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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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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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폐 절상에 압력을 넣지 마라. 많은 수출회사가 문 닫고 농민공(農民工)들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일 중국에 사회 경제적 동요가 생기면 이는 세계적 재앙이 될 것이다.”(원자바오 중국총리, 2010년 10월 6일, 브뤼셀에서) 중국 총리 원자바오(溫家寶)가 브뤼셀에서 열린 중국-EU 정상회의에서 EU의 인민폐 절상요구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파이낸셜 타임스 10월 7일자) 미국서 299달러에 팔리는 이동전화기의 중국 제조회사 부가가치는 오로지 4달러에 불과하다. 서방의 인민폐화(貨) 절상압력은 이 작은 이윤마저 소멸시켜 중국의 수출을 막고, 제조업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해고될 것이다. 중국 경제는 성장을 멈추고 사회경제 혼란이 일어나서, 세계는 중국으로의 수출을 멈추고 보호무역으로 가는 재앙이 오리라는 게 원 총리의 논리이다. 마치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이 홍콩을 방문하여, 만약 서방 선진국이 중국의 경제성장을 돕지 않으면 2억의 중국인 보트 피플이 태평양을 떠다닐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반문한 것을 연상케 한다. 30년 전 덩샤오핑의 ‘2억 보트 피플’ 위협은 협박으로 들리지 않고 경제성장을 도와 달라는 호소로 들렸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印度)에서 1인당 소득이 선진국의 10분의 1(중국) 또는 30분의 1(인도)도 안되는 수준의 근대화가 진행된 것만으로도 이미 세계의 에너지, 식량, 물, 자원, 환경, 통화, 무역, 그리고 군사와 지정학에 결정적 교란 요인 또는 재앙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 또는 ‘인도’가 만든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근대화라는, 서양이 전파한 경제성장 방식(자원소비), 에너지 다소비 생활방식(자동차, 고속도로), 거주방식(도시화)이, 중국과 인도라는 세계최대 인구대국에 이식된, 즉 ‘서양 근대화의 세계화’, ‘근대화의 히말라야권(圈·히말라야를 사이에 둔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동아시아를 합친 권역) 침투’로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서양이 앞서 간 성장과정을, 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었던 거대인구 공동체들(중국과 인도)이, 서양의 과거에 없었던 고도성장 속도로 짧은 시간(중국 30년, 인도 15년) 내에 달성한 결과가 바로 중국문제군(群)이요, 인도문제군이다.
“인민폐 절상에 압력을 넣지 마라. 많은 수출회사가 문 닫고 농민공(農民工)들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일 중국에 사회 경제적 동요가 생기면 이는 세계적 재앙이 될 것이다.”(원자바오 중국총리, 2010년 10월 6일, 브뤼셀에서) 중국 총리 원자바오(溫家寶)가 브뤼셀에서 열린 중국-EU 정상회의에서 EU의 인민폐 절상요구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서방의 인민폐화(貨) 절상압력은 이 작은 이윤마저 소멸시켜 중국의 수출을 막고, 제조업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해고될 것이다.
2011년 1월 14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은 벤 알리 독재 정권을 퇴진시키고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튀니지 혁명은 튀니지의 국화(國花)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지 7년의 시간이 흘렀다. 혁명 이후 튀니지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혁명 전후 언론 환경의 변화, 재스민 혁명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튀니지 현지를 방문했다. 지난 4월 19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 위치한 카르타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이름에 과거 로마와 지중해 패권(覇權)을 두고 다툰 ‘카르타고’가 들어가 있어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내 지방 공항과 규모가 비슷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튀니스의 중심지인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으로 향했다. 튀니지의 택시는 폴크스바겐, 르노, 시트로앵, 푸조 등의 유럽산 경차로 모두 노란색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 내부가 매우 깔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부는 폐차(廢車) 수준이었다. 유럽에서 폐기되기 직전의 차량을 수입해 택시로 쓰기 때문이었다. 차창 밖의 튀니지 모습은 여느 이슬람 국가들보다 자유로웠다. 건국 당시부터 세속주의를 표방했고, 여성의 권리를 높게 인정했기에 튀니지 여성 상당수는 이슬람 전통 의상을 착용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했다. 우리의 ‘광화문광장’과 같은 튀니스 중심부 하비브 부르기바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건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의 동상이었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1957년부터 1987년까지 30년간 독재 통치를 했음에도 프랑스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튀니지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튀니지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었다. 동상 앞에서 만난 튀니지 교육부의 하센 벤 슬리만 국장은 부르기바 대통령의 동상을 가리키며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인 부르기바는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자로서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부르기바는 1987년 당시 총리였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실상 빼앗기듯 넘겨준다. 이후 2011년 재스민 혁명 전까지 23년간 벤 알리의 독재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1957년부터 1987년까지 30년간 독재 통치를 했음에도 프랑스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튀니지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튀니지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었다. 동상 앞에서 만난 튀니지 교육부의 하센 벤 슬리만 국장은 부르기바 대통령의 동상을 가리키며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인 부르기바는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자로서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이슬람력과 함께 서양력을 사용한다. 이란은 이란 고유의 태양력을 쓴다. 이를 이슬람태양력이라고 부르고, 이슬람력을 이슬람음력이라고 한다. 이란의 태양력은 일 년이 365일이다. 첫 6달은 31일이고, 이후 5달은 30일, 마지막 달은 29일이다. 4년마다 마지막 달에 하루를 더해 30일을 만든다. 한 해의 시작은 3월 21일 춘분이다. 이란의 달력은 12 별자리와 기간이 같다. 이를테면 첫 번째 달인 파르바딘(Farvardin)은 3월 21일에 시작하여 4월 20일에 끝나는데, 양자리(Aries)다. 이란에서는 이슬람양력, 이슬람음력, 서양력을 다 쓰는데, 거의 모든 신문이나 공공매체에 이 셋이 모두 표기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슬람양력과 이슬람음력을 모두 인정하나 정부기관은 이슬람양력을 따른다. 이슬람음력은 이슬람과 관련한 종교행사나 의례를 준수하는 데 쓰이고 이슬람양력은 이슬람 종교 외 경축일을 기념하는 데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이란의 설날은 노루즈(새로운 날)인데, 춘분일인 3월 21일이다. 전통적으로 기념해 온 조로아스터교 관련 의례를 다른 이름으로 바꾼 경우도 있다. 새해 13번째 되는 날, 올해의 경우 4월 2일은 불운을 막기 위해 모두가 집 밖으로 나가는 날인데, 시즈다 베다르(Sizdah bedar)라는 전통적인 이름 대신 자연의 날로 개명하였다. 이슬람양력은 이슬람음력과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을 기점으로 한다. 파흘라비 왕정시대에 레자 샤(Reza Shah)는 키루스(Cyrus) 대왕이 즉위한 기원전 559년을 양력의 기원으로 삼아 해를 세었으나,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양력의 시작점이 현재처럼 바뀌었다. 그래서 2017년 올해는 이슬람양력으로 1396년이다. 1396년은 올해 3월 21일에 시작하였고, 내년 2018년 3월 20일에 끝난다. 이란에서 이슬람력 1439년의 첫날은 오만과 같이 9월 22일이었다. 즉 이란에서 2017년 9월 22일은 이슬람음력 1439년 1월 1일(무하람월 1일)이었고, 이란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슬람양력에 따르면 1396년 6월 31일(샤리바르월 31일)이었다.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이슬람력과 함께 서양력을 사용한다. 이란은 이란 고유의 태양력을 쓴다. 이를 이슬람태양력이라고 부르고, 이슬람력을 이슬람음력이라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휴전협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한국 정부는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해 8월 변영태(卞榮泰) 외무부 장관은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변 장관은 미국이 그해 7월 호주·뉴질랜드와 앤저스조약을 체결하고, 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안보외교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통하다. 하지만 6·25 이전에도 한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를 묵살했던 미국은 이번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조차 1953년 4월 18일 합동참모본부(합참)에 보낸 보고 전문(電文)에서 “현시점에서 양국 간의 안보조약 체결을 고려하지 않을 것을 건의한다”고 상신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3년이나 함께 피 흘리면서 싸웠건만, 미국 그리고 미국 군인의 눈에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입으로는 한국의 통일 열망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명예로운 휴전을 성취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배치되는 한국 정부의 조치는 한국에 오직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했다. 미국은 립서비스로 이승만 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동맹을 대신하려 했다. 월터 스미스 국무차관은 1953년 5월 22일 엘리스 브릭스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한국에 가까운 지리적 근접성이 침략에 대한 억지력이 되고 있다. ▲휴전협정과 더불어 발표할 유엔의 제재강화성명(공산 측의 재침략이 있을 경우 참전 16개국이 공동으로 그에 맞서는 제재에 참여한다는 약속)이 미국이 한국의 장래 방어를 위해 계속적인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라면서 “현 상황에서는 대통령(아이젠하워)이 대한민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려할 수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전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공허한 다짐에 넘어가지 않았다.
변 장관은 미국이 그해 7월 호주·뉴질랜드와 앤저스조약을 체결하고, 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6·25 이전에도 한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를 묵살했던 미국은 이번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분간 내려오는 명령이 없고 여유가 있었다. 안기부 내부는 각자 자기가 맡은 업무를 혼자서 수행하는 분위기였다. 시간을 각자 자기가 관리하는 것 같았다. 안기부 내에는 일반인에게는 금지된 다양한 사상 서적들도 있었는데, 이참에 시간을 내서 그 책들을 읽었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일성 선집(選集)도 읽었다. 북한의 법률 서적들도 봤다. 사회주의적 대(大)가족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한 법률체계였다.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직접 만나 얘기도 들었다. 함흥시 인민위원장 출신이었는데, 그는 북한에서 인민위원장이면 요트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사회안전부 출신도 만났다. 그는 북한의 부패상을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북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전제주의 국가였다.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에 북한은 성(城)안의 농경체제가 됐고 군사 독재국가가 됐다고 여겼다. 그게 북한의 실체 같았다. 북한보다 더 교조적인 것은 남한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운동권 내에서도 NL그룹, PD그룹, 제헌의회 그룹, 주체그룹 등 많은 분파(分派)가 존재했다. 남한 내의 독재와 자본주의적 모순을 체험한 그들은 더욱 열렬하게 혁명을 꿈꾸는 것 같았다. 지적 호기심만 있다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수사단의 책임자가 나를 불러 물었다. “주체사상이나 김일성 선집을 보니까 어떤 느낌이었소?”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다릅니다. 민족주의가 들어가 있고 유교의 냄새가 나는 북한의 독특한 사상체계인 것 같습니다. 경전(經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인민 대중’이란 용어가 성경 속의 하나님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영생을 추구하듯 주체사상 안에는 영원한 정치적 생명이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선지자가 등장하듯 ‘지도자 동지’가 있었습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이 핍박을 받듯이 미 제국주의가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구조였습니다. ‘메시아’는 김일성이고 교리(敎理)는 주체사상입니다. 당원들이 사도(使徒)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도(信徒)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듯 그들은 남조선 혁명을 완성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세계에 전파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한 내의 운동권들은 메마르고 관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는 민족과 인간미가 들어 있는 주체사상 쪽에 더 공감한 것 같습니다.”
그는 북한의 부패상을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북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전제주의 국가였다.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에 북한은 성(城)안의 농경체제가 됐고 군사 독재국가가 됐다고 여겼다.
이 같은 대립구도는 극(劇)을 소비하는 다수 대중이 사회 지배계급에 느끼는 박탈감과 무력감(無力感)을 달래주기에 환영받는 부분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런 설정 쪽이 극적(劇的)으로 훨씬 재미있기 때문에 시작되고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필자는 언젠가 해외 영화비평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이기는 것은 다큐멘터리지 극영화(劇映畫)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읽은 적도 있다. 뭐든 현실에서는 좀처럼 이뤄지기 힘든 소망이 극예술로서 가치도 생기는 것이고, 또 그쪽이 더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박진감을 줘 대중을 몰입시키기도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대중은 이 같은 대립구도를 스스로 설정해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을 다독이기도, 어려운 현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단순히 엄혹한 현실에 대한 마취제(痲醉劑) 역할만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이런 극적 대립의 속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대중문화계에서 엿볼 수 있는 경향성은 단순한 선=약자, 악=강자 설정을 크게 넘어서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반자본주의 색채를 띠는 콘텐츠가 언젠가부터 늘어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전에는 최소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 맞는 얘기다. 분명 이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앞서 반기업 정서의 메카와도 같다는 TV 드라마만 해도 그렇다. 사실 1990년대에는 오히려 재벌 집안의 유복한 아들이 선한 역으로 등장하고, 서민 집안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위로 올라가려는 인물이 악에 가깝게 묘사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설정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대성공한 사례들까지 존재한다. 1995년 방영된 KBS2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1999년 방영된 SBS 드라마 〈청춘의 덫〉 등이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크게 변했다. 가정주부들이 주로 보던 아침드라마부터 서서히 노골적인 반기업 정서를 드러내더니 곧 전체 시간대를 장악해버리기에 이른다. 그러다 2010년이 되자 한국광고주협회 월간지 《KAA저널》 2010년 3월호에 ‘드라마 속에 나타나는 반기업 정서’라는 기사까지 실리게 된다.
이런 극적 대립의 속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대중문화계에서 엿볼 수 있는 경향성은 단순한 선=약자, 악=강자 설정을 크게 넘어서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크게 변했다. 가정주부들이 주로 보던 아침드라마부터 서서히 노골적인 반기업 정서를 드러내더니 곧 전체 시간대를 장악해버리기에 이른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에만 몰두하던 중국이 청사편찬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0년 인민대학 청사연구소의 다이이(戴逸) 교수가 청사 재편찬에 관한 의견을 내면서부터였다. 이듬해 3월 양회(兩會·全人大와 政協) 기간에 인민대학 리원하이(李文海), 북경대학 왕샤오추(王曉秋) 교수가 같은 의견을 피력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2002년 3월 중국 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준비팀을 설치한 데 이어, 그해 8월 장쩌민(江澤民) 주룽지(朱鎔基) 후진타오(胡錦濤) 리란칭(李嵐淸) 등 4명의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에서 이 편찬사업을 비준했다. 이때 리란칭 부총리는 “중화민족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게 하며,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가 전승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중화민족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정신적 원천이 될 수 있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해 12월말 25명으로 구성된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위원회의 주임은 인민대학 다이이 교수, 부주임은 동북공정의 핵심인물인 중국사회과학원 마다정(馬大正) 학술위원, 북경대학 주청루(朱誠如) 교수 등이 맡았다. 중국은 2003년부터 올해까지 10년 동안 총 6억 위안(약1100억원) 이상의 국가예산을 쏟아부었다. 이 사업에는 중국 전역 160개 대학·연구기관의 1600여 교수와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2010년 12월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청대의 사료를 재정리하여, 당안(?案) 문헌(文獻) 연구(硏究) 도록(圖錄) 편역(編譯) 등 5종으로 펴냈는데, 그 규모가 1800여 권, 10억 자에 달했다. 편찬팀은 또 2011년에도 지방과 군사분야 등의 자료집 66권을 저술했다고 청사영도소조판공실이 올 1월 밝혔다. 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사료집을 기초로 최종적으로 총 92권, 각권 35만 자, 총3220만 자의 청사를 펴낼 계획이다. 92권은 ①시대순으로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통기(通紀) 8권 ②천문역법 지리 인구 법률 등에 관한 전지(典志) 39권 ③각 시대의 인물에 관한 전기(傳記) 22권 ④각종 사표(史表) 13권 ⑤도록(圖錄) 10권 등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에만 몰두하던 중국이 청사편찬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0년 인민대학 청사연구소의 다이이(戴逸) 교수가 청사 재편찬에 관한 의견을 내면서부터였다. 이듬해 3월 양회(兩會·全人大와 政協) 기간에 인민대학 리원하이(李文海), 북경대학 왕샤오추(王曉秋) 교수가 같은 의견을 피력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자, 정리 좀 해보자. 홉스나 묵자나 둘 다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인간 모습을 말하면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한다. 욕망 때문에 쟁투하는 모습을 들어 인간의 자연적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 다 공포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實存)도 말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홉스도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이성을 봐도 역시나 둘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욕망이 있고 정념에 휩싸인 채 살지만 인간이 아무렇게 행동한다? 본능대로만 행동한다? 홉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홉스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는 심사숙고(深思熟考)의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지고 또 따져본 다음에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6장에서 심사숙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왜 따지고 심사숙고할까. 욕망, 욕구, 그리고 공포 때문이다. 행동을 통해, 결단을 통해 내 욕망·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어떤 결단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계산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택해야 내가 공포에 조금이라도 떨지 않을 상황이 오게 될지 절로 따져본다는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 무엇이 내 욕망을 더 충족시켜주고 내게 보호와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숙고하고 따져보는 게 인간이다. 홉스는 그 이성을 계산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묵자처럼 저울질한다는 거다. 묵자와 홉스는 ‘평등’을 키워드로 인간을 이해한 것도 비슷하다. 앞서 말한 대로 묵자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의 의로움이,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의 의로움이 있다고 말하면서 각자가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존재라고 했다. 자기 이익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겸애는 그 평등한 주체들이 공평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돕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묵자는 ‘천지(天志), 천지’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뜻을 말한다. 묵자는 유일신(唯一神)을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뜻과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이자 바람이라고까지 한다. 그 신(神) 앞에서 묵자가 보는 인간은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환원(還元)된다. 그래서 묵자는 ‘동(同)’을 굉장히 강조했다. 차별을 폐지하라고 했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이란 기준으로 신분은 늘 재배치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에게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나 묵자나 둘 다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인간 모습을 말하면서 인간 본성을 이야기한다. 욕망 때문에 쟁투하는 모습을 들어 인간의 자연적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 다 공포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實存)도 말한다.
주 대사의 말처럼 튀니지의 실업문제는 심각하다. 기자가 튀니스의 밤거리를 다니며 가장 자주 마주친 광경은 조그만 카페에 수십 명의 남자가 모여서 노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카드놀이를 하거나 길에 앉아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라마단이란 특수한 기간인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할 일이 없어서 새벽까지 놀아도 문제 될 게 없기 때문이다. 현재 튀니지의 실업률은 18%다. 이 중 25세 이하 청년층의 실업률은 정부 발표치가 20% 이상이고, 실제로는 40%에 가깝다고 한다. 얼마 안되는 일자리도 숙련 근로자를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높은 학력자의 실업은 전체 청년실업률보다 훨씬 높다. 튀니지의 경제, 경영, 법학 석사(碩士) 소지자 실업률은 평균 47.1%이고 사회과학 분야 석사 소지자 실업률은 43.2%이다. 벤 알리 정권은 지난 수년간 실업문제를 경제분야에서 최우선 순위로 두고 일자리를 창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재스민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간 불균형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다. 튀니지 비농업 부문 일자리의 75%, 공공투자의 65%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있다. 내륙지역은 공공(公共)서비스의 질이 매우 낙후한 상황이고, 일자리도 없어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지난해 반정부 시위가 촉발된 곳이나 경찰의 진압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이 중부 내륙 지역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이 문제들이 해결되진 않는다. 과도정부나 제헌 후 출범할 정부가 일자리, 공공시설의 개선,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 지역 불균형 해소, 물가안정 등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재스민 혁명’은 실패로 귀결된다. 2010년 튀니지는 3.7%의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지난해에는 성장률이 0.2%에 그쳤다. 외국인투자는 전년 대비 29.2%, 신규 일자리 창출 29.6%, 외국인 관광객 30.7%, 튀니지 GDP의 7%를 차지하는 관광수입은 33% 감소해 경제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이에 부흥당은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 및 경제발전을 약속했다.
주 대사의 말처럼 튀니지의 실업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튀니지의 실업률은 18%다. 지역 간 불균형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다.
《뉴욕 타임스》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통해 트럼프의 논리가 효과적으로 나타난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2009년 중국산 타이어 제품에 대한 오바마의 보복성 관세 35%가 그 예(例)이다. 그 결과 물밀 듯 들어오던 중국산 저가 타이어 수입이 줄어들고, 타이어 관련 미국 노동자의 재취업도 가능해졌다. 오바마는 2012년 연두교서에서 이를 자신의 치적(治績) 중 하나로 자랑했다. 한국에도 가끔씩 전해지긴 했지만, 트럼프는 환율조작을 일삼는 일본·한국에 대해서도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수차례 천명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단순히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 200여 년 동안 국가 간 상식으로 여겨 온 무역원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대통령 후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적인 논조를 보면, 트럼프를 경제 문외한(門外漢)인 포퓰리스트 수준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후보로 분석하고 있는 게 보인다. 사실 트럼프의 주장은 일반적인 미국 국민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반중·반일(反中·反日)은 감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와 관련해 피부로 느끼는 문제다. 기사에도 나오지만, 트럼프는 단 한 장의 티셔츠도 미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는 2016년의 상황을 대변한다. 중국산 티셔츠가 들어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티셔츠를 만들던 미국인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게 문제다. “티셔츠 공장의 노동자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재취업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현실은 척박하다. 오바마가 일자리를 늘려 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실업률(Unemployment Rate)은 5%에 달한다. 갤럽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기 능력에 비해 저가의 임금으로 일하는 사람, 즉 저평가 취업률(Underemployment Rate)의 경우 무려 14.7%에 달한다(2016년 2월 기준). 미국 경제학자들은 2020년이 되면 미국의 실업률은 다시 7%대로 올라가고, 저평가 취업률도 20%대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트럼프와 같은 유의 주장은 일시적 감정분출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 낸 미국민의 아바타라고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단순히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 200여 년 동안 국가 간 상식으로 여겨 온 무역원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대통령 후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적인 논조를 보면, 트럼프를 경제 문외한(門外漢)인 포퓰리스트 수준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후보로 분석하고 있는 게 보인다.
사실 명운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명보다는 정치적 역학(力學)관계로 보는 것이 현대적으로 더 적실성이 있다. 2013년 장성택 전격 처형과 이어진 고모 김경희의 칩거는 곧 김정은에게 더 이상 상왕(上王)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괘상(卦象)은 바뀌게 될 수밖에 없다. 상왕은 음, 임금은 양, 재상은 음이 된다. 장관급 또한 자세를 낮췄으니 음이 되고 장성택 제거의 뒷배가 돼준 군부는 양이 되고 백성들은 다시 고분고분해져 음이 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되면서 이괘와는 음양이 모두 바뀐 감(坎)괘(☵☵)로 옮겨갔다. 감(坎)이란 구덩이·함정·위험이다. 괘만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어쩌면 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그러면 먼저 임금에 해당하는 구오(九五)에 대한 주공의 풀이부터 보자. “구오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坎不盈 中未大也]” 모호하다. 공자(孔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공자는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은 중(中)이 아직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구오는 강(剛)으로 중정(中正)을 얻었다. 효만 놓고 보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임금 자리에 있다. 그럼에도 주공의 효사에서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다’라고 했다.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평평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구오가 아직 크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이유는 밑에 호응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구이(九二)는 아직 험한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라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없다. 결국 구덩이가 가득 차야 허물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은, 그전까지는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허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효종(孝宗)이나 현종(顯宗)은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라 하겠다. 평평하게 되는 것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였다. 임금이 본래의 권위를 되찾고 마침내 백성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결국 구덩이가 가득 차야 허물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은, 그전까지는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허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효종(孝宗)이나 현종(顯宗)은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라 하겠다.
이쯤 되면 중소기업 정책은 거의 골격을 갖춘 셈이다. 전후(戰後)의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 정책담당자들은 이 정도까지 제도를 정비했다. 1960년 상공부에 중소기업과를 설치했고 1996년에야 중소기업청을 설치한 한국과는 중소기업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경제가 한국전쟁 특수 등으로 고도성장을 시작하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문제, 즉 ‘이중구조론’이 불거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생산성, 임금, 기술, 자금조달 격차가 심각하여 일본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이중구조 문제는 경기가 나쁠 때보다 좋을 때 불거지기는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해결 방법에서 일본은 좀 달랐다. 당시 일본은 업종별 산업구조 고도화 정책으로 나왔다. 모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중소기업이 많이 포진해 있고 또 중요 산업인 기계·전자 부품산업과 섬유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기계공업진흥임시조치법(1956년), 섬유공업설비임시조치법(1956년), 전자공업진흥임시조치법(1957년)을 제정해 중소기업들의 설비근대화, 기술향상, 경영합리화를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했다. 오늘날 일본이 기계·전자 부품 강국이 되는 기반은 이때 만들어졌다. 일본정부는 업종별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진흥자금조성법(1956년), 중소기업근대화자금조성법(1963년) 등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대기업의 대금지불 지연과 부당한 대금인하를 방지하기 위한 하청대금지불지연방지법(1956년)을 독점금지법의 특별법으로 제정하기도 했다. 당시에 불거진 또 하나의 문제는 영세상인 보호 문제였다. 먼저 지역 영세 소매상인과 대기업과의 분야조정을 위해 백화점법(1956년)을 제정했고, 영세상인의 사업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구매업자·소매시장 등을 규제하는 소매상업조정특별조치법(1956년)을 제정했다. 또 영세상인의 조직화를 위해 상점가진흥조합법(1962년)을 제정했다. 이후에는 대형 소매점 진출을 규제하는 소위 ‘대점법(大店法·1973년)’을 제정해 대기업 진출에 대해 규제를 가했다.
기계공업진흥임시조치법(1956년), 섬유공업설비임시조치법(1956년), 전자공업진흥임시조치법(1957년)을 제정해 중소기업들의 설비근대화, 기술향상, 경영합리화를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정부는 업종별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진흥자금조성법(1956년), 중소기업근대화자금조성법(1963년) 등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필자가 반드시 들르는 긴자 4번가 샤부샤부 식당 건물의 1층에는 프라다 긴자점이 들어서 있다.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프라다 매장으로 들어서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대략 1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가는 식이다. 물론, 대형 가방도 눈에 띈다. 일본인 손님은 단 한명도 없다. 프라다 매장은 중국인 손님을 의식한 듯, 아예 문을 활짝 열어 둔 상태다. 매장 바깥쪽에 서서 안쪽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20대로 보이는 중국인 여성이 프라다 가방을 곧바로 구입했다. 들어간 지 5분 만이다. 포장은 아예 하지도 않은 채, 비닐에 둘둘 말아서 큰 가방 안에 넣는다. 가방 가격은 약 45만 엔, 400만원 정도다. 긴자는 도쿄방문 중국인 관광객이 찾는 필수코스다.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대형 버스가 내려놓는 중국 관광객의 수는 하루 평균 1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미쓰코시 지하 3층 초미니 와인바에 들렀다가 동석한 미쓰코시 백화점 관계자로부터 긴자를 방문하는 중국인들의 소비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건을 구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10분 정도입니다. 그 대신 아이폰으로 중국 내 친구들과 끊임없이 통화를 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구입 여부에 대한 상의인 듯합니다. 원래 미쓰코시는 백화점 내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지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중국인들은 물건을 사기 전에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 중국에 보내, 현지의 중국인과 상의를 합니다. 백화점 6층에 위치한 시계매장에서 100만 엔 이상의 고급시계는 하루에도 5개 이상 팔립니다. 최고 1200만 엔짜리 시계를 전부 현금으로 구입한 경우도 있습니다. 미쓰코시는 올 가을부터 8층 전체를 초대형 면세백화점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중국인 손님을 타깃으로 한, 최고가(最高價) 브랜드 판매장입니다. 단 한 번에 끝나는 손님이 아니라, 한 번 구입한 손님을 평생고객으로 만드는 방안도 고려 중입니다. 예를 들어 일정 액수 이상 손님에게는 항공료를 공짜로 제공해 일본 방문을 유도하는 식의 이벤트 말입니다.”
긴자는 도쿄방문 중국인 관광객이 찾는 필수코스다.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대형 버스가 내려놓는 중국 관광객의 수는 하루 평균 1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분노하는 백인’에 주목했다. 자유무역을 하면서 자신의 일자리가 날아갔다고 여기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이번 경선에서 분노의 한 표를 던지면서 판세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미시간에서 승리한 이유가 바로 백인의 분노라고 해석했다. 트럼프는 워낙 외국에 대한 적대감을 일찌감치 드러냈고, 한국에 대해서도 방위비 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하면서 미국인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제대로 먹혀 미시간주 경선에서 트럼프는 남성 유권자 43%의 지지를 얻었다. 트럼프보다 백인 노동자의 덕을 본 후보가 샌더스다. 여론조사만 보면 샌더스는 힐러리에게 미시간에서 지는 걸로 나왔다. 그러나 TV토론과 유세 과정에서 샌더스는 계속해서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유일한 후보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미시간 지역 경제가 자유무역협정 통과로 어려워졌다는 인식을 갖는 유권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이었다. 디트로이트 등 공업도시가 많은 미시간에서는 샌더스의 주장이 먹혔다. 부동층이던 이들이 샌더스에게 무더기 표를 던지면서 힐러리 캠프가 비상이 걸렸다. 힐러리는 자유무역협정을 상원의원 때도 찬성했고, 국무장관을 하면서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도한 경력이 있어서다.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한 북·중서부 제조업 지대를 일컫는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샌더스에 가세하면 의외의 고전을 할 수도 있다. 샌더스는 오하이오와 일리노이, 4월 5일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에 희망을 걸고 있다. 미시간에서 17%포인트나 뒤지던 여론조사를 역전승(2%포인트 승리)으로 만들어낸 저력을 발휘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는 인종도 초월했다. 백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흑인 유권자의 30% 가까이도 출구조사 분석결과 샌더스에 동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CNN과 AP통신 등은 “샌더스가 ‘TPP는 미국인 노동자에게는 재앙이었다’고 선전하면서 좋은 결과를 미시간에서 얻었고, 중서부 공업지대인 오하이오, 일리노이에서도 더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미시간에서 승리한 이유가 바로 백인의 분노라고 해석했다. 자유무역을 하면서 자신의 일자리가 날아갔다고 여기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이번 경선에서 분노의 한 표를 던지면서 판세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분노하는 백인’에 주목했다.
중국 군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이들은 대외(對外) 관계에까지도 역할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이번 중·일 갈등과 천안함 사태는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악화된 주변국과의 관계 및 실추된 중국의 이미지를 어떻게 다시 복구하느냐로 귀결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당사국으로서 일본은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 및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이번 중·일 갈등에서 나타난 중국의 태도는 지난 15년 동안 중국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화평굴기(和平?起) 또는 화평발전(和平發展)과는 상충(相衝)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은 적극적으로 주변국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마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독단성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이용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왔으며, 따라서 중국은 이들 주변국들과의 관계개선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중·일 갈등으로 중국은 평화적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중국의 선전효과는 완전히 상쇄되었고 오히려 중국의 부상을 폭력성, 또는 적어도 독단성과 동일시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중·일 갈등에서 나타난 중국의 대외전략 변화가 한중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대외전략의 변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우려를 표명해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미국의 침체가 시작된 이후로 중국 대외전략의 변화는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고, 우리는 그것이 앞으로의 미·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 왔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자국의 부상과 위상강화에 대한 상대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외교적 독단성을 강화해 가고 있다. 그 예로 중국은 천안함 사건과 중·일 갈등에서 한중 관계에서 우리가 대비해야 할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요소들을 미리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중·일 갈등에서 나타난 중국의 태도는 지난 15년 동안 중국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화평굴기(和平?起) 또는 화평발전(和平發展)과는 상충(相衝)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은 적극적으로 주변국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지난 6월 김부겸 국무총리의 ‘규제챌린지’ 발언 이후 상황이 급물살을 탔고, 10대 이하 이용자들이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마인크래프트’가 셧다운제 탓에 오직 한국에서만 성인 게임이 될 위기에 처하자 셧다운제 폐지 여론도 전에 없이 커졌다. 그렇게 10년을 버텨오다 고작 2개월여 만에 판세가 완전히 뒤집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갑론을박(甲論乙駁)의 ‘10년 전쟁’ 와중에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부모’의 역할론이다. 미성년 자녀의 양육 방식에 절대적 권한과 책임이 있는 부모의 존재는 이런 일련의 논박(論駁) 과정에서 이상스러울 정도로 배제돼 있었다. 그저 지나치게 개인 자유권을 침해하는 권위주의 정책이라는 정도의 비판만이 반복됐을 뿐이다. 그런 부모의 권한과 자리를 국가 등 공적개념(公的槪念)이 차지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도 보기 드물었다. 필자는 게임 셧다운제가 처음 시행되던 당시 한 게임 업계 관계자를 만나 ‘미성년 자녀들 부모의 의견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전혀 뜻밖의 답을 듣게 됐다. 업계 종사자로서 셧다운제로 명확한 타격을 입을 것은 알고 있지만,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도 셧다운제에 찬성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먹고사느라 바빠 솔직히 아이들 생활 하나하나까지 다 신경 쓰기가 어렵거든요. 물리적으로 안 되는 건 아닌데 심정적으로 지쳐요. 더 큰 이유는, 그러다 아이가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게 다 나와 아내, 부모 책임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거운 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국가가 나타나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규제해서 너희 부모들이 힘들이지 않아도 되게끔 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누가 반대하겠어요. 그러다 혹 뭐가 또 잘못되더라도 그건 이제 국가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거든요. 난 아무 잘못이 없게 되죠. 이러니까 부모들도 이게 사실 우리 권한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이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 조용히들 있는 겁니다.”
그러다 지난 6월 김부겸 국무총리의 ‘규제챌린지’ 발언 이후 상황이 급물살을 탔고, 10대 이하 이용자들이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마인크래프트’가 셧다운제 탓에 오직 한국에서만 성인 게임이 될 위기에 처하자 셧다운제 폐지 여론도 전에 없이 커졌다. 그렇게 10년을 버텨오다 고작 2개월여 만에 판세가 완전히 뒤집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데 많은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간 견해차 때문이다. 우리는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데 있어 상호군수지원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수준으로 보는 데 비해, 일본은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2010년 12월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일본 총리는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를 파견하는 방안을 한국 측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앞서 2002년 한반도 유사시를 가정해 미군과 공동으로 한반도 내 자국 피란민 소개작전 내용을 담은 ‘작전계획 5055’를 수립했다. 일본이 외교채널을 통해 자위대 파견 문제를 제기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돌고 있다. 김 국방장관의 방일 취소도 결국 ‘이 문제를 협상테이블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 관계자는 “PKO 활동과 관련한 상호군수지원을 한답시고 자위대를 부산항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지 않으냐”며 “이 대목에서 김 장관의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거류민 보호’를 빌미로 1개 대대를 이끌고 한양 도성에 진입했으며, 이를 계기로 확대된 조선 내정간섭은 결국 대한제국의 국권 찬탈로 이어졌다. 허문도(許文道)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김정일 사후 우리 민족은 통일기로 접어들었다”며 “지금 일본과 군사협정을 맺는다면, 일본이 한국 통일을 떠받치는 ‘평화무력’의 일부라는 구실이 남게 된다. 이것은 한국 통일 주도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통일과정에 군사협정 등의 결과로 일본의 군사력이 어떤 형태로든 끼어들게 된다면 북한은 친일파 숙청 때처럼 통일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할 것”이라며 “민족통일의 동력원(動力源)은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고, 통일 언저리에 일본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것처럼, 일본은 문명의 외톨이로 문명적 의리를 모르는 나라로서 한반도 분단에도 설명 책임(accountability)이 있는 나라”라며 “미국은 판단착오로 패전국 일본에 메시아적 호의를 쏟아부었지만, 일본은 도의(道義)와는 담을 쌓고 대국의 버스에만 올라타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 왔기 때문에 한일 군사협정 이후 한중 갈등관계를 만든 뒤 중국으로 기울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데 많은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간 견해차 때문이다. 우리는 군사협정을 체결하는 데 있어 상호군수지원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수준으로 보는 데 비해, 일본은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량은 자연스레 왕권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만 주희는 왕권을 극도로 부정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삼대(三代) 운운할 때 담긴 현실정치적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점은 훗날 조선의 주자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기존의 조선 성리학에만 매몰될 경우 이처럼 숨어 있는 코드를 놓칠 수밖에 없다. 당쟁 발발 이후부터만 보자면 조선의 동인(東人)이나 남인(南人)은 대체로 진량과 비슷한 입장이었고, 서인 노론 벽파는 주희를 견결히 고수했다. 그 정점에 ‘조선의 주자’ 송시열이 있는 것이다. 그해 9월 주희는 다시 진량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나라 고조의 경우 사사로운 의도의 정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태종 마음의 경우에는 나는 그의 한 생각조차 인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만 인의(仁義)를 빌려서 사사로움을 행했지만… 1500년간 바로 이와 같이 가만히 있기만 했기 때문에 단지 새는 곳을 막고 해진 곳을 대충 얼기설기 기워가면서 시일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소강(小康)이 없지는 않았으나 요순(堯舜)·삼왕(三王)·주공(周公)·공자가 전한 도(道)는 하루도 천지간에 시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춘추시대 이후 1500년 중국사, 특히 황제들에 의해 통치되어온 역사의 시간 전체에 대한 부정이자 황제권(皇帝權)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당연히 주희가 살던 남송의 황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주희의 잣대는 오직 하나, 도덕(道德)이었고 그 도덕의 올바름 여부에 대한 판단의 권한은 임금이 아니라 도학자(道學者)인 자신에게 있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치의 주체가 현실 속의 권력자인 임금이 아니라 도를 체현한 도학자에게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들이 도통(道統)을 강조한 의도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런 도통 현창(顯彰)은 고스란히 조선에도 이어져 문묘(文廟) 종사를 둘러싼 정치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희의 잣대는 오직 하나, 도덕(道德)이었고 그 도덕의 올바름 여부에 대한 판단의 권한은 임금이 아니라 도학자(道學者)인 자신에게 있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치의 주체가 현실 속의 권력자인 임금이 아니라 도를 체현한 도학자에게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들이 도통(道統)을 강조한 의도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국 베이징 《신징바오(新京報)》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총서기는 지난해 12월 31일 베이징에서 열린 당 정치국 집단학습에서 “개혁개방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임무로 반드시 대(代)에 걸쳐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 총서기는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오늘의 중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내일도 없다”며 “개혁개방 과정에서 생기는 모순은 개혁개방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진핑의 개혁개방 가속화 의지는 최근 문제가 된 중국 광둥성의 유명 잡지 《난팡저우모(南方週末)》 파업 사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당국의 검열에 반발해 지난 1월 6일 시작된 이 잡지의 파업 사태는 《난팡저우모》 기자들이 광둥성 당위원회와 협상 끝에 파업을 풀어 일단락됐다. 중국 내외에서는 이 사건이 ‘시진핑 총서기의 개혁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라고 여기며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유심히 지켜봤다. 결국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의 6세대 정치인 중 선두주자인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당서기를 소방수로 보내 “광둥성 정부가 기사에 대해 사전검열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태를 매듭지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시진핑 총서기가 보인 개혁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 총서기가 향후 자신의 집권 10년 동안 중국의 지식인들과 서구(西歐)가 요구하는 정치·경제 개혁을 제대로 실시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분석은 그것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정치에 세 개의 정파가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바다. 하지만 시진핑이 속한 태자당(太子黨), 공청단(共靑團), 그리고 상하이방(上海邦) 등이 경제노선을 두고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이나 덩샤오핑(鄧小平) 시절처럼 목숨을 건 정쟁을 벌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바로 이것이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전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이 다른 점인데, 경제개혁을 위한 정치동력은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이미 사라졌고, 따라서 권력구조 내부의 동력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최근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을 통해 권력투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다툼은 누가 더 많이 권력을 갖느냐의 단순논리를 넘지 않았다.
중국 베이징 《신징바오(新京報)》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총서기는 지난해 12월 31일 베이징에서 열린 당 정치국 집단학습에서 “개혁개방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임무로 반드시 대(代)에 걸쳐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 총서기는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오늘의 중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내일도 없다”며 “개혁개방 과정에서 생기는 모순은 개혁개방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런던 테러는 트럭이 아니라 승용차, 현대자동차의 투싼이었다. 차량은 영국 현지 자동차 렌트업체,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의 차량임이 밝혀졌다. 해당 업체에서는 소형 SUV를 제공하며 렌터카 지점에 따라 현대 투싼, 토요타 RAV4 등을 렌트할 수 있다. 해당 업체에서는 볼보와 랜드로버사의 SUV도 렌트하는데 동일기간 렌트비용이 토요타나 현대차에 비해 비싸다. 테러범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테러에 사용할 차량을 굳이 고가의 렌트비를 주고 대여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 현지에서 현대차는 2륜모델과 4륜모델의 휠을 구분해서 제공하는데 2륜에는 17인치 휠을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4륜모델은 19인치 휠을 장착해 판매한다. 테러에 사용된 차량은 장착된 휠이 17인치인 것으로 보아 2륜모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생한 테러들의 양상을 보면 트럭과 같은 대형 화물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차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차종을 활용해서 유사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예비군과 정보당국 등에서는 차량 폭탄 테러 등을 노리는 차량을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있다. 의심스러운 차량을 구분하는 방법을 담은 매뉴얼 구성 등이 시급해 보인다. 앞서 프랑스 니스 테러의 테러범도 19톤 트럭을 다른 지역에서부터 렌트한 뒤 니스로 몰고 왔으며, 이번 영국 의회 테러에서도 차량은 렌트한 것이다. 렌트한 차량이 아닐 경우에는 대부분 탈취한 것이다. 베를린 트럭 테러는 본래 트럭의 운전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조수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당초 계획했던 이동경로를 타고 가지 않았다. 스톡홀름의 경우도 배달을 하던 트럭을 테러범이 탈취한 뒤 테러를 일으켰다. 일부 테러범은 자신이 평소 사용하던 차량을 가지고 돌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 테러범은 본인 소유의 차량이 없는 인물들이 많다. 또 테러범들은 평소 해당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외부인이거나 외국인 등이 해당 국가로 이민 혹은 취업한 경우다. 테러범들은 어떤 경로로든지 차량을 구해야 한다. 차량을 구하는 과정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반드시 차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차량을 구하는 과정을 법적 절차 등을 통해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
테러범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테러에 사용할 차량을 굳이 고가의 렌트비를 주고 대여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 런던 테러는 트럭이 아니라 승용차, 현대자동차의 투싼이었다.
아마존닷컴의 설립자인 제프 베조스(Jeff Bezos)가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했다. 그의 자산은 지난 7월을 기준으로 100조원($90 billion, 발표)이다. 수 년 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를 제쳤다. 제프 베조스는 1964년 1월12일 제프리 요한슨과 테드 요한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18세, 어머니는 16세에 불과했다. 10대 부모는 적은 돈을 들고 멕시코로 떠났다. 그의 생부는 시급 $1.25를 받는 직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렸으나 부부간에 다툼이 잦았고, 술버릇까지 좋지 않았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생후 17개월인 아들을 데리고 이혼했다. 이후 그녀는 베조스가 네 살 때 쿠바에서 넘어온 미구엘 베조스와 재혼을 했고, 그가 베조스를 아들로 입양했다. 제프 베조스는 유년 시절 조부모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는 “텍사스 근교의 조부모 집에서 풍차를 고치고, 소에 백신 주사를 놓고, 저녁이면 둘러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지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 베조스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그는 순탄치 않은 출생으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보여야 했다. 야망, 지식에 대한 열망, 가차없는 매정함은 이때부터 생겼고, 이것이 성공에 대한 강렬한 불씨가 됐다”고 썼다. 베조스는 고등학교 때 ‘올 A’ 학점을 받았고, 프린스턴대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물리학자를 꿈꿨다. ‘아마존’에 대한 사업 구상을 한 것은 뉴욕의 한 증권가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베조스는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웹 사용자가 매년 2,300% 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산업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고 못했었다. 수 백만권이 넘는 책을 온라인으로 팔아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번득 떠올랐다”고 했다. 베조스의 나이 서른, 결혼한 지 1년 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안정적 직장을 때려치우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남편에게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아마존닷컴의 설립자인 제프 베조스(Jeff Bezos)가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했다. 수 년 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를 제쳤다.
섣불리 트럼프 당선을 확신한 한국 여론이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은 바로 카운티(county)들이었다. 미국 대선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州·state)별 개표 상황만 볼 게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카운티들의 개표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개표는 카운티들이 각각 하고, 따로 보고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라는 건 사실상 하나하나가 나라다. 대한민국 국토보다 훨씬 큰 주들이 다수 있을 정도다. 이러니 한 주 안에도 여러 도시가 있고, 또 도심지와 외곽 지역으로 나뉜다. 따라서 카운티에 따라 표의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고소득층이 밀집된 지역이 있는 반면, 저소득층이 밀집된 곳이 있고, 성향·직업·학력·인종 등 기준에 따라 표심(票心)이 세분화될 수 있다. 바이든이 가장 먼저 뒤집은 경합주는 위스콘신이었다. 위스콘신 개표 상황이 81%였을 때만 하더라도, 이미 트럼프가 4%p를 앞서고 있었다. 주내(州內) 카운티들의 상황을 모르는 대다수 한국인이 트럼프의 경합주 압승을 예측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 내 전문가들은 아직 바이든의 표 가운데 상당수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강력한 텃밭인 밀워키, 민주당 우세 경향을 보여온 그린베이 등의 카운티에서 아직 사전(事前)투표 개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개표를 시작하며, 역전극이 이루어진 것이다. 위스콘신을 시작으로 경합주들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미시간은 디트로이트 등의 인구 고밀집 민주당 지역에서 사전투표들이 집계되며 빠른 속도로 뒤집혔다. 사전투표의 4분의 3 이상이 바이든 표라고 분석되었던 펜실베이니아 역시 개표 후반 우편투표가 집계되기 시작하면서 바이든이 트럼프를 추월하게 된다.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인 딥사우스(Deep South)의 조지아마저 민주당 강세 지역 풀턴 카운티와 드칼브 카운티 등의 표가 집계되며 바이든이 역전극을 이루어낸다. 네바다·애리조나마저 넘어가자, 이제야 사람들은 바이든의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민주당의 강력한 텃밭인 밀워키, 민주당 우세 경향을 보여온 그린베이 등의 카운티에서 아직 사전(事前)투표 개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개표를 시작하며, 역전극이 이루어진 것이다. 위스콘신을 시작으로 경합주들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대선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도 제법 만든다. 크루즈가 루비오를 겨냥해 내보낸 광고에는 과거 〈성적인 욕망〉 〈채울 수 없는 욕망〉 〈금지된 죄악〉 등의 에로영화에 출연한 에이미 린지라는 여성이 등장해 논란이 됐다. 크루즈 캠프는 즉각 광고를 내렸는데, 이에 반발한 린지는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루비오는 ‘미국에 다시 아침을’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내보내면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보여줬는데, 이 도시가 캐나다 밴쿠버여서 망신을 당했다. 루비오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84년 선거 때 사용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던 ‘미국에 새 아침을’이란 광고를 흉내 냈는데, 본전도 못 챙겼다. 젭 부시 지지단체는 영국의 주식시장 화면을 잘못 사용했고, 이민자 반대 정책을 내세운 트럼프는 미국의 국경 대신 모로코 난민 모습을 내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국 정치에서는 웬만해선 ‘거짓말쟁이(Liar)’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 경선을 보면 아주 쉽게, 자주 이런 용어들이 쏟아졌다. 트럼프는 크루즈를 “불안정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큰 거짓말쟁이”라고 했고, “정신질환자”라는 표현까지 썼다. 루비오의 키가 자신보다 작은 것을 비꼬듯 ‘꼬마 마코(Little Marco)’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젭 부시는 트럼프를 ‘조작의 달인’이라고 부르며 몰아붙였다. 그러나 트럼프와 맞붙은 후보 중에 크게 성과를 얻은 측은 별로 없다. 루비오는 트럼프 방식으로 트럼프를 비난하다 최근 “트럼프를 인신공격한 것은 잘못이었다”며 꼬리를 내렸다. 루비오는 유세에서 트럼프를 겨냥해 “손 작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했었고, 이에 트럼프는 TV토론 때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이게 작아 보이냐. 이게 작다면 다른 어딘가도 작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나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끄집어내며 반박한 것이다. 이런 공방의 여파로 한 인터넷 매체는 한때 트럼프가 자신의 성기를 노출한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고 보도했다가 이를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트럼프를 사칭한 한 네티즌이 가짜 사진을 올린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막말’도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점잖은 워싱턴 정치에 익숙한 초선 연방상원 의원에게는 버거웠던 모양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크루즈가 루비오를 겨냥해 내보낸 광고에는 과거 〈성적인 욕망〉 〈채울 수 없는 욕망〉 〈금지된 죄악〉 등의 에로영화에 출연한 에이미 린지라는 여성이 등장해 논란이 됐다. 크루즈 캠프는 즉각 광고를 내렸는데, 이에 반발한 린지는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 기자가 만나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이 모든 논의의 당사자, 바로 위안부 생존자다. 일본에는 한 분의 한국인 위안부 출신 생존자가 살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외부로 알려진 위안부 생존자는 한 명이라고 해야 한다. 더 계실 수도 있지만 과거를 밝히지 않고 살고 계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72년, 한국인 위안부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위안부 문제를 증언한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살다가 1991년에 돌아가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에 살고 계신 송신도 할머니는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재 입원 중이다. 특별한 병이라기보다는 노환 때문이다. 심장이 안좋아져 입원했는데, 입원 후에 더 몸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때 치매 증세까지 나타났지만, 현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재활 중이라고 한다. 1922년생, 벌써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무리도 아니다. 할머니 대신 양징자 대표를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하 전국행동)의 공동대표인 양씨는 송 할머니 곁을 20년 넘게 지켜 왔다. 양 대표에게서 송 할머니가 살아온 길을 들을 수 있었다. 양 대표와 할머니는 1992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양 대표는 ‘종군위안부 우리 여성 네트워크’(위안부 네트워크)라는 모임에서 활동 중이었다. 여기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우리 동네에 위안부 출신 여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연락한 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제보였기 때문에 단체에서는 피해자로 추정되는 분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책을 쓰기도 한 가와다 후미코 씨가 개인적으로 할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와다 씨에게 “조선 여자와 변호사가 함께 찾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조선 여자’가 재일교포 양징자씨였다. 30대 중반의 여자 변호사와, 30대 후반의 양 대표가 방문하자 할머니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흥’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조선인 여성을 기대했으리라. 2박3일 동안 이어진 할머니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일본에는 한 분의 한국인 위안부 출신 생존자가 살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외부로 알려진 위안부 생존자는 한 명이라고 해야 한다. 더 계실 수도 있지만 과거를 밝히지 않고 살고 계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일본의 도쿄만(東京灣)에 정박한 미해군의 미조리 호(USS Missouri)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되고, 연합군이 점령할 지역을 자세히 밝힌 태평양 미육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일반명령 제1호’가 공표되었다. 거기에는 북위38도선 이남의 한국은 미군이 점령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항복조인식과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에 관한 뉴스는 국내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자로 된 하지 사령관의 두 번째 포고문이 9월 5일에 다시 한국의 중요 도시에 뿌려졌는데, 그것은 나흘 전의 포고문보다 한결 구체적으로 진주군의 목적과 한국인들에 대한 요구사항을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군의 진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일반국민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포고문은 “어떠한 개혁도 서서히 진행한다”고 언명하고, “국민에 대한 포고나 명령은 현존하는 제기관을 통하여 공표되며…”라고 하여 우선 현상유지 정책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반하는 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 하지 사령관의 이러한 포고는 8월 29일에 맥아더의 전보를 통하여 알게 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북한상황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와 8월 31일부터 직접 연결된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의 무전 내용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와 고즈키 사이에는 9월 4일까지 닷새 동안에 무려 40회 이상의 전신이 왕복했다.4) 고즈키는 9월 1일에 한국에서는 “목하의 혼란상태를 악용하여 평화와 질서를 교란시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을 선동하는 자들이 횡행하고 있다”고 타전한 데 이어, 9월 3일에는 인천항의 300여 하역노동자들이 임금과 식료품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고 미군의 한국상륙은 아마도 적색 노동조합의 사보타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한국인 폭도들의 일본인 경찰관에 대한 폭력행위 및 탄약탈취와 빈발하는 파업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그러면서 고즈키는 자기의 입장은 극히 곤란하며, 미군의 도착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다고 타전했다. 하지는 고즈키에게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질서를 확보하고 기존의 통치기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5)
이튿날 일본의 도쿄만(東京灣)에 정박한 미해군의 미조리 호(USS Missouri)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되고, 연합군이 점령할 지역을 자세히 밝힌 태평양 미육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일반명령 제1호’가 공표되었다. 거기에는 북위38도선 이남의 한국은 미군이 점령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중에도 밀라노의 성장은 빨랐다. 자치도시들이 일어선 배경은 상업의 발전이었고 상업은 본래 밀라노의 강점이었다. 밀라노는 고대 이래 로마와 알프스 이북 지역 간 교역 루트의 연결점이었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전초지였다. 밀라노의 위치를 지도로 한번 확인해 보라. 도시 남쪽의 포강이 서로는 토리노, 동으로는 만토바, 페라라를 거쳐 아드리아에 이른다. 북으로는 마조레 호수와 코모 호수가 물길로 알프스를 지나고, 두 호수에서 각각 발원한 티치노강과 아다강이 밀라노의 좌우를 감싸고 흘러 포강에 합류한다. 밀라노가 항구가 아니면서 항구 이상의 이점이 있고 롬바르디아가 해안선이 없으면서 사통팔달의 물길로 오히려 불편이 없는 것이다. 사실 물길이 아니라도 북에 가로놓인 알프스에는 고대부터 발달한 고갯길들이 여럿 있어 교역은 물론 대형 ‘침입’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음은 한니발 이래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다. 자치도시들 중에 제일 먼저 군주국으로 재정비하고 대외 확장을 노린 것도 밀라노였다. 일찍이 13세기 중반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은 숙적 델라토레 가문을 누르고 군주제를 확립해 비스콘티 시대(1277~1447)를 열었다. 특히 잔갈레아초(Gian Galeazzo Visconti·1351~1402) 시절의 밀라노는 해상무역에 치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반도 남단의 섬 시칠리아 왕국을 빼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최강이었다. 잔갈레아초는 이 세상에 돈 버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동으로 베로나를 점령, 파도바를 위협했고 남으로는 아펜니노를 넘어 피렌체에 육박했다. 이 두 공화국은 이때부터 큰돈을 투자해 좋은 용병대장 구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서구 최고의 화려함이라던 파비아의 비스콘티(Castello Visconteo) 궁에 살며, 호사스럽기로 교회 중 최고라는 밀라노 두오모를 착공하고 아름답기로 수도원 중 최고라는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을 지어 오늘 우리에게 즐거운 볼거리들을 남겨주었다. 1385년 공작(公爵) 자리도 챙겨 밀라노를 일찌감치 공작령(Ducato)으로 유럽 지도에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자치도시들 중에 제일 먼저 군주국으로 재정비하고 대외 확장을 노린 것도 밀라노였다. 일찍이 13세기 중반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은 숙적 델라토레 가문을 누르고 군주제를 확립해 비스콘티 시대(1277~1447)를 열었다. 특히 잔갈레아초(Gian Galeazzo Visconti·1351~1402) 시절의 밀라노는 해상무역에 치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반도 남단의 섬 시칠리아 왕국을 빼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최강이었다.
또한 세종은 명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자 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다. 태종은 세종에 대해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데 항상 밤새워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독서를 금지시켰는데도 내 큰 책들을 모두 청해 가져갔다.”(《세종실록》)고 했다. 중국으로부터 구해 온 서적들도 모두 탐독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익히 파악하고 있던 세종은 수시로 명에 사행을 보내 서적, 약재, 악기, 화약 등 조선이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들을 확보하여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토대를 마련했다. 일례로 세종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의 발명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이 읽은 책에는 원대로부터 고려에 반입된 서적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는 원대에 중국에 도입된 아랍의 이슬람 문명에 관한 책들과 이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기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몽고 왕조인 원은 한족(漢族)을 피지배층으로 하고, 아랍인들을 제2계층의 신분으로 하여 행정을 그들에게 맡겼는데 당시 대몽고 제국하에 있던 이슬람권은 천문학, 수학, 과학, 건축 등이 고도로 발달했었다. 명은 원을 접수하면서 이러한 이슬람 문명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세종은 그것을 명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은 동래현(東萊縣)에 재주가 뛰어난 기술자로 이름이 난 천민(賤民) 장영실(蔣英實)을 발탁한 후 우선 명에 유학시켰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이슬람 문명의 천문학과 과학을 접할 수 있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본 것을 모방한 것으로 완전자동 물시계는 아니었지만 이 공로를 인정해 세종은 그를 노비 신분에서 면제해 주고 곧 이어 정5품 벼슬을 제수했다. 이후 장영실은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해 천문관측대를 건설하고 세종 14년에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渾天儀) 등 최첨단 과학기기들을 고안해 설치했다. 이어서 세계 최초의 독자적인 발명품인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와 자동물시계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어 냈다.
중국으로부터 구해 온 서적들도 모두 탐독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익히 파악하고 있던 세종은 수시로 명에 사행을 보내 서적, 약재, 악기, 화약 등 조선이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들을 확보하여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토대를 마련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다.
이렇게 좌우뇌의 성향이 다른데 그저 막연하게 책 읽고, 토론하고, 글쓰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해서 논술 실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많은 독서, 논술 교육을 보면 아이들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이를 치료하겠다는 돌팔이 의사와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밥만 많이 먹으면 다 낫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안 아프게 하는 약을 주어야 합니다.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 아이가 왜 머리가 아파하는지를 알고 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뇌 아이가 부족한 것은 좌뇌의 사고력입니다. 좌뇌를 보완해서 사고력을 키워 주어야 합니다. 좌뇌 아이에게는 우뇌를 보완해서 창의력을 키워 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냥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입시 논술에서도 글쓰기보다는 글읽기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요 대학들의 논술문제가 주어진 제시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요약하는 부분의 비중이 높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글읽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다만 아이의 뇌 유형을 파악한 후 아이의 머리를 다차원적, 구조적, 창의적 사고교육으로 잡아 주면서 읽기, 토론, 쓰기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아이의 사고력과 창의력을 어떻게 잡아 주면서 읽기, 토론, 쓰기가 진행되는지를 한번 알아봅시다. 우뇌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책을 읽혀야 할까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사고구조를 찾아낸 후 그 사고구조로 다시 책을 읽게 하는 다차원적 읽기(Multi-dimensional reading)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다차원적 사고가 글읽기에 적용된 것입니다. 이 방법을 아이 공부에 적용해 보려면 부모는 아이와 함께 책을 같이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때 부모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가면서 ‘이게 무슨 소리지?’ ‘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질문해 주어야 합니다. 정말 아이가 귀찮아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왜, 왜, 왜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저자가 어떤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를 반드시 물어보고, 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때 아이는 분명히 문장을 외워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보는 순간 외워 버립니다. 문장에 나와 있는 단어를 쓰지 말고 자신의 말로 표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 아는데 자꾸 왜 그러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이들은 직관적으로는 이해했지만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완전히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그 때서야 저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자의 사고구조를 파악했으면 다시 저자의 사고구조, 즉 저자의 렌즈를 끼고 책을 읽게 해야 합니다. 그 의미가 완전히 통하는지 말입니다.
대학입시 논술에서도 글쓰기보다는 글읽기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요 대학들의 논술문제가 주어진 제시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요약하는 부분의 비중이 높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글읽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다만 아이의 뇌 유형을 파악한 후 아이의 머리를 다차원적, 구조적, 창의적 사고교육으로 잡아 주면서 읽기, 토론, 쓰기를 진행해야 합니다.
나가사키는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1570년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에 의해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지가 되면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다채로운 역사의 고장이 된다. 나가사키는 근세 시기 일본의 대유럽 교류 창구이자 대중국 무역 중심지로서, 에도시대 260년의 발전 과정을 축약하고 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는 초기 기독교 전래기에 일본에서 가장 기독교가 융성했던 곳이다. 스미타다는 1563년 그의 사위와 함께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적극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1567년 예수회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기독교 포교가 시작된다. 알메이다는 히라도(平戶)에 일본 최초의 서양 의술 병원을 세운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569년에는 빌렐라 신부에 의해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자에게 세례가 행해지고 교회당이 세워지는 등 교세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하는 1571년 시점에 나가사키에는 이미 1500명을 헤아리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으로 예수회의 입지가 강화되고 교세(敎勢)가 공고해지자, 1580년 오무라 가문은 나가사키의 관할권을 아예 예수회에 기증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가(佐賀)의 류조지(龍造寺) 가문과 사쓰마(薩摩)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규슈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오무라 가문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예수회를 활용코자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스미타다가 선교사들에게 빌린 채무를 갚지 못해 관할권을 넘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입항세(入港稅) 징수권과 재판권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나가사키 및 인접 모기(茂木)에 대한 관할권이 예수회로 이관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로마의 예수회 고문서관에 보관된 스페인어 문서에 기증 기록이 있으며 일본 측 사료에도 그를 뒷받침하는 정황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의 주권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만, 나가사키는 한때 (이론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령(敎會領)’이었을 정도로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다.
1567년 예수회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기독교 포교가 시작된다. 알메이다는 히라도(平戶)에 일본 최초의 서양 의술 병원을 세운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569년에는 빌렐라 신부에 의해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자에게 세례가 행해지고 교회당이 세워지는 등 교세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한마디로 단순히 무력(武力)에서만 항우를 이긴 것이 아니라 장차 임금이 될 수 있는 임금다움[德]이라는 면에서 이미 항우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제 항우는 어떤 면에서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점에서 제왕학의 교과서인 《논어》는 생생한 나침반을 제공한다. 반고의 《한서(漢書)》 항적전(項籍傳)이다. 항우(項羽)로 더 알려져 있는데 우(羽)는 항적의 자(字)다. 〈적(籍)은 어릴 적에 글을 배웠으나 다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접었고 검술을 배웠으나 역시 다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접었다. (작은아버지) 항량이 그에게 화를 내니 적이 말했다. “글은 성과 이름만 적을 줄 알면 충분합니다. 검술은 한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라 배울 필요가 없으니 만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자 할 뿐입니다.” 이에 량은 그의 뜻이 기이하다[奇]고 여겨 마침내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적은 크게 기뻐했으나 그 (병법의) 취지만 대략 알고서는 이 역시 끝까지 배우지는 않았다.〉 항우의 이 같은 모습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용맹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동시에 공자로부터 배우기를 싫어한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던 자로(子路)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논어》 양화(陽貨)편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여섯 가지 좋은 말과 그에 따른 여섯 가지 폐단을 들어 보았느냐고 묻고서 이렇게 말했다. “어짊[仁]을 좋아하기만 하고 (그에 필요한)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어리석게 된다[愚]는 것이다. 사람을 평하고 논하기[知=知人]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쓸데없는 데 시간과 노력을 탕진하는 것[蕩]이 된다. 신의[信]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친다[賊]는 것이다. 곧은 것[直]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너무 강퍅해진다[絞]는 것이다. 용맹[勇]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러워진다[亂]는 것이다. 굳센 것[剛]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뭐든 제 마음대로 하게 된다[狂]는 것이다.”
항우의 이 같은 모습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용맹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동시에 공자로부터 배우기를 싫어한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던 자로(子路)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한마디로 단순히 무력(武力)에서만 항우를 이긴 것이 아니라 장차 임금이 될 수 있는 임금다움[德]이라는 면에서 이미 항우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제 항우는 어떤 면에서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결국 독일 지멘스사의 이체와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가 최종 후보로 남았고, 엎치락뒤치락 피 말리는 경합을 벌이다 마지막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테제베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차량 평가에는 교통개발연구원 외에 한국전기연구소, 한국기업평가, 세종합동법률사무소, 미국의 벡텔사 등이 참여했다. 최강윤 박사는 “테제베가 최종 선정된 것은 전체 평가 요소 중 비중이 30%나 되는 운영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의 신칸센이나 독일의 이체는 시속 300km 고속열차를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반면, 프랑스의 테제베는 시속 300km를 안전하게 운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최강윤 박사는 이 위탁 과제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1992년 7월 고속철도공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7년 12월까지 5년여 동안 근무하다 현재의 한국철도기술연구원으로 왔다고 한다. 이 연구원은 철도 분야의 기술개발 및 정책연구를 통해 철도교통의 발달과 철도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1996년 설립된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고속철도 차량이 테제베로 결정된 후 제조사인 알스톰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국내 제조사인 현대로템과 함께 KTX2인 ‘산천’ 개발을 주도했다. 최 박사는 “1995년 6월부터 1996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 알스톰사 사무실에서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저희 연구원을 비롯해 시설공단과 코레일, 차량 제조회사 등에서 1000명이 넘는 기술진이 프랑스에서 차량, 전차 제어, 열차 제어에 관련된 기술이전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죠. 기술이전은 알스톰사와 프랑스철도청(SNCF)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엔지니어들이 강사로 와서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우리 기술진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총 1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자가 교재였고, 모두 영어로 돼 있었습니다. 강좌도 50개가 넘었어요. 강사들은 모두 성심성의껏 강의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렇듯 아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100% 소화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귀국 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며 스스로 깨쳐 가는 방법밖에 없었지요.”
고속철도 차량이 테제베로 결정된 후 제조사인 알스톰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국내 제조사인 현대로템과 함께 KTX2인 ‘산천’ 개발을 주도했다. 최 박사는 “1995년 6월부터 1996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 알스톰사 사무실에서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안개의 도시 춘천으로 가는 열차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따와 청춘열차라고 부른다. 오전과 오후 사이의 시간에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관광을 떠나는 어르신이 주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부담 없는 나들이 도시인 것이다. 울긋불긋 환절기 옷을 입고, 일행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열차에 오르는 그들. 청춘열차를 통해 젊음이라는 천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오정희 작가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춘천으로 갔다. 대도시와 소도시를 오가는 동안 세월은 빨리 갔고 열차는 가까워졌다. 90년 한옥이 관광명소가 된 춘천 고택 옆에 작가가 사는 아담한 집이 있다. 마당 곳곳 서 있는 묘목이 집의 나이를 짐작게 한다. 전구 같은 가을빛에 보랏빛 가지가 바구니에 널린 채 마르고 있다. 빨간 플라스틱 대야는 작은 연못 같다. 그 안에는 부레옥잠이 아기자기 담겨 있다. 오정희 작가는 작은 키에 아담한 체형이고 눈빛은 맑게 빛나 소녀 같은 분위기다. 거기에 호호백발은 어쩐지 애교스럽다. 그런데 씩씩한 목소리는 강단이 있다. 소녀 같은 이미지는 목소리에서 어른으로 변한다. 어린 소녀에서 중년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쓴 소설 속의 여자들도 저렇게 씩씩했던가! 오정희 작가는 문학 평론가의 애찬을 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아름다운 자수가 연상되는 문체의 미학과 억압된 여성의 내면을 다양하게 형상화한 장점을 꼽을 수 있다. 여성작가는 가정생활과 병행하며 어떻게 글을 썼을까. 작가는 ‘나는 우렁각시’라고 스스로를 표현했다.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만 글을 썼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며 무수히 스쳐가는 마음을 밥을 짓듯 지어냈다. 가족을 챙기는 것이 항상 먼저였다는, 너무나 아내적이고 너무나 엄마적인 그녀는 사후에 문학관도 시비도 다 부질없단다. 무엇이라도 자기 이름을 높일 만한 일을 하면 무덤에서 나오겠다고 말했다. 아내가 무덤에서 나올까 봐 두려운 남편은 그러자고 약속했다. 집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선물로 준다는 창가 수채화를 스마트폰에 찰칵!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만 글을 썼기 때문이다. 오정희 작가는 문학 평론가의 애찬을 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아름다운 자수가 연상되는 문체의 미학과 억압된 여성의 내면을 다양하게 형상화한 장점을 꼽을 수 있다. 여성작가는 가정생활과 병행하며 어떻게 글을 썼을까.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 모두 큰맘을 먹고 모든 일 다 뒤로 미루고 모였습니다. 마침 외삼촌과 이모네 가족까지 다 와주었습니다. 사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고 먹고살기 힘들 때에는 각자 먹고살기 바빠서 이렇게 온 가족이 한꺼번에 모인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잖아요. 아무튼 많은 가족이 어머니 집에 다 모였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도 신이 나서 옥타브가 더 하이소프라노로 올라갔습니다. 오랜만에 자식 손주들이 다 모였다면서 자식과 손주들을 한 명씩 안아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떨리는 손과 몸을 보면서 자식들은 안타까워하며 오히려 자식들이 어머니를 더 꽉 안아드렸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날 밤 식사를 마치고 엄마 옆에 함께 누워 엄마의 계속적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엄마 눈을 바라보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엄마의 눈은 젊었을 때는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거든요. 아버지도 엄마의 맑은 눈이 예뻐 쫓아다녔고 엄마가 싫다고 해도 매일같이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사랑을 만들어갔거든요. “엄마. 지금 무슨 생각해?” “글쎄. 아무 생각도 없어.” “엄마.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가 언제야?” “응? 글쎄다 30대 때였을까 아니다 40대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돈도 없고 먹고살기도 바빠서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돈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 먹여 살리고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바빴지.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 그 다음부터가 오히려 더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니 아버지 쓰러지시고 병수발 하느라 정신없었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만 끔벅이며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세월만 보내던 아버지를 살리려고 안 해 본 것이 없고, 안 가본 곳이 없이 정신없이 살았는데, 니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시고 그냥 하늘나라로 떠나지 않았니. 그때는 참으로 야속하더라.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떠나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생만 시키고 떠나지 않았니.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그래도 말은 못 해도 옆에 숨만 쉬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었지. 아예 우리 곁을 떠나니까 너무 허전하더라.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지 않니. 지금 내 소망은 빨리 하늘나라로 가서 니 아버지 만나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어.”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 모두 큰맘을 먹고 모든 일 다 뒤로 미루고 모였습니다. 마침 외삼촌과 이모네 가족까지 다 와주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가족이 어머니 집에 다 모였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도 신이 나서 옥타브가 더 하이소프라노로 올라갔습니다.
조선의 다양한 왜구대책과 일본 국내정세의 안정으로 왜구는 조선에 투항하거나 무역으로 전환하면서 왜구의 침입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연안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왜구들은 약탈품의 시장으로서, 그리고 땔감과 물을 공급받을 중간 기착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기회가 있으면 수시로 조선 연안을 침략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잔존 왜구를 섬멸할 생각을 갖고 있었고, 특히 왜구의 본거지로 삼도왜 중에서도 대마도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마도인이 조선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서는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어린 나이에 도주가 되자 내분이 일어났다. 행정통제가 느슨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진 가운데 생활마저 어려워지자 이들은 다시 왜구로 변하여 조선의 연안을 침입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종에 양위하고 국방·안보문제를 직접 관장하던 상왕 태종은 차제에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출병에 앞서 태종은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전술적으로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요동으로 이동한 이 기회에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한다는 전술도 고려되었다. 1419년 잔존한 왜구들을 섬멸하기 위한 최후의 군사적 조치가 대마도 정벌이었던 것이다.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부르는 대마도 공략은 조선 초기 조-일 관계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선 측은 삼군도체제사(三軍都體制使) 이종무(李從茂)를 필두로 하여 병력 1만7000여 명과 병선 227척을 동원했다. 조선군은 초기에 대승을 거두고 도주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답이 없자 병력을 좌우 양군으로 나누어 각지를 토벌하였다. 대마도 병력의 반격도 격렬했다. 전투가 장기화하면서 조선은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일본 본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였다. 도주는 항복의사를 표시해 왔다. 양측의 교섭 결과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屬州)로서 경상도의 관할하에 두며 경상관찰사를 통해 서계를 올릴 것과, 앞으로 대마도로부터 오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등에 합의했다. 대마도주는 조선의 일부인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된 것이다.
조선의 다양한 왜구대책과 일본 국내정세의 안정으로 왜구는 조선에 투항하거나 무역으로 전환하면서 왜구의 침입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연안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왜구들은 약탈품의 시장으로서, 그리고 땔감과 물을 공급받을 중간 기착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기회가 있으면 수시로 조선 연안을 침략하였다.
유비는 징저우를 차지하고 방통(龐統)까지 영입한다. 지난날 수경선생(水鏡先生)이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갈량과 방통을 추천했는데, 두 사람을 모두 얻었으니 유비의 기쁨이 어떠했으랴. 이제 제갈량이 제시한 ‘융중대책(隆中對策)’에 의거하여 이저우를 차지한 후,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은 눈앞에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비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유장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유비의 생각은 천하의 여론과도 같은 백성들의 신임이 우선이었다. 이는 이저우의 주인인 유장을 아무 이유 없이 처단한 후 발생할 분란을 사전에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멍관(萌關)에 주둔한 유비는 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던 중 유비는 손권과 조조가 전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유비는 손권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유장으로부터 병력과 군량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이저우 내 반대파의 여론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유비는 이를 기회로 오랫동안 숨겼던 본모습을 드러내고 유장을 향해 칼을 뽑는다. 서기 211년. 유비는 방통의 세 가지 계책 중 중책(中策)을 받아들여 오랜 숙원인 이저우공략에 나선다. 자멍관에서 민심을 얻고 있던 유비는 즉시 남하(南下)하여 푸수이관(水關)을 탈취하고 성도(成都)의 목 줄기에 해당하는 뤄현(縣)을 공략한다. 이때 징저우의 제갈량으로부터 긴급하게 편지가 날아든다. 천문이 좋지 않아 참모의 신상에 나쁜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절대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제갈량과 경쟁관계인 방통은 유비에게 제갈량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며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설득한다. 방통이 타던 말이 속을 썩이자 유비는 자신이 타던 백마와 바꾼다. 그리고 방통은 좁은 길을 택해 공격에 나선다. 골짜기를 진군하던 방통은 지역 이름이 뤄펑포(落鳳坡)임을 알고 급히 후퇴를 명하지만 장임(張任)의 매복군(埋伏軍)이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비의 백마와 바꿔 탄 터라, 더더욱 유비로 오해받아 집중공격의 대상이 된다. 36세의 열혈남아 방통은 이렇게 허망하게 전사한다.
서기 211년. 유비는 방통의 세 가지 계책 중 중책(中策)을 받아들여 오랜 숙원인 이저우공략에 나선다. 자멍관에서 민심을 얻고 있던 유비는 즉시 남하(南下)하여 푸수이관(水關)을 탈취하고 성도(成都)의 목 줄기에 해당하는 뤄현(縣)을 공략한다. 이때 징저우의 제갈량으로부터 긴급하게 편지가 날아든다.
《호색일대남》 이후 ‘구사조시(草双紙)’라는 장르가 유행한다. 구사조시는 에도 중기인 18세기 중반부터 에도 말기인 19세기 초반까지 에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대중오락 서적의 통칭으로, 그림과 텍스트를 같은 판목에 새겨 인쇄함으로써 시각적 효과가 가미된 ‘가벼운 읽을거리’로 만화의 원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에도에 출판붐이 일면서 현재로 치면 100만부 이상의 판매량에 해당하는 초베스트셀러가 속속 등장한다. 먼저 《남총리견팔견전(南総里見八犬伝》(1814~1842)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저자인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28년 동안 총 106책(冊)에 걸쳐 집필한 집념의 ‘생애작(lifetime work)’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창작 판타지물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만화나 영화가 현대에도 재생산될 정도로 대중문학의 틀을 바꾼 근세 요미혼(讀本)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이다. 짓펜샤 잇규(十返舍一九)가 쓴 《동해도중슬률모(東海道中膝栗毛)》(1802~09)는 에도시대 여행, 관광 붐의 기폭제가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에도에 사는 평범한 중년남성과 청년이 콤비를 이루어 이세(伊勢)참배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코믹하게 서술한 이 작품은 당초 초편과 속편의 2편으로 종료 예정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대히트 덕분에 이세를 넘어 오사카까지 여행을 계속하는 8편까지 연장됐다. 그후 독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도카이도(東海道)를 벗어나 일본 각지를 돌며 여행하는 스토리를 추가하는 《속슬률모(続膝栗毛)》(1810~1822)가 출간됐다. 도중에 작가가 소재 고갈로 집필을 몇 번이나 그만두려 하였으나 제발 연재를 계속해 달라는 독자들의 간청으로 집필을 이어 갔다고 할 정도이다. 일본 각지의 명물과 풍속, 인정(人情)을 코믹한 터치로 풀어낸 에도 기행(紀行)문학의 걸작은 독자들과 같이 호흡하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더 이상 인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원(元)판목이 닳아 판목을 다시 제작해야 했으며 패러디나 복제판이 다수 제작되며 3만권 이상이라는 당시로선 경이로운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에도에 출판붐이 일면서 현재로 치면 100만부 이상의 판매량에 해당하는 초베스트셀러가 속속 등장한다. 먼저 《남총리견팔견전(南総里見八犬伝》(1814~1842)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저자인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28년 동안 총 106책(冊)에 걸쳐 집필한 집념의 ‘생애작(lifetime work)’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창작 판타지물이다.
지난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 만큼 시정의 여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께 일일이 알렸다. 평소 한복의 멋을 좋아하여 노란빛과 옥빛 한복을 입었던 육 여사는 1963년 양지회를 설립해 많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매년 ‘사랑의 열매 바자회 개최’, 자립농가의 성공담을 담은 〈희망의 등불〉을 매년 1회씩 발간·배포, 어린이의 학습과 교양을 위한 양지문고(1질 60권)를 벽지·낙도 등 700개 학교에 무료로 기증, 어린이의 학습·휴식처가 됐던 어린이회관을 1971년 건립해 연 300만명의 어린이들을 참관시켰고, 어린이의 미담을 담은 교양지 〈어깨동무〉를 매월 전국 농어촌, 벽지, 낙도 어린이에게 배포했다. 1970년 5월 마지막 토요일, 육 여사가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가 응접실에서 육 여사를 만났다. 육 여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최근의 민심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솔직하게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육 여사는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대통령은 마침 식사 중이었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금 전 육 여사에게 말씀드렸던 민심 상황들을 다시 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이나 비판적인 의견을 보고받으면 안색이 어둡게 변하면서 안면이 경직됐다. 그러면 육 여사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나도 대통령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보고했다. 그 길이 국가와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또 육 여사도 그렇게 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보고가 끝난 후에는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항상 쓴 약을 마신 것처럼 “고맙다”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18년이란 세월을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듣기 싫은 얘기를 크로스체크하면서 기꺼이 들었고, 육 여사가 그것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 만큼 시정의 여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께 일일이 알렸다. 평소 한복의 멋을 좋아하여 노란빛과 옥빛 한복을 입었던 육 여사는 1963년 양지회를 설립해 많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진행되던 1866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상선(The General Sherman)이 조선의 평양 경내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천주교도의 살해 이유를 물었다. 이 선박은 영국인 선교사이며 통역인 토머스(R.J.Thomas) 목사를 비롯하여 청국 사람의 승선은 물론, 상품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적재하고 있었다. 조선 측은 국법으로 교역이나 기독교가 모두 금지되어 있음을 알리고 빨리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대동강 수위가 내려가 선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셔먼호 선원들은 당황하여 무기로 위협하면서 식량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근대화의 선각자였고 미국에 대한 개방을 지지했던 개혁·개방론자였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군병이 동원되어 화공으로 배를 공격해 태워버리고 토머스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선원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 신부 리델이 청국으로 돌아가 이를 알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선에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미국 아시아함대사령관 벨(H.Bell) 제독에게 셔먼호의 잔해 탐색을 지시했다. 벨 제독은 슈펠트(R.W.Shufeldt) 제독으로 하여금 전함을 이끌고 조선에 가도록 했는데 그가 조선 측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셔먼호 문제를 힐책하는 서한만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셔먼호 선원 가운데 생존자가 있다는 풍문이 돌자 다시 미국 아시아함대의 셰난도(The shernandoah)호가 황해도 허사진에 나타나 사건 경위와 생존자를 탐문했다. 조선 측은 황해도 관찰사의 서한을 통해 셔먼호 사건은 미국 선원들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해명하자 미 함은 서한을 받아 돌아갔다. 이와 같이 양차에 걸친 조사에 실패한 미국은 프랑스에 미·불 합동원정을 제의했으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와 같이 국내 혁명의 사후처리 사정으로 거절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도 남북전쟁 이후의 후유증으로 ‘조선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진행되던 1866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상선(The General Sherman)이 조선의 평양 경내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천주교도의 살해 이유를 물었다. 조선 측은 국법으로 교역이나 기독교가 모두 금지되어 있음을 알리고 빨리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때는 한제국(漢帝國) 중흥(中興)의 조(祖), 광무제(光武帝)로부터 11대가 지난 효령황제(孝靈皇帝) 유굉(劉宏) 시대의 일이다. 황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관직을 팔아 사복을 채우며 환관들을 중용하고 외척에게 주요 직위를 주었다. 조정의 부패가 극에 달하니 하늘이 조정을 버린 것인가. 어느 날 파란 구렁이가 옥좌(玉座)에 앉고 암탉이 수탉이 되고 대지진과 해일이 일어났다. 메뚜기 떼가 밭을 메우고 기아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측근과 환관들이 보고조차 하지 않으니 황제 유굉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유굉은 13세에 즉위하였다. 20여 년간 낙양의 궁전에서는 매일같이 연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가려 뽑은 미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기는 게 그의 주요 일과였다. 이 어리석은 황제는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환관들 또한 황제를 돈과 여자와 술에 빠뜨려 정치에 마음 쓰지 못하도록 책략을 써 왔다. 환관 가운데 제일 윗자리의 열 명을 십상시(十常侍)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을 비판하는 자는 국외로 추방하거나 참혹하게 살해하니 백성들은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환관의 두목이자 황제로부터 아버지라 불리는 장양(張讓)은, 매일의 일과로서 금소(禁所)에 드나들었다. 황제는 반나체 상태로 취해 있기 일쑤고 주위에는 노래와 춤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술과 음식이 넘쳐흘렀다. 여자들도 아편에 취해 나체로 지냈다. 누워 있는 나체 여자의 음부에는 남근을 본뜬 장형(張形)이 박혀 있기도 하였다. 환관들은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금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성욕을 채울 수 없는 한을 풀기 위해 대신 권력다툼과 돈벌이에 열중하였다. 황제가 가장 아끼고 집착하는 왕 미인(王美人)은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상의가 찢어질 만큼 크고 아름다운 유방을 가졌다. 장양은 황제가 없으면 그 부드럽고 탄력 있는 유방을 쓰다듬고 즐겼으나 거기까지뿐이었다. 그는 ‘황제여, 마음껏 즐기시오. 우리 십상시는 비록 여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나 그대보다 더 부자올시다’ 하고 속으로 외쳤다. 또한 ‘아들아, 정치는 이 아비가 할 터이니 너는 지금처럼 그렇게만 계속 지내다오. 설령 비명에 간다 해도 새 황제를 옹립하여 이 권세 천년만년 누리리라’, 그렇게 속말을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환관 가운데 제일 윗자리의 열 명을 십상시(十常侍)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을 비판하는 자는 국외로 추방하거나 참혹하게 살해하니 백성들은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환관들은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금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성욕을 채울 수 없는 한을 풀기 위해 대신 권력다툼과 돈벌이에 열중하였다.
일반적인 독서, 논술 교육은 책을 읽고 난 후 토론을 시킵니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도 기존의 교육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토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두 가지로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가 말하기(speaking)이고, 다른 하나가 글쓰기(writing)입니다. 이 둘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으로는 말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말을 하면서 생각한 내용을 정리하고, 이렇게 정리된 것을 글로 표현하면 글쓰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그렇다면 토론보다는 먼저 혼자서 말하는 스피치 교육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고 난 후 그 내용을 말하게 해야 합니다. 우뇌 아이냐 좌뇌 아이냐에 따라 말하기도 다릅니다. 우뇌 아이는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점을 말입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느낀 것, 즉 감동 받은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뇌 아이들이 말이 많은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물론 말에 논리가 없습니다. 그냥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우뇌 아이들끼리 토론을 시켜 놓으면 토론이 아니라 난장판입니다. 이 아이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모릅니다. 좌뇌를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신의 느낀 점을 표현할 뿐입니다. 토론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아이에게는 읽은 내용을 저자의 사고구조대로 정확하게 이해해서 표현하는 다차원적 스피치(Multi-dimensional speech)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또 저자의 생각을 분석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구조적 스피치(Structural speech)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저자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표현하는 창의적인 스피치(Creative speech)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어려워할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책을 읽히면서 이 스피치 작업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스피치를 통해 좌뇌 훈련을 시켜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사고력도 좋아집니다. 반면에 좌뇌 아이들은 표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우뇌가 발달되어서 다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커 가면서는 좌뇌 아이들은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에게는 좌뇌의 지적 자극을 주면 감동을 받고 그때부터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독서, 논술 교육은 책을 읽고 난 후 토론을 시킵니다. 먼저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두 가지로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가 말하기(speaking)이고, 다른 하나가 글쓰기(writing)입니다. 이 둘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토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토론보다는 먼저 혼자서 말하는 스피치 교육이 더 필요합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북으로 진격하느라 나와 헤어졌고, 우리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가족들을 모두 모시고 서울 청파동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두 할머니는 잠시 서울에 다니러 온 것인데, 1·4후퇴 때문에 다시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평양에서 후퇴하자, 아버지는 연락병을 보내 서둘러 부산으로 이사하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꾸려 최형진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천안 국도변에서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고 천신만고 끝에 부산 큰아버지댁에 도착했다.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 주고, 고아원으로 안내해 준 일도 있었다. 아버지는 육군본부 작전국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로 함께 떠났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 직선제 개헌안인 발췌개헌안을 관철시키려 했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육본 작전국장이었던 아버지는 이종찬 장군과 함께 군의 중립을 지키면서 병력차출을 거부했다. 작전국장 시절, 아버지는 박정희 대령을 작전국 차장으로 임명했다. 아버지는 종종 어머니에게 “내가 참모총장을 한다면, 후임을 할 만한 사람은 박정희뿐이야”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부관과 사병들은 “다른 장군들은 부하 장병들에게 욕하고 반말을 예사로 하는데, 이용문 장군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당시 김창룡(金昌龍)의 특무대는 위세가 대단했다. 특무대장의 계급이 대령임에도 불구하고 장군들이 김 대장을 보면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군의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김창룡 특무대장의 감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고 한다. 하루는 우리 집을 자주 찾는 분 가운데 장태화(張太和·서울신문 사장 역임)씨가 있었다. 그는 작전국 문관이었다. 아침 일찍 또는 저녁 무렵 찾아와 아버지에게 정보 상황을 보고하곤 했다. 하루는 특무대에서 장태화씨를 감금해 조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도사단장이었던 아버지는 특무대장 승인도 없이 데리고 나와 버렸다.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평양에서 후퇴하자, 아버지는 연락병을 보내 서둘러 부산으로 이사하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꾸려 최형진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천안 국도변에서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고 천신만고 끝에 부산 큰아버지댁에 도착했다.
노르만 궁을 나오면 지척에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교회가 있다. 아랍풍의 분홍색 돔이 눈에 띄는 비슷한 시기에 지은 교회다. 키오스트로가 예쁘고 역시 아랍인들이 각종 열대 식물로 꾸며놓은 정원이 일품이어서 쉬어갈 만한 곳이다. 인근의 두오모(카테드랄레)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은 전형적인 혼합 양식의 건축이다. 내부는 좀 심한 개조를 겪어 18세기 신고전 양식만 남아 감흥이 덜하다. 시칠리아 왕이자 신성로마 황제이던 ‘세계의 경이(Stupor Mundi)’ 페데리코 2세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두오모를 나서면 비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Via Vittorio Emmanuelle) 큰길이다. 이 직선도로를 따라 1km 남짓 가면 옛 부두(La Cala)에 이르는데 팔레르모의 볼거리는 대개 이 길가나 혹은 그 좌우 500여m 내에 있다. 나폴리가 시역(市域)이 넓고 볼거리들이 언덕 아래위로 산재해 있어 도보로 다니기가 쉽지 않은 데 비하면 상당한 장점이다. 이쯤에서 팔레르모를 위한 변명 하나를 해본다. 나폴리도 비슷한 얘기를 듣지만 팔레르모도 오랜 세월 굳어진 메초조르노(Mezzogiorno・이탈리아 남부지방의 통칭) 공통의 부정적 평판이 있다. 전반적으로 무질서하고 상시적으로 소음이 많고 군데군데 불결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하다는 얘기다. 특히 팔레르모의 무질서와 도시 쓰레기는 괴테같이 점잖은 여행객도 한마디 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코르소(Via del Corso·포폴로 광장과 베네치아 광장을 잇는 직선도로)’ 못지않은 아름다운 길이 바람 한번 불면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하고…. 나폴리에서도 나귀들이 동네마다 돌며 쓰레기를 실어가던데…. 팔레르모도 무언가 방안을 내야 하는 것 아니냐?” 묻자 답 왈, “집집마다 밖으로 쓸어낸 쓰레기는 바람 없는 날엔 밖에서 썩고 바람 부는 날엔 여기저기 날아다녀…. 열심히 쓸어보았자 몽당 빗자루만 쓰레기에 추가되는 셈”이란다. 팔레르모, 나아가 시칠리아에서 요즘 말로 ‘행정의 실패(failure of public service)’는 뿌리가 깊다. 하지만 ‘실패’에 따르는 여행객의 불편들을 이내 잊게 만드는 샘솟는 매력을 아울러 갖춘 곳이다. 신화와 역사와 종교, 바꿔 말해 인류 문명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빼어난 풍광과 날씨와 음식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환대 속에 다듬어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팔레르모, 나아가 시칠리아에서 요즘 말로 ‘행정의 실패(failure of public service)’는 뿌리가 깊다. 하지만 ‘실패’에 따르는 여행객의 불편들을 이내 잊게 만드는 샘솟는 매력을 아울러 갖춘 곳이다. 신화와 역사와 종교, 바꿔 말해 인류 문명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빼어난 풍광과 날씨와 음식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환대 속에 다듬어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둘째, 오대양 박 사장 등 신도들이 형성한 자금의 행방은? 종교단체의 특성상, 또한 실제로 검찰이 찾아낸 물증(4억6000만원의 수표거래 기록)에 비추어 헌금 및 대출 등 여러 방식으로 형성된 자금은 교단 측에 흘러간 것으로 결론지었다. 오대양 박 사장, 구원파의 송 여인, 광주의 L여인 등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인물들은 모두 구원파 신도들로부터 모은 돈을 교단 측에 전달하는 ‘자금모집 책임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파악됐다. 셋째, 사건의 배후는?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만을 볼 때는 직접적인 배후가 바로 유 사장이라고 할 증거는 없다. 실제로 그는 오대양 집단변사 아닌 상습사기(헌금 및 우회대출 관련)로 사법처리됐다. 그러나 집단변사 사건은 결국 구원파 신도들의 종말론에 대한 ‘신앙’과 돈(헌금) 문제에서 비롯됐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의 구심점이자 돈(헌금)의 종착역이라 할 유 사장은 설사 형사책임이 없더라도 직간접으로 사건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그런데 다 덮어진 사건을 놓고 ‘6명’은 왜 느닷없이 자수한 것일까? 자수한 이들이 고백한 ‘구타 살해 및 암매장 사건’은 경찰이든 검찰이든 사실 전혀 모르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당시 경찰과 검찰에서 그들이 내놓은 진술과 전체 정황을 종합해 보면 결론은 ‘제 발이 저려서’ 그리고 ‘고립무원 상태의 무력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들의 진술을 보면, 그들 스스로 오랜 시간 종교적인 미혹(迷惑)과 세뇌(洗腦)상태에 빠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그들이 종교적 관념을 벗어나 이성(理性)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살인사건을 알고 있으리라는 걱정도 컸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부랴부랴 박 사장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결국 그들은 박 사장의 윗선인 (유 사장 등) 교단 상부에 문제를 상의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청 혹은 하소연을 접한 교단 역시 난감했을 것이다. 사건에 개입할 수도, 방치할 수도 없었을 터이므로 결국 자수를 권유했던 게 아닌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둘째, 오대양 박 사장 등 신도들이 형성한 자금의 행방은? 종교단체의 특성상, 또한 실제로 검찰이 찾아낸 물증(4억6000만원의 수표거래 기록)에 비추어 헌금 및 대출 등 여러 방식으로 형성된 자금은 교단 측에 흘러간 것으로 결론지었다. 오대양 박 사장, 구원파의 송 여인, 광주의 L여인 등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인물들은 모두 구원파 신도들로부터 모은 돈을 교단 측에 전달하는 ‘자금모집 책임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파악됐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승자와 패자를 떠나 어떤 점에 있어서 인간적인 부분들, 그런 부분들을 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견디게 하는 듯합니다. 비극적인 요소와 늘 공생하는 희극적인 요소들을 보며 그 속에서 웃음을 찾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면 삶을 살아가는 데 굉장한 의지가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죠. 그런 것들을 독자들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자 스스로도 기본적으로 이 삶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상당한 권태를 느끼면서. 젊을 때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는 의지가 남아 있다면 그것 자체가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결정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소설이라는 커다란 버팀목이 있지 않나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을 쓰면서 보냈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 자체도 때론 무료한 작업입니다. 가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낼 때 희열감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나 괜찮은 생각들이 자주 떠오르진 않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설가로서 좀 힘든 부분입니다.” —작중 화자가 가는 곳마다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요정 팅커벨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게 재미있네요. 보통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과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게 조금은 다르더라고요. 얼마 전에 영국에 가서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템스강이 굽이쳐 흐르는 리치먼드란 동네에 살았죠. 하루는 어떤 사람과 함께 샌드위치를 들고 거닐다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거기 예쁜 돌들이 많더라고요. 바닷가 예쁜 돌들을 주워다가 템스강에 던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은 우리나라 남해 어느 바닷가에서 주운 돌들을 충청도의 어느 산에다 던지고, 다른 몇 개는 가지고 돌아왔죠. 그 이후 강원도에 갔을 때는 그 강에다 던지고…. 돌들도 한곳에만 있으면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이렇게 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돌들도 여행을 하게 되잖아요.”
가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낼 때 희열감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나 괜찮은 생각들이 자주 떠오르진 않거든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을 쓰면서 보냈습니다. 그런 것들이 소설가로서 좀 힘든 부분입니다. 소설을 쓰는 것 자체도 때론 무료한 작업입니다.
1981년 국회의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행정관리청 장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세지마 회장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만나보라”고 했다. 나카소네 장관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총리가 되면 첫 방문국으로 미국을 택했습니다. 나는 총리가 되면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이를 환영하겠습니까?” “물론 환영할 것입니다.” 사실 나카소네는 자유민주당 내 소수(少數)계파의 수장(首長)으로 당시만 해도 총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때문에 나카소네의 방한 의사를 외무부나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82년 11월, 나카소네는 정말 일본 총리가 됐다. 이어 그는 세지마 회장을 통해 방한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노신영(盧信永·안기부장, 국무총리 역임) 외무부 장관을 만나 그 뜻을 전했다. 우리 정부도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양국 간 최대 현안은 경제협력자금 제공 문제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직후 한국이 공산주의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본이 안보 무임(無賃)승차를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논리를 내세워 일본에 100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요청했었다. 이후 양국은 액수와 구성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나, 일본에서는 세지마 회장이 역할을 했다. 1982년 12월 8일 나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세지마 회장을 만났다. 이때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세지마 회장을 만날 수 없어서 시골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간다는 핑계로 김해공항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경협 규모는 40억 달러로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여 있었다. 다만 공적개발원조(ODA)와 수출입은행의 상품차관 규모를 각각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우리는 ODA 규모를 늘리려 했고, 일본은 수출입은행 차관을 늘리려 했다. 논의 끝에 나는 세지마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환영할 것입니다.” 사실 나카소네는 자유민주당 내 소수(少數)계파의 수장(首長)으로 당시만 해도 총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82년 11월, 나카소네는 정말 일본 총리가 됐다. 이어 그는 세지마 회장을 통해 방한 의사를 전해왔다. 우리 정부도 환영의사를 표했다.
채만식은 아내 은선흥과의 관계를 모티브로 한 작품도 남겼다. 장편 《아름다운 새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체험에 바탕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소설 속 ‘강부인’은 채만식의 모(母), ‘며느리 서씨’는 은선흥, ‘준’은 채만식과 닮아 있다. 이 소설은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됐다가 1947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소설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막 그럴 때에 건넛방으로부터 병색과 수심을 얼굴에 드리우고, 며느리가(방금 강부인이 하던 말로 하면 ‘죄 없이 소박 받은’ 준이 아낙이) 헝클어진 머리를 다스리면서 원기 없이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중략) 며느리 서씨는 심화와 부실한 건강으로, 볼썽없이 바스러지고 조로를 하였다. 언뜻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인다. 그와 반대로 시어머니 강부인은 이른바 노익장(老益壯)하여, 원 나이보다 네댓 살은 젊어 보인다. (중략) 노상 혼인하던 첫날밤 애기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이래 이십 년은, 꼬박 생과부로 살아오는 여인이니라 하는 선입주견만으로가 아니다. 아무 내력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어딘지 불행하여 보인다. 추레하고 수심스러운 표정이야 그 자신의 항상 경황없고 슬픈 심정의 반영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말고도, 일종의 선천적인 것으로 무엇인지 모를 불길스런 듯 박행스런 듯한 상모(相貌)다. (중략) 준이 아낙을 소박한 소연이 그 인물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심성이나 부덕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도 아니다. 또 열세 살에 든 장가라서 자성한 후 개성이 눈뜸을 좇아 자유결혼을 욕망하는 나머지 아낙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을 구실로 명령결혼(命令結婚)에 대하여 의식적인 항거를 일삼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역 아니다. (중략) 오직 한 가지 특별한 사유가 따로 있던 것이다. 하되 그것은 맹랑하기 상식을 초월한 것으로, 항용 이성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좀처럼 휘어잡기 어려운 마성(魔性)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십 전 생과부로(정히 처녀과부로) 사십 고개를 넘고 있는 그 서씨였다.〉(p11~12, 《채만식전집4》)
채만식은 아내 은선흥과의 관계를 모티브로 한 작품도 남겼다. 장편 《아름다운 새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체험에 바탕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소설 속 ‘강부인’은 채만식의 모(母), ‘며느리 서씨’는 은선흥, ‘준’은 채만식과 닮아 있다. 이 소설은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됐다가 1947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1415년(태종15년)에 세상에 나온 한명회의 할아버지는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다. 그의 동생 한상경(韓尙敬)은 개국공신이다. 따라서 한명회의 집안 자체는 조선 혹은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기(韓起)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었고 일찍 죽어 한명회는 어려서 고아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자 작은할아버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을 찾아가 몸을 맡겼는데 한상덕은 어린 한명회의 남다른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살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스승 유방선(柳方善)을 함께 모셨던 서거정(徐居正)이 쓴 한명회의 묘비명이 전하는 젊은 시절 한명회의 모습이다.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공과는 사생(死生)의 우의(友誼)를 맺어 서로 좋아함이 옛 관중(管仲)과 포숙(鮑叔)보다도 더했는데 권공과는 뜻이 같고 기개가 합하여 살림살이는 경영하지도 않고 산수간(山水間)에 노닐면서 혹 마음에 맞으면 한 해가 다하도록 돌아올 줄을 몰랐으며 명리(名利)에는 담박(淡泊)했다. 일찍이 길창군에게 농담하기를 “문장과 도덕은 내가 자네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경륜(經綸)과 사업(事業)에 있어서는 어찌 많이 모자라겠는가?”라고 했다. 대체로 의론(議論)에 나타나는 것이 고매(高邁)하고 기위(奇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큰 재기(才器)로 지목하였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살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사춘기 때였고 굉장히 괴로웠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많이 외로웠죠. 하지만 그 외로움이 자양분이 되어 작가가 되었는지 모르죠. 요즘 청소년들의 왕따 그것은 굉장히 심각하고 슬픈 문제거든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혹성입니다. 동물들도 왕따를 시킨다는 말이 있죠. 《피플 붓다》에도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자비롭고 너그러운 것 같지만 한편은 동물이나 다름없지요. 인간이 아주 잔인합니다. 어떤 마을에 만만한 과부가 하나 있어요. 그러면 그 동네에 거의 모든 남자가 그 과부와 한 번씩 자 본다는 거예요. 아이들도 몸이 불편한 아이를 보면 보호해 주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그 아이를 학대를 해요. 그런 아이한테 가방을 들게 하며 너도나도 왕따를 시키는 게 지금 우리 아이들의 현상이에요.”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왕따를 이겨내는 그것도 하나의 생명력입니다. 제 소설 《피플 붓다》에서는 그 아이가 따돌림으로부터 이겨내려고 하는 모습,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교육이 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고 성적 위주의 교육입니다. 과외 학원이라든지 수능이라든지… 성적지상주의가 왕따 문화를 만들고 있어요. 왕따 문화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본은 더 심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일진’이라는 것이 일본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낙제를 한 학생을 다른 학생들이 뒷동산으로 데리고 가서 모두가 한 번씩 때려 죽여놨어요. 바야흐로 세계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런 때에 공부를 안 해서 낙제를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요. 시대에 따라서 왕따 문화가 달라지는 거죠. 그것을 어떻게 잘 교육시키느냐,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정서를 순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와 가까워져야 합니다. 가해 학생의 부모들도 마찬가지고 피해자의 부모도 마찬가지로 그 아이의 삶과 늘 같이 엮여서 사는 그런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가해 학생들의 경우, 누군가를 왕따시키는 그 자체가 놀이처럼 즐거움이 되어버리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만만한 아이 하나를 돌려가면서 때리고 즐기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건전한 다른 놀이, 다른 학업이 즐거운 놀이가 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당하는 아이들은 그것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자비롭고 너그러운 것 같지만 한편은 동물이나 다름없지요. 인간이 아주 잔인합니다. 가해 학생들의 경우, 누군가를 왕따시키는 그 자체가 놀이처럼 즐거움이 되어버리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건전한 다른 놀이, 다른 학업이 즐거운 놀이가 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할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허탈하면서도 씁쓰레한 미소로만 웃어 보였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하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못 와. 하늘나라에 갔어” 하는 겁니다. 나와 아내는 들고 있던 만두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너무 안타까워서 …. 두 분은 부부인데 할아버지는 수원의 큰아들 집에, 할머니는 목동의 작은아들 집에 사셨답니다. “두 분이 싸우셨나요?”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며느리들끼리 싸웠어.” 큰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왜 나만 부모님을 모셔야 하냐고 나 혼자 부모님을 모실 수가 없다고 …. 하도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공평하게 양쪽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한 분씩 모시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 만난 거랍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병에 걸려 먼저 돌아가셨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천장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우리는 또 다시 천국에선 같이 살 수 있겠지 ….” “야속한 사람, 왜 나만 남겨두고 먼저 떠났어! 가려거든 나도 함께 데려가지 …. 자식들 다 소용없어 …. 어려서 갖은 고생 다 하면서 키웠지만 다들 결혼하고 나면 마누라한테 잡혀서 기도 펴지 못하고 잡혀 살고 있잖아?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며 애지중지 키웠는지 애들은 알지 못하나 봐. 나중에 자기들도 늙고 병들어 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겠지 ….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리도 잘못인데 누구를 탓하겠어 …. 부모는 불편하고 방해만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식들한테 하는 것 봐봐. 그것 반만이라도 부모에게 신경써 주면 이런 일들은 없을 텐데 …. 자식 키워 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런 것을 왜 진작 모르고 살았을까? ….”
두 분은 부부인데 할아버지는 수원의 큰아들 집에, 할머니는 목동의 작은아들 집에 사셨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며느리들끼리 싸웠어.” 큰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왜 나만 부모님을 모셔야 하냐고 나 혼자 부모님을 모실 수가 없다고 …. 하도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공평하게 양쪽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한 분씩 모시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공덕리 위를 지날 때에는 멀리 독립문 밖 무학현(峴) 너머 홍제원 시내(溪)의 모래밭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운동연습으로 또는 원족회(遠足會)로 자주 갔던 곳이라 마음에 그윽이 반가웠었습니다. 거기서 경의선 철로의 중간을 끊고 새문 밖 금화산(金華山) 부근의 하늘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미동(渼洞)보통학교의 불타고 없어진 옛터나마 살피려 하였으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많은 탓인지 얼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모화관 뒤 무학재(현 무악재 - 편집자주) 고개와 그 앞에 서 있는 독립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무학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물꼬물 올라가고 있는 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야 비행기의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의 위까지 떠 가서 한 발 휘휘 돌았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붉은 높은 담 밖에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내려다보기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인 빛 누런 마당에 햇빛만 혼자 비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하여 보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면서 거기는 평동(平洞), 냉동(冷洞), 감영(監營) 네거리의 일판(一版)이 벌어져 있는데 감영 네거리에 흰옷 입은 한 떼의 사람이 몰켜(몰려-편집자주)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성냥갑(燐寸匣) 같은 전차가 병난 장난감같이 느리게 땅바닥에 배를 대이고 기어가는 것이 흘깃 보이더니 그 전찻길 옆 개와(蓋瓦)지붕에 에워싸인 목판 같은 마당에 울긋불긋 가물가물하는 것은 아마도 경성여자보통학교와 또 그 한집에 있는 내 모교 미동보통학교인가보다 하였습니다. 미동학교는 어저께 저녁에 내가 그 마당에 초대받아 가서 지금 눈에 내려다보이는 저 학생들과 이야기하던 곳이요, 그 옆에 평동은 내 출생지라 알지 못할 친한 정과 반가운 마음이 샘솟듯 하야 이 일판의 상공에서 재조(才操)를 두 번 훌훌 넘었습니다. 여기서 재조 넘은 것도 보이기는 경성 시가 전체에서 모두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덕리 위를 지날 때에는 멀리 독립문 밖 무학현(峴) 너머 홍제원 시내(溪)의 모래밭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운동연습으로 또는 원족회(遠足會)로 자주 갔던 곳이라 마음에 그윽이 반가웠었습니다. 거기서 경의선 철로의 중간을 끊고 새문 밖 금화산(金華山) 부근의 하늘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미동(渼洞)보통학교의 불타고 없어진 옛터나마 살피려 하였으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많은 탓인지 얼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마을 공동체 만들기 사업’이 몇몇 선도적인 지자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 의지와 참여 속에 마을의 물리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개선하여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바탕을 두곤 한다. 기존의 관(官) 주도 마을개선 사업에서 벗어나 지역주민이 직접 계획을 세우고 마을을 변화시키려는 자발적 참여 과정이 주목된다. 이를 통해 예상되는 주요사업에는 주거환경 및 공공시설의 개선, 마을기업의 육성, 환경보전 및 개선, 마을 자원을 활용한 호혜적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의 복지 증진, 그리고 마을 공동체와 관련된 단체 및 기관의 지원이다. 이에 발맞추어 서울시는 지난 9월 11일 은평구 불광동의 옛 국립보건원 자리에 ‘마을 공동체 지원센터’를 개설하면서 앞으로 ‘주거, 복지, 문화, 경제 공동체’ 등 5대 시책 및 68개 사업에 대해 1340억원을 투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현 시장의 역점사업 중 하나인 “서울시의 골목마다 추억과 삶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도시로 만들 것이며, 이를 통해 자살과 범죄, 빈곤, 갈등 등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라는 이 ‘마을 공동체 복원사업’에 대해 어느 누구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라고 강조한 마하트마 간디의 주장처럼 우리 모두는 마을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을 소망하고 있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근대화-산업화 및 도시화- 과정은 이 소중한 마을을 많은 사람이 등지게 만들었고, 이제 다시 그 가치를 확인하고 마을을 만들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를 넘어 1990년대 초 부동산값이 정점에 다다르면서 신도시 중심의 재개발 사업과 최고의 교통사고율을 목도하면서 토건의 도시 개발시대로부터 회귀하여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소수의 지역생활 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을 만들기 사업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 의지와 참여 속에 마을의 물리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환경을 종합적으로 개선하여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바탕을 두곤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마을 공동체 만들기 사업’이 몇몇 선도적인 지자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우발적인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해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했다. 히로시마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 만행은 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 영국 영사 힐리어(Hilie), 러시아 베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okerill)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1895년 10월 31일 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이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 중에서도 왕비 시해를 입증하는 것들이 있다. 1895년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보고서는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했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고문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일본 법제국 장관에게 직접 보고한 보고서에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하면서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 필요성을 암시했다.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朴鍾涍) 교수는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 Waeber) 조선공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보낸 보고서를 찾아냈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 J. 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이 첨부되어 있다. 니콜라이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고 한다.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해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했다. 히로시마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승만은 10월 29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돈암장으로 초청했다. 이승만은 전날 도쿄에 다녀온 하지와 만나서 신탁통치문제 등 당면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정당통합운동에 공산당을 참가시키는 문제도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배석자없이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세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회담내용은 박헌영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기록만 보존되어있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도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했고, 박헌영은 그 전제조건으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우리는 현시점에서 타국의 힘을 빌려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독립을 달성한 뒤에 자신의 정부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 정부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 허용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박헌영의 주장은 결국 우파민족주의그룹의 중심 세력인 한민당을 정당통합운동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승만이 자신도 장차 수립될 정부에 친일파가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자, 박헌영은 “그렇다면 아직 문제될 것이 없다”고 양해했다. 두사람은 이어 인민공화국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이승만은 하지 중장이 인민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말하는 것을 자기가 인민공화국을 조직한 사람들에게 정부를 해산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약속하여 군정청의 강제 해산 조치를 중지시켰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헌영은 “미군정 아래서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역설했다.64) 박헌영은 이승만과 면담하기에 앞서 10월 27일에 반도호텔의 하지 중장 사무실에서 그를 면담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지는 미군정부의 시책에 공산당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고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통일조국을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은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65) 이승만과 박헌영의 회담이 있은 뒤에 박헌영은 11월 2일에 천도교 강당에서 열리는 독촉중협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배석자없이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세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회담내용은 박헌영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기록만 보존되어있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도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했고, 박헌영은 그 전제조건으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우리는 현시점에서 타국의 힘을 빌려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할 수는 없다.
이승만은 취임식이 거행된 바로 그날 오후부터 집무를 시작했다. 대통령 집무실은 중앙청 3층의 200호실로 정해졌다. 부통령실은 미군정장관실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안건은 「대한민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안이었다. 그것은 1945년 12월부터 미군정부가 접수하여 관리해 오던 귀속재산〔구 일본정부 및 일본인 소유의 재산〕의 소유권을 한국정부에 이양하는 중요한 협정이었다. 이승만은 이 협정문을 같이 검토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의 최순주(崔淳周)와 백두진(白斗鎭), 식산은행의 장봉호(張鳳鎬) 세 사람을 오후 2시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오라고 불렀다. 최순주는 미국 유학생으로서 아는 사이였으나 다른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네 사람은 회의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국문과 영문으로 된 전문 14조의 협정문과 보충협정이 있고 부속문서도 있어서 상당한 분량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그 중요한 문서를 즉석에서 검토하기란 세 은행가의 능력에는 부치는 일이었다. 장봉호가 이승만에게 이 문서를 빌려주시면 가지고 돌아가서 잘 연구하여 내일 의견을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 문서는 외부에 내보낼 수 없다면서 이 자리에서 몇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잘 보고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세 시간이나 진땀을 뺐다. 백두진이 한 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협정문 제9조에 미국무부 해외물자청산위원회(Office of Foreign Liquidation Commissioner)로부터 공여된 물자대금에서 미국정부가 한국 내에서 필요한 토지 및 건물의 매수 가격을 뺀 금액에 대하여 1년에 2%의 이자를 붙여 원(圓)화로 변제하기로 되어 있는 조항에 대하여는 이의를 제의하여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 조항은 잘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협정안은 아마도 7월 21일 오후에 이화장을 방문한 하지의 경제고문 번스가 가져온 것인 듯한데, 그랬다면 이승만은 그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 협정안을 직접 검토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승만은 취임식이 거행된 바로 그날 오후부터 집무를 시작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안건은 「대한민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안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그 중요한 문서를 즉석에서 검토하기란 세 은행가의 능력에는 부치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 협정문을 같이 검토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의 최순주(崔淳周)와 백두진(白斗鎭), 식산은행의 장봉호(張鳳鎬) 세 사람을 오후 2시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서 요즘 주식인 쌀에서 농약이 검출되었다며 참 시끄러운데 이에 대해 좀 언급을 해야겠다. 사실 그런 것쯤이야 선거철이라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을 뿐이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논란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비료, 농약, 제초제를 뿌리기 시작한 그 시절부터 쌀은 이미 그런 오염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벼가 그것들이 섞인 물을 흡수했을 테니 당연하다. 모르긴 해도 정밀하게 검사하면 농약 성분뿐만 아니라 제초제, 비료의 화학성분까지 벼가 머금고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 식물에 매운맛을 섞어 물을 주면 그 열매가 맵고 설탕을 섞으면 달기 마련이다. 그처럼 벼뿐만 아니라 밥상 위의 온갖 작물이 다 그렇다. 비료로 벼를 키우고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기 시작한 수십 년 전부터 각종 암을 비롯한 불·난치병을 앓는 환자가 점점 더 많아진 것 같다. 마시면 곧장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 독한 약이 밴 음식을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먹었으니 말이다. 미세한 독성이 오랜 세월 인체에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런 병을 앓을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하기도 하다. 그리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뭐 하나 안심하고 먹을 것이 없는 것 같다. 유기농 농작물도 농도만 묽을 뿐이지 농약, 제초제를 쓰지 않으면 농사를 짓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벼를 자연에 맡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어장의 물고기 먹이처럼 퇴비를 주면서부터 작물의 면역력이 떨어져 자생력을 잃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도가 점점 심화돼 잡초와 병충의 공격을 방어할 기력을 다 잃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생산량은 현저하게 줄어들기 마련이고 근대에 이르러 인구가 폭발적으로 불어나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부득불 비료, 제초제, 농약을 개발해 작물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쌀에 농약성분이 있다는 것 자체를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란 생각도 든다. 농도가 너무 짙다면 세상이 떠들썩하게 문제를 삼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논란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비료, 농약, 제초제를 뿌리기 시작한 그 시절부터 쌀은 이미 그런 오염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벼가 그것들이 섞인 물을 흡수했을 테니 당연하다. 모르긴 해도 정밀하게 검사하면 농약 성분뿐만 아니라 제초제, 비료의 화학성분까지 벼가 머금고 있을 것이다.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의 상처가 다 아물 무렵부터 안중근은 날마다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 함경북도 경원의 고향을 버리고 며느리와 함께 연해주의 아들을 찾아와 살고 있던 병길의 아버지 황오섭 노인이 병길 내외가 살고 있는 마을의 초가 한 채를 빌려 안중근이 머물도록 주선해 주었다. 밥은 병길의 아내 숙경이 해다 줄 때도 있었고, 마을의 다른 동포 집에서 아이 생일이니 시부모 환갑이니 이런 저런 구실로 밥을 해서 보내오기도 하고 직접 초청하여 함께 먹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땔나무는 전적으로 황오섭 노인이 감당하였다. 그 어떤 도움보다 병길의 세 살배기 계집아이 정선이가 안중근의 시름을 덜어주고 말동무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집 뒤란의 텃밭 가장자리에 표적을 세워놓고 권총 사격 연습을 하고 있노라면 작은 계집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점수를 매겨주는데 기억력이 비상하여 요 근래의 안중근의 사격 점수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아저씨, 오늘은 모두 100점이다. 와.” 안중근의 사격 솜씨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여서 그가 연습을 하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탄환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사격 연습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더욱 정신을 집중한 결과 탄환 한 발을 쏠 때마다 정확도는 높아갔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표적을 맞힐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연습을 중단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그동안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대동공보의 이강 주필과 가까운 사이가 됐고, 이강의 요청으로 논설문을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장지연, 이동휘 같은 사람들과 만나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해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면 마음은 언제나 허전했다. 정세를 판단하는 시각도 좋고 역사를 이해하는 이론도 좋으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동이었다. 수분하의 정대호는 지난 봄 진남포에 가서 안중근의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향했으나 도중에 기차가 연결되지 않아 도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랬던 정대호가 다시 진남포로 간다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와 품에 안겨줄 테니 살림을 할 준비를 해두라는 전갈이었다.
안중근의 사격 솜씨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여서 그가 연습을 하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탄환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사격 연습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더욱 정신을 집중한 결과 탄환 한 발을 쏠 때마다 정확도는 높아갔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표적을 맞힐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연습을 중단했다.
그런데 북경에 갔던 성절사 윤휘가 황제 명의의 칙서를 받아왔다. 내용은 속히 원병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 조정에서 조선의 관망 태도에 불만이 커져 가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 광해군은 안팎으로 몰렸다. 파병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졌다. 군대는 보내되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그리고 그간 유화해 온 후금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마침내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痛使·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원정군 사령관에 무장을 택하지 않고 언어에 능통한 측근을 임명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광해군은 출전하는 강홍립에게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작전지시를 했다. 조선의 정예병이 쓸모없이 희생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지침이다. 조선군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강홍립은 후금군의 호위 속에 누르하치를 만났다. 조선군의 일부는 풀려났지만 최고 지휘관인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 억류되었다. 그는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정보는 광해군의 형세 판단과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강홍립의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은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선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에게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와 특히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 여부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작전지시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밀지를 내려 항복하도록 사전에 지시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광해군이 국왕 직속의 통역관 강홍립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사료에 나타난 작전지시 내용으로 미루어 명군을 위해 조선군이 궤멸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전세를 보아 후금에 투항하는 것을 용인했을 가능성은 높다. 광해군은 후금에 보여준 그간의 유화책도 고려했을 것이다.
조선군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조선군의 일부는 풀려났지만 최고 지휘관인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 억류되었다. 그는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정보는 광해군의 형세 판단과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운전할 때는 앞을 잘 살피며 운전해야 한다. 한눈팔거나 딴짓하면 안 된다. 운전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안 되고 DMB를 시청해도 안 된다. 다만 운전 중에 내비게이션을 잠깐잠깐 보는 건 허용된다. 운전 중에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는 것은 운전 중에 문자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더 위험하다. 문자 보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안 보고도 한 손으로 조작할 수 있지만, 내비게이션은 큰 문자판을 더듬더듬 하나씩 눌러야 하고 잘못 입력하면 지우고 다시 눌러야 하고 단어를 여러개 누르거나 아니면 짧은 단어에 여러 목적지가 검색되면 그중에 맞는 걸 찾을 때까지 계속 검색하느라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비게이션을 쳐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운전하는 사람이 살짝살짝 졸음운전하면 옆에 탄 사람은 졸지 말라고 경고하든지 아니면 차를 세우고 쉬었다 가자고 해야 한다. 옆에서 졸음운전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다가 사고당하면 위험한 상황을 방치한 점에 대해 본인에게도 일부 책임이 인정된다. 이런 걸 안전운전촉구 불이행이라고 한다. 버스나 택시의 승객으로 탑승하여 잠자면서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는 사람 차를 같이 타고 갈 때 서로 교대운전하는 게 아니라면) 운전하는 사람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동승자도 도와야 한다. 계속 “조심해~ 조심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졸거나 딴짓하면 위험을 경고해야 한다. 엄청나게 빨리 달리면 천천히 가자고 해야 하고 자꾸 신호위반하면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가만있다가 사고 나면 동승자에게도 10~20%가량 과실이 인정될 수 있다. 이번 사고는 오랫동안 내비게이션을 조작한 건 아니고 짧은 시간이었던 거 같다. 오랫동안 앞을 안 보고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면 동승자 과실이 20%까지 인정될 수도 있었을 듯하다. 시속 60km로 달릴 때 자동차는 1초에 16.7m를 움직인다. 내비게이션을 잠시 조작하느라 2초 동안 앞을 못 보면 33m, 3초면 50m를 눈감고 운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 커브길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운전 중에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는 것은 운전 중에 문자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더 위험하다. 문자 보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안 보고도 한 손으로 조작할 수 있지만, 내비게이션은 큰 문자판을 더듬더듬 하나씩 눌러야 하고 잘못 입력하면 지우고 다시 눌러야 하고 단어를 여러개 누르거나 아니면 짧은 단어에 여러 목적지가 검색되면 그중에 맞는 걸 찾을 때까지 계속 검색하느라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비게이션을 쳐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해변의 길손》은 성경의 카인과 아벨처럼 동생에 대한 형의 질투에서 빚어진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인데 이런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따로 있나요. “인간에게 소유욕이라고 하는 욕망, 그것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거든요. 황두표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지금도 그런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에 있어요. 살아 있는 자식보다 떠나가고 없는 자식에 대한 집착도 그런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지켜보는 살아 있는 자식은 못 견뎌 하는 것이고요. 사랑이고 재산이고 누구든지 독차지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그와 같은 것은 형제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확대될 수 있거든요. 지금도 우리는 분단시대를 살고 있어요.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고 저쪽은 아직도 억압된 사회제도 속에서 살고 있어요. 《해변의 길손》은 동전의 안과 밖 같은 사랑과 미움, 빛과 그림자를 형상화시킨 것이지요.” ―문학의 영원한 소재가 되는 사랑, 그 뒷면에는 왕따와 편애(질투)가 있어요. 선생님의 최근 소설 《피플 붓다》도 왕따에 대해 다뤘는데 요즘 10대들의 학교폭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저도 초등학교 다닐 적에 왕따를 당해본 경험이 있어요. 제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 태어난 곳은 승용차로 40분 더 들어가는 곳이에요. 그 고향땅이 옛날에는 섬이었어요. 대개 섬마을은 농토가 작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곳에서 아버지가 김 양식도 하고 열 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지었어요. 말하자면 가난한 마을에서도 제일 부자였던 거죠. 다른 사람들은 논 한 마지기 가지고 있거나 그나마도 없거나 한 살림인데, 우리 집은 거기에 비하면 부잣집이었어요. 그러니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나를 미워했어요. 당시가 광복 직후라 이데올로기 싸움도 막 일어나고 있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전부 다 남로당 편을 드는 분위기였어요. 그들은 우리 아버지를 부르주아라 하고, 자기들은 프롤레타리아라 했어요. 아버지를 반동분자라고 손가락질했지요. 마을 아이들은 저를 반동분자 아들이라고 따돌렸어요. 요즘으로 치면 왕따였죠. 굉장히 힘들게 살았어요.”
《해변의 길손》은 동전의 안과 밖 같은 사랑과 미움, 빛과 그림자를 형상화시킨 것이지요. ―《해변의 길손》은 성경의 카인과 아벨처럼 동생에 대한 형의 질투에서 빚어진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인데 이런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따로 있나요. 그와 같은 것은 형제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확대될 수 있거든요.
조선의 무역이 잘되어 가는 것을 보면 조선사람의 경제력이 증대해 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면의 사실은 표면과 전연 배치가 되어 있다. 표면 관(觀)으로는 쌀을 일본에 갖다가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대용의 식량으로 값싸고 분량 많은 만속(滿粟·만주에서 생산된 잡곡을 의미한다. 우리 농촌은 좋은 쌀을 빼앗기고 이들 잡곡으로 연명했다-편집자)이나 외미(外米)를 사들이는 것이 조선사람의 주머니 여재(餘在)가 떨어질 것 같이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아주 딴판이다. 자기가 만들고 또 맛 좋은 쌀을 일본에 갖다 판다 하나 조선사람의 손으로 파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대지주들의 손을 거쳐서 이출(移出)되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보아도 오산(誤算)이 없을 줄로 생각된다. 그럼으로 조선사람에게는 쌀을 비싸게 팔고 값싼 좁쌀이나 양쌀을 산다 하여도 그의 주머니는 아무 여재가 없음은 의심할 것 없는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조선의 무역이 잘되어 간다고 하지만 조선사람으로서 받는 그의 혜택이 별로 없는 결과가 되고 만다. 따라서 통계상 숫자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서는 조선의 경제를 가리켜서 참으로 조선사람의 경제라고 말할 용기가 안 나선다. 조선의 무역은 이상과 같다 하고 대내적으로 들어가 상공업 기타 각 방면의 형편은 어떠한가? 먼저 공업계를 보자. 이 역시 무역과 같이 통계상으로는 축년(逐年·해마다-편집자) 발전되어 간다. 공장 수가 7년 전에 3499개소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5342개소로 늘고 또 자본금도 7년 전에는 1억7798만5802원이었던 것이 2년 전에는 5억4912만2364원으로 격증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늘어갈 형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공업계가 발전이 되어 간다마는 무역과 같이 조선사람의 손으로 되는 공업계가 아니라 대자본을 가지고 있는 일본사람의 거의 독무대가 되어 있다. 오직 조선사람은 공업이 발달됨에 따라서 받는 혜택이라고 할 것은 노동력을 바치고 저렴한 임금을 받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럼으로 일본의 자본이 조선공장 전체에 대하야 독점적 지배적의 지위에 있은 즉, 조선의 공업도 조선사람의 손으로 좌우치 못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표면 관(觀)으로는 쌀을 일본에 갖다가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대용의 식량으로 값싸고 분량 많은 만속(滿粟·만주에서 생산된 잡곡을 의미한다. 우리 농촌은 좋은 쌀을 빼앗기고 이들 잡곡으로 연명했다-편집자)이나 외미(外米)를 사들이는 것이 조선사람의 주머니 여재(餘在)가 떨어질 것 같이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아주 딴판이다. 자기가 만들고 또 맛 좋은 쌀을 일본에 갖다 판다 하나 조선사람의 손으로 파는 것이 아니다.
이어령의 말은 쉼 없이 이어진다. “기계적인 통계로 인간의 능력을 정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살아있는 자에게는 허망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도식화될 수도 GNP로 결정될 수도 없는 거지요. 호킹 박사가 거대한 우주의 원리는 이해해도, 동네 처녀가 실연을 당해 세상이 무너지는 그 감정은 호킹 박사의 이론보다는 유행가 가사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문화적인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 정치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이론이 가능할 뿐입니다. 생명과 몸, 자본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이러한 발상은 바로 ‘궁금함’에서부터 시작한다. 선생은 자신의 묘비명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 평생 이 우물 저 우물, 무수히 많은 우물을 파다가 이제 더 이상 우물을 파지 못하는 자리에 서서, 그 궁금증 때문에 누워 있는 사람, 여기에 있다.” 그에게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일 뿐이다. 미국의 사상가인 스콧 니어링이 죽었을 때 그의 반려자였던 헨리 역시 “그는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마저도 궁금한 한 세계일 뿐이다. 이어령 선생은 말했다. “누구나 나처럼 될 수 있는데 말이지요. 내가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독창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어느 순간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작문을 제일 잘하는 학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들입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못 쓰는 거지요. 글 쓰는 법을 배우면서 글 쓰기를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입니다. 특히 입시 위주 교육의 부작용은 심각하지요. 수능으로 생각을 망치는 거지요. 수능 안에 내 생각을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정상으로 태어나서 비정상이 되는 겁니다. 물고기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어른은 99.9%가 머리를 왼쪽에 놓고 그립니다. 하지만 유치원생에게 그려보라고 하면 50%만 왼쪽에 머리를 두고 나머지는 오른쪽에 머리를 둡니다. 잘못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교정하는 겁니다. 이건 무서운 일이고 매달려 있는 사과의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게 블라인드를 치는 겁니다.”
이어령의 말은 쉼 없이 이어진다. “기계적인 통계로 인간의 능력을 정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살아있는 자에게는 허망한 것입니다. 호킹 박사가 거대한 우주의 원리는 이해해도, 동네 처녀가 실연을 당해 세상이 무너지는 그 감정은 호킹 박사의 이론보다는 유행가 가사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위와 같은 자유민주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부류가 또 있다. ‘민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외국과 샅바를 잡고 당당히 겨뤄 보려는 것은 극구 피하는 부류다. 그러면서 선진국들에서 배울 만한 것들을 폄하하거나 질시(envy)하고 저주하는 앙심(ressentiment)을 품고 있다. 이런 부류도 얼핏 보면 민족주의, 즉 내셔널리즘의 한 갈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민족주의를 ‘우파’ 민족주의라 하고 이들을 ‘좌파’ 민족주의로 갈래를 지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엄정하게 보면 이들에게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성립시켜 보지 못하고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됐던 우리의 역사적 사정 때문에 혈연적·문화적·낭만적 민족주의 성향도 우리에게는 상당하다. 1917년 볼셰비키 공산혁명 후에 레닌과 스탈린은 자유민주 진영을 타도하는 세계 공산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 ‘피압박 민족들이여! 단결하라!’는 기치 아래 당시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민족들을 선동했다. 한반도에서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의 괴뢰로 들어온 공산주의 세력과 소련 공산당에 충성하는 남로당 세력이 낭만적 민족주의자들을 주 대상으로 통일전선전술 공작을 지금까지 줄기차게 벌여 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혈연적·낭만적 민족주의는 그 속성상 정치의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공산전체주의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괴물이 되어 갔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좌우합작론과 남북협상론, 분단체제론과 분단사학론 및 통일지상주의와 통일사학이 그런 부류들이다. 민주주의도 ‘인민’민주주의니 ‘진보적’민주주의니 ‘좌파’민주주의니 하면서 아무리 꾸며 대도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듯이, 민족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민중’민족주의니 ‘인민’민족주의니 ‘진보적’민족주의니 ‘좌파’민족주의로 가장하려 해도 그것은 좌익혁명론이지 민족주의는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도 ‘인민’민주주의니 ‘진보적’민주주의니 ‘좌파’민주주의니 하면서 아무리 꾸며 대도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듯이, 민족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민중’민족주의니 ‘인민’민족주의니 ‘진보적’민족주의니 ‘좌파’민족주의로 가장하려 해도 그것은 좌익혁명론이지 민족주의는 아닌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의사의 진단서와 국과수의 마디모 감정서 중 어느 게 더 정확한 걸까?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확인한 국과수 감정서에는 이상하게도 ‘마디모’라는 단어가 없다. 마디모 분석을 했다면 마디모 분석과정과 결과가 기재돼야 하는데 마디모 분석을 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이유는 마디모를 안 했기 때문이다. 경찰에서 마디모를 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국과수에서는 마디모를 하지 않고 이런 감정서를 보내는 것이다. 〈사고 차량 사진을 보면 현저한 변형 및 파손 흔적이 보이지 않아 충돌속도는 시속 8km/h 이하일 것으로 보임, 일반적인 추돌실험에서 피추돌 차량에서의 속도변화가 약 8km/h 이하일 때 탑승자에게 경추상해가 발생하기 어려우며, 발생하더라도 수일 이내에 증상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음, 시속 8km/h 이하의 속도에서 사고 난 것으로 보이기에 목을 다치게 할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허리, 어깨 등은 목보다 더 다치기 어렵기에 결국 상해를 입을 만한 충격이 가해졌다고 보기 어렵고, 상해가 발생하더라도 수일 이내에 사라질 것으로 판단됨.〉 즉 마디모를 하지 않고 ‘추돌실험에서 시속 8km/h 이하일 때는 안 다친다’라고 보고되어 있으니 이 사건의 피해자도 안 다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감정서를 보면 〈측면추돌은 정면충돌이나 후면추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후방향의 충격량 전달이 경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운전자에게 전달된 충격에너지는 경미한 것으로 보이기에 운전자에게 현저한 운동변화(상해발생)를 초래할 정도의 충격량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됨.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돌실험(슬레드 가속실험) 논문들의 공통된 결론은 속도변화 5~15km/h일 때 다수의 피해자들은 불편함을 호소한 적이 없었고 소수의 피해자들은 일시적인 불편을 호소했지만 특별한 치료 없이 수일 이내에 사라졌다. 따라서 충격력이 경미한 수준으로 보이며 이 충격력이 운전자의 현저한 운동변화(이로 인한 상해발생)를 초래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결과를 보내고 있다.
이유는 마디모를 안 했기 때문이다.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확인한 국과수 감정서에는 이상하게도 ‘마디모’라는 단어가 없다. 경찰에서 마디모를 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국과수에서는 마디모를 하지 않고 이런 감정서를 보내는 것이다. 마디모 분석을 했다면 마디모 분석과정과 결과가 기재돼야 하는데 마디모 분석을 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도 사는 곳마다 좋은 환경을 만든다. 미국의 노르웨이 이민자(移民者)들은 약 460만명으로 본국(本國) 인구와 같다. 본국 인구보다 많은 미국 이민자를 낸 나라는 아일랜드뿐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주(州)는 미네소타(16%), 노스다코타(30%), 사우스다코타(16%), 몬태나(12%), 위스콘신(9%)이다. 미국에서 만나는 백인 50명 중 한 명은 노르웨이 사람이다. 이들은 주로 중북부(中北部) 지방에 많이 산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 출신 이민자는 약 1200만명이다. 미네소타주는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32%, 독일계가 38%이다. 미네소타는 주민들의 건강상태가 52개주 중 1등이라고 한다. 범죄발생률은 52개주 중 14번째로 낮은 편이다. 미국에서 ‘미네소타주 출신’이라면 모범생으로 통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노스다코타는 범죄발생률이 52개주 중 세 번째로 낮다. 사우스다코타도 9위, 위스콘신이 8위, 몬태나주는 7위이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도 본국처럼 호수가 많고 추운 주에 모여 산다. 미네소타주는 별명이 ‘1만 개의 호수를 가진 땅’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모여 살면서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고 본국과 연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6·25 남침 전쟁 때 우리에게 의료지원을 해준 나라이고 국립의료원을 지어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1953년부터 2008년 사이 이루어진 한국 어린이의 해외입양 중 미국으로 입양된 수는 총 10만8222명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구성하고, 그다음이 프랑스 1만1165명, 스웨덴 9297명, 덴마크 8702명, 노르웨이 6295명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해외입양을 많이 수용한 나라는 스웨덴이다. 세계 130개국에서 4만5000명을 입양했는데, 인구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 입양국이다. 미국 내에서도 스칸디나비아계(系) 미국인들이 해외입양을 많이 받아들이는데, 미네소타주에는 1만5000~2만여 명의 한국 아동이 입양되었다. 이 수치는 미네소타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도 사는 곳마다 좋은 환경을 만든다. 미국의 노르웨이 이민자(移民者)들은 약 460만명으로 본국(本國) 인구와 같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주(州)는 미네소타(16%), 노스다코타(30%), 사우스다코타(16%), 몬태나(12%), 위스콘신(9%)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의 활동 경험을 통해 대안 세계화의 가능성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지난 2003년부터 약 10년간 전북 부안 지역 공동체의 아픔과 슬픔의 기억들이 어떻게 새로운 공동의 기억으로 대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등용마을이 에너지 자립마을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적 가치에 우선성을 두게 되었으며, 이것이 향후 어떻게 다양한 사회적 협동조합의 경험을 통해 지속가능한 마을 공동체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등용마을의 시공간적 특성을 부안의 역사, 문화, 사회정치적 갈등 경험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등용마을은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며, 변산 바닷가가 마을 서쪽으로 4km만 가면 위치해 있어 산, 바다, 들이 골고루 결합된 마을로 여기에는 30가구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50년 전 천주교 김대건 신부의 종손이 이 등용마을에 정착하면서 천주교라는 종교적 토양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둘째, 종교, 문화, 역사적 전통 이외에 부안지역이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갈등의 장소로 기억되는 것은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주민 반대운동이 전개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2003년 ‘위도 방사성 핵폐기물 처분장’ 추진에 반대하며 2년여 동안 치열한 반대투쟁을 전개한 결과, 300여 명이 넘는 지역주민이 구속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고통의 결과를 낳았다. 이후 1년이 넘는 촛불집회, 학생등교 거부운동, 고속도로 점거 등 수많은 반대운동과 최초의 독자적 지역주민 투표를 통해 유권자 중 72%의 투표에 92%가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했다. 마침내 2005년 9월에 핵폐기장 건설을 정부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이 갈등의 상처는 너무나 컸고 주민들이 겪는 외상(트라우마)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결과 지역주민 내 불신은 물론 외부 집단-정치, 언론, 심지어 시민사회-에 대한 불신 또한 극에 달했다.
둘째, 종교, 문화, 역사적 전통 이외에 부안지역이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갈등의 장소로 기억되는 것은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주민 반대운동이 전개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2003년 ‘위도 방사성 핵폐기물 처분장’ 추진에 반대하며 2년여 동안 치열한 반대투쟁을 전개한 결과, 300여 명이 넘는 지역주민이 구속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고통의 결과를 낳았다. 마침내 2005년 9월에 핵폐기장 건설을 정부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천하제일의 명의(名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편작(扁鵲)이 말했다.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치료하면 보통의사이고, 가벼운 병을 치료하여 중병을 앓지 않게 하는 의사가 명실공히 명의이며, 가벼운 병마저 앓지 않게 예방하는 의사가 신의(神醫)”라 하였다. 그러니까 몸의 안과 밖에 나타난 이상 징후를 알아차리고 병이 깊어지기 전 재빨리 치료하는 의사가 진정한 명의이다. 시기를 놓치고 난 뒤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중병을 고치기도 어려울뿐더러 고쳐 봐야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심하게 파손된 자동차 같아서 온전하게 오래 보존하지 못한다. 이런 의사는 그저 그런 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병의 결과만 보고 치료하는 요즘의 의술에 의탁하기보다 자기 몸은 자기가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기 몸에 발생하는 이상 징후는 자신이 가장 잘 알 테니 말이다. 몸의 안과 밖에 발생한 이상 징후를 알아차리고 어느 장부(臟腑)가 병마의 침입소식을 급히 보냈는지 알아두면 스스로를 위한 명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장육부에 침입한 병마가 어떤 전이과정을 거쳐서 중병을 앓게 하고 종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지부터 먼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어느 오장(五臟)이든 병이 들면 그 장부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장부로 옮겨가서 중병을 앓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첫째, 신장, 방광은 간담으로부터 사기(邪氣·병을 유발하는 나쁜 물질 또는 기운)를 받아서 병이 든다. 사기가 신장, 방광에 머물다가 심장, 소장으로 옮겨가 병들게 한 다음, 다시 폐, 대장으로 옮겨간다. 폐, 대장이 망가지면 마지막으로 비위(脾胃)로 간다. 이때 비위마저 병들면 천하에 둘도 없는 명의도 고칠 수 없다. 따라서 간담으로부터 사기가 신장, 방광으로 옮겨가기 전에 몸의 안과 밖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간담의 사기를 치료해야 한다. 신장, 방광이 병들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만약 이 시기를 놓쳤으면 심장, 소장을 치료해 폐, 대장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도 시기를 놓쳤으면 급히 서둘러 사기가 비위로 옮겨가기 전에 폐, 대장을 치료해야 한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천하제일의 명의(名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편작(扁鵲)이 말했다.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치료하면 보통의사이고, 가벼운 병을 치료하여 중병을 앓지 않게 하는 의사가 명실공히 명의이며, 가벼운 병마저 앓지 않게 예방하는 의사가 신의(神醫)”라 하였다. 그러니까 몸의 안과 밖에 나타난 이상 징후를 알아차리고 병이 깊어지기 전 재빨리 치료하는 의사가 진정한 명의이다.
이제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며, 더 이상 시장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오만한 과신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장을 이상화하고 정부를 불신하는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았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에서 벗어나 더 이상 정부의 규제, 행정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치명적인 오류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을 분리하는 대신에 더욱 가까운 관계로 설정한다. 그 이유는 정치, 경제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세계에서 애매모호하고(fuzzy), 예측가능하지 않은 세계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이제 금융안정을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경제성장과 고용을 관리하는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정부기구의 확대를 의미하기보다는 정부의 역할과 영향력, 즉 규제강화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서구의 민주주의와 인권원칙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권위주의적인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모델을 강화하여 왔다. 과연 서구의 민주주의 가치가 아니라 중국의 권위주의에 기초한 국가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미국이 새로운 정치방향을 잡아가는 데 헤매고 있고, 유로존이 위태한 상태이며,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해지고 있으며, 그리고 일본은 3·11 후쿠시마 원전사태 여파로 경제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중국만이 경제위기를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중국의 부상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서구 혹은 중국 중 어디에 둘 것인가 논쟁이 있다. 진정 자유경제를 강조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번영과 국력을 우선시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로 이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어쨌든 중국식 혹은 아시아 모델과 서구 자본주의 모델은 서로 충돌하거나 혹은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4.0’은 정부와 시장을 분리하는 대신에 더욱 가까운 관계로 설정한다. 그 이유는 정치, 경제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세계에서 애매모호하고(fuzzy), 예측가능하지 않은 세계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이제 금융안정을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경제성장과 고용을 관리하는 더 큰 책임을 맡아야 한다.
이후 두 달이 지났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A반은 10명 중에서 6명이 탈락했습니다. 이유는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4명은 그냥 다닌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가려면 논술을 해야 하고, 내가 좋고 싫고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공부가 좋아서 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B반은 한 명도 탈락이 없었습니다. 왜 계속 다니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냥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글을 읽든 자꾸 분석해서 저자의 머리를 찾고, 비판도 해 보고 하니까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두 반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A반 교사는 배경지식을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지식을 전수해 주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다차원적 사고 가운데서 생각의 1차원에 머물러 있는 교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열심히 받아 적고 지식을 자신의 머리에 축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교육을 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기존 뇌신경네트워크를 활용해서 그냥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있는 자신의 머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면에 B반 교사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어떻게 저자의 렌즈로부터 나왔는지를 분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이 저자의 머리에서 어떻게 나왔으며, 이 지식을 출제자가 어떻게 처리해서 문제를 만들고, 답을 요구하는지를 분석시킨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식을 생산하고 가공 처리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는 아이의 머릿속에 새로운 뇌신경네트워크를 만들어 주는 교육입니다. 선생님이 먼저 분석을 하면 아이들도 그것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분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좌뇌를 활용해서 기존의 지식을 분석하고, 또 우뇌로 분석한 지식을 새롭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면, 그때 새로운 뇌신경네트워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이들은 공부를 재미있어 합니다. 이러한 재미가 바로 지적 감동입니다. 이렇게 지적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그때 아이의 뇌신경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고력과 창의력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식을 생산하고 가공 처리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좌뇌를 활용해서 기존의 지식을 분석하고, 또 우뇌로 분석한 지식을 새롭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면, 그때 새로운 뇌신경네트워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이들은 공부를 재미있어 합니다.
미국 선거를 지켜보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주마다 또 같은 주에서도 카운티마다 다른 대의원 계산 방식이다. 대체로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전체 주의 대의원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제(Winner Take All·WTA)’가 가장 일반적인 대통령 선거 방식인데, 각 당 후보를 뽑는 과정은 이보다는 몇백 배 복잡했다. 민주당은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공화당은 이 방식과 승자독식제를 혼용한다. 게다가 승자독식 외에 ‘부분 승자독식’ 또는 ‘승자 절대다수 배분’ 방식까지 있어 표 계산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승자독식제가 적용된 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온전한 승자독식이 아니고, 하이브리드형이다. 대의원 50명 가운데 전체 득표율이 1위인 후보가 주 대의원 29명을 차지하고, 나머지 21명은 7개의 선거구에서 1위를 한 후보가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싹쓸이했다. 주 전체에서도 1위를 했고, 7개 카운티 각각에서도 모두 1위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텍사스와 조지아, 앨라배마, 버몬트 등은 ‘50대 20’ 규정이 적용되는 곳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은 후보가 독식하는 게 아니라, 과반을 넘겨야 하는 자격조건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1위 후보가 나머지 후보들과 대의원을 배분하는데, 1위 쪽에 대다수 대의원이 배분된다는 차원에서 ‘승자 절대다수 배분(Winner Take Most·WTM)’이라고 부른다. 하한선도 있어, 대의원을 배당받으려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려야 한다. 이 때문에 루비오는 20% 밑의 지지율 때문에 대의원 수에서는 상당히 손해를 많이 봤다. ‘50대 15’ 규정이 적용되는 곳(아칸소, 오클라호마)도 있고, ‘66대 20’ 규정(테네시) 등 복잡 다양한 방식이 다 동원된다. 최대 관심이 쏠리는 플로리다는 1위 후보가 99명의 대의원을 독식하는 ‘승자독식’ 방식의 경선을 치른다. 지금 여론조사만 보면 트럼프가 루비오를 앞선다. 그런데 플로리다가 승자독식주가 된 것은 최근이다. 당시 젭 부시가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면서 부시에게 힘을 몰아준다는 차원에서 득표 방식을 바꿨다. 그런데 부시는 일찌감치 탈락하고, 주의 대표격인 루비오가 트럼프에게 힘을 쓰지 못하면서 괜히 방식을 바꿨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의 세계에서 꼼수는 결국 이상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미국 선거를 지켜보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주마다 또 같은 주에서도 카운티마다 다른 대의원 계산 방식이다. 민주당은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공화당은 이 방식과 승자독식제를 혼용한다. 게다가 승자독식 외에 ‘부분 승자독식’ 또는 ‘승자 절대다수 배분’ 방식까지 있어 표 계산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박수를 받으며 의사당에 입장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긴 문장을 30분가량 읽었다. 그는 먼저 국무총리 인선문제를 다른 정파들이나 중요 지도자들과 상의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중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야 작정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 우리 형편에 각 정당과 사회의 규례가 충분히 짜이지 못한 중에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사정에서 자연 분규 문란한 상태가 이루어질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 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야 정부조직과 국무총리의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명록을 채용하야 전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승만은 이 추천명록이나 신문보도 등의 여론으로 미루어 국무총리 적임자로 가장 인망이 있는 사람이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민의와 또 내정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정부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다소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 일후에 정치상 풍운 변태가 다소간 정리된 후에 몇 정당이 각각 주의주장으로 대립하여서 공선을 따라서 그 정당이 득세하는 날에는 득세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다른 정당은 다 정부에 참여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형편이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중에 몇몇 정당을 포함해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게 되는 중에서 행정처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 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의 선도자로 지목받는 이가 피임되면 다소간 난편(難便)한 사정이 있을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승만은 이 추천명록이나 신문보도 등의 여론으로 미루어 국무총리 적임자로 가장 인망이 있는 사람이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민의와 또 내정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피자, 케이크 같은 것은 정확히 자르거나, 분할 선택법을 통해 조각을 잘라 내어 분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과 같이 나눌 수 없는 물건이거나, 보석처럼 조각냈을 때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물건이라면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이런 경우 봉인된 입찰법(The method of sealed bids)을 통해 물건을 분배하는데, 총 3단계로 진행된다. ① 참가자는 물건 각각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적어 입찰한다. 입찰이 끝나면 각자의 입찰 금액을 모두 더한 뒤, 인원수로 다시 나누어 각자의 몫을 구한다. ② 각각의 항목에 대해 가장 높은 금액을 적은 사람은 해당 물건을 분배받는다. 자신의 몫보다 높은 가치를 배당 받았다면 차액을 지불하며, 자신의 몫보다 낮은 가치를 배당받았다면 차액을 현금으로 배당받는다. ③ ②에서 모인 차액이 부족한 이에게 배당되고 난 뒤, 남았다면 입찰에 참가한 인원수로 나누어 재분배한다. A, B, C 세 명이 시계, 카메라, 선글라스 세 개를 나누어 가지기 위해 봉인된 입찰법을 진행한다고 해 보자. 다음은 A, B, C가 각자 세 개의 물건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로 입찰한 결과를 표로 정리한 것이다. 입찰 결과 시계에 가장 가치를 높게 둔 사람은 C이며, 카메라와 선글라스는 A가 가장 높게 가치를 두었다. 그 결과 C는 시계를 배당받는데, C가 생각하는 시계의 가치는 150만원이며 자신의 몫은 110만원이므로 차액인 40만원을 지불한다. 마찬가지로 A는 카메라와 선글라스의 가치 260만원과 자신의 몫 120만원의 차액인 140만원을 지불하며, 아무것도 받지 못한 B는 60만원을 현금으로 배당받는다. C와 A가 낸 금액과 B가 받은 금액을 정리하면 40만원+140만원-60만원=120만원이 되는데, 이 금액을 세 명이서 40만원씩 나눠 받으면 분배가 완료된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세 개의 물건 가치의 1/3만큼 배당을 받았으므로,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공평하게 분배가 된 셈이다. 단, 봉인된 입찰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피자, 케이크 같은 것은 정확히 자르거나, 분할 선택법을 통해 조각을 잘라 내어 분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과 같이 나눌 수 없는 물건이거나, 보석처럼 조각냈을 때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물건이라면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이런 경우 봉인된 입찰법(The method of sealed bids)을 통해 물건을 분배하는데, 총 3단계로 진행된다.
—북방민족의 고유한 문자나 사서는 없었나요. “한대 이후 돌궐이나 말갈 등은 고유문자가 있었지만, 그 이전 북방민족의 문자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된 바 없습니다. 기록도 중원민족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고대 북방민족의 사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요.” ‘오랑캐’의 사전적 의미는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다. 그러나 오랑캐로 칭해진 그들도 농경을 했고, 기후의 변화에 따라 삶의 수단을 변화시켰다. 초기에는 변화된 자연환경에 목축으로 대응했고, 더 척박해진 다음에는 유목으로 삶을 영위했다. 정착할 수 없었기에 말을 길들여 이동 수단으로 삼았고, 불안정한 여건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청동기의 칼날을 벼려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예술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지배층은 황금장식으로 권위를 높이며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고, 전사(戰士)의 청동무기에는 익숙하고 수호적 의미를 담은 각종 동물 문양을 조각했다. 전술도 빼어났다. 기동력 빠른 준마와 날렵한 전차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필요한 것들을 얻은 뒤 바람처럼 초원 저 깊은 곳으로, 육중한 전차 따위로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원으로 사라졌다. 오죽했으면 상나라 왕조는 융과 같은 계열의 강(羌)족을 증오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제사의 제물로 썼을까. 하지만 그들의 약탈은 곡물과 같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결코 세상 누구로부터도 ‘오랑캐’로 여겨질 만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 아니었다. 없었던 것은 오직 문자와 사서뿐이었다. 어쩌면 이동이 잦은 생활 탓에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역사의 기억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구전되는 과정에 하나씩 기억에서 사라지고, 특히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는 서둘러 잊었을 것이다. 남들이 칭하는 ‘오랑캐’라는 치욕의 이름도 그렇게 잊으려 했겠지만, 결국 ‘오랑캐’라 기록한 사서와 자신들 사서의 부존재는 영원히 그 오명을 벗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역사의 의미가 새삼 두렵지 않은가? 그런데 그보다 더한, 아주 희미한 기억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찬란한 황금문명도 있었다.
‘오랑캐’의 사전적 의미는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다. 그러나 오랑캐로 칭해진 그들도 농경을 했고, 기후의 변화에 따라 삶의 수단을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예술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었다. 전술도 빼어났다. 결코 세상 누구로부터도 ‘오랑캐’로 여겨질 만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눈물을 훔친다. 탄자니아 남부 오지에서 살다 린디로 공부하러 나온 늦깎이 만학도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임스는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우며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수많은 토속신앙을 숭배하는 가운데 그가 이방종교를 선택한 까닭은 뭘까? 과거 인도양을 따라 무역을 통해 이슬람이 많이 전파되었고, 내륙은 유럽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포교를 진행해 왔다. 상대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 토속종교는 외부종교와의 혼합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금도 아프리카의 이슬람교와 기독교에서는 엄격한 종교적 율법 외에 수백 수천 년을 이어 온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지키고 있다. 이제 갓 종교에 귀의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나를 보더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이 험한 길을 어찌 오셨습니까? 맙소사, 당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니 너무 슬픕니다.” 그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꺼이꺼이 울어 젖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고생은 하고 있지만 난 괜찮다. 그러니 그의 감정 표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다음엔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다. “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먼 곳에서부터 왔다니요.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이 대단하긴 하지만 고생한 걸 생각하니 한편으론 너무 불쌍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들의 감수성이 예민한 건지, 남부 현지인들의 감정이 유난히 풍부한 건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눈에는 내가 너무 불쌍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사는 이들에게 나는 오히려 위로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격려를 받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함이 전해진다. 묘한 기분이다. 물론 고맙기도 했다. 그들은, 행복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양 팔을 벌려 안아 준다. 그들의 체온을 느끼고, 마음을 느끼고, 나는 어느새 콧등 시리게 감동을 받고 있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탄자니아 남부 오지에서 살다 린디로 공부하러 나온 늦깎이 만학도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임스는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우며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수많은 토속신앙을 숭배하는 가운데 그가 이방종교를 선택한 까닭은 뭘까? 이제 갓 종교에 귀의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나를 보더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원리를 가장 알기 쉽게 해부한 소설 《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갈파했다. 체제 투쟁은 엘리트와 대중의 역사관을 어느 세력이 장악하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일명 ‘의식화’라고 하는 세뇌 작업인데, 나라의 현 체제와 사회현상에 대해 부정적 의식을 배양케 하여 사회변혁운동에 나서도록 하는 일종의 좌경의식 주입 작업을 가리킨다. 역사관을 장악, 지배하게 된다면 곧 국가 전체를 장악해 길이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좌익 혁명 세력이었던 이른바 ‘386 세력’은 1987년 ‘민주화’ 직후부터 중고생들의 역사교육을 통한 의식화 작업에 많은 힘을 쏟았다. 지난 11월 28일에 드디어 국정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공개되었다. 2003년부터 생산된 금성출판사의 검정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는 좌편향성이 도를 넘었었다. 그리고 2010년부터 생산되어 채택된 검정 한국사 교과서들의 현대사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교과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현 정부가 국정으로 한국사 교과서를 편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정하고 좌경 기득권 세력의 음해와 저항을 무릅쓰고 1년에 걸쳐 만든 것이다. 기존에 교육 현장에서 채택해 사용하고 있는 검정 국사 교과서들의 현대사 부문 서술은 기본적으로 이른바 ‘민족 민주주의 혁명(NDR)’ 전략에 입각해 있다. ‘민족 민주주의’는 제3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정체·사회주의 혁명 추진 노력을 감추고 비사회주의 세력들도 동조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내용의 강령, 즉 민족주의·민주주의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춘 강령을 제시하여 비사회주의 세력들과 연대한 반제국주의(반미 및 반서방을 의미) 투쟁과 친사회주의적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표명한 잠정적 사상이자 정권 조직 형태라고 할 수 있다(양동안, 2011, 《사상과 언어》). 이 사상의 북한식 형태가 북한의 남한혁명 전략인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 전략이다.
2003년부터 생산된 금성출판사의 검정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는 좌편향성이 도를 넘었었다. 지난 11월 28일에 드디어 국정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2010년부터 생산되어 채택된 검정 한국사 교과서들의 현대사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월남에 갔다. 채명신(蔡明新) 사령관이 떠나고 이세호(李世鎬) 사령관이 왔다. 부대는 1969년 11월 ‘창군기념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단위의 대규모 작전을 벌였다. 적(敵)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포위하고 일주일 동안 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사단 전체가 전혀 전과(戰果)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당황했다.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우리의 작전구역 바깥 지역은 미 공군이 일주일 동안 폭격을 했다. 그곳은 조용했다. 어쩐지, 그곳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육사 동기생인 사단 작전참모에게 “미군이 폭격한 지역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그는 미군과 연락을 해보더니 “미군이 못 들어간다고 한다. 그곳은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들어가고 싶어졌다. “미군이 일주일을 폭격했는데, 어떻게 견디겠나? 아마 이미 궤멸했을 것이다. 들어가 보겠다.” 미군 측에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들어가겠다면, 들어가라”고 했다. 박민식 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헬기를 타고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적지(敵地)로 들어갔다. 교전(交戰)이 벌어졌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했다. 박 대위에게 “이상 없느냐”고 했더니, “이상 없다”고 했다. “뒤져보라”고 했다. 적 사단사령부에는 각종 중화기를 비롯한 1개 사단분의 장비와 1년치 식량 등이 있었다. 적군은 모두 도망쳐서 아무도 없었다. 부상병 한 명만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노획한 전리품(戰利品)을 가져오려는데, 방법이 없었다. 공병 1개 중대를 요청해 헬기 착륙장을 만든 후, 일주일 동안 전리품을 실어 날랐다. 총알 한 방 안 쏘고, 한 명의 사망자, 부상자도 없이 거둔 전과였다. 사실은 거저주었다는 편이 옳다고 할까. 응우옌 반 티에우 월남 대통령을 비롯해 월남군, 미군, 한국군 요인들이 전리품을 보러 왔다. 이 일로 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대대장이 무공훈장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적 사단사령부에는 각종 중화기를 비롯한 1개 사단분의 장비와 1년치 식량 등이 있었다. 적군은 모두 도망쳐서 아무도 없었다. 부상병 한 명만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노획한 전리품(戰利品)을 가져오려는데, 방법이 없었다. 공병 1개 중대를 요청해 헬기 착륙장을 만든 후, 일주일 동안 전리품을 실어 날랐다.
오경석은 1866년 병인양요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했다. 오경석은 더 늦기 전에 자주적으로 개국을 실현하고 개혁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체성이 강한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에 준비를 갖추어 개국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오경석은 청국에서 구입해 온 신서를 우선 그의 친구인 유홍기에게 먼저 읽도록 했다. 그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다. 둘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개혁 필요성에 공감한 후 일본을 자주 왕래하던 이동인(李東仁)과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조선의 개혁 방향에 관해 논의했다. 그리고 오경석은 유홍기에게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켜 개혁운동을 추진해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인 신분의 오경석이나 유홍기로서는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오경석은 1869년 평안도관찰사에서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한 박규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오경석과는 이심전심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 자제들을 교육해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해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1869년 말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완전히 동지로 결합했다. 1870년 초부터는 서울 북촌 재동의 박규수 자택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박영효·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이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신서들을 교재로 국제정세의 변화와 근대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세력의 정치적 당파가 형성되었다. 이들 청년들은 1877년 박규수가 죽자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 등의 문하에 출입하다가, 오경석이 사망하는 1879년 이후에는 유홍기와 강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오경석은 1866년 병인양요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했다. 오경석은 더 늦기 전에 자주적으로 개국을 실현하고 개혁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은 기업에 있어 아직 유치하다 한 점이 무불하나 그러나 기업회사의 불입(拂入)자본을 보면 1911년에 15,910천원이었던 것이 1926년에는 21,061천원이 되었으니 그 격증률(激增率)이 실로 배가 된다. 그리고 이 자본 중에 조선인 자본은 근(僅)히 10.3%(1926년도)에 불과하다. -(이하 26행 삭제)– 5 -(3행 삭제)- 이 전략을 세움에 있어 조선의 사회적 조건을 먼저 살펴보자! 근대문명이 조선에 수입된 이후에 그 산업 정책의 발달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야 앙진(昻進)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에는 아직까지도 외국에 비하야 공업의 발달이 부족하고 농촌경제가 중심세력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현재 조선의 (1926년 통계에 의하면) 공업노동자가 겨우 남녀 합하야 8만600여 인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도 조선의 공업이 경제상 중심세력을 못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직도 그 발전의 여지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근대문명이 조선에 수입된 이후 조선 내에 있어 공업의 발달이 일(日) 증가하고 공업경제가 그 세(勢)를 만연하는 것이 사실이나 조선의 공업은 방적, 제사(製絲), 착금(○錦)고무 등 소비공업의 발달됨이 있을 뿐으로 ×××의 생활품의 소비시장으로서의 가치를 면치 못하였고 공업 원료는 재료 그대로 외국에 수출되는 것이 현하 조선의 경제중심이 아직도 농촌경제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농촌경제가 경제계의 중심세력이 되어 있는 이만큼 봉건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어 그것이 비록 봉건적 지배제도로서 존재치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잔재가 여전히 은연중에 여성을 가정 제도에서 사회적 관습에서 그 질곡에 신음케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분위기가 일반 사회를 에워싸고 돌며 여성운동의 분위기에도 이것이 둘러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 즉, 다시 말하면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 그 자신도 이 봉건적 관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고 또 과거의 무지가 여성의 사회적 기능에 있어 일반운동에 미급(未及·아직 미치지 못함-편집자)되어 있고 따라서 봉건적 잔재에 여지없는 유린을 당하는 등 사실이 우리 사회에 암류(暗流·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온한 움직임-편집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에는 아직까지도 외국에 비하야 공업의 발달이 부족하고 농촌경제가 중심세력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현재 조선의 (1926년 통계에 의하면) 공업노동자가 겨우 남녀 합하야 8만600여 인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도 조선의 공업이 경제상 중심세력을 못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아직도 그 발전의 여지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하나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이 경우 국민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존재를 초월하여 하나의 집단적 개체로 설정된다. 국민을 하나의 유기체(有機體) 또는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하나 속에 개개인은 전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부품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집단적 개체를 대표한다는 존재에 의해 모두가 통제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 집단적 개체는 스스로 전체이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가 따로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런 논리에 선 체제에서 어긋나는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제거돼야 한다. 즉 개개인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평등은 실현되기는 하지만 자유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런 국민주권의 현실태(現實態)를 전체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와는 아주 다른 국민주권의 실현방식이다. 우선 그것은 개개인의 평등에 더하여 자유를 인정한다는 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평등한 개개인은 각기 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로 인정된다. 그런 상이한 의견들을 보유한 개개인은 모두가 주권행사에 참여할 당연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평등과 동시에 자유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주권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복수(複數)의 집단을 이루고 이들이 서로 경합(競合)하는 가운데 주권자 개개인의 의사가 표출되게 함으로써 정치적 자유를 통한 주권행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 제도적 장치가 투표다. 이를 통해 대의제(代議制) 또는 대표제가 성립된다. 이런 제도에 의한 권력행사는 그것이 국민주권이란 명분으로 독재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권력을 행사하게 한다. 이런 사상에 근거한 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체제라 한다는 것이다. 노 전 총리는 “대의제 또는 대표제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 즉 국민주권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편의적 차선책(次善策)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덧붙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평등과 동시에 자유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주권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복수(複數)의 집단을 이루고 이들이 서로 경합(競合)하는 가운데 주권자 개개인의 의사가 표출되게 함으로써 정치적 자유를 통한 주권행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 제도적 장치가 투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데 술집 근처에 장미꽃을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답니다. 그 아주머니가 자꾸 쫓아오며 꽃을 사달라고 해서 술김에 한 송이를 사게 되었답니다. 하도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기는 하였는데 버릴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지고 가게 되었답니다. 초인종을 누르니 마누라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문을 열어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손에 들려 있는 장미를 본 것이지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물끄러미 다시 한 번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장미 왜 사왔어?”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답니다. 장미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주려고 사왔지” 무심결에 한 얘기지만 갑자기 마누라가 감동을 받더랍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잡히고 이런저런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그동안 잘못했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결국 부인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다고… 왜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두 사람은 서로 순간 당황했지만… 결국 장미꽃 한 송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복원해 준 것이지요. 사실은 아무 의미 없이 장미꽃을 사게 되었고 버릴 수 없어서 가져왔지만 그 장미꽃이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연결해 준 것이지요. 그는 마누라에게 장미꽃을 주면서 아무 말 없이 꼭 껴안아주었답니다. 사실 할 얘기도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마누라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미안한 마음도 많아 흐르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더랍니다. 그 이후 그는 부인과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답니다. 그날 이후 그가 결심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택시 운전이랍니다. 그래서 그는 집안 식구들 몰래 택시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택시 회사를 찾아가서 사장님과 면담을 하였답니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면서 “잘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자존심 상하고, 식사 제때에 할 수 없고, 나이 먹은 사람이 하루종일 좁은 차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줄 아느냐?”면서 여러 번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였지만 결심이 확고한 그분의 모습에 결국 열심히 해보라면서 흔쾌히 열쇠를 내주었답니다.
사실은 아무 의미 없이 장미꽃을 사게 되었고 버릴 수 없어서 가져왔지만 그 장미꽃이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연결해 준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데 술집 근처에 장미꽃을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답니다. 그 아주머니가 자꾸 쫓아오며 꽃을 사달라고 해서 술김에 한 송이를 사게 되었답니다. 하도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기는 하였는데 버릴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지고 가게 되었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분노하는 백인’에 주목했다. 자유무역을 하면서 자신의 일자리가 날아갔다고 여기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이번 경선에서 분노의 한 표를 던지면서 판세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미시간에서 승리한 이유가 바로 백인의 분노라고 해석했다. 트럼프는 워낙 외국에 대한 적대감을 일찌감치 드러냈고, 한국에 대해서도 방위비 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하면서 미국인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제대로 먹혀 미시간주 경선에서 트럼프는 남성 유권자 43%의 지지를 얻었다. 트럼프보다 백인 노동자의 덕을 본 후보가 샌더스다. 여론조사만 보면 샌더스는 힐러리에게 미시간에서 지는 걸로 나왔다. 그러나 TV토론과 유세 과정에서 샌더스는 계속해서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유일한 후보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미시간 지역 경제가 자유무역협정 통과로 어려워졌다는 인식을 갖는 유권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이었다. 디트로이트 등 공업도시가 많은 미시간에서는 샌더스의 주장이 먹혔다. 부동층이던 이들이 샌더스에게 무더기 표를 던지면서 힐러리 캠프가 비상이 걸렸다. 힐러리는 자유무역협정을 상원의원 때도 찬성했고, 국무장관을 하면서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도한 경력이 있어서다. 한때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한 북·중서부 제조업 지대를 일컫는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샌더스에 가세하면 의외의 고전을 할 수도 있다. 샌더스는 오하이오와 일리노이, 4월 5일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에 희망을 걸고 있다. 미시간에서 17%포인트나 뒤지던 여론조사를 역전승(2%포인트 승리)으로 만들어낸 저력을 발휘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는 인종도 초월했다. 백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흑인 유권자의 30% 가까이도 출구조사 분석결과 샌더스에 동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CNN과 AP통신 등은 “샌더스가 ‘TPP는 미국인 노동자에게는 재앙이었다’고 선전하면서 좋은 결과를 미시간에서 얻었고, 중서부 공업지대인 오하이오, 일리노이에서도 더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워낙 외국에 대한 적대감을 일찌감치 드러냈고, 한국에 대해서도 방위비 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하면서 미국인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제대로 먹혀 미시간주 경선에서 트럼프는 남성 유권자 43%의 지지를 얻었다.
이승만에게 사사건건 앞장서서 반기를 들던 김상돈이 사고를 저질렀다. 2월 27일에 자기가 몰던 지프차로 길에서 놀던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마포의 자기 집에서 두 가족과 호위 경관 두 사람을 태우고 시공관으로 가던 길에 아현동 로터리에서 정한진(丁漢鎭)이라는 여덟 살 난 아이를 치어 30분 만에 숨지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뒤의 조치였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김상돈은 두 호위 경관에게 이 사실을 엄비에 부치고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두 경관은 마포구청으로 가서 재무과 차석 오봉갑(吳鳳甲)에게 아이가 전날 병사한 것으로 허위 신고하여 즉석에서 화장인허를 받고 묘지사용 허가증까지 발부받아 화장하여 매장했다. 김상돈과 두 경관, 그리고 마포구청 직원은 서울지검 최복렬(崔福烈) 검사에게 불구속으로 취조를 받고 4월 13일에 업무상 과실치사, 허위 유인(有印)공문서 작성 교사, 허위 유인공문서 작성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었다.50) 이 사건에 대하여 기자들의 서면질문을 받고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권상 제일 중요한 것이 생명재산 보호권이요, 정부의 제일 중요한 책임도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민법특별조사위원 중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서 어린아이를 치어 죽였다는데, 그 후에 경찰이 조사해서 사실을 소상히 보고할 기회를 주지 않고 시신을 없이했다는 보고를 들었으나, 경관들과 검찰관들이 다 정당히 조치할 줄로 믿고 조치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종시 아무 소리가 없으므로 법무당국에 물은즉 사실을 조사는 했으나 특별한 조치는 없게 된 것을 알기에 이르렀으니, 나로서는 대단히 놀랍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법으로 판단하고 공포해서 민중이 알아야 되겠는데, 아무 판단 없이 그냥 덮어주고 말면 경관과 검찰관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오직 특별조사위원 중 몇 사람들이 반민법을 진행한다는 명의로 헌법에 대치되는 일을 행해서 치안에 많은 동요가 있게 되므로 나로서는 이런 일을 법적으로 교정하기를 수차 선언하였으나 국회의원 중에서도 여러분이 협의하여 국회에서 조처하겠다고 누차 말한 분도 있었고 행정 장관 중에서도 순조로 막겠다고 담보하는 고로 기다리고 있던 중인데, 한 가지 양해된 것은 경찰이 조사위원의 명령으로 반민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것만은 막아서 조사위원들이 평민을 고용하여 특경대를 만들어 사람을 자유로 잡아 가두게 된 것이니, 이것이 다 위법한 행동이다. …”
이승만에게 사사건건 앞장서서 반기를 들던 김상돈이 사고를 저질렀다. 2월 27일에 자기가 몰던 지프차로 길에서 놀던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김상돈은 두 호위 경관에게 이 사실을 엄비에 부치고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두 경관은 마포구청으로 가서 재무과 차석 오봉갑(吳鳳甲)에게 아이가 전날 병사한 것으로 허위 신고하여 즉석에서 화장인허를 받고 묘지사용 허가증까지 발부받아 화장하여 매장했다.
—최근 발간된 리콴유 회고록에는 중국의 강경외교노선에 대한 우려도 들어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의 외교정책은 앞으로도 비교적 강경노선을 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개혁·개방 초기에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른 구조조정을 했지만 지금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 부상에 따라 내수촉진 등 자국 상황에 맞는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또 경제발전이 일정 단계에 들어서면 국방력 강화를 꾀하게 됩니다. 중국이 지금 바로 그 단계에 들어서 점점 군비를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주변국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현재 중국 외교정책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15년쯤 뒤 중국이 정말 강대국, 즉 고소득국가가 되었을 때는 다른 국가들이 중국 시스템과 조율하며 개혁이나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향후 15년간의 외교정책이 가장 어려울 것입니다.” 솔직하지만 주변국으로서는 상당히 우려되는 발언이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전통적인 영토 확장, 패권주의적인 면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사분쟁도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죠. 이런 점이 주변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996년부터 싱가포르에 있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러시아, 베트남, 인도 등과의 접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기에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국가입니다. 해상문제 해결에는 경험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또 미국과 달리 중국은 외교정책이나 군사현대화 등에서 여전히 투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 때문에 주변국이 불안해하기는 합니다. 경제성장으로 G2의 지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중국은 지금 산적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 국제 문제에는 수동적입니다. 더구나 중국의 시스템은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내부다원주의입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데도 외교부 한 곳이 아니라 당 대외연락부, 국방부, 상무부 등 여러 곳이 관여하죠. 심지어는 지방정부 국유기업의 외국투자업무까지 외교교섭으로 간주합니다. 외교부의 역할이 방만하면서도 너무 좁은 거죠.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 같은 부서도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패권을 추구할 수 있겠나 하는 거죠. 미국의 패권계획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 유럽, 독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대응할 뿐이지 패권계획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국가입니다. 해상문제 해결에는 경험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또 미국과 달리 중국은 외교정책이나 군사현대화 등에서 여전히 투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 때문에 주변국이 불안해하기는 합니다. 미국의 패권계획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 유럽, 독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대응할 뿐이지 패권계획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반도호텔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조선호텔을 고급장교 숙소로 정했다. 일본군의 항복문서조인식은 9월 9일 오후 3시45분에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쪽에서는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미군을 대표해서 하지 중장과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해군대장이 수락서명을 했다. 서명식은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후 4시를 기하여 남한 전 지역에서 일장기의 게양이 금지되고 사람 눈에 뜨이는 곳에 있는 일장기 및 일장기 표지는 제거하게 했다. 오후 4시30분이 되자 총독부 정문 앞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73) 항복조인식이 끝나자 ‘미국태평양육군총사령관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가 함께 공포되었다. 흔히 ‘맥아더 포고’로 통칭되는 ‘포고 제1호’는 먼저 “일본국 천황과 정부, 그리고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된 항복문서의 조항에 따라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오늘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지역을 점령한다. 한국국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한다는 결의를 유념하면서 점령의 목적은 항복문서의 이행과 한국인들의 개인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임을 확인한다.…”고 전제하고,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미국태평양육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으로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지역과 그곳 주민에게 군정을 수립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6개조로 된 점령 조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 및 이 지역의 주민에 대한 행정권은 당분간 자신의 권한하에서 시행하고(제1조), 정부, 공공단체 및 명예단체의 모든 직원과 고용원, 공공복지 및 공중위생을 포함한 모든 공공시설 및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임원과 고용원, 그리고 다른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별명이 없는 한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일체의 기록과 재산을 보관하는 데 힘써야 하며(제2조), 점령군에 대한 적대행위나 치안 교란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제3조), 주민의 소유권은 존중된다(제4조)고 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군정기간 중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하고, 영어문장과 한국어 또는 일본어 문장 사이에 해석이나 정의에 불명료한 점이나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문장을 기본으로 한다고 한 조항(제5조)이었다. ‘포고 제2호’는 범죄자 처벌에 관한 내용이었고, ‘포고 제3호’는 통화(通貨)에 관한 것이었다.74) 포고문은 전국의 주요 거리에 나붙었다.
일본군의 항복문서조인식은 9월 9일 오후 3시45분에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쪽에서는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미군을 대표해서 하지 중장과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해군대장이 수락서명을 했다.
테비타 보세와콰(Tevita Boseiwaqa) 국토부 차관은 국방부와 산업부 등 핵심 부서에서 차관을 역임한 소위 ‘실세’ 차관 중 한 명이다. 바이니마라마 수상의 측근으로 분류된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지요. 그 전에는 한국을 막연히 선진국 중 하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 보니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룩한 나라였더군요. 이번 한국 방문은 피지의 발전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장 크게 감명을 받은 부분은 뛰어난 국가 기반 시설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교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서울 등의 도시뿐 아니라 교외 지역의 도로와 거주 시설이 잘 개발된 것을 보았습니다. 도시와 교외 지역의 동반 발전이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 음식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 다음에 방문했던 중국에서의 기름진 음식만 아니었다면 체중도 좀 줄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피지의 다양한 자원 중, 피지 정부가 중점적으로 개발하는 자원은 어떤 자원인지요. “대부분 아직 개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첫째, 물자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물자원의 개발이 수동적으로, 필요로 하는 지역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물자원 개발을 위해 피지 정부가 직접적·능동적으로 나설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산림자원입니다. 체계적인 조림 사업과 병행한 산림자원 개발 계획을 수립 중입니다. 셋째는 유기농 농작물입니다. 얼마 전 수바 근교에 위치한 방가완이라는 섬에 다녀왔는데, 이 섬은 토양이 매우 비옥해 아무런 화학 비료 없이 유기농으로 키웠는데도 카사바나 타로의 작황이 마치 비료와 농약을 사용한 것처럼 좋았습니다. 피지에는 방가완처럼 비옥한 토양을 가진 지역이 많습니다. 아쉬운 점은 아직 이런 지역들 대부분이 휴지 상태입니다. 앞으로 유기농 작물 사업을 장려할 예정입니다.
테비타 보세와콰(Tevita Boseiwaqa) 국토부 차관은 국방부와 산업부 등 핵심 부서에서 차관을 역임한 소위 ‘실세’ 차관 중 한 명이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바이니마라마 수상의 측근으로 분류된다.
야구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인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는 SABR와 metrics의 합성어이다. 세이버메트릭스 창시자인 빌 제임스(Bill James)는 미국야구연구협회인 SABR(The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라는 모임을 만들어 야구의 모든 기록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냈다.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 차원에서 야구를 분석하는 데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모든 구단에서 야구단을 운영하기 위해 기본 데이터로 사용하고 이 기록을 바탕으로 팀을 운영한다. 즉, 각 팀 더그아웃의 주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스포츠에 빅데이터를 접목시켜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팀 전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전문가를 세이버메트리션(sabermetrician)이라 부른다. 이들은 야구에 관한 모든 지표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분석한다. 최근에는 더그아웃에서뿐 아니라 해설자, 전문 기자, 스포츠 칼럼니스트와 일반인들까지도 다년간 누적해 온 야구 기록에 대한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세이버메트릭스를 바탕으로 야구 경기 분석을 하기도 하고 선수들과 구단 간의 연봉 협상 시 이 방식의 분석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많은 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가난한 구단이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98년 빌리 빈(Billy Beane)이 단장으로 취임한 이후 2000년대에는 거의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강팀이 되었다. 특히 2002년에는 아메리카 리그 사상 최초 20연승을 하며 그해 프로야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이 되었다. 이는 홈런이나 타율이 높은 타자보다 출루율이 높은 타자가 득점확률이 높다고 제시한 ‘머니볼(money ball)이론을 바탕으로 예산이 적은 스몰마켓팀이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하는 운영방식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빅마켓팀에서도 스타선수나 높은 타율, 홈런 등의 요소가 아닌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머니볼 이론을 야구단 운영에 적용하였다. 대표적으로 빅마켓팀인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8년 이후 월드 시리즈 우승이 없었는데 2004년 세이버메트리션을 기용한 후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리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보스턴 레스삭스는 이후에도 2번이나 더 우승을 하였다.
미국의 많은 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가난한 구단이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98년 빌리 빈(Billy Beane)이 단장으로 취임한 이후 2000년대에는 거의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강팀이 되었다. 특히 2002년에는 아메리카 리그 사상 최초 20연승을 하며 그해 프로야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이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상으로서의 보수주의’는 안정 속에서 자유와 번영을 영위하면서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민주헌정의 전통이 일천한 한국에서 보수주의를 기준으로 정치사상이나 세력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더 정확하고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프레임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사상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은 특별한 가치평가가 내포되지 않은 대명사적 용어인 좌익(左翼·the Left)과 우익(右翼·the Right)으로 호칭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아도 타당하고, 다른 나라의 예에 비추어 보아도 옳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어가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부터다. 1945년 9월 중순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및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서는 한국민주당이 등장한 이후부터 좌익과 우익이란 용어의 사용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말 발표된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1946년 1월 남한의 정치세력이 선명하게 양분되면서 신탁통치 찬성 편에 가담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주변세력을 좌익, 반대편에 가담한 이승만·김구·한민당 중심의 세력을 우익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어 왔다. 1970년대 이후 사상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희박해지고, 또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보다는 ‘보수’와 ‘혁신’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는 일본의 좌편향 풍조가 이 나라 언론계와 정계에 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는 사회주의혁명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던 이 나라의 운동권이 자기들을 진보세력이라 부르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음에는 수구(守舊)세력, 얼마 후에는 보수세력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운동권에 동조적인 언론계 종사자들이 그런 호칭법을 추종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좌·우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극히 희소해졌다. 혁명운동권은 좌익·우익 호칭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수구꼴통’, ‘극우(極右)’로 매도했기 때문에 그 호칭법을 피하게 된 것이다.
사상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은 특별한 가치평가가 내포되지 않은 대명사적 용어인 좌익(左翼·the Left)과 우익(右翼·the Right)으로 호칭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아도 타당하고, 다른 나라의 예에 비추어 보아도 옳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어가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부터다.
한국인이 ‘따라가는 선진화’에 빠져든 것은 지배층이 중국의 한자와 한문과 서적을 가져다가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삼으면서였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선비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을 무기로 삼아 기존의 불교세력과 친원세력(親元勢力)을 몰아내고,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를 세우게 됨으로써 ‘따라가는 선진화’가 한층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은 학자(學者)와 사제(司祭)와 관료(官僚)의 구실을 아울러 하면서 유일한 지배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자, ‘따라가는 선진화’를 통치 근간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상태로 500년 동안이나 계속 따라서 배우면서 사대(事大), 중화(中華), 모화(慕華), 소중화(小中華), 동국(東國), 정학(正學), 이단(異端), 도통(道統), 진서(眞書), 언문(諺文)의 논리로서 따라가는 선진화를 펼쳐나갔다. 이런 일이 잘 이뤄지도록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책임을 진 최고의 우두머리가 임금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는 소국인 조선이 대국인 중국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모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며, 소중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 배워서 이 땅에 작으나마 중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동국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바라본 상황에서 동쪽에 있는 나라인 조선을 말하고, 정학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을 말하며, 도통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요순문무(堯舜文武)에서 공맹정주(孔孟程朱)로 이어지는 중국의 학문 전통을 말한다. 이단은 성리학에서 벗어난 모든 학문을 말하고, 진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말하며, 언문은 조선의 말을 적는 훈민정음을 말한다. 그들은 중국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분석하고, 진단하고, 처방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니 그들은 제 임금을 군주(君主), 제 말을 방언(方言), 제 글을 언문(諺文), 제 문화를 동속(東俗)이라고 낮추어 불러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조선시대 사대는 소국인 조선이 대국인 중국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모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며, 소중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 배워서 이 땅에 작으나마 중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통일로(서울역 네거리에서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에 이르는 47.6km의 국도) 주변에는 통일로 공원묘지를 비롯하여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 땅에 고향을 두고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와 정착한 사람들의 선영이 집결되어 있다. 임진각에 마련되어 있는 망배단(望拜壇)에서 합동 제례를 거행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 동기(한 발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 묻히고자 하는)로 조성된 묘소들이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배우 신영균(전 국회의원)씨의 모친도 이곳에 영면해 있고, 우리나라에서 현금자산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알려진 태평양화학(아모레화장품 본포) 서성환 회장(황해도 평산)의 신후지와 선영도 이 부근에 있다. 임진강의 흐름을 굽어보는 자리에 조선조 태종, 세종, 문종의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영의정 황희(黃喜)와 그의 아들로 역시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黃守身) 부자의 묘소가 지척에 잠들어 있고 임진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그를 기리어 지은 누각 반구정(伴鷗亭)이 있으나 안타깝게도 황희 부자의 묘소는 지척에 진혈을 두고도 실기(失機)하여 부자 영의정의 집안 운은 그때 끝나고 말았다. 황희가 정승으로 발탁된 것은 일반적으로 세종의 안목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풍수지리학의 눈으로 볼 때 승려 나옹(懶翁)의 혜안을 먼저 꼽는 이들도 있다. 고려말의 선승 나옹 스님이 전라도 남원 실상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가까운 순창의 회문산에 있는 ‘홍곡단풍형’ 명당에 누군가 신후지를 잡아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면 난세를 극복하는 데 일조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던 스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남원의 부호에게 “명당을 잡아 주겠다”고 약속하여 500냥의 시주를 받아 퇴락한 암자를 짓는 데 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호를 데리고 회문산에 갈 때마다 비바람이 몹시 불고 짙은 안개가 산을 에워싸는 바람에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스님을 믿고 거금을 시주한 부호는 역정이 났다. 스님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 부호는 스님에게 뭇매질을 하고 이어 “열흘 안으로 그 자리를 찾아내라, 아니면 내가 시주한 돈을 돌려주든지, 그것도 아니면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위협했다. 겨우 풀려난 나옹이 광한루 다리 위를 비척거리며 걷는데 마침 지나가던 하급관리 황군서(黃君瑞)를 만났다. 사람 좋은 황군서는 나옹의 그릇을 알아보고 존경해 오고 있던 터였다.
가까운 순창의 회문산에 있는 ‘홍곡단풍형’ 명당에 누군가 신후지를 잡아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면 난세를 극복하는 데 일조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던 스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남원의 부호에게 “명당을 잡아 주겠다”고 약속하여 500냥의 시주를 받아 퇴락한 암자를 짓는 데 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호를 데리고 회문산에 갈 때마다 비바람이 몹시 불고 짙은 안개가 산을 에워싸는 바람에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스님을 믿고 거금을 시주한 부호는 역정이 났다.
이 무렵 철도청 안에 고속철도건설기획실(후에 고속철도건설기획단으로 조직 변경)이 생겼고, 신종수 회장은 건설계획 담당관을 거쳐 건설국장을 지냈다.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설립된 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건설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회장은 고속철도 건설의 기틀을 다진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루이스버저에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 용역을 준 것은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는 교통개발연구원이 맡았어요. 그런데 교통개발연구원은 그 일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용역을 줬습니다. 국내업체에 주면 말들이 많은데다 객관적 검토가 필요해 일부러 해외업체를 끌어들인 것인데, 문제는 루이스버저가 고속철도를 운행하고 있는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 회사가 아니라 고속철도가 없는 미국 회사라는 데 있었어요. 뭔가 자료가 나오고 배울 것이 있는 곳에 줘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회사에 일을 맡긴 것이죠. 이 때문에 교통개발연구원은 물론 루이스버저와도 마찰이 많았습니다.” 이미 발주가 끝난 뒤라 업체를 교체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를 공단 건설본부와 루이스버저가 각자 따로 진행한 뒤 양쪽의 결과물을 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공단 측은 과거에 검토했던 서울-대전 간 자료를 토대로 기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와 교차되는 지점이 대략 400개였고, 지나야 하는 하천도 그만큼 됐다. 1km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나타나는 셈이었다. 신 회장은 안전운행을 위해서는 선로를 일본처럼 고가(高架) 형태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지형의 특징을 모르는 루이스버저는 고가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평면으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맞섰다. 루이스버저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언론 플레이에 집중하는 한편 정치권까지 끌어들였다. 신 회장을 포함한 공단 측 입장이 난처해졌다. 교통개발연구원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고속철도는 후대의 안전이 담보된 생명선인데,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그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공단 이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공단 이사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출신의 김종구(金鍾球)씨가 맡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실무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 무렵 철도청 안에 고속철도건설기획실(후에 고속철도건설기획단으로 조직 변경)이 생겼고, 신종수 회장은 건설계획 담당관을 거쳐 건설국장을 지냈다.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설립된 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건설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회장은 고속철도 건설의 기틀을 다진 실무 책임자였다.
검사 두 사람이 한 방을 쓰던 시절, 감찰부 말석(末席)으로 배속된 나는 선임인 남문우 검사(현 변호사)와 책상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11월 말쯤인가, 남 검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보라”며 한 가지 첩보를 귀띔했다. 정부 기자재 조달 과정에서의 예산 낭비 및 횡령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부가 외국에서 컴퓨터 설비를 수입하면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값싼 중고 불량품을 대거 들여왔으며 거기서 남는 돈을 누군가 착복했다는 줄거리였다. 대체로 정부의 조달 부문에는 대단위 예산이 투입되는 까닭에 얽힌 돈이 상당히 크다. 더욱이 반드시 공무원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만약 무슨 문제가 있게 되면 사태의 심각성도 작지 않다. 심상치 않은 사건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일들을 놔두고 이 일에 매달렸다. 우선 컴퓨터에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정부에만 컴퓨터가 도입됐던 시점이어서 자연스럽게 내사 단계에 접촉한 이들은 모두 공무원이었다. 아직 공식 수사가 아닌, 내사 단계였기 때문에 주로 술자리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컴퓨터를 둘러싸고 돌아가던 이야기를 얻어듣는 방식을 취했다. 며칠 그렇게 서소문과 광화문 주변 술집을 돌아다니며 사실을 확인한 결과, 사건의 내용은 처음 첩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이야기였다. 바로 얼마 전 있었던 반포 AID아파트의 부정추첨이었다. 경쟁 과정에서 누군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보게 되면,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불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불만은 언제 어떤 형식으로든 밖으로 삐져나오게 마련이다. 반포 AID아파트 재추첨을 진행했던 중앙전자계산소 직원들 사이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컴퓨터 추첨에 관여했던 일부 직원들이 컴퓨터를 조작해 자신이 당첨되거나, 다른 이를 당첨되게 해주고 뇌물을 받아 한 몫씩 단단히 챙긴 정황이 포착됐다. 거기에 끼지 못한 다른 직원들이 나와 여러 차례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질시와 부러움 가득한 속내와 저간의 사정을 하나씩 둘씩 털어놓았던 것이다.
11월 말쯤인가, 남 검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보라”며 한 가지 첩보를 귀띔했다. 정부 기자재 조달 과정에서의 예산 낭비 및 횡령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부가 외국에서 컴퓨터 설비를 수입하면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값싼 중고 불량품을 대거 들여왔으며 거기서 남는 돈을 누군가 착복했다는 줄거리였다.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년 6월 24일 스톡홀름에 입성(入城)했다. 그 보름 전인 6월 6일 그는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再)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國敎)로 택한다. 1525년엔 신약(新約)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거의 동시에 가톨릭을 버렸다. 덴마크는 1523년에 스웨덴의 독립을 허용한 뒤에도 실지(失地)를 회복, 스웨덴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1563~1679년의 115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전쟁을 하였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스웨덴은 반격에 나서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와 코펜하겐을 2년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덴마크는 결국 북구(北歐)의 패자(覇者) 자리를 스웨덴에 넘겨주고 만다. 스웨덴 수도(首都) 스톡홀름에 아주 인기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VASAMUSEET)이다. 1628년 8월 10일의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戰艦) ‘바사’를 1961년에 건져 복원,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구경하러 온다. 낙후되었던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强國)으로 만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대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전함은 상부가 너무 무거워 풍랑이 불자 뒤집히면서 침몰하였다. 전함은 길이가 69m, 높이가 49m이다. 배수량(排水量) 1200t에 64개의 대포를 실었고, 탑승 선원은 400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약 50명이 구조되었다. 침몰한 곳이 해안에 가깝고 얕은 바다 밑이어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1만4000개의 조각을 맞추어 복원한 전함이므로 원래의 재질(材質)에 원래의 모습이다. 전복 사고 후 구스타프 대왕은 관련자를 문책하도록 지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과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설계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였다. 사고원인은 ‘신(神)의 뜻’으로 귀착되었다.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년 6월 24일 스톡홀름에 입성(入城)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再)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國敎)로 택한다.
참으로 오랫동안 수사하는 데만 진력했던 습관 혹은 관성 때문일까. 몸은 인천에 있으되 신경은 줄곧 서울로 뻗는다. 말할 것도 없이, 과연 검찰이 어떻게 한보 사건을 처리해 나갈 것인가 궁금증이 솟는 것이다. 인천지검장 취임식을 마친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그러니까 1월 25일 토요일과 26일 일요일, 습관대로 휴일임에도 청사에 출근했다.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질없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채운다. 때가 때인지라 상상의 ‘화두’는 역시 한보 수사다. 그것도 ‘내가 만약 중수부장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 놓고는. <… 이런 시기에 누가 중수부장이 되든 결국 무거운 돌덩어리에 짓눌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과연 저 중수부장이라는 자리가 빛나는 자리가 될까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리가 될까. … 지금 한보 수사는 검찰의 수사체질부터 확 뜯어고쳐서 어떤 난관도 돌파하겠다는 굳은 의지부터 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인적 구성부터. … 국가정책이니 국가이익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해명성 수사나 정치권 눈치 보는 수사 따위를 해서는 안 될 것이고. … 범죄혐의가 포착되면 무조건 밀고 나가야 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수사를 맡은 쪽의 책무다. … 정권이나 검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대와 국가의 요청을 기준으로 삼아야 ….> 그러다 눈을 떠 보면 그런 것들을 내가 뭣하러 걱정하는가, 부질없다는 생각뿐. ‘한보 문제에 대한 수사는 더 없이 선명하고 다부지게 해 내야 성공한다’는 내 상상과 달리 현실에서 검찰 수사는, 검찰의 한식구로서 보기에 안타깝기 짝이 없는 쪽으로 굴러갔다. 한보 부도가 발표되고 4일 만인 1월 27일 검찰은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주로 대출 관련 비리를 겨냥해 검찰은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이윽고 수사에 착수한 지 24일 만인 2월 19일 검찰은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 등 9명을 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수사를 일단락지었다. 정 총회장과 김우석 내무부장관,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권노갑씨,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김종국 전 한보그룹 재정본부장 등이었다.
‘한보 문제에 대한 수사는 더 없이 선명하고 다부지게 해 내야 성공한다’는 내 상상과 달리 현실에서 검찰 수사는, 검찰의 한식구로서 보기에 안타깝기 짝이 없는 쪽으로 굴러갔다. 한보 부도가 발표되고 4일 만인 1월 27일 검찰은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주로 대출 관련 비리를 겨냥해 검찰은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앞의 세 코스가 연회 전의 간식이었다면 네 번째 코스는 전채요리로 이름 역시 전채대조각(前菜大彫刻)이다. 이름에 조각이 들어간 것은 매 선에 이룡희주(二龍戱珠·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백옥공작(白玉孔雀·무로 만들어 백옥처럼 하얀색의 공작), 붕정만리(鵬程萬里·만리를 날아가는 대붕) 등과 같은 화려한 이름의 조각을 배경으로 각각 8가지의 찬 음식을 차리기 때문이다. 음식으로는 소금물에 절인 사슴고기인 염수녹육(鹽水鹿肉), 새우를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 요리한 호접하(蝴蝶蝦) 등 특별한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오향우육(五香牛肉) 같은 것들도 있다. 다섯 번째는 품과어연탕(品鍋御宴湯)으로, 이름 그대로 뜨거운 탕 요리다. 매 선에 오르는 요리는 악어발탕인 관민악어장(罐燜鰐魚掌), 콩 싹과 사슴꼬리를 재료로 한 두묘녹미탕(豆苗鹿尾湯), 약재인 천마와 거북을 곤 천마금구(天麻金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불도장(佛跳墻), 여덟 가지 진기한 재료로 만든 팔진일품과(八珍一品鍋), 악어의 혀와 발을 뭉근하게 끓인 악어설회장(鰐魚舌燴掌) 등이다. 이어지는 어연대채(御宴大菜)는 주요리다. 이 여섯 번째 코스에는 모두 5차례 음식이 오르는데 그중 4차례는 각각 4개의 요리로 구성되어 있고, 한 차례는 구운 고기 2종이 오른다. 이때 사용되는 재료야말로 산해진미이고 기이한 재료들이다. —주요리에 사용하는 특별한 재료를 든다면. “잘 알려진 상어지느러미, 바다제비집(燕窩·연와), 원숭이머리버섯, 동충하초 등 여러 진기한 재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재료와 양념 하나하나 모두를 최상품으로만 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자인 황제를 위한 음식이었기에 당연히 그러해야 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양념도 모두 천연재료를 쓰는데, 이를테면 단맛 하나도 옥수수에서 추출한 단맛과 호박에서 추출한 단맛을 제각각 다른 요리에 씁니다. 호박과 어울리는 음식에 옥수수의 단맛을 쓰면 맛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이롭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 때문이죠.”
앞의 세 코스가 연회 전의 간식이었다면 네 번째 코스는 전채요리로 이름 역시 전채대조각(前菜大彫刻)이다. 이름에 조각이 들어간 것은 매 선에 이룡희주(二龍戱珠·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백옥공작(白玉孔雀·무로 만들어 백옥처럼 하얀색의 공작), 붕정만리(鵬程萬里·만리를 날아가는 대붕) 등과 같은 화려한 이름의 조각을 배경으로 각각 8가지의 찬 음식을 차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와 같이 자란 원시자연의 벼와 사람의 돌봄으로 자란 요즘의 벼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원시자연에서 자생한 벼에서 수확한 쌀에 얼마만큼의 강력한 면역성분이 함유돼 있을까? 그리고 육신을 자양하는 성분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상상만 해도 온몸의 에너지가 용솟음친다. 비단 쌀뿐만 아니라 채소, 과일 등도 다 그러하다. 어쩌면 만 가지 병을 다스리는 약성이 그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 같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은 요즘 같은 병을 앓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맞기는 하지만 원시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곡식과 채소, 과일을 구할 수도 없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누구나 생전에 그런 곡식과 채소, 과일을 얼마든지 스스로 길러서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원시자연의 성분만큼이나 탁월하지는 않겠지만 그에 버금갈 만한 성분과 약성을 지니게 할 만한 아주 간단한 재배방법이 있다. 그러나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볍씨나 채소, 과일을 심어놓고 잡초가 자라거든 제초제를 뿌리거나 뽑지 말고 그대로 두면 된다. 잘 크라고 비료나 거름을 줄 필요도 없다. 벌레가 먹어도 농약을 뿌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이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잡초에 항거하고 면역력과 약성을 자생시키기 마련이다. 요즘의 씨앗들은 워낙 오랜 세월 인간의 돌봄으로 맺힌 것이라 처음부터 그것들이 잘 자라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첫해는 씨앗도 제대로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볼품이 없는 씨앗이라도 그곳에 또 심으면 된다. 한 3년 그렇게 하다 보면 해마다 그것들이 터뜨린 떡잎이 자라고 자라면서 저절로 자생력을 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점점 키도 크고 몸통도 실하고 씨앗도 알차게 맺힌다. 그렇게 5년 정도만 반복하면 드디어 원시자연의 시절과 버금가는 곡식과 채소, 과일을 틀림없이 얻을 수 있다. 수확량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그런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전 농토에 다 그리할 수는 없을 테니 농토 한 모퉁이에 혹은 한 마지기씩 그렇게 씨앗을 뿌리고 내버려두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 모든 농토를 다 그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꿀 필요가 없으니 힘도 들지 않고 비용도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비싼 가격으로 전 세계에 수출도 할 수 있으니 대단히 경제적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그런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전 농토에 다 그리할 수는 없을 테니 농토 한 모퉁이에 혹은 한 마지기씩 그렇게 씨앗을 뿌리고 내버려두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에 모든 농토를 다 그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꿀 필요가 없으니 힘도 들지 않고 비용도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비싼 가격으로 전 세계에 수출도 할 수 있으니 대단히 경제적이다.
유행가라고 하면 누구나 레코드를 연상할 만치 그 관계가 깊다. 그러나 우리가 유행가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민요나 잡가, 속요 등과 연락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다른 일방으로 창가 혹은 동요의 유행을 더듬어 상고(想考)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생각한다. ‘학도야~’ 하는, 또는 ‘공부할 날 많다 하고~’ 등으로 시작되는 ‘근학가(勤學歌)’라든가, ‘열차가’ ‘축구가’ ‘망향가’ ‘관동 8경가’류의 창가, 그리고 서양가요의 번역, 예(例)하면 ‘매기의 노래’(매기의 추억), ‘클레멘트의 노래’ 또 서과서(書科書)로부터 퍼져 나온 ‘카나리아의 노래’ 등은 ‘카츄샤’ ‘장한몽(長恨夢)’ ‘이 풍진 세상을’ ‘지난 엿새 동안~’ 등과 시기를 전후하야 그 유행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동요가 유행하던 그 시대에는 지금 있는 것 같은 유행가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야 윤극영 작곡의 ‘푸른 하늘 은하수’ 하는 ‘반달’을 위시하여 ‘봄 편지’ ‘오빠생각’ 등의 압도적 유행은 여기 특기할 만하며 따라서 그 당시에는 동요단체의 조직, 동요집 출판, 동요 레코드의 제작 등이 왕성하였으며 뒤를 이어 인기를 잠시 집중시킨 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가요 레코드라 하겠다. 정사(情死)를 앞두고 ‘다뉴브 왈츠곡’에 작사·취입한 ‘사(死)의 찬미’가 한동안 유행계의 물의를 일으킨 기억도 너무 또렷하다. 이렇게 레코드 예술이 진전됨에 따라 ○창(○唱, 판독불가·편집자주)이라는 데서 소위 유행가란 명목으로 ‘낙화유수’니 ‘세 동무’니 ‘암로(暗路)’니 ‘봄노래’니 ‘방랑가’ ‘오동나무’ 등 아직도 귀에 새로운 가요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이 방랑을 노래한 것이었고 ‘봄노래’만이 비교적 씩씩한 기상을 띤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그 대체적 경향이 역시 창가의 범주를 확실히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만은 사실이겠으며 더구나 편곡, 그 반주 등은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리가 있다. 그러자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부른 ‘황성(荒城)의 적(跡)’은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새로운 ‘쇼크’를 주어 방방곡곡 청춘남녀의 입에서 입으로 그 유행을 용(踊)하게 되니, 아직까지 채규엽, 강석연(姜石燕), 이애리수, 이정숙(李貞淑) 등 몇 사람 못 되는 레코드 가수의 수효가 늘고 작곡하는 사람이 일가를 이루게 되고 회사 측으로서도 한층 이 방면에 새로운 주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부른 ‘황성(荒城)의 적(跡)’은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새로운 ‘쇼크’를 주어 방방곡곡 청춘남녀의 입에서 입으로 그 유행을 용(踊)하게 되니, 아직까지 채규엽, 강석연(姜石燕), 이애리수, 이정숙(李貞淑) 등 몇 사람 못 되는 레코드 가수의 수효가 늘고 작곡하는 사람이 일가를 이루게 되고 회사 측으로서도 한층 이 방면에 새로운 주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상화는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가 1908년 사망해 4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김신자는 덩치가 큰 여장부였다. 문중에 따르면, 키가 5척6촌(169.7cm 추정), 몸무게가 18관(67.5kg 추정)으로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인지 이상화를 제외한 3형제의 키가 6척(尺)이 넘었다고 한다. 1척이 30cm라면 180cm가 넘었다는 얘기다. 이상화는 신장과 몸집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맏아들 이상정(李相定)은 광활한 중국 만주벌판에서 임시정부와 중국 장계석 군대에서 독립전쟁을 벌인 장군이 되었다. 셋째 이상백(李相佰)은 일본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 나중 일본체육회 고위인사가 되었고 해방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올랐다. 넷째 이상오(李相旿)는 ‘대한사격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수렵인이다. 이상오는 훗날 《한국야생동물기》 《세계명포수전》 같은 책을 썼다. 상화의 어머니 김신자는 억척스레 자녀를 키웠지만 정이 많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 과부가 되어서인지 불심(佛心)이 지극했다는 증언도 있다. 충희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시며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며 “아버지가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상화의 백부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선생입니다. 당대 부호로서 재력을 바탕으로 팔운정(現 수창초등학교 부근)에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렀습니다. 우현서루는 단순 책방이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이었어요. 우현서루와 인연을 맺은 인물이 많은데 ‘목놓아 크게 소리내어 통곡하노라’고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張志淵),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朴殷植),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휘(李東輝)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우현서루에 인재들이 모여들자 1915년 일제는 폐쇄하고 말았어요. 그 후 강의원(講義院)으로 바뀌었다가 교남학교(1921년 설립)의 모태가 됩니다. 이 교남학교에서 이상화 시인이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 후신이 지금의 대구 대륜중고교입니다.”
이상화는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가 1908년 사망해 4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상화의 어머니 김신자는 억척스레 자녀를 키웠지만 정이 많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 과부가 되어서인지 불심(佛心)이 지극했다는 증언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고진감래(고민 끝에 감이 떨어진다)라 했던가. 정 의원 소환 문제로 끙끙거리던 수사진에 이건개 검사장이 아이디어를 내놨다. “유명인사나 고위인사들은 대한민국 땅에 있는 이상 특급호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했다. 세 번째 소환에도 정 의원이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12월 26일, 수사진은 서울시내 특급호텔의 벨보이와 도어맨, 식당 종업원들에까지 “정몽준 의원을 보면 연락해 달라” 전화로 사발통문을 돌려 협조를 구했다. 유명인사가 호텔에 나타나면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정보 입수와 전달이 빠르리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뒤 S호텔 측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이곳 중식당에 정 의원이 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수사관이 그곳으로 날아갔고 정 의원과 대면했다. 검찰이 기어이 자신을 찾아내자 정 의원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수사관에게 “내일(12월 27일) 검찰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쪽에서 어떻게 그 소식이 풀려나갔는지는 몰라도 언론은 일제히 ‘정몽준 의원이 27일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윽고 이튿날 오후 2시, 정 의원은 약속대로 서초동 검찰청사에 들어왔다. 그는 “롯데호텔에서 초원복집의 도청 실행자인 문씨 등을 만나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도청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2월 11일 문씨와 만나기 전 안충승 부사장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고 진술했다. 또 “안 부사장에게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그때 보고받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씨 등에게 100억원을 주기로 했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거철에 온갖 이야기가 나돌게 마련인데 그것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또 믿어야 하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씨 등에게 2000만원을 주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의미로 봐야 할 대답이었다.
이윽고 이튿날 오후 2시, 정 의원은 약속대로 서초동 검찰청사에 들어왔다. 그는 “롯데호텔에서 초원복집의 도청 실행자인 문씨 등을 만나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문씨 등에게 2000만원을 주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스위스의 산업화는 부의 양극화를 가져오면서 새로운 정치·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냈다. 20세기 들어 유럽 국제사회의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논란과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여파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확산되었는데 스위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와중에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노동자와 노조세력의 임금인상 투쟁이 격렬해졌다. 스위스의 경제가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정부가 조정하는 강제적 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노동조합뿐 아니라 경영자 측에서도 이를 반대했다. 자유경제체제하에서 국가권력의 개입을 배격해 온 스위스 국민의 일관된 입장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대표산업인 철강, 기계, 시계산업 노사대표가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1937년 노사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노조 측에서는 파업을 불만해결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사용자 측에서는 임금인상 요구에 대한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것이 그 내용이다. 모든 근로자는 노조 가입권이 있으며, 노조는 회원의 회비로 재정을 조달한다. 각 노조의 회비는 업계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근로자는 연간 약 200프랑에서 600프랑의 회비를 낸다. 스위스의 2개 노조총연맹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각 노조의 회비 중 일부 고정금액이 노조연맹에 지급된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노조의 자원과 시설, 임금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스위스의 노조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데, 이는 조직률이 낮고 구조가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노조들은 약세에도 불구하고, 질병, 사고, 실업보험 등 현재 스위스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위스 노조가 스위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나라와 달리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 덕분에 노조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정치 제도 내에서는 노조 등 다양한 이해집단이 새로운 정책을 제안, 토론하는 과정에 참여해 각자의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 또 이들 이해집단은 스위스 국민이 투표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할 수도 있다.
스위스의 노조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데, 이는 조직률이 낮고 구조가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노조들은 약세에도 불구하고, 질병, 사고, 실업보험 등 현재 스위스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위스 노조가 스위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나라와 달리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제도 덕분에 노조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경제를 위기로 몰아간 한보 ‘몸통’의 추적. 그것이 국가와 국민이 나를 포함한 2차 수사팀에 내린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다. 이미 당시 국민과 여야 정치권, 그리고 언론과 검찰 안팎에서는 그 ‘몸통’이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수사를 맡은 검찰로서는 ‘풍차가 바로 저기 있다’ 해서 대놓고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 방식과는 달라야 했다. 큼지막한 타깃을 겨냥해 과감히 칼을 꺼내 휘두르며 돌진하는 모습은 겉보기에는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들다 결국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거나,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검사가 판정패한 사건들이 검찰사(史)에는 적지 않다. 무턱대고 ‘경기장에서 지쳐 쓰러지도록’ 달려들기만 한다 해서 바라는 결과가 덜컥 나오는 것은 아니다. 큰 사건일수록 실패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그만큼 치밀한 전략과 준비, 그리고 증거 수집이 생명이다. 추적 대상의 덩치가 클수록, 또 비밀이 깊이 묻혀 있을수록 그것을 치고 들어가는 전략은 정확하고 정교해야 한다. 검찰로서는 속된 말로 ‘털어보아야 할’ 대상이 너무도 많았다. “검찰은 왜 빨리 수사를 진행하지 않느냐”고 여론이 재촉한다 해서 수사 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아무나 붙잡아 조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그 누구도 제쳐 놓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정 총회장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 아들을 구속시킨 직후, 나는 내 방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아직 용도가 며칠 남은 3월자 달력을 북 찢어 그 뒷면에 한보 ‘불법대출’의 ‘흐름도’를 얼기설기 연필로 그려보았다. ‘누가 뭐라 하든지 사태의 제1차 책임은 한보에 대출해 준 은행장들에 있다. 총액 5조7000억원, 한보에 지원한 대출 규모라면 반드시 은행장 결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은행장들에게도 수조 원대 대출 결정은 버겁다. 은행의 대출 절차에 모든 게 합당하다 해도 결국 주저할 수밖에 없는 액수다. 더욱이 당시 철강 쪽에 돈을 들이붓던 한보의 신용상태는 탄탄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굴지의 은행들이 천문학적 액수의 대출을 계속 내준 것은 보나마나 배후의 ‘어떤 힘’이 작용한 결과다. 여기까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당장 추측할 수 있는 배후는? 그것은 세상에서 거론되는 것처럼 김현철씨일 수도 있고 청와대 수석들일 수도 있다. 또 권력을 가진 실세 정치인들일 수도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것이 국가와 국민이 나를 포함한 2차 수사팀에 내린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다. 이미 당시 국민과 여야 정치권, 그리고 언론과 검찰 안팎에서는 그 ‘몸통’이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수사를 맡은 검찰로서는 ‘풍차가 바로 저기 있다’ 해서 대놓고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 방식과는 달라야 했다.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국제기구로 IMF, 세계은행, WTO 3인방을 들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주요 선진국 대표자들이 미국의 브레튼우즈라는 마을에 모여 전쟁 동안 중단되었던 국제무역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회의를 가진 결과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무역 질서를 구축하였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세 축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원활한 국제무역질서 조성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던 IMF와 세계은행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주도하는 핵심적인 금융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이 기구들은 제3세계의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 선결 조건으로 해당국에 금융 자유화나 민영화 정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역설적이게도 IMF와 세계은행이 주도한 제3세계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이 전반적으로 실패하게 되면서, 이 기구의 비민주적 운영 메커니즘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비판의 핵심은 구제 대상국의 이익이 아닌 주요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금융기구가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국제금융기구의 민주적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그것은 제3세계의 목소리를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국제금융기구의 지배구조는 선진국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어 1국 1표 체제로의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실제로 국제금융기구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201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는 IMF 지배구조에 관한 개혁안이 승인되었다. 그 핵심은 신흥시장국과 개발도상국에 기존보다 더 많은 IMF의 투표권을 부여하여, 상임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투표로 선출함으로써 신흥개도국의 인사가 이사로 진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개혁안을 따른다 하더라도 IMF를 주도하는 핵심 국가의 수가 5개국에서 10개국으로 늘어나는 수준에 머물기 때문에 제3세계의 목소리를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국제금융기구의 의사결정 과정에 남반구와 개발도상국의 의견이 더 잘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국제금융기구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핵심 과제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주요 선진국 대표자들이 미국의 브레튼우즈라는 마을에 모여 전쟁 동안 중단되었던 국제무역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회의를 가진 결과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무역 질서를 구축하였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세 축으로 구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