6.8조의 연서체로 분량은 총 3,254행에 달한다. 특히 이 작품은 쯔놈으로 쓰여진 자료중의 최대의 것으로 베트남의 국민문학으로 불린다. 의상. 베트남의 민속 의상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 자이이다. 아오 자이는 현재에는 명절이나 결혼 등 행사, 일상의상 등으로 입는다. 흰색 아오 자이는 베트남 전역에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고 학생 이외에는 다양한 색상의 원단으로 아오 자이를 만들어 입는다. 예전에는 성별 구분 없이 아오 자이를 입었으나 현재에는 여성용 의복으로 한정된다. 단, 전통 문화 행사에서는 남성이 입는 경우도 있다. 요리. 주 요리의 재료는 대개 쌀과 간장, 생선 소스 등이다. 대체적으로 음식의 맛은 달거나 맵거나 시거나 감칠맛이 나며 향채 풀로 인한 민트향과 바질향이 나기도 한다. 유명한 음식은 베트남 쌀국수이다. 고수를 넣어 먹기도 한다 음악. 베트남의 음악은 세 지역, 북부, 중부, 남부 지방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북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베트남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음악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엄격한 형식을 가진다. 베트남의 전통 음악은 몽골의 침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경극 극단을 붙잡아 두었다. 중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우울한 멜로디 등 참파 문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남부 지역의 음악에서는 자유방임적인 삶의 태도가 묻어난다. 베트남의 전통 현악기인 단 짜인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현은 철제이고, 각각의 V자 모양으로 된 다리에 의해 지지되어 있다. 종교.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극히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생활.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개인 별 소득 차가 크지 않다. 남녀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보통 자녀 수가 많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급속한 이농 현상).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고 여성 노동자의 고용을 장려하고 있다(소득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가사 노동을 부부가 분담하며 유교 전통이 드러난다(장손을 중시하고 아들에게 유산 등을 상속하는 행위). 연애 결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 공휴일. 베트남에는 1월 말~2월 초에 뗏이라 해서 최장 7일 간의 연휴가 있으며 음력 공휴일은 음력 3월 10일에 있는 훙왕 기일 하나뿐이고 1년의 마지막 공휴일은 9월 2일 독립기념일이다. 즉, 10월부터 12월까지 공휴일이 없는 셈이다.
2004
106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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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
포세이돈(, )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지진·돌풍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넵투누스()에 해당한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 태어났으며, 제우스 및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돌고래, 물고기, 말, 소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주로 트리아이나를 들고 물고기나 돌고래 떼와 함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며 파도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미가 급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툭하면 다른 신들이나 인간들과 다투었다. 아내는 가이아, 데메테르, 암피트리테이며 자식애가 강해서 영웅들과 갈등이 많은 신으로 유명하다. 특히, 제우스의 아들과 많은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자주 싸우면서 숙부를 언제나 남편으로 삼고 싶었던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구애를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였다. 아내와 자식애가 유독 엄청나게 많은 신으로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신화. 탄생. 포세이돈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어느 날 불길한 예언을 들었다.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 자신도 아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이었다.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크로노스는 아내인 레아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족족 삼켜버렸다. 그중에는 포세이돈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탄족과의 싸움. 자식을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그의 어머니 레아는 한 명이라도 구하고자 여섯 번째 아이인 제우스를 출산할 때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리고 진짜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에게 맡겼다. 그렇게 제우스는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제우스는 나중에 장성해서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삼킨 형제들과 누이들을 되찾고자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레아에게서 받은 구토제를 마신 크로노스는 예전에 삼긴 모든 자식과 돌을 토해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 그들이었다.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인 퀴클롭스 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형제의 도움까지 받은 올림포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어 티탄 신들을 대지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봉인하였다. 포세이돈의 여자와 부성애. 포세이돈은 자신의 형제인 제우스와 맞먹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였는데, 아내는 무려 셋을 두었다. 첫 번째 아내는 자신의 할머니인 가이아였고 두 번째 아내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가 똑같이 티탄족과 싸우면서 그렇게 아내로 취한 데메테르였고 세 번째 아내는 트리톤을 낳은 돌고래자리의 주인인 암피트리테였다.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여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들을 낳았는데, 포세이돈과 관련하여 유명한 여자들은 아테나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동침한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 아테나와 아름다웠지만 아테나에 의해서 참혹하게 변한 메두사 등이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자식들이 영웅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 영웅들에게 해일과 지진을 일으켜서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오디세우스가 있다. 포세이돈은 아내와 자식애가 누구보다 강한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까닭이 자녀들이 못생기고 추하다고 질타를 받을까봐 우려를 해서 그런 것이라고 전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와 맞먹을정도로 여성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남성신으로 묘사된다. 부성애. 자식들이 제우스에 비해서 흉측하고 항상 괴물들만 태어나자, 불안해진 포세이돈은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고자 결심하였다. 어느 날 유명한 안드로메다 공주의 어머니인 카시오페이아 왕비가 포세이돈의 아내와 자식들이 안드로메다 공주에 비해서 별볼일없다고 세 치 혀를 내밀면서 자신과 딸자랑을 하자 몹시 기분이 나빠진 포세이돈이 그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끔찍한 바다괴물한테 시집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결국에 어머니의 어리석음에 딸만 애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는데, 메두사를 처리하고 온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해내자, 그녀의 부모를 별자리로 만들었으나 거꾸로 매달아서 형벌을 줬다고 한다. 포세이돈은 페르세우스한테 매우 안 좋은 감정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유명한 일대기로 그가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무사히 치르고 외딴섬에 쉬러 잠시 배를 섬에 안착시키고 이상한 동굴속에 음식들이 가득한 걸 보고 가져가고자 하였지만 그곳에는 포세이돈의 아들인 폴리페모스가 있었다. 신탁에서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적이 될 암시를 하였고 신탁의 예상대로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하자 엄청나게 분노하여 해일을 일으켜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아주 심하게 늦추기도 하여서 오디세우스를 지지하던 올림포스 신들한테 있어서는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한편,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아들인 안타이오스를 죽이자 제우스와 헤라클레스한테 몹시 안 좋은 감정으로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한테는 소중한 딸이자 바다의 여신이기도 한 식탐의 여왕인 카리브디스의 목숨을 구제를 해줬던 제우스 못지않은 어쩌면 제우스보다 뛰어난 부성애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에 남겨졌다. 아테나와 힘겨루기. 아테네 시. 포세이돈과 아테나는 하나의 도시를 놓고 겨룬 적이 있다. 심판은 그 도시의 주민들이 결정하기로 하고 겨루는 내용은 주민들에게 얼마나 더 필요한 물건을 선물로 주느냐였는데 포세이돈은 말(馬)을 너무나 좋아하는 신답게 여기에서도 말을 꺼냈다.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꺼냈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올리브가 말보다 훨씬 쓸모있다고 판단하여 아테나의 승리로 판정해줬다. 이 도시는 아테나에게 봉헌되었고 도시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라 불리게 되었다. 메두사. 포세이돈은 인간인 메두사와 서로 연인이었는데 아테네의 신전까지 메두사를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눴다. 이에 분노한 아테나는 메두사를 흉칙한 괴물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테나는 페르세우스를 이용하여 메두사를 죽여버린다. 이에 대해 포세이돈은 메두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것도 있지만 아테나와 페르세우스한테 심한 악감정이 있었던걸로 보인다.
2005
72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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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피디아
누피디아()는 월드 와이드 웹을 기반으로 하고, 전문가의 검증을 통해 문서가 작성되는 자유 콘텐츠 백과사전이었다. 2000년 3월에 시작되어 2003년 9월까지 운영되었고, 현재 위키를 기반으로 하는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위키백과와는 달리, 누피디아는 위키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대신 광범위한 규모의 동료평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특징이며, 다른 전문적인 백과사전에 필적하는 수준의 문서를 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누피디아는 전문가들의 자유 콘텐츠 지원을 통해 운영되었다. CNET은 2008년 6월, 누피디아를 현존하지 않는 웹사이트 중 인터넷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위키백과보다도 훨씬 뛰어난 웹사이트라고 했다. 역사. HTML에 기반했던 누피디아 로고
2006
3309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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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마 천(, 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다. 산시 성 용문(龍門)(현재 위남시 한청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 생애. 학문. 주나라의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태사령.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태초력.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릉 변호와 궁형.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이릉을 질투한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사실 이는 한 무제가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게 아니라 이광리가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이광리의 여동생이 한 무제의 후궁이었다. 중서령.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무제의 신임을 얻는 과정에서 사마천에게는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이후 이광리는 무제를 폐하고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무제의 서자인 창읍왕 유박을 천자에 제위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무제에게 진압당했으며 이 때문에 무제가 이광리의 구족을 멸했다. 단순히 이런 일 때문에 무제는 사마천을 위로하고 다시 중용했다. 업적. 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2007
7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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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
2008
3302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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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 )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로서 저자는 일반적으로 일리아스의 저자인 호메로스로 전해지고 있다. 시의 주제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귀향 모험담이다. 때문에 서양 문학사에서는 모험담의 원형으로 주목된다.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시는 총 24편으로 나뉘며, 6각운(Hexametre)로 작곡되었다. 줄거리. 제1권. 트로이가 멸망한 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나, 이타케 군주인 오디세우스는 바다 위를 떠다니며 아직도 귀국 허가가 없어 칼립소의 섬에 억류당한 채이다. 여러 신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제우스의 명령으로 헤르메스를 님프 칼립소에게로 보내어 그를 놓아 줄 것을 허락하는 한편, 고향 이타케 섬으로 아테나 여신이 몸소 찾아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부친의 행방을 찾으러 그리스 본토로 갈 것을 권고한다. 그 이타케 섬, 그의 성에서는 주인이 오랫동안 행방 불명된 동안에 이웃 여러 섬과 이타케에서 구혼자들이 몰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며 그 아들의 나이 어림을 기회로 매일같이 향연을 계속해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그 용사의 이야기를 해 다오. 뮤즈 여신이여. 지모(智謀)가 뛰어나며, 트로이의 거룩한 성시(城市)를 함락시킨 뒤, 참으로 숱한 섬과 나라들을 방황해 온 그 사나이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명을 건지고, 동료들의 귀국 길도 열어 놓으려 애쓰는 동안 숱한 종족이 살고 있는 나라들과 그 기질들에 맞서 분별 있게 행동하고, 해상(海上)에서 무수한 고뇌를 가슴 깊이 되씹기도 여러 번이 있었지. 허나, 무척이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부하들을 구원하지는 못했었다. 어쩔 수 없는 자업 자득이었으니, 그들은 신의 노여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이라,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태양신의 소유물인 소를 마구 잡아먹고 있었으니, 태양신이 그들로부터 귀국의 날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한 내력을, 어느 대목부터라도 좋으니 제우스의 따님이신 뮤즈 여신이여, 우리한테도 이야기해 다오. 다른 대장들로서 준엄한 죽음의 운명을 벗어난 용사들은 이미 모두 다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전쟁에서도, 험한 바닷길에서도 운수 좋게 벗어나서, 그런데 오디세우스만은, 고국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도, 여신들 사이에서도 세력 있는 님프 칼립소가, 주위에 텅빈 동굴 속에서 그와 결혼하기를 갈망하여 붙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세월이 흘러, 여러 신들이 정해 놓은 이타케 섬으로 돌아갈 그의 귀국 날이 돌아왔으나, 그 때에도 아직 온갖 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지, 다시 관의 길이 시작되었다. 즉 다른 신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으나, 포세이돈은 아직도 노여움을 풀지 못해 신이나 다름없는 오디세우스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이즈음 포세이돈은, 먼 곳에 살고 있는 아이티옵스 족들에게로 떠나고 없었다. 이 아이티옵스(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맨 끝에 살고 있었다.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은 해가 저무는 서쪽 끝에, 또 다른 한쪽은 해가 솟는 동쪽 끝에. 그 나라로, 황소와 새끼양의 제물을 바치는 제사에 참여하려고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세이돈이 잔치에 앉아서 즐거워하는 동안, 다른 신들은 올림푸스에 있는 제우스 대신(大神)의 궁전에 모여 있었는데, 인간들과 신들의 어버이 신인 제우스가 맨 먼저 좌중에 의논의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슴 속에 용맹했던 아이기스토스가 떠올랐으므로 (그를 아가멤논의 아들이며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친 오레스테스가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불사의 신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허 참, 정말 무슨 까닭으로 인간들은 우리 신들한테 죄를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재앙이란 재앙은 모두 우리한테서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들의 분수를 벗어난 행동 때문에 타고난 운명보다도 더한 쓰라린 꼴을 당하는 것을. 이번 일만 하더라도, 아이기스토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정실(正室)인 클뤼타임네스트레와 밀통해서는, 아가멤논이 트로이에서 귀국하자 살해하기에 이르렀지. 그것도 이내 자신의 파멸을 부르는 것인 줄 알면서도 말이지, 우리가 미리 저 훌륭한 파수꾼, 아르고스의 살해자인 헤르메스를 사절로 보내어 경계하라고 했는데도 말이야. 아가멤논을 살해하면 안 된다, 또 그 아내를 탐내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도. 왜냐 하면 그런 짓을 하면, 곧장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의해 복수를 받을 것은 뻔한 일이니까. 지금은 나이가 어리고 타국에 가 있지만, 얼마 뒤면 어른이 되어 제 나라가 그리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헤르메스를 시켜 말했는데도, 내가 애써 잘 하라고 걱정해서 말해 주었는데도, 아이기스토스의 얼빠진 마음을 설득하지는 못했던 게야. 그래서 그는 이제 만사를 오직 한 번의 행동으로 앙갚음 당하고 만 셈이란 말이지." (후략) 제2권. 텔레마코스는 다음 날 아침 시민회의를 열어 구혼자들이 이타케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구혼자들의 두목 노릇을 하는 안티노오스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텔레마코스는 또한 이타케 주민들에게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확인을 위한 여행에 필요로 하는 배 한 척을 마련해 주기를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실망한 텔레마코스에게 아테나가 오디세우스의 옛 친구인 멘테스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행에 필요로 하는 배와 식량 등을 마련해 주리라 약속한다. 저녁이 되어 그는 아테나가 변신한 멘토르와 함께 어머니 페넬로페 몰래 스파르타로 떠난다. 제3권. 필로스에 도착하여 텔레마코스는 해안에서 네스토르를 만난다.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에게 트로이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건네준 뒤, 오디세우스의 안부는 스파르타의 군주 메넬라오스에게 알아보라고 텔레마코스에게 조언한다. 제4권. 메넬라오스의 성에서 텔레마코스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환영을 받는다. 헬레네는 텔레마코스에서 겉모습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임을 알아차린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오디세우스의 활약을 높이 칭찬한다. 다음날 아침 메넬라오스는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 방문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집트의 바다신 프로테우스에게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 섬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준다. 한편 이타케에서는 안티노오스와 구혼자들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암살할 음모를 꾸민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의 전령으로부터 이 음모를 전해 듣고는 구원해 줄 것을 아테나에게 기도한다. 제5권. 오디세우스의 장래에 대해 신들이 회의한 끝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칼립소의 섬으로 보낼것으로 결정했다. 오디세우스를 남편으로 삼기 위하여 수많은 구혼을 오디세우스에게 하는 칼립소에게 헤르메스는 오디세우스를 귀향시키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한다. 칼립소는 엄한 명령에 복종을 하여 오디세우스에게 귀향 채비를 갖추라고 하며 도끼를 주었다. 얼마 후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만든 뗏목을 타고 귀향 길에 오르지만, 그를 저주하는 포세이돈이 일으킨 풍랑에 휩쓸려 온갖 죽을 고생을 한 끝에 바다의 요정 로이코테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전설적인 섬 파이아케스에 이른다. 허기와 피로로 기진 맥진한 오디세우스는 해안에서 숲덩굴을 찾아 몸을 가린 후 풀숲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제6권. 알키노오스가 지배하는 파이아케스족의 섬으로 풍랑에서 목숨을 건진 후 오디세우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아테나는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아의 꿈에 나타나 날이 밝으면 시녀들을 거느리고 해변으로 나가 밀린 빨래를 하라고 충고한다. 여신의 뜻대로 공주는 바로 오디세우스가 잠을 자고 있는 해변에 이르러 빨래를 마친 후 시녀들과 공놀이를 했는데, 공이 잠자는 오디세우스에게 떨어져 그가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다른 처녀들은 발가벗은 낯선 남자를 보자 모두 달아나지만 나우시카아 공주는 그대로 대면하여 이야기를 듣는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처한 딱한 상황을 공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한다. 공주는 오디세우스가 평범한 남자가 아님을 직감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내어 주고 길을 알려 준 후 먼저 가라고 말한다. 제7권. 나우시카아를 뒤따라 그녀의 아버지의 궁전에 다다른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안개에 쌓여 궁전에 스며들어 알키노오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왕실에 모여 있던 여러 신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보고 어수선 해 하는 틈을 타 오디세우스는 왕비 아레테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도와줄 것을 청한다. 알키노오스는 오디세우스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환영을 한다. 아레테는 오디세우스가 입고 있는 옷을 눈여겨 보고는 어디서 옷을 얻었는가 묻자, 오디세우스 나우시카아를 해변에서 만난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밤이 늦어 모두들 잠자리를 찾는다.
2010
700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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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그리스 문학은 초창기부터 동로마 제국 시절까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문학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졸기 그리스 초기 미케네 시대에 쓰인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들 수 있다. 이 두 서사시와 《호메로스 찬가》, 헤시오도스의 두 시집 《신통기》와 《일과 날》은 고전기부터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까지를 관통하는 그리스 문예 전통의 중요한 기초를 이룬다. 서정시인 사포, 알카이오스, 핀다로스는 초창기 그리스 시 전통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작품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그리스 비극작가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에 관하여 남긴 비극, 특히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로 유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양식의 경계를 확장한 희곡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 희극’ 양식으로 작품을 쓴 반면, 이후의 극작가 메난드로스는 ‘신 희극’의 선구자였다. 기원전 5세기를 살았던 사학자,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자신들의 생애와 태어나기 이전의 사건들을 다룬 역사책을 저술하였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여러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대화편을 남긴 한편,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수많은 논문을 남겼다. 후대의 주요 작가로는 아르고나우타이의 항해기를 다룬 서사시인 《아르고나우티카》를 쓴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수학의 새 지평을 연 논문을 저술한 아르키메데스, 주로 전기와 수필을 남긴 플루타르코스가 있다. 기원후 2세기의 작가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는 주로 풍자 작품을 쓴 그리스화된 시리아인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이후의 그리스 문학과 더불어 서구 문학에 있어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많은 고대 로마 작가들은 그리스의 선학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르네상스 이후로도 단테 알리기에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유럽의 여러 작가들은 고전적 주제와 동기에 있어 많은 영감을 얻었다. 고졸기 그리스 문학. 호메로스 서사시. 그리스 문학의 시발점에는 호메로스의 기념비적인 두 작품,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자리잡고 있다. 호메로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불명이다. 일리아스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 말미의 10일간을 다루는 담화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리스 영웅의 이상을 구체화한 아킬레우스가 서있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전사 중 하나였던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10년간의 전쟁 이후, 그는 또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을 아내와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항해하는데 쓰게된다. 페넬로페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지며, 호메로스는 그녀를 서약, 겸양, 순결과 오디세우스와의 결혼동안 보인 존경을 바탕으로 그녀를 이상적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10년간의 항해에서 오디세우스는 동료들 모두와 배를 잃고 거지로 가장하여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작품 모두 고대의 전설을 기초로 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말해진다. 호메로스의 언어는 이오니아 방언을 기초로 하여 아에올리스와 아티카의 방언이 조금 섞인 고어체이다. 아티카 방언이 섞인 이유는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의 호메로스 서사시 판본 때문이다. 서사시의 운문은 6보격이다. 헤시오도스 시. 고졸기의 다른 위대한 시인은 바로 헤시오도스이다. 호메로스와 다르게 헤시오도스는 자기 자신을 시 속에서 언급한다. 하지만 그밖의 어떤 자료도 그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는 중앙 그리스의 보이오티아 주민이였고, 기원전 700년 경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헤시오도스의 두 장편인 《일과 날》과 《신통기》이다. 일과 날은 그가 잘 알고있던, 가난에 고통받는 시골 생활의 충실한 묘사이다. 이 시는 또한 농부들을 위한 규칙들을 설명하고있다. 신통기는 창조와 신에 관한 체계적인 담화이다. 이 시는 생생하게 먼 옛날 황금기부터 시작한 인류사를 묘사하고있다. 고졸기 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작품은 고전 전반에 걸쳐 찬사를 받고있으며 고대 그리스 신화의 창립자적인 글로 많은 고대 독자들에게 읽혔다. 호메로스는 영웅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말했으며, 헤시오도스는 신화 창조 담화와 동시대 일상의 현실적인 면을 포괄했다. 호메로스는 이오니아에서, 헤시오도스는 보이오티아현에서 유행했다. 보이오티아의 시가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호메로스의 시와 달랐던 이유는 보이오티아의 거친 자연환경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낭만이나 수사(파토스)보다 농업, 역법, 점괘 등 당시 삶을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더 가깝게 다가왔던 것이다. 고전기 그리스 문학. 시. 서정시라는 말은 리라(λύρα)라는 악기와 함께 합창단이나 개인이 부른 곡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그 어원과는 달리 여기서 말하는 서정시는 4개의 장르로 나눠지는데 그 중 2개는 키타라가 아닌 플루트가 반주되는 장르이다. 이 두 장르는 만가와 단장격 시이다. 두 장르 모두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였다. 만가는 만가 대구법로 쓰였고 약강격 시는 약강 삼보격으로 쓰였다. 첫 서정시인은 기원전 7세기경의 중요한 약강격 시인인 파로스의 아르킬로코스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의 고전시인의 경우처럼 조각들로로만 남아있다. 몇몇 단편들은 그가 매우 험난한 인생을 산 것을 전해준다. 많은 서정시들은 아이올리스 방언으로 쓰여졌다. 각 서정시마다 매우 다양한 시 보격이 사용되었다. 서정시인들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9명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린다. 그중에서 레스보스의 사포 (기원전 630년 경 - 기원전 570년 경)은 가장 널리 찬송되는 시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그녀의 시는 호메로스의 시만큼의 존경을 받았다. 그중 “아프로디테의 송가”만이 현대에까지 원형 그대로의 완결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포와 더불어 그녀의 동시대인인 레스보스의 알카에우스 역시 서정시 만가로 유명하다. 알크만이 쓴 시는 듣기 불쾌하다고 여겨진 도리아 방언으로 쓰였음에도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후대의 시인인 테베의 핀다로스는 제창 서정시로 유명하다. 희곡.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희곡은 아테나이 출신의 극작가들이 썼으며 오로지 아티카 방언만이 사용되었다. 합창공연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통이었다. 아테나이인은 테스피스라는 이름의 남자를 합창단장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서 연기자를 첫번째로 도입한 희곡의 창시자로 여긴다. 훗날 극작가들은 스토리텔링을 더 자유롭게 하고자 연기자의 수를 3명으로 늘렸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따른 아테나이의 깨어난 국가정신은 과거의 영웅적 전설적 주제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비극작품에서 표현되었다. 완전히 남아있는 모든 그리스 비극은 대체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으로 추정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레수스」를 쓴 작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퀼로스의 아들인 에우포리온의 작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가 썼다고 여겨지는 남아있는 비극은 일곱 작품이 있다. 이 희곡들 중 세 작품,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코이포로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우메니데스)》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으로 묶인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총 일곱 작품이 현존하는데, 그중 가장 호평받은 작품에는 오이디푸스와 그의 자식들의 이야기를 다룬 테바이 3부작이 있다. 테바이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 구성된다. 이 희곡들은 보통 “3부작”으로 불리지만 순차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내용적으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초기 활동시기인 기원전 441년 작성되어 연대상으로는 처음 쓰였다. 셋 중 가장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은 그의 활동시기 중반부인 기원전 429년경 쓰였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내용상으로 2번째이나 사실은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작품이며 소포클레스 사후, 기원전 401년에야 공연되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희곡은 모두 열아홉 작품이다. 그중 잘 알려진 희곡에는 메데아, 히폴뤼투스와 바카애가 있다. 레수스는 가끔씩 에우리피데스의 아들의 작품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사후 복제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문학의 경계선을 늘렸으며 그의 작품 내의 많은 요소들은 비극적이라기보다 희극적이다. 그의 작품인 알케스티스를 예로 들자면, 이 작품은 문제극으로 분류되며 희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점 등을 들어 진정한 비극보다는 희비극으로 특징을 더 갖고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역사. 고전기에 활동한 유명한 두 역사가는 바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이다. 헤로도토스는 흔히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저서 《역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문 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투키디데스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사도행전의 저술가들과 비잔티움의 역사가 프로코피오스같은 후대 작가들과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의 세번째 역사가, 아테네의 크세노폰은 투퀴디데스가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기원전 411년을 시작점으로 하는 역사서, 《헬레니카》를 저술했으며, 기원전 362년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크세노폰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나바시스》를 들 수 있는데, 이 세밀한 작품은 키루스 2세가 형을 황좌에서 끌어내리려는 내전에서 키루스 2세를 도와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했던 본인의 1차사료를 바탕으로 쓰였다. 철학.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많은 철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에 살았다. 그리츠 초기의 철학자들 중 밀레토스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들을 묶어 "밀레토스 철학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철학자들의 글은 킬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가 보존한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조각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 철학자 사모스의 피타고라스의 삶에 관해서는 매우 적은 것만이 알려졌으며 현재까지 그가 쓴 글 중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그의 제자 아크라가스의 엠페도클레스의 인상적인 시 전집이 남아있다. 에페수스의 헤라클리토스와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의 많은 단편 조각들 역시 남아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그리스어 문학. 이 시대는 테오클리토스가 시작한 <목가>라는 전원생활을 묘사한 짧은 시형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문학 양식은 탄생하지 않았고 전시대의 문학 양식을 연구 모방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의고(擬古)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특색은 시가 비근한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성과 세부적 표현기교가 뛰어나다는 점에 있다. 산문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이 다수 출현하고 있으나 문체의 면에서는 한때의 풍부한 맛이나 건강한 맛은 없으며 고르기아스(그리스 변론가, 기원전 483-기원전 376)의 형식을 추종하는 관능적(官能的)인 것으로 과장이 많은 아시아니즘에서 얼마간 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제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의 동방 정벌에서 비롯되는 헬레니즘 시대는 아프리카·소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계 제국시대였다. 문화의 중심도 아테네보다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안티오크 등으로 옮겨져 그리스 문화는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화했다. 문학의 무대도 국제적 성격을 띠어 세계 시민적 일상생활에서 생겨난 보편적 감정이 서술되기에 이른다. 종래의 그리스 문화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를 낳은 민족 통일의식에 바탕을 두고, 폴리스(도시국가)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에 비해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보편화라는 헬레니즘의 적극적인 면은 그와 같은 창조의 기반을 잃고 세계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표면상 그리스적인 것이긴 하나, 전 시대의 그리스 문학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전 시대 문학의 모방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학이 다음 시대의 그리스 문학 및 로마 문학 형성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 컸던 것은 절대적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고전기 그리스 문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등 각 지역은 도서관이 건립되어 방대한 양의 고전작가 작품들이 수집, 보존되었다. 이와 병행해서 이들 작품의 사본을 분류 교정 및 진본 여부를 구별하는 문헌학이 발달했다. 또한 아폴로도로스(아테네의 문법가, 기원전 2세기?)의 신화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옛 문물을 고증하는 학문도 생겨났다. 이들 학문은 모두 당시의 문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현학적(衒學的) 냄새를 덧붙이기조차 했다. 칼리마코스의 <아이티아>나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가>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서사시는 자연과학 등 본래의 서사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재를 취급한 것이 많이 출현했는데 아라토스(Aratos)의 <파이노메나(Phainomena)> 등이 바로 그것이다. 비극에서는 별로 취할 점이 없는 것에 반해 희극에서는 이 시대에 '신희극'이라 불리는 단계에 접어들어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아티카의 '고희극'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풍속희극'이 완성되었다. 필레몬, 디피로스(기원전 340?-기원전 289?), 메난드로스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당시의 과학적 지리학의 발달과 병행해서 헤카타이오스(그리스의 역사가, 기원전 550?-기원전 475?) 이래의 지지(地誌)의 전통은 이 시대에도 계승되어 스큐락스 및 스큐무노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세계 여행기(世界旅行記)·항해기(航海記) 등이 저술되었다. 역사 서술은 티마이오스(기원전 356?-기원전 260?)의 <시칠리아사(史)>에 의해 대표되는 고증 취미에서 무비판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나열한 것이나, 두리스(기원전 340?-기원전 280?)의 <사모스섬 연대기>, 그리고 퓨라르코스와 같이 역사적 진실보다는 극적(劇的)인 효과를 노린 것 등 비과학적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히에로니무스나 폴리비오스(기원전 201?-기원전 120?)와 같은 뛰어난 역사가도 있었다. 특히 폴리비오스는 로마를 이 시대의 역사의 중심으로 잡고 세계적 시야에 서서 비판적·과학적 역사를 서술하여 그리스·로마를 가릴 것 없이 후세 사가(史家)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가 헬레니즘 문학의 최전성기였으며 그 후 시들기 시작하여 기원전 30년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최대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에게 함락당하는 것과 함께 헬레니즘 시대는 끝이 났다. 로마 시대의 고대 그리스어 문학. 철학. 에픽테토스 (55년 - 135년경)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철학자이다. 그의 강의는 제자 아리안에 의해 '강연'과 '엔케이디온'으로 정리되었다.
2012
10645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2012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 아르피눔에서 태어나 기원전 43년 12월 7일(율리우스력) 포르미아에서 사망한 로마의 정치인, 변호사이자 라틴어 작가이다. 이탈리아 유산 계급 출신의 로마 시민이던 키케로는 귀족 계층에 속하지는 않았는데, 귀족들은 원칙적으로 그에게 주요 정치적 역할을 주지 않고자 했다. 동시대인 폼페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는 달리 키케로는 군인 경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수사학과 법학을 건실히 다지고 나서 그는 변호사로서의 소질을 충실히 발휘하여 기원전 63년에는 최고 행정직, 집정관이 되어 출세하는데 성공했다. 야망가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위기의 공화정에서 키케로는 세 치 혀로 카틸리나 음모를 막았는데, 이 연설이 바로 카틸리나 반박문이다. 허나 본인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성공은 기원전 58년 음모가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망명길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57년 로마로 돌아온 키케로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주름잡은 정계에서 더이상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발발한 내전 와중, 키케로는 망설이며 폼페이파에 합류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의 권력을 달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는 안토니우스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게 된다. 안토니우스를 향한 키케로의 거침없는 반대는 결국 기원전 43년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훌륭한 연설가이던 키케로는 고전 라틴어 표현의 전형으로 평가받은 풍부한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이 중 대부분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키케로는 정계에서 활동을 멈춘 시기 동안 수사학 저서 집필과 희랍 철학 이론의 라틴어 수용에 헌신했다. 중세 동안 부분적으로 잊혀졌던 키케로의 작품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고전 시기에 다시 조명받았다. 허나 19세기와 20세기 전반 동안, 키케로는 그저 희랍 철학자들을 집대성한 인물로만 평가받았다. 피에르 그리말은 더 긍정적으로 키케로가 희랍 철학의 일부를 우리에게 전해준 귀중한 중개인이었다고 평가한다. 정치 생활에서의 평가는 보통 박하다. 난투장의 중심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으로, 로마로 온 출세한 이탈리아인으로, 다재다능한 기회주의자로 평가받으며, 테오도어 몸젠과 제롬 카르코피노에 따르면 폼페이의, 이후 카이사르의 "잠복한 군주정의 수동적인 도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생애. 학문.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라티움 지역 아르피눔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들의 출세를 바라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수사학, 웅변술을 스카이볼라 밑에서 익히면서 전설적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세계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철학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이드로스에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까지 군복무를 했다. 기원전 88년에서 82년에 걸쳐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당시의 원로원의 후원을 받던 술라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동안 키케로는 아카데미학파의 필론 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게 된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79년에서 77년 사이에 아테네,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고 로도스섬을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정치.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선출된다. 5년 뒤 안찰관에 선출되어 재임 기간 동안 유명한 베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쓴다. 43세의 나이로 (기원전 63년) 이른바 지방 신출내기("homo novus")로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시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고 원로원 최종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선포한 뒤, 일당 5명을 붙잡으면서 로마를 위기에서 건졌지만, 이때 재판도 없이 혐의자를 처형한 문제로 나중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 원로원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는 도구로 그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하게 되자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키케로는 이들 실권자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더군다나 키케로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이 있는 클로디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시 카틸리나의 모반 가담자 5명을 불법으로 처형한 사실을 들추어내어 고소를 함으로써 키케로를 약 1년 6개월 동안 (기원전 58년 3월 - 57년 8월) 로마에서 추방시킨다.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 거리를 두면서 주로 저작활동을 한다. 이 시기(기원전 55년 - 51년)에 키케로는《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법론》("De legibus")등을 썼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하는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정치적 불만과 함께 기원전 45년에는 사랑하던 딸 툴리아가 사망함으로써 키케로는 삶의 보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philippicae)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법적 상속자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과소 평가하여 정치적으로 기만하지만, 곧 제2차 삼두정치에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실감한다. 안토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에서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카이사르와의 친분.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키케로는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에게 친구와 친지들의 인사 청탁(人事請託) 편지를 자주 쓰곤 했고, 카이사르는 기꺼이 응했다.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자, 카이사르에게 동생을 청탁했다. 그리하여 퀸티우스 시세로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종사하며 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키케로와 고전 라틴어. 정치가로서 키케로는 역사의 거센 흐름에 좌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문학자로서 그의 이름은 라틴어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이른바 고전 라틴어는 키케로에 의해서 비로소 그 틀이 잡혀졌으며 그의 라틴어 문체는 곧 고전 라틴어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이 4세기 중엽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 밑에 있는 동안 라틴어는 이들 지역에서 이른바 관용어로서 쓰이게 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멸망 후 중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는 계속 문어로서 두루 쓰여졌다. 여기에서 라틴어 문어를 올바로 쓰고 배우는 첫과정에서 언제나 키케로의 변론문을 라틴어의 표본으로 삼았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라틴어를 배우는 데에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읽어보기. 저서. 변호문 수사학 철학저서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