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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535 | 1054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35 | 안양시내버스 52번 | |
31853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37 | 여건욱 | 여건욱(呂虔旭, 1986년 9월 16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자, 현재 LG 트윈스의 데이터분석팀 프런트이다.
선수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2009년 SK 와이번스의 2차 5순위(전체 4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경찰 야구단 시절.
2010년 시즌 후에 입단했다.
SK 와이번스 복귀.
2013년 4월 3일 두산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선발 투수들의 이탈과 부진으로 선발진에 공백이 생기자 후반기에 임시 4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LG 트윈스 시절.
2015년 7월 24일 당시 LG 트윈스 소속이었던 신재웅, 정의윤, 신동훈과 SK 와이번스 소속이었던 그와 진해수, 임훈의 3:3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였다.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2020년 시즌 후 방출됐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21년에는 김현욱이 운영하는 유소년 야구 아카데미 '몸 편한 야구'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2022년부터 LG 트윈스의 데이터분석팀 프런트로 활동한다. |
31853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38 | 최경철 | 최경철(崔敬哲, 1980년 8월 1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이자, 현재 KBO 리그 SSG 랜더스의 2군 배터리코치이다.
선수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지만 바로 입단하지 않고 신생 팀인 동의대학교 체육학과 (1999학번)에 입학했다. 2003년 동의대 체육학과 졸업 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지명권을 승계한 팀에 같은 해 입단하였다. 동의대 창단 멤버로 포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박경완, 정상호와의 경쟁에서 밀려 상무 야구단에 입단하였다.
상무 야구단 시절.
2007년에 입단하였다.
SK 와이번스 복귀.
2008년에 복귀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도 자리잡지 못했다.
넥센 히어로즈 시절.
2012년 5월 2일에 투수 전유수를 상대로 트레이드돼 허도환의 백업 포수로 출장했다. 2013년에 상무 야구단에서 박동원이 제대하자 다시 2군으로 밀려났다.
LG 트윈스 시절.
때마침 윤요섭, 현재윤의 부상으로 포수 자원 부족을 겪게 된 팀 사정상 2013년 4월 24일에 당시 LG 트윈스 소속이었던 서동욱과의 1:1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2014년에는 윤요섭, 조윤준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당시 전 구단 포수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주전 포수로 등극했다. 고타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찬스시 타점을 올려 팀에 큰 도움이 됐고 그 어느 때보다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2014년 준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모두 선발로 출장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4차전 뒤 실시된 기자단 투표에서 유효표 50표 중 35표를 얻어 시리즈 MVP에 선정됐다. 시즌 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병규와 함께 가장 높은 연봉 인상률을 기록했다.
2015년에도 팀의 주전 포수를 맡아 꾸준히 선발 출장했으며 4월 7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팀의 첫 홈런을 쳐 냈다.
2016년 11월 25일 본인이 직접 구단에 직접 요청해 방출됐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군입대가 결정돼 공백이 확실시 되긴 했으나 두산 베어스에서 이원석의 보상 선수로 이흥련을 지목하며 제대 후에도 두산 베어스 소속으로 뛰게 돼 팀의 백업 포수 공백이 생겼고, 공백을 채우기 위해 영입됐다. 2017 시즌 후 방출됐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8년부터 SK 와이번스의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했다.
논란.
2015년 7월 1일 두산전에서 걸어가던 오재원을 온 힘을 다해 밀어서 논란이 됐다.
2015년 8월 9일 두산전에서 오재원과의 홈 승부 때 공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으나 그가 공이 없는 왼손 빈 글러브로 태그를 해서 논란이 됐다. 원래는 아웃 선언이 됐지만 오재원과 두산 베어스 측의 합의 판정 요청으로 세이프로 번복됐고, 당시 LG 트윈스의 감독이었던 양상문이 합의 판정 신청 가능 시간인 10초가 지나서 요청했다고 끝까지 어필을 해봤으나 세이프로 판정됐다.
응원가.
LG 트윈스 시절.
원곡 : 토이의 '뜨거운 안녕'<br>
가사 : 날려버려 무적 LG 최경철~ 최!경!철! *4
삼성 라이온즈 시절.
안타 삼성 최!경!철! 워어어어 날려라 *4 |
318550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0 | 마페이 1 | 마페이 1()은 카시오페이아자리에 있는 거대타원은하이다. 한때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여겨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은하군, IC 342/마페이 은하군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하의 명칭은 1967년에 적외선 방출 관측을 통해 이 은하와 그 이웃 은하인 마페이 2를 발견한 파올로 마페이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마페이 1은 약간 평탄한 핵형 타원은하이다. 상자 형태를 띠고 주로 늙은 금속풍부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별들로 이루어진 매우 작은 청색의 은하핵을 가지고 있다. 모든 거대타원은하와 같이, 마페이 1은 두드러지는 분포의 구상성단들을 가지고 있다. 마페이 1은 우리은하로부터 3~4 Mpc만큼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은하는 우리은하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대타원은하이다.
마페이 1은 회피대에 위치하며 우리은하의 별과 먼지로 심하게 가려져 있다. 만약 이 은하가 회피대에 가려지지 않았다면, 하늘에서 가장 크고(보름달의 크기의 약 3/4배) 가장 밝으며, 가장 유명한 은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페이 1은 매우 어두운 하늘에서 30~35cm 또는 그보다 거대한 망원경을 이용하여 가시적으로 관측될 수 있다.
발견.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파올로 마페이는 적외선 천문학의 선구자 중 한명이었다.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초근적외선 영역(I-대역, 680~880 nm)에서 천체에 대한 고해상도 사진을 얻기 위해 마페이는 화학적으로 극도로 민감한(hyper-sensitized) 표준 이스트먼 감광유제 I-N을 이용하였다. 극도의 민감화를 이루기 위해서 마페이는 그것을 3~5분 동안 5% 암모니아수에다 담구었다. 이 방법을 통해 감도는 열 배 정도까지 향상되었다. 1957년에서 1967년 사이에, 마페이는 이 기법을 이용하여 구상성단, 행성상성운과 같은 많은 천체들을 관측하였다. 이들 천체 중 일부는 청색(250-500 nm)에 민감한 건판에서 보이지 않았다.
마페이 1 은하는 1967년 9월 29일 아시아고 천문대의 슈미트 망원경과 연동한 극도로 민감한 I-N 사진건판을 통해 발견되었다. 마페이는 무정형성운과 황소자리 T형 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마페이 1과 함께 그것의 동반은하인 나선은하 마페이 2도 발견하였다. 이 천체는 근적외선 영역에서 겉보기 크기가 최대 50"이지만 청색광에 민감한 건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은하의 스펙트럼에는 어떠한 방출 또는 흡수선조차도 없었다. 후에 마페이 1은 약전파(radio-quiet)를 보여주었다. 1970년에 하이런 스핀래드는 마페이 1이 근처에 있는 숨겨진 거대타원은하임을 주장하였다. 마페이 1은 은하수의 뒤에 가려지지 않았다면 북반구 하늘에서 가장 밝은 은하 열 손가락 안에 꼽혔을 것이다.
마페이 1이 희미해 보이기 때문에, 마페이 1에 대한 안시관측은 매우 어두운 하늘에서 고품질의 성도와 최소한 직경 30~35 cm의 망원경을 필요로 한다.
거리.
마페이 1은 회피대의 중심에 있는 은하면으로부터 거의 0.55˚만큼 떨어져 있으며 가시광선에서 소광 등급이 약 4.7 등급(약 1/70배)이다. 소광 뿐만 아니라 마페이 1에 대한 관측은 은하가 그 자체와 쉽게 혼동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우리은하의 희미한 별들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힘들다. 그에 대한 결과로 마페이 1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특히나 어려움이 있어왔다.
1971년, 마페이 1의 발견 직후에 하이런 스핀래드는 마페이 1까지의 거리를 국부은하군의 내부에 해당하는 약 1 Mpc 정도로 측정하였다. 1983년에 로널드 부타와 마셜 맥콜은 이 측정을 타원은하에 대한 광도와 속도분산 사이의 일반 관계를 이용하여 2.1+1.3 -0.8 Mpc 정도로 수정하였다. 그러한 거리는 마페이 1이 국부은하군의 꽤 바깥쪽에 있음을 시사하나, 이전의 값에 영향력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까웠다.
1993년 게라드 루피노와 존 톤리는 표면밝기 요동을 이용하여 마페이 1까지의 거리를 4.15 ± 0.5 Mpc 정도로 측정하였다. 2001년 말에, 팀 데이비지와 시드니 반 덴 버그는 조율된 광학기구(adaptive optics)를 통해 마페이 1에 있는 가장 밝은 점근거성가지 별을 관측하여 태양으로부터 은하까지의 거리가 4.4+0.6-0.5 Mpc에 있음을 결론내렸다. 마페이 1까지의 거리에 대한 최신의 측정은 개선된 타원은하의 광도/속도분산 관계와 갱신된 성간소광량에 근거하여 2.85 ± 0.36 Mpc이다.
지난 20년 간 보고된 먼 거리(≥3 Mpc)는 마페이 1이 국부은하군이 마페이 1의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충분히 가깝지 않음을 시사한다.
마페이 1은 태양으로부터 약 66 km/s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국부은하군의 질량중심에 대한 은하의 속도는 297 km/s이다. 이것은 마페이 1이 우주의 팽창에 영향을 받음을 의미한다.
물리적 특징.
크기 및 형태.
마페이 1은 허블 분류 체계에서 E3형으로 분류된 거대타원은하이다. 이는 약간 평탄하고 단축이 장축의 70%에 해당함을 의미한다. 또한 마페이 1은 상자형(E(b)3형)을 띠고 있는 것에 비해서, 중심 영역(반경 ~ 34 pc)은 r1/4 법칙에 비해 방출광이 모자라다. 이것은 마페이 1이 타원 핵형임을 의미한다. 상자 형태와 어두운 핵의 존재는 무거운 타원은하와 왜소한 타원은하 사이에 있는 전형적인 중간형 타원은하에서 나타난다.
마페이 1의 겉보기 크기는 파장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 그 이유는 우리은하에 의해 심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색광에서의 크기는 1~2'인데 비해 근적외선에서는 장축이 23'(달의 시지름의 3/4 이상)에 이른다. 3 Mpc의 거리에 있을 때 실제 크기는 약 23 kpc이다. 마페이 1의 총 가시절대등급 Mv = -20.8으로, 우리은하의 밝기와 견줄 만하다.
은하핵.
마페이 1은 중심에 약 1.2 pc 크기의 매우 작은 청색의 은하핵을 가지고 있다. 이 은하핵은 약 29 태양질량에 해당하는 이온화된 수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은하핵이 최근에 별의 형성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마페이 1의 중심에는 활동은하핵(AGN)의 징후가 없다. 중심에서의 X-선 방출은 거대해서 수 많은 항성 광원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별과 성단.
마페이 1은 주로 연령이 100억 년 이상인 늙은 금속풍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타원은하로서 마페이 1은 상당한 수의 구상성단(약 1,100 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성간소광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지상 관측으로 어떤 구상성단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2000년에 허블 우주 망원경의 관측으로 은하 중심 영역에서 약 20 개의 구상성단 후보가 드러났다. 이후에 지상 망원경을 이용한 적외선 관측으로 밝은 구상성단 후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은하군의 구성원.
마페이 1은 국부은하군 근처에 있는 은하군의 주요 구성원이다. 은하군의 다른 구성원으로는 거대나선은하 IC 342와 마페이 2가 있다. 또 마페이 1은 위성은하로 작은 나선은하 드윙글루 1을 가지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MB1과 같은 수많은 왜소한 위성은하를 가지고 있다. IC 342/마페이 은하군은 우리은하로부터 가장 가까운 은하군 중 하나이다. |
31855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1 | 국도 제6호선 (일본) | 국도 제6호선()은 도쿄도 주오구와 미야기현 센다이시 미야기노구를 잇는 총 연장 439.9km의 구간을 가진 일본의 일반 국도이다. 그러나 국도 간판이 배치되는 도쿄에서 이와누마까지는 334.0 km이다.
2011년 3월 12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하여, 히로노에서 하라노마치까지의 사이는 통행할 수 없었다가, 2014년 9월 15일부터 자동차 한정으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통행 금지.
2011년 3월 12일 발생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기인하여, 방사성 물질로부터 차폐하기 위한 출입 금지 구역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6번 국도에 대한 통행 금지 구간이 생겨난 상태가 성립되어 있어 북측 (소마 방면)의 경우 하라노마치에 남측 (이와키 방향)는 히로노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다. |
318554 | 3283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4 | 검정 치마 | |
318555 | 1146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5 | 국도 1호선 (일본) | |
318556 | 1146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6 | 국도 6호선 (일본) | |
31855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8 | 사티야지트 레이 | 사티아지트 라이(, , 1921년 5월 2일 ~ 1992년 4월 23일)는 인도의 영화감독이다. 영화 《아푸》 3부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인도에 방문한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르누아르에게 가르침을 요청하여 1955년, 혼자힘으로 《아푸 제1부 - 길의 노래》를 촬영하여 1956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그 제2부 《불굴의 인간》은 195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 제3부 《아푸의 세계》도 절찬을 받았다. 《아푸》 3부작은 벵골의 가난한 민중들의 고뇌의 생활시(生活詩)이며, 세계 영화계의 불멸의 역작이 되었다. |
318559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59 | 사타지트 라이 | |
318560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0 | 사트야지트 레이 | |
318561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1 | 자루비노 항구 | |
318562 | 1381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2 | 루이 암스트롱 | 루이 대니얼 암스트롱(, 1901년 8월 4일 ~ 1971년 7월 6일)은 미국의 가수이자 재즈 음악가이다. 종종 트럼펫과 클라리넷을 연주하였다. 1971년 7월 6일에 심근 경색과 폐암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약 반세기에 걸쳐 연주 활동을 한 루이 암스트롱은 '새치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3세 무렵부터 트럼펫(처음에는 코넷)을 배워, 1922년 시카고의 킹올리버 악단에 참가하였고 이후 많은 악단에서 연주 활동을 해왔다. 1925년 〈핫 파이브 세븐〉을 취입하고, 악단도 조직하였다. '핫 파이브'()의 이름으로 취입된 수십곡은 미국 재즈 사상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재즈의 산 역사이자 증인이라 평가받는 루이 암스트롱은 1930년을 중심으로 한 몇 해 동안 절정기를 맞았다. 1932년 유럽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영국 국왕의 어전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 작은 편성의 올스타즈를 만들었으며, 대전 후에도 세계 각지를 순회 공연하였고,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60세가 넘기까지 현역으로 활약하면서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그는 담배를 즐겨 폈고, 와인 등의 주류도 곧잘 마셨는데 폐질환과 심근 경색 등으로 자주 고통을 받았지만, 은퇴하지 않고 계속 방송과 무대 공연에 나섰다.1971년 7월 6일 뉴욕 퀸스 자택에서 수면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였던 루이 암스트롱은 1927년 이후 스캣을 널리 보급하였다. 스캣은 타악기 리듬에 고정된 음절을 붙여 소리내는 서아프리카의 음악 관습을 그 원조로 삼고 있는 뜻이 없는 음절에 붙인 선율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재즈의 즉흥 가창법이다. 일찍이 암스트롱은 가수의 흥을 돋궈주는 역할로서, 특히 블루스 가수 베시 스미스의 노래를 반주해주기 위해 리프(riff: 재즈에서 솔로에 맞추어 연주하는 즉흥적 성격의 짧은 기악 반주)를 연주했다. 그는 트럼펫 솔로의 놀라운 표현에 곁들여 소박하고 개성적인 노래도 부르는 독특한 연기력과 기교로 널리 알려졌다. 레퍼토리도 재즈에서 팝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음악 영화에도 토키 초기부터 수 없이 출연하였다. 그는 재즈 사상의 거인이며 희대의 솔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의 제1인자로 평가받는다.
초기 생애.
루이 암스트롱 스스로는 1900년 7월 4일에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재즈 역사학자인 사디어스 버놀 존스는 루이 암스트롱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기 위해 뉴올리언스 침례교회의 세례 명부를 확인하던 중 출생확인서에서 암스트롱이 1901년 8월 4일에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루이 암스트롱이 태어날 당시 그의 생부 윌리엄 암스트롱은 빈민가의 날품팔이 노동자였으며, 어머니 매리 앨버트는 16세가 채 되지 않은 미혼모였다. 아버지는 암스트롱이 걸음마를 익히기도 전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떠났고, 어머니는 매춘을 생업으로 이어가며 아들의 양육을 책임져야만 했다. 암스트롱은 매춘굴에서 생활하며 석탄이나 폐품을 팔아 나르며 가계를 도왔다. 11살 때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또래 아이들을 모아 4중창단을 조직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모으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이웃에 사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가족 카로노프스키 일가로부터 코넷을 선물 받았고, 그는 독학으로 코넷 연주를 익혔다.힘든 환경에서도 밝게 성장했던 루이 암스트롱은 1913년의 마지막 날 밤, 의붓아버지의 권총을 공중에 쏘아대는 위험한 장난 때문에 18개월 동안 뉴올리언스의 흑인소년보호소의 감호를 받았다. 이곳 소년원은 그의 첫 번째 음악학교가 되었다. 소년원의 브라스 밴드 마스터였던 피터 데이비스로부터 기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고, 암스트롱은 가난과 범죄에 찌든 빈민가를 탈출하기 위해 코넷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감호소에서 나온 이후에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거목 킹 올리버에게 음악을 배웠다. 1918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데이지 파커와 첫 번째 결혼을 한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스의 거리와 살롱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경력.
1920년대.
뉴올리언스 재즈 신의 거물이던 벙크 존슨, 키드 오리, 그리고 그의 오랜 음악적 영웅 킹 올리버와 협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해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올리언스의 스토리빌(사창가)이 철거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찾아 시카고로 이동하게 된 킹 올리버는 루이 암스트롱과 키드 오리에게 자신의 밴드를 이양한다. 그 후 암스트롱은 오르간 연주자 페이트 마라블이 이끄는 밴드에 합류해 미시시피 강을 횡단하는 유람선 연주를 3년 동안 계속했다. 그는 유람선에서의 활동 기간 동안 악보 읽는 법과 편곡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1921년, 스무 살이 된 암스트롱은 키드 오리의 밴드로 복귀한다. 편곡자 플레처 헨더슨의 권유로 1922년부터 뉴욕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그는 최고의 코넷·트럼펫 연주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폴 화이트먼·듀크 엘링턴을 포함한 모든 밴드의 리더들은 그의 음악을 가까이 두고자 했다. 암스트롱은 코넷·트럼펫 연주 외에도 자신이 개발한 특유의 기악적인 보컬과 스캣을 즐겼으며, 1925년에는 자신의 독립적인 활동을 위해 시카고로 향했다.
시카고에 정착한 루이 암스트롱은 그의 스승 킹 올리버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온전히 통제하는 소규모 밴드인 캄보밴드 핫 파이브와 핫 세븐을 결성한다. 여기에는 그의 두 번째 아내 릴 하딘 암스트롱이 참여했고, 조니 도즈와 키드 오리를 포함한 5~7명의 유동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다. 레코딩을 통해 보다 진화된 음악적 개념의 재즈 연주를 도입한 이들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암스트롱의 순도 높은 즉흥 연주, 솔로를 포함한 매력적인 보컬, 창의적인 스캣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리듬과 화성, 솔로·앙상블의 모든 개념을 가져왔다.
1925년 가수로 데뷔한 암스트롱은 1926년 피아니스트 얼 하인스를 만나 그와 함께 최고의 음악적 하모니를 형성했다. 종래의 재즈가 지니고 있던 관성을 탈피하고 보다 세련된 음악으로 재즈의 입지를 다지며 스윙의 묘미를 실천해보였다. 재즈가 감상의 영역으로 자리하는 한편, 대중적 지지를 누릴 수 있는 팝 뮤직으로 자리할 수 있게끔 기여한 루이 암스트롱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평가였다.
1930년대.
1930년대 중·후반 스윙 재즈의 열풍으로 미국 전역이 들끓던 당시 루이 암스트롱은 베니 굿먼·글렌 밀러·듀크 엘링턴·카운티 베시와 함께 스윙 재즈의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마피아 알 카포네와도 친분이 있던 수완 좋은 매니저 조 글레이저와 계약하고, 공연·레코딩 활동 외에도 뮤지컬·영화의 배우로 출연했다. 무대 위에서 하얀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익살스런 농담을 던지고, 하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연주·노래했던 연예인 루이 암스트롱에게 재즈는 좁은 공간이었다. 1932년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A rhapsody in black and blue》로 영화 배우에 데뷔했다.
1940년대.
1940년대를 맞이하면서 스윙 재즈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지만 한편으로는 찰리 파커를 위시한 예술지향주의자들에 의해 비밥 재즈의 혁명이 가열되고 있었고, 재즈는 암스트롱의 의도와 달리 아티스트 중심의 예술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즈가 새로운 문명으로 이동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1947년 뉴욕 타운 홀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루이 암스트롱과 올스타즈'라는 6중주단을 결성하고, 이들과 함께 미국 전역과 세계를 순회하는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얼 하인스, 잭 티가든, 바니 비가드, 드 캐틀릿 등이 참여한 올스타즈는 멤버 교체를 거듭하며 암스트롱의 마지막 활동까지 함께 했던 동반자였다. 재즈가 비밥과 쿨 재즈, 하드 밥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암스트롱은 자신의 음악적 뿌리였던 블루스와 가스펠·재즈뿐 아니라 〈La Vie En Rose〉 〈Mack The Knife〉 같은 팝·뮤지컬·샹송 등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1950년대-1970년대.
1954년 루이 암스트롱은 20여 년간의 장기 계약을 맺었던 데카와 프리랜서로 다양한 레코딩에 매진했다. 그중에서도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대가 패츠 월러의 곡을 노래·연주했던 〈Satch Plays Fats〉와 재즈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와의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는 〈Ella And Louis〉는 가장 빛나는 음악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백인 관객들 앞에서 보인 과장된 웃음과 제스처로 후배 재즈 뮤지션과 진지한 재즈 팬으로부터 “우스꽝스러운 엉클 톰”이라는 악평에 시달렸던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거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기부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1961년 예순의 나이에 이른 루이 암스트롱에게 이 시간들은 새로운 전성기로 불려도 좋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가 즐비했던 나날이었다. 1936년 미국 영화 《Pennies from heaven》에 주연을 맡았다. 1964년 〈Hello, Dolly!〉는 비틀즈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을 제치고 빌보드 팝 차트의 정상을 누렸으며,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 남자 보컬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63년 4월 8일부터 22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2주간 공연을 가졌다.
1956년 루이 암스트롱은 아프리카 가나 공화국 방문 당시 “나의 조상은 이곳에서 왔고, 나에게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피부색에 대한 자긍심을 내비친 바 있다. 1967년 싱글 앨범 〈What a Wonderful World〉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인한 그는 1971년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죽음.
1971년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자택에서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의 원인은 심근 경색과 폐암이었다. 그의 죽음을 접한 소련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한 편의 시를 헌화하며 “천사 가브리엘이여. 루이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내려주세요”라는 구절로 그의 아름다운 삶과 음악을 표현했다.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는 암스트롱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며 그의 빛나는 음악적 유산에 감사를 전했다.
그가 생전에 남겨둔 미공개 녹음의 보존을 위해 힐러리 여사가 12만 달러, 연방 정부에서 3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2000년 7월 뉴욕에는 암스트롱 기념관이 개관했다. |
31856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4 | 라 벤타나 | 라 벤타나()는 대한민국의 탱고·재즈프로젝트 음악 그룹이다.
음반.
정규 음반.
1집 Como el Tango, Como el Jazz (탱고처럼,재즈처럼) (2008년 8월 27일)
2집 Nostalgia And the Delicate Woman (2010년 6월 22일)
3집 Orquesta Ventana (2013년 5월 28일)
비정규 음반.
빨간풍선 (2013년 4월 29일)
수상.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음반부문 |
318565 | 3283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5 | 라벤타나 | |
318566 | 6254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6 | 보리차 | 보리차()는 볶은 겉보리를 넣고 끓인 차이다. 고소한 맛이 나는 전통차로서 맥다(麥茶)나 맥차(麥茶)라고도 부른다.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주로 마신다. 한국에서는 한 해 내내 찬 물이나 뜨거운 물 대신 마시고, 일본에서는 주로 여름에 찬 음료로 마신다.
만들기.
약불에 겉보리를 껍질이 탈 듯 말 듯한 정도로 볶은 다음, 팔팔 끓는 물에 넣고 중불에서 끓여 만든다. 시판하는 티백을 사용하기도 한다. 끓인 다음에는 바로 식혀야 향이 좋다. 편의점이나 자판기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보리차를 사 마시기도 한다. |
318567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7 | 보컬리스트 | |
318569 | 1569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69 | 김영민 (철학자) | |
31857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72 | 방라뭉군 | 방라뭉군()은 태국 촌부리주의 남쪽에 있는 암프(군)이다.
역사.
무앙 방 라뭉은 반 방 라뭉, 탐본 방 라뭉에 위치하고 있다. 정부는 방 라뭉을 암프로 절하시켰으며, 지역 군청은 클롱 낙 양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후 클롱 녹 양이 교통 상으로 이점이 없어짐에 따라 1909년 탐본 나 클루에아에 있는 해변 근처의 프라야 사타야 누쿤 (초엠)으로 이전하였다.
1952년 10월 21일, 군청은 태풍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정부는 임시 군청을 수쿰빗 로드에 있는 방 라뭉 학교에 재건하였다. 1953년에 정부는 신 청사 건물에 대한 예산을 확보하고 인근 지역에 학교로 건립하였으며, 아직도 그 건물이 사용되고 있다.
지리.
북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인접 지역은 촌부리 주의 시라챠와 플루악 다엥, 니콤 파타나, 사타힙, 라용 주의 방 창과 타이 만이다. |
318589 | 23147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89 | 타일랜드 | |
318590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590 | ALT 리눅스 | ALT 리눅스(ALT Linux)는 리눅스 커널과 시시포스(Sisyphus) 계열의 RPM 기반의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로 모스크바의 IP랩스 리눅스 팀에서 파생된 ALT 리눅스 팀에서 ALT 리눅스 시시포스 계획에 따라 만들었다. 정확한 현지화와 APT, 시냅틱을 통한 효율적 꾸러미 관리 등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 운영 체제의 불안정판 저장소인 시시포스는 2007년 최우수 C뉴스상을 받기도 했다.
종류.
ALT 리눅스는 초심자와 숙련자 모두를 위한 다양한 판을 제공한다. |
31861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14 | 쓰루미쓰바사교 | 쓰루미쓰바사 교()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쓰루미구에 있는 다리이다. 수도고속도로 완간 선이 지나가며 1994년 12월 21일에 개통하였다.
요코하마 베이브리지와 비견해서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다리이다.
'쓰루미'는 쓰루미 구에 유래했으며 '쓰바사'는 '날개'를 뜻하는 낱말이다.
공업 지역에 있으며 다이코쿠 부두에서 볼 수 있으나 동일본 여객철도 쓰루미 선 우미시바우라 역에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볼 수 있어, 국도 제357호선의 일부이기도 한다. |
318615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15 | 츠루미츠바사 다리 | |
318616 | 331646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16 | 백준기 | 백준기(白駿基, 白俊基, 1952년 12월 3일 ~ )는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겸 연기자이다.
생애.
1972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76년 TBC 동양방송 17기 공채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다.
2005년 8월 그의 아들은 이라크 자이툰 부대 3진으로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2008년 12월에는 홍서범·조갑경, 조관우, 이광기, 이연경, 이진우·이응경, 최나래 등과 함께 결식아동돕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
318618 | 3322511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18 | 문회원 | 문회원(文會元, 1945년 7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생애.
1965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3년 후 1968년 뮤지컬 배우 데뷔하였으며 4년 후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다. |
318622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22 | 스노 레퍼드 | |
31862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23 | 김상만 | 김상만은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
318624 | 10645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24 | 김상만 (언론인) | 김상만(金相万, 1910년 1월 19일~1994년 1월 26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인이다.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나 동아일보 회장, 아시아신문재단 회장,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명예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호는 석촌(惜村)·일민(一民). 본관은 울산(蔚山). 인촌 김성수와 고광석의 장남이다.
군사 정권 당시 야당 성향의 언론을 운영하며 정권에 맞섰으나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부터는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생애.
출생.
일민 김상만은 1910년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455번지에서 동아일보의 설립자 김성수(金性洙)와 고광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력.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한지도 2년 후 1930년 2월 일본에 유학, 1933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학사)를 수료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정경대학(School of Economics & Political Science)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36년 영국 런던대학교 정치학 석사 수료 이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19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법학석사)를 나왔으며, 1985년 일본 와세다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경영.
1949년 동아일보 이사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래 45년간 동아일보사의 실질적인 사주(社主)로서 재임하는 동안 동아일보의 사세가 신장되었다. 아버지인 김성수의 사후 그는 사촌형인 고재욱과 상의하여 회사를 경영해 나갔다. 이후 점차적으로 그는 막후에서 영향력과 실력을 행사하였다.
1955년 재단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에 선출되었다. 1955년 동아일보사 상무, 1961년 전무이사 겸 발행인을 거쳐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1963년 4월 25일에는 동아방송(DBS)을 개국하였고, 일간 ≪소년동아≫(1964.7.)를 창간하였으며, 일제하에 발행되다가 폐간된 월간 신동아(1964.9.), 여성동아(1967.11.) 등의 잡지를 재발간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부사장 겸 발행인으로 재임 중, 신동아 필화사건이 일어나 발행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71년 8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에는 동아일보사 기자와 동아방송 프로듀서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회사측과의 갈등이 심화 대립되는 상태가 벌어졌는데, 이 해 말부터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동아일보와 모든 자매지에 대한 광고 탄압을 자행하여 안팎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 기자와 방송 프로듀서들에 대한 집단해고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김상만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공로로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의 1975년도 ‘자유의 금펜상(Golden Pen of Freedom)’을 받았다. 이어서 1977년 동아일보사 대표이사 회장, 1981년 동아일보사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에서 해고된 직원들의 처우를 외면하여 후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78~198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본부이사를 지냈다. 1982년 재단법인 고려중앙재단 이사장에 선임되고 1983년 한영수교 100주년기념사업위원장, 1984년 신문인협회 고문, 1986년 IPI 종신명예회원에 선임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정부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자제하고 점차 온건적 성향, 친정부 성향으로 변화해갔다.
1989년 동아일보 해직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면서 동아일보는 보수적 성향으로 변신했고 그는 이를 묵인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을 지지하였다고 전해진다.
기타 활동.
대외적인 활동으로는 1971년 아시아신문재단(PFA) 이사로 선임되어 1976년 4월에는 아시아신문재단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79년에는 국제신문협회(IPI) 본부이사로 선임되었다가 1986년 5월에는 명예 종신회원에 추대되었다. 1964년부터 1978년까지는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을 맡았고, 1982년에는 고려대학교 재단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으며, 재단법인 동아꿈나무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그 밖에도 교육과 장학 사업에도 가담하여 고학생들의 후견인을 자처하였고, 재단법인 의양언론재단 이사, 한국정신박약아보호협회 이사, 한양로타리클럽 회장 한국박물관회 회장, 한영수교 1백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는 등 폭넓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94년 6월 동아일보에서는 광화문 사옥 1, 2층에 김상만의 호를 따서 ‘일민문화관’을 개관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유족 친지들의 재산출연으로 ‘일민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학술연구지원 및 국제교류사업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군사정권과 척을 지었지만 1987년 노태우 정부에 호의적이었고, 1992년에는 김영삼을 적극 지원하여 당선에 기여하였다.
사후.
사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빈소는 고려대학교 내 인촌기념관에 마련되었고,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
318625 | 1028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25 | 검은발담비 | |
318629 | 3463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29 | 도원군 숭 | |
318635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35 | 댄스홀 | 댄스홀(Dancehall 또는 Bashment)은 1970년대 후반에 발전된 자메이카 대중 음악의 한 종류이다. 댄스홀의 시작은 197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루츠 (Roots) 스타일보다는 더 희소하였다. 1980년대 중반, 전자 악기가 널리 퍼지고 사운드가 디지털 댄스홀과 함께 많이 변화하게 되자 빠른 리듬과 함께 그 특징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댄스홀의 중심요소는 자메이카 표준 영어보다 파트와(Patois)라고 불리는 자메이카 크리올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고 리듬(Riddims)이라고 불리는 곡의 반주에 있다.
댄스홀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자메이카의 주류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90년대에는 자메이카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댄스홀은 2010년대, 댄스홀을 주류 서양음악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서양 아티스트,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
성장.
댄스홀이라는 이름은 사운드 시스템이라고 하는 자메이카 음악산업에서 녹음으로 유명했던 무도장(Dance hall)에서 유래했다. 댄스홀은 1940년대 부유층의 댄스에 참여할 수 없었던 킹스턴이라는 내륙도시 의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마이클 맨리에서 에드워드 시가까지의 사회주의 정부의 변화를 포함한 자메이카의 사회적, 정치적인 움직임은 레게음악을 전세계에서 자메이카 본토로 불러들였고 이는 본토 자메이카 음악인들의 실연음악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사회적인 정의, 본토로의 귀환, 라스파타리 운동과 같은 기존 레게의 주제보다 댄스, 폭력, 섹스와 같은 주제가 레게 음악의 주류가 되기 시작한다.
음악적으로는, 1960년대의 옛 리듬을 재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슈가 미놋(Sugar Minott)은 그가 세션으로 있던 옛 스튜디오 원의 리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음악 프로듀서 돈 마이스(Don Mais)는 루츠 래딕스(The Roots Radics) 밴드로 옛 리듬들을 재작업하는 중이었다. 루츠 래딕스 밴드는 계속해서 헨리"준조"로스(Henry "Junjo" Lawes)라는 아티스트와 베링턴 레비, 프랭키 폴, 주니어 리드와 같은 유명한 레게 스타들이 만들어낸 초기 댄스홀 레코딩의 키 몇 몇을 작업하였다. 돈 카를로스(Don Carlos), 알 캄프벨(Al Campbell), 트리스턴 팔마(Triston Palma)와 같은 주류 가수들이 이 시대에 출현하였으며 그레고리 아이삭(Gregory Issac), 버니 웨일러(Bunny Wailer)과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들이 있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 블랙 스콜피오(Black Scorpio), 제미나이 디스코(Gemini Disco), 벌고 하이파이(Virgo Hi-Fi), 에이시즈 인터네셔널(Aces International)과 같은 사운드 시스템들은 얼마 안가 디제이들의 새로운 음악 경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옛 아티스트들은 캡틴 신배드(Captain Sinbad), 랭킹 조(Ranking Joe),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론 레인저(Lone Ranger), 조지 웨일스(Josey Wales),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제너럴 에코(General Echo), 옐로우맨(Yellowman)과 같은 신인들에게 밀려났다. 이러한 변화는 헨리"준조"로스(Henry "Junjo" Lawes)가 제작한 앨범 "A Whole New Generation of DJs"에 큰 영향을 끼친다. 처음으로 디제이가 가수보다 녹음에 있어서 중요성을 띄게 된 것이다. 또 다른 경향으로는 사운드 클래시 앨범이 있는데, 이는 라이벌 디제이와 사운드 시스템들이 관객들의 호응을 누가 더 많이 얻느냐를 겨루는 실황 앨범이었다.
옐로우맨(Yellowman)은 초기 댄스홀 아티스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써 처음으로 미국 주류 레이블과 계약한 디제이이다. 그의 인기는 그 당시, 전성기 밥 말리와 맞먹을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은 레이디 지(Lady G), 레이디 쏘우(Lady Saw), 시스터 낸시(Sister Nancy)와 같은 여성 디제이들의 전성시대였다. 다른 여성 아티스트로는 다이애나 킹(Diana King)이 있으며 90년대 2000년대에는 세실(Ce' Cile), 스파이스(Spice), 마카 다이아몬드(Macka Diamond)등이 있다.
현대 댄스홀.
1980년대 중반, 캐리브해 최초로 MIDI를 사용한 프랑스 캐리브인 그룹 캐사브(Kassav)는 전자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킹스 재미(Kings Jammy)가 프로듀싱한 웨인 스미스(Wayne smith)의 1985년 히트곡 '(Under mi)Sleng Teng'의 전자음은 댄스홀 레게음악계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Casio MT-40 키보드로 만들어진 이 전자리듬을 많은 제작자들이 댄스홀 최초의 전자리듬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사실은 아닌게, 1984년 프린스 재즈보(Prince Jazzbo)가 프로듀싱한 호레이슨 퍼거슨의 'Sensi Addict'와 같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Sleng Teng'의 리듬은 이후 200여 곡이 넘는 음악에 사용되었다. 디제이가 선도하고 크게 신시사이저화 된 댄스홀 레게는 기존의 자메이칸 음악 산업과 분리되었다.
덥 포이엇(Dub Poet) 마타바루카(Matabaruka)는 '1970년대의 레게가 붉은색과 녹색, 황금색이었다면, 이후 10년의 레게는 금목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댄스홀이 기존의 문화적 뿌리에서 너무 벗어나버려서 순수주의자 사이에서 레게의 확장을 어디까지 봐야하나하는 논쟁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뿌리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은 이후 세계적인 레게스타가 되는 버카니어(Buccaneer), 케이플턴(Capleton), 샤바 랭크스(Shabba Ranks)과 같은 신인들에게도 꾸준히 나타나게 된다. 새로운 프로듀서 또한 명성을 얻게 되는데 필립 '패티스' 버렐(Philip "Fatis" Burrell), 데이비드 '루드보이' 켈리(David "Rude boy" Kelly), 조지 팽(George Phang), 휴 '레드맨' 제임스(Hugh "Redman" James), 도노반 저메인(Donovan Germain), 바비 디지털(Bobby Digital), 스틸리 앤 클리비(Steely & Clevie)라 불렸던 와이클리프 '스틸리' 존슨(Wycliffe "Steely" Johnson)과 클리블랜드 '클리비' 브라운(Cleveland "Clevie" Brown)는 슬라이 앤 라비(Sly& Robbie)의 지위를 넘볼 지경 이었다. 디제이들은 격렬한 것에 더욱 관심을 보였데 그 중 비니 맨(Beenie Man), 바운티 킬러(Bounty Killer), 매드 코브라(Mad Cobra), 닌자맨(Ninjaman), 부주 밴튼(Buju Banton), 수퍼 캣(Super Cat)은 꽤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강한 디제이 사운드의 구성요소인 "스윗 싱(Sweet Sing)"은 루츠 레게와 리듬 앤 블루스에서 나왔는데 팔세토와 여성적인 억양이 특징이다.
댄스홀 팝.
2000년대 초반 댄스홀은 팝뮤직에도 영향을 끼쳐 자메이카 뿐만 아니라 미국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다. 그 중 션 폴(Sean Paul)이라는 아티스트는 "Get busy"라는 싱글로 댄스홀 레게 최초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하게 된다.
전통적인 댄스홀 음악과는 달리 댄스홀 팝은 팝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코러스를 반복한다던지, 멜로디를 강조한다던지, 훅이 있다던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적인 요소가 적고, 신성 모독도 적다. 2000년대 자메이카에서 성공한 댄스홀 팝 아티스트로는 비니 맨(Beenie Man), 엘리펀트 맨(Elephant Man), 팝칸(Popcaan), 바이브즈 카르텔(Vybz Kartel), 코쉔즈(Koshens), 미스터 베가스(Mr.Vegas), 마바도(Mavado), 스파이스(Spice)등이 있다.
댄스홀 팝은 2010년대에 들어서 드레이크 (음악가)의 싱글 'One Dance'와 'Controlla' (2016), 리한나와 드레이크 (음악가)의 'Work' (2016),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와 같은 많은 음악들이 성공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된다. 또한 Lean On (2015), Light it Up (2015), Run Up (2017)로 유명한 메이저 레이저도 댄스홀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얘기한 적 있다. |
31863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38 | 이륭양행 | 이륭양행(怡隆洋行)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1919년 5월 중국 단둥에 설립한 무역선박회사로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쇼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는 아일랜드의 처지를 고려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
318640 | 3289842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0 | 카도쿠라 켄 | 카도쿠라 켄(, 1973년 7월 29일 ~ )은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2019 시즌부터 현역시절에 처음 데뷔를 했던 친정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2군 투수 코치로 활약을 했다.
현역 시절 주니치 드래건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을 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 KBO 리그 팀인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 등에서 소속 선수로 활약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야구 선수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선수이다. KBO의 등록명은 카도쿠라이다.
생애.
프로 입단 전.
중학교 시절 신장 190cm를 넘는 장신 투수로 주목을 받았고 사이타마현에 소재하고 있는 세이보우가쿠엔 고등학교에 진학해 야구부의 에이스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1973년에 태어난 세대에서는 사이타마 현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군림할 정도로 프로 야구계로부터도 주목을 끈 존재였지만 시로이시 노리유키가 주장으로 있는 가스카베교에이 고등학교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궁합이 나빴고 고교 3학년 때인 1991년에 춘계 사이타마 현 대회, 춘계 간토 대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사이타마 대회에서 모두 시로이시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1:3으로 가스카베교에이 고등학교한테 패하면서 한신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는 일은 없었다.
1992년 도호쿠 복지대학에 진학(동급생은 후쿠모토 아지아)하면서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 정도의 원동력이 되어 프로 야구단 관계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등 1995년의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주니치 드래건스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의 입단 동기는 아라키 마사히로, 와타나베 히로유키, 후에 긴테쓰에서도 같이 활약하는 마스다 다이스케 등이 있다.
주니치 드래건스·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시절.
이듬해 1996년 7월 28일의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데뷔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그 해에는 7승을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97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1구원승 포함이라 통산 9선발승), 1998년에도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였지만 다음 해인 1999년은 2승(1선발승)으로 끝났다. 1999년 오프에는 고이케 히데오, 사노 시게키, 요시무라 가즈히토와의 맞트레이드로 고이케 다쿠이치, 아즈세 고타로 등과 함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 이적했는데 긴테쓰 이적 2년째인 2001년에는 시즌을 통해 선발 로테이션의 일각을 지키면서 8승(전년도와 똑같은 7선발승) 5패의 성적으로 긴테쓰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평균자책점은 6.49).
한편 주니치가 출전한 1999년 일본 시리즈와 긴테쓰가 출전한 2001년 일본 시리즈에서 가도쿠라의 등판 기회는 없었다. 2003년 오프 시즌에는 후쿠모리 가즈오, 야노 에이지와의 맞트레이드로 우다카 신지와 함께 요코하마에 이적했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2004년 6월 23일의 야쿠르트전에서는 요코하마 이적 후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홈런을 때려 냈다. 시즌 초에는 선발 투수를 맡고 있었지만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 해에는 중간 계투로도 경험했다.
이듬해 2005년 8월 20일의 주니치전에서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었고 역대 네 번째인 ‘전 구단을 상대로 승리’를 달성(다만 달성 시점에서의 전체 구단이며, 자신이 소속했던 긴테쓰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했는데 개인 최고 성적이 되는 11승(모두 선발)을 올려 최종전에서는 중 이틀에 등판시키는 우시지마 가즈히코 감독의 조치도 있어 팀 동료인 미우라 다이스케와 함께 리그 최다인 177개의 탈삼진을 기록,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석권했다.
2006년에는 작년에 비해 불안정한 투구 플레이로 평균자책점 4.84의 성적을 기록할 정도의 부진을 겪으면서 한때는 중간 계투로 조정하는 등 만족스러운 투구 내용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시지마 감독은 참을성이 많을 정도의 선발로 기용해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는 등 10승(1구원승 포함이라 통산 9선발승)을 올려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을 달성했다. 투구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팀의 일원으로서의 두 자릿수 승리, 팀 최다승, 무엇보다 FA권을 행사했다는 이유와 1년 혹은 2년 이상이라는 계약과 연봉이 조금 늘어난 것에 대해서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구단 측은 “10승 10패의 투수는 필요 없다”등과 같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구단 측의 대응에 불만을 느낀 가도쿠라는 이적을 시야로 넣은 FA 선언을 했다. 12월 2일, 요코하마가 가도쿠라의 잔류 교섭을 중단하면서 가도쿠라도 요코하마와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메이저 리그 구단으로부터의 오퍼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도 하는 등 “입단 테스트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요코하마보다 조건이 나빠도 타 구단”이라고까지 발언했다. 그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할 의사를 나타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면서 “매우 영광”, “하라 감독에게 동경하고 있었다”라고 말해 12월 7일 요미우리와의 입단 교섭에 응했다. 2년 계약에 인센티브 2억 엔의 제시를 받아 “굉장히 높은 평가를 해 주었고 기분은 거의 굳어지고 있다.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시점에서는 요미우리의 이적이 사실상 결정되었다.
12월 11일, 요미우리의 입단이 정식으로 확정되면서 “다음 시기의 개막 대전은 요코하마와의 3연전에서 던지고 싶다”라고 말하는 등 의지를 나타냈다. 한편, 가도쿠라의 이적에 따른 인적 보상으로 구도 기미야스가 요코하마에 이적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7년, 본인이 “다음 시기의 개막 대전은 요코하마와의 3연전에서 던지고 싶다”라는 희망대로 개막 다음날인 2차전에 선발 등판해 요코하마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으면서도 호투하였지만 팀 타선의 지원없이 결국 후루키 가쓰아키한테 결승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었다. 8월에는 간신히 첫 승리 투수가 되면서 히어로 인터뷰에서도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이후의 등판에서는 7실점 하는 등 선발 투수로서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 구원 등판에서도 9월 18일 한신과의 경기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중간 계투로서 2경기에 등판했다.
이듬해 2008년의 시즌 개막은 2군에서 보냈고 4월 하순에는 중간 계투로서 1군에 승격, 11경기에 등판해 2홀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종 등판에서는 3차례 등판했지만 모두 실점을 기록했고 그 중 두 차례는 동점인 상황에서 등판해 2패를 기록했다. 5월 1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의 연장 10회에 구리하라 겐타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하면서 패전 투수가 되는 등 2군으로 떨어졌다. 6월 이후는 2군에서의 선발 투수로서 등판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등판은 없었고 일본 시리즈의 출전 자격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가 감액 제한의 25%를 넘는 대폭 삭감한 연봉을 제시했지만 재계약 협상이 결렬되었고 본인이 출전 기회를 요구한 적도 있어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결국 2년 동안 요미우리에서 단 1승 밖에 거두지 않았다.
12월 23일에는 요미우리로부터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노구치 시게키와 함께 시카고 컵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미국·한국 프로 야구 시절.
2009년 1월 20일,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면서 스프링 캠프의 초청 선수로 참가하였고 스프링 캠프 연습 경기에서 6경기에 출전하여 3실점의 호투를 보였으나 개막 직전인 4월 2일에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 후 미국 야구계를 중심으로 이적처를 모색했지만 2009년 4월 14일에 마이크 존슨의 대체 선수로 KBO 리그 팀인 SK 와이번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고, 등번호는 54번으로 배정받았다. 4월 18일의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번째 투수로서 첫 등판했고 그 후 선발 로테이션의 일각으로서 28경기에 등판해 시즌 8승과 5.00의 평균자책점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보여주었으나 포스트 시즌에서 맹활약하면서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0년 3월 27일의 한화전에서 긴테쓰 시절인 2001년 이후 9년 만이 되는 개막전 선발 투수로서 등판해 7회를 8안타 2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5월 4일의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도 호투해 개막 이후 7연승을 기록하면서 SK의 16연승을 이끈 주인공이 되었다. 7월 17일의 KIA 타이거즈전에서도 10승째를 올렸다. 일본 프로 야구 시대를 통해서 개인 최다가 되는 14승(13선발승으로 장원삼 김선우와 선발승 공동 6위, 평균자책점은 3위)을 기록해 SK의 정규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SK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인 11월 5일에는 대만에서 열린 한국-타이완 클럽 챔피언십 2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11월 13일의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는 3회 도중 3실점을 기록하면서 강판당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후 일본 내의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왼쪽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SK 와이번스에서 그와 재계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후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고 2011년 1월 16일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괌 1차 캠프에 합류하여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1월 25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총액 30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체결, 등번호는 16번으로 결정했다. 같은 해 5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완봉 승리를 거두어 한·일 통산 100승(91선발승)을 달성하였고 한때 평균자책 1위까지 달렸으나 SK에서 나타낸 우려가 결국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그 해에는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대단히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류중일 감독이 그를 포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7월부터 무릎 부상으로 인해 페이스가 점차 떨어져 있었고 2군으로 내려갔지만 끝내 삼성에서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 부상으로 결국 중도 하차하게 되었지만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한 일본인 선수 중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삼성 라이온즈는 대체 선수로 저스틴 저마노를 영입하였다.
일본 야구계 복귀에의 도전.
2012년 1월, 일본 프로 야구계의 복귀를 목표를 두면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불합격 판정을 받았고 2월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춘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역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홋카이도 다테시의 클럽 팀인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 경식 야구부에 입단해 홋카이도 지구 예선으로부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목표로 했다.
같은 해 5월 25일, 이와미자와 시영 야구장에서 열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홋카이도 1차 예선에서는 1차전 상대 오타루 야구 협회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까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후의 경기에서는 연패를 당하여 홋카이도 지구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가도쿠라 자신은 의 보강 선수로서 도시 대항 야구에 출전하게 되었다. 7월 15일 도쿄 돔에서 열린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는 1차전 상대인 와의 맞대결에서 JR 홋카이도의 3번째로서 7회말부터 등판했지만 2대 2의 동점인 상황에서 사카타 아쓰히코에게 결승 2점 홈런을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12년 11월 21일, 파이터스 스타디움(지바현 가마가야시)에서 12개 구단 합동 입단 테스트에 참가하여 프로 구단의 복귀를 타진했지만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구단이 없자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후.
2012년 12월 31일, 일본의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닛폰은 12월 31일 인터넷판에서 가도쿠라가 현역에서 물러나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코치를 맡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 구단은 가도쿠라의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점을 고려해, 투수 인스트럭터로 선임했다.
2013년에 인스트럭터로 부임한 그는 성적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온 투수 릭 판 덴 휘르크의 사이드 스텝을 체계적으로 교정해 주었다. 2군 투수코치로 정식 계약한 2014년에는 시즌 초 부상으로 2군에 내려온 릭 판 덴 휘르크를 선발 에이스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하여 삼성 팬들로부터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2015년에는 1군 불펜코치로 올라왔으나, 시즌을 마치고 계약이 만료된 후 삼성과 재계약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2016년에 도쿄 메트로폴리탄 텔레비전에서 게스트 해설자로 활동하면서 야구 해설가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일본 각지에서 야구교실에 참가했고, 2017년부터 간사이 TV 방송과 도쿄 방송 홀딩스에서 해설자로 출연을 했다.
2019 시즌을 앞두고 처음으로 프로 데뷔를 했던 주니치 드래건스의 2군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다시 지도자 활동을 시작했다.
실종과 발견, 그리고 재실종.
2021년 5월 26일 실종됐다.
5월 15일부터 팀 훈련에 무단으로 결석하더니,
모든 사람과 연락이 두절됐으며, 일본 경찰은 수색중이라고 한다. 미·일 통산 100승-100홀드-100세이브를 기록한 우에하라 코지는 "카도쿠라씨 도대체 어디에?"라며 "무사하기를 바란다"고 전했고, 후지TV의 MC 타니하라 쇼스케도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걱정했다. 6월 2일 요코하마의 한 공원에서 노숙자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했으나, 아내를 통하여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했지만 6월 6일 아내가 블로그를 통해 "집에 잘 돌아왔다, 죄송하다" 등의 말을 남기며, 카도쿠라의 실종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2021년 7월, 카도쿠라의 아내를 통해, 카도쿠라가 다시 한번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6월 23일 이후로, 3주가 넘게 지난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
318642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2 | 차미연의 손에잡히는경제 | |
318643 | 312964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3 | 퍼스트레이디 | |
318644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4 | 지오토 | 지오토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645 | 10645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5 | 그리스 디아스포라 | 그리스 디아스포라(ελληνική διασπορά)란 전통적인 그리스 본토에서 벗어나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 이주민들을 말한다. 대개 남동부 유럽이나 소아시아에 분포한다. 이 디아스포라(離散)의 구성원은 그들의 정체성 규정 혹은 본토를 떠난 그들 조상들을 기준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역사.
고대.
고전 그리스에서 로마 시대까지.
고대에 발칸반도와 소아시아에서 내려온 그리스 부족들이 바깥 세계로 무역과 식민지 건설을 확대하면서 그리스의 문화, 종교, 언어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중해와 흑해 연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부, 리비아 북부, 에스파냐 동부, 프랑스 남부, 흑해 연안에 그리스식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리스인들은 400개 이상의 식민시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왕조를 정복하면서 헬레니즘 시대가 개막되는데, 이 시대에 그리스의 새 식민화 물결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나갔으며, 이집트, 서남 아시아, 인도 북서부에서 그리스인들이 지배 계급을 이루게 된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들로 이주했는데, 그 범위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인도, 쿠웨이트까지 이르렀다. 셀레우키아,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같은 헬레니즘 도시는 로마 시대까지 세계적으로 큰 규모의 도시였다.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 그리스어는 제국 전역에서, 특히 동부 지역에서 라틴어 대신 링구아 프랑카의 지위를 누렸다. 기원후 4세기경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화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에 정교회가 뿌리내리면서, 정교회는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다.
중세.
7세기에 비잔티움의 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중세 그리스어를 제국의 공식 언어로 정했다. 그리스어는 레반트 지역을 비롯한 지중해와 흑해 지역에서 계속 쓰여 상인, 관료, 이주민 등 지역 주민 사이에서 그리스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얼마 안되어 이슬람 세력이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했다. 대개 그리스 주민들은 계속 지역에 남아 할리파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전 그리스 저작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데 도움을 주어 초기 이슬람 철학과 중세 이슬람의 과학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것이 다시 비잔티움 제국의 과학에도 기여했다. 이슬람 지배를 받던 그리스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중 12세기의 알 하지니가 유명하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이탈리아를 향한 탈출.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옛 그리스 땅을 정복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많은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피난을 갔다. 이들이 이탈리아로 흘러들어가면서 그동안 서유럽이 접하지 못했던 여러 그리스의 고전들도 함께 가져왔다. 덕분에 이들은 유럽 르네상스가 발흥하는 데 이바지했다.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은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에 자리잡았다.
근현대.
19세기.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후로 그리스 디아스포라는 이 신생 국가에 중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본국에 자금을 대주고 해외의 정세를 파악했다. 그리스 상인 가족은 이미 다른 나라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이 혼란기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직물과 곡물 등을 교역하던 해외 지중해 연안 지역(프랑스의 마르세유, 이탈리아의 리보르노, 칼라브리아, 바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러시아(오데사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영국(런던, 리버풀)에 새 둥지를 틀었다. 사업은 흔히 대가족 전체가 함께 경영하는 식이었으며,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그리스 정교 교회에 아이들을 보냈다. 시장이 변하고 이들이 더욱 성장하면서 랄리나 바글리아노 형제처럼 어떤 집안은 그리스인 지역 사회의 자금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여 해운업자로 성장하기도 했다. 디아스포라 그리스인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이들은 레반트, 북아프리카, 인도, 미국까지 진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이후 정치 상황이 어느정도 안정되자 몇몇 이산 가족들은 신생 독립국 그리스로 돌아와서 이 나라의 (특히 아테네에서) 문화, 교육, 정계에서 중요 인사가 되기도 했다. 해외 그리스인들의 자금과 지원은 이들 가족들을 창구로 삼아 본토로 들어왔으며, 그리스 국립 도서관같은 기관들을 지원하고, 자연 재해가 일어나면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20세기.
20세기에 접어들자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고국 그리스 본토나 키프로스를 떠나 미국, 영국,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멕시코, 남아프리카로 떠났는데,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 대전(1939~45), 그리스 내전(1946~49),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1974)에 특히 두드러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벌어진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 ~ 1922년)으로 인해 오늘날 터키 땅에 살던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예부터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로 갔으나, 소련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스 내전 이후 일부 좌파 활동가들과 그 가족들이 정치적 이유로 유럽의 공산국가로 이주했다. 헝가리에는 그리스 이주민들이 완전히 새로 건설한 마을 벨로이안니스가 있다.
그 밖에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나라로는 스웨덴이 있는데, 오늘날 15,000명이 넘는 그리스계 스웨덴인이 살고 있다.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돌아갔지만, 이들 나라에는 아직도 상당한 수의 1세대, 2세대 그리스인들이 남아 그리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
1950년대 이집트에서는 나세르 대통령이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을 추방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로부터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스인들이 이 도시의 사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유럽과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자, 수세대에 걸쳐 자신들의 그리스 가계(家係)가 "사라진" 디아스포라 그리스인들이 현대 그리스의 아테네나 테살로니키 같은 주요 도시 지역 혹은 키프로스로 이주했다. 그루지야에서 그리스로 온 사람도 매우 많다.
폰토스 그리스인인 흑해 연안의 그들 땅에서 온 그리스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 국적.
그리스 바깥에서 태어났어도 그리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화를 통해 그리스 시민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사람의 부모와 조부모가 그리스인으로 태어났음을 증명해야 한다. 즉 신청자 본인의 출생 증명서 뿐 아니라 그리스 조상의 출생 증명서와 혼인 증명서도 필요하며, 그리스 시민권을 가진 친척과 신청자 사이의 관계가 증명되게끔 모든 일족들의 출생 증명서도 필요하다.
현재.
그리스 디아스포라의 중심지로는 시카고, 런던, 뉴욕, 멜버른, 토론토가 있다.
그리스 외무부 산하의 그리스 해외 일반국에서는 그리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여러 연구 자료를 축적해왔다.
오늘날 그리스와 키프로스 바깥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총인구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 수가 3백만 명 정도로 나온다. 그리스 해외 위원회(SAE)의 추정치에 따르면 약 7백만 명이라고도 한다. 해외 해당지역 사회에 통합되거나, 이민족과 결혼하거나, 그리스어를 버리는 경우 등도 디아스포라 그리스인을 정의하는 데 영향을 준다. |
31864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6 | 휠체어 테니스 | 휠체어 테니스(wheelchair tennis)는 하반신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들을 위한 테니스의 한 형태이다. 코트, 공, 라켓 및 스코어링 방식 등 전반적인 규칙은 일반 테니스와 동일하지만, 선수들이 특별히 고안된 휠체어를 사용하면서 공을 두 번까지 튀기는 것이 인정된다는 점이 다르다.
휠체어 테니스는 패럴림픽 공식 종목이며 그랜드 슬램 대회에도 별도의 부문이 존재한다. 경기 방식은 크게 남자와 여자, 4인 경기(Quads)로 나뉘며 각 경기 방식마다 단식과 복식이 있다. 4인 경기는 사지마비 장애인을 위한 경기 방식으로, 장애인 올림픽 등을 비롯한 일부 대회에서는 혼합 경기(Mixed)라고 불리기도 한다. 4인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라켓을 테이프로 손에 고정시킨 채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
역사.
휠체어 테니스는 1976년 휠체어 테니스의 창시자와도 같은 존재인 브래드 파크스(Brad Parks)를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후로 다른 장애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장애인들을 위핸 치료 요법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휠체어 테니스는 처음 시작된 이후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가서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장애인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처음 도입되었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사상 최초로 정식 종목으로 도입되었다.
메이저 대회.
휠체어 테니스 국제 대회는 "NEC 휠체어 투어"라는 이름으로 국제 테니스 연합(ITF)에 의해 운영된다. 휠체어 테니스에는 슈퍼 시리즈 (super series: SS)라고 불리는 4 개의 탑랭커 메이저 대회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 호주 오픈 (멜버른), 브리티시 오픈 (노팅엄), 재팬 오픈 (이즈카, 후쿠오카), 그리고 US 오픈 (샌디애고)이다. 또한 월드 팀 컵 국가 대항전이 존재하며, 연말에는 탑랭커 선수들만 출전하는 시즌 파이널 대회로서 NEC 휠체어 테니스 마스터스 대회 (단식) 및 카모치 복식 마스터스 대회 (Camozzi Doubles Masters tournaments)가 열린다. 여기에 더해 4대 그랜드 슬램 대회인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에 휠체어 테니스 부문이 있다.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정식 종목으로 경기가 이루어진다.
기타.
휠체어 테니스계에서는 네덜란드가 전통적인 강국으로, 장애인 올림픽 및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많은 네덜란드 출신 선수들이 우승을 차지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선수로는 과 등이 있다. |
318648 | 1054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48 |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 |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의 재임기간은 대통령의 임기와 동일하다.
법에서 명시된 권한이나 요구되는 임무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대통령의 해외순방시 동행, 국내외 귀빈 방문시 접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에 따라서는 복지, 교육, 문화 등의 분야에서 대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대통령의 배우자가 여성인 경우 First Lady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남성인 경우 First Gentleman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수행한 권한대행의 배우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부인 중 실제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수행한 사람으로는 허정의 부인 백귀란이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 맞이에 참여했다. |
318650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0 | 46610 B612 | |
318651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1 | 모용위 | 연 유황제 모용위(燕 幽皇帝 慕容暐, 350년 ~ 384년, 재위: 360년 ~ 370년)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의 마지막 황제이다.
생애.
모용위는 모용준(慕容儁)의 셋째 아들로 350년에 태어났다. 형인 모용엽(慕容曄)이 죽었기 때문에 35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60년에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용위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慕容恪)이 이끌었는데,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62년에 모용위는 동진(東晉)의 낙양(洛陽)을 공략하여 365년에 함락시키고 동진의 황제와 비를 사로 잡아 끌고가 노예로 삼아 동진을 멸망시켰다.이후 남아 있던 동진의 하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366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다시 국정을 맡았다. 모용평은 부패하여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졌다.
369년에 동진의 잔당인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평은 전진(前秦)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慕容垂)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전진의 부견(苻堅)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에 왕맹(王猛)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鄴)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다.
383년에 비수대전(淝水大戰) 때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도망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에 부견의 암살을 모의하였다고 하여 살해당했고 400년에 모용덕(慕容德)이 모용위에게 시호를 올려 유제(幽帝)라고 하였다. |
31865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2 | 언중유쾌 | 이외수의 언중유쾌는 2008년 10월 13일부터 2009년 10월 16일까지 방송된 MBC 표준FM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9시 35분부터 오후 10시까지 방송하였다. |
31865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6 | 아크 리눅스 | 아크 리눅스(Ark Linux)는 리눅스 계열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로 만든 이는 베른하르트 로센크랜저(Bernhard Rosenkränzer)이며 오늘날 다수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기본 GUI는 KDE이며 사용하는 꾸러미 형식은 RPM이다. 마지막 판은 2008.1(2008년 5월 15일에 나옴).
구성.
아크 리눅스 중심 체제(코어 시스템)는 사무 도구, 인터넷 접속 도구, 인스턴트 메시지 도구, 파일 공유 도구 등 새 일반 데스크톱 사용자가 필요로 할 것들을 CD 1장에 담은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 밖의 다른 것(서버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도구 등)은 담겨 있지 않다. 중심 체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은 APT나 추가 디스크를 통해 바로 설치할 수 있으며 엔비디아의 3D 드라이버, 어도비 플래시같이 '공짜지만 소스코드는 공개되지 않은' 소프트웨어들 또한 별도의 저장소를 통해 받을 수 있다.
꾸러미 관리.
아크 리눅스는 APT와 RPM으로 꾸러미를 관리하며 GUI 프론트엔드로는 키냅틱(Kynaptic - 시냅틱의 Qt 이식판)이 포함되어 있다. 꾸러미 저장소는 다음과 같이 4개가 있다.
일반 업데이트는 조선소 트리와 조선소 - 기증 트리로부터 꾸러미들을 받는 것이다. |
318657 | 1476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7 | 단독성 | |
318658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58 | 바닥함수 | |
318660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0 |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목록 | 다음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제작/배급한 극장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의 목록이다.
클래식에 포함된 장편 영화들은 모두 이전의 디즈니 피처 애니메이션이었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의 일부) 명백하게 정해진 것을 제외하면, 이 목록의 모든 영화는 전통 2D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카우 삼총사》 (2004년 4월 2일 개봉)를 발표하면서 마지막 전통 애니메이션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발표하였고, 《치킨 리틀》 (2005년 11월 4일 개봉)을 개봉하면서, 앞으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영화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2006년 7월, 개발 중에 있던 새로운 전통 애니메이션 영화 《공주와 개구리》가 공개되면서 앞서 했던 발표는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디즈니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서는 잘생긴 주인공들이 착하고 똑똑하면서 악을 물리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 반면, 악한 주인공은 모두 못생기거나 악마나 괴물처럼 못생겨서 나쁜 일을 일삼거나 피해를 주지만 끝내 당하거나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과 대조되는 영화의 대표적인 것은 슈렉이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 줄거리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만든 영화도 쿵푸팬더가 대표적인 영화다. |
318661 | 3236925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1 | 김태형 (1967년) | 김태형(金泰亨, 1967년 9월 12일 ~ )는 전 KBO 리그 OB 베어스의 포수이자, 현재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다.
선수 시절.
OB 베어스 시절.
인천전문대를 중퇴하고 단국대 체육학과 편입 후 졸업해 1990년에 입단하며 1980년대를 주름잡던 팀의 포수 듀오 조범현과 김경문을 밀어내고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비형 포수 중 하나였고, 주전으로 활동하며 상대적으로 장타력이 좋은 박현영과 출장 시간을 이상적으로 배분했으며, 김인식감독으로 취임한 후 일발 장타력을 인정받던 이도형까지 포수진에 가세한 덕분에 팀의 포수진은 현재까지도 내려오는 전통의 포수 왕국의 컬러를 확립했다. 공격력 부분에서 백업인 박현영, 이도형에 비해 열세인 덕분에 특출난 시즌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한 일등 공신이었다. 이후 국가대표 출신 초대형 포수 유망주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이 연달아 입단하며 그의 주전 포수 자리를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하는 시도가 진행됐는데, 의외로 최기문을 밀어낸 진갑용이 타격, 수비 양쪽에서 부진을 거듭하며 확실한 후계자로 믿음을 주지 못했다.
두산 베어스 시절.
1999년부터 신인 열세로 평가받던 홍성흔이 의외로 주전 포수를 차지하며 홍성흔의 백업과 수비 강화를 위한 역할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진행됐다. 2001년에 플레잉코치로 보직이 변경됐으며, 6경기 출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선수 시절 비슷한 커리어의 수비형 포수였고, 이후 현역 감독으로 경쟁 중인 대선배 조범현, 김경문보다는 현역 시절 타격을 잘했다.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 5적 네임밸류로 불렸으나 당시 구단주가 KBO 회장이면서 두산 그룹의 오너였던 박용오 회장이었고 선수협에 가입하면 구단 자체를 없애 버린다고 엄포를 놓자 그는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구단과 선수협 가입 불가에 합의했다. 그러나 구단이 심정수를 트레이드시키며 구단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다시 선수들을 이끌고 선수협에 가입했다.(김태형은 현역을 은퇴 할 때 한국시리즈 우승을 마무리를 했었다.)
야구선수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
현역 마지막 시즌부터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고 다음 해에 은퇴하며 10년 동안 배터리코치로 활동했다. 홍성흔 이후 포수 자원인 용덕한, 양의지 등을 강인권 코치와 함께 프로에 안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김광수 감독대행 체제로 2011 시즌이 끝난 후 감독 후보군에 올랐지만, 당시 투수코치였던 김진욱이 신임 감독이 됨에 따라 팀을 떠나 SK 와이번스의 배터리코치로 옮겼다.
SK 와이번스 코치 시절.
수비적으로는 아직 모자란 모습을 보였지만 포수보다 플래툰으로 많이 나왔던 이재원이 주전 포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이 컸다. 3년간 배터리코치로 있다가 2015년에 당시 감독이었던 송일수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친정 팀으로 돌아와 감독을 맡았다.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취임식 때 그는 공격적인 야구를 선보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5년 감독 부임 첫해 페넌트레이스 성적 79승 65패, 3위로 마쳤고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에서 SK를 꺾고 올라온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4차전에 크게 뒤지던 경기를 7회부터 9회까지 연속 9득점을 올리며 7점 차 대역전승을 해 3승 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어 NC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벼랑 끝에 몰렸으나 4차전 더스틴 니퍼트, 5차전 선발투수 장원준의 활약으로 3승 2패로 NC를 꺾고 감독 부임 첫해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에 역전패를 당했으나 2차전부터 5차전을 내리 이기며 14년 만에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 우승으로 그는 역대 4번째로 감독 부임 첫 해에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 됐고, 이 공로로 2015 시즌 감독상을 받았다. 1995년 현역 시절, 2001년 코치 시절, 2015년 감독 시절 우승해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기록을 세웠다. 2016년 5월 11일 SK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전반기 후 후반기를 앞두고 3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
318663 | 7531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3 | 오모로소시 | 오모로소시()란 류큐국의 가요집(歌謠集)이다. 1531년부터 1623년 사이에 슈리 왕부(王府)에 의해 편찬되었다. 류큐국의 옛 노래인 오모로를 모은 것이다. 히라가나 표기는 역사적 표기법에 따라 쓰며, 현대 가나 사용법에서는 おもろそうし라고 쓴다. 소시(そうし|草紙)는 히라가나에 의한 산문으로 일본 본토의 영향을 받은 명명으로 보인다. 오모로란 옛 류큐어로 "생각"을 나타내는 우무이(うむい) (일본어로는 오모이(おもい)라고 함)에서 왔으며, 제의(祭儀)에 쓰였던 특수한 말인 노리토[祝詞]였으리라 생각된다. 모두 2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왕,노로(상급무녀),영웅,시인,항해자등의 인물을 칭송하고, 풍경,천문,전쟁,신화등이 노래의 소재이다. 그리 많지는 않으나,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한 것도 있다. 총 22권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으나 편찬시기가 들쑥날쑥해서 1권이 편찬된 이후 약 70년 정도 중단되었으며, 사쓰마의 류큐침공이후인 1613년에야 제 2권이 다시 작성되었고, 10년 후인 1623년에 나머지 20권이 한꺼번에 편찬되었다.
※「/\」=되풀이 부호
표기양식.
히라가나를 주로 쓰고, 약간의 한자가 섞였다. 짧게는 2줄부터 길게는 40줄에 달하는 운문으로 댓구를 활발히 활용하하여 류카(琉歌)의 원류를 이룬다. 또한 현대 오키나와어에 없는 옛말이 꽤 많다.
사료적 가치.
류큐국의 민속을 아는데 반드시 필요한 1급 사료이다. 류큐학의 창시자인 학자 이하 후유(伊波普猷)는 오모로소시의 해독과 번역을 중심작업으로 삼았다. 이 책의 해독을 통해 류큐국 제의 양상을 알 수 있고, 제정일치 사회임을 파악하는 여러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큰줄기로서의 해독은 완료되었으나, 세부 사항에서는 아직 해석이 미흡한 부분도 많다. |
31866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4 | 비비디 바비디 부 | 비비디 바비디 부()는 1948년에 알 호프만과 맥 데이비드, 그리고 제리 리빙스톤이 작사한 코믹송이다. 이 노래는 1950년에 개봉된 디즈니 만화 신데렐라에 차용되었다.
1949년 11월 7일에 페리 코모와 폰테인 시스터즈의 목소리로 녹음이 되었으며 RCA 빅터 레코드에서 출시하여 그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음반은 빌보드 차트 14위에 올랐다. 또한 HMV에 의해 영국에서도 출시 되었다.
또한 이 노래는 조 스태포드와 고든 맥래의 목소리로 다시 녹음되었으며, 이들이 부른 노래가 수록된 음반(카탈로그 번호 782)은 캐피털 레코드가 출시하였다. 이 음반은 1949년 12월 16일에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에 진입했으며, 7주 동안 타차트에 올라 있었다.
이 노래는 캐쉬 박스에서 집계한 최고 판매량에서 7위로 기록되었다.
가사.
이 노래 가사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거의 아무 뜻도 없다.
그러나 1948년에 녹음했을 당시에는 영어가사가 부분적으로 추가되었는데, 이는 신데렐라가 개봉했을 때 반영이 되지 않았다. 또한 노래의 빠르기는 녹음된 판마다 다양했다.
패러디.
일본의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는 자신이 디즈니 만화의 팬이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하였다. 실제로 그의 작품인 드래곤볼 시리즈에는 세 명의 캐릭터가 등장을 하는데, 나쁜 마법사인 "비비디(Bibidi)"와 그의 아들 "바비디(Babidi)", 그리고 강한 악마인 "부(Buu)"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이름은 이 노래 제목에서 파생이 되었다.
이 노래는 또한 만화 핑키, 엘미라 그리고 브레인(Pinky, Elmyra & the Brain)의 삽화 중 하나였던 "Narfly Ever After"에서 패러디 되었다.
대한민국의 이동통신업체인 SK텔레콤은 2009년 2월부터 이 노래의 판권을 구입하여 "비비디 바비디 부 캠페인"을 전개시켰다. |
318665 | 919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5 | 비비디바비디부 | |
31866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6 | 박옥수 | 박옥수(朴玉洙, 1944년 ~ )는 대한민국의 목사다. 선교단체인 기쁜소식선교회(Good News Mission)와 청소년 단체인 국제청소년연합(Internatioanl Youth Fellowship, IYF), 범기독교 목회자 단체인 기독교지도자연합(CLF)을 설립했다.
1962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을 하던 케이스 글라스(Kays Glas, WEC, 네덜란드), 데릭 얼(Derek Earl, WEC, 영국), 딕 욕(Dick York, Sheild of Faith Mission, 미국), 말론 베이커(Marlon Baker, Christian in Acion, 미국) 등 해외 선교사들이 설립한 선교학교(대구)에서 훈련을 받고,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미국 LA의 한 교포 학생을 한국으로 데려와 교육한 일을 계기로 청소년 교육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1년 국제청소년연합(IYF, International Youth Fellowship)을 설립해 국내 및 해외에서 청소년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박옥수 목사는 국제청소년연합(IYF)을 통해 청소년 인성 교육인 ‘마인드교육’을 국내 및 해외에서 추진하고 있으며, ‘마인드교육’이 성경에 나타난 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핵심이 ‘사고력’, ‘자제력’, ‘교류’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박옥수 목사는 2017년 3월, 뉴욕에서 범 기독교 목회자 포럼을 개최한 것을 계기로 기독교지도자연합(Christian Leaders Feliowship, CLF)을 설립했다.
기독교지도자연합(CLF)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를 모토로 하며, 교단과 교파, 교리를 떠나 다양한 소속의 기독교 목회자와 리더들이 참석하는 컨퍼런스와 포럼 등을 뉴욕과 서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개최하고 있다. |
318668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8 | 오오노 스스무 | |
318669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69 | 오오노 카츠오 | |
318670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70 | 오오타니 마사에 | |
318671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71 | 오오하시 마사히로 | |
318673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73 | 오오타 히카리 | |
318674 | 919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74 | Bibbidi-Bobbidi-Boo | |
31867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79 | 5툴 플레이어 | 5툴(five-tool) 플레이어는 야구에서 장타력, 컨택트, 스피드, 수비, 송구능력을 모두 갖춘 선수를 뜻한다 |
318682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82 | 2004년 대한민국 병역 비리 사건 | 2004년 대한민국 병역 비리 사건은 신종 수법을 통해서 연예인들과 야구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병역을 불법면제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이후 총 관련자 136명 중 43명이 구속되었고, 48명은 불구속 입건, 3년의 공소시효 지난 연루자 모두 재검 거쳐 재입대를 하였다. 병풍이라고도 한다.
사건 개요.
2004년 9월 7일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는 프로 야구 선수 50명이 불법 병역 면제를 받거나 시도했으며, 이들 중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선수들에 대해 처벌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32명의 선수가 구속되거나 구속 영장이 신청되었고, 24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KBO에서는 56명 전원에 대해서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후 서울지방경찰청은 야구 선수들을 시작으로 연예인, 대학·프로야구, 일반인, 전국으로 확대하여 수사를 진행되었다. 10월 25일 경찰청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중 송승헌, 신승환, 장혁, 한재석 등의 유명 연예인들이 포함되었다. 연예인들 중 신승환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송승헌, 장혁, 한재석은 그해 11월 4일 재검을 받았다. 그 뒤 한재석은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에 입대하여 2007년 소집해제하였다. 송승헌과 장혁은 그 다음 날인 11월 16일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여 2006년 제대하였다.
한편 야구 선수들은 모두 8개 구단 51명이 연루되었는데, 이들 모두 2004년 잔여경기 출장이 금지되어 시즌 아웃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하여 총 71명이 재검을 받았고 대부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였다. 한편 병역 비리를 주도한 브로커 우 모와 김 모는 2001년부터 76명에게 병역을 면제시켜주는 조건으로 1인당 최고 7,000만원씩 총 42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 11월, 법원에서는 해당 야구선수들에게 징역 8월 ~ 10월의 실형을 선고했으며, 수형 후 복무할 것을 명했다.
프로 야구 구단별 상황.
LG 트윈스.
이동현의 경우 부진했던 진필중을 대신하여 마무리로 썼을 정도로 LG에서는 중요한 중간계투진이었다. 이동현은 행정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판결 후 수술로 재활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지만 부상이 악화되어 조기에 소집 해제되었다. 심수창은 구속되어 8개월형을 선고받고 2005년 재검에서 면제판정을 받았다.
두산 베어스.
불펜진이 대거 연루되어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채상병, 이재우, 이재영은 곧바로 이듬해 입대하여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고 유격수 손시헌은 조금 늦게 입대하여 2009년에 복귀했다. 반면 손시헌이 연루되었을 때 그의 친구였던 이종욱(당시 현대 소속)은 상무에서 복무 중이었다. 손시헌은 이후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재영은 소집 해제 후 2008년 6월에 LG 트윈스로 시즌 중에 트레이드되었다.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병역비리 사건 때 피해가 큰 편이었다. 상단의 표에 없지만 이 사건에 베테랑 투수인 이경필도 연루되어, 시즌 아웃되었다. 이후 이경필은 복귀 후에 1승 2패에 그치고 2007년 한국시리즈 이후 방출되어서, 은퇴 후 현재는 천하무적 야구단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서승화와의 사건으로 부상을 당했던 윤재국은 설상가상으로 비리까지 얽히면서 2004년을 완전히 접고 복귀 후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를 반복했던 임재철도 두산으로 오자마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고 소집 해제 이후 두산에 정착했다. 베테랑들이 대거 연루되는 바람에 두산은 2005년 시즌 개막 전 최하위권으로 예상되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
비리 대상자 중 불펜진이 많아서, 출장 정지 처분 이후 한국시리즈 때까지 불펜 및 배터리 운용에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 당시 배터리 코치였던 전종화 코치도 브로커를 소개시켰던 혐의가 드러나 조사를 받았고, 불구속 처리되었다. 박정환은 성동구치소 출소 후 받은 재검에서 완전히 면제 판정을 받았으나, 공백 기간으로 부진하여 2007년을 끝으로 삼성에서 방출당했다. 이후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여 대타로 주로 나서고 있다. 김현수와 오상민은 이후 삼성에서 방출당하고 각각 두산, LG로 이적했다. 이정호는 박진만이 자유계약선수로 이적할 때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삼성에서 떠난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3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좌완 투수 김형근은 1군 무대에 서 보지도 못하고 연루되어 전력 외로 이탈한 후, 일본 독립 리그에 진출했다. 윤성환과 정현욱, 현재윤은 소집 해제 이후 팀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특히 윤성환은 삼성의 새로운 에이스가 되었다. 곽동훈은 지명 후 병역비리 사실이 드러나 삭감된 계약금에 입단했으며, 곧바로 복무해야 했다. 지승민은 소집 해제 전 교통사고를 당해 방출 통보를 받고 신고 선수로 새로 계약하여 잔류하다가 채상병을 상대로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되었다. 병역비리 사건이 일어난 무렵 같은 해에 삼성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투수 권오준이 해병대에서 제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권오준이 돋보이기도 했다.
한화 이글스.
신민기의 경우 프로 입단 전에는 대표적인 유망주였으나, 제대로 꽃피우기 전에 이 사건에 연루되고 복귀 이후에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해 2009년을 마지막으로 방출당했다. 마정길은 복귀 이후 불펜의 중심이 되었고 조규수는 복귀 후 2군을 전전하다가 2009년 11월 16일에 두산에 트레이드되었다. 한상훈은 2008년 시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한상훈의 자리를 이여상이 대신했고, 2011년 제대하여 좋은 활약을 펼치는 중이다. 이영우마저 이 사건에 연루되어서, 2002년 아시안 게임 우승으로 받은 병역 특례를 박탈당했다. 불펜 투수 박정진도 연루되었으며 복귀한 이후 한때 방출설이 나돌았을 정도로 부진하다가 2010년에 가까스로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롯데 자이언츠.
타격진에서 김주찬과 조성환이 연루되어 투수진보다 누수가 큰 편이었다. 조성환은 이후 자수하였다. 투수 김장현은 병역비리 사건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2009년에 방출당했다. 임경완은 홀드 1위를 기록하던 중 연루되어 부산진경찰서에서 전경으로 복무했다. 이외에도 김사율, 허일상, 최기문도 연루되어서, 그렇지 않아도 최하위를 전전하였던 롯데 자이언츠는 이 사건으로 선수층이 얇아졌다.
현대 유니콘스.
마일영과 정성훈이 연루되었지만 그 외에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정성훈도 이진영과 함께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고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병역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박장희는 복귀 후 2008년에 방출당했다. 이상열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홀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소집 해제 후 크게 감각이 떨어져 서울 히어로즈로 바뀐 이후에도 1패만 기록해 2009년에 방출당했다. 그 후 LG 트윈스에 입단해 활약 중이다.
SK 와이번스.
투수보다는 타자 쪽에서 조금 손실이 있었다. 이진영은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자신은 병역을 기피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하여 행정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때 SK의 리딩 히터였던 채종범은 SK에서 타격이 가장 좋았었기 때문에 SK 입장에서도 손실이 큰 편이었다. 이호준도 연루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마쳤다. 복귀 후 채종범은 김강민에게 주전 자리에서 밀려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좌타자 강혁도 연루되었고 그를 영구 제명에서 풀리게 해 준 방콕 아시안 게임 우승의 병역 특례까지 박탈당했으며 복귀 이후 부진하여 2007년에 방출당했다. 2003년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온 김영수는 현역으로 입대했다. 대한민국으로 U턴한 이후에도 기대 이하였던 투수 조진호는 이 사건으로 인해 SK에서 방출당했다. 이호준, 이진영, 채종범, 강혁, 김영수 외 SK에서 병역 비리에 연루되었던 선수들은 모두 방출당했다.
KIA 타이거즈.
유동훈은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KIA의 핵심 불펜이 되었다. 이현곤은 갑상선 질환으로 의병 제대했다. KIA 타이거즈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으나, 이듬해 최하위로 시즌을 마치고 만다.
그 외.
그 당시 현역으로 뛰었던 선수들 이외에도 몇몇 선수들이 적발되었다. 이미 두산 베어스에 지명되었던 박종섭은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미국 마이너 리그에서 활동하였던 정성기도 연루되어 강제로 귀국, 현역으로 복무를 마치고 다시 도미했다. |
318684 | 33983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84 | 돈 텔 파파 | 《돈 텔 파파》(Don't Tell Papa)는 대한민국의 코미디 영화이다. 2004년 9월 3일에 개봉되었다.
줄거리.
어느날, 모텔에서 뜨거운 만남을 가진 철수와 애란. 이후 애란은 아이를 낳게 됐지만 철수에게 떠넘긴뒤 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이 일로 속도위반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철수는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하지만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모텔 이름을 딴 '초원'이란 이름을 지은후 나이트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 10년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대로 나이트에서 자란 초원은 말투도 행동도 나이트직원이었다. 그리고 이런 초원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
318685 | 125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85 | 현상주의 | 현상론(現象論, )은 다음을 말한다. |
31869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90 | 최능익 | 최능익(崔能翊, 1889년 11월 24일 ~ 1976년 12월 22일,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생애.
최능익은 1916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변준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토대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공작을 지원하였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8월에 통합 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가족.
아들 하워드 최는 1945년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미 해군에 입대하였으나 필라델피아에서 훈련을 받던 중 전쟁이 끝났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미 해군에 재입대하여 인천 앞바다에서 수뢰 탐지 작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
318692 | 10645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92 | 안드레아 팔라디오 |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년 11월 30일 ~ 1580년 8월 19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축가이다. 본명은 안드레아 디 피에트로 델라 곤돌라(Andrea di Pietro della Gondola)이다. 파도바 출신으로 주로 비첸차에서 활약하였으며 비트루비우스와 알베르티의 저서를 연구하여 당대 건축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 자신도 《건축 사서》를 저작하여 비트루비우스의 기술과 남아 있는 건축물과의 상세한 대조를 하였다. 그는 알베르티 이상으로 이론과 실천과의 긴밀한 관련을 실증하였고 더 한층 실제적이어서 후세에 대한 영향도 컸다. 1994년과 1996년에 ‘비첸차 시와 베네토주의 팔라디오 빌라’(City of Vicenza and the Palladian Villas of the Veneto)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생애.
팔라디오는 1508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에서 부친 피에트로 델라 곤돌라(Pietro della Gondola)와 모친 마르타(Marta)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맷돌을 만들어 설치해 주는 장인이었다.
파도바의 석공 바르톨로메오 카바차(Bartolomeo Cavazza)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다가 6년을 하기로 계약되어 있었지만 18개월 후 비첸차로 옮긴다. 1524년 4월에 팔라디오의 대부이자 지방 조각가 빈첸초 데 그란디(Vincenzo de Grandi)의 도움으로 비첸차의 석공 길드에 조수로 가입하였고 페데무로 공방의 조반니 다 포를레차(Giovanni da Porlezza)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였다.
비첸차의 인본주의자이자 당대 최고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잔 조르조 트리시노는 팔라디오의 과학과 수학의 천부적 능력을 알아보고 팔라디오에게 비트루비우스의 책을 읽게 하여 재능을 개발시켰으며 크리콜리의 아카데미 트리시니아나에서 정식으로 인문학 교육을 받게 하였다. 또한 트리시노는 팔라디오를 데리고 1541년, 1545년, 1546년 ~ 1547년, 1549년 네 차례에 걸쳐서 로마를 여행하며 팔라디오가 고대 유적과 르네상스 고전주의 건축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팔라디오의 본래 이름은 안드레아 디 피에트로 델라 곤돌라(Andrea di Pietro della Gondola)였으나 트리시노가 팔라디오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혜의 여신인 팔라스 아테나나 팔라스 여신상을 지칭하는 팔라디온(Palladium)에서 팔라디오라는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측되며 트리시노는 팔라디오가 비트루비우스 고전 건축의 전파자가 되리라 믿었다.
트리시노가 사망한 1550년 이후에는 바르바로 형제가 트리시노를 대신하여 팔라디오가 건축 이론을 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아리스토텔레스 학자인 다니엘레 바르바로는 팔라디오와 함께 1552년에 트렌토, 1554년에는 로마를 여행하였고 1556년에는 《비트루비우스》의 새로운 주해 번역서를 팔라디오와 같이 작업하여 출판하였다. 다니엘레의 동생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가 마르칸토니오 바르바로도 베네치아에서 팔라디오의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바르바로 형제 이외에도 파도바의 코르나로(Cornaro)와 피사니(Pisani) 집안도 팔라디오의 후원자가 되었다.
팔라디오는 설계한 건물만으로도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1570년에 《건축 사서》()를 출판하면서 진정한 명성을 얻는다. 동시에 고전 건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 팔라디오 양식(Palladianism)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팔라디오는 《건축 사서》에서 간결한 형태의 문장과 다양한 도판을 활용하여 건축에 관한 최초의 대중서를 만들었다.
팔라디오는 1580년 8월에 르네상스 시대의 첫 번째 영구적인 실내 극장인 비첸차의 테아트로 올림피코의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테아트로 올림피코를 비롯하여 팔라디오가 끝마치지 못한 건축 프로젝트는 제자인 빈첸초 스카모치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기법.
르네상스 건축은 중세 건축에 대한 반발과 인본주의에 뿌리를 둔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의 차용에서 비롯된 독립적이고 완결적인 형태를 특징으로 하고 비례와 조화를 추구하여 이를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은 설계의 완벽성은 자연의 모방에서 오며 이를 위해 건축의 형태는 기하 법칙에 의해 구성되어야 하며 모듈이 설계 전체의 치수를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비트루비우스는 건물의 구성 요소들 사이에 조화적 통일성을 주장하며 ‘디스포시티오’(dispositio, 조화로운 배치)와 동일한 비례 법칙의 적용을 의미하는 ‘시메트리아’(symmetria, 대칭)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완전수와 인체 비례를 건축 설계의 이상적 체계의 단위로 정의내렸다. 알베르티는 비트루비우스의 두 개념을 ‘콘친니타스’(concinnitas)라는 단일 개념으로 정리하였고 그리스 음계의 화음 체계와 건축의 이상적 비례가 상호 대응한다고 주장하였다.
팔라디오도 비트루비우스와 알베르티의 법칙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스스로 조화수열에서 파생된 숫자로 건물의 치수를 산정하였지만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반영하여 일정량의 치수의 가감을 인정하였다. 한편 팔라디오는 건축 양식의 명확성, 질서, 대칭의 측면에서 합리성을 나타내면서도 고전적인 형태와 장식 모티브들을 사용하였는데 고전 건축이 자연의 법칙을 좇아 구성된 자연스런 건축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영향.
팔라디오 양식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곳은 영국으로 17세기 초에 이니고 존스가 팔라디오 양식을 도입한 이후 18세기 전반에는 대대적인 팔라디아니즘 운동이 일어나 팔라디오 양식의 컨트리 하우스가 유행하였다. 영국의 팔라디오 양식은 바로크 건축의 과도하고 기형적인 변형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하였고 팔라디오와 이니고 존스의 건축에 기초하여 엄격한 고전 건축을 국가적인 건축 규범으로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니고 존스는 팔라디오와 스카모치의 건축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형성하였고 그리니치에 팔라디오 양식의 퀸스 하우스를 설계하였다.
영국의 팔라디오 양식을 집약시킨 건축가는 콜린 캠벨과 벌링턴 백작 리처드 보일이었다. 캠벨은 바로크 양식의 과도한 장식성을 비판하고 고전 건축의 단순미의 부활을 주장하며 팔라디오 양식을 이상적 모델로 받아들였다. 벌링턴 백작은 1725년경에 팔라디오의 라 로톤다를 모방하여 런던 근교에 치즈윅 하우스를 설계하였다. 18세기 영국에서 부흥한 팔라디오 양식은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아메리카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한편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팔라디오 양식은 신고전주의로 이어졌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팔라디오 양식은 18세기 중엽에 영국의 건축 서적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미국 제3대 대통령으로서 잘 알려진 토머스 제퍼슨은 팔라디오 양식을 기초로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몬티첼로를 설계하였으며 팔라디오 양식을 공공 건축에 적용하여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팔라디오의 도면의 대부분은 현재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에 남아 있다. 1613년 ~ 1614년에 이니고 존스가 팔라디오의 자녀에게서 구입한 도면 약 250매와 1719년에 벌링턴 백작이 입수한 60매의 도면을 합한 것이다. 이 외에 비첸차 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자료가 있다. 1979년에 설립된 미국 팔라디안 연구 센터는 팔라디오에 대한 이해를 향상하는 연구와 조사를 하고 있다.
작품 목록.
팔라디오의 작품은 도시의 건축인 팔라초, 전원의 빌라, 대부분이 베네치아에 세워진 종교 건축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외에도 극장, 문, 다리 등이 있다. 현존하는 작품만으로 40채가 넘으며 미완공인 것, 파괴된 것, 불확실한 것까지 합하면 수가 두 배에 이른다. |
318693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93 | 팔라디오 | |
318694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94 | 니잠알물크 | |
318695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695 | 니잠 알 물크 | |
31870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0 | 찰보리 | 찰보리는 1978년 정부의 다수성 품종 육성정책에 의해 개발되었다. 찰성이 있으며, 일반보리에 비해 흡수율이 좋다. 다른 작물에 비해 병해충이 심하지 않아 농약을 살포할 필요가 없다. 비타민과 무기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쌀의 보조식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섬유질이 많아 소화가 잘되고 대장 기능을 향상시켜 준다. 특히 베타글루칸 성분이 쌀의 50배, 밀의 7배가 많아 지방축척을 억제하여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져 있고,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추어 주어 심장질환과 당뇨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
318701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1 | 소시민 (동음이의) | 소시민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702 | 7222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2 | 녹색연합 | 녹색연합(綠色聯合, Green Korea United)은 1991년 6월 6일 창립한 대한민국의 환경운동단체이다.
녹색연합이 폭로한 '미군 한강독극물(포름알데히드) 방류사건 (2000년 2월)'은 영화 《괴물》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월간 <작은것이 아름답다>와 회원 소식지 <녹색희망>을 정기 발행하고 있으며, <자연을 담은 소박한 밥상> 등의 친환경생활 관련 서적을 출간하고 있다. 아울러 <종이 안쓰는 날(No Paper Day)>, <지구를 위한 한시간(Earth Hour)>,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 등의 환경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
318703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3 | 프티부르주아 | |
318704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4 | 프티 부르주아 | |
318705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5 | The Way I Am | The Way I Am(더 웨이 아이 엠)은 다음을 의미한다. |
31870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6 | 전제 | 전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707 | 1102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7 | Session Description Protocol | |
318709 | 5295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09 | 가네코 야스지 | 가네코 야스지(, 1920년 ~ 2010년)는 옛 일본제국 육군의 병사이다. 중일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종전 후 일본군의 전쟁 범죄에 관해 증언을 남겼다.
이력.
야스지는 지바현에서 태어났다. 1940년 4월 징병검사에서 합격판정을 받고 그해 가을 소집되어 이등병으로 북지나방면군 독립혼성제10여단 제44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조선에 배치되었다가 일본의 항복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억류되어 5년간 시베리아에서 억류생활을 하였고,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어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소용되었다. 여기서 5년 동안 구금된 이후, 1956년 기소면제 판정을 받고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1990년대부터 자신이 체험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증언하였으며 2000년에는 국제여성전범재판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증언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귀신》(「日本鬼子」)에 출연하여 증언했다. 한편 가네코와 함께 이 영화에 나와 증언을 한 일본군 출신들 중에는 중국의 포로 수용 시설에 있었을 때, 세뇌 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잘못을 부정하려는 이도 있다.
우익 성향의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와 와타나베 도시오는 1940년에 입대한 가네코가 1937년의 남경공략전에 참전했다고 하는 등의 증언 상의 오류를 들어 가네코의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증언 내용.
"일본이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15년이나 계속되었던 중국 침략에서 수많은 죄를 범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코바야시 씨에게 말한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예로부터 거짓말은 도둑질의 씨가 된다고 했다. 하물며 《전쟁론》에 나오는 침략 전쟁은 살인 강도와 똑같다. 무기를 들고 다른 나라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반항하면 죽이는 것이다. 《전쟁론》을 그리려면 전쟁의 무서움과 잔혹함, 그리고 슬픔을 그려서 두 번의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역사의 사실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군 병사의 범죄, 가해 행위가 군의 방침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보고, 가네코와 같이 자신의 행동을 고백하는 전직 병사를 "일부의 극악인"이라고 평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들은 극악인이었다. 피해자도 우리를 악귀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악귀로 만들었나? 누구도 좋아서 악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배우는 게 아닌가? ? 군대는 극악인이 되도록 교육하지 않았나? 하타도 군대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군대는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한다. 전쟁에 나간다면 하타도 똑같은 "극악인"이 될 것이다." |
318711 | 3242655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1 | 다단계 마케팅 | 다단계 마케팅(multi-level marketing, MLM) 은 "제조업자 → 도매업자 → 소매업자 → 소비자"와 같은 일반적인 유통경로를 거치지 아니하고, 다단계(多段階), 즉 다(많은) 단계의 회사 및 판매원들이 거래에 참여하는 유통방식이다. 유통방식뿐 아니라 후원수당에서도 다(많은)단계적 개입이 이뤄지는 데, 이렇듯 다단계의 본질적 의미에서 후원수당의 단계적 배분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개요.
자사 제품을 구입한 고객을 판매원같이 이용하여 제품판매와 유통망을 확대해 나가는 판매방식이다. 이로써 본부가 상품을 판매할 출자자를 모집하고, 그 출자자가 다시 다른 출자자를 가입시키면 보수를 받게 된다. 피라미드식 판매방식이라고도 한다. 194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연대판매 방식이며 최근에는 일본 등에도 외국기업 진출을 계기로 보급되고 있다. 회사로서는 의료보험은 물론 퇴직금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판매원으로서도 여가 활동으로 능력에 따라 이익을 받을 수 있다. 또 소비자가 판매원으로 둔갑해 조직을 가지치기식으로 확산시켜 가기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유통망을 방대하게 형성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판매조직이 상품의 판매와는 관계 없이 무원칙적으로 확대되고 말단 출자자가 대량의 재고를 책임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 대한민국에는 프랑스 화장품 수입 판매로 도입되었는데 소비자 피해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은 최근 피라미드식 판매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자 방문판매법을 제정하여 소비자가 충동구매를 했거나 강매당한 경우, 14일 이내에 해약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문제점.
대다수의 업체들이 제공하는 시스템에서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에서 정의한 1단계판매원(다른 판매원의 권유를 통하지 아니하고 가입한 판매원), 즉 상위스폰서의 회원번호가 필요하지 않은 1단계판매원과 그 하위 2단계 및 3단계이상 판매원은 시작부터 공평하지 아니한 기회가 부여되고 있다. 각 업체마다 하위 판매원의 매출 누적 방식과 각 판매원에게 배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유통구조.
일반적으로 제조회사 > 판매회사 > 다단계판매원으로 간단한 유통구조로 볼 수 있으나, 다단계판매원은 각각의 레벨이 다른 판매원들이 존재하고, 하나의 매출로 하위의 모든 판매원들이 수당배분에 참여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무한의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다.제조회사판매회사1단계판매원2단계판매원3단계판매원...n단계판매원이렇듯 다단계판매의 유통구조는 매출하나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무한이 많은 다단계판매원들이 나눠가져야 하는 유통구조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사례.
합법적 다단계 마케팅을 사칭한 피라미드형 사기는 내구재의 단일 상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품질 대비 가격이 턱없이 상식이상으로 높게 책정되어 이익을 얻는 형태가
이런 불법적인 업체는 좋은 상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빠른 시간 내에 더 많은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피라미드형 사기는 정상적인 합법적 다단계판매 형태를 넘어 네트워크 마케팅을 사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단계판매업체는 방문판매업체와 다르나 혼동해서 사용되기도 하며, 이들은 소비자피해보상보험인 공제조합에 등록하게 되어 있다. 네트워크 마케팅과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법률적인 용어는 다단계판매이다.
지엔지피.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웰빙테크에 불법피라미드 영업으로 인한 과징금 44억원을 부과했다. 이는 ‘단군 이래 최대 사기사건’으로 불리는 제이유 사건의 피해액 94억원에 이어 두번째에 달하는 액수이다. 공정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웰빙테크는 취업을 미끼로 대학생 등 청년층 구직자를 모집해 귀가 방해, 폭언, 협박, 청약철회 방해 등으로 2만여명에게 1000억원어치의 물건을 강매하였다.
거마대학생.
거마대학생은 서울의 거여동과 마천동에 거주 하며 합법적인 다단계판매 회사와 유사한 형태로 만든 불법적인 사기회사에 빠진 대학생들을 일컫는다. 불법 사기 업체들은 속이기 쉬운 20대 초반 대학생들을 주로 상대하며 거여동과 마천동에 주로 합숙을 시키며 사기 행각에 동참하게 만든다.
유사 암호화폐 사기.
2017년 10월 초기 코인 공개(ICO)를 했던 유사 암호화폐 '헥스트라 코인'에 투자했다가 총 60억 원 가량의 피해를 입은 50여 명이 2018년 7월 30일 집단 소송을 하였다. 헥스트라 코인의 판매에는 다단계 방식이 적용됐다. 투자자들이 다른 투자자를 유치하면 '후원 보너스'를 주는 식이었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헥스트라 코인에 대해 "암호화폐 라는 허울을 사용했을 뿐 전형적인 다단계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코인 최초 가격인 0.9달러로 계산하더라도 최소 300억 원 이상의 피해가 예상되는 사례이다. |
318712 | 1070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2 | 적성어 배척 | 적성어 배척(敵性語排斥)이란 중일전쟁 및 2차세계대전동안 일본에서 일어난 일종의 언어순화운동으로, 교전상대국인 미국,영국의 언어인 영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적성어 배척에 의한 바꿔 말하기 운동.
적성어 배척은 법률및 관공서의 문서로 하달되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자체적인 규제에 의해서도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그 배척정도는 각 조직이나 지리적 사정등에 의하여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영국해군을 모델로 많은 항해용어에서 영어를 차용하고 있던 일본제국 해군과 그 산하기관 및 소위 "높으신 분들"의 눈이 닿지 않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영어 차용어가 많이 쓰였다. 1944년 개봉한 영화 뇌격대출동(雷撃隊出動)에는 남방 주둔지 안에서 군인들이 야구를 하는 씬이 있는데, 여기서 스트라이크라는 영어 차용어가 등장한다.
반대로 일본 육군및 그 예하기관의 영역에서는 철저한 영어 배척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역시 군수공장등의 부품명칭등(볼트,너트,스패너등) 일본어로 어찌 바꿔볼 도리가 없는 경우도 많아서 근본적으로 완전한 실시는 불가능했다. 적성어를 "순화"할 때 대부분 한자가 이용되었으며, 일본 고유어와 한자어에 차등을 두지는 않았다.
분야별 바꿔 말하기의 예.
야구.
야구는 적대국인 미국의 국기(國技)이자, 미국에서 기원한 스포츠였기 때문에 야구용어에서 영어를 철저히 배제했다.
또한 1890년대부터 벌써 일본어로 번역된 야구 용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바꿔 말하기 운동이 철저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야구 자체에 대한 배척기운이 일어나 전쟁 말기인 프로야구는 1944년~1945년 동안, 중등학교 야구대회는 1941~1945년 동안 중지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
31871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3 | 2.8 cm 41호 중대전차총 | 2.8 cm 41호 중대전차총은 독일의 압착원리를 이용한 대전차 무기이다. 공식적으로 중대전차 소총()으로 분류되지만, 경대전차포라고 보는 것이 옳다..
특징.
비록 sPzB 41이 중대전차소총으로 분류되지만, 그 구조는 일반적인 대전차포와 더 가깝다. 대전차포처럼 완충장치가 있고, 포방패와 견인장치가 있다. 유일하게 대전차소총과 같은 점이라면 포신이 가벼워서 손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기에 부앙-선회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sPzB 41의 가장 큰 특징은 약실에선 28mm이던 구경이 포구에서는 20mm로 줄어드는 원뿔형의 포신이다. 탄약에는 두개의 외부 플랜지가 붙어있는데, 포구쪽으로 나아가면서 플랜지는 압착되면서 표면적을 줄여 탄속이 매우 빨라진다. 이러한 포신으로 인해 1,400 m/s의 매우 빠른 속도를 갖게 된다. 머즐브레이크에는 구멍이 뚫여있다. 수평이동차단식 폐쇄기는 "사분-자동(quarter-automatic)":(탄약이 장전되면 자동으로 닫히는 방식)식이다. sPzB 41에는 500m까지 시야가 확보되는 개방식 조준구가 설치되어있으나 필요할 경우 3.7 cm PaK 35/36에도 장착된 ZF 1х11망원 조준구를 부착할 수 있다.
완충 시스템은 유압반동완충기와 스프링 압력 만회기로 구성되어 있다. 서스펜션이 있는 분리식 견인주행장치를 사용하며, 더 낮은 자세로 은폐하기 위해 바퀴의 타이어를 제거할 수 있다; 제거에는 30~40분 정도 걸린다. 도구없이 5조각으로 분해할 수었으며, 가장 무거운 조각은 62 kg이다.
개발사.
원뿔형 총신은 1903년 독일의 칼 푸프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I1920년과 1930년대 또다릉 독일 엔지니어 게를리히가 실험적인 원뿔형 총신의 총구속도 1,800m/s의 7mm 대전차소총을 개발해 냈다.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1939~1940년 마우저-베르케 AG사는 28/20mm 구경 "게라트 231" 혹은 "MK.8202"라고 명명된 대전차무기를 개발하였다. 1940년 6~7월 사이 시험적으로 94대 (자료에 따라 30)가 생산되어 육군에서 평가되었다. 평가후 몇가지 변경과 함께 "2.8cm schwere Panzerbüchse 41"로의 명명과 양산이 시작되었다. 1문의 가격은 4,520 라이히스마르크 (비교를 위해, 5cm PaK 38포 1문의 가격은 10,600 라이히스마르크). 1943년 생산이 종료되었다ㅣ 생산이 중단된 주된 원인은 텅스텐 탄약의 부족이었다.
배치.
sPzB 41은 몇몇 기계화 사단과 경보병, 산악 및 공수부대에서 사용되었다. 몇몇은 대전차와 전투 공병부대에 공급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개전초부터(6월 1일 국방군은 183문을 가지고 있었다.) 종전까지 운용되었고, 1944년~1945년의 북아프리카 전역과 서부전선에서도 목격되었다.
sPzB 41의 단거리 사격은 2차 대전시기 대부분의 장갑차량을 관통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KV-1이나 IS-2같은 중전차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심지어 이러한 중전차들의 전면장갑 하부를 관통한 실례가 있다.)
계열형.
sPzb 41은 SdKfz 250반궤도 장갑차에 장착되었다; 이 형식은 "SdKfz 250/11"로 명명되었다. 적은 수가 SdKfz 221장갑차에 장착되었다.
요약.
2차 대전동안 압착포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무기의 제조는 발전된 기술과 높은 산업표준 없이는 불가능했다. 독일을 제외하고 이러한 무기를 양산한 나라는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리틀존 어댑터-비록 포자체는 아니었지만—를 양산한 영국이 유일하다. 소련에서는 V. G. 그라빈이 이끄는 설계국의 시도는 기술적 문제로 실패했다.. 미국에서는, sPzB 41에서 영감을 받아 28/20포를 M3포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작업은 1941년 9월에 시작되어 실질적인 성과 없이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sPzB 41는 단거리에서는 훌륭한 위력을 발휘하는 소형, 경량(대전차포로서), 분해가능한 구조의 높은 발사속도를 자랑하는 좋은 무기였나, 몇가지 단점들 또한 존재하였다. 구체적으로:
몇몇 저자들은 sPzB 41 짧은 수명에 비난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짧은 거리에서 500발을 사격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빠른 탄속의 "일반적"인 포신의 수명 또한 짧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련의 57-mm ZiS-2는 1,000발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텅스텐의 부족은 sPzB 41의 생산 중단을 가져왔다.
탄약.
sPzB 41에는 단지 두가지 탄종만이 있다: "2.8 cm Pzgr.41"철갑탄과 "2.8 cm Sprg.41"파편탄이다.
Pzgr.41은 텅스텐 카바이드탄심, 연철 외피와 마그네슘합금 캡으로 구성된다. 탄심의 길이는 40mm 이고 직경은 10.9mm 9.1%정도의 텅스텐을 함유하고 있다.
각주.
※아래 기록한 참고 문헌은 영어 위키백과 2.8cm sPzB 41의 참고 문헌이며, 본문 또한 이를 번역한 것입니다. |
31871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4 | 조지프 리스터 | 리스터오브라임리지스 남작 조지프 리스터(, OM, PC, FRS, 1827년 4월 5일 ~ 1912년 2월 10일)은 영국의 외과의사이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 있는 동안 무균수술법을 확립하였고, 혈액·염증 등의 응고에 관한 중요한 관찰로 현대 외과 수술에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 무균수술법이 나오기 전에는 아주 간단한 수술도 감염증을 일으켰고, 수술 환자의 50% 정도가 사망했다.
1867년에 펴낸 그의 저서는 방부의 체계에 대한 소개이다. |
318715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5 | 조셉 리스터 | |
31871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6 | 리스터 | 리스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717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7 | 윌리엄 T. G. 모턴 | 윌리엄 토머스 그린 모턴(William Thomas Green Morton, 1819년~1868년)은 미국의 치과의사이다. 매사추세츠주 찰턴에서 출생하여, 하버드 의대에서 수학하였다. 화학 교수 잭슨의 권유에 따라 1846년 9월 통증 없이 이를 뽑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수술에 에테르 마취제를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에테르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두고 에테르 사용 발견의 우선권을 주장한 잭슨 등 몇몇 사람과 소송 쟁의를 하면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
318718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18 | 윌리엄 토머스 그린 모턴 | |
318720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0 | 아서 스탠리 에딩턴 | 아서 스탠리 에딩턴 경(, , FRS, 1882년 12월 28일~1944년 11월 22일)은 영국의 천문학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물리학을 배우고, 1906년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조수가 되어 위도 변화 관측 등에 종사하는 한편, 항성의 통계적 운동을 수학적으로 해석하여 은하계의 회전을 예견했다. 191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다음 해 동 천문대장에 취임, 1916년부터 항성의 내부 구조에 대하여 이론적 연구를 추진, 방사적으로나 중력적으로나 항성은 균형 상태를 유지한다는 기본 가정에 입각하여 온도·밀도의 분포를 산정하고, 24년 질량·광도 관계를 증명했다. 또 백색왜성의 이상(異常) 고밀도에 대해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한 검증 실험을 지시하여 성공했다. 상대성 이론에 관해서도 독창적인 연구를 전개하고, 이것을 우주 구조에 적용하여 독자적인 우주론을 제창했다.
성장기.
에딩턴은 1882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단에 위치하는 컴브리아주의 켄덜()에서 퀘이커 교도 부모, 아서 헨리 에딩턴(Arthur Henry Eddington)과 세라 앤 셔우트(Sarah Ann Shout) 아래에서 태어났다. 켄덜로 이사 오기 전 에딩턴의 아버지는 스트라몽게이트 학교(Stramongate School)의 교장이 되기 위해 랭커셔에 있는 퀘이커 교도들을 훈련시키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는데 에딩턴의 아버지는 에딩턴이 태어난 지 2년 후, 1884년에 영국을 휩쓴 전염병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였고 에딩턴의 어머니는 비교적 적은 수입으로 두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결국 에딩턴 일가는 웨스턴슈퍼메어로 이사했다. 집에서만 교육을 받던 에딩턴은 이후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3년을 공부한다.
1893년 에딩턴은 브린메린(Brynmenlyn) 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특히 수학과 영문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이로 인하여 1898년 16살의 나이로 (후에 맨체스터 대학교가 된) 맨체스터의 오언즈 대학교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게 된다. 에딩턴은 입학한 첫 해에는 두루두루 많은 과목을 수강했으나 이후 물리학으로 전향하여 3년 동안 물리학을 공부했다. 에딩턴은 그의 물리와 수학 선생님이었던 아서 슈스터(Arthur Schuster, 1851~1934)와 호러스 램(Horace Lamb, 1849~1934)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맨체스터에 있는 돌턴 홀(Dalton Hall)에 살면서 퀘이커 수학자인 J.W. 그램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에딩턴은 빠르게 진척을 이루어 여러 장학금들과 함께 물리학의 1등급 우등 학위(First Class Honours B.Sc.)를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오언즈 대학에서의 그의 성과 덕분에 1902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케임브리지에서 그의 지도 교사는 유명한 수학자 허먼(R.A.Herman)이었다. 1904년 에딩턴은 2학년생으로는 처음으로 시니어 랭글러(Senior Wrangler, '영국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를 해낸 사람'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캠브리지의 최고 수학 학부생)로 선정되었다. 1905년 석사 학위(M.A.)를 취득한 후 그는 캐번디시 실험실에서 열이온 방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잘 진행되지 못했고,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연구와 병행하여 그는 공대 신입 학부생들에게 수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연구 및 업적.
천문 연구.
1906년 1월, 에딩턴은 영국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왕실 천문학자 최고 조수 자리에 임명되었다. 다음 달 그는 그리니치 천문대에 가기 위해 캠브리지를 떠났다. 그는 1900년부터 사진 건판에 나타난 433 에로스의 정밀한 시차 분석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두 배경 별들의 겉보기 운동을 기반으로 새로운 분석 기법을 개발하여 1907년 스미스 상(이론물리학, 수학 및 응용수학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 실적을 낸 두 학생에게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수여한 두 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1912년 찰스 다윈의 아들 조지 다윈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에딩턴은 1913년 초에 조지 다윈의 자리였던 'Plumian Professor of Astronomy and Experimental Philosophy'(Lowndean Professorship과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2개의 주요 교수직)라는 교수직에 승진임용된다. 그 해 말 theoretical Lowndean chair였던 로버트 볼마저 세상을 뜨자 에딩턴은 다음 해 캠브리지 천문대 전체를 감독하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1914년 5월 그는 영국학사원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으로 선출되고, 1918년에는 왕립메달(Royal Medal, 매년 런던 왕립학회에서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에서 각각 큰 공을 세웠다고 판단되는 두 사람에게 주는 은도금된 메달)를 받아 1926년 베이커 강연(Bakerian Lecture)을 했다.
에딩턴은 또한 별의 내부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였으며 별의 진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1916년 세페이드 변광성에 대한 물리적 설명들을 조사하면서 이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엠덴(Emden)의 폴리트로프(Polytropic) 모델 안에 존재하는 복사압력에 대한 카를 슈바르츠실츠의 선행 연구를 더 확대했다. 이 모델들은 별을 내부 열과 압력이 중력과 평형을 이루는 가스로 이루어진 구로 생각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서 에딩턴의 중요한 공헌은 별의 붕괴를 막는 요인이 복사 압력임을 보였다는 데 있다. 비록 그는 그가 투과율이나 에너지 생산의 원리에 대한 견고한 배경 지식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는 그의 모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모델로 그는 별의 물리적 성질 중 가장 중요한 온도, 압력, 밀도를 별 내부의 모든 점에 대해 계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설령 그의 모델이 주류 물리학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도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호프우드 진스는 여기서 별을 이루는 물질들은 필연적으로 이온화되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에딩턴과 진스 사이의 마지막 협력이었다.
에딩턴은 그의 결과들의 일관성을 통해 그의 모델의 타당성을 증명했다. 그의 모델은 특히 질량-광도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했는데, 이것으로부터 거성과 왜성을 포함한 모든 별들이 이상기체와 같이 행동한다는 예상치 못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의 모델들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별의 에너지의 근원에 대한 생각을 뒤집을 방법을 모색했다. 진스와 다른 사람들은 고전역학에 기반을 둔 켈빈-헬름홀츠 매커니즘을 지지한 반면 에딩턴은 양성자-전자 소멸과 핵융합 과정이 그 근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던 중 그는 별의 내부 온도가 몇 백만 도라야 함을 설명했다. 1924년 그는 별들의 질량-광도 관계를 발견했다.(외부 링크와 주석의 Lecchini 참조) 몇몇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에딩턴의 모델은 별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유용한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마이컬슨이 1920년 계산한 별들의 직경이 맞아떨어지자 에딩턴의 직관적이고 실험적인 모델에 익숙하지 않았던 천문학자들이 에딩턴의 모델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상태의 이론은 그리하여 1926년 "The Internal Constitution of the Stars"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에딩턴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천체물리학 연구를 계속하며 별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다. 그는 그의 이론이 양자물리학과 결합되어 연장되는 것, 그리고 축퇴 물리학이 왜성들을 기술하는 문제에 대해 진스와 에드워드 아서 밀른(Edward Arthur Milne)과 더 많은 논쟁을 벌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실험적 검증.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에딩턴은 왕립천문학회의 비서관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빌럼 더 시터르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일련의 편지들과 논문들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던 반면, 에딩턴은 국제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독일 물리학자가 제창한 논문을 읽어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더욱이 그는 일반 상대론이 기술되는 데 쓰인 수학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곧 상대론을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론을 만들어 발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안한 것으로 유명했다.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에서도 역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성의 근일점이 100년에 43″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이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관측할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위르뱅 르베리에가 관측했지만 빛의 휘어짐과 적색 편이는 당시까지 관측되지 않고 있었다.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프랭크 왓슨 다이슨(Frank Watson Dyson, 1868-1939)이라는 천문학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에게 상대론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이슨은 에딩턴에게 1919년에 있을 일식을 관찰하기 위해 두 탐험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태양의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는 정도를 측정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고자 한 것이다.
전쟁 직후인 1919년 5월 29일, 에딩턴은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아프리카 근처의 프린시페 섬으로 떠났다.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그는 태양 주위의 별들의 사진을 찍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태양 근처를 지나는 광선은 태양의 중력장의 영향으로 휘기 때문에 그것을 내보내는 별들은 그것들의 실제 위치보다 살짝 이동되어 보여야 했다. 태양이 가려지지 않을 때에는 태양의 빛이 이러한 광선을 내놓는 별들의 빛을 불분명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효과는 오직 개기일식 때에만 관측할 수 있었다.
1919년 5월 29일 에딩턴이 찍은 개기 일식 사진들 중 하나가 1920년 그의 논문에 게재되었고 이는 명백히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라 빛이 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의 신문들에 의해 주요 기사로 다루어졌다. 11월 7일에는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론, 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 내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에딩턴은 전 세계를 과학으로 연결시켜 준 획기적 사건으로서의 1919년 탐험과 상대론을 대중화하려는 목적의 캠페인에 착수하게 되었다.
에딩턴이 얻은 관측 자료들은 질이 낮으며 브라질 세아라주 소브라우(Sobral)에서 그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관측이 내놓은 뉴턴의 모형과 더욱 가까운 관측 자료들을 불합리하게 도외시해버렸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1919년, 에딩턴이 얻은 자료들은 후에 이루어진 관측들에 비해 실로 질이 떨어지는 것들이기는 했으나 당대의 천문학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브라질 탐험에서의 결과들이 거절당한 이유는 망원경의 결함 때문이었다.
에딩턴이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는 동안 관련 개념들을 일반인과 과학자의 언어로 모두 설명하는 그의 재주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 강연들을 종합하여 아인슈타인이 칭찬하기도 한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이론"(1923)으로 집약했다.
1919년 에딩턴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있었던 원리.
일반적으로 위 그림과 같이 에딩턴이 관측한 중력장에 의한 빛의 굴절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제시된다.
먼저 광행차 현상은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정면의 빗줄기를 보면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비스듬히 자신을 향해서 떨어진다. 이와 같이 빛을 관측자의 방향으로 직진한다고 가정했을 때, 관측자의 속도(자전과 공전)를 뺀 속도 벡터 방향으로 별이 보이는 현상을 광행차라고 부른다.
그림2에서 지구가 공전궤도의 그림 상의 위쪽에 있을 때 밤에 c 위치에 있는 별은 지구의 공전에 의해 a 방향에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지구가 공정궤도의 그림 아래쪽에 있을 때, 즉 6개월 후에는 개기 일식 때 별을 관찰하면 어디에 있는 것과 같이 보일까?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c 위치의 별에서 나오는 빛은 태양에 의해 휘어지기 때문에 그림1과 같이 b의 위치에서 빛이 직진해 오는 것으로 느끼게 되며, 여기에 광행차까지 고려할 경우 별은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그런데 지구가 공전궤도의 위쪽에 있을 때와 달리 아래쪽에 있을 때는 광행차가 지구에 수직으로 입사하는 빛이 아닌 방향과 같이 지구 공전 반대로 비스듬한 방향으로 입사하는 빛에 대해 적용되므로 광행차의 효과는 커질 것이다. 때문에 별들이 6개월 전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더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정밀한 실험을 위해서는 지구가 공전궤도 아래쪽에 있을 때 지구의 자전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주론(Cosmology).
에딩턴 또한 일반 상대론적인 우주모델의 첫 번째 세대의 발전에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르메트르의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관한 1927년의 논문과 허블의 나선 은하의 오목한 부분에 대한 연구를 공부하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 우주의 불안정성에 대해 조사하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안정된 우주에서 최근의 팽창 상태로 변해갈 때 우주 상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는 그의 우주에 대한 연구는 상수의 중요성과 성질에 초점이 맞춰졌다. 상대성의 수학 이론에 에딩턴은 우주상수에 대한 해석이 우주의 자율적인 팽창 및 수축을 뜻한다고 생각했으며 에딩턴은 에딩턴 한계를 정의했다.
에딩턴 한계.
에딩턴 광도라고도 불리며 이는 일정 질량의 항성이 낼 수 있는 빛의 최대한의 밝기를 말한다. 대부분 태양 질량의 약 120배를 한계치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항성은 에딩턴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R136a1 항성(태양 질량의 265배)이 발견되면서 반박되고 있다.
기초이론.
1920년대에 그는 그가 죽기 전까지 그는 모든 신경을 양자 이론, 상대성 이론, 우주론, 그리고 중력에 대해서 아우르는 기초이론(fundamental theory)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연구를 기존의 틀 안에서 진행했지만 후에는 조금 더 나아가서 기본적인 상수들의 차원이 없이 비율을 구하고 비교하는 숫자적인 비교에 초점을 맞췄다.
그의 기본 접근 방식은 무차원수를 생성하기 위해 몇 가지 기본적인 상수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얻어진 수들이 10^40, 그것의 제곱 또는 그것의 제곱근에 수렴하였다. 그는 양성자의 질량과 전자의 전하가 자연적이고 우주를 지탱하기 위한 완벽한 특성이며 그 값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디랙 역시 이러한 연구를 추구했으며 "Dirac large numbers hypothesis"라고 불린다. 아직까지도 몇몇 과학자들은 이 관계 속에 무엇인가 필연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의 개념을 약화시키는 것은 하나는 미세 구조 상수 α이다. 그가 이 값을 측정할 당시에는 이 값이 1/136에 매우 가까웠고, 그는 인식론적 이유에 따라서 그 값은 정확히 1/136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측정해 본 결과 값은 1/137에 더 가까웠다. 최근에 더욱 정확히 한 계산값에 따르면 값은 정확히 1/137이며 이는 에딩턴이 자유도를 하나 덜 따졌었기에 나온 오류였다. 이 수는 현재 에딩턴 수(Eddington number)라고 부른다. 이 사건 이후, Wags는 그를 “Arthur Adding-one”이라고 풍자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오류는 에딩턴의 신뢰에 금이 가게 하였다. 최근에 측정된 값은 1/137.035999679 (94)로 추정된다.
에딩턴은 그가 기초 물리의 대수학적 기초를 알아낸 것이라고 믿었고 이를 "E-numbers"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효과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고차원적 구조로 통합하였다. 그의 이론이 긴 시간동안 기존 물리 사회에서 무시당했던 반면에, 유사한 대수적인 표기는 '대통일 이론'의 많은 현대적인 시도에 근거가 되었다. 또한 에딩턴은 주안점을 특별하게 그것들로부터 유도되는 무차원수인 기초적인 상수 값들에 두었고, 최근에는 물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죽기 전까지 연구를 완료하지 못했다. 기초 이론(Fundamental Theory)라고 이름 붙여진 저서는 사후 1948년에 출판되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고 어머니 세라 에딩턴과 여동생 위니프레드와 같은 무덤인 케임브리지의 Parish of the Ascension Burial Ground에 묻혔다.
에딩턴의 철학.
에딩턴의 철학 관련 집필들.
에딩턴은 1919년의 자신의 일식에 관한 실험을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시 루바이야트에 교묘한 풍자를 집필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에딩턴은 상대성에 관해, 그리고 나중에는 양자역학에 관해 수많은 강의, 인터뷰,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와 "New Pathways in Science"를 포함한 책들에 모아졌다. 그의 기술적인 문학적 암시와 유머는 유명한 어려운 주제들에 어느 정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에딩턴의 책과 강의는 단지 그의 명료하고 즐거운 설명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새로운 물리에 대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함축에 대한 토론에 대한 열망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깊게 뿌리 박힌 과학적인 조사와 종교적인 신비주의에 관한 철학적인 조화에 대해서 역설했으며, 또한 현대 물리학의 실증주의적인 성격은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과 자유 의지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다른 많은 종교적인 과학자와는 다르게 그는 과학이 종교적인 명제를 증명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원숭이 무리가 타자기 위에서 퉁기고 놀 경우, 그들은 대영 박물관에 있는 모든 책을 쓸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1928년 저서인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에 무한 원숭이 정리를 홍보했다. 그의 대중적인 글은 그를 거의 실제로 세계대전 중에 영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상주의.
이상적인 결론은 그의 인식론의 통합이 아니라 두 가지의 중요한 논쟁에 기초했다.
첫 번째는 현재의 물리 이론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다. 간단히, 에테르 및 기초 입자의 행동에 관한 기계적 이론들은 상대성과 양자 물리학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에딩턴은 유물론적인 원리 체계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결과 유물론 또는 관념론의 분리가 철저하다고 추정했고 관념론적인 원리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더욱 흥미로운 두 번째 논쟁은 에딩턴의 인식론에 기초하여 있었고 두 개의 부분으로 이뤄진다고 간주된다. 첫째, 우리가 목표 세계에 아는 것은 구조뿐이며, 목표 세계의 구조는 정확하게 우리 자신의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목표 세계도 “마음의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원론적인 원리 체계는 증거에 의거하여 옹호될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로, 우리는 목표 세계가 비물질적인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목적 세계가 물질적이라고 명료하게 가정할 수도 없다. 이원론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물질적인 성질들이 목적 세계에 기인한다고 가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목적 세계가 물질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마침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물질적인 것이므로 이것은 부조리한 내용이다.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그의 저서인 "Science and Religion(1966)"에서 133 쪽을 보면 아서 에딩턴의 저서인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1928)"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인간 자유의 아이디어의 방어"와 그의 과학, "보이지 않는 세계(1929)"의 기초를 제공하여 철학적 관념론인 "진실성은 기본적으로 마음이라는 이론"을 지지해 준다.
Charles De Koninck는 에딩턴이 우리의 마음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실성을 믿었다고 강조했지만, 그는 "마음의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 고유한 세계의 명료함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물리적인 세계는 똑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마음은 세계와 끊어질 수 없는 연결을 가지고 있다.
비결정론.
결정론을 지지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에 대항하여, 에딩턴이 지지하는 비결정론은 물리적 객체가 물리학자들의 이해의 인식론적인 한계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는 숨겨진 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비결정론에 의한 것이다.
인간 에딩턴.
실버스타인과의 일화.
다음 일화는 에딩턴의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에딩턴은 1919년 11월 6일 왕립 학회의 회의에서 자신을 상대론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루드윅 실버스타인Ludwig Silberstein이라는 과학자를 만나게 된다. 실버스타인은 상대론을 이해한 세 명의 사람 중 하나로 에딩턴을 거론했다(물론 나머지 두 명은 아인슈타인과 자기 자신이었다). 에딩턴이 이에 대한 대답을 삼가자, 그는 에딩턴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에요, 단지 세 번째 사람이 누굴까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죠!"
블랙홀의 존재성에 관한 찬드라세카르와의 논쟁.
에딩턴의 모델로부터 파생된 결과들은 그와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던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와의 유명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찬드라세카르는 태양 질량의 약 1.4배 이상 되는 질량을 가진 별은 백색왜성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지막에 도달함을 보였다. 찬드라세카르는 순수하게 수학만을 사용하여 블랙홀의 존재를 암시하였는데, 에딩턴은 수학만을 사용해 유도된 실세계의 현상은 물리적이지 않고 불합리하다며 찬드라세카르의 업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지도적인 입장에 있던 에딩턴은 찬드라세카르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이에 기진맥진이 된 찬드라세카르는 에딩턴이 독단적이며 급진적인 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묘사된 에딩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찬드라세카르의 아이디어는 1930년대 후반이 지나면서 에딩턴을 제외한 대부분의 천체물리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에딩턴 수.
에딩턴은 사이클러의 장거리 운행 기록을 나타내는 수로 이름이 남았다. 이 맥락에서 에딩턴 수는 E로 정의되며, E 마일을 가는 데 사이클러가 걸린 일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70 에딩턴 수는 사이클러가 70 마일 이상을 하루의 70회 안에 완주한 것을 말한다. 현실적으로 70에서 75 이상의 에딩턴 수를 달성하기란 힘이 든 것이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에딩턴은 최고 에딩턴 수가 84라고 한다.
관련자료.
영상: <아인슈타인과 에딩턴>.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영국 싱글드라마로 컴퍼니 픽처스와 BBC가 제작하였으며 HBO와 합작한 작품이다. 배우 데이비드 테넌트가 아서 스탠리 에딩턴 경 역할을 맡았으며, 앤디 서키스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에딩턴의 실험이 바꾸어 놓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운명 등을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잘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과학사의 열거가 아닌 그 속에서 살아가는 과학자들의 인간적 면모를 다루고 있으며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의 과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에 관해서도 진지하게 짚어나가고 있다. 2008년 11월 22일 BBC Two 채널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다. |
318721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1 | 아더 에딩턴 | |
318722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2 | 아서 에딩턴 | |
318723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3 | 아더 스탠리 에딩턴 | |
318724 | 944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4 | 사생안티 | |
318725 | 3313903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5 | 츠키노 우사기 (달의 요정 세일러문) | 츠키노 우사기(, 국내명:세라)는 타케우치 나오코의 만화작품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자, 본 작의 주인공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는 일본판은 미츠이시 코토노(제44화~50화에서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아라키 카에가 대역을 맡았다), 한국판은 1994년 1기만 발매되었던 비디오버전에서는 송도영(전반), 박영희(후반)가, 1997년~98년에 한국방송공사(이하 KBS)에서 방송판은 최덕희, 2012년~16년까지 대원방송에서 재더빙한 방송판은 이지현이 연기했다.
실사판에서는 특촬물에서는 사와이 미유, 뮤지컬에서는 1대 오오야마 안자, 2대 후미나 하라, 3대 칸베 미유키, 4대 쿠로키 마리나가 연기했다.
인물.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세일러문으로 변신한다. 금발을 경단모양으로 묶고 다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치바 마모루로부터 ‘오당고 아타마(경단머리)’라고 불렸다.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고 나서부터는 ‘우사코’, ‘우사’라 불린다. 미나토구 아자부 쥬반에 산다. TV 애니메이션 등장 초에는 쥬반 중학교 2학년(첫 시리즈, R)이었고, 그 후 3학년이 되어(S, SuperS) 쥬반 고등학교로 진학(스타즈)한다. 가족으로는, 부모와 남동생이 있다(자세히는〈주인공 가족〉을 참조). 실사판에서는 제1화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으나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Special Act의 결혼식 장면에서 등장하고 있다.
밝고 천진난만한 성격이며, 덜렁이에 울보이고 변덕스럽다. 지각과 늦잠을 밥 먹듯이 하여 학교의 성적은 상당히 나쁘다. 복도에서 벌 받으면서 도시락을 미리 까먹기도 하는 뻔뻔스러운 일면도 있다. 그 때문에, 누나로서의 위엄은 전혀 없어서 동생인 신고로부터 언제나 얕보이고 있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그러한 성격이 강조되어 있기에 원작에 비해 미숙한 분위기로 묘사되고 있다. 사람한테 금방 반하는 면도 있어서, 턱시도 가면이나 오락실에서 일하는 후루하타 모토키 등에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근본 심성은 착하고 다정하여, 주위의 소문 등으로 인한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는 관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에 친구도 많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주위로부터 경원시당하기 일쑤였던 다른 동료들을 그 다정한 마음으로 받쳐주고 있다. 애니메이션판에서의 피쉬 아이도 결국 이러한 마음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다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겁없는 면도 있어서, 애니메이션 3기(S)에서는 미스트리스9에게 몸을 빼앗긴 토모에 호타루를 끝까지 죽이지 않고, 최종장에서 파라오90과 함께 죽으려 하던 그녀를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필사적으로 구출해내기도 했다. 세일러 우라누스와 세일러 넵튠은, 이 일로 하마터면 지구가 멸망할 뻔 했다면서 프린세스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결투를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원작과 실사판의 마지막에 가서는 치바 마모루와 결혼한다.
전생에서는 실버 밀레니엄의 공주 프린세스 세레니티였다. 지구의 왕자 엔디미온(마모루의 전생)과 연인 사이였으나, 신분상 허용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퀸 베릴과 지구의 사람들이 퀸 메탈리아에게 조종당하여 달을 습격했을 때 엔디미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인 퀸 세레니티의 은수정의 힘으로 지구에 환생하였다.
미래에는 은수정의 힘으로 불로불사의 몸이 되어, 대변동으로 괴멸 상태에 빠진 지구를 은수정의 힘으로 재생시킴과 동시에 크리스탈 도쿄라는 도시를 세워, 그 도시의 여왕인 네오 퀸 세레니티가 된다.
미래에 퀸이 되고서는, 세일러 플루토의 죽음을 슬퍼하는 딸 치비우사에게“스몰 레이디, 사람은 누구든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겪게 된답니다.”라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등, 딸에게 어머니다운 위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 앞으로 보내는 편지가 틀린 글자 투성이인 등, 과거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면도 있다.
30세기 보다 더 머나먼 미래에는 카오스와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어, 태양계 말고도 우주를 지키는 우주 최강의 전사 세일러 코스모스가 된다.
이름의 유래는 ‘달의 토끼’로부터 따 온것이라고 한다.
세일러 문.
달을 수호성으로 가지는 사랑과 정의의 세일러복 미소녀전사.
환상의 은수정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특별장비로는 머리의 경단 모양에 달린 초음파증폭기와, 필살 정화 기술을 내뿜는 스틱 또는 롯드(변신 아이템과 함께 시리즈마다 바뀜)가 있다. 또 티아라를 던지는 기술이 있는데, 세일러 전사라면 누구라도 가능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전사에게는 없는 것을 보아, 문 티아라 액션 역시 물리공격기술이 아니라 티아라를 매개로 정화력을 투사하는 기술로 해석된다. 격투전에 있어서는 도망이 특기. 전생에서 전투원이 아니라 프린세스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유명한 대사로는 “사랑과 정의의, 세일러복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너를) 용서치(용서하지) 않겠어(않겠다)!” “달을 대신하여, 혼내주겠어!”가 있다. 원작 제3기의 등장대사는 “사랑과 정의의 별! 달을 수호로 하는 신비의 전사! 세일러 문 등장!”이었다. 이미지 칼라는 은색이다. |
31872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6 | 장재봉 | 장재봉(張在奉, 1896년 ~ 1966년)은 대한민국의 민속 예술인이다.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적 형으로부터 오광대 탈춤을 배웠다. 그 후 1945년에 통영 오광대를 부활시키고 이를 보존하여 1964년에 눌원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해 12월 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제1급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 이 밖에도 문둥탈, 말뚝이, 비비 양반 등에 특기가 있었다. |
318727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7 | 유전학자 | |
31872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8 |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 테오도시우스 그리고로비치 도브잔스키(, , , 1900년 1월 24일 ~ 1975년 12월 18일)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 유전학자·진화생물학자이다.
업적.
개체군에서의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의 연구는 또한 다윈의 진화이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연결하는 실험적 증거를 제시했다. 초파리의 자연 집단의 유전적 다양성을 연구하여 생물학적으로 성공적인 종은 그렇지 못한 종보다 집단 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 반면 유전적 변이가 드물게 일어나는 집단은 환경 변화에 상대적으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므로 사라질 위험까지 있다. 그는 초파리 집단에 자연선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면서 초파리의 유전적 변이가 계절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기타.
홍수지질학회의 프랑크 루이스 마쉬(Frank Lewis Marsh, 1899-1992)와 진화에 대해 다수의 서신을 교환하며 자주 토론했다. |
31872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29 | 이교익 | 이교익(李敎翼, 1807년 ~ ?)은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자는 사문, 호는 송석, 본관은 연안이다.
산수도와 꽃, 나비 등의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기묘한 나비를 뜰에서 보고 이를 잡아 색채를 연구하려고 의관도 벗은 채 성북동까지 따라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노승소요도》, 《호접도》 등이 있다. |
318733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33 | 도브잔스키 | |
31873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36 | 논고 | 논고(論告)는 최후변론의 하나로, 공판절차에 있어서 피고인 신문과 증거조사의 종료 후 검사가 사실 및 법률적용에 관한 의견을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기소된 사실이 어느 증거에 의해 인정되는가, 적용법조는 어떤 것인가, 형은 어느 정도에 상당하는가 등이 논고의 내용이 된다. 논고 중에서 검사의 형벌의 종류 및 그 양에 대한 의견 진술을 구형이라고 한다. 이는 검사의 견해일 뿐이고 법원은 이에 구속되지 않고 판결을 내린다. 검사의 출석없이 개정한 경우에는 공소장의 기재사항에 있는 것을 의견진술로 간주한다. |
31874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40 | 최신해 | 최신해(崔臣海, 1919년 4월 24일 ~ 1991년 3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겸 수필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다.
생애.
일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삼락당(三樂堂, 三落黨), 향당(鄕黨)이다.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외솔 崔鉉培)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면에서 성장한 그는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나온 이후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부 정신과 교실에서 연구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를 계속 하였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대한민국 육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그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예하 의무대대 군의무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으며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에서 함께 장교로 복무한 분자생물학자 겸 생화학자 이기령과 그의 아우인 농화학자 겸 저술가 이춘녕(이 둘은 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자제)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같은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에서 각각 같은 시기에 군의무장교 혹은 정훈장교 등의 보직으로 복무하였고 약학자 겸 저술가 채동규(물리학자 동운 최규남의 손아랫처남) 또한 같은 시기인 1949년부터 1955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하였다.
이후 그는 1951년에 대한민국 육군군의학교 교관으로 이임되어 복무하다가 1954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으며 1956년에는 국립 서울청량리뇌병원 원장이 되었고, 1961년에 일본 야마구치 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신경정신과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서훈과 저서.
그는 틈틈이 생활 수상을 모아 글을 발표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는 《국보 찾아 10만리》와 수필집 《훔친 사과가 맛있다》, 《공부 못하는 천재》, 《고독을 이겨야 하는 현대인》 등이 있다. |
31874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745 | 프세볼로트 가르신 | 프세볼로트 미하일로비치 가르신(, 1855년 2월 14일 ~ 1888년 4월 5일)은 러시아의 작가이다. 군인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17세 때 발작이 있은 후 사망할 때까지 여러 번 정신병원을 찾았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퇴역하였다. 전쟁의 체험을 그린 단편 소설 《4일간》을 발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사회악에 대한 반항과 절망적인 번민을 그리고 있다. 그 밖에도 《병사 이바노프의 추억》과 《겁쟁이》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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