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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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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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극적인 변화의 원인으로 주로 꼽히는 건 1997년 IMF 외환(外換)위기 상황이다. 직전까지는 소위 ‘고도성장기의 열매를 따 먹는’ 입장이었기에 이렇다 할 근심 걱정도 없고 특히 중산층 의식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계층갈등과 그에 따른 피해의식이 오히려 수그러드는 추세였던 반면, IMF 외환위기로 바로 그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TV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도 달라진 대중의식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 경제 저성장(低成長) 국면이 지속되면서 청년 취업률은 거의 상시적인 문젯거리가 돼버렸고, 대중의식도 점차 비관적이고 신경질적으로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다.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은 왜 미국 대중문화계에서도 2010년대부터 영화 〈인 타임〉 〈더 퍼지〉 등 상당히 극단적인 반자본주의 성향 엔터테인먼트가 늘어나기 시작했는지, 급기야 2019년에 이르러 국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루저들의 폭동(暴動)’ 영화 〈조커〉의 대대적 흥행신화까지 낳게 됐는지 이해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상당 부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중산층이 몰락하고, 그로 인해 2011년 “우리는 99%다” 구호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등 엄청난 사회 혼란과 생존의 불안감이 들이닥친 데 따른 흐름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IMF 외환위기 및 그 이후 한국 대중문화계 상황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오징어 게임〉의 등장까지 이르게 한 한국 사회 불안감의 실체가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은 사실 경제계층이 바뀌지 않고 대(代)물림되는 봉건적 사회로의 진행 탓에 대중의 분노가 치솟아 오른 게 아니라, 정반대로, 계층이동이 너무 원활한 바람에 이른바 ‘중산층의 불안’이 극심해진 시점이란 것이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도 해외에서는 탈북자 여성 캐릭터나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 캐릭터 등이 주로 주목받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아가다 몰락한 두 캐릭터, 기훈(이정재 분)과 상우(박해수 분)에 언론미디어의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직전까지는 소위 ‘고도성장기의 열매를 따 먹는’ 입장이었기에 이렇다 할 근심 걱정도 없고 특히 중산층 의식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계층갈등과 그에 따른 피해의식이 오히려 수그러드는 추세였던 반면, IMF 외환위기로 바로 그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TV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도 달라진 대중의식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 경제 저성장(低成長) 국면이 지속되면서 청년 취업률은 거의 상시적인 문젯거리가 돼버렸고, 대중의식도 점차 비관적이고 신경질적으로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다.
3. 영감적 신앙, 이것은 신의 감동을 받았거나 특히 마음에 어떤 자극을 받은 신앙이니 예(例)하면 저 바울(바오로) 선생 같은 이가 그러하다. 우리 마음에 참됨과 열성을 가져 신의 참됨과 합치될 때 바야흐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아희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픈 소리를 하여도 울지 아니하였다”는 비유와 같이 아무 감응이 없는 생활은 영감을 얻을 수 없다. 솔직하고 순결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상에 말한 세 가지 신앙, 즉 무조건 신앙, 이지적 신앙, 영감적 신앙을 종합하여야 비로소 원만하고 완전한 신앙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둘째, 대기적(對己的) 생활, 현대 조선청년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 허영적, 인순고식(因循姑息·머뭇거리며 임시 방편적인-편집자)적인 생활을 한다. 진취분투하려는 생각은 없고 사치생활, 향락생활로 흐르고 만다. 이 반면에 반발적으로 감분적(感憤的) 생활을 하려는 자가 있으니 이는 영웅이오, 인걸이라 할 것이다. 금일 도시로 농촌으로 건설개혁할 일이 많은 이때 퇴영적·향락적으로 퇴락한 생활을 한다거나 이목(耳目)의 소호(所好)와 심(心)의 소락(所樂)을 따라 안일하고 에로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오늘날 청년들을 유혹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가정에서 쓰는 레코드만 하더라도 음악, 이야기 같은 것이 모두가 에로틱한 것이다. 일반은 이런 것을 좋아한다. YMCA가 좀 가치 있는 공헌을 하려 한다면 가정 사회를 통하야 유익한 일을 힘써야 하겠다. 일반 청년 남녀를 볼 때 그 머리에 참된 것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부허(浮虛)하고 향락적이며 정욕에 유혹하야 에로틱한 것뿐이라면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이냐. 우리 기독청년의 운동은 극기하여 나를 희생하는 생활을 하야 사회의 좋지 못한 것을 개정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가죽 옷과 메뚜기를 먹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갱생 도중에 있는 독일 청년과 같이 근검 질소(質素·꾸밈이 없고 수수하다-편집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듣건대 미국에서는 비율빈(필리핀-편집자) 학생이, 동경(도쿄-편집자)에서는 조선 학생들이 제일 사치하다 하니 이 웬 모순인가. 이목의 소호와 심의 소락을 버리고 귀를 기우려 대중이 “조선기독청년들이 우리를 돕고 붙들어다오” 하는 말을 듣고 모든 유혹을 멀리하고 대원(大願)을 품어 실행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세상 청년들은 세상에 흘러가더라도 기독청년은 극기와 희생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원을 가진다면 사불범정(邪不犯正·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이 바른 것을 건드리지 못함. 곧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뜻-편집자)이요, 해보겠다는 것은 반듯이 성공을 얻을 것이다. 구약 역사에 모세를 보더라도 대원이 생김에 부귀영화를 폐리(廢履·버리고 밟고-편집자)와 같이 버리고 나갔다. 예수께서도 큰 원(願)이 있으매 시험을 이기셨다. 우리도 대원을 품으면 모든 것을 이기리라고 믿는다.
우리 기독청년의 운동은 극기하여 나를 희생하는 생활을 하야 사회의 좋지 못한 것을 개정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가죽 옷과 메뚜기를 먹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갱생 도중에 있는 독일 청년과 같이 근검 질소(質素·꾸밈이 없고 수수하다-편집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하고 있는 박종인(朴鍾仁) 기자의 최근작 《매국노 고종》(와이즈앱 펴냄)은 ‘고종 계몽군주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라는 잣대로 고종의 치세(治世) 43년을 들여다보는 저자는 ‘고종은 매국노(賣國奴)’라고 단언한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었고, 그 근대화에 뒤처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저자는 고종을 ‘매국노’ ‘만악의 근원’이라고 지탄(指彈)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고종은 욕심에 굶주린 기생생물 같았다. 기생충은 숙주(宿主)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숙주가 생명이 끊기는 순간 기생충 또한 생명이 끊긴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장기(臟器)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고종은 ‘숙주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기생충의 기본 생존 원칙을 무시했다. 권력 유지라는 이기적인 탐욕이 모든 생존 원칙을 앞섰다.” 이쯤 되면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사자(死者)명예훼손’으로 소송이라도 걸어오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두 눈 부릅뜨고 직시하는 고종 치세 43년의 역사는 초·중·고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역사다. 안동 김씨 세도, 고종의 즉위와 파락호 이하응(李昰應)의 극적인 집권, 대원군(大院君)과 민비의 권력 다툼,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봉기, 갑오경장(甲午更張), 을미사변(乙未事變), 아관파천(俄館播遷), 대한제국 선포, 러일전쟁, 을사조약(乙巳條約), 헤이그밀사 사건, 군대해산, 경술국치(庚戌國恥)…. 멀리는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부터 뮤지컬과 드라마로 만들어진 〈명성황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등을 통해 수없이 변주(變奏)되었던 속상하고 못난 역사다. 저자는 그 역사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헤집는다. 그 일이 쓰리고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저자는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며 이를 악문다.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하고 있는 박종인(朴鍾仁) 기자의 최근작 《매국노 고종》(와이즈앱 펴냄)은 ‘고종 계몽군주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었고, 그 근대화에 뒤처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저자는 고종을 ‘매국노’ ‘만악의 근원’이라고 지탄(指彈)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8. 알레산드라 베라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던 알레산드라 베라가 13살 제자와 위험한 관계를 시작한 건 2015년 9월. 여교사에 따르면 먼저 접근(?)을 시도한 건 제자였다. 학생은 지난해 인스타그램에서 베라에게 친구 맺기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베라가 요청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진 않았다. 이후 교사와 학생으로 지내던 두 사람이 가까워진 건 베라가 여름 학기에 학생이 결석을 하자 베라는 인스타그램으로 학생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고, 학생은 베라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만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썸'을 타기 시작했고, 베라의 승용차에서 첫 키스를 나눴다. 이튿날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시작했다. 베라는 4살 된 딸을 둔 엄마였지만 학생과의 관계에 푹 빠져들었다. 현지 언론은 "베라가 학생을 알게 된 후 거의 매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ABC 등 현지 언론은 "베라에게 최고 99년 징역이 선고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9. 디온 얀스 2016년 2월 9일 미국 플로리다 주 앨런 D 니스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이자 여자 역도팀 감독인 디온 얀스는 학교 이사회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는 ‘학생들과 부적절한 내용의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것. 학생들은 체육 교사인 얀스가 스마트폰 메신저로 자신의 누드 사진을 보내고 술에 취해 자신들을 불러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이 학교 풋볼팀 속 학생 3명이 음란 메시지와 브래지어만 입은 얀스의 사진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얀스는 주로 트위터와 스마트폰 메신저 ‘스냅챗’을 이용해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조사 과정에서 한 학생은 자신의 SNS에 “나는 얀스 선생님과 스냅챗으로 누드 사진을 주고받으며 ‘썸’을 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얀스와 성관계를 맺었느냐’는 질문엔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교 측은 “어떤 내용의 메시지가 오갔는지는 공개하지 않겠다”며 “다수의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고 밝혔다.
2016년 2월 9일 미국 플로리다 주 앨런 D 니스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이자 여자 역도팀 감독인 디온 얀스는 학교 이사회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는 ‘학생들과 부적절한 내용의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것.
― ‘최대한 압력 작전’의 입안자이면서 미북정상회담에도 참여했다. “‘최대한의 압력 작전’을 통해 북한에 끔찍한 고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전에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상회담은 한국 정부가 ‘설레발(agitated)’을 치지 않았더라면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북한이 ‘최대한의 압력 작전’에 의한 고통을 감지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많은 안보 전문가들은 미북정상회담이 시행된 순간 ‘최대한의 압력 작전’이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른 점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그런 의견에 찬성한다.” ― 미북정상회담 후에도 대북제재는 계속되지 않았나. “그렇지만 정상회담이 끝나는 순간 우리의 결연한 의지가 급강하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단 북한과 공동성명서를 낸 이상,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됐다.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좀 더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도, 정상회담을 실패로 돌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서게 됐다. 결과적으로 엉망이 된 셈이다.”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문재인 정권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로 북한만 한 곳이 있을지 의문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북한이 왜 그토록 문재인 정권을 철저히 무시하는지가 궁금했다. 홈스의 인터뷰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문재인 정권은 미북정상회담 당시 워싱턴과 평양을 연결한 중매(仲媒) 역할을 했다. 일이 꼬일 경우 양쪽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것이 중매쟁이의 운명이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권으로서는 선의(善意)로 행한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선의나 본심은 중요하지 않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흑백 결론만이 남는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싱가포르 회담을 전후해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말이지만, 언제부터인지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바이든 정권 등장과 함께 ‘한반도 운전자론’이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르겠다. 잘되기 바라지만, 상황을 보면 운전자의 차에 동승할 인물이 있기나 할지 궁금하다.
― 미북정상회담 후에도 대북제재는 계속되지 않았나. “그렇지만 정상회담이 끝나는 순간 우리의 결연한 의지가 급강하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단 북한과 공동성명서를 낸 이상,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됐다.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좀 더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도, 정상회담을 실패로 돌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서게 됐다. 결과적으로 엉망이 된 셈이다.”
물론 한 번의 회담이 평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평화로 귀결되는 것도 전혀 아니며 김정은의 외양이 변했다고 그의 내심도 변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또한 트럼프가 이상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고 그의 본심이 변한 것이라고 예단해서도 안 된다. 회담이 끝난 후 《폭스(Fox)》 뉴스의 샨 해니티 앵커와 인터뷰를 한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레토릭은 싫어하며 그러기 원치 않는다.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선택 대안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본심을 반영한 것이고 어떤 것이 본질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트럼프-김정은의 회담 결과에 대한 평가는 양적(量的)인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다. 소위 미국의 주류 언론들이 압도적으로 반(反)트럼프라는 사실을 알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작년 여름 트럼프가 북한에 대해 강경발언을 쏟아내고 있을 때는 “미국과 북한은 핵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며 트럼프를 비난했다. 회담 후에는 “트럼프가 자신을 위한 쇼를 했다”면서 “트럼프가 패하고 김정은이 승리, 미국의 이익을 훼손시켰다”고 비난한다. 언론의 거의 대부분이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트럼프의 패배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의 비난이 논리적・실질적으로 정당한 것도 아니며 트럼프는 그들의 비난에 전혀 기가 죽는 모습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이 트럼프를 배신자나 되는 것처럼 비난하며 김정은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트럼프 완패, 김정은 완승”과 같은 신문 사설 타이틀도 있을 정도다. 국제정치의 원칙을 통째로 무시한 이 같은 제목은 우리에게 득 될 것이 없다. 어떤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회담에서 완패를 할까? 만약 미국이 정말로 완패를 당했다면 적어도 한두 달 이내에 판을 뒤집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마저 비난하면 한국은 어느 나라와 협력하겠다는 것인가? 본 글은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냉정한 관점에서 분석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Q가 156에 이르는 협상의 달인이라는 트럼프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엉성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이 트럼프를 배신자나 되는 것처럼 비난하며 김정은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트럼프 완패, 김정은 완승”과 같은 신문 사설 타이틀도 있을 정도다. 국제정치의 원칙을 통째로 무시한 이 같은 제목은 우리에게 득 될 것이 없다.
튀니스의 중심이자 재스민 혁명 당시 시위대가 운집했던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에 도착했다. 부르기바가 30년 동안 집권한 독재자인데도,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시내 한복판에 있고, 튀니지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비교가 됐다. 광장 끝 중앙에 있는 이븐 할둔(중세 이슬람을 대표하는 튀니지 출신의 역사·정치·사상가) 동상을 지나 자이투나 사원이 있는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구시가지는 중세시대에 축조(築造)된 성곽 안에 있다. 이곳은 미로같이 좁은 골목이 이어져 있어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였다. 구시가지 골목의 폭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다. 가로등도 없어 매우 어두웠다. 이방인이 매우 꺼릴 만한 환경이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 탓인지 이곳에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빈발한다. 길을 가다 현지인 무리를 만나면 내심 긴장이 됐지만, 약 한 시간 동안 압달라 구에츠를 찾아 헤맸다. 길을 가다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건물이 나와 내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닌 것 같았다. 이씨를 통해 현지 사정에 밝은 한국인 유학생에게 전화해 정확한 위치를 물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라마단 기간에는 영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일 현지 체류 한국인 사업가에게 들은 얘기로는 차이나타운에도 사창가(私娼街)가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곳의 화대는 러시아 여성은 20디나르, 이탈리아 여성은 30디나르 등이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가 득세한 정황은 더 있다. 주(駐)튀니지 대사관에 따르면 혁명 이후 여성들에 대한 폭언·폭행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전통을 따르지 않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다. 부르기바 대통령 이래 튀니지에서는 히잡을 착용한 여성이 관공서나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학내 히잡 착용 불허로 논란이 있었지만, 이슬람국가 튀니지에서는 이미 법으로 수십년 동안 이를 규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위협 때문에 복식(服飾)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실제 거리를 다니다 보면 히잡을 쓴 여성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차도르를 착용한 여성도 종종 보였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학내 히잡 착용 불허로 논란이 있었지만, 이슬람국가 튀니지에서는 이미 법으로 수십년 동안 이를 규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위협 때문에 복식(服飾)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실제 거리를 다니다 보면 히잡을 쓴 여성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손자가 활약하던 시대는 춘추(春秋)시대 말, 서서히 전국(戰國)시대의 여명이 동터오던 시기였다. 많은 나라가 영토국가화(領土國家化)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단순한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나 성읍(城邑)국가가 아니라 어엿한 나라 꼴을 갖춰가던 동양적 근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가 15~18세기 유럽과 유사하다는 것은 앞서 숱하게 이야기한 바이다. 당시의 유럽처럼 총력적 경쟁을 벌이던 이 시기, 많은 나라가 나름 근대적 국가를 만들어가던 때다. 그걸 생각하면 손자의 퍼포먼스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만하고 또 상당히 상징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국법(國法)에는 예외(例外)가 없다. 국법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근대의 필수적 요소는 국가의 폭력 독점이다. 독점된 폭력의 힘을 국가가 법으로 행할 때 그것에서 예외가 없고 그것이 정말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일은 영토국가화의 필수적 과정이다. 손자의 행위는 단순히 유세 중에 벌어진 해프닝과 퍼포먼스가 아니라 남방의 원시(原始)국가던 오나라가 어엿한 국가의 꼴을 갖춰가는 시기에 있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생각한다. 근대국가 만들기, 영토국가 형성기의 과정이 아니더라도 군대란 것이 본래 그런 것 같다. 군법은 지엄하고 냉혹해야 한다. 늘 그렇게 집행할 수 있어야 군대는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조직이 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군주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병사들을 통솔해야 하는 경우라면 잔인하다는 명성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군대란 그런 명성 없이는 단결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뿐더러 어떠한 군사작전도 감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경탄할 만한 행동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포함된다. 즉 그는 수많은 종족 출신이 뒤섞인 군대를 이끌고 멀리 이역(異域) 땅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운명의 힘이 좋을 때든 나쁠 때든 자신의 군대 내에서든 아니면 자신의 군대와 군주 사이에서든 그 어떤 불화도 없었다. 이는 그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잔인함은 그가 가진 다른 무한한 비르투(Virtu)들과 함께 그의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을 항상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군주론》 17장)
손자가 활약하던 시대는 춘추(春秋)시대 말, 서서히 전국(戰國)시대의 여명이 동터오던 시기였다. 많은 나라가 영토국가화(領土國家化)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단순한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나 성읍(城邑)국가가 아니라 어엿한 나라 꼴을 갖춰가던 동양적 근대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건 지금 MZ세대는 세간의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다. 4·7재보궐선거가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그 전부터 이들 특유의 소비 트렌드 등에 대해 산업계의 관심이 지대했다. 하여간 ‘뭔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호기심에 맞춰 MZ세대에 대한 각종 분석 서적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1994년생 작가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책에서 임명묵 작가는 1990년대생들, 즉 MZ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해 상당히 입체적인 면면을 제시한다. 이른바 ‘꼰대 문화’에 대한 혐오가 극심하다는 점에서 언뜻 매우 개인주의적인 세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온라인상에서는 타인에 대해 지극히 간섭적인 행각들을 일삼는 ‘젊은 꼰대’이기도 하다. 또 언뜻 ‘욜로’나 ‘소확행’에 열중하는 듯하면서도 코인 열풍에 휩쓸리는 등 ‘한탕주의’에 매몰(埋沒)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인터넷 등장으로 비롯된 ‘온라인 문화’가 MZ세대의 의식 구도를 가로지르는 중심 코드로서 지목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 X세대와 한국 MZ세대를 온전히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해보기는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대중문화 환경이 세대 특성을 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실이 그렇다. 세대론(世代論)에 의하면 각 세대가 놓인 문화 환경에의 고려와 반영은 기본에 가깝다. 투표 성향 등 이데올로기 바탕이 궁금할수록 더 그렇게 ‘문화로 돌아가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애초 이데올로기 바탕이라는 것도 세대 차원의 문화적 세례(洗禮)가 경제·사회적 환경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화학작용의 이런저런 면면을 섬세히 파악해 세대의 숨은 본질에 접근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20여 년 전 신세대 1970년대 출생자들을, 고의적이건 아니건 처음부터 잘못 파악하는 통에 그들 스스로조차 자신의 정체성(正體性) 확인이 혼란스러워졌던 과오(過誤)를 돌이켜보면 더더욱 그렇다.⊙
가장 최근에는 1994년생 작가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책에서 임명묵 작가는 1990년대생들, 즉 MZ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해 상당히 입체적인 면면을 제시한다.
냉전사 최고의 권위자인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가 “한 개인이 단 한 건의 문서를 통해 그토록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자기 의사를 개진해 한 나라의 외교정책을 전격적으로 바꾸어놓은 경우는 드물다”고 언급할 정도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미국의 대소(對蘇) 외교정책의 기초는 조지 케넌이 주장한 ‘봉쇄전략(Strategy of Containment)’이었다. 1946년 2월 22일 비밀문건으로 타전된 ‘긴 전보’를 작성한 조지 케넌은 1947년 여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잡지에 ‘Mr. X’라는 익명으로 〈소련 행태의 근원(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곧바로 수완 좋은 기자 아더 크록이 Mr. X는 조지 케넌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글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글이 되었다. 케넌이 차후 회고록에서 직접 밝힌 바 있듯이 오해의 소지가 많은 논문이었다. 학자들은 케넌이 Mr. X 논문에서 밝히려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구명하기 위해 연구했는데, 케넌의 진의가 한 연구 분야가 될 정도로 케넌의 대소정책이 의미하는 바는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케넌이 제안한 대소정책은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라고 불리는 한계가 분명히 설정된 전략이었다. 봉쇄란 무엇보다도 현재의 소련이 더 이상 팽창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였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미국은 ▲소련으로부터 위협당하는 국가들이 자신감을 고취하고 힘의 균형을 회복하게 하는 일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국제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알력을 이용해 소련이 자국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역량을 위축시키는 일 ▲해소되지 않은 차이점들을 협상을 통해 타결하기 위해 소련의 국제관계 개념을 점진적으로 수정하는 일 등에 매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에는 군사적인 수단은 물론 경제·정치·심리적인 것이 폭넓게 적용되어야 한다. 케넌은 미국의 대소정책은 장기적이며 서서히, 그러나 끈기 있게 일관성을 가진 정책이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결국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은 채 소련이라는 체제를 변질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케넌이 차후 회고록에서 직접 밝힌 바 있듯이 오해의 소지가 많은 논문이었다. 학자들은 케넌이 Mr. X 논문에서 밝히려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구명하기 위해 연구했는데, 케넌의 진의가 한 연구 분야가 될 정도로 케넌의 대소정책이 의미하는 바는 복잡하고 어려웠다.
《월간조선》은 미국 워싱턴DC 연방검찰이 지난 5월 2일에 작성한 50페이지 분량의 공소장을 입수했다. 공소장에는 북한 조선무역은행이 미국의 대북제재를 피해 어떤 방식으로 돈세탁을 했고, 어떻게 북한 핵·미사일 개발 관련 자금을 조달했는지가 상세히 적시되어 있다. 조선무역은행은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조선무역은행은 여러 국가의 금융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러 지역에 비밀지점을 두고 있다. 조선무역은행의 직원은 총 900여 명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해외 비밀지점에 나와 있는 직원은 300여 명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무역은행은 해외에서 신용대출, 투자, 외화사용 규제 회피, 외국 은행들과 협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자의 수출·수입 등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2013년 3월 조선무역은행을 국제 결제망에서 퇴출시켰지만 지금까지도 비밀리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검찰이 공개한 공소장에 따르면 고철만·김성의 전 조선무역은행 총재와 한웅·리종남 전 부총재를 포함한 평양 본점 및 해외 지점 직원 28명과 황하이린 등 중국인 직원 5명은 250개 해외 지점과 유령기업 이름으로 비밀리에 영업하며 제재를 회피했다. 중국 베이징·선양·단둥·주하이, 러시아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오스트리아, 태국, 쿠웨이트, 리비아 등 10여 개 지점이 해외영업을 계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무역은행이 주요 거점으로 둔 중국 지점의 총책은 김동철이다. 김동철은 중국 선양에 위치한 조선무역은행의 비밀지점에서 활동했다. 특히 김동철은 조선무역은행의 프론트 조직인 SIG(Sumer International Group)와 무역회사 헤드순(Headsoon)을 관리하는 책임자다. 이뿐만 아니라 김동철은 조선무역은행의 유령회사인 SBC(Shenyang Bright Century)와 국제무역회사 밍정(Mingzheng)을 관리하고 있다. 2017년 9월 미국 해외자산통제국은 밍정을 조선무역은행의 물자 등을 공급해주는 대행업체로 지목했다.
조선무역은행이 주요 거점으로 둔 중국 지점의 총책은 김동철이다. 김동철은 중국 선양에 위치한 조선무역은행의 비밀지점에서 활동했다.
스벡스와 콕스는 히라야마선의 고가(高價) 화물을 몰수했다. 그에 대해 선주 측이 항의하자 그들은 에도로 사절단을 올려보내 막부에 사건의 진상과 화물 몰수의 정당성을 직보(直報)했다. 이들에게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윌리엄 애덤스의 존재로 인해 막부 최고위층 접근이 용이한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히라야마 주인선의 사례를 들어 “마카오·마닐라를 왕래하는 주인선이 국법을 어기고 포르투갈·스페인과 내통해 몰래 기독교 포교를 돕고 있다. 일본 선박의 마닐라·마카오 도항(渡航)이 계속되는 한 선교사 잠입이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막부의 권위와 안전을 해(害)할 것이다”라고 히데타다에게 진언(進言)한다. 몰수 화물의 소유권 확보보다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도항 저지가 이들의 본심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영·란으로서는 포르투갈·스페인 선박은 해상 전력의 우위를 통해 일본의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자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교통만 봉쇄하면 (비유럽 세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대일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스벡스와 콕스가 일본 사정을 꿰뚫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책략이었다. 콕스와 스벡스가 움직이자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를 필두로 마카오·마닐라 주인선 무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내 무역세력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주인선 무역을 직접 경영하는 것 외에 포르투갈의 마카오·나가사키 무역에 ‘토긴(投銀)’으로 불리는 투자를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남만무역의 지속은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스에쓰구는 당사자인 히라야마 조친과 함께 에도로 직접 올라가 “영·란 측이 선교사라고 주장하는 유럽인들은 상인일 뿐이며, 이들이 히라야마선을 나포한 것은 무도한 해적 행위에 해당하므로 이들의 교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히라야마선에 탑승한 유럽인들이 과연 선교사인지를 증명하는 문제가 사안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스벡스와 콕스는 히라야마선의 고가(高價) 화물을 몰수했다. 이들에게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윌리엄 애덤스의 존재로 인해 막부 최고위층 접근이 용이한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두 번째 역시 이와 관련된 것으로, 우리에게는 과거 다이톈추(戴季陶·1891~1949·국민당 우파 이론가) 선생의 ‘지식상의 의화단(義和團·권법으로 서양을 몰아내려던 운동)’ 경향이 존재합니다. 일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전쟁에서 ‘모든 대가(代價)를 치르더라도’라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글로벌경제 시대에 그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개혁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가 말이 됩니까? 설마 개혁개방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트럼프 개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도 ‘지식상의 의화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永不放棄/Never give up)》라는 제목으로 2016년 4월 상하이에서 출간된 중국어 트럼프 자서전은 매우 얇은 책입니다. 저는 세 번 읽으면서 트럼프라는 사람이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미국 대통령을 인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우선, 우리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겁니다. 물론 세계도 그를 얕보긴 합니다. 또한, 그가 너무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여깁니다. 사실상 우리가 그를 잘 모르는 것은 진지하게 그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동산 사업가 출신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우선 튼튼히 기초를 세운 다음에 생각하고 세밀하게 설계합니다. 논리가 매우 뚜렷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빌딩은 기울어지고 팔 수 없으니까요. 비즈니스맨으로서 그의 특징은 상대가 강한 신뢰감을 보일 때 상대의 약점을 잘 파악하여 마지노선을 세워 놓고 위협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룹니다. 상대가 전력(全力)으로 공격할 때는 돌연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도 합니다. 자서전에서 그는 몇 차례 벼랑 끝에 처했던 일들과 다양한 상대들과 싸웠던 경험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트럼프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이 우리가 그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트럼프 개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도 ‘지식상의 의화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부동산 사업가 출신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우선 튼튼히 기초를 세운 다음에 생각하고 세밀하게 설계합니다.
이 같은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는 다양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먼저 케임브리지대 피터하우스(Peterhouse) 칼리지에 위치한 본부 이외에도 런던과 워싱턴 D.C., 로스앤젤레스 등에 지부를 두고 미주, 유럽, 아시아·태평양, 아프리카 등 지역뿐 아니라 환경 등 10여 개의 연구 주제에 대한 정책을 연구한다. 소속 연구진은 정기적으로 정책 자료집을 발간하는 한편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TV에 출연하거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외부 연사들을 초빙해서 강연회를 여는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해왔다. 2007년 9월에서 2010년 12월 사이 개최된 주요 행사는 마이클 처토프 (Michael Chertoff) 미(美)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장관과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현(現) 아프가니스탄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과의 간담회를 비롯해 총 185회에 이른다. 올해 3월에는 송상현(宋相現)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이 ‘21세기의 국제법’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2008년 10월에는 데이빗 알턴(Lord Alton of Liverpool) 경(卿)을 초대해 북한 자유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끝으로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는 현직 정치인과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사이어티는 워싱턴 D.C.에서 시작된 외교정책 관련 청년전문가 모임(Young Professionals on Foreign Policy) 런던 지부 운영을 지원한다. 차세대 외교 브레인을 키우기 위해서다. 동시에 스튜어트 노동당 의원, 패트릭 머서(Patrick Mercer) 보수당 의원 그리고 폴 키치(Paul Keetch) 자민당 의원을 앞세워 의회에 영미 관계 및 국제안보 관련 의원 모임(All Party Parliamentary Group on Transatlantic and International Security)을 조직, 정책 현안에 대한 연구를 대행(代行)해 주는 한편 의원 외교를 지원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는 다양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아울러 외부 연사들을 초빙해서 강연회를 여는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해왔다. 소속 연구진은 정기적으로 정책 자료집을 발간하는 한편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TV에 출연하거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
마구하던 도감청에 대해 법으로 고삐를 죌 필요가 있었다. 우선 도감청 관련 실무 책임자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힘들 것 같았다. 도감청을 담당하는 부서는 폐쇄적이었다. 심지어 부장이 명령해도 그들은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기획단에서 함께 일하면서 친했던 과학기술국의 간부가 떠올랐다. 안경을 쓰고 뚱뚱한 그는 명문대 공대(工大) 출신의 수재(秀才)였다. 그를 따로 조용히 만나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기술자 특유의 쑥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보기관 입장에서 도감청은 업무상으로는 필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도감청에 관여하는 많은 직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 시중의 일반 전화국 직원도 업무에 협조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비밀을 지키도록 입을 막고 있지만 언제 누가 양심선언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힘으로 누르고 겁을 주면 됐지만 앞으로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도청법을 만들어 기준을 제시해주시면 그 일을 하는 우리가 좀 더 당당해질 것 같습니다.” 도감청을 담당하는 그도 어떤 막연한 불안이 있었던 것 같았다. “도감청이라는 게 정말 필요한 겁니까?” 내가 근본적인 것부터 물었다. “나는 공대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기술국에 들어와 20년이 넘었습니다. 기술 분야에만 있어서 정보나 첩보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사회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다만 제 분야에 대해 아는 만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신을 장악하는 사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보부 기술국에서 군대 지휘관들이 하는 통신을 체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지휘관들의 통신 속에서는 반란의 징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체험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2·12사태가 벌어졌을 때 보안사령부와 각 부대의 교신(交信)이 심각했습니다. 또 5·18이 일어났을 때 우리 기술국은 자체적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도청 코드를 걸었습니다. 전두환은 당황하고 망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출근하지도 않았습니다. 심복이던 이학봉씨가 전화를 걸어 사령관 소재지를 확인하는 과정도 나오더라고요. 세상은 전두환이 배짱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정권을 잡은 것같이 말하는데, 기술국의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 기회에 도청법을 만들어 기준을 제시해주시면 그 일을 하는 우리가 좀 더 당당해질 것 같습니다. 정보기관 입장에서 도감청은 업무상으로는 필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에 대한 가장 큰 비토 세력은 소련이었다. 과거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바 있는 소련에 동독은 ‘전략적 발코니’였다. 소련은 동독 땅에 30여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 1989년 가을 동독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지자 서독이나 서방은 과거 1956년 헝가리사태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며 긴장했다. 일찍부터 동구권 내정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천명해온 고르바초프는 호네커 정권의 붕괴를 방임했지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부정적 반응을 드러냈다. 소련의 첫 반응은 기존 조약들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헬싱키의정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럽의 현 상태, 즉 주권국가 동독의 존재, 독일(동독)과 폴란드 간의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차지한 옛 독일 영토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라는 얘기였다. 1990년 2월 10일 콜과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에 대해 하등의 이의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같은 달 21일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는 “독일의 통일이 두 동맹 체제(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전략적인 균형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통일독일이 나토에서 탈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는 1952년 스탈린이 했던 제안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콜은 “통일을 위해 나토 회원국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콜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러한 입장을 소련에 전하면서 “중립화된 통일독일보다는 차라리 나토와 유럽공동체의 틀 안에 구속되어 있는 통일독일이 소련의 안보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소련은 통일독일이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둘 다 가입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마지못해 통일독일의 나토 가입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에도 자기들이 동독에서 철수한 후 옛 동독 땅에는 나토군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통일독일의 주권이 여전히 전승 4대국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의미였다.
독일 통일에 대한 가장 큰 비토 세력은 소련이었다. 과거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20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바 있는 소련에 동독은 ‘전략적 발코니’였다. 소련은 동독 땅에 30여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
― 팬데믹 시대에 디지털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디지털을 통한 팬데믹 대응은 피할 수 없다. 전 세계 모든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모바일 인터넷 디지털을 활용해 바이러스 대응에 나서고 있다. 덕분에 국민 개개인을 감시하는 체제로 발전되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자를 알고 정부가 곧바로 연락해서 활동을 제약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디지털 대응은 개개인의 익명화(匿名化)에 있다. 이미 독일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전염병에 걸렸다 해도 정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응할 수 있는 모바일 앱도 있다. 정부가 어디에 어떤 상태의 감염자가 있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는 전부 차단하는 식의 대응체제다. 익명성을 전제로 한 팬데믹 대응인 셈이다. 중국처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개개인의 모든 것을 감시·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에 기초한 디지털 대응체제가 이뤄질 것이다. 결국은 도덕·윤리에 기초한 디지털 체제다.” ― 개인정보와 관련된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의 문제점들이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디지털 정보를 감시체제로 이용하는 정부도 문제지만, GAFA의 경우 19세기식 노동착취의 주범(主犯)으로 변한 지 오래다. GAFA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만, 그들의 비즈니스가 앞으로 계속될 수 있을지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 나의 전망으로는 페이스북은 앞으로 10년 내에 아주 미약한 존재로 변할 것이다. 수많은 소셜미디어(SNS) 중 하나로, 과거의 야후(YAHOO) 같은 존재로 추락할 것이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를 보라. 개인정보 침해와 관련된 스캔들이 수시로 터지고 있다. 왜 계속해서 터져나올까? 마크 저커버그 스스로 페이스북의 운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명(無名)으로 사라지기 전에 엄청난 돈을 벌 목적으로 이미 축적된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비즈니스에 활용하고 있다. 개인 허락도 없이 무단 판매했다는 점에서 불법, 개인정보 활용에 따른 이익금을 개개인에게 전혀 분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취라 볼 수 있다.”
전 세계 모든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모바일 인터넷 디지털을 활용해 바이러스 대응에 나서고 있다. 덕분에 국민 개개인을 감시하는 체제로 발전되고 있다.
정당(政黨)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적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정치적 주장’이라는 것이 포괄적이다 보니 정당들도 사회 전 분야 정견(政見)을 세워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런 통념을 깨고 특정 정책과 공약에 ‘올인’한 이색 정당이 지구상에 속속 나타나고 있다. 2011년 2월 6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 시장선거에서 지역 정당 후보가 민주당과 자민당의 후보들에 압승해 화제가 됐다. 정권교체에 54년이 필요할 정도로 정치적 마이너(minor)의 힘이 미약했던 일본에서 이변이 일어난 셈이다. 골리앗 정당을 물리친 다윗의 이름은 ‘감세일본당’. 당명(黨名)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주요 정책 목표는 감세(減稅)다. 중의원 출신으로 2009년 당선돼 ‘시민세 10% 감세, 시의회 의원 수 및 의원보수 절반삭감’ 등을 추진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이 창당했다. 가와무라 시장은 취임 후 추진한 감세정책이 시의회의 반대로 좌초되자 시장직을 사임하고 시의회 해산운동을 주도하면서 감세일본당을 만들었다. 이후 동시에 치러진 나고야 시장선거와 의회해산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모두 승리, 감세정책을 다시금 추진할 기반을 확보했다. 감세라는 특정 이슈를 키워드로 내세운 작은 지역정당이 중앙권력을 쥐고 있는 거대 정당을 물리친 사례다. 이스라엘에는 ‘은퇴자당’이 있다. ‘기말림(Gimalyim·은퇴자들)당’은 말 그대로 은퇴한 노인들이 설립한 정당이다. 이들은 창당한 지 1년도 채 넘지 않은 2006년 치러진 총선을 통해 입각(入閣)하면서 이슈가 됐다. 기말림당은 큰 이념의 틀 없이 연금확대와 같은 은퇴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 이슈에 집중했다. 은퇴자가 은퇴자를 위한 정책을 만들자 은퇴자들뿐 아니라 젊은 층까지 호응했다. 기말림당의 총수 라피 아이탄(Eitan)이 이스라엘의 정보조직 ‘모사드’ 출신임이 부각되면서 선거운동에 위기가 오기도 했지만, 난관을 극복하고 창당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06년 총선에서 7석의 의석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골리앗 정당을 물리친 다윗의 이름은 ‘감세일본당’. 당명(黨名)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주요 정책 목표는 감세(減稅)다. 2011년 2월 6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 시장선거에서 지역 정당 후보가 민주당과 자민당의 후보들에 압승해 화제가 됐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24년 동안 재위(在位)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in Abdul Aziz) 국왕. 그는 2002년 81세 생일을 맞아 3개월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면서 한화(韓貨)로 600억원 상당의 돈을 썼다. 가족과 친지, 의료진, 경호원 등 300여 명을 실어 나르기 위해 6대의 제트기가 동원됐다. 일행은 제네바의 부촌(富村)으로 이름난 콜롱주 벨리브의 호화 빌라 10채와 500개의 고급 호텔을 장기(長期) 임차(賃借)했다. 2006년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군주 및 독재자의 재산’에 따르면, 당시 압둘 아지즈의 재산은 210억 달러(당시 한화 약 19조7300억원)로 793명 중 최고 부자였다. 이것은 당시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e Ramon Pinochet Ugarte) 전 칠레 대통령은 1995년 11월 25일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생일잔치에는 2000여 명이 참석했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1989년 국민투표에서 패한 후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군(軍)총사령관으로 막후의 실력자였다. 그가 80회 생일장치를 성대하게 치른 것은 여전히 자신이 칠레의 실력자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1986년 민중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지에서 죽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 필리핀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1999년 70세 생일에 마닐라호텔의 연회장 2개를 빌리고 외국인들까지 초청해 다음날 아침까지 요란한 파티를 열었다. 그는 2009년 80세 생일에는 마닐라에서 약 1000명의 손님이 참석한 가운데 수많은 장미꽃과 거대한 생일케이크에 둘러싸여 파티를 벌였다. 생일축하 불꽃놀이도 했다. 마르코스의 가족들은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행운의 숫자 7과 겹치는 7월 7일에 그의 치적을 기리는 책 7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24년 동안 재위(在位)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in Abdul Aziz) 국왕. 그는 2002년 81세 생일을 맞아 3개월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면서 한화(韓貨)로 600억원 상당의 돈을 썼다.
다음날은 1월 25일로 ‘경찰의 날’이었다. 안내자는 “오늘은 공휴일이므로 공항으로 가는 길이 잘 뚫릴 것이다”고 했다. 2000만 인구와 700만 대의 자동차가 붐비는 카이로의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곳으로 악명(惡名)이 높다. 이날은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 오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기를 타고, 타슈켄트를 경유,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운명적인 25일 오후에 무바라크의 30년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카이로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구글 직원인 와엘 고님은 페이스북에 경찰에 맞아죽었다는 할레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수많은 회원들이 생겼다. 몇 사람의 주모자가 1월 25일을 시위 날짜로 잡은 것은 ‘경찰의 날’에 경찰의 무자비성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시위를 꾸민 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전단지를 통하여 홍보를 하긴 하였으나 많이 모여야 수천 명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날 타흐리르(해방) 광장에는 수만 명이 집결, 진압 경찰을 몰아붙였다. 이 현장을 취재한 CNN 카이로 지국장 벤 웨드만 기자는 직감적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보안경찰이 30만명을 넘는 이집트에서 경찰이 몰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직전에 튀니지의 젊은들이 봉기, 23년간 독재를 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낸 사건이 이집트의 젊은이들에게 상상력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은 1월 27일 반(反)정부 시위를 막기 위하여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진 시민들이 카이로 시내로 자연스럽게 몰려들도록 초대한 패착(敗着)이었다. 이집트는 8500만 인구의 52.3%가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이고 실업자가 많다.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이들이 40%이다. 그럼에도 전(全)국민의 76%가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정권은, 현대의 정보기술로 무장한 이 불만층을 향하여 불씨를 던진 셈이다. 더구나 카이로는 인구밀집도가 세계 최고이고, 일자리가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좋은 조건이다.
구글 직원인 와엘 고님은 페이스북에 경찰에 맞아죽었다는 할레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그날 타흐리르(해방) 광장에는 수만 명이 집결, 진압 경찰을 몰아붙였다. 이 운명적인 25일 오후에 무바라크의 30년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카이로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2020년이다. ‘0’이라는 숫자로 끝나는 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한 시대가 끝났다거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0’자가 들어간 해는 우리 모두에 의해 무엇인가 다른 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3rd decade)이 시작되는 2020년은 지난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왔던 국제정치의 몇 가지 변화 요인이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해가 될 것이다. 2020년은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이후, 혹은 더 길게 본다면 1990년 미·소 냉전(冷戰)체제가 종료된 이후 2019년까지 진행된 국제정치의 기본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변하는 결정적인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0년은 소련의 멸망으로 냉전체제가 와해된 해였다. 소련이 없어진 세상에서 미국은 유일 패권국(覇權國)이 되었고, 자국이 오랫동안 원하던 국제질서를 온 세상에 적용시킬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는 ‘세계화(世界化)의 시대(age of globalization)’라고 불리던 것으로서, 미국이 숭앙하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념을 국제정치 차원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세계가 급격히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인 이슬람이 미국을 향해 일으킨 9·11테러는 세계화의 진행을 잠깐 막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무드에 적극 올라탄 중국의 역할로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은 지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유일 패권국의 지위를 다져나간 미국은 온 세계를 자유와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에 근거한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클린턴(1993~2001년), 부시(2001~2009년), 오바마(2009~2017년) 대통령이 충실히 집행한 이 정책은 미국이 명쾌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어야만 하는(permanent war)’ 나라가 되게 하였다. 미국 사회 일각에서 이에 대한 반감(反感)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고, 2016년 대선(大選)에서는 24년간 지속되어온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근거한 미국 외교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1990년은 소련의 멸망으로 냉전체제가 와해된 해였다. 소련이 없어진 세상에서 미국은 유일 패권국(覇權國)이 되었고, 자국이 오랫동안 원하던 국제질서를 온 세상에 적용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유일 패권국의 지위를 다져나간 미국은 온 세계를 자유와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에 근거한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이 같은 관점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도 올해 서적으로 출간된 바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 박현준의 저서 《세대 간 사회이동의 변화: 한국사회 얼마나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는가?》다. 이 책에서 박현준은 조사와 연구를 통해 비(非)화이트칼라 계층 부모의 자녀가 화이트칼라로 상승 이동할 확률은 최근까지도 계속 높아져 왔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출생자가 그 직전 연도 출생자보다 상승이동률 증가가 주춤하긴 하지만 그보다 전과 비교해 보면 여전히 높은 상승이동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화이트칼라 중산층 부모를 둔 자녀들이 부모와는 달리 비화이트칼라로 하강할 확률도 1980년대생에서 급증(急增)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저런 선동 내용들과 달리 한국 사회는 오히려 계층이동이 너무 활발해 문제라는 얘기다. 계층사다리 문제라는 것도 실제로는 위로 올라갈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중산층이 사다리에서 떨어져 하강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에 더 가깝다. 그렇게 새롭게 등장한 한국 사회 중산층이 그 지위를 마치 봉건 계급처럼 대물림까지도 가능한 부동(不動)의 것으로 여기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대한 염증과 분노를 일으키게 됐다는 순서다. 〈오징어 게임〉은, 그리고 다른 많은 한국의 반자본주의 성향 대중문화 콘텐츠는 바로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을 정조준한다. 〈오징어 게임〉 속 기훈과 상우처럼 ‘사다리에서 떨어진’ 이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이다. 다만 여기서 코드를 슬쩍 ‘1% 대(對) 99%’로 바꿔줘 공감대를 넓히는 작업이 추가될 뿐이다. 상위 1%는 선동대로 ‘올라갈 수 없는’ 지점이 아니라, 중산층에 비해 ‘사다리에서 떨어질 위험이 적은’ 지점이라는 점에서 분노의 코드를 모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촘촘하게 구성된 코드가 국내는 물론 해외 각국, 특히 미국에서 크게 불고 있는 각종 불만과 전복(顚覆) 의지를 만나 세계적 문화현상을 일으킨 순서라고 봐야 한다. 2019년은 미국의 〈조커〉, 2021년에는 한국의 〈오징어 게임〉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오징어 게임〉은, 그리고 다른 많은 한국의 반자본주의 성향 대중문화 콘텐츠는 바로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을 정조준한다. 〈오징어 게임〉 속 기훈과 상우처럼 ‘사다리에서 떨어진’ 이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이다.
1995년 미국 의회가 제정한 ‘예루살렘대사관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首都)로 인정하고, 주(駐)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고 규정했다. 단 대사관을 이전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6개월마다 이전을 유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 법의 발의자는 당시 공화당의 밥 돌 상원의원이었다. 대선(大選)에서 유대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낸 묘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6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현직 클린턴 대통령에게 패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패한 뒤 20년 만에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고배(苦杯)를 마신 것이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로 대선에 나섰다가 모두 패한 유일한 정치인으로 기록됐다. 대선에서 밥 돌처럼 유대인의 지지를 기대한 빌 클린턴, 조지 부시(아들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유세에서는 모두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예조항을 활용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지도,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와는 달리 과감하게 유예조항을 무시하고 법안을 그대로 살리는 돌직구를 던졌다. 그리고 지난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일에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했다. 예루살렘 대사관법이 통과될 당시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평화협상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악영향을 우려하여 이 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3년 후인 올해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 이스라엘은 축제 분위기다.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 임시국가위원회 위원장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영국 몰래 텔아비브박물관으로 불러 4시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자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 70년 후인 올해 5월 14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인정하고 대사관까지 이전했으니 두 ‘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에는 은인 중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1995년 미국 의회가 제정한 ‘예루살렘대사관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首都)로 인정하고, 주(駐)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고 규정했다. 단 대사관을 이전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6개월마다 이전을 유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그렇다면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누구인가? 우선 다소 복잡한 시아파 계보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시아파는 5이맘 시아, 7이맘 시아, 12이맘 시아, 이렇게 셋으로 크게 나뉜다. 5이맘 시아는 자이디(Zaydi) 시아라고 하는데, 오늘날 예멘의 후시(Huthi) 반군이 대표적인 자이디 시아다. 7이맘 시아는 이스마일리 시아라고 한다. 현대 세계에서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이스마일리 시아 인물은 영국에서 활약 중인 아가 칸(Agha Khan)이다. 전 세계 시아 중 12이맘 시아 다음으로 큰 분파다. 12이맘 시아는 이란, 이라크, 레바논의 주류 시아로, 보통 시아라고 하면 이들 12이맘 시아를 가리킨다. 7이맘 시아를 이스마일리 시아라고 하는 이유는 6번째 이맘의 후계자 문제로 12이맘 시아와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6번째 이맘 자으파르 앗사디끄(Jafar al-Sadiq)는 큰아들 이스마일을 다음 이맘으로 지명하였는데, 불행히도 이스마일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작은아들 무사(Musa)를 7번째 이맘으로 다시 지명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일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이맘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마일리 시아를 형성하였다. 이스마일리 시아는 10세기 무슬림 세계의 강국 파티마(Fatimah) 칼리파(Khalifah)조를 건립하였다. 909년 오늘날 튀니지 지방에서 시작하여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이들이 세운 도시다. 카이로의 아랍어명은 ‘까히라(Qahirah)’인데, ‘승리자’를 의미한다. 이집트를 차지한 파티마 칼리파조의 자부심이 돋보이는 도시명이다. 또한 이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현대 순니 세계 최고 교육기관으로 불리는 알아즈하르(al-Azhar)를 세웠다. 아즈하르는 ‘가장 빛나는’이라는 뜻인데,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딸 파티마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티마의 다른 이름이 자흐라(Zahrah)였다. 970년 모스크로 건설되었는데, 972년부터는 교육기관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스크는 예배소 외에도 교육기관의 기능을 겸비하였으니 특별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스마일리 시아가 세운 시아 교육기관이 오늘날 순니 최고 기관이 된 것은 흥미롭다고나 해야 할까 보다.
이스마일리 시아는 10세기 무슬림 세계의 강국 파티마(Fatimah) 칼리파(Khalifah)조를 건립하였다. 7이맘 시아는 이스마일리 시아라고 한다. 시아파는 5이맘 시아, 7이맘 시아, 12이맘 시아, 이렇게 셋으로 크게 나뉜다.
상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재작년(1929년) 7월에 잡히어 경성 복심(覆審)법원에서 3년 징역을 받고, 목하 대전형무소에서 그물을 뜨고 있는 그는 “임연선어 불여퇴이결망(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연못에 앉아 물고기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낫다-편집자)”이란 맹자의 일구(一句)를 써서 그의 최근 심경을 그 계씨에게 알리었다 한다. 기독교도로 최초의 출세를 한 그는 최근에 와서 공산주의자로의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거니와 그가 기미(己未·1919년-편집자) 전년이던 무오년(戊午年) 8월 하순경에 상해에서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과 같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야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파견한 것을 비롯하야 혹은 의정원 의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장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인(世人)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1919년, 일본 탁식국(拓殖局) 장관 고하(古賀)씨의 초청을 받아 동경정계에 나타났던 때니 그의 유창한 영어와 현하(懸河)의 웅변이 우선 일본 신문기자들을 탄복게 하고, 그의 개결(介潔·성품이 깨끗하고 굳음-편집자)한 행동과 견고한 의지가 정계 요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으니 동대(東大) 교수 길야작조(吉野作造) 씨로 하여금 “일본서도 드물게 볼 인물이다”라고 격찬(激讚)을 아끼지 않게 했다는 풍평(風評)도 그때의 일이었다. “돈은 필요하지마는 지조와 교환한 돈은 쓸 수가 없다”고, 제출된 30만원 조건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도 있고, “청도(靑島) 총영사의 종신직보다는 종신토록 하여야 할 딴 직분이 있다”고 단연히 동경을 떠났다는 말도 있다. 기후(其後)에 여운형은 1923년 1월 중순경 노도(露都) 모기과(莫期科·모스크바-편집자)에서 개최된 원동(遠東)민족대회에 참석하야 기염을 토한 일도 있었고, 비율빈(比律賓·필리핀-편집자), 남양 등지에로 돌아다니며 세계의 현황과 약소민족의 장래에 대하야 열변을 토한 일도 있었다 한다. 그의 해외생활이 전후 15년에 긍(亘)하였으니, 그의 관계한 일이 어찌 이에 그치랴마는, 그가 잡혀오는 기차 중에서 기자단에게 말한 바와 같이 소성(所成)은 없었으나 해외의 여러 가지 운동에 그가 참가치 아니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 촉진회, 노병(勞兵)회, 대표회 등등에도 그의 족적이 없는 곳이 없다. 당년 46세인 그는 지금 형무소에서 주는 콩밥 세 덩이로 장신위구(長身偉軀)의 건강을 지탱하고 있으니 반도 산하에 양춘(陽春·음력 정월, 따뜻한 봄-편집자)의 엄이 틈을 철창 속에서 내다보는 그의 감회는 그가 아니고는 모를 일이다.
기독교도로 최초의 출세를 한 그는 최근에 와서 공산주의자로의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거니와 그가 기미(己未·1919년-편집자) 전년이던 무오년(戊午年) 8월 하순경에 상해에서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과 같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야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파견한 것을 비롯하야 혹은 의정원 의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장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인(世人)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1919년, 일본 탁식국(拓殖局) 장관 고하(古賀)씨의 초청을 받아 동경정계에 나타났던 때니 그의 유창한 영어와 현하(懸河)의 웅변이 우선 일본 신문기자들을 탄복게 하고, 그의 개결(介潔·성품이 깨끗하고 굳음-편집자)한 행동과 견고한 의지가 정계 요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으니 동대(東大) 교수 길야작조(吉野作造) 씨로 하여금 “일본서도 드물게 볼 인물이다”라고 격찬(激讚)을 아끼지 않게 했다는 풍평(風評)도 그때의 일이었다.
동소문 안 숭삼동의 이광수씨를 찾았습니다. 씨는 수년간을 신병으로 근일까지도 이곳저곳으로 전기 요양을 다녔고 집에는 얼마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한곳에 완성된 서재에서 사색생활을 못하였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늑한 유리창으로 앞을 막은 꽤 넓은 마루 위에 일면으로 따뜻한 보료를 깐 것이든지 상상했던 것보다는 그리 많지 않은 책 탁자 옆에 포근포근한 방석으로 에워싼 등침상이 놓인 것이라든지 그리고 침방 안에 책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만 보아도 씨의 몸 두던 곳이면 다 서재라고 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렇게 항상 서재에 갇혀 삽니다. 지난달에는 이종우씨 개인 전람회 시 날과 또 다른 날에 큰 거리에 나가 보았습니다마는 한 달에 두 번씩이나 바깥 구경을 해본 것은 아마 근년에는 드문 일이겠습니다. 참 오랫동안 착실한 서재생활을 했다고 할런지요. 그러나 ‘독서’라는 것 하고는 전연 인연을 끊었습니다. 주야 책 쌓인 옆에 누워서 눈감고 궁리하기에 골몰하거나 혹은 먼 산을 바라보지 않으면 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흩어지는 나의 구상의 실마리를 거두어보는 공부도 했습니다. 병세가 전혀 물러갔다는 요사이도 여전히 읽는다는 것보다는 쓰는 것을 숭상하는 편이겠지요. 요사이 집필 중에 있는 것은 《단종애사》뿐입니다. 이것도 대개 새벽에 눈이 뜨이면 곧 시작해서 두 시간쯤 계속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씨의 표정은 극히 눈물겹게 나타났습니다. 온 활력과 가득한 재질을 기침 없이 번뜩이던 씨의 먼 과거가 몹시 그리우신 듯도 하며 일변으로 읽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써보고하는 문학자의 생활과 멀리 떠나 지내던 가까운 과거를 애석해하는 듯한 기색도 환연하였습니다. “미깡(귤-편집자)이나 좀 잡수어보십시오”하며 기자의 앞에 과일쟁반을 갖다놓는 씨의 부인 허영숙씨의 “참말이지 다시 살아나신 셈이지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하루 24시간 동안에 일광욕하는 시간과 세 때 식사하는 시간 모두 합해서 4시간쯤이나 일어나 계신지요. 거진 20시간은 꼭 누워 있습니다” 하는 시름없이 솟아나오는 그 말마디에는 형용키 어려울 만한 심각한 맛이 떠돌았습니다. “과연 부인의 놀라운 공력으로 이와 같이 다시 선생을 서재에 뫼시게 되었습니다” 하고 기자가 입을 열게 되자 부인은 대단한 감격한 어조로 다시 “술 담배 그 외 모든 자극물이란 것은 일절 금하고 살로 갈 슴슴 달콤한 음식만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아마 미구에는 정신과 육체가 아울러 건전해질 것이며 따라서 옛 때보다 더 서재생활다운 것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할 때에 곧 뒤를 이어 풀려나오는 씨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동소문 안 숭삼동의 이광수씨를 찾았습니다. 씨는 수년간을 신병으로 근일까지도 이곳저곳으로 전기 요양을 다녔고 집에는 얼마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한곳에 완성된 서재에서 사색생활을 못하였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특히 요즘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상에 번져 가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가 각국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점이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다양한 논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처절하게 펜의 자유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1970년에 설립된 풍자 주간지이다. 전신(前身)은 드골의 죽음을 풍자해 비판을 받고 문을 닫은 주간지 《하라키리》로, 종교인, 정치인, 기업인 할 것 없이 다양한 대상을 성역없이 풍자하는 것을 편집 방향으로 삼아 왔다. 그 때문에 초기 부수가 3만 부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매체는 거침없는 풍자와 비판으로 각계의 표적이 되어 왔다. 2011년 아랍의 봄 특집호를 낸 후 폭탄공격을 받았고, 2012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성적 포즈를 취한 나체의 무하마드를 게재하기도 했다. 테러를 우려한 당시 프랑스 외무상 로랑 파비우스(Laurent Fabius)는 전세계 20개국의 대사관과 문화센터와 학교를 닫으며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고 반문했다. 이슬람 율법은 아무리 멋있게 그렸더라도 무하마드의 그림은 불경한 것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 후 샤를리 에브도는 경찰의 지속적인 경호를 받았는데, 경호하던 경찰 중 한 명도 이번에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47세의 샤르보니에(Charbonnier)는 20년 동안 샤를리 에브도에서 일하며 숱한 위협에 노출되었으나 그때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2012년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풍자 대상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신념은 볼테르의 사회풍자 정신, 그리고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한 사람을 뺀 인류가 같은 의견을 갖고 있고 그 한 사람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인류가 그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인류 전체를 침묵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 말에 근거했을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1970년에 설립된 풍자 주간지이다. 전신(前身)은 드골의 죽음을 풍자해 비판을 받고 문을 닫은 주간지 《하라키리》로, 종교인, 정치인, 기업인 할 것 없이 다양한 대상을 성역없이 풍자하는 것을 편집 방향으로 삼아 왔다. 그 때문에 초기 부수가 3만 부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매체는 거침없는 풍자와 비판으로 각계의 표적이 되어 왔다.
샌더스는 강성 리버럴 성향의 공약들을 내놨다. 복지 혜택을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갈수록 심화하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100만명의 저소득층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대학 무상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천명했다.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제도를 대폭 확대하고 보육과 유아교육을 의무화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금융산업 관련 공약은 클린턴 행정부의 금융산업 규제 완화 정책을 폐지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초대형 금융기관들은 해체하는 것이 답”이라는 입장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지인 초대형 금융회사들은 위기 이후 몸집이 더 커져서 미국 경제를 다시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셋째, 탁월한 소통 능력을 지녔다. 트럼프는 논란을 이용한 언론 플레이의 대가였다. 10년 넘게 토크 라디오를 진행하고 리얼리티 쇼에 출연한 그는 ‘비난보다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란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청취율과 시청률을 올리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러한 교훈을 선거운동에 적용했다. 시도 때도 없이 유명 정치인과 언론인, 연예인들을 실명을 들어 가며 조롱하고 비난했다. 이를 통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론의 관심 기회를 자신과 자신의 정책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는 기회로 활용했다. 아직까지 ‘논란 마케팅’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트럼프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샌더스는 온라인 선거운동 능력이 뛰어났다. 차기 대권 주자들의 웹사이트 중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공식 웹사이트는 물론, 구독자가 10만명에 육박하는 레딧(Reddit) 게시판과 100만명 이상의 팔로워를 갖고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 등 SNS를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공약을 소개하고 지지층을 넓혔다. 참여형 선거운동을 펼쳤다. 지지 소모임을 결성하도록 유도하며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했다. 이러한 선거운동의 위력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일궈낸 대규모 유세에서 잘 드러났다. 7월 1일에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와, 8월 10일 포틀랜드주 오리건시에서 개최된 샌더스 연설에는 각각 1만명과 2만8000명이 모였다. 대선 후보 경선 초반에는 접하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샌더스는 강성 리버럴 성향의 공약들을 내놨다. 복지 혜택을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이 기구는 우여곡절 끝에 1950년 9월 19일에야 겨우 공식 출범했다. 출범과 거의 동시에 서독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그동안 얻어 쓴 자금이 식량과 원자재 구입으로 이미 소진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IMF에 특별 융자금을 신청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1950년 가을은 서독 경제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 부담스럽던 빚을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5월이 접어들기 무섭게 일거에 다 갚아버렸다니, 이게 있을 법한 일인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946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개혁파의 대표 격이던 야콥 카이저는 “부르주아 시대는 지나갔다”고 천명하면서 새로운 도이치의 도덕적·정치적 기반을 닦으려면 부(富)의 재분배가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부르주아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즉각 맞받아쳤다. 그의 동조자들은 자신들의 비전을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라고 명명(命名)하고선 강력한 국가권력이 독점과 카르텔로부터 자유경쟁과 자유기업을 보호해주는 길만이 최선이자 국민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Freie Markt)만이 보편적 번영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사회적이라는 논지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그리고 그들의 고위 보좌관들은 모두 사회적 시장경제가 중·장기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복리증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이었지, 당장 임금을 충분히 올려줄 묘수를 장만해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숙성 기간을 거치면 경제가 나아진다는 원론적인 입장이었는데, 6·25가 서독 경제의 전면 가동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앞당겨준 것이다. 동독에서는 소련이 악랄하게 생산시설을 뜯어가고 인프라 전반을 해체했지만, 서방연합국 점령지 일부에는 요행히 얼마간의 생산 기반과 인력이 남아 있었기에 밀려오는 수요에 젖 먹던 힘을 짜내서 감당하려는 엄두라도 냈다.
출범과 거의 동시에 서독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그동안 얻어 쓴 자금이 식량과 원자재 구입으로 이미 소진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IMF에 특별 융자금을 신청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처럼 코란 말씀에 따라 무슬림은 한 해가 12달이고 윤일이 없는 이슬람력을 사용한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지 6년째 되는 해인 638년 당시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였던 우마르가 이슬람력의 기원 1년을 622년으로 정하였다. 무함마드는 고향 메카에서 유일신 신앙을 알리려고 했지만 반대파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이해에 위험을 무릅쓰고 무슬림 공동체를 북쪽 오아시스 도시 야스립으로 옮겼다. 이를 히즈라(hijrah)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이주(移住)’라는 뜻이다. 야스립은 무함마드가 온 이후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인 ‘마디나트 안 나비(Madinat an-Nabi)’로 불렸고, 이를 줄여 아랍어로 ‘메디나(Medinah)’로 부른다. 우리말로는 ‘도시(都市)’다. 메카와 메디나는 339km 떨어져 있다. 최초의 무함마드 전기 작가인 이븐 이스하크(Ibn Ishaq)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메디나 남쪽 쿠바(Quba’)에 도착한 때가 무슬림력으로 라비 알아왈(Rabi‘ al-Awwal)월 12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서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622년 9월 24일이다. 그런데 무슬림력에서 이달은 3번째 달이다. 따라서 역산하여 첫 번째 달 첫날인 무하람(Muharram)월 1일을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았다. 서력으로는 7월 15일(목)과 16일(금) 사이인데, 7월 16일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슬람력은 히즈라를 기준으로 하였기에 히즈라력이라고 한다. 히즈라의 형용사형인 히즈리(Hijri)를 써서 영어로는 히즈리 캘린더(Hijri Calendar)라고 부른다. 서구 문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삼아 서기를 표현할 때 A.D.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안노 도미니(Anno Domini)’의 약자로 ‘주님의 해’라는 뜻이다. 이슬람력은 히즈리 해(Anno Hijri)라고 하여 A.H.라는 약어를 쓴다. 물론 요즘 영어권에서는 A.D.가 지나치게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공원(公元, Common Era)의 약자인 C.E.로 표기한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지 6년째 되는 해인 638년 당시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였던 우마르가 이슬람력의 기원 1년을 622년으로 정하였다. 이처럼 코란 말씀에 따라 무슬림은 한 해가 12달이고 윤일이 없는 이슬람력을 사용한다.
타이완의 탈중입미(脫中入美)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이완 역사의 큰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대륙에서 패퇴해 타이완에 자리 잡은 뒤 ‘본토수복’이란 구호를 내세우면서 타이완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교육해왔다. 중국 본토에 뿌리를 둔 정권으로서는 당연한 스탠스였다. 하지만 타이완 역사는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인 하서시기(荷西時期), 반청복명운동을 벌인 정성공이 1662년부터 1683년까지 21년 동안 지배한 명정시기(明鄭時期), 이어 청조의 강희제에 복속된 청치시기(淸治時期),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관할이 넘어간 이후부터 종전까지의 일치시기(日治時期)로 분류된다. 폴리네시아 인종에 속하는 다양한 원주민과 중국 본토 푸젠에서 이주해온 한족까지 타이완은 서로 다른 방언을 구사하는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면서 타이완인(Taiwanese)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스페인-청조-일본 등 역대에 걸쳐 타이완을 통치한 이들은 타이완인들 위에 군림해 온 타자(他者)라는 관념이 강하다. 명청(明淸)교체기에 정주(定住)하기 시작한 타이완의 한족들조차 중국 본토의 한족은 자신들을 복속시키려는 이방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2018년 1월 1일 총통부에서는 차이잉원 총통이 참석한 가운데 새해맞이 행사가 열렸다. 이때 현지의 언론매체들은 차이 총통이 중화민국 국가(國歌)를 오랜만에 소리 내어 불렀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민주의 오당소종(三民主義 五黨所宗·삼민주의는 우리 당(국민당)이 받들어야 할 이상)’이란 말로 시작되는 중화민국 국가는 국민당 색채가 짙어 이전에 차이잉원 총통은 국가 제창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타이완이 가진 정체성 고민이 여기에 함축돼 있다. 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하나의 중국’을 모토로 하는 9·2공식(共識)에 대해 결연한 반대입장을 밝힌 차이잉원 총통은 중화민족주의의 그늘에서 탈피해 미국과 굳건한 동맹전선을 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와 혼합된 중화민족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2018년 1월 1일 총통부에서는 차이잉원 총통이 참석한 가운데 새해맞이 행사가 열렸다. 이때 현지의 언론매체들은 차이 총통이 중화민국 국가(國歌)를 오랜만에 소리 내어 불렀다는 점에 주목했다.
2003년 일간지 《알와딴》의 편집장이 됐지만, 이븐 타이미야(1263~1328)를 비판하는 글이 지면에 나가도록 했다는 이유로 불과 52일 만에 편집장에서 해임됐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종교사에서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주장하다가 옥고(獄苦)를 치른 아흐마드 이븐 한발(780~855)의 보수적인 신앙을 이어 받은 학자다. 그는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성인(聖人) 공경과 같은 대중적인 믿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슬람으로 개종(改宗)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 지배층을 불신자(不信者)라고 비난했으며, 신학과 철학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배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종교이념인 와하비(Wahhabi) 사상은 아흐마드 이븐 한발과 이븐 타이미야를 사상적 원조로 삼는다. 그런데 이븐 타이미야를 비판하는 글이 나가도록 했으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층이 발칵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서구(西歐)에서는 이때부터 카슈끄지를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종교이념에 도전하는 용감한 언론인’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를 낸 것은 사실 대단한 일이다. 카슈끄지가 ‘사상(思想)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철옹성(鐵甕城) 같은 국가이념인 와하비 사상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그는 실은 무슬림형제단을 추종하는 인물이었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은 세속적(世俗的) 서구사상에 반대하고, 이슬람을 종교를 넘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보는 근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와하비와 다른 점은 와하비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정(王政)의 수호사상이라면,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의 가치가 철저히 스며든 국가를 꿈꾼다. 서구가 카슈끄지를 ‘진보적 언론인’으로 보는 것은, 면밀히 살피면 사실 실상과 다른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이 다양한 사유(思惟)가 공존(共存)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종교사에서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주장하다가 옥고(獄苦)를 치른 아흐마드 이븐 한발(780~855)의 보수적인 신앙을 이어 받은 학자다. 그는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성인(聖人) 공경과 같은 대중적인 믿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날 애리조나 체이스필드에는 류현진을 보기 위해 그의 형과 부모도 경기장을 찾았다. 류현진은 경기 후 자신의 라커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한미프로통산 100승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타격 역시 마찬가지다. 항상 개인기록보다 팀 승리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미통산 100승을 달성한 현장에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곤 부모님이 항상 오셨다. 한 경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느라 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투수 류현진이 타석에서 보여준 3타수 3안타의 기록은 다저스 팬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에게도 큰 화제가 됐다. 특히 올해로 64년째 다저스 경기를 홀로 중계하며 ‘다저스의 목소리’로 불리는 빈 스컬리(86) 다저스 전담 캐스터는 기자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류현진이 마지막 타석에서도 안타를 쳐 다저스 투수 가운데 지난 2009년 3타수 3안타를 기록했던 랜디 울프의 기록을 깼으면 했지만 1루 주자가 견제사당하는 바람에 류현진의 타격 기회가 무산돼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류현진의 부모와 형이 경기장을 찾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가능한 한 우리 TV 중계 카메라가 그들의 모습을 자주 화면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다저스의 1선발 클레이튼 커쇼 또한 류현진의 활약을 가리켜 “멋진 타격이었다. 류현진은 앞으로 타자로 전향해도 되겠다”며 찬사를 보냈다. 과거 메이저리그 홈런타자 출신으로 현재 다저스 타격코치를 맡고 있는 마크 맥과이어는 경기 다음 날인 15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류현진은 타격 재능을 타고난 선수가 분명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투수는 홈경기를 할 때만 타격연습을 하고 원정 땐 타격훈련을 할 장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연습을 생략한다. 타격훈련도 안 한 류현진이 한 경기에서 3안타를 몰아친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타격에 재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맥과이어 코치에게 한국에는 지명타자제도가 있기 때문에 류현진이 고교 졸업 후 8년간 타격을 한 적이 없다고 알려주자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칠 수 있냐”며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할 정도였다. 맥과이어 코치는 현역시절 통산 홈런 583개(역대 10위)를 터뜨리며 ‘빅맥(Big Mac)’이란 애칭으로 유명했던 거포였다.
투수 류현진이 타석에서 보여준 3타수 3안타의 기록은 다저스 팬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에게도 큰 화제가 됐다. 특히 올해로 64년째 다저스 경기를 홀로 중계하며 ‘다저스의 목소리’로 불리는 빈 스컬리(86) 다저스 전담 캐스터는 기자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류현진이 마지막 타석에서도 안타를 쳐 다저스 투수 가운데 지난 2009년 3타수 3안타를 기록했던 랜디 울프의 기록을 깼으면 했지만 1루 주자가 견제사당하는 바람에 류현진의 타격 기회가 무산돼 아쉬웠다”고 말했다.
1966년 12월 기민당과 사민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대연정(大聯政)이 출범했다.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총리,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았다. ‘코끼리들의 결혼’이라는 소리를 들은 대연정은 전체 하원의석 중 총 447석을 차지했다. 기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다가 밀려난 ‘유일 야당’ 자민당의 의석은 49석에 불과했다. 대연정이 출범한 것은 당시 산적해 있던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큰 과제는 그때까지도 미국·영국·프랑스 등 점령 3개국이 갖고 있던 비상사태 선포권을 넘겨받아 기본법(헌법)에 이를 명시하는 개헌(改憲)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서독이 완전한 주권 회복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세력, 지식인, 학생들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한 대연정이 나치와 같은 독재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독일은 훗날 ‘문화혁명’이라고 일컫게 되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1950년대 ‘라인강의 기적’ 덕분에 전후 복구를 완결 짓고 풍요를 누리게 됐지만, 그 풍요의 과실을 따 먹게 된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를 향해 “당신들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뭐 하고 있었느냐?”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젊은이들에게 전후 서독은 나치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전히 권위주의적 적폐(積弊)들이 온존해 있는 불의(不義)한 체제였다. 기성 체제의 모순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연극이 공전의 히트를 하는가 하면, 나치 전력(前歷)이 있는 기민당 요인들이나 보수 매체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은 나치 시대에 군사기지와 강제수용소 건설을 했던 건설회사 간부였다는 이유만으로 ‘나치’라는 공격에 시달리다가 임기 만료 전에 사임했다. 나치 시절 외무부 부국장이었던 키징거 총리도 젊은 여성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았다. 정신병리학자 알렉산더 미첼리히는 이러한 현상을 ‘아비 없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아비 없는 사회’의 젊은이들의 불만은 결국 1968년 68사태로 폭발했다. 그 배후에는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국가안전부)의 공작이 있었다.
대연정이 출범한 것은 당시 산적해 있던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큰 과제는 그때까지도 미국·영국·프랑스 등 점령 3개국이 갖고 있던 비상사태 선포권을 넘겨받아 기본법(헌법)에 이를 명시하는 개헌(改憲)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는 둘 다 ‘작은정부주의자’이다. 또 다른 법가의 간판스타인 상앙(商鞅) 역시 작은 정부론을 역설한다. 민간이 알아서 하자는 것이고 민간영역에 판단을 맡기자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몇 가지 형태가 있다. 백성의 집에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천하에서 왕 노릇 하며, 관리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강하게 되고, 군주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나라는 약해지고 만다.〉 《상군서(商君書)》 ‘설민(說民)’편 옳고 그른 판단은 임금이 하는 것이 아니다. 관리가 해주는 것 역시 아니다. 백성이 한다. 백성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백성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한다. 이것을 해도 될지 안 될지, 이 사업을 시작해도 될지 안 될지 일일이 국가의 판단을 물어야 하고 공무원들에게 허가를 맡는 것이 아니다. 민간의 일은 민간에서 민간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천하에 왕 노릇 하는 나라는 형벌과 상을 민심에서 판단되도록 하며 기물과 용구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집에서 판단되도록 한다. 정치가 명확하면 백성들의 판단이 군주와 같아지고 정치가 어두우면 군주와 백성의 의견이 달라진다. 의견이 같아지면 실행이 되고 의견이 다르면 저지되고 말 것이며 실행되면 다스려지지만 저지되면 혼란이 일어난다.〉 《상군서》 ‘설민’편 모든 일에서 국가의 관리·감독이 필요해선 안 된다. 백성들이 자율적인 판단 주체가 되고 그들이 결정해야 한다. 어느 것을 팔지, 어떤 사업을 할지, 사업 자체를 할지 말지, 어떤 일을 벌일지 국가가 결정해야 하나? 특히 생산과 교환의 영역에 반드시 국가가 나서야 할까? 상앙의 생각에는 아니다. 민간에서 알아서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왕 노릇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간의 힘이 세져야 국가 역시 강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 간섭이 덜해야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고 본 것이다. 민간에 자유를 주고 민간영역을 믿어야 외부로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제국과 같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는 둘 다 ‘작은정부주의자’이다. 또 다른 법가의 간판스타인 상앙(商鞅) 역시 작은 정부론을 역설한다. 민간이 알아서 하자는 것이고 민간영역에 판단을 맡기자는 것이다.
독일은 지난 1970년대에 행정개편을 통해 지자체 조직을 개선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지자체 규모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00만 인구의 대(大)도시 쾰른은 광범위한 결정권한을 갖고 있지만, 주민 수 5000여 명의 작은 게마인데는 그렇지 못하다. 독일 역사를 보면, 게마인데의 규모와 관계없이 자치에 대한 의식과 욕구가 강하게 깔려 있다. 이러한 전통이 냉전 후 동서독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통일 전 동독에는 지방자치란 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분단되면서, 동독 정부가 소위 ‘민주적 중앙집권체제’를 위해 지방자치 개념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읍·면과 같은 지방행정 단위는 국가행정의 최하부기관으로 강등됐고, 지역의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유치원, 체육시설, 문화시설, 직업학교, 소방서 등 서독에서는 자치단체 고유 영역에 속하는 분야를, 동독에서는 국영기업이 맡았다. 이들 기관은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간섭을 받거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다. 동독에는 주를 대신해 14개의 ‘구역(Bezirk)’이 있었다. 물론 자치권을 갖지 못했으며, 국가행정의 중간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구역은 사회주의통일당 세력이 이끄는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독일 통일은 동독이 서구화된 서독에 ‘가입(beitreten)’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현명하게도 1949년 헌법을 기초한 서독 법학자들은 하나의 특별 조항을 마련해 뒀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 시 동독이 서독의 법적, 행정적 시스템을 완전하게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조항을 둔 것이다. 실제로 동독의 중앙집권적 통치원칙은 민주적, 연방적 구조를 가지고 있던 서독의 그것과 전혀 호환될 수 없었다. 또 동독 체제에는 법치주의와 사회복지국가(Sozialstaatlichkeit)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도 전무했다. 결국 전수(Transfer)를 통한 변환(Transformation)이라는 형식의 통일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는 지방자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지난 1970년대에 행정개편을 통해 지자체 조직을 개선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지자체 규모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세 번째로 선덕왕이 미리 안 일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물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의 남쪽이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과연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불경은 말한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한 절이다. 선덕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이 절을 세웠는데, 674년에 명랑법사(明朗法師)는 당(唐)나라의 50만 대병을 막기 위해서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지어 부처의 힘으로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그 후 5년 만에 사천왕사는 완공을 보았다. 불경에는 도리천이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나온다. 서라벌 가운데 있는 낭산 남쪽 아래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며, 선덕왕릉은 낭산 남쪽 봉우리 정상에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선덕왕을 신령스런 대왕으로 떠받들었다.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왕 재위 3년(634년)에 창건되었다. 남동신 박사(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분황사의 재조명》이란 저서에서, ‘분황사’란 절 이름이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절 이름에 향기 분(芬) 자가 들어가는 것은, 당시 여성이 왕이 된 것을 비판하는 일부 신라 귀족 세력들에게 선덕왕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분황사 건립 12년 후인 선덕왕 재위 15년(646년)에 완성한 황룡사구층목탑도 외적[九夷]들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또한 여왕이라 하여 국내외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선덕왕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신라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한 절이다. 선덕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이 절을 세웠는데, 674년에 명랑법사(明朗法師)는 당(唐)나라의 50만 대병을 막기 위해서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지어 부처의 힘으로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 아베(安倍) 전 총리, 스가(菅) 현 총리에서 볼 수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총리가 과학자와 함께 대국민 기자회견에 나서게 됐다. 사령탑으로서의 정치가와 과학자의 결합인데, 이것은 후쿠시마에서 얻은 교훈일 듯하다. “정치가와 과학자가 함께 자리를 하면서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후쿠시마 참사 당시 총리는 간 나오토(菅直人)다. 도쿄공업대학 출신으로, 본인 스스로 과학기술에 정통한 엔지니어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건 발생 당시 간 총리의 대응이 사사건건 지나치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나왔다. 총리관저와 과학기술자들과의 불협화음이 곳곳에서 노출됐다. 아베 전 총리나 스가 총리의 대응 방식을 보면 간 총리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적절히 대응하는 듯하다.” ― 후쿠시마 참사는 10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천재지변의 결과라는 말도 있다. “후쿠시마 원전 관리 기업인 도쿄(東京)전력이 그 같은 변명의 진원지다. ‘거대한 자연의 힘을 인간이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라는 심정일 것이다. ‘쓰나미(津波)로 인해 세상을 뜬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해서 도쿄전력의 책임인가’라는 변명도 심심찮게 들린다. 나는 그 같은 변명을 수용할 수 없다. 증거는 도호쿠(東北)전력이 운영한 오나가와(女川) 원전이다. 후쿠시마에서 북쪽으로 175km 떨어진 곳에 들어선 바닷가 원전이다. 후쿠시마보다 지진층에 한층 더 가까운 곳에 들어선 발전소이다. 1984년부터 발전에 들어갔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무려 15m 높이의 방파제를 쌓았다. 당시 도호쿠전력 부사장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인데, 방파제 건설에 따른 추가 비용에 대한 반발이 엄청났다. 하지만 그 덕분에 3·11 당시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 무사히 지나갔다. 당시 오나가와 주변은 쓰나미 피해자들의 피난 생활 무대로도 활용되었다. 방파제가 지켜주고, 다른 곳은 전부 정전(停電)인데도 원자력발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에는 도호쿠전력의 부사장 같은 사람이 없었다.”
후쿠시마 원전 관리 기업인 도쿄(東京)전력이 그 같은 변명의 진원지다. ‘거대한 자연의 힘을 인간이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라는 심정일 것이다.
조선의 당쟁을 거시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실마리를 저 멀리 남송(南宋) 시대 두 유학자의 격렬한 논쟁에서 찾은 이유는 이 사건이야말로 조선의 300년 당쟁을 총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송 시대 두 번째 황제인 조신(趙昚·효종)의 통치 연간인 순희(淳熙) 8년(1181년)부터 12년까지 4년에 걸쳐 당시 52세던 주희(朱熹·1130~1200년)와 39세던 진량(陳亮·1143~1194년)이 유학의 도(道)를 둘러싸고 두 사람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논전(論戰)을 벌였다. 사실 외형적으로만 보면 두 사람은 같은 유학자에다가 둘 다 금(金)나라에 맞서 화의(和議)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크게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친분도 깊은 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깊은 심연(深淵)의 양편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 진량은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반대하며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자들에 대해 “도덕성명(道德性命)에 대해 공담이나 일삼으니 중풍으로 마비돼 고통과 가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대신 그는 유학을 원칙으로 삼되 세상을 위해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인 일을 추구했다. 이를 흔히 사공학(事功學)이라고도 하고, 공리(功利) 추구라고도 부른다. 첫 번째 불꽃은 그간 중국 왕조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서 피어올랐다. 이미 주희뿐만 아니라 기존의 성리학자들은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는 오로지 천리(天理)로써 정치를 했고,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오로지 인욕(人欲)으로써 정치를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도(道)라는 것도 주희 등에게는 바로 삼대의 도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나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에 대해서는 이욕(利慾)에 입각한 공리(功利)나 추구한 잡패(雜覇)일 뿐 삼대의 왕들처럼 왕도(王道)를 행한 임금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이나 주희는 늘 “삼대의 도리는 주나라에서 끊어졌다”고 말했다. 이는 한나라·당나라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송나라조차도 임금다운 임금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만으로도 극한의 왕권 비판 이론이었다.
평소 진량은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반대하며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다. 대신 그는 유학을 원칙으로 삼되 세상을 위해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인 일을 추구했다.
콘퍼런스는 매일 강사들이 바뀌어 발표를 했다. 강사 중에는 《제3의 물결》이란 책의 저자인 엘빈 토플러가 있었다. 그가 정보수사관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범인의 집에 들어가려면 수색영장도 있어야 하고 총에 맞을 위험도 있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로봇 거미를 만들어 침투시키고 외부에서 모니터로 보면 어떨까요? 이 로봇 거미가 천장이고 벽장이고 다니면서 촬영을 하고 필요하면 범인에게 독침을 쏴서 잠시 마비시켜 체포하면 편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정보 수사기관의 일들이 아주 줄어들 텐데 말이죠.” 사람들이 ‘와아’ 하며 웃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고 있는 미국 경찰관의 모습은 권총과 경찰봉을 배에 차고 있는 뉴욕 거리의 뚱보 이미지였습니다. 갱들의 원색적인 근육의 힘에 대응하는 국가 공권력의 상징이었죠. 그러나 권총이나 방망이로 상징되는 그런 경찰관의 모습이 유물로 되는 세상입니다. GPS 시스템을 개발하면 어디에 있는 누구라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인공위성에서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셀룰러 폰의 건전지를 자극하면, 폭발하게 돼 범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보화·과학화 되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쉬었다. 사람들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여러분 재미있는 얘기 한두 가지 더 해볼까요? 요즈음 핵폐기물을 처리하느라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단인데 그걸 값싸게 처리할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이미 우리 미국에서 대기권 밖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건 그 비용이 얼마 되지 않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가격이 파격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핵폐기물을 로켓으로 전부 대기권 밖으로 쏴 올려서 우주에다 버리는 겁니다. 나중에 우주인들이 우주의 공해 문제를 들고 항의하러 올 때까지는 안심 아닙니까? FBI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쳐서 병원에서 수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앞으로는 얼마든지 인공장기들이 생산되어 나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같이 불편한 방탄조끼를 입지 않고 일을 보고 만약 장기가 다치면 바로 앰뷸런스로 들어가 장기를 갈아 끼우면 되지 않을까요?”
강사 중에는 《제3의 물결》이란 책의 저자인 엘빈 토플러가 있었다. 인공위성에서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셀룰러 폰의 건전지를 자극하면, 폭발하게 돼 범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보화·과학화 되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이 무렵 언론에 등장해 또 다른 맥락의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장난치려고 한다면 큰 실수가 될 것” “김정은이 합의를 이뤄내지 않으면 리비아가 끝난 것처럼 끝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펜스 발언에 북한 당국이 험담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5월 24일 회담 취소를 발표한다. 그는 “슬프게도 최근 성명에서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볼 때, 오랫동안 계획됐던 만남을 갖는 게 부적절하다고 느껴진다”며 “김 위원장이 핵 역량을 얘기하는데 미국의 핵 역량은 매우 크고 강력하다. 이를 절대 사용할 일이 없기를 신(神)에 바란다”고 했다. 볼턴이 대통령을 설득해 회담을 취소시켰지만, 이 결정은 곧 뒤집힌다. 트럼프는 세기적 만남이 가져다줄 언론의 관심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노련한 김계관이 사과성 성명을 내자, 트럼프는 “북한과 다시 대화 중”이라며 “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회담 전날 폼페이오 장관은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수용 가능한 유일한 결과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고 했다. 다음 날 싱가포르회담 결과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문구가 사용되는 등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당하였다는 평가가 나오게 된다. 싱가포르회담 이후 말이 가장 크게 바뀐 사람은 트럼프와 폼페이오였다. 김정은을 ‘리틀 로켓 맨’이라 조롱하던 트럼프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폼페이오의 말은 종잡을 수 없었다. 폼페이오는 6월 13일 한국에서 기자들과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한의 중대한 비핵화(major disarmament) 성과를 달성하기 바란다”고 했다. 6월 25일에는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시간표를 설정할 계획이 없다”며 “2개월이 됐든 6개월이 됐든 시간표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취소했다. 이즈음 볼턴 보좌관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1년 이내에 폐기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무부 대변인실은 즉각 “북한에 비핵화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런 혼선이 의도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 측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이 무렵 언론에 등장해 또 다른 맥락의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장난치려고 한다면 큰 실수가 될 것” “김정은이 합의를 이뤄내지 않으면 리비아가 끝난 것처럼 끝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펜스 발언에 북한 당국이 험담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5월 24일 회담 취소를 발표한다.
그러나 한미 동맹이 막강한 것 같아 보이는 바로 이 시점에서, 비록 소수(少數)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한미동맹을 끝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보고서가 간행됐다. 보고서를 내놓은 케이토(CATO) 연구소는 미국 워싱턴DC에 소재하고 있는 보수(保守) 성향의 유명 싱크탱크로서, 헤리티지재단과 함께 자유주의(libertarian)적 입장을 대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연구소다. 보고서의 저자 더그 밴도(Doug Bandow) 박사 역시 레이건 대통령 특보(特補)를 지낸 영향력 있는 학자다. 그는 냉전(冷戰)이 끝난 1990년대 초반 이래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과 책을 다수(多數) 저술했으며 최근(6월 23~24일)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도 “지금은 미국이 한국에서 물러날 시기”라는 평소의 지론(持論)을 강력히 주장했다. 7월 14일 간행된 밴도 박사의 보고서는 비록 본문 6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내용이지만 “한미동맹은 너무 낡았으며, 불필요하고, 위험한 것(outdated, unnecessary, and dangerous)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점진적으로 한미동맹을 철폐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보고서가 현 오바마 행정부의 대한(對韓)정책을 뒤바꿀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 더 나아가 한반도란 무엇일까?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으며, 미국은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지켜줄 것인가? 세계 4대 강국의 이익이 상호 교차되는 지극히 위험한 지역인 동북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서, 솔직히 혼자 힘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것도 역부족인 대한민국이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할 수 있을까? 등등 광범위한 전략적 주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계기를 제공한다. 우선 이 글에서는 한미동맹과 주한(駐韓)미군에 관한 미국의 다양한 입장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보고서의 저자 더그 밴도(Doug Bandow) 박사 역시 레이건 대통령 특보(特補)를 지낸 영향력 있는 학자다. 그는 냉전(冷戰)이 끝난 1990년대 초반 이래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과 책을 다수(多數) 저술했으며 최근(6월 23~24일)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도 “지금은 미국이 한국에서 물러날 시기”라는 평소의 지론(持論)을 강력히 주장했다.
미국의 많은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행복한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직이란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따라서 재임 중 그만큼 정신적 압박을 많이 받아 폴크(James Polk)와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처럼 퇴임 후 4년 이내에 사망한 분도 있다. 반면 후버(Hoover) 대통령처럼 퇴임 후 무려 32년간 사회활동을 한 후 생을 마감한 분도 있다. 특히, 그는 퇴임 후 정부의 행정개혁을 위한 ‘후버 위원회’(Commission on Organization of the Executive Branch)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제퍼슨(Jefferson) 대통령은 퇴임 후 17년간 활동했는데 그는 현재의 버지니아(Virginia) 대학교를 설립했고, 매디슨(Madison) 대통령은 퇴임 후 이 대학의 이사장을 지냈다. 또한 미국의 몇몇 대통령은 퇴임 후 다시 공직에 종사했다. 애덤스(John Quincy Adams) 대통령은 퇴임 후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7년간 재직하였다. 존슨(Andrew Johnson) 대통령은 재임 당시 의회를 무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서 하원에서 탄핵이 결정되었으나 상원에서 한 표 차이로 탄핵이 부결되었다. 퇴임 후 그는 다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재직하였다. 반면 몇몇 전직 대통령(예를 들어, 뷰런, 필모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등)은 다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다만 클리블랜드(Cleveland) 대통령(1885~1889)은 퇴임 후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하여 4년 후 다시 대통령(1893~1897)에 당선되어 재직하였다. 태프트(Taft) 대통령(1909~1913)은 퇴임 후 모교인 예일대 법과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다 하딩(Harding) 대통령에 의해 미국 연방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930년 사망할 때까지 9년 동안 재직했다. 그는 점점 강력해지는 대통령의 권한과 영향력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외에도 많은 전직 대통령들은 여행, 독서, 회고록 집필 등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반면 후버(Hoover) 대통령처럼 퇴임 후 무려 32년간 사회활동을 한 후 생을 마감한 분도 있다. 특히, 그는 퇴임 후 정부의 행정개혁을 위한 ‘후버 위원회’(Commission on Organization of the Executive Branch)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미국의 많은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행복한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며, 더 이상 시장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오만한 과신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장을 이상화하고 정부를 불신하는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았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에서 벗어나 더 이상 정부의 규제, 행정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치명적인 오류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을 분리하는 대신에 더욱 가까운 관계로 설정한다. 그 이유는 정치, 경제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세계에서 애매모호하고(fuzzy), 예측가능하지 않은 세계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이제 금융안정을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경제성장과 고용을 관리하는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정부기구의 확대를 의미하기보다는 정부의 역할과 영향력, 즉 규제강화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서구의 민주주의와 인권원칙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권위주의적인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모델을 강화하여 왔다. 과연 서구의 민주주의 가치가 아니라 중국의 권위주의에 기초한 국가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미국이 새로운 정치방향을 잡아가는 데 헤매고 있고, 유로존이 위태한 상태이며,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일본은 3·11 후쿠시마 원전사태 여파로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중국만이 경제위기를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중국의 부상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서구 혹은 중국 중 어디에 둘 것인가 논쟁이 있다. 진정 자유경제를 강조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번영과 국력을 우선시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로 이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어쨌든 중국식 혹은 아시아 모델과 서구 자본주의 모델은 서로 충돌하거나 혹은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서구의 민주주의와 인권원칙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권위주의적인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모델을 강화하여 왔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어찌됐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2021년에 이르렀다. 서두의 〈신패왕화: 예스마담〉 사례로도 알 수 있듯, 이제 홍콩영화는 ‘잘나가던’ 1980년대의 추억이라도 팔아야 해외로 수출돼 간신히 극장 개봉이 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아니 사실 그 정도가 아니다. 지금은 홍콩영화의 정체성(正體性)이 실제적으로 거의 휘발된 상황에 가깝다. 상당 부분 ‘중국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온전히 흡수당한 형태다. 2003년 홍콩과 중국 간 CEPA(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을 통해 홍콩영화는 중국 시장에서 수입쿼터제 제한을 받지 않고 개봉할 수 있게 됐다. 이후로도 홍콩영화의 중국 진출 관련으로 각종 우대정책이 계속 이어졌다. 아시아 시장을 모조리 잃고 빈사(瀕死) 상태에서 베풀어진 단비 같은 우대정책이기에 홍콩영화 산업은 일제히 중국을 향해 달려갔지만, 이는 홍콩영화의 정체성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단적으로 영화 기획부터 배급까지 그 어느 지점에서든 중국 당국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게 됐다. 자연스럽게 홍콩영화계는 철저히 중국 정부 입맛에 맞는 영화만 제작하게 됐다. 나아가 이제는 주윤발이나 유덕화 같은 홍콩 태생 배우조차 광둥어(廣東語)가 아닌 중국 보통화로 연기하고 있다. 이런 절대적 종속(從屬)에 직면한 홍콩의 독립영화인들은 이제 30여 년 전 〈미스터 코코넛〉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2015년 홍콩 ‘우산혁명’으로부터 1년 뒤 개봉된 독립영화 〈10년〉이 한 예다. 〈10년〉은 개봉 시점으로부터 10년 뒤인 2025년의 홍콩 사회를 다루는 옴니버스 SF영화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광둥어를 사용하는 홍콩 땅임에도 택시기사가 보통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주요 역에서 승객을 태우지 못하게 된 미래, 중국과의 경제 통합으로 홍콩에서 달걀농장이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홍콩산 달걀에 ‘현지(本地)’라는 푯말을 세워 팔려 하자 ‘현지’ 자체가 중국 정부가 금지한 검열단어라 쓰지 못하게 된 미래 등이 나열된다. 모두 사라지는 홍콩의 정체성과 중국으로의 일방적 흡수를 경계하는 내용이다.
서두의 〈신패왕화: 예스마담〉 사례로도 알 수 있듯, 이제 홍콩영화는 ‘잘나가던’ 1980년대의 추억이라도 팔아야 해외로 수출돼 간신히 극장 개봉이 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지금은 홍콩영화의 정체성(正體性)이 실제적으로 거의 휘발된 상황에 가깝다.
이와 같은 투자 위축은 곧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본래 홍콩영화계도 당시 다른 많은 나라의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범죄조직 자본이 일정 수준 이상 침투돼 있었다. 그런데 1989년 이후 소위 ‘양지(陽地)의 투자’가 얼어붙으면서 어디까지나 음지(陰地)에 머물러 있던 ‘삼합회(三合會)’ 등 범죄조직의 영향력이 훨씬 강력해졌다. 그리고 이런 범죄조직에는 합리적인 경영 방침 내지 미래산업 비전 같은 것이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졸속 속편 및 아류작”이 그래서 이 시기에 한층 빈번해졌다. 장기적 비전 같은 것은 애초 없었고, 그저 빠른 자본회수만 목표로 삼을 뿐 영화 시장이 어떻게 망가지든 별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범죄조직조차 1997년 이후 중국 공산당이 홍콩 범죄조직들에 어떤 조치를 가할지 몰라 그 전까지 초단기적으로 ‘치고 빠질’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설득력 있다. 여기서 서두에 언급한 세 가지 ‘홍콩영화의 몰락’ 원인 중 두 번째, 불법복제 CD 문제가 불거진다. 좀처럼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당시 홍콩에서 영화 제작을 컨트롤해 극장에 거는 측과 해당 영화의 불법복제 CD를 만들어 파는 측은 모두 삼합회 등 범죄조직이었다. 애초 삼합회 자체가 1990년대 들어 컴퓨터 소프트웨어, 음악과 영화 CD/DVD 등 지적재산의 불법 복제와 판매로 중심사업을 이동시킨 상태였다. 필자도 이 시기에 홍콩을 방문해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반환 1년 전인 1996년 홍콩을 찾아 그곳 잡지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안내로 도심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어느 영화관 바로 앞에서 해당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의 불법복제 CD를 파는 행상을 목격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단속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 물으니 “어차피 저 영화 돈 댄 측과 불법복제 CD를 만들어 파는 측은 같은 사람들이고, 영화관과 부율(賦率)을 나눠 수익을 얻는 것보다 직접 불법복제 CD를 만들어 파는 게 더 이익이 많이 남기에 극장에는 사실상 홍보용으로 걸어두는 것에 가깝다”는 답을 들었다.
반환 1년 전인 1996년 홍콩을 찾아 그곳 잡지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안내로 도심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어느 영화관 바로 앞에서 해당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의 불법복제 CD를 파는 행상을 목격했다. 여기서 서두에 언급한 세 가지 ‘홍콩영화의 몰락’ 원인 중 두 번째, 불법복제 CD 문제가 불거진다. 필자도 이 시기에 홍콩을 방문해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한국 정부가 ‘진보적’이라는 세력에 의해 장악될 때마다 북한 핵 문제는 한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처럼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한국인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이유를 미국의 강압정책에서 찾았다. 지독히도 못살게 구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은 핵폭탄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 핵 문제는 남북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집권하고 있는, 현재 한국 정부는 북한 핵 문제의 당사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중재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지난 2년여 동안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선전했다. 북한 핵에 대해 원천적으로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 정책은 애초부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북한이 핵을 만드는 이유는 미국과 싸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다. 북한은 미국과 싸우지 않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가는 핵폭탄을 만드는 것이다. 김정일이 당시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한 말이다. “수령님 대에 조국을 통일하자면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 놓고 조국통일 대사변(大事變)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 이 말이 보여주는 바는 북한의 핵전략은 국제정치의 기본 원리에 정확히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과, 북한의 지도 세력은 핵 전략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미국 본토를 핵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이 미국 본토를 확실하게 공격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더 이상 마음 놓고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는 일을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되는 날, 북한은 한국과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한국이, 한국 전역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핵무장한 북한과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그런 날이 온다면 한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북한 핵 전략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을 싸움도 하지 않은 채 굴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북한이 핵을 만드는 이유는 미국과 싸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미국 본토를 핵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산업화는 부의 양극화를 가져오면서 새로운 정치·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냈다. 20세기 들어 유럽 국제사회의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논란과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여파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확산되었는데 스위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와중에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노동자와 노조세력의 임금인상 투쟁이 격렬해졌다. 스위스의 경제가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정부가 조정하는 강제적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노동조합뿐 아니라 경영자 측에서도 이를 반대했다. 자유경제체제하에서 국가권력의 개입을 배격해 온 스위스 국민의 일관된 입장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대표산업인 철강, 기계, 시계산업 노사대표가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1937년 노사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노조 측에서는 파업을 불만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사용자 측에서는 임금인상 요구에 대한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것이 그 내용이다. 모든 근로자는 노조 가입권이 있으며, 노조는 회원의 회비로 재정을 조달한다. 각 노조의 회비는 업계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근로자는 연간 약 200프랑에서 600프랑의 회비를 낸다. 스위스의 2개 노조총연맹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각 노조의 회비 중 일부 고정금액이 노조연맹에 지급된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노조의 자원과 시설, 임금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스위스의 노조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데, 이는 조직률이 낮고 구조가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노조들은 약세에도 불구하고, 질병, 사고, 실업보험 등 현재 스위스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위스 노조가 스위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나라와 달리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 덕분에 노조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정치 제도 내에서는 노조 등 다양한 이해집단이 새로운 정책을 제안, 토론하는 과정에 참여해 각자의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 또 이들 이해집단은 스위스 국민이 투표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할 수도 있다.
20세기 들어 유럽 국제사회의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논란과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여파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확산되었는데 스위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와중에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노동자와 노조세력의 임금인상 투쟁이 격렬해졌다. 스위스의 경제가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중국은 2018년 현재 37개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다. ‘협력협정’은 일반 ‘협정’에 비해 훨씬 더 구속력이 있다. ‘원자력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13차 5개년 경제·사회 개발계획’ 및 ‘제13차 5개년 원자력 공업 발전계획(2016~2020년)’, ‘중국 제조 2025’에서 원자력 발전 설비 제조를 포함하는 원자력 수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세계 원자력 시장에서 ‘원자력 수출 주도국’의 판도가 바뀌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독자 브랜드인 ‘HPR1000과 CAP1400’을 내세워 해외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다. 이미 중국은 지난 7월 사우디 원전 수주에서 우리나라, 미국,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예비 사업자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출 노형에 있어서도 대형 원전에서 소형 원전, 고온가스로 수출까지 계획하고 있다. 또한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와 ‘저우추취(走出去, Going Global)’라는 최고 지도자의 정책적 지원하에 정부 차원의 막대한 자본 지원, 원활한 추진을 위한 체제 개혁 및 수출 전담 기관 설치 등 원자력 수출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은 300MW급 CNP300 원전을 수출해 파키스탄 차슈마(Chashma) 1~4호기가 가동 중이었다. 이 밖에 파키스탄 카라치만(Karachi Coastal) 1·2호기는 HPR1000으로 현재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HPR1000으로는 영국 브래드웰B(Bradwell B) 1·2호기, 아르헨티나 아투차(Atucha) 4호기와 파타고니아(Patagonia) 5호기 건설이 계획 중이다. 남아공, 케냐, 이집트, 체코, 태국, 브라질, 우간다 및 사우디, 수단, 이란, 인도네시아 등과는 대형 원전뿐 아니라 차세대 원전인 다목적 일체형 소형원자로(SMR) 및 고온가스로(HTGR)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남아공, 케냐, 이집트, 체코, 태국 등과 같이 자국(自國)의 불안정한 정세와 재정 문제로 원전 도입을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산업 인프라 구축, 금융지원 패키지 등을 제시하며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중국은 2018년 현재 37개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원자력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13차 5개년 경제·사회 개발계획’ 및 ‘제13차 5개년 원자력 공업 발전계획(2016~2020년)’, ‘중국 제조 2025’에서 원자력 발전 설비 제조를 포함하는 원자력 수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세계 원자력 시장에서 ‘원자력 수출 주도국’의 판도가 바뀌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독자 브랜드인 ‘HPR1000과 CAP1400’을 내세워 해외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 동안 고종을 ‘계몽전제군주’로 떠받들면서 그의 ‘근대화’ 노력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상찬하는 국사학자들이 있었다. 1898년 8월 17일 나온 대한제국의 헌법 격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萬世不變)할 전제정치다”(제2조) “대한국 황제는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제3조) 등 황제의 권리와 신민(臣民)의 의무만을 열거하고 있다. 도대체 거기에 무슨 ‘계몽’이 있고 ‘근대’가 있단 말인지…. 고종예찬론자들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광무개혁, 즉 철도 건설, 도로·하수구 정비, 학교 설립, 근대적 공장·회사 설립 등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박하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사업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오히려 고종은 구(舊)체제 시절에 이루지 못한 만사의 독점을 완성하면서, 자기가 그 독재의 정점에 있음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이런 외형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황제독재를 위한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종은 운산금광채굴권 등 이권(利權)을 열강에 헐값으로 넘겼으며, 벼슬을 팔았고, 돈이 될 만한 사업이나 세원(稅源)들은 모조리 내장원(內藏院)으로 귀속시켰다. 그나마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外勢)들 간에 묘한 균형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때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 시기를 허송했다. 그는 당시 세계 질서를 움직이고 있던 대영제국과 그와 궤를 같이하는 미국, 서구(西歐) 열강들이 공적(公敵)으로 여기고 있던 러시아에 의존하려 들었다. 사실 188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되어온 친러정책은 당대 국제질서에 반하는 위험하고 철없는 정책이었다. 여기에 더해 고종은 아관파천을 감행했고, 미관(美館)파천, 영관(英館)파천, 불관(佛館)파천을 수시로 타진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했다. 일본이 승리한 후에는 미국에 기대보겠다고 ‘앨리스 공주’(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에게 매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 동안 고종을 ‘계몽전제군주’로 떠받들면서 그의 ‘근대화’ 노력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상찬하는 국사학자들이 있었다. 황제독재를 위한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종은 운산금광채굴권 등 이권(利權)을 열강에 헐값으로 넘겼으며, 벼슬을 팔았고, 돈이 될 만한 사업이나 세원(稅源)들은 모조리 내장원(內藏院)으로 귀속시켰다.
‘아(我)’나, 아(我)와 상대되는 비아(非我)의 아(我)도 역사적의 아(我)가 되려면 반드시 양개(兩個)의 속성을 요(要)하나니 일(一) 상속성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부절(不絶)함을 위함이요, 일(一)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 영향의 파급됨을 위함이라. 그러므로 인류 말고 다른 생물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아(我)’의 의식이 너무 미약‐혹, 절무(絶無)‐하야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됨으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을 인류에 뿐 양(讓)암이라.(인류에게만 주어졌다-편집자)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 아(我)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야 또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됨으로 인류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됨이라.(중략)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我)가 생긴 뒤에 비아(非我)가 생긴 것이지만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非我)가 있은 뒤에 아(我)가 있나니, 말하자면 조선민족‐아(我)‐이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 중국 구이저우성·후난성·윈난성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 중국민족에 점차 동화됨-편집자), 지나족(중국을 가리키는 호칭. 신채호 선생은 중국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지나’로만 불렀다-편집자) 등‐비아(非我)‐이 없었으리니 이는 선천적에 속(屬)한 자(者)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 지나족 등‐비아(非我)‐의 상대자가 없었으면 조선이란 국명(國名)을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을 둔다 하는 등‐아(我)‐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후천적에 속한 자라.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의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의 것을 유지하되 양자의 일(一)이 부족하면(두 가지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편집자) 패망의 임에 귀(歸)하는 고(故)로, 유태(猶太)의 종교나 돌궐의 무력(武力)으로도 침륜(沉淪)의 화(禍)를 면치 못함은 후자가 부족한 까닭이며 남미(南美)의 공화(共和)와 애급(埃及·이집트-편집자) 말세의 흥학(興學)으로도 쇠퇴의 환(患)을 구(救)치 못함은 전자가 부족한 까닭이니라.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我)가 생긴 뒤에 비아(非我)가 생긴 것이지만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非我)가 있은 뒤에 아(我)가 있나니, 말하자면 조선민족‐아(我)‐이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 중국 구이저우성·후난성·윈난성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 중국민족에 점차 동화됨-편집자), 지나족(중국을 가리키는 호칭. 신채호 선생은 중국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지나’로만 불렀다-편집자) 등‐비아(非我)‐이 없었으리니 이는 선천적에 속(屬)한 자(者)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 지나족 등‐비아(非我)‐의 상대자가 없었으면 조선이란 국명(國名)을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을 둔다 하는 등‐아(我)‐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후천적에 속한 자라.
이게 끝이 아니었다.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후보별로 확보할 선거인단 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가 최대 쟁점이었던 것. 박 후보 측은 대의원·당원·일반국민의 경우 실제로 참여한 선거인 수가 정해지는 만큼 여론조사 선거인 수도 전체(대의원 당원 일반국민)투표율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반면 이 후보 측은 투표율에 관계없이 여론조사에 할당된 선거인단4만5717명을 후보별 지지율에 따라 나눠야 한다고 맞섰다.이 후보측은 투표율에 영향을 받지않게 함으로써 여론조사의 실제 반영비율을 높이려는 계산을 했고 박 후보 측은 이에 강력 반발,결국 무산됐다. 경선결과 이 후보는 예상대로 여론조사,박 후보는 투표에서 각각 이김으로써1.5%p라는 박빙승부로 판가름 났다. 양측간 경선이 첨예했던 만큼이나 후유증도 컸다.박 후보를 지지했던 친박계 의원들이 이듬해 총선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공천학살'을 당했던 것. 새누리당(한나라당 후신)에선 정몽준·이재오·김문수 후보 등이 오픈프라이머리 방식을 요구했다.본선 경쟁력 강화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기존의 경선 룰 방식으론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당내 주류세력이었던 박근혜 후보 측은 기존 룰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정·이 후보는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박 후보를 비난하며 경선출마를 포기하는 상황으로 치닫았다. 민주통합당(대통합민주신당 후신)경선에선 모바일 투표의 문제점들이 부각되면서 손학규 후보 등이 지역순회 경선 도중 울산경선 불참을 선언하는 등 파행을 겪기도 했다.모바일 투표는 조직동원력에서 앞선 것으로 알려진 친노(친 노무현)측이 유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전의 경선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당 선관위의 진상조사로 손 후보가 경선에 복귀한 것을 계기로 순회경선은 재개됐고 문재인 후보가 선출됐으나,경선과정에서 초래됐던 갈등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문 후보는 경선에 이어 안철수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여론조사 방식과 설문 문항 등을 놓고 갈등을 빚다가 안 후보가 출마를 포기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모바일 투표는 조직동원력에서 앞선 것으로 알려진 친노(친 노무현)측이 유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전의 경선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당 선관위의 진상조사로 손 후보가 경선에 복귀한 것을 계기로 순회경선은 재개됐고 문재인 후보가 선출됐으나,경선과정에서 초래됐던 갈등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2005년 11월 22일, 영국 의회에서는 색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영국 정치인이 아닌 미국 정치인의 이름을 딴 단체의 창립식이 열린 것이다. 군사력을 확충하고 민주국가 간 동맹을 공고히 하며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 단체의 이름은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Henry Jackson Society)였다. 헨리 잭슨(Henry Jackson·1912~83)은 1941년 의회에 입성한 뒤 42년 동안 상·하원(上·下院) 의원으로 활약한 미국 정계의 거성(巨星)이었다(박스 기사 참조). 그러나 영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생소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불과 여섯 달 전의 총선(總選)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로를 비방하던 보수와 진보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보수당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교육장관), 에드워드 바이지(Edward Vaizey·현 문화·미디어·스포츠 차관 겸 비즈니스·혁신·기술 담당차관), 그리고 데이비드 윌렛(David Willetts·현 대학·과학 담당 부장관) 의원 등이 눈에 띄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노동당의 지슬라 스튜어트(Gisela Stuart) 이외에도 데니스 맥셰인(Denis MacShane·전 유럽 담당 부장관), 그레그 포프(Greg Pope)와 재키 로런스 (Jackie Lawrence) 의원 등이 동참했다. 멤버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옥스퍼드대(大)의 버넌 보그대너(Vernon Bogdanor)와 채텀하우스의 폴 코니시(Paul Cornish) 등 저명한 학자들뿐 아니라 리처드 디어러브(Richard Dearlove) 정보국 국장과 육군 아이리시 연대(Irish Regiment)의 팀 콜린즈(Tim Collins) 대령 등 전직(前職)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반전체주의》(反全體主義)의 저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올리버 캄(Oliver Kamm)과 《더 타임스》(The Times)지(紙)의 부(副)편집장인 제라드 베이커 (Gerard Baker) 등 저명한 언론인들도 힘을 보탰다.
2005년 11월 22일, 영국 의회에서는 색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영국 정치인이 아닌 미국 정치인의 이름을 딴 단체의 창립식이 열린 것이다. 군사력을 확충하고 민주국가 간 동맹을 공고히 하며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 단체의 이름은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Henry Jackson Society)였다.
—북방민족의 고유한 문자나 사서는 없었나요. “한대 이후 돌궐이나 말갈 등은 고유문자가 있었지만, 그 이전 북방민족의 문자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된 바 없습니다. 기록도 중원민족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고대 북방민족의 사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요.” ‘오랑캐’의 사전적 의미는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다. 그러나 오랑캐로 칭해진 그들도 농경을 했고, 기후의 변화에 따라 삶의 수단을 변화시켰다. 초기에는 변화된 자연환경에 목축으로 대응했고, 더 척박해진 다음에는 유목으로 삶을 영위했다. 정착할 수 없었기에 말을 길들여 이동 수단으로 삼았고, 불안정한 여건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청동기의 칼날을 벼려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예술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지배층은 황금장식으로 권위를 높이며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고, 전사(戰士)의 청동무기에는 익숙하고 수호적 의미를 담은 각종 동물 문양을 조각했다. 전술도 빼어났다. 기동력 빠른 준마와 날렵한 전차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필요한 것들을 얻은 뒤 바람처럼 초원 저 깊은 곳으로, 육중한 전차 따위로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원으로 사라졌다. 오죽했으면 상나라 왕조는 융과 같은 계열의 강(羌)족을 증오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제사의 제물로 썼을까. 하지만 그들의 약탈은 곡물과 같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결코 세상 누구로부터도 ‘오랑캐’로 여겨질 만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 아니었다. 없었던 것은 오직 문자와 사서뿐이었다. 어쩌면 이동이 잦은 생활 탓에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역사의 기억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구전되는 과정에 하나씩 기억에서 사라지고, 특히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는 서둘러 잊었을 것이다. 남들이 칭하는 ‘오랑캐’라는 치욕의 이름도 그렇게 잊으려 했겠지만, 결국 ‘오랑캐’라 기록한 사서와 자신들 사서의 부존재는 영원히 그 오명을 벗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역사의 의미가 새삼 두렵지 않은가? 그런데 그보다 더한, 아주 희미한 기억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찬란한 황금문명도 있었다.
—북방민족의 고유한 문자나 사서는 없었나요. 한대 이후 돌궐이나 말갈 등은 고유문자가 있었지만, 그 이전 북방민족의 문자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된 바 없습니다.
푸틴은 현대판 차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연속 4년간 선정한 세계 영향력 1위의 인물이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푸틴 지지도는 80%의 고공행진을 했다. 서방에서는 관제언론을 동원한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푸틴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왜 그럴까?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남한 면적의 173배이고 국경선은 총연장 2만km로 1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총 329회의 전쟁을 치렀고 주로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한 편이었다. 제2차 대전 때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 의해 900일간 봉쇄당했다. 1일 125g의 빵으로 연명하고 인구 3분의 1를 잃었다. 제2차 대전의 전체 희생자 5000만명 중에서 2600만명이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빵 한 조각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대국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은 참지 못한다. 소련해체의 장본인 고르바초프의 우유부단함에 분노했고 술주정뱅이 옐친의 무능에 분통을 터뜨렸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지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그는 법학도의 치밀함과 유도선수의 날쌤과 정보요원의 은밀함을 갖춘 인물이다. 전투기를 타고 체첸 전쟁터로 날아가고 잠수함으로 바닷 속을 유영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팝송을 부르기도 한다. 푸틴은 대통령보다 상위개념인 왕중왕 차르다. 러시아 국민들은 세계 지도자들이 푸틴에게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TV 앞에서 지켜보면서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단일 패권국가인 미국 대통령도, 러일전쟁에서 패배를 안겨 준 일본 총리도, 신의 대리인인 로마 교황도 차르 푸틴을 장시간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러시아는 부국강병(rich & strong state)을 지향하지만, 굳이 양자택일을 한다면 ‘부유한 국가’(rich state)보다는 ‘강한 국가’(strong state)를 더 원한다. 푸틴의 지각습관도 이러한 국민정서에 대한 화답일 수 있다. 물론 협상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998년 한·러 외교마찰 때 프리마코프 외무장관은 회담 시작 전 박정수 외교장관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면서 기선을 제압하던 외교비화가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연속 4년간 선정한 세계 영향력 1위의 인물이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푸틴 지지도는 80%의 고공행진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푸틴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더 나아가 개인을 넘어 초국적 기업에 대한 증세도 강조하였다. 그 핵심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 초국적 기업에는 세금을 부과하겠지만, 국내로 돌아온 기업에 대해서는 오히려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자본가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세금 공격으로 부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역효과를 내 미국을 등지고 아예 국적 없는 초국적 자본가계급(Transnational Capital Class)으로 살게 되진 않을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투기성 금융자본이 자신의 이윤창출만을 목표로 무책임하게 운용되는 것은 결코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탈규제와 자유 시장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이러한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어느 정도 제도화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유럽, 그중에서도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도 부자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난 1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처음으로 토빈세(Tobin Tax)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토빈세는 투기성 단기 금융거래에 대해 벌금성 세금을 부과하여 금융시장의 불안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본래 토빈이 제안한 세제비율은 금융거래액의 1%이지만, 이후 그 비율이 0.1%, 0.25%로 계속 변동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악화된 부의 불균등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랑스 아탁(ATTAC)은 그동안 토빈세를 통해 걷은 수익금을 전 세계 빈곤 감소, 공공서비스 보호, 빈곤국 개발프로젝트에 지원하는 것을 주장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입법 예고한 토빈세는 과연 급진적인 금융개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책 뒤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도이다. 그동안 프랑스 진보 진영은 금융거래 과정에서 막대한 소득을 올리는 금융기관과 고소득자에게 토빈세를 도입할 것을 꾸준히 주장해 왔다. 그런데 4월로 예정된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럽연합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도입을 발표하였다. 아마도 경제위기를 자초한 금융자본가와 초국적 기업에 대항하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일반 시민에게 보여주고자 기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 이유는 토빈세는 일국에 국한된 금융거래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최소한 유로존으로 묶인 유럽연합과의 합의를 통해 투기성 금융거래를 제한할 때 금융시장의 안정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르코지는 최근에 일반 시민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줄 수 있는 부가가치세를 1.6%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그의 부자 때리기 정책은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경제민주화 정책 과정을 올바로 끌어안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 그중에서도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도 부자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난 1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처음으로 토빈세(Tobin Tax)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토빈세는 투기성 단기 금융거래에 대해 벌금성 세금을 부과하여 금융시장의 불안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지난 11월 6일(이하 현지시각 기준) 실시한 미국 중간선거 뉴저지주(州) 3선거구에 출마한 ‘앤디 김(36)’ 후보가 현역 공화당 의원을 물리치고 하원(下院) 입성에 성공했다. 그동안 미국 선거 역사상 양원(兩院)에 입성한 한국계 미국인은 현재까지 ‘제이 김(김창준)’ 전 하원의원이 유일했다. ‘앤디 김’ 후보가 당선함으로써 ‘제이 김’ 이후 20년 만에 하원의원이 탄생한 셈이다. 선거 초반 ‘앤디 김’ 후보는 공화당 톰 맥아더 후보에게 2300여 표 차로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우편투표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세(戰勢)를 역전시켰다. 13일 오전 기준으로 ‘앤디 김’ 후보는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지만, 뉴저지 지역 언론은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미개표된 ‘임시표’를 근거로 “지역 정서상 민주당이 유리하나, 그렇다고 (앤디 김 후보가)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보도한 것이다. ‘임시표’란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지 않은 투표자가 투표소에 올 경우, 우선 투표를 하게 한 후 나중에 투표권이 있는지 확인하는 제도다. 결과적으로 ‘앤디 김’ 후보는 보수 성향인 ‘오션 카운티’ 지역에선 3만100표가량 뒤졌지만, 진보 성향의 벌링턴카운티에서 3만3600표를 더 얻으면서 당선을 확정지었다. ‘앤디 김’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과 정면 충돌하지 않는 운동을 펼쳤다. 오히려 공화당이 그를 ‘연고 없는 뜨내기 출마자(carpetbagger)’로 공격하는 네거티브를 펼쳤다. 뉴저지 3선거구는 백인 유권자가 주류로, 공화당의 아성(牙城)과 같은 곳이다. 2010년 선거부터 내리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던 곳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당시 이곳에서 1위를 했었다. 상대 후보였던 맥아더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앤디 김’ 후보를 위협했다. 공화당의 파상공세, 아시안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승기(勝旗)를 거머쥔 터라 그의 당선은 그만큼 의미가 깊다. 한인(韓人) 2세인 ‘앤디 김’ 후보는 뉴저지주 말턴에서 성장했다. 이후 미국의 명문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국제관계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앤디 김’ 당선인은 중동(中東)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대(對)중동 관계를 중시한 오바마 행정부에 발탁돼 2009년 9월, 이라크 전문가로 국무부에 첫발을 내디뎠다. 201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의 전략참모를 지냈다. 2013년부터 2015년 2월까지는 미 국방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이라크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특히 ‘이슬람 국가’(IS) 전문가로 IS에 대한 분석과 대응을 논의하는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6일(이하 현지시각 기준) 실시한 미국 중간선거 뉴저지주(州) 3선거구에 출마한 ‘앤디 김(36)’ 후보가 현역 공화당 의원을 물리치고 하원(下院) 입성에 성공했다. ‘앤디 김’ 후보가 당선함으로써 ‘제이 김’ 이후 20년 만에 하원의원이 탄생한 셈이다. 그동안 미국 선거 역사상 양원(兩院)에 입성한 한국계 미국인은 현재까지 ‘제이 김(김창준)’ 전 하원의원이 유일했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의 경우 아직 실험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히 기업 마케팅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념적 비판보다는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후견기업, 지자체, 지역시민사회,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한국 상황에 적합한 사회적 기업의 새로운 모델을 찾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지역·생태주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시민이 관심을 보이며 구체적인 사업에 대한 참여도 높다. 지역·생태주의의 대안은 바로 ‘협동조합’이다. 국가 혹은 의회주의를 통한 변화나 자본(시장)이 그 대안도 아니기에 결국 시민(민중) 스스로 연대하여 협력적인 살림살이를 모색하는 생협이 대안이라고 본다. 한국의 경우 안전한 먹거리 구매 생협을 목표로 운영 중인 조합이 2008년 조사에 따르면 158개 회원조합, 30만명의 조합원과 357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생협은 친환경 농산물 중심의 사업이기 때문에 시장 규모의 확대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고, 일반 농산물에 비해 가격도 비싸고, 대형 유통업계가 친환경 농산물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에서 생협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지역·생태주의의 또 다른 대안은 바로 ‘공정무역’이다. 다양한 사례가 있지만 커피의 경우, 전 세계 커피 원두 판매의 1.5%만이 공정무역으로 거래될 정도로 공정무역의 규모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 아름다운가게, 두레생협, 한국YMCA, (주)페어트레이드코리아, 한국공정무역연합, iCoop 등이 중심이 되어 네팔, 팔레스타인, 동티모르 등지에서 커피나 초콜릿을 공정무역으로 거래한다. 그 규모가 2006년의 4억1000만원에서 2008년 28억5000만원으로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 효과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옥스팜의 공정무역의 한계를 비판한 월든 벨로(W. Bello)의 주장처럼 공정무역을 통한 지역과 생태계 보호운동은 단순한 ‘온정주의’적 접근에 불과하며, 제3세계의 근본적인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지역·생태주의 주장처럼 현재 전 지구적으로 착근되어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체제를 부정하며 그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환경파괴를 주도하는 현 자본주의 세계경제 체제를 저지하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사회를 형성할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괄호 안에 넣고 있다.
둘째, 지역·생태주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시민이 관심을 보이며 구체적인 사업에 대한 참여도 높다. 지역·생태주의의 대안은 바로 ‘협동조합’이다. 국가 혹은 의회주의를 통한 변화나 자본(시장)이 그 대안도 아니기에 결국 시민(민중) 스스로 연대하여 협력적인 살림살이를 모색하는 생협이 대안이라고 본다.
이토는 10월 25일 관성자(寬城子)에 머물렀고 이튿날 새벽 러시아 철도국에서 특별열차를 파견하여 영접하였다.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러시아 군사·경찰 호위병이 수천 명에다 각국 영사단과 관광단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으며 그 밖에도 그를 보러온 사람들이 마치 나무숲 같았다. 군악이 연이어 울려 퍼지고 화포가 연속 울렸다. 이토는 차에서 내려 러시아 대신과 악수하고 군대의 경례를 받은 후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안중근은 양복 차림에 권총을 지니고 러시아군의 뒤에 서서 노리고 있었다. 열 발짝 떨어진 거리로 뛰어들어 총을 빼 들고 첫발에 이토의 가슴을 쏘아 맞혔다. 하지만 화포 소리가 크게 울려 호위병들은 모르고 있었다. 다시 쏘아 이토의 옆갈비를 맞혔다. 이때 군경과 환영단이 알아차리기 시작하여 뿔뿔이 달아나고 안중근이 불쑥 드러났다. 이토는 그를 가리키며 ‘바가야로’(馬鹿=일본어 욕)라고 욕하였다. 세 번째 탄환도 복부를 맞혀 이토는 곧바로 땅에 쓰러졌다. (조선인이 자신을 쏘았다는 말을 병원에서 전해 듣고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는 일본 관리의 전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국내 학계의 정설이다. 이토의 죽음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기고 위인의 면모를 보이려는 의도에 맞춘 발언이라는 것이다.-편집자) 다시 일인 총영사 천상(川上), 비서관 삼(森), 철도총재 전중(田中) 등 3명을 향하여 쏘아 맞히니 모두 넘어졌다. 권총의 여섯 발 총알이 총알마다 제대로 맞으니 세상에 없는 일이었다. 이는 안중근의 꿋꿋한 기상과 쏘는 기술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수천 명 군대가 죄다 흩어져 달아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으며, 헌병 및 장관들도 검을 잡고 서로 훔쳐볼 뿐이었다. 총알이 떨어지고 총소리가 울리지 않자 여러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안중근의 총을 빼앗아 헌병에게 주었다. 안중근은 즉시 라틴어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결박당하였다. 안중근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왜 달아나겠느냐, 내가 달아나려고 하였다면 아예 죽을 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얼빈의 러시아 재판소에 구금당하였다.
안중근은 양복 차림에 권총을 지니고 러시아군의 뒤에 서서 노리고 있었다. 열 발짝 떨어진 거리로 뛰어들어 총을 빼 들고 첫발에 이토의 가슴을 쏘아 맞혔다.
지난해 12월 19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아이시스(ISIS·우리 언론은 IS로 표기하고 있음)에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제 위대한 젊은이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때(After historic victories against ISIS, it’s time to bring our great young people home!)”라고 쓰며 시리아 주둔 미군철수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ISIS가 시리아에 미군을 주둔시킨 유일한 이유였는데, 시리아에서 이들을 무찔렀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We have defeated ISIS in Syria, my only reason for being there during the Trump Presidency)는 것이 철군의 변(辯)이다. 실익 없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 대선(大選) 후보 때부터 누누이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지론(持論)이었다. 그러나 시리아 철군(撤軍)은 너무나도 갑작스런 결정인 데다가 미군을 도와 ISIS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쿠르드군을 저버리고 가는 것이라 파장이 크다. 끝까지 적을 물고 늘어지기에 ‘미친개’,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수도승 전사(戰士)’라는 별명을 지닌 군인 중의 군인 출신 매티스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결정에 반기(反旗)를 들었고, 결국 사표를 냈다. 미국 정계와 여론은 “성급하고도 무모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쏟아부었다. 철군이 미국 동맹국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적에 이로우며,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제신뢰도에 치명상을 입혀 향후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우리 국방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국가를 향한 믿음을 강건히 하고 동맹과 함께 굳건히 적에 맞섭시다”라는 매티스 장관의 고별인사는 시리아 철군이 미군과 함께 싸우는 우군(友軍)과 동맹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듯하다. 부정적인 여론에 주춤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한 발 물러서서 점진적 철군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 당장 미군을 빼면 위험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즉각 철군에서 최소 한 달은 넘어 4개월 정도는 걸려야 미군이 시리아에서 귀환할 것 같다.
“우리 국방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국가를 향한 믿음을 강건히 하고 동맹과 함께 굳건히 적에 맞섭시다”라는 매티스 장관의 고별인사는 시리아 철군이 미군과 함께 싸우는 우군(友軍)과 동맹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듯하다. 부정적인 여론에 주춤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한 발 물러서서 점진적 철군으로 방향을 틀었다.
백성의 힘을 뭉쳐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침입할 경우 막아야 하고, 때로는 원정을 가서 적의 땅을 취해야 한다. 그렇기에 ‘일(壹)’을 통해 ‘진(盡)’을 했다면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단(摶)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라의 업무가 한 가지에 집중되면 백성이 응하여 쓸 수 있고 일의 근본에 집중하면 백성들은 농사짓기를 즐거워하고 전쟁에도 기꺼이 나서게 될 것이다.” 《상군서》 ‘일언(壹言)’편 “무릇 성인의 나라 다스림에는 능히 백성들의 힘을 뭉칠 수도 있고 백성들의 힘을 상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제도가 잘 살펴지면 백성들의 힘이 뭉쳐지지만 힘이 뭉쳐졌는데도 그 힘을 농전에 소모시키지 않으면 실행이 되지 않는 것이요, 실행이 됨에도 부유하게 해주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나고 만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뭉쳐 부국강병을 이루며 그 힘을 덜어 적을 죽이도록 백성을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상군서》 ‘일언’편 《상군서》의 이런 말들이 무서운 말 같은가? 어쩔 수 없다. 전쟁이 일상화된 시기와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급격히 국력을 키우고 국가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진(秦)은 낙후된 서쪽 변방의 국가로서 무시받던 후발(後發)주자였기에 더욱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자, 상앙의 말대로 힘을 만들어냈으면 집중시켜서 외부로 투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될 때가 있다. 단순히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을 준비할 수도 있어야 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기가 유럽의 근대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혁신을 불러왔으며, 과학과 기술을 꽃피우게 했다. 우리의 근대와 번영도 전쟁을 준비하던 국가 총력전 체제에서 탄생하고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진은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첫 번째로 총력전 체제, 국민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내고, 그에 기반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그 중심에 바로 ‘일’ ‘진’ ‘단’을 말한 상앙이 있었던 것이다. 근대는 본래 총력전 체제, 총동원 체제와 함께 오는 것이라는 것을 《상군서》는 잘 보여준다.
백성의 힘을 뭉쳐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침입할 경우 막아야 하고, 때로는 원정을 가서 적의 땅을 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스포츠 기구들이 로잔에 모여 있어, 여러모로 동계스포츠를 활성화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알파인 스키의 도시로 알려진 스위스 생모리츠(St. Moritz)에서 1928년과 1948년 두 차례나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올림픽 때는 한국도 참가했는데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참가였습니다. 또 1948년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첫 번째 올림픽이었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12년 만에 다시 열린 첫 올림픽이었기에 여러모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몇십 년간 엄청난 성장을 보여준 국가입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G20의 멤버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때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로 알려졌으나, 가장 다이내믹하고 새로운 유행과 문화를 선도하는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또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 스포츠 이벤트 등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한국의 이러한 체계적인 인프라와 자원을 통해 세계 수준의 스포츠 이벤트인 평창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평창이 성공적인 올림픽을 개최하여 한국에 큰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올림픽으로 하여금 새로운 지평을 열고, 스포츠맨십을 통한 민주주의의 값진 가치를 만천하에 알려줄 것이라 믿습니다. 특히 최근 한반도의 긴장이 스포츠를 통해 누그러들고 국제교류 등을 통해서 평화와 안정이 한반도에 깃들기를 희망합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한-스위스 관계 발전은 물론 더 다양한 분야로의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한-스위스 간의 경제적 교류는 이미 상당한 발전을 보여줬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과학, 교육, 문화 분야의 발전도 한 차원 높아지는 계기를 만들어왔죠. 과거 1953년 판문점에 스위스가 중립국(NNSC)의 역할로 한국에 온 이후로 양국은 매우 뜻깊은 관계(perfect matches!)를 맺어왔습니다. 따라서 이번 한국의 올림픽에서 양국은 다시 한 번 돈독한 우정를 확인하고 다가올 미래에도 양국의 이익 도모 및 협력을 증진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대사는 앞서 '새로운 지평'이란 표현을 두 차례 사용하였는데, 이는 2018 동계올림픽 평창유치위원회(조직위 전신)가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특히 1948년 올림픽 때는 한국도 참가했는데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참가였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G20의 멤버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 스포츠 이벤트 등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일본은 이미 한국의 상대가 안되는 한물간 나라’라는 식의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삼성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지만, 일본 유수의 전자업체들은 망하기 직전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 특유의 미덕(美德)으로 전(全)세계가 찬탄하던 종신(終身)고용제는 엉망이 되고, 젊은이는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하고, 연금(年金)이나 퇴직금도 보장되지 못하는 회사가 대부분이고, 일본의 기술력은 바닥을 기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일본이란 나라가 20세기 한순간 반짝 빛난 ‘어제의 강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하지만 ‘한국 밖’으로 나와서 보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1980년대 거품경제 당시의 ‘일본신화(神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위상과 권위를 갖고 있는 나라다. 지난 3월부터 워싱턴 스미소니언 아시아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韓日) 문화제를 비교해 보자. 3월 11일부터 6월 13일까지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들러 보면, 300여 객석 가운데 관람객 수가 평균 수십 명을 넘지 못한다. 필자가 찾았던 평일에는 ‘단 한 명’만이 외롭게 앉아서 관람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본의 호쿠사이(北齋) 판화전과 일본불교 탱화 전시회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관람객들로 터져 나간다. 관심도나 참여자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일의 일본 모습을 증명해 주는 대졸(大卒)취업률을 보자. 2011년 7월 발표된 정부통계를 보면 2011년 봄에 졸업한 대학생 중 91.9%가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대학원 진학 포함). 같은 기간 한국의 경우 대략 70%가 직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군 입대, 대학원 진학 포함). 90%대에 이르는 일본 대학생의 취업률은 1%포인트 범위 내에서의 차가 있을 뿐 거의 매년 비슷하다. 청년실업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90%대의 대졸취업률을 자랑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시간에 1000엔을 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지천에 깔린 나라도 일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일본은 이미 한국의 상대가 안되는 한물간 나라’라는 식의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거품경제 당시의 ‘일본신화(神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위상과 권위를 갖고 있는 나라다.
무역 이권 개입 의혹으로 불운의 추방을 당한 사정과 별개로, 로드리게즈가 일본 활동을 통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 돋보이는 ‘일본학’ 연구이다. 그는 뛰어난 일본어 능력을 발판 삼아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Arte da Lingua de Iapam)》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1604년부터 1608년에 걸쳐 나가사키학림(學林·교회의 부속 학교)에서 출간된 동 책자는 형태론, 품사론, 문장·호칭론의 3부로 나뉘어 라틴어 문법을 기초로 분석한 일본어의 구조, 문법, 발음, 구어와 문어의 차이, 각종 문서의 작성법, 경어법, 방언 등 일본어에 대한 체계적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1620년에는 동 책자의 문법 부분을 축약·정리하는 한편, 신철자(표기)법과 인명(人名)·호칭론 등의 내용이 추가된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Arte Breve da Lingoa Iapoa)》이 마카오에서 출간되었다. 이들은 서양 어학의 관점에서 최초로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념비적인 연구서로 언어학사(史)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로드리게즈는 만년에 예수회 본부의 요청으로 《일본교회사·Historia da Igreja de Iapam)》를 집필한다. 비록 출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남겨진 사본을 통해 밝혀진 그의 일본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운 것이었다. 로드리게즈 이전에도 프로이스나 발리냐노 등에 의해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기술된 바 있지만, 로드리게즈는 적응주의에 의해 철저한 현지화 교육을 받은 사제답게 일본 포교의 선결 과제로서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언어·역사·문화·자연·지리 등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세밀한 분석을 통해 기존 기술과는 격이 다른 일본론을 전개하고 있다. 한 지역의 총체를 구성하는 각 요소를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다루는 이러한 접근은 근대의 ‘지역연구’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으로, 17세기 초에 이미 근대적 방법론에 필적하는 분류와 접근법이 엿보이는 그의 각종 저술은 그가 서구의 ‘일본학’(Japanology)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역 이권 개입 의혹으로 불운의 추방을 당한 사정과 별개로, 로드리게즈가 일본 활동을 통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 돋보이는 ‘일본학’ 연구이다. 그는 뛰어난 일본어 능력을 발판 삼아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Arte da Lingua de Iapam)》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 맥 박사와는 어떻게 함께 일을 하게 됐나. “맥 박사는 1990년대에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 지금처럼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자동으로 녹취를 풀 수 없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받으면 이를 타자로 쳐서 맥 박사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1998년 말부터 그와 함께 일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 맥 박사와 꽤 오래 일을 함께 하고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안다. 맥 박사는 1990년대 중후반 들어 점점 학계의 주류(主流)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맥 박사가 이런 회의론(懷疑論)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까지의 커리어 내내 여러 표창과 상을 받고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쌓아온 명성으로 연구 결과를 뒷받침할 수 없는 첫 번째 사례가 (납치 문제) 아니었나 싶다. 그는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현실을 조금 슬프게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옛 친구들이나 동료들에 대해 그냥 실망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한 것이다.” ― 맥 박사와 함께 납치를 연구하던 동료들의 의견은 어땠나? 이들 모두 맥 박사의 연구에 동의했나. “맥 박사가 두 개의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알려주고 싶다. 맥 박사는 하버드 의대 소속으로 케임브리지 병원에서 레지던트들을 가르쳤다. 그는 병원 인근에 비영리단체를 하나 따로 만들고 외계인에 의한 납치현상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하버드가 돈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로렌스 록펠러 등이 지원했다. 록펠러는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미국인 중 돈이 가장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은 맥 박사의 연구를 지지했다. 하지만 하버드 의대 학생들은 조금 달랐다. 몇 명은 큰 관심을 가졌지만 많은 학생은 이런 연구가 맥 박사의 명성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맥 박사가 이 문제에서 관심을 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많았다.”
― 맥 박사와 함께 납치를 연구하던 동료들의 의견은 어땠나? 이들 모두 맥 박사의 연구에 동의했나.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은 맥 박사의 연구를 지지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훼방하기 위해 취할 것으로 예견되는 조치들에 대해 보고했는데, 그중에는 ‘현재 유엔군사령부가 수용하고 있는 북한군 비(非)송환포로들의 일방적 석방’도 들어 있다. 이는 20일 후 반공포로 석방으로 현실화됐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빼내거나, 더 나아가 유엔군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경우 유엔군을 동원해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국에 고분고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1952년 5월 3일 맥스웰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이 입안하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에 보고한 ‘에버레디(Ever Ready)’계획이다. 이 계획 속에는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戒嚴)을 선포하고 이에 불복종하는 한국 군부(軍部) 및 민간 지도자들을 감금한 다음, 유엔군 사령부 명의의 군정(軍政)을 실시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이 추진하는 정전(停戰)협정에 동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실 미국이 이승만 정부 전복(顚覆) 계획을 꾸민 것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의 와중에서도 미국은 이와 유사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이승만 정부 전복 음모를 꾸미는 한편, 미국 정부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브릭스 주한미국대사를 5월 26일 경무대로 보내 다시 한 번 휴전협상에 대한 한국의 협조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수 및 유엔군 철수 이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클라크 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위조약 대신 만약 침략이 일어나면 참전 16개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는 말로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며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방위조약뿐이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가 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며 클라크 사령관의 제안을 일축했다.
미국은 이 경우 유엔군을 동원해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국에 고분고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1952년 5월 3일 맥스웰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이 입안하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에 보고한 ‘에버레디(Ever Ready)’계획이다.
우리가 ‘토착왜구척결’이라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반(反)문명적 소동과 출구(出口)도 대책도 없는 대일(對日)강경책에 빠져 자족(自足)하고 있는 동안,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의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부터의 탈출을 넘어 이제는 ‘새로운 나라, 일본’을 향해 전진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사회를 향한 아베 총리의 정치적 언행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자신과 부인, 자유민주당과 내각 주요 자리에 포진해 있는 측근들의 스캔들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율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반격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회담 때에는 면전에서 홍콩과 신장 위구르 지역의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결정한 해상자위대의 중동(中東) 파병에 대해서는 미국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파병’이라고 선언했다. 국내 언론 보도만 보면 아베 총리는 국제적으로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실상은 정반대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2012년 일본의 센카쿠(尖閣)열도 국유화 조치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2년 전 베이징(北京)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2000억 위안에 달하는 대규모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2019년 6월 도쿄 G20정상회의에서의 정상회담, 2019년 12월 베이징 정상회담을 거쳐 오는 4월에는 도쿄에서 ‘벚꽃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지난 1월 호르무즈 해협에 해상자위대를 파병할 때에는 19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에게 ‘일본 선박의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임을 미리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치밀한 일본식 ‘네마와시(‘사전조정’을 의미하는 일본어)’ 외교에 로하니 대통령도 별다른 이견(異見)을 내놓지 않았다. 도미닉 라브 영국 외교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상은 2월 초 도쿄(東京)에서 만나 두 나라의 경제적 동반자 관계 구축, 북핵(北核)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해양안전보장 등에 관해 공동으로 대처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2012년 일본의 센카쿠(尖閣)열도 국유화 조치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2년 전 베이징(北京)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2000억 위안에 달하는 대규모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2019년 6월 도쿄 G20정상회의에서의 정상회담, 2019년 12월 베이징 정상회담을 거쳐 오는 4월에는 도쿄에서 ‘벚꽃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잡지 앞 부분에는 알카에다 주요 지도자들의 ‘지령’(指令)을 서구의 젊은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해 놓았다. 오사마 빈 라덴(Bin Laden)의 ‘성명(聲明) 대본’도 3차례 축약·게재되었다. 연설 대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도 지루하거나 시의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삭제하고 실었다. 이 중 두 편은 빈 라덴의 성명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연설이다. 창간호인 2010년 6월호에 실린 ‘지구를 구하는 길’(The way to save the earth)은 2010년 1월에 공개된 빈 라덴의 성명을 요약한 것이다. 미국의 학자 노암 촘스키(Chomsky)와 미 항공우주국 소속 전문가인 제임스 한센(Hansen)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주장을 펼쳐 당시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던 성명이다. 빈 라덴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의 폐해’를 언급하며 “대기업을 비호하기 위해 교토의정서를 비준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부시 전 대통령)과 의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이념과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온난화 현상을 예로 들어 미국을 비난한 것이다. 2010년 겨울호에는 ‘우리가 당한 것을 그들도 겪게 하기 위해’(In order that they taste some of what we tasted)라는 제목 아래 빈 라덴이 2004년 10월에 한 연설문을 실었다. 이 연설에서 빈 라덴은 2001년 9·11테러의 배후에 자신이 있었음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그는 테러 동기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폭정을 휘두른 것을 목격한 후 (테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를 공격 목표로 정한 데 대해서는 “레바논에서 파괴된 탑(Tower)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맛본 것을 그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미국의 탑을 공격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쌍둥이 탑(Twin Towers)이라고도 불린 곳이다. 2010년 가을호에는 빈 라덴이 2007년 12월에 공개한 연설을 한 쪽 분량으로 간략하게 줄여 실었다.
창간호인 2010년 6월호에 실린 ‘지구를 구하는 길’(The way to save the earth)은 2010년 1월에 공개된 빈 라덴의 성명을 요약한 것이다. 미국의 학자 노암 촘스키(Chomsky)와 미 항공우주국 소속 전문가인 제임스 한센(Hansen)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주장을 펼쳐 당시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던 성명이다. 빈 라덴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의 폐해’를 언급하며 “대기업을 비호하기 위해 교토의정서를 비준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부시 전 대통령)과 의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A씨는 브라질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일본어 발음은 다소 어눌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A씨는 자식을 아침 일찍 다른 병원으로 빨리 옮기기 위해 병원 측의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의사는 진단서 내용에 대한 재검증이 필요하다면서 당장 발급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A씨는 딸이 아침에 다른 병원으로 가 긴급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진단서 발급을 재삼재사 요구한다. 담당 의사는 물론 다른 의사들도 몰려와, 1시간에 걸쳐 A씨를 설득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이 상한다. A씨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반발하고, 의사들도 마음대로 하라고 대응한다. A씨는 의사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휴대폰으로 몰래 찍는다. 나중에 A씨는 젊은 의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개자식 죽어라(畜生 死ね)”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휴대전화에 이 대목은 없다). 이건 일본인이 최악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험악한 욕이다. A씨가 폭언에 항의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자, 의사들은 곧바로 사과한다. 그 같은 상황 전부가 유튜브에 실려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자의 상황설명과 함께 평론가 세 명의 의견이 흘러나왔다. 평론가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필자는 현재 일본의 공기가 어떤 것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의견은 각론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의사가 저런 욕을 한 것은 의사로서 자격 상실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죽어라’라는 말을 한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왜 저런 욕을 했는지에 대한 상황도 이해해야 한다. 담당 의사만이 아닌 병원 내 의사·간호사가 모두 나와 한 시간 이상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A씨는 자신의 딸에 대한 진단서만을 요구했다. 심야응급실에는 화급을 다투는 다른 환자들도 많다. 아무리 자신이 급하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든 A씨에게도 잘못이 있다. 특히 휴대전화를 몰래 꺼내 찍은 것도 이상하다. 의사가 ‘죽어라’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비디오 안에는 그 같은 장면이 없다. 외국인의 경우 언어불통으로 오해가 생길 수 있겠지만, 브라질 출신의 A씨는 일본어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특별히 봐줘야 할 이유가 없다.”
A씨는 자식을 아침 일찍 다른 병원으로 빨리 옮기기 위해 병원 측의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의사는 진단서 내용에 대한 재검증이 필요하다면서 당장 발급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국제기구로 IMF, 세계은행, WTO 3인방을 들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주요 선진국 대표자들이 미국의 브레튼우즈라는 마을에 모여 전쟁 동안 중단되었던 국제무역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회의를 가진 결과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무역 질서를 구축하였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세 축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원활한 국제무역질서 조성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던 IMF와 세계은행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주도하는 핵심적인 금융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이 기구들은 제3세계의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 선결 조건으로 해당국에 금융 자유화나 민영화 정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역설적이게도 IMF와 세계은행이 주도한 제3세계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이 전반적으로 실패하게 되면서, 이 기구의 비민주적 운영 메커니즘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비판의 핵심은 구제 대상국의 이익이 아닌 주요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금융기구가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국제금융기구의 민주적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그것은 제3세계의 목소리를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국제금융기구의 지배구조는 선진국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어 1국 1표 체제로의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실제로 국제금융기구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201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는 IMF 지배구조에 관한 개혁안이 승인되었다. 그 핵심은 신흥시장국과 개발도상국에 기존보다 더 많은 IMF의 투표권을 부여하여, 상임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투표로 선출함으로써 신흥개도국의 인사가 이사로 진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개혁안을 따른다 하더라도 IMF를 주도하는 핵심 국가의 수가 5개국에서 10개국으로 늘어나는 수준에 머물기 때문에 제3세계의 목소리를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국제금융기구의 의사결정 과정에 남반구와 개발도상국의 의견이 더 잘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국제금융기구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핵심 과제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주요 선진국 대표자들이 미국의 브레튼우즈라는 마을에 모여 전쟁 동안 중단되었던 국제무역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회의를 가진 결과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무역 질서를 구축하였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세 축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요원마다 제네바 중심 지역 고급 호텔이 배정됐다. 안기부 요원들이 호텔에 모여 비밀회의를 가졌다. 본부에서 온 팀장인 국장급 요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서는 대통령 수행 장관과 기업인, 그리고 경호원과 현지 외교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한데 섞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은밀히 활동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림자같이 활동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색깔과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외교관과 달리 우리 안전기획부 요원들의 자부심은 단결력입니다. 대통령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시샘하는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합쳐 각자 자신의 임무를 일당백으로 수행해나갑시다.” 그들만이 가지는 사명감이라는 마음의 끈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작전회의를 하듯 그들 사이에 업무가 분담됐다. 팀장이 제네바대표부에 상주하는 요원에게 물었다. “테러가 있다면 북한대표부와 아무래도 연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먼저 북괴 요원들의 동향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제네바대표부에 상주하는 요원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미 북한대표부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그 안에 몇 명 없는 것 같습니다. 경비원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고 잔디밭에 도베르만(맹견 중의 하나) 한 마리가 있었어요. 제네바 북한대표부에는 평소 사람이 몇 명 없는데 이따금 본국에서 사람이 올 경우 호텔에 묵지 않고 북한대표부에서 묵다가 갑니다. 지금까지 외부에서 누가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여기 지원을 오신 우리 요원들이 북한대표부 주변을 감시하면서 그곳 사람들이 늘어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대표부와 달리 지금 평양의 서커스단이 제네바 노가 힐튼 호텔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가 단원으로 위장해서 그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서커스 단원들을 직접 체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공연하는 호텔 측 지배인을 매수해 그들의 공연계획이나 묵을 호텔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이미 파악했습니다.”
안기부 요원들이 호텔에 모여 비밀회의를 가졌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서는 대통령 수행 장관과 기업인, 그리고 경호원과 현지 외교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한데 섞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은밀히 활동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림자같이 활동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색깔과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외교관과 달리 우리 안전기획부 요원들의 자부심은 단결력입니다. 대통령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시샘하는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합쳐 각자 자신의 임무를 일당백으로 수행해나갑시다.” 그들만이 가지는 사명감이라는 마음의 끈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작전회의를 하듯 그들 사이에 업무가 분담됐다.
원래 일북수교의 핵심 현안은 역사 문제 식민지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문제였다. 1965년 한국과 이뤄진 수교 모델이 북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상이나 배상은 차관(借款)이나 대북(對北)경제교류기금이란 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1990년대 말 워싱턴에서는 일북협상에 따른 경제적 지원금이 100억 달러 선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의 ‘인플레(?)’를 감안하면 경제교류의 액수는 더 커질 수 있다. 두 차례의 평양 방문을 단행한 고이즈미의 북한 접근법을 보면 미국과의 관계를 ‘철저히’ 염두에 둔 이벤트로 분석된다. 당시 고이즈미 정권은 이라크 전쟁에 1000명의 비(非)전투 목적의 자위대를 파견하고, 복구지원비로 4년간 매년 50억 달러를 제공했다. 2003년 12월,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자위대 파병에 대한 국민의 반대는 55%에 달했다. 고이즈미는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워싱턴은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2006년 8월 15일, 고이즈미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방문했을 때도 미국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2014년 봄, 아베는 정치적 동지이자, 전임 수상이기도 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미국의 2중대로 자처하고 있다. 일본은 크림사태와 관련해서도 적극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한국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베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15억 달러의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의 10억 달러보다도 많은, 단일국가로는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러시아 지도자에 대한 제재에 들어가자 아베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러시아 고위 군 관계자의 도쿄 방문을 거부하고, 각종 러일 교류도 중단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경우, 자위대가 파병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우크라이나를 미일동맹2.0에 기초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장(場)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과 수교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불만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이즈미는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2003년 12월,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자위대 파병에 대한 국민의 반대는 55%에 달했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테러집단 조직원이나 테러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2010년 대구에서 활동하던 파키스탄 탈레반 조직원은 이슬람 성직자로 위장해 주한미군 시설을 염탐하고 이를 탈레반에 보고했으며 경찰에서 이 같은 혐의가 밝혀졌지만, 단순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추방되는 데 그쳤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국정원 등 안보기관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4년 6월까지 알카에다와 헤즈볼라 등 국제 테러조직과 연계된 혐의로 강제추방된 외국인은 56명이었다. 그것도 이들이 재판이나 자국 정부 인도조치 없이 단순 추방된 것에 불과하다. 검찰은 “이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붙잡혔다면 중형을 선고받거나 자국 사법기관에 인도됐을 것”이라며 “국내에는 테러 대응 관련법이 없어 이들을 명확히 처벌할 규정이 없는 만큼 한국에서 테러범이 암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테러와 관련한 조항은 대통령령 제47호 ‘국가대테러활동지침’이 있는데, 이는 테러 대응 시 정부조직 간 업무분장과 행동지침 등을 규정할 뿐이며 법률이 아니어서 처벌 조항을 담고 있지 않다. 또 국가보안법은 북한과 관련한 테러에만 대응할 수 있어 이슬람 테러집단을 단죄할 방법이 없다. 정부는 2001년 9·11테러 이후 ‘테러방지법’을 발의했지만 인권과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인권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한국테러학회장 이만종 호원대 법경찰학부 교수는 “테러는 사후처벌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최선의 방책인데 우리나라는 테러와 관련된 법이 신설되거나 개정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각 부처에 분산된 대 테러 기능을 통합하고 조정 및 기획업무를 담당할 전담부서, 테러방지법, 민관 연계 시스템 등 테러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당부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국토안보부를 신설하고 애국법을 제정했습니다.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잉 입법 논란도 있었지만, 한 번이라도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 테러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논리도 국민의 안전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국정원 등 안보기관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4년 6월까지 알카에다와 헤즈볼라 등 국제 테러조직과 연계된 혐의로 강제추방된 외국인은 56명이었다. 검찰은 “이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붙잡혔다면 중형을 선고받거나 자국 사법기관에 인도됐을 것”이라며 “국내에는 테러 대응 관련법이 없어 이들을 명확히 처벌할 규정이 없는 만큼 한국에서 테러범이 암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로미오 작전이란 슈타지가 젊고 매력적인 남성 간첩을 활용, 서독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독신 여성들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한 작전 일체를 말한다. 동독 작센 지역의 유명 극장에서 일하던 롤란트(Roland)는 상당한 지성과 외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NATO 본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는 여성을 포섭하라는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61년 서독으로 떠났다. 그는 ‘카이 페터센’이라는 이름의 덴마크 언론인으로 가장했고 덴마크 억양이 있는 독일어로 말을 했다. 슈타지가 목표로 정한 마가레테라는 이름의 여성은 예쁘고 부지런하며 수줍음 많은 기독교신자였다. 이전에 로미오 타입의 간첩들이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롤란트는 다방면의 지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결혼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 무렵 롤란트는 마가레테에게 “나는 덴마크 군(軍) 비밀보안대 간부”라며 또다시 신분을 위장했다. 마가레테는 연인을 위해 나토의 비밀정보들을 빼냈으며 롤란트는 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한동안 성공적으로 간첩활동을 하다 방첩기관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롤란트는 동독으로 넘어갔다. 마가레테는 서독에 남아 다른 간첩을 통해 정보를 제공했으나 연인이 없어지면서 점차 흥미를 잃고 협조활동을 중단했다. 또 다른 젊은 서독 여성 게르다(Gerda)는 1960년대 초 열아홉의 나이에 파리의 한 어학원에서 동독 간첩 허버트 슈뢰터를 알게 됐다. 슈뢰터는 자신의 정체를 게르다에게 털어놓았고 그녀는 동독에까지 가 슈타지와 접촉하고 슈타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1966년부터 게르다는 외무부 정보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서독의 모든 대사관에서 들어오는 암호전문을 해독해 슈타지에 넘겨줬다. 외무부 정보센터의 업무 분위기는 자유분방한 편이었는데 이 점을 이용, 게르다는 1m가 넘는 전보문 용지를 자신의 핸드백 속에 챙겨 청사에서 퇴근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를 남편 슈뢰터는 사진으로 찍어 동독 측에 넘겼다. 그녀가 3개월간 워싱턴의 서독대사관 암호해독원으로 파견됐을 때 슈타지는 미독(美獨) 관계의 내부사정에 대한 고급첩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독 작센 지역의 유명 극장에서 일하던 롤란트(Roland)는 상당한 지성과 외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NATO 본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는 여성을 포섭하라는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61년 서독으로 떠났다. 슈타지가 목표로 정한 마가레테라는 이름의 여성은 예쁘고 부지런하며 수줍음 많은 기독교신자였다.
VOC의 만행이 베이징에 알려지면서 명 조정의 경각심이 고조된다. 명의 병부(兵部)는 푸젠 순무에 남거익(南居益)을 임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VOC를 중국 해안에서 몰아낼 것을 지시한다. 11월 통상 교섭을 제의하는 척하면서 VOC 사절을 샤먼으로 불러들인 남거익은 이들의 상륙을 유인한 후, 사절단장 크리스티안 프랑스준(Christian Franszoon)을 포함 50여 명의 인신을 구속한다. 생포된 VOC 인원들은 모두 참수(斬首)되었고, 프랑스준은 베이징으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보복에 나선 VOC가 이듬해(1624년) 1월부터 해안 약탈을 재개하자 결전을 각오한 남거익은 2월 푸젠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150여 척의 군선(軍船)을 동원하여 전면적인 펑후다오 봉쇄에 돌입한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명의 군선들은 VOC 포대의 화망(火網)을 뚫지 못했고 함선과 요새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VOC는 명의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된다. 7월 이후 집요한 상륙 작전이 결국 성공하고 이로 인해 요새로 통하는 물길이 차단되는 한편, 8월 이후 명의 군세가 계속 보강되자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몰린 VOC는 패배를 인정하고 강화를 제의한다. VOC는 명이 제시한 조건에 따라 요새를 파괴한 후, 9월 펑후다오를 떠나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7개월 넘게 계속된 무력 대치는 명의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명 입장에서는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명군은 10배가 넘는 양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VOC의 신무기 화력에 큰 희생을 치르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펑후다오 해전은 성채만 한 VOC 함선에 조각배 같은 명 군선 수십 척이 달려들다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싸움이었고, 세상의 중심을 자부하던 명은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남거익은 조정에 올린 상계에서 “홍모인(紅毛人·서양인)의 배는 대단히 크고 그 함포는 10리 밖에서도 중국 군선을 한 방에 조각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이었다고 놀란 심정을 적고 있다.
명의 병부(兵部)는 푸젠 순무에 남거익(南居益)을 임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VOC를 중국 해안에서 몰아낼 것을 지시한다. 11월 통상 교섭을 제의하는 척하면서 VOC 사절을 샤먼으로 불러들인 남거익은 이들의 상륙을 유인한 후, 사절단장 크리스티안 프랑스준(Christian Franszoon)을 포함 50여 명의 인신을 구속한다. 생포된 VOC 인원들은 모두 참수(斬首)되었고, 프랑스준은 베이징으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타이완에서는 국민당 진영을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기의 블루에서 착안해 ‘란잉(藍營)’이라 한다. 반면 민진당 진영은 녹색의 아름다운 섬을 보도(寶島·Formosa)를 대표한다고 해서 ‘뤼잉(綠營)’이라고 한다. 민진당은 정서적으로는 타이완 독립에 비교적 가깝지만 공식적으로는 현상(Status Quo)유지 정책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국민당의 상징인 청천백일기를 국기로 존중하고 있다. 국민당과 차별되는 민진당의 색채는 타이완 토착민들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차이잉원 총통은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퇴해 타이완으로 온 뒤 저지른 2·28학살 사건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도 비록 국민당 출신이지만 타이완섬 출신으로 2·28에 대해서는 차이잉원 총통과 같은 입장이다. 이 같은 타이완의 정치지형에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10월 12일 타이베이 시내 민진당 당사 앞에서는 급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희락도연맹(喜樂島連盟) 소속 12만명(주최측 추산)이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여기에는 반중 노선이 확고한 민진당 당원도 여럿 참가했다. 민진당은 이들에게 참가 자제령을 내렸다. 시위대는 ‘타이완 독립’과 ‘중국에 의한 병탄 반대’의 구호를 외쳤다. 희락도연맹은 아직까지는 “정당 조직은 아니며 타이완 국민들의 진실된 소리를 전하는 대중운동 차원의 단체”라고 밝히고 있다. 희락도연맹은 타이완 민간방송 Formosa TV의 궈페이홍(郭培宏) 회장이 발기인이다. 여기에는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 리덩후이 전 총통, 국립타이완대학 교수 출신으로 국제법의 권위자인 펑밍민(彭明敏), 기업가 출신으로 민진당의 자금원이었던 구콴민(辜寬敏) 등 150명의 유력인사들이 참여했다. 해외 네트워크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호주 동남아 유럽 등 세계 각지에 설립된 희락도 해외지부는 앞으로는 중국 대륙이 아닌 중국, 화교(華僑)가 아닌 대교(臺僑)로 용어통일 운동을 벌여 타이완의 독립을 널리 홍보하자고 외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국민당 진영을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기의 블루에서 착안해 ‘란잉(藍營)’이라 한다. 반면 민진당 진영은 녹색의 아름다운 섬을 보도(寶島·Formosa)를 대표한다고 해서 ‘뤼잉(綠營)’이라고 한다.
손님들의 코로나 백신접종 증명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장 문을 닫으라는 시(市)정부의 명령을 받은 미국의 햄버거 회사가 이 조치에 강경하게 항의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중보건국은 지난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한 인앤아웃버거(In-N-Out Burger) 매장에서 손님들이 휴대해야 하는 예방접종 증명서를 직원들이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매장 폐쇄를 지시했다. 해당 업소는 다시 가게를 열었지만, 테이크아웃 손님들만 상대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시 공중보건국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마스크를 벗는 공중(公衆) 실내 환경에서는 바이러스가 더 쉽게 퍼질 수 있기 때문에 백신 접종은 특히 중요하다”면서 “이것이 샌프란시스코시가 실내 식사에서 백신 증명을 요구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앤아웃의 법률-비즈니스책임자(Chief Legal&business Officer)인 아니 웬징어(Arnie Wensinger)는 “우리는 정부의 백신경찰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인앤아웃버거는 이 성명에서 “레스토랑을 폐쇄한 후 현지 규제 기관은 레스토랑 직원이 모든 손님에게 적극적으로 예방 접종 증명서와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요구한 후 적절한 문서가 없는 손님의 입장을 금지하는 집행 요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알려왔다”고 밝혔다. 성명은 이어 “회사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최고 형태의 고객 서비스는 우리를 방문하는 모든 손님들에게 봉사하고 모든 손님들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면서 “우리는 어떤 정부의 백신경찰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인앤아웃버거는 “우리 식당 직원이 손님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비합리적(unreasonable)이고 침해적(invasive)이며 위험한(unsafe)한 일”이면서 “우리는 민간기업에게 그들의 사업을 후원하기로 선택한 손님들을 차별하도록 강요하는 정부의 어떤 지시도 격렬하게 반대한다(disagree). 이는 명백히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며, 침해적이고, 부적절하며, 공격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손님들의 코로나 백신접종 증명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장 문을 닫으라는 시(市)정부의 명령을 받은 미국의 햄버거 회사가 이 조치에 강경하게 항의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중보건국은 지난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한 인앤아웃버거(In-N-Out Burger) 매장에서 손님들이 휴대해야 하는 예방접종 증명서를 직원들이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당 매장 폐쇄를 지시했다.
바이블, 비블로스, 페이퍼, 파피루스… 선생의 성경 뿌리 찾기는 계속 이어졌다. “비블로스라고 불린 레바논 도시는 BC 4500년 전에 세워진 항구였어요. 그땐 그곳이 페니키아 땅이었어요. 고대에 항구도시로 성장해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모이던 지역이었죠. 정리하자면 비블로스라는 도시 이름은 파피루스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어요. 이집트에서 사온 파피루스를 팔던 데에서 유래됐지요.” ‘말의 화석 캐기’가 이번에는 레바논 삼나무로 이어졌다. “비블로스는 삼나무(백향목)와 종이(파피루스) 교역으로 번성했는데, ‘레바논 삼나무’는 성경에 수백 군데 나옵니다. ‘구약 시편’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자라리로다. 주의 집에 심겨진 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뜰들에서 번성하리로다’(92장 12~13절)라는 구절이 있지요. 나무가 크고 꼿꼿하기에 사람이 죽으면 삼나무로 널을 만들었다고 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벌레가 안 먹어요. 신전도, 널도 레바논의 삼나무를 베어 만들다 보니 레바논 지역이 황폐해지고 지금은 천연기념물이 되어 그야말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된 거죠. 레바논 화폐에 그 삼나무가 나옵니다.” 성경이 책이 되고 책이 종이가 되더니, 이번에는 파피루스의 갈대와 레바논 삼나무의 모습으로 이미지가 바뀐다. 몇 개의 화석 쪼가리로 공룡들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고생물학자와 다를 게 없다. “성경은 ‘책’입니다. 정관사가 붙어 ‘더 북(the book)’이지요. 책은 말을 문자로 적은 것인데 그리스어로는 ‘로고스(logos)’라 했지요. 그런데 그 뜻이 호두 속 같아서 ‘말’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진리, 이성, 논리, 법칙, 관계, 비례, 설명, 계산’ 등 이루 다 적을 수 없어요. 가뜩이나 숨이 찬데 이걸 또 로마 사람들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말’과 ‘이성’으로 두 쪽이 납니다. 주일마다 들고 다니는 《성경》 책 놓고 생각을 정리해보세요. 성경보다 훨씬 윗사람이 누구여? ‘말씀’이지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의 말씀이 성경보다 훨씬 위야. 그럼 말씀, 즉 로고스가 누구야? 바로 하나님이시지.
나무가 크고 꼿꼿하기에 사람이 죽으면 삼나무로 널을 만들었다고 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벌레가 안 먹어요.
미국의 주류(主流) 언론들은 2017년 트럼프가 북한에 대해 험악한 말을 하며 폭격이라도 할 듯 강경 언급을 발하고 있을 때 “핵(核)전쟁을 하자는 거냐?”며 트럼프를 비난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회담하고 김정은을 치켜세우는 것을 본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트럼프를 ‘김정은에게 놀아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중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상 트럼프가 하는 어떤 일도 미국 주류 언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아는 트럼프일진대, 북한과 대충 타협해서 평화를 이루고 칭찬을 받고 중간선거에서 이기려 한다는 한국의 다수(多數) 평론가의 주장은 논리가 약하다. 필자는 이번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참패할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중간선거에서 질 경우 트럼프가 탄핵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 역시 미국에서 야기되는 각종 정치 사건들의 본질상 타당한 논의가 아니다. 민주당이 탄핵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를 차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3분의 2, 즉 67명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번에 중간선거를 치르지 않는 공화당 상원의원 숫자가 42명이다. 즉 이번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상원의원이 전원 낙선할 경우에도 공화당 상원의원은 42명이라는 말이다. 물론 42명 중 반란표가 나올 가능성이 없진 않다. 하지만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의 공화당은 급속히 ‘트럼프의 공화당’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공화당 의원들의 반란으로 트럼프가 탄핵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18년 중간선거에 출마하려는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후보 37명 중 35명이 경선을 통과했다. 탈락한 공화당 기득권 의원들 중 무려 33명이 은퇴·낙향하고 있다. 이번에 은퇴하는 공화당 상·하원 33명 중 31명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 대해 반대했던 의원들이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트럼프가 탄핵을 모면키 위해 중간선거에 매달리고 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간선거에서 질 경우 트럼프가 탄핵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 역시 미국에서 야기되는 각종 정치 사건들의 본질상 타당한 논의가 아니다. 민주당이 탄핵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를 차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셋째, 동서독 간 교류협력이 동독 정권의 변화와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동서독 간 관계 진전 속도에 비해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은 매우 더뎠다. 동독에서는 공산체제 비판으로 정치범이 속출했고 의사표현, 이동의 자유 등 기본권의 제약도 심했다. 1980년대 초 국제사면위원회의 동독 인권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약 200명씩 발생하는 정치범 중에서 50% 가량이 체제비판 발언으로 수감됐다. 특히 국경에서 동독 탈출을 시도한 주민들이 사살(射殺)되는 사건이 계속 터졌다. 1970년대 후반 동독의 저명한 반(反)체제 인사들은 교류협력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서독 사회에 폭로하기도 했다. 심지어 슈미트 서독 총리는 동독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 “이곳(서독)에서 저항함으로써 (동독 인권유린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라고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넷째, 서독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개선 과정에서 국경선 등 현상유지를 인정함으로써 국익상실을 초래했다. 2차 대전 전(前) 독일 영토였던 오더-나이세강(江) 동쪽 땅을 미국·영국·프랑스 등 다른 전승국들의 동의 없이 국경선으로 인정해 버림으로써 독일은 전전(戰前) 영토의 4분의 1을 상실하고 차후 협상카드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마지막으로, 사민당 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입장에 동조하며 유화적 목소리가 커지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동독 내 반체제세력보다는 공산정권 지도부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아첨을 통한 변화’, ‘굴욕을 통한 변화’라는 비아냥마저 듣기도 했다. 사민당은 1982년 기민당의 콜 정부가 들어서면서 야당이 된 이후에도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과 교류를 확대했다. 특히 사민당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인들이 대거 서독으로 탈출하자 탈출자 수용 제한과 점진적 통일을 주장하면서 ‘통일을 주저하는 당’이라는 악평까지 받았다.
셋째, 동서독 간 교류협력이 동독 정권의 변화와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동독에서는 공산체제 비판으로 정치범이 속출했고 의사표현, 이동의 자유 등 기본권의 제약도 심했다. 동서독 간 관계 진전 속도에 비해 동독 주민의 인권 개선은 매우 더뎠다.
세상이 무심하기도 하야 그리운 남편과 생이별을 하다시피 하고 홀로 남아 있을지언정 사랑의 결정인 두 아들을 데리고 굶다 먹다 하는 신세라도 적이 위안을 받고 있으나 삼순구식도 그에게는 계속할 힘이 없어져 그의 할 바를 몰라 옥중에 있는 가장에게 하소연한 바가 있었던지 “내 걱정은 마시고 부디 수범(秀凡)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라는 편지를 떼여본 박 여사는 한층 더 수운(愁雲)에 잠기어 복받치는 설움을 억제할 길이 없이 지내는 중이라 한다. 굶어도 사나이 자식은 글을 배워야 한다 하야 없는 것 있는 것을 다 털어 교과서를 겨우 □□□ 큰아들 수범군을 교동보통학교 2학년에 통학을 시키는 중이나 어머니가 굶으니 수범군도 굶고 다니는 날이 태반인데다가 옷 한 벌 변변히 얻어 입지 못하고 남과 같이 학용품 한 가지 잘 사서 쓰지 못하야 추루한 기상은 이웃 사람도 차마 보지 못하는 모양이나 수범군은 그 어머니에게 효성이 기특하야 말썽부리는 일 한 번 없고 어머니가 혹 나가서 늦게 돌아오면 언제까지든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는데 그의 나이는 금년 여덟 살이라 하며 그 밑으로 두범(斗凡)군이 있으니 그는 당년 두 살로 아버지의 얼굴을 아직 한 번도 못 보았다 한다.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하며 박 여사가 다시 생각나는 듯 눈물을 흘리며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잊고 훌쩍거리는 그 광경에는 어언간 동정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편지 한 끝에는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달라는 부탁이 있으나 우선 어린아이를 거느리고 살아갈 길도 망연하니 옷 한 벌 부칠 재료가 있을 리 없다. 서리치는 아침 눈보라 날리는 저녁에 그의 심경이 어이하리. 지금 있는 집도 어느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좁다란 방 한 칸에 6원50전씩을 주어왔으나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 못하야 석 달 동안이나 지불치 못하고 있으매 날마다 성화같은 집주인의 독촉에는 굶는 것보다 견디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갈 곳이 어디일는지? “굶어도 같이 굶고 떨어도 같이 떨 운명에 빠진 어린 것들이 더욱 가련하야 못 견디겠습니다” 하는 박 여사와 두 아이의 장래는 어떻게 될는지? 풍운아의 처자라 남모르는 애화(哀話)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진은 산파 문패와 박자혜 여사)
“대련이야 오죽이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하며 박 여사가 다시 생각나는 듯 눈물을 흘리며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잊고 훌쩍거리는 그 광경에는 어언간 동정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편지 한 끝에는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달라는 부탁이 있으나 우선 어린아이를 거느리고 살아갈 길도 망연하니 옷 한 벌 부칠 재료가 있을 리 없다. 지금 있는 집도 어느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좁다란 방 한 칸에 6원50전씩을 주어왔으나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 못하야 석 달 동안이나 지불치 못하고 있으매 날마다 성화같은 집주인의 독촉에는 굶는 것보다 견디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버스가 고치(도사) 시내로 들어서 고치역 앞에 이르자 차창 밖으로 3명의 무사(武士)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1829~1865. 다케치 즈이잔(瑞山)이라고도 함],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郎・1838~1867)의 동상이다. ‘도사에 다른 인물들도 적지 않은데, 왜 하필 저 세 사람일까’ 하다가 한순간 무릎을 쳤다. 그들은 모두 ‘청년’들이었다.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유신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목숨을 던진 사람들! 메이지유신 이후 백작(伯爵)이니 뭐니 하는 작위(爵位)를 받고 대신(大臣)·총리를 지냈다 한들 새파란 청춘을 이상(理想)을 위해 던진 이 세 사람에게 비할 것인가! 나이가 20대, 30대라고 청년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청년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 경우 성당과 광장을 중심으로 한 구(舊)시가지를 한 바퀴 돌면 대개 중요한 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성(城) 아래 조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돌아보면, 중요한 사적지들이 대부분 커버된다. 조카마치는 다이묘(大名・영주)를 모시는 상급 사무라이들과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치 역시 고치성을 중심으로 주요 사적지들이 몰려 있다. 첫 번째 찾은 곳은 야마우치신사(山內神社). 도사의 초대(初代) 다이묘였던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1545/1546~1605)를 모시는 곳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을 섬기던 무장(武將)이었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를 앞두고 일찌감치 자신의 영지(領地)를 바치겠다는 뜻을 표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편에 붙었다. 그 덕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뚜렷한 전공(戰功)을 세우지는 못했음에도 전후(戰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도사의 번주(藩主)로 임명됐다. 5만 석 규모의 소영주에서 일약 20만 석 규모의 대영주로 벼락출세한 것이다. NHK는 2006년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삶을 다룬 〈공명(功名)의 갈림길〉이라는 대하사극을 방영한 바 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 경우 성당과 광장을 중심으로 한 구(舊)시가지를 한 바퀴 돌면 대개 중요한 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성(城) 아래 조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돌아보면, 중요한 사적지들이 대부분 커버된다.
국내 언론은 빅터 차 석좌가 ‘대북 강경파’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대북 온건론자’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대북 지원’을 반대하는 등 큰 틀에선 대북 강경파로 볼 수 있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 석좌를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대화론자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2016년 2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열린 ‘북한인권 콘퍼런스’ 기조발언을 통해 “북한과 제대로 된 대화 창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걱정스러운 일”이라며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대화 창구를 열어 둬야 한다”고 말한 게 비근한 예다. 지난해 7월 빅터 차 석좌가 힐러리 클린턴 외교 참모 출신인 제이크 설리번(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보좌관)과 《워싱턴포스트》에 한 북핵 관련 공동 기고문도 또 다른 예다. 두 사람은 이 기고문에서 예전 방식으로 북한과 거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북핵 시설 선제 타격에 나설 경우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무력 사용은 북핵 문제 해결 옵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국이 미국과 북한 간 협상을 이끌어 내는 역할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협상의 당사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를 두고 외교 소식통들은 “트럼프 행정부와 배치되는 이 기고문으로 인해 빅터 차 내정자가 쉽지 않은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빅터 차 석좌는 사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이른바 ‘햇볕정책(대북포용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김대중 정부 첫 해인 1998년 5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북한대학원 개원을 기념해 ‘전환기 북한의 정책 선택’을 주제로 연 국제 학술 세미나에 참석해 발제한 논문 〈탈냉전 기조의 문제점과 북한〉에서도 잘 드러난다. 논문의 요지는 포용 정책을 통해 북한에 어느 정도 인센티브가 주어지면 북한 지도부가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평화를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 빅터 차 조지타운 대학교 교수는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북한을 봉쇄와 고립정책으로 대하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며 “북한에 대한 강경 혹은 온건 노선 모두가 기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최적 정책은 대북 포용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A씨도 이런 말을 남겼다.
국내 언론은 빅터 차 석좌가 ‘대북 강경파’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대북 온건론자’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대북 지원’을 반대하는 등 큰 틀에선 대북 강경파로 볼 수 있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 석좌를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대화론자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첫 두세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도 ‘아, 이 책은 지금 내가 읽어야 할 책이구나’ 하는 느낌이 팍 왔다. 이후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이 책에 푹 빠져서 보냈다. 이 책은 ‘수사-기소-판결-처벌’이라는 사법(司法) 절차의 순서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매 단계에서 어떤 형태로 정의가 이루어지는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검사와 수사관, 판사, 배심원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체험을 들어가면서 상술(詳述)한다. 이 책의 구성만 봐도 미국 검찰이 수사와 기소를 모두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검찰은 수사는 하지 않는다”는 식의 괴담(怪談)이 횡행하고 있는데, 저자 프릿 바라라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저자가 책 앞머리에서부터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이유를 위해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그 과정을 책임진 자들의 태도가 공정하다고 여길 때, 그 결과도 정당하다고 믿는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권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일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올바르지 못한 이유를 위해’ 하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보고 있다. 검찰과 법무부 간부들이 위조서류까지 동원해가면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을 막기 위해 법석을 떤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문재인 정권이 180여 석이라는 절대다수 의석만 믿고 ‘법의 탈을 쓴’ 반(反)법치적 법률들을 양산(量産)해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왜곡금지법, 공수처법을 만들더니, 이제는 ‘가짜 뉴스’를 잡겠다는 명분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입법을 강행하고 있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급히 통과시킨, 예타(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내용으로 하는 가덕도공항특별법 역시 정의나 공정과는 거리가 먼 법이다. 저자는 “훌륭한 조리법이 맛있는 음식을 보장하지 못하듯, 현명한 법도 정의를 장담하지는 못한다”고 말하는데, 앞에서 거론한 법들은 아예 ‘어리석고 사악한 법’들이다. 당연히 정의와는 거리가 먼 법들이다.
문재인 정권이 180여 석이라는 절대다수 의석만 믿고 ‘법의 탈을 쓴’ 반(反)법치적 법률들을 양산(量産)해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왜곡금지법, 공수처법을 만들더니, 이제는 ‘가짜 뉴스’를 잡겠다는 명분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입법을 강행하고 있다.
SF-86 서류에 고의로 틀린 정보를 적거나 명백한 사실을 숨기는 건 중죄다. 1만 달러 이하의 벌금과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위반 사항이 국제적인 테러나 미국 내 테러에 관련된 것이라면 8년 징역형도 가능하다. 백악관 조사 절차를 통과하면 상원 인준이라는 절차가 기다린다. 미국 해양대기국의 국장이었던 제인스 베이커의 말이다. “(고위직에 임명되고 싶다면) 스스로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그 직위와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 세력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당신 편으로 만들어라. 이건 상당히 중요하다. 다른 후보들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고 필사적일 테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 프레드 톰슨 의원의 법무 보좌관이었던 하나 시스테어는 “인준과 관련한 절차를 다루는 여당과 야당의 담당자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다. 백악관이 후보를 통과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거라고 단정하지 마라. 밥 내시의 설명이다. “후보자는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저 앉아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요?’ 하고 묻지 마라.” 대통령 지명직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대비 전략을 세워라. 대통령 지명직에 임기는 없다. 대통령 뜻에 좌우되는 자리인 데다, 당신 스스로 떠나야 하는 정치적인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청문회 통과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 후보자 목록에 오르는 것부터가 문제다. 밥 내시는 “상하원 의원, 백악관 직원, 이해관계자 집단들, 협회 등등 온갖 곳에서 추천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공식 뒷조사가 시작되기 전에라도 백악관 인사실 직원이 후보자의 동료에게 전화해 솔직하게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후보자가 좁혀지면 조사가 마무리된다. 인사실 실장은 백악관 직원관리실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추천서를 전달한다. 해당 직위에 대한 설명과 후보자의 이력, 왜 실장이 이 인사를 추천하는지가 두 페이지 이내로 기술되어 있다. 거론됐던 다른 후보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놓기도 한다. 100번 중에 99번은 대통령이 실장의 의견을 그대로 수락한다.
SF-86 서류에 고의로 틀린 정보를 적거나 명백한 사실을 숨기는 건 중죄다. 1만 달러 이하의 벌금과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위반 사항이 국제적인 테러나 미국 내 테러에 관련된 것이라면 8년 징역형도 가능하다.
—최근 발간된 리콴유 회고록에는 중국의 강경외교노선에 대한 우려도 들어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외교정책은 앞으로도 비교적 강경노선을 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개혁·개방 초기에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른 구조조정을 했지만 지금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 부상에 따라 내수촉진 등 자국 상황에 맞는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또 경제발전이 일정 단계에 들어서면 국방력 강화를 꾀하게 됩니다. 중국이 지금 바로 그 단계에 들어서 점점 군비를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주변국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현재 중국 외교정책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15년쯤 뒤 중국이 정말 강대국, 즉 고소득국가가 되었을 때는 다른 국가들이 중국 시스템과 조율하며 개혁이나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향후 15년간의 외교정책이 가장 어려울 것입니다.” 솔직하지만 주변국으로서는 상당히 우려되는 발언이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전통적인 영토 확장, 패권주의적인 면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사분쟁도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죠. 이런 점이 주변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996년부터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러시아, 베트남, 인도 등과의 접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기에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국가입니다. 해상문제 해결에는 경험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또 미국과 달리 중국은 외교정책이나 군사현대화 등에서 여전히 투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 때문에 주변국이 불안해하기는 합니다. 경제성장으로 G2의 지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중국은 지금 산적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 국제 문제에는 수동적입니다. 더구나 중국의 시스템은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내부다원주의입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데도 외교부 한 곳이 아니라 당 대외연락부, 국방부, 상무부 등 여러 곳이 관여하죠. 심지어는 지방정부 국유기업의 외국투자업무까지 외교교섭으로 간주합니다. 외교부의 역할이 방만하면서도 너무 좁은 거죠.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 같은 부서도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패권을 추구할 수 있겠나 하는 거죠. 미국의 패권계획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 유럽, 독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대응할 뿐이지 패권계획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으로 G2의 지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중국은 지금 산적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 국제 문제에는 수동적입니다. 더구나 중국의 시스템은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내부다원주의입니다.
자말 카슈끄지.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자국(自國) 영사관에 혼인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갔다가 살해되어 전(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카쇼끄지, 카쇼기로도 표기되는 성을 가졌는데, 카슈끄지라는 이름은 ‘나무 숟가락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을 뜻하는 터키어다. 터키어로는 ‘나무 숟가락’을 뜻하는 ‘카슈크’와 ‘사람’을 뜻하는 ‘츠’가 붙어 ‘카슈크츠’라고 하는데, 아랍어로는 ‘카슈끄지’라고 표기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래 터키 중부 카이세리 출신인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과 결혼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初代) 국왕 압둘 아지즈의 주치의 역할을 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다. 왕족은 아니지만,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카슈끄지 집안에는 꽤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카쇼기로 더 알려진 삼촌 아드난 카슈끄지는 1980년대에 무려 4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억만장자 무기상(武器商)으로 명성을 떨쳤다. 유명 여성작가였던 고모 사미라는 파리의 리츠호텔과 런던의 해로드백화점을 소유한 이집트 출신 갑부 무함마드 알 파예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들 도디 알 파예드, 즉 카슈끄지의 사촌형은 영국의 전(前)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연인으로 다이애나와 함께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카슈끄지는 1958년 메디나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했다. 잠시 서점에서 일한 것 외에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줄곧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정보당국과 함께 일하면서 9·11 테러 이전에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의 우호적인 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측에 오고간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아는 인물로 꼽히는 카슈끄지는 왕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으로 민감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에 대항하는 전사(戰士)들의 신앙심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물론 9·11 테러 이후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자말 카슈끄지.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자국(自國) 영사관에 혼인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갔다가 살해되어 전(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퇴한 것은 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배관공’이라고 일컫는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민주당 선거 관련 자료를 빼돌리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진척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사실, 특히 백악관 내 도청 테이프 존재 등에 대해서 거짓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였다. 자칫 좀도둑들의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침투 사건 정도로 그칠 뻔했던 워터게이트 사건은 밥 우드워드 등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보도와 정권 내부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 제보자)의 제보로 결국 닉슨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대 스캔들로 번졌다. 이 과정은 수기와 영화,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꽤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닉슨 정권 입장에서 본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책은 국내에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백악관에서 감옥까지》(원제 Born Again)는 관심을 끄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찰스 콜슨(1931~2012년)은 제1기 닉슨 행정부(1969~1973년) 시절 닉슨의 특별보좌관으로 활약했던 책사(策士)였다. 그는 닉슨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온갖 궂은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그 때문에 ‘처리 담당’, 즉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필요하다면 자기 할머니라도 밟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콜슨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모습에 염증을 느껴 닉슨이 재선된 직후인 1973년 백악관을 나와 로펌(law firm) 변호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전되면서 ‘닉슨 해결사’인 그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친구의 권유로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회심(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다. 그는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7월 유죄선고를 받고 6개월간 복역한 후 석방됐다. 이후 재소자·전과자·범죄희생자 및 그 가족들을 돕는 ‘교도소 선교회’를 설립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독교 사역에 전념했다. 이 책은 원제(原題) 《Born Again》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저자의 신앙고백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런 측면보다는 닉슨 정권의 이면(裏面)과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전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퇴한 것은 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배관공’이라고 일컫는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민주당 선거 관련 자료를 빼돌리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진척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사실, 특히 백악관 내 도청 테이프 존재 등에 대해서 거짓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였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면 임기 말이던 2016년 말부터 2017년 3월 탄핵이 결정될 때까지의 상황이 이란의 지도자 샤를 연상케 한다. 당시 박 대통령의 임기 중 여러 차례 촛불시위가 있었고, 세월호를 기점으로 여론이 악화됐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인 좌익 진영을 주축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시위가 거세졌다. 세월호 이후 2015년부터 시위는 점차 거세졌다. 광화문 거리에는 민주노총 등이 민중총궐기 집회 등을 열었다. 민노총, 전농 등 53개 8만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당시 국정농단과 탄핵이 수면으로 올라오기 전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쇠파이프 등을 들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막는 경찰버스 수십 대를 집회 참가자들이 때려부쉈다.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일부는 경찰버스의 기름통에 불이 붙은 천을 집어넣으려고까지 했다. 과격 폭력 시위가 거듭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데모에 참가한 세력은 이들의 청와대행을 막는 경찰을 향해 과잉진압이라고 했다. 이 장면이 다수의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되어 보도됐다. 한때 민주노총의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로 숨어들어가는 사건도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블릿PC가 언론을 통해 등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기폭제가 됐다. 과연 미국 CIA가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란의 샤 정권 붕괴 예측 실패를 딛고 일어난 CIA가 한국의 박근혜 정권 붕괴 과정은 어떻게 바라볼까. 지난 2월 27일,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징역 30년과 벌금 1185억원을 구형했다. 이 구형이 내려진 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마녀 사냥(Witch Hunt)’이라는 단어 하나만 달랑 올렸다. 한국에서 검찰이 해당 발표를 하고 불과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당시 발표 시각은 한국 시각으로는 오후였지만 미국 동부는 이른 새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경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트위터를 게재했다. 미국 대통령은 매일 수시로 CIA 국장으로부터 각종 정보 보고를 받는다.⊙
당시 박 대통령의 임기 중 여러 차례 촛불시위가 있었고, 세월호를 기점으로 여론이 악화됐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인 좌익 진영을 주축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시위가 거세졌다.
미국 선거를 지켜보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주마다 또 같은 주에서도 카운티마다 다른 대의원 계산 방식이다. 대체로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전체 주의 대의원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제(Winner Take All·WTA)’가 가장 일반적인 대통령 선거 방식인데, 각 당 후보를 뽑는 과정은 이보다는 몇백 배 복잡했다. 민주당은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공화당은 이 방식과 승자독식제를 혼용한다. 게다가 승자독식 외에 ‘부분 승자독식’ 또는 ‘승자 절대다수 배분’ 방식까지 있어 표 계산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승자독식제가 적용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온전한 승자독식이 아니고, 하이브리드형이다. 대의원 50명 가운데 전체 득표율이 1위인 후보가 주 대의원 29명을 차지하고, 나머지 21명은 7개의 선거구에서 1위를 한 후보가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싹쓸이했다. 주 전체에서도 1위를 했고, 7개 카운티 각각에서도 모두 1위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텍사스와 조지아, 앨라배마, 버몬트 등은 ‘50대 20’ 규정이 적용되는 곳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독식하는 게 아니라, 과반을 넘겨야 하는 자격조건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1위 후보가 나머지 후보들과 대의원을 배분하는데, 1위 쪽에 대다수 대의원이 배분된다는 차원에서 ‘승자 절대다수 배분(Winner Take Most·WTM)’이라고 부른다. 하한선도 있어, 대의원을 배당받으려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려야 한다. 이 때문에 루비오는 20% 밑의 지지율 때문에 대의원 수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많이 봤다. ‘50대 15’ 규정이 적용되는 곳(아칸소, 오클라호마)도 있고, ‘66대 20’ 규정(테네시) 등 복잡 다양한 방식이 다 동원된다. 최대 관심이 쏠리는 플로리다는 1위 후보가 99명의 대의원을 독식하는 ‘승자독식’ 방식의 경선을 치른다. 지금 여론조사만 보면 트럼프가 루비오를 앞선다. 그런데 플로리다가 승자독식주가 된 것은 최근이다. 당시 젭 부시가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면서 부시에게 힘을 몰아준다는 차원에서 득표 방식을 바꿨다. 그런데 부시는 일찌감치 탈락하고, 주의 대표격인 루비오가 트럼프에게 힘을 쓰지 못하면서 괜히 방식을 바꿨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의 세계에서 꼼수는 결국 이상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대체로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전체 주의 대의원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제(Winner Take All·WTA)’가 가장 일반적인 대통령 선거 방식인데, 각 당 후보를 뽑는 과정은 이보다는 몇백 배 복잡했다. 가장 먼저 승자독식제가 적용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미국 선거를 지켜보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주마다 또 같은 주에서도 카운티마다 다른 대의원 계산 방식이다.
지난여름 선생의 엄친상을 당했을 때다. 그 부음을 평양 성안에 사람으로서도 알지 못한 이가 많다. 알았다면 그는 선생과 가까이 지냈거나 혹은 신직(新職)의 인사소식을 본 사람뿐 그는 일절로 부고를 폐지하였다. 화환과 만장의 사절은 물론 친지의 장지 동행까지도 일절 사절하야 평양의 아니 조선의 신기록을 지었다. 그가 허례폐지를 주장함이 그 자신에게부터 실행됨을 알게 하는 바이어니와 선생이 따님을 시집보낼 때에도 ‘모닝’을 세(貰)내 오지 않고 조선예복으로써 식을 마쳤다. 이것을 고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철부지가 아니면 미련한 인간일 것이다. 평양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통 몰아서 하나도 쓸 놈이 없다고 욕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에게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그의 앞에는 모두 다 사람처럼 뵈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 선생님은 그렇지 않거니- 이것이 그의 말이다. 평양사람을 다 욕을 하여도 조 선생만의 인격은 그의 핏속에도 흐르는 모양이다. 선생이 매일 같이 기독청년회관에 나와 낮았으면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정말 각 방면 인물이다. 억울한 호소, 딱한 의논, 입학시험에 낙제된 학생의 부형, 낙제의 염려 있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 오는 사람의 방문, 심지어는 연전에는 출분(出奔·도망친-편집자)한 계집 때문에 선생을 찾아온 노동자도 있었다. 선생은 반듯이 이들에게 손을 주어 악수하고 친절로써 그의 온화한 성품을 발휘한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을 때 요리(要理)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다음 번에도 대답이 장로답지 못한 것을 말하자면 특등취급으로 준(準)무시험 장로쯤 되었다. 물론 선생의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결코 아니다. 장로문답에 낙제라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없을 일이다. 그는 구태여 장로를 원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에게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이제는 없어졌지만 연전 경성 모 신문사에서 선생을 모셔다가 사장을 삼으려 할 때 끝내 거절한 것이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을 때 요리(要理)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서인의 이이는 동인의 유성룡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준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이가 자신들이 붕당을 꾸몄다고 했다며 노발대발하며 이준경의 관작을 추탈(追奪)해야 한다고 했고, 유성룡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이이가 선조의 지시를 받아 ‘10만 양병(養兵)’ 계책을 올리자 유성룡은 당장 10만 군대를 만들면 외적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나라가 망한다며 좌절시켰다. 선조 16년(1583) 9월 8일 이이가 이조판서로 조정에 복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날 이후 양사의 비판이 이이보다는 정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철은 이이보다도 서인 성향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동인을 몰아세우는 데 조정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철(鄭澈·1536~1593)의 어린 시절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지만 큰 누님이 인종의 후궁이 되고 막내 누님도 성종과 숙의 하씨 사이에서 난 계성군의 아들 계림군 이유와 결혼했다. 왕실과 이중의 혼맥(婚脈)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궐을 출입하며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 가깝게 지냈다. 인종의 요절로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화(禍)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매형인 계림군 이유가 윤원형 일파의 표적이 된 것이다. 계림군은 함경도 안변으로 도피를 했고 그사이에 장인인 정철의 아버지와 처남인 큰형 정자가 붙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치러야 했다. 계림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지만 아버지와 큰형은 목숨은 구했다. 대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을사사화가 일어난 지 2년 후에 다시 윤원형은 윤임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소위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을 조작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 광양에 유배 중이던 큰형은 다시 함경도 두만강가의 경원으로 옮겨지던 도중 32세 나이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사망했다. 이때 정철의 나이 12세 때였다. 훗날 정철이 반(反)왕권론인 주자학에 빠져든 것은 이 같은 불행한 개인사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서인의 이이는 동인의 유성룡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또 이이가 선조의 지시를 받아 ‘10만 양병(養兵)’ 계책을 올리자 유성룡은 당장 10만 군대를 만들면 외적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나라가 망한다며 좌절시켰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에선 우파 정권이 강력하게 노동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을 통틀어 가장 적극적으로 노동 개혁에 나서고 있는 정치 지도자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이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후 30여 년 만에 ‘제2의 영국병’을 고치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직을 세 번 연임한 대처의 첫 임기 시절 강성 노조의 득세, 방만한 공공 부문, 과도한 복지 때문에 ‘영국병’이란 말이 나왔다. 특히 강성 노조들의 파업사태가 만연했다. 당시 복지지출 삭감과 세금 인하,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등 개혁 정책을 마련했던 대처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 개혁에 나섰다. 대처는 파업의 원인이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만 고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클로즈드 숍(Closed shop)’ 때문이라고 보고 이 제도를 폐지시켰다. 대처는 1984년 탄광노조가 불법파업을 벌이자 9500여 명을 연행하는 등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 때문에 ‘철의 여인’이란 말을 들었던 대처는 영국병을 해결하는 업적을 남겼다. 캐머런 총리의 노동 개혁은 의료, 교육, 교통, 소방과 같은 핵심 공공서비스 분야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저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난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의 압승으로 연임에 성공한 캐머런 총리는 노동조합법 개정안(Trade Union Bill)을 밀어붙여 지난 10월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앞으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파업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파업 찬반 투표에 전체 조합원의 50% 이상이 참여하고, 전체 조합원의 40% 이상이 찬성해야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합원 1000명의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경우 최소 500명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하고 400명 이상의 찬성표가 나와야만 한다. 투표율과 상관없이 단순히 과반수 찬성으로 파업을 하는 기존의 관행을 막겠다는 것이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조합원을 협박하거나 강제로 파업에 참여시키는 것도 금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부 극단 세력이 주도한 파업으로 국가 경제가 마비되는 사태를 막겠다는 의도이다.
유럽을 통틀어 가장 적극적으로 노동 개혁에 나서고 있는 정치 지도자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이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이후 30여 년 만에 ‘제2의 영국병’을 고치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네팔 카지노나, 특별한 숙소에서 도박으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자살을 원할 경우 자살용 권총을 대여해 준다는 것은 사실일까. 주 네팔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는 시바 프라사드 포카렐(Shiva Prasad Pokharel) 씨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했다. 네팔의 대표적 언론인 비쉬누 니스트리(Bishnu Nisthuri)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안투 이얌》지(誌) 실무 편집장, 《히말라야 타임스》 편집장, 《스페이스 타임》 실무 편집장 등을 거쳤다. 1998년부터 네팔기자연맹(FNJ) 실행위원을 역임한 비쉬누 니스트리는 2005년 5월 제21차 네팔기자연맹 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됐다. 법조인 출신의 언론인 타라 나스 다할(Tara Nath Dahal)도 “네팔은 총기 소유국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카지노 관계자들의 말도 비슷했다. 통역 벅터 람 라미차네 씨의 말이다. “네팔에서 왕세자가 가족을 총으로 난사한 사건이 발생했죠. 아마 이 때문에 네팔에서는 총을 쉽게 사거나 대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죠. 네팔 카지노나, 특별한 숙소에서 도박으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자살을 원할 경우 자살용 권총을 대여해 준다는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 아닐까요. 제가 확신하는데 우리나라(네팔)에는 자살용 총을 대여해 주는 곳이 없습니다.” 네팔 왕실은 비교적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비렌드라 국왕이 네팔 민주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었기 때문. 1972년 27세에 네팔의 열 번째 국왕이 된 그는 한동안 전제 군주로 군림했지만, 1990년 민주화 시위가 발발하자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왕실은 2001년 ‘피의 만찬’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해 6월 매달 국왕이 주재하는 왕실 일가의 저녁 모임이 열렸다.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랴 왕비,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쉬루티 공주, 그리고 비렌드라 국왕의 누이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무차별 총격이 벌어졌다. 유혈극의 장본인은 디펜드라 왕세자. 당시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만취한 왕세자가 왕비의 꾸중을 듣고는 격분해 가족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그 뒤 자살을 시도했다. 국왕 부처 등 8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뇌사 상태에 빠졌던 왕세자는 사흘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왕실 일가족이 몰살하는 대참극이 벌어진 후 왕실은 흔들렸고, 2008년 5월 네팔 의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렇다면 네팔 카지노나, 특별한 숙소에서 도박으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자살을 원할 경우 자살용 권총을 대여해 준다는 것은 사실일까. 주 네팔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는 시바 프라사드 포카렐(Shiva Prasad Pokharel) 씨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했다.
지구상에서 일본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들 한다. 왜 그럴까. 필자가 볼 때 과거 역사로 인한 반일(反日)감정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문화적·사상적으로 우리에게 배운 한 수 아래의 나라라는 인식이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15년 오늘의 이 시점까지도 국내 어느 대학에서도 일본사상이나 일본사상사와 관련해 제대로 된 강좌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기막힌 현실이 이를 대변한다고 하겠다. 대학 현실이 이럴진대 다른 쪽 상황이 어떠한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진지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가슴을 식히고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무조건 밉고 싫다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시하고 관심조차도 갖지 않는 것은 알 만한 사람과 국가가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극복해 무엇을 해 보겠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것이다. ‘일본이 자체 기술로 행성탐사우주선 ‘하야부사’를 쏘아 올리고, 혼다 같은 기업이 제트비행기를 제작·판매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으로서, 일본 근세사상사라는 창(窓)을 통해 일본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필자 나름의 결론은 ‘일본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우리 사회의 일본 이해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각 시대별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하나로 꿰어 일본사상 전체를 이해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시대에 등장한 사상은 그 시대의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물로서의 생명력이 있는 이데올로기이고 그런 이데올로기의 본질과 특징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절름발이 인식이 횡행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특정 시대의 사상에 대한 보다 폭넓으면서도 구체적인 이해가 선행조건으로서 필수적이다. 부연하자면 서구나 일본에서 생산된 시각에 더하여 우리 시각으로의 ‘일본 본질 보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구상에서 일본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들 한다. 필자가 볼 때 과거 역사로 인한 반일(反日)감정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문화적·사상적으로 우리에게 배운 한 수 아래의 나라라는 인식이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이 회장의 24개 질문이 모두 절박한데, 그러나 그 질문이 다 적합한가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그것을 증명해봐라, 그런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질문들은 이미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때 예수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인간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지요. 손바닥에 난 못자국의 흔적 말입니다. 이 흔적, 그 자국은 현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 흔적이 우리에게 어떤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 신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현하는가, 하는 것으로 고개를 돌려야 해요. 죽음이나 신은 what이 아니라 how와 when으로 또는 where로 파악하자는 것이죠. 알렉산더가 넘어져 땅에 누웠을 때 자신이 땅에 묻히는 형상이 떠오르고 그 순간에 죽음이 그 눈앞에 나타나요. 자신이 묻히는 땅의 넓이지요. 전쟁터에서 그렇게 무수한 죽음을 보았고 헤아릴 수 없이 지고 이기는 전쟁을 겪은 사람인데도 엉뚱하게도 씨름판에서 한가롭게 놀다가 죽음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무패의 장군이 하찮은 모기 한 마리에게 물려 죽게 된 것처럼, 그렇게 죽음과 신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 다가온다는 겁니다.” ― 교수님은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나타나셨나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겠지요. “맞아요. 그것은 지금까지 책에서 읽고 생각하던 죽음이 아니었어요. 아주 판이한 것이었지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나는 여섯 살 때의 죽음의 체험담까지 시로 써온 사람인데도 죽음은, 암은 내 글과도 다른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물론 사극에 나오는 저승사자의 모습 같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지요. 달나라 사진을 찍은 것 같은 MRI의 화상이고 나 자신의 몸이 빈 갯벌의 진흙바닥의 구멍에서 갑자기 게들이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캔서(cancer)라는 말이 ‘게’를 뜻하는 라틴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그랬을 겁니다. 한자의 암(癌)과 같은 덩어리보다는 집게 발이 달린 게가 기어 다니는 것, 축축한 진흙탕 갯바닥을 구멍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나는 여섯 살 때의 죽음의 체험담까지 시로 써온 사람인데도 죽음은, 암은 내 글과도 다른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물론 사극에 나오는 저승사자의 모습 같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지요.
1930년대 경성제대 문과에 몇몇 저명한 박사와 교수가 있었는데 개중에 등총린(藤塚鄰·후지쓰카 지카시-편집자 註) 교수도 쟁쟁한 이로 특히 완당(阮堂·추사 김정희-편집자 註)을 연구하고 완당을 통해서 한청(韓淸) 간 문화교류의 새로운 면을 밝힌 사람인데 육당 선생에게 자주 찾아오고 선생을 극진히 예우하고 선생에게서 《용감수경(龍鑑手鏡)》(10세기 거란의 승려 행균[行均]이 편찬한 한자 자전[字典]-편집자 註)을 빌려다가 영인본을 작성하고 그 외에도 선생과 학문상으로 접촉이 긴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께서 모모 인사들의 청탁으로 한말에 내탕금을 관리하던 이용익(李容翊)이 24만원(?)의 거금을 일본 제일은행에 예치하였다는데 이의 확증만 얻으면 제일은행에 청구하여 가지고 육영사업에 충당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조사하려면 부득불 한말의 여러 개문서(介文書)와 기록 문헌을 상고하는 수밖에 없었고 또 여기에는 성대(城大·경성제국대학. 지금의 서울대학교-편집자 註)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대도서관에서 특별히 학외인으로서 도서를 관람하려면 성대 교수의 보증과 추천이 필요하게 되므로 선생께서는 특별열람에 필요한 보증인으로서 제일 먼저 등총 교수를 찾아가서 특별도서 열람 추천 건을 부탁하였더니 등총 교수는 뜻밖에도 과히 좋지 않은 낯빛으로 “나는 대소사를 막론하고 매번 육당 선생을 찾아가서 뵈었는데 선생은 이런 중대한 일을 타인을 심부름시킨다는 것은 다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등총 교수에게 “기왕 당신이 육당 선생을 존경하는 터이라면 모처럼 육당 선생의 소청이니 도와드리면 좋지 않으냐, 하여튼 나는 물러가서 당신의 감상을 그대로 복명하겠노라”고 말하고 돌아와서 선생께 말씀한즉 “허어, 그 친구가 자기는 나를 여러 차례 예방하였는데 내가 한 번도 답례를 하지 않았으므로 섭섭히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하시고 대번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의 뒤를 따라 등총 교수 댁을 찾아가서 (불과 200m 정도였음) 미안하다는 뜻을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모모 인사들의 청탁으로 한말에 내탕금을 관리하던 이용익(李容翊)이 24만원(?)의 거금을 일본 제일은행에 예치하였다는데 이의 확증만 얻으면 제일은행에 청구하여 가지고 육영사업에 충당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조사하려면 부득불 한말의 여러 개문서(介文書)와 기록 문헌을 상고하는 수밖에 없었고 또 여기에는 성대(城大·경성제국대학. 지금의 서울대학교-편집자 註)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크로넨베르크에 사는 ‘열 명의 평범한 독일인’은 나치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1939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선 나치는 이들의 소외의식을 불식시켰다. 전쟁 전 재단사 보조이다가 실직한 구스타프 슈벵케는 이렇게 말한다. “나치당은 나처럼 ‘작은 자들의 정당’이었다고….” ‘작은 자’들, 보통 사람들에겐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1939년 이전의 독일은 행복한 시절이었다. 나치당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줬다. 직장에서 권리를 침해당한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저렴한 비용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목수인 칼 클링겔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죠. 첫 번째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독일에서는 아이를 딱 둘만 갖게 되었죠. …1933년 이후에야 우리는 아이를 더 많이 갖게 되었죠. 사람마다 미래를 보게 된 거지요.” 그러면서 이 목수가 하는 얘기는 섬뜩하다. “좋은 발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독재정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정부의 형태는 그거랑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죠. 어떤 사람한테 돈이나 기회가 없게 되면,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히틀러의 정적(政敵)들이 암살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유대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도 무관심했다. 그런 공포들 가운데 어떤 것도 마이어가 만난 열명의 친구들의 일상생활을 침범하지 않았으며, 한 번도 이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이후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적폐(積弊)수사’로 공무원이나 검사, 판사, 우파 시민운동가들이 검찰에 불려 다니며 수모를 겪고, 감옥에 가고, 자살을 해도, 언노련(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 밉보인 방송인들이 자기가 평생 일해온 방송사에서 쫓겨나도,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단지 세금을 납부하고, 지역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예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뿐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작은 자’들, 보통 사람들에겐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1939년 이전의 독일은 행복한 시절이었다. 나치당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줬다. 직장에서 권리를 침해당한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저렴한 비용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오랜 폭정(暴政)이 난무하면서 썩어 문드러진 명종(明宗) 시대를 지나면서도 인재는 남아 있었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말 그대로 진흙탕 속의 진주였다. 이준경은 세조와 성종 때 크게 번성했던 광주 이씨의 후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그의 나이 6세 때, 즉 연산군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준경 형제도 함께 유배를 갔으나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록은 “준경은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비범하였으며 체격이 웅대하여 많은 선비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다소 늦은 중종26년(1531) 문과에 급제해 주로 홍문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533년에는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禍)를 당한 사림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어 5년 동안 독서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강직하기로는 그의 형 이윤경(李潤慶·1498~1562)이 한 수 위였다. 두 사람 모두 관리로서 청렴과 엄중함이 뛰어나 두 봉황새라는 뜻에서 ‘이봉(二鳳)’으로 불렸다. 1537년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강직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이 설쳐대던 명종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명종3년에는 요직인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한때 윤원형과 가까운 이기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이듬해 풀려났고, 그 후 형조·병조·이조·공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다. 명종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을 때는 도순찰사를 맡아 성공적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우찬성에 올랐고 이후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년)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이른다.
오랜 폭정(暴政)이 난무하면서 썩어 문드러진 명종(明宗) 시대를 지나면서도 인재는 남아 있었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말 그대로 진흙탕 속의 진주였다.
중국 정부가 청사편찬 사업에 국가역량을 결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화여대 정혜중 교수는 “청사편찬 작업은 동북공정 사업과도 관련된 국가적 차원의 사업으로서, 중국의 역사적 통치기반을 다민족 국가이면서 최대 영토를 실현시켰던 청사에 직접 두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조가 이민족(만주족) 왕조이긴 하지만 그들이 이룩한 거대한 성과를 현대 중국에서 고스란히 이어받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중국이 청조의 영토에 집착하는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영토중심적 역사관’을 완성하려는 목적이다. 이 역사관은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터무니없는 역사관이다. 과거에 중국 주변의 국가와 민족이 중국과 어떤 관계에 있었든 상관없이, 현재 그 국가와 민족의 강역(疆域)이 중국영토 안에 포함돼 있으면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송(宋)을 공격하여 남쪽으로 몰아낸 여진족이나 명을 멸망시킨 만주족(청)의 역사가 모두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간주한다. 심지어 엄연히 중국 국경 밖에 별도의 나라(몽골)로 존재하는 몽골인의 역사도 과거에 그 활동영역이 중국 내였다는 이유로 자기네 역사라고 강변한다. 칭기즈칸을 중국사의 위대한 인물로 그리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보는 ‘동북공정’도 이 사관에서 나왔다. 중국은 이 괴이한 역사관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화민족(中華民族)’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는 마치 세계 수많은 나라의 이민자들로 형성된 미국이 자국민을 ‘미국민족’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어색하다고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지적했다. 중국이 ‘중화민족’ 개념을 창조한 목적은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에게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 주어 민족단결을 도모하고, 그들의 과거사를 중국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관영TV는 55개 소수민족을 ‘중화민족 대가정(大家庭)의 일원’이라고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열심이다. 중국은 이런 개념의 연장선에서 자국을 ‘통일적 다민족국가’라고 정의한다.
중국 정부가 청사편찬 사업에 국가역량을 결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화여대 정혜중 교수는 “청사편찬 작업은 동북공정 사업과도 관련된 국가적 차원의 사업으로서, 중국의 역사적 통치기반을 다민족 국가이면서 최대 영토를 실현시켰던 청사에 직접 두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조가 이민족(만주족) 왕조이긴 하지만 그들이 이룩한 거대한 성과를 현대 중국에서 고스란히 이어받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