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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연예술은 대규모 지향성이 강하다. 집단주의적 정신을 기초로 집회적 성격이 강한 공연물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여러 장르의 혼합이나 스타디움에서의 대규모 공연 형식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북한의 공연 형식 중 가장 규모가 큰 공연장르이다. 연인원 10만 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15만석 규모의 대형 스타디움(본부석 제외)의 대부분을 무대로 활용하고 있는데, 기존의 집단체조에 새롭게 예술공연(음악, 연극, 무용, 교예 등)을 배합하여 만든 대규모 스타디움 공연이 곧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다. 지난 2000년 10월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에서 첫 선을 보인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2002년 <아리랑> 공연을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 정착되었다.1999년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졌으며, 1970년대의 ‘혁명가극’, ‘혁명연극’에 비견할 만한 21세기의 북한을 대표하는 새로운 공연 장르라 할 수 있다.
집단주의적 정신을 기초로 북한은 대규모 지향성이 강한 공연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북한의 공연 형식 중 가장 규모가 큰 공연장르로, ‘혁명가극’, ‘혁명연극’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공연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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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연극의 공연방식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에 앞서 우리 경우와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몇 가지 사항을 먼저 점검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50년이 넘는 분단이 남긴 남북의 이질성은 연극문화라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북한에서의 모든 공연 활동은 당국의 관리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연 단체의 조직에서 운영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인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와 같은 상업적 공연 활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북한 사회 전체의 운영 체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북한의 모든 공연이 개개인이나 개별 극단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국의 일방적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북한 극단의 공연 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의 하나로 ‘당국의 관리 기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 당국에 의한 관리 체제가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미친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당국의 관리와 함께 연극에 대한 당국의 지원 체계가 발달되어 있는 곳이 또한 북한이기 때문이다. 중앙(평양)의 대표적 공연 단체들이 하나같이 설비를 잘 갖춘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또한 북한에는 이른바 ‘항일혁명예술’의 전통을 이어 새롭게 혁신한 ‘혁명가극’, ‘혁명연극’이라는 독자적 장르가 존재한다. 나중에 살펴볼 것이지만 이른바 ‘<피바다>식 가극’이니 ‘<성황당>식 연극’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북한의 가극․연극을 대표하는 표준 모델(이른바 ‘본보기 작품’)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성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북한의 모든 연극은 ‘<성황당>식 연극’을 기준 삼아 제작되고 있다.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통일된 질감이 북한 연극의 한 특질로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들은 밖으로는 북한연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안으로는 연극 창조 작업의 지침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북한의 연극문화는 한국과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에서의 모든 공연활동은 당국의 관리 하에서 이루어진다. 관리와 함께 지원 체계가 발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미친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항일혁명예술 전통을 잇는 혁명가극, 혁명연극이라는 독자적 장르가 존재한다. 통일된 질감이 특징이며 밖으로는 북한 연극을 대표하고 안으로는 연극 창조 작업의 지침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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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연극 <성황당>에서 무대미술 분야의 혁신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이른바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은 원래 혁명가극 <피바다>의 성과가 연극 분야에 도입된 것이다. 앞서의 다장면 구성 형식의 장면 연결을 위해서는 흐름식 무대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흐름식 무대란 말 그대로 장면 장면이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자는 데서 발상된 것이고, 입체무대라고 하는 것은 배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무대미술이 극 진행과 긴밀히 연결되게 하여 극의 사실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목표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인물의 감정 변화에 조응하여 음악이나 조명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무대 장치나 소도구까지도 극적 효과를 만드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 기본 관점이다. 이를 위해 현대적인 기술을 최대한 동원하여 무대미술을 고안해야 하는데, 그 구체화된 성과가 바로 흐름식 입체무대 미술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구되는 것은 다양한 무대 설비들이다. 무대 회전은 물론이려니와 무대 전체 혹은 일부가 상하 좌우로 이동할 수 있는 설비가 있어야 하고, 배경그림, 입체적 장치, 반입체적 장치, 여러 개의 중간막과 흐름막 등 무대미술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술과 설비가 완비되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북한의 주요 극단들은 설비가 훌륭한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는 거의 해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설비나 장치가 준비되면 한 장면의 진행 중에 무대가 변화하기도 하며, 장면 전환의 경우도 휴지가 없이 신속하게 전환될 수 있게 된다. 또 북한연극에서 신속한 장면 전환을 위해 자주 사용하는 것이 흐름막을 이용한 ‘환등 배경’이다. 환등 배경이란 그림이나 사진을 필름에 담아서 영사하여 무대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앞으로 무대 우에 펼쳐질 생활환경과 꼭같은 화폭을 환등미술로 흐름막에 비치면서 그것이 흘러가는 동안에 무대를 자연스럽게 흐름식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혁명연극 <성황당>은 무대 미술분야의 혁신으로 흐름식 입체무대가 돋보인다. 흐름식 무대란 인물의 감정변화에 맞게 음악과 조명이 변하고 무대장치와 소도구에 의한 극적효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다양한 무대설비와 장치가 필요한데 북한의 주요 극단들은 휼륭한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설적인 문제는 다 해결되어 있다. 신속한 장면 전환을 위해 흐름막을 이용한 환등 배경이 있는데 그림이나 사진을 필름에 담아서 영사하여 무대 배경으로 흘려보내는 동안 무대를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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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집단체조에서 그 뿌리와 토대를 찾을 수 있다. 집단체조와 같이 18,000명이 참여하는 배경대에서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운동장 바닥에서는 1,500여 명이 동시 출연하는 체조가 펼쳐지는 점은 기존의 집단체조와 흡사하지만, 거기에 새롭게 무용 장면이 체조장면과 유사한 비중으로 배치되고, 중요한 부분의 표현이 전문 예술가들의 독창이나 독무, 연기 등으로 채워지는 등 예술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즉,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피바다가극단, 만수대예술단, 평양교예단 등 북한 최고의 전문예술가 집단이 출연하여 음악․무용․교예 등 예술적 표현을 비약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는 점, 국가 기념행사와는 별개인 하나의 공연으로 기획되고 있다는 점, 본격적인 무대장치 및 조명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에서 집단체조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 집단체조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에서 관장하는 체육행사의 일부인 데 비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문화성에서 직접 관장하는 예술공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집단체조는 집단체조에서 비롯되지만 여러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문 예술가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국가 기념행사와 별개이다. 또 무대장치와 조명이 도입되어 차이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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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傍唱)의 단어적 의미는 ‘곁에서 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연극 대사 가운데 ‘방백’(傍白: 곁에서 하는 말)과 쓰임새가 유사하다. 즉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극적 사건진행의 외부(곁)에서 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그 기원은 멀리 그리스연극의 코러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코러스는 시종 무대 위에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일부가 되어 극적 장면 구성에 참여하는 것인 반면 방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밖에 있으면서 노래로서만 극에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극중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음악극의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방창’이란 ‘가사가 있는 노래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방창은 무대 위의 사건과 떨어져 외부에서 하는 노래를 말한다. 한편 이러한 방창은 가사로 구성된 노래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의 성격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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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은 극중인물이 아닌 가수에 의하여 무대 밖에서 불리우면서 인물들의 사상감정과 극의 세계를 개방해 주는 노래 형식이기 때문에 연극의 특성을 살리는 데 아주 적합한 형상수단으로 된다. 방창의 이러한 형상적 기능을 원만히 살려내기 위하여 <성황당>식 혁명연극에서는 극의 발전론리와 정황에 맞게 가사를 절가화하고 있다. 따라서 절가화된 가사에 기초한 방창은 각이한 인물들의 사상감정을 서정심리적으로 개방하기도 하고 서사적으로 펼쳐보이기도 하며 극적으로 깊이 있게 들춰내기도 함으로써 극중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다양하게 개방하는 데서 위력한 형상수단으로 되고 있다.
방창은 극중인물이 아닌 가수가 무대 밖에서 부르는 형식이다. 이 형상적 기능 위해 <성황당>식 혁명극은 가사를 절가화하여 극중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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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강점에도 불구하고 연극에 지나치게 많은 노래가 삽입된다든지 하는 것은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 노래가 너무 많아지면 연극이 아니라 가극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연극에서 음악이 아무리 좋은 형상수단이라고 하여도 연극의 특성에 맞게 잘 써야 은을 낼 수 있습니다. 연극에서는 음악을 가극이나 영화에서처럼 써서는 안 됩니다.”고 지적하면서, ‘연극혁명’ 초창기에 연극에 합창단과 관현악단까지 끌어들이려 했던 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연극에서는 ‘독방창을 1절 정도로 짧게’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그 해결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노래가 많은 걸 경계하며 ‘연극혁명’ 초창기 연극에 관현악단을 삽입하려던 시도를 비판, ‘독방창을 1절 정도로 짧게’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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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연예술이 내외에 자랑하는 형상 요소가 바로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이다. 북한 공연예술의 기초가 사실주의에 있으므로, 무대미술에 있어서도 ‘재현의 미학’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이 기본 목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사실적 재현을 무대적으로 구현하는 중심축은 ‘입체성’과 ‘흐름성’이다. ‘입체성’은 무대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마치 실제의 생활공간을 무대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마치 실제의 생활공간에 옮겨와 있고, 또 그 생활의 일부를 목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즉, 여기서 ‘입체무대’란 ‘살아있는 실제’를 무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무대미술에서도 재현의 미학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 중심축은 입체성과 흐름성이다. 그 중 입체성은 실제의 생활공간을 무대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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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성’과 함께 ‘흐름성’을 보장하는 축이 ‘흐름식무대’이다. 관객들을 극적 상황에 몰입하게 만드는 기초가 ‘입체무대’에 있다면, 일단 형성된 ‘극적 감흥’을 지속시켜 일정한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흐름식 무대’이다. ‘흐름식’이란 공연이 막이나 장(암전)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연결된 흐름으로 무대화하는 극 진행의 원리를 말한다. 이는 북한 공연예술의 구성이 사건의 축보다 ‘감정 조직’을 중시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흐름식 입체무대 미술’로 불리는 북한식 무대미술의 기초는 원래 1970년대 초 ‘가극혁명’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1978년 ‘혁명연극’ <성황당> 창조 때부터 연극 분야에도 도입된다. 이후 거의 모든 북한 공연예술에서는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을 채용하고 있다.
‘흐름식 무대’란 형성된 ‘극적 감흥’을 지속시켜 일정한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공연이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진행한다. 이후 북한 공연예술에서는 거의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을 채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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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연장은 무대의 깊이와 너비가 매우 큰 규모로 되어 있다. 근경, 중경, 원경의 삼차원에 걸친 장치와 배경을 활용하여 무대미술의 입체성의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보통 앞무대와 주무대로 구성된 근경에는 입체와 반입체의 장치물이 사용되며, 주로 마을길이나 마당 등 배우들의 액팅 에어리어(북한 용어로는 ‘배우공간’)가 된다. 흔히 무대 앞쪽은 넓게 트인 공간을 만들어놓고, 주무대의 중간 뒷쪽으로 입체장치와 반입체, 평면장치가 놓인다. 기본무대와 뒷무대 사이에 설치되는 중경은 주로 드림장치를 활용하며, 보통 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과 그 주변으로 설정되어 있다. 원경은 뒷무대 부분으로 다양한 드림장치와 배경을 이용해 마을 밭이나 산, 시내 등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무대미술의 입체성을 위해 특히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뒷무대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드림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드림장치에는 그물드림장치와 막드림장치가 있다.
북한의 공연장은 무대의 깊이와 너비가 매우 크다. 근경, 중경, 원경의 삼차원에 걸친 장치와 배경을 통해 무대미술의 입체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특히 주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뒷무대인데, 다양한 드림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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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무대미술에서 ‘흐름식’이란 주로 무대전환에서 나타난다. 막과 막 사이의 끊김 현상을 극복하고 가장 빠르고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무대배경이 바뀌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식 장면전환의 목표는 “관중이 무대에서 화폭이 언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전환시켜 관중의 정서적 감흥을 유지”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연극에서 무대전환을 할 때 막을 쳐놓고 오랜 시간 망치질로 세팅을 다시 하던 어수선한 ‘막간’과 비교할 때 기술적으로 가장 커다란 진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의 무대미술에서 ‘흐름식’이란 주로 무대전환에서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 연극에서 무대전환을 할 때 막을 치고 오랜 시간 세팅을 하던 ‘막간’에 비해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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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북한 무대미술의 미학적 특징은 여백의 미를 인정하지 않고 화면 전체를 사실적 입체적으로 빼곡하게 채우는 조선화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연극의 ‘가득 채워진 무대’는 19세기 말 ‘제4의 벽’이 그 규모를 확대하여 전면화한 것으로서, ‘재현의 미학’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위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실제로 믿게 하겠다는 것이 북한 무대미술의 핵심원리이다. 이와 같은 실제 생활공간의 충실한 재현은 관객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작품 내용을 제시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모든 예술에서 ‘통속성’을 강조하는 북한의 경우 사실적 재현이야말로 관객 누구나 작품을 쉽게 이해하는 하는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고,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은 그 구체적 실천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현의 미학은 관객들이 누릴 수 있는 상상력의 폭을 제한하고, 무대 위에 펼쳐지는 형상세계를 일방적 방식으로 관객에게 ‘주입’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현대연극이 지향하는 ‘빈 무대’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가득 채워진 무대’를 보여 주는 것은 북한연극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북한 무대미술의 미학적 특징이자 핵심원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을 실제로 믿게 하겠다는 사실적 재현에 있다. '흐름식 입체무대미술'은 그 구체적 실천 성과로 '가득 채워진 무대'는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무대 위 형상세계를 일방적 방식으로 주입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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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식 장면전환의 목표는 “관중이 무대에서 화폭이 언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전환시켜 관중의 정서적 감흥을 유지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 1978년의 <성황당> 공연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제2장에서 제3장으로, 제7장에서 제8장으로 전환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흐름막에 의한 장면전환, 그리고 제3장의 지주집 앞 대문간이 회전하면서 제4장 지주집 안뜨락으로 변하는 회전식 무대전환과, 제5장 복순이네 집 장면이 통째로 무대 한쪽으로 흘러가고 이어 지주집 장면이 통째로 흘러들어와서 제6장으로 변하는 부분 등이다.
흐름식 장면전환의 목표는 관중이 무대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레 전환시켜 정서적 감흥을 유지하게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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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표기연구실에서 1970년대 초부터 15년 동안 연구하여 1987년에 발표하였다. 형태와 놀림을 나타내는 15개의 모음과 자리와 방향을 나타내는 19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 형성의 원리는 몸동작 형상을 본떠 표기 문자를 만들고 이를 자모식으로 조합하여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5선지 악보를 원용하여 인체의 높이구조에 맞추어 고안한 3선의 ‘무용보표’에 무용문자를 기입하여 사용하며, 기본 문자의 활용 외에 무용의 길이표(음표활용), 형상표, 부위표, 줄임표, 변율표, 형상표어(‘흠모의 정을 담아 느리게’, ‘사과를 딴다’ 등) 등을 함께 활용하고 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5개의 모음과 19개의 자음의 형태를 나타내내 문자를 1987년에 발표했고, 이를 조합헤 악보에 원용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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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족예술단은 가극과 음악무용종합공연을 하는 중앙예술단체인데, 특히 민요, 민속무용, 민족가극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의 창조공연에 주력하고 있는 예술단이다.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국립민족예술단은 1972년 4월 3일 창립 당시에는 ‘평양예술극단’이었으나, 1975년 12월부터 ‘평양모란봉예술단’으로 개명하였다가 1985년 ‘평양예술단’으로 개명하였다. 1992년 현재의 ‘국립민족예술단’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민족예술단의 주 활동무대는 1982년 7월에 개관한 봉화예술극장이다. 1970년대 초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등을 창조 공연하였고, <언제나 어디서나 수령님 우러러> 등 수많은 가요와 <강선의 노을>, <풍년든 들판에서>, <장고춤> 등 무용을 만들어 냈다. 특히 1988년 ‘민족가극’ <춘향전>이후 민족가극 <심청전>, 민족가극 <박씨부인전>을 연이어 공연하면서 민족가극 전문 공연단체로 자리 잡았다. 또한 1997년 전통무용과 기악곡을 중심으로 진행된 민속무용조곡 <평양성 사람들>은 북한식‘민족문예’ 창조의 선봉에 국립민족예술단이 있음을 보여 주었는데, ‘임진왜란 때 자기 조국과 향토를 무한히 사랑하며 그를 지켜 용감히 싸운 평양성 사람들의 슬기롭고 근면한 기상’을 그리고 있다. 이 예술단은 1973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국립민족예술단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에 주력한 중앙예술단체이다. '평양예술극단'에서 '평양모란봉예술단', '평양예술단', '국립민족예술단'으로 개명되었다.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 혁명가극과 <언제나 어디서나 수령님 우러러> 등 가요, <강선의 노을> 등 무용, <춘향전>등 민족가곡, <평양성 사람들>등 민속무용조곡을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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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연극단’은 연극을 전문으로 창조 공연하는 북한의 대표적인 중앙 연극공연단체이다. 우리의 국립극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46년 5월 23일에 조직된 ‘중앙예술공작단’을 전신으로 하여 창립되었으며, 1947년 1월 9일 ‘국립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전후 ‘국립연극극장’으로 되었으며, 1972년부터 지금의 ‘국립연극단’으로 개칭되었다. 초기에는 연극 <춘향전>, 연극 <심청전> 등 고전작품을 비롯하여 송영의 <금산군수>(1949), <불사조>(1959), 한태천의 <명령은 하나밖에 받지 않았다> 등을 안영일․이서향․황철 등의 연출로 공연하였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집체작의 형태로 이른바 ‘혁명연극’들을 창조하였다. 천리마기수들의 전형을 형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는 행복해요>(1960), 인민상계관작품인 <붉은 선동원>(1961), 대표적 ‘수령형상창조’ 공연인 <승리의 기치 따라>(1968), <혁명의 새 아침>(1971)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46년 조직된 중앙예술공작단을 전신으로 하는 국립연극단은 우리나라의 국립극단에 해당하는 북한의 대표 중앙 연극공연단체이고, 붉은 선동원, 승리의 기치 따라, 혁명의 새 아침 등의 대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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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김정일의 지도에 의해 <성황당>을 공연한 이후에는 <혈분만국회>(1984), <3인 1당>(1987), <딸에게서 온 편지>(1987), <경축대회>(1988) 등 북한의 ‘5대 혁명연극’을 ‘<성황당>식 혁명연극’으로 재창조하는 등 100여 편의 장막극과 270여 편의 중․단막극을 공연했다. 1990년대에도 <승냥이>, <소원> 등의 혁명연극을 발표하는 등 북한연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국립연극단’에는 13명의 인민배우와 10명의 공훈예술가, 그리고 40여 명의 공훈배우가 소속되어 있다. 최근 리모델링을 한 국립연극극장을 거점으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국립연극단’의 중심 구성원들은 1978년 <성황당> 공연에 출연하여 북한 연극계의 중추가 된 리단(연출가), 리병수(무대미술가), 고옥성(복순이 어머니 역), 곽원우(만춘 역), 김춘남(돌쇠 역) 등이다. 이 극단은 197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김정일의 지도 하에 <성황당> 공연 후 100여 편의 장막극과 270여 편의 중․단막극을 공연했다. 1990년대에도 <승냥이>, <소원> 등 혁명연극을 발표하는 등 북한연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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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인형극단은 인형극을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예술단체이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동에 위치하는 평양인형극단은 1955년 문화선전성 산하 대중예술극장에 만들어진 인형극부가 모체가 되어 1958년 3월 인형극단으로 발전한 다음, 1961년 독립적인 중앙예술단체인 평양인형극단이 되었다. <밭곡식의 왕>(1956), <홍보와 놀보>(1957), <혹 뗀이야기>(1960), <뿔 난 너구리>(1962), <세 동무>(1969) 등 단막, 장막형식의 인형극을 공연해 오던 평양인형극단은 1970년대 들어 김일성이 들려준 동화를 각색한 인형극들을 제작하여 새로운 시기를 맞는다. 동화 <놀고 먹던 꿀꿀이>를 각색한 단막인형극 <꿀꿀이>(1971)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이후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 들려주었다는 동화를 원본으로 제작한 인형극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셋째의 착한 마음> (김정숙, 1990), <울리지 않는 종>(김일성, 1993), <봉선화>(1999)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특히 <셋째의 착한 마음>은 ‘<성황당>식 혁명연극’ 형식의 성과와 경험을 인형극의 특성에 맞게 받아들여 창조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북한 인형극의 대표작이다. 평양인형극단에는 창작창조과, 배우과, 무대과, 인형제작과의 부서가 있다.
인형극을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예술단체인 평양인형극단은 단막, 장막형식의 인형극을 공연 하다가 1970년대 들어 김일성이 들려준 동화 <놀고 먹던 꿀꿀이>를 각색한 인형극 <꿀꿀이>를 제작하여 새로운 시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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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희극극단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1995년 창립된 희극 전문극단이다.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0년대 중반에 이 극단을 만든 것은 웃음을 통해 주민들의 누적된 불만과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희극이 주민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과장, 웃음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상적 내용과 교양적 가치를 잘 조화시켜 나갈 것’ 을 강조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재담 <제정신을 가지고 살자>, <제 것을 사랑하라>, 독연극<잡귀신>, <특수 방탄복>, 만담 <부모를 잘 모시자>, 사이극 <인심좋은 작업반장>, 촌극 <다같이 충고할 때>, 희극 <웃으며 살자> 등이 있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작품들이다. 연출형식은 우리의 코미디와 거의 유사하다.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희극배우로 장철호가 있다.
김정일에 의해 1995년 창립된 희극 전문극단 국립희극극단은 '고난의 행군'시기 주민들의 누적된 불만과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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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예단은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교예(우리의 서커스와 마술에 해당)를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중앙예술단체이다. 평양교예단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에 6월 10일 약 20여 명이 ‘국립교예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다. 단원은 1천 200~300명으로 공중교예를 하는 배우1과, 동물교예를 하는 배우2과, 요술을 보여주는 요술과, 수중교예과, 빙상교예과 등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평양교예극장’을 전용극장으로 하여 주 5회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평양교예단은 체육과 예술의 결합, 다양성과 민족성 함양이라는 창작원칙을 세우고 지난 50여 년간 체력교예 330여 편, 요술, 310여 편을 비롯하여 동물교예, 빙상교예, 수중교예 등 총 970여 편의 작품을 창작공연하였다. 국내공연 37,930여 회를 비롯하여 중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모로코 등 70개 나라 5,620여 회를 해외공연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평양교예단은 35차례에 걸친 국제 교예 및 요술축전에 참가하여 60여 개에 달하는 최고상, 특별상, 금메달 등을 수상했다고 한다. <널뛰기>, <전회비행>, <날아다니는 처녀들>, <공중철봉비행>, 요술 <사과풍년> <신기한 힘> <우산재주>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4바퀴 돌아잡기, 몸을 펴고 3바퀴 돌아잡기 등 난이도가 높은 기술로 구성된 <날아다니는 처녀들>은 세계적인 공중곡예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민예술가 박소운와 김재근, 부자(父子)요술가이며 인민배우인 김택성과 그의 아들 김철,김광철 등 수십 명의 명예칭호 소유자들을 배출했다. 지난 1999년 말 통일농구대회 때 서울에서 환상적인 묘기를 선보였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도 서울공연을 한 바 있다. 평양교예단은 교예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 1972년과 1982년 ‘국기훈장 제1급’을, 지난 1977년에는 북한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평양교예단은 교예를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중앙예술단체이다. 체육과 예술의 결합, 다양성과 민족성 함양이라는 창작원칙으로 지난 50여 년간 체력교예 330여 편, 요술, 310여 편을 비롯하여 동물교예, 빙상교예, 수중교예 등 총 970여 편의 작품을 창작공연하였다. 또한 35차례에 걸친 국제 교예 및 요술축전에 참가하여 60여 개에 달하는 최고상, 특별상, 금메달 등을 수상했으며 난이도 높은 기술로 구성된 <날아다니는 처녀들>은 세계적인 공중곡예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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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비전문 아마추어 공연단체로는 크게 예술소조와 예술선전대를 들 수 있다. 예술소조가 경제적 생활 조직에 소속된 순수 비전문극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예술선전대는 전문극단과 비전문극단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선전대’는 1970년대 초부터 각 도․시․군 소재지에 설치되었는데, 경제선동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소조의 활동을 지원하여 군중예술을 발전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중앙의 주요 공연단체들도 의무적으로 예술선전대를 조직하여 경제선동공연에 참가한다. 이 때는 예술단원의 일부가 소편대를 이루어 경제선동공연에 참가하는 방식을 취한다.
북한의 아마추어 공연단체인 예술선전대는 전문극단과 비전문극단의 중간성격을 띄며 경제선동공연활동과 예술소조의 활동을 지원함으로 군중예술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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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경우 문화시설의 개념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문화’라고 하는 용어의 사용과 관계되어 있다. ‘문화’를 ‘사회문화’라고 하는 넓은 영역으로 사용하면 예술․종교․교육․체육 관련 시설이 모두 문화시설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흔히 ‘문화시설’이라 하면 좁은 의미의 ‘문화예술시설’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에서는 “공연, 전시 및 문화보급, 전수 등 문화예술 활동에 지속적으로 이용되는 시설”로 규정하고 있다. 공연활동이 이루어지는 극장이나 영화관, 전시활동이 이루어지는 미술관, 박물관, 전시장, 전수활동이 이루어지는 전수회관, 문화예술교육시설 등등 그 종류도 대단히 많다.
남한에서 문화시설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흔히 문화시설이라고 하면 협의의 문화예술시설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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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은 연극의 특성에 잘 어울리는 성악형식입니다. 연극음악의 기본형식은 방창으로 되어야 합니다. 방창을 연극에 받아들이란다고 하여 가극에서처럼 쓰려고 하여서는 안 됩니다. … 연극은 가극과 달리 대사와 행동 속에 극이 있고 극속에 대사와 행동이 있는 예술입니다. 그런 것만큼 연극의 특성을 무시하고 아무 방창형식이나 마구 끌어들이면 대사와 행동이 저애를 받고 극이 살지 못하게 됩니다. 대사와 행동으로 극이 지속되게 하자면 방창을 주로 독방창으로 짧게 울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대사가 없이 행동만 진행되는 중요한 극적 계기에서 극의 양상과 장면의 내용에 맞는 독방창을 1절 정도로 짧게 주면 인물의행동도 더 돋보이고 극의 흐름도 정서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연극 특성에 안 맞는 방창은 대사와 행동에 방해를 주기 때문에 독방창으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행동만 있는 극적 장면에서 적절한 독방창 1절 정도는 주면 인물의 행동과 극의 흐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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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문화기반시설’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공공도서관․박물관․미술관․문예회관․지방문화원․문화의 집 등 사회적 인프라가 되는 주요 공공문화시설을 지칭한다. 이 경우 민간부문의 문화예술시설을 제외하게 되며, 문화관광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시설의 건립 및 운영에 직․간접으로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 및 개념을 고려할 때 ‘문화시설’이란 “문화예술 활동에 관계되는 공공의 시설물”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화기반시설이라 할 때는 공공시설의 성격,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화부문 인프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기반시설'이란 민간 문화예술시설을 제외한 사회적 인프라가 되는 주요 공공문화시설로 공공시설의 성격,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화부문 인프라의 의미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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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우리의 ‘문화시설’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문화교양건물’이라는 용어가 가장 근접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조선대백과사전9』에 의하면 ‘문화교양건물’이란 “근로자들을 문화정서적으로 교양할 목적으로 건설한 공공건물”로 정의된다. 북한의 문화교양시설은 다시 관람형의 문화교양건물(극장, 영화관등), 학습형의 문화교양건물(인민대학습당, 도서관 등), 전시형의 문화 교양건물(박물관, 전람관), 소조운영형의 문화교양건물(문화회관, 궁전 등)로 나뉜다. 대체로 우리의 ‘공연시설’과 북한의 ‘관람형의 문화교양건물’이, ‘전시시설’과 ‘전시형의 문화교양건물’이, ‘정보제공시설’과 ‘학습형의 문화교양건물’이, ‘지역문화복지시설’과 ‘소조운영형의 문화교양건물’이 짝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와 북한이 눈에 띄게 다른 점은 근로자와 청소년들에 대한 ‘교양’에 시설의 주된 기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용어조차 ‘교양건물’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우리의 ‘문화시설’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문화교양건물’이 있다. 북한은 근로자와 청소년들에 대한 ‘교양’에 시설의 주된 기능이 있다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교양건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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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문화교양건물’ 외에도 ‘문화후생시설’, ‘공공건물’이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는데, 각각 ‘문화교양건물’보다 지칭하는 범위가 넓은 편이다. ‘문화후생시설’이란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의 요구에 맞게 인민들의 문화위생적 생활과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여 주는 여러 가지시설”로서, 학교․유치원과 같은 교육시설, 병원․진료소․요양소와 같은 보건시설, 극장․영화관․문화회관․체육관과 같은 문화체육시설, 밥공장․식당․여관․양복점․목욕탕․이발소․미용 등 여러 가지 편의수리시설과 생활편의 및 위생편의시설이 포함된다. 여기 문화 교양건물에 해당하는 것은 ‘문화체육시설’이라 할 수 있다.
문화후생시설은 인민의 생활 편의를 위해 만든 교육, 보건, 문화체육, 편의수리 등의 생활편의시설을 말한다. 문화 교양건물은 문화체육시설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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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관람형 문화교양건물은 우리의 공연시설에 대응하는 문화시설이다. 우리의 공연시설 개념에는 전통적인 연극극장 및 영화관, 그리고 야외음악당이나 야외무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북한의 경우 가극, 연극, 교예, 무용, 음악 공연을 할 수 있는 전용공연장 및 다목적 공연장들이 이에 포함된다. 다만 북한에서는 공연예술을 발표하는 공연장은 ‘극장’이라 하고,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은 ‘영화관’이라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또한 ‘극장’에서는 주로 전문 공연예술 단체가 창작 발표를 하고 있고, 아마추어 예술동아리의 ‘군중예술’ 발표장은 별도로 ‘문화회관’ 또는 ‘문화궁전’이라는 명칭의 시설로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관람형 문화교양건물 중 우리의 공연장에 해당하는 것은 ‘극장’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공연 발표하는 공연장은 ‘극장’,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은 ‘영화관’이다. 또한 ‘극장’에서는 전문 공연예술 단체가, '문화회관' 또는 '문화궁전'에서는 아마추어 예술동아리가 발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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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극장이란 공연예술의 발전과정을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극장건축의 발달이 공연예술의 변화 및 발전을 돕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의 극장은 북한 공연예술의 역사를 일정하게 반영하기도 하며, 또한 북한 극장이 북한 공연예술의 발전을 돕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한다. 북한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여러 공연예술이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교예라든가 총체장르인 음악무용서사시극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교예와 같은 특수한 공연 장르를 위해서는 전용공연장을 지어서 대비해왔고, 총체공연물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실내체육관이나 스타디움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방창’을 극 표현 수단으로 즐겨 사용하는 관계로 방창무대가 따로 갖추어져 있는 것도 우리에게 없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극장이란 공연예술과 상호 발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북한에는 우리에게 없는 다양한 공연예술들이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교예나 음악무용서사시극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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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양대극장은 평양시 대동강구역 옥류동 문수거리에 청년중앙회관과 나란히 서 있다. 1989년 제13차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건립하였으며, 5월 18일 개관하였다. 김정일의 지도에 의해 대동강 건너편 만수대대기념비의 중심축과 일치되는 동평양지구의 문수거리 중심축 주변에 새로운 문화교양중심부를 형성하도록 동평양대극장과 청년중앙회관을 건립하였다 한다. 북한의 도시계획은 김일성 관련 기념물을 중심에 놓고 축을 형성하면서 이루어진다. 동평양대극장의 경우만수대언덕의 김일성 동상과 조선혁명박물관의 정면구성축과 일치되는 선에 위치하여 ‘만수대대기념비’의 사상예술적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평양대극장과 청년중앙회관은 김정일의 지도로 세워졌다. 김일성 관련 기념물을 중심에 두며 도시계획이 시작되는데, 특히 동평양대극장은 김일성 동상과 조선혁명박물관과 일치되는 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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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부지면적은 62,000여㎡이다. 동평양대극장은 현관홀과 관람석, 무대, 관리운영부분이 배우들의 공연활동과 관람자들의 관람에 편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여 줄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현관홀은 극장 앞부분에 반원형의 4층의 건물로, 각종 연습실은 극장 뒷부분에 7층으로 건축하였다. 극장의 외형은 그 기능상 특성과 주변건축물들의 조형적 특성을 고려하여 문수거리의 높고 낮은 살림집들과 강한 대조를 이루게 큰 덩어리로 만들었다 한다. 브론즈 유리로 마감한 반원형 부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고, 정면 출입구 윗부분에는 직사각형 덩어리를 올려놓아 대조적 효과를 주었다. 거기에 금강산 풍경을 형상한 대형쪽무이벽화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반원형덩어리에 대조적으로 수직을 강조하였으며, 다중이용시설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정면현관부의 문칸 4면을 모두 유리로 마감하여 현관홀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게 만들었다.
동평양대극장은 배우들의 공연활동과 관람자들의 관람에 편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게 설계하였다. 전체적으로 반원형덩어리에 수직을 강조하였으며, 다중이용시설이라는 점을 참고하여 현관홀의 내부가 들여다보이게 만든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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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중앙예술단의 공연은 크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국가기념일과 관계되는 경축공연(새해경축, 2.16경축, 4.15경축, 5.1절 경축, 당창건일 경축 등), 둘째 주요 행사시 진행하는 행사공연, 셋째, 일반공연(정기공연 및 순회공연), 넷째 외국방문공연(해외 공연), 다섯째 경제선동공연(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의 공연)이 그것이다. 이 가운에 경축공연과 일반공연이 주로 극장에서 펼쳐진다. 동평양대극장은 주로 만수대예술단의 음악무용종합공연 발표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외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이나 북한의 국기기념일 공연시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마추어 예술소조의 공연행사도 열리기도 한다. 2002년 9월에는 문화방송 평양특별공연의 무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북한의 중앙예술단의 공연은 크게 국가기념일과 관계되는 경축공연, 주요 행사시 진행하는 행사공연, 일반공연, 외국방문공연, 경제선동공연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경축공연과 일반공연이 주로 극장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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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중심부에서 룡성방향으로 나가는 서성구역 와산동 대로변에 위치한 봉화예술극장은 1982년 7월 개관하였으며, 연건평 45,900㎡으로 2,000석 대극장과 800석 소극장이 있다. 이 극장에는 직경 10m의 이동식 회전무대를 비롯하여 악사승강무대, 방창이동무대, 수평이동무대 등이 있어 무대를 교체하기가 편리하게 되어 있다. 내부에는 묘향산 이선남폭포 그림과 우산분수와 줄분수로 이루어진 분수장식이 있다. 극장의 현관홀은 2층관통홀로 되어 있으며 홀의 측면에는 옷보관실을 두었다. 극장의 무대는 기본무대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옆무대, 뒷무대와 연결시켰으며 방창무대와의 연결도 잘 처리하였다. 또한 배우연습실, 창작실, 분장실, 무용연습실을 비롯한 배우들의 공연에 필요한 실들이 꾸려져 있고,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사무실과 공기갈이칸 등을 비롯한 실들이 배치되어 있다.
1982년 7월 개관한 봉화예술극장은 2,000석 대극장과 800석 소극장이 있다. 배우들의 공연에 필요한 실들이 꾸려져 있고, 여러 사무실과 공기갈이칸 등을 비롯한 실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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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건축설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중앙현관홀을 2층관통홀로 형성하고 공간을 넓고 시원하게 하였으며 원형계단과 실내분수를 배합하여 형성함으로써 건축공간의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또한 중앙홀에서 각 실까지를 복도로 연결하고 휴게실과 복도의 조명설비도 적정하게 해결하였다. 또한 내부의 벽과 기둥, 바닥 등을 대리석, 화강석으로 다듬어 붙여 화려하게 하였다. 이 극장에서는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민족가극 <춘향전>, 음악무용종합공연 등 많은 무대예술작품이 공연되었으며, 평양예술단의 주 활동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1999년 12월에는 로저 클린턴과 태진아 설운도 최진희 등이 참가한 남북합동공연 ‘2000 평화친선음악회’와 현철, 안치환 등이 참여한 남북합동공연 제1회 민족통일음악회도 바로 여기에서 열렸다.
극장의 건축설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중앙현관홀을 2층관통홀로 형성하고, 실내분수와 원형계단을 배합해 건축공간의 조화를 이룬 점인데, 이 극장에서는 남북합동공연과 민족통일음악회 등이 열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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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중심부인 중구역 대동문동 서문거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1976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북한의 극장 가운데 1970년대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설계 및 시공 과정에서 현지지도를 했을뿐만 아니라, 1977년 1월 1일에는 만수대예술단의 개관기념공연 음악무용이야기 <낙원의 노래> 공연을 참관하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만수대예술극장은 연건축면적 약 6만㎡의 4층 건물로, 무대면적 2,000㎡, 높이 40m의 대형극장이다. 그 규모로 보아 가극이나 음악무용 이야기 장르 등 대형공연을 목적으로 건립된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극장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만수대예술단의 주공연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만수대예술극장은 북한의 1970년대 대표 건축물로 김정일이 설계과정부터 지대한 관심을 쏟은 결과물이다. 대형공연에 적합한 대규모 극장으로 만수대예술단의 주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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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에서는 주로 음악무용소품공연을 하는데 필요에 따라 영화도 상영할 수 있게 하였고, 좌석수를 늘이거나 줄일 수 있게 가변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무대에는 5개의 열승강무대와 두 틀의 수평이동무대, 회전무대, 요술무대 등이 있다. 또한 100여 개의 각종 ‘드림설비’가 설치되고 모든 무대장치를 원격조종하도록 하였다. 배우분장실은 무대조명 색깔에 맞게 분장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색의 전등이 설치된 분장대가 있으며, 무대실황을 항상 볼 수 있게 하는 모니터 설비들도 갖추어 놓았다. 이밖에도 모든 설비들을 현대적 설비로 꾸려놓아 건립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극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극장은 좌석수를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가변구조이며, 무대와 배우분장실 등 모든 설비들이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어 기술적 수준이 상당한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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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모란봉구역 만수교 옆에 위치한 원형의 교예전용극장으로 1964년에 건립되었으며, 연건평은 15,000㎡에 수용인원 1,800석의 규모이다. 극장은 크게 3개의 동으로 이루어 졌는데 1호동은 원형극장 부분이고, 2호동은 훈련장 및 관리청사 부분이며, 3호동은 보조건물 부분이다. 내부공간은 대부분 무대와 관람석(1,600여 석)이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공간에 유보장을 비롯한 관람봉사부분을 두었다. 이 극장의 원형무대는 일반 교예극장과 달리 무대를 건물 중심에서 6m가량 뒤에 옮겨 놓고 그 뒤에 보조무대를 잇닿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관람자들이 무대공연을 정면에서 보면서 공연의 연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보조무대에 배경막과 환등설비를 갖추어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게 하였다. 반구형 천정의 정점을 중심으로 설치한 공중무대는 공중입체교예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였다.
평양의 교예전용극장은 1964년에 건립되었고 수용인원1,800석 규모이다. 3개동으로 이루어져 관람자들의 연속적 공연관람을 보장하며 배경막과 환등설비로 다양한 공연효과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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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정면에는 높이 26m나 되는 14개의 돌기둥이 반원형으로 된 아름다운 채양과 시원한 감을 주는 전망대를 떠받들고 있으며 좌우벽과 그 옆에는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 혁명가극의 주인공들을 형상한 부각상들과 원형장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전면길이는 125m, 측면길이는 145m, 후면길이는 93m이며, 높이는 45m이다. 극장은 기단층과 지상 6층(뒷면 9층)으로 되어 있다. 기단층에는 공기조화기계실, 무대기계실, 전기기계실들과 보조시설들이 배치되어 있고 지상건물에는 관람홀과 무대, 휴게실, 분장실, 연습실, 배우실, 대중봉사실 등 800여 개의 방들이 있다. 1층부터 2층까지 관통된 중앙현관홀이 있다. 정면유보장을 부채형으로 구부러지게 조성하고 1, 2층을 관통함으로써 시원한 공간감을 주며 좌우에 대형 나선형 계단을 장식적으로 배치하였다.
극장 정면에는 돌기둥이 전망대를 떠받들고 있으며 혁명가극 주인공들의 부각상과 원형장식물이 배치되어 있다. 극장은 기단층과 지상 6층으로 되어 있는데, 정면유보장이 1,2층을 관통하여 시원한 공간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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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장은 부지면적 약 30,000㎡, 건축면적 6,000㎡, 연건축면적 18,200㎡로 건물은 반지하층과 지상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지하층에는 기계실, 흡연실, 위생실 등 40여 개의 방이 있다. 1층에는 현관홀과 옷보관실, 무대기계실 등이 있고, 2층에는 기본관람홀과 휴게실, 무대 등이, 그리고 3층에는 휴게홀, 사진전시실, 배우실 등이, 4층에는 종합연습실, 배우실, 사무실 등이 있다. 1,200여 석을 가진 3층으로 된 관람홀은 통로가 따로 없이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를 1,500mm로 넓게 배치한 점이 특징이며, 양쪽 측면 벽에 발코니 객석을 배치하였다. 무대 깊이는 약 30m 정도, 무대높이는 24m 정도이고, 뒷무대에도 무대천정을 높게 하였으며, 앞무대에 방창소무대를 배치하고, 회전무대, 승강무대, 수평이동무대 등의 무대기계를 설치하여 전문예술공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극장은 반지하층과 지상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홀은 앞뒤 좌석 사이를 넓게 배치했고, 양쪽 측면 벽에 발코니 객석을 만들었다. 앞무대에 방창소무대를 배치, 각종 무대기계를 설치하여 전문예술공연이 가능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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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각형 평면으로 된 극장의 외형은 뒤의 옛 성벽과 앞에 있는 칠성공원 등 자연풍치적 조건에 어울리게 설계하였다. 극장의 겉면에는 강한 수평, 수직 띠를 두르고 창들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였으며 건물 윗층에 독특한 전망대를 크게 두어 주변을 잘 전망할 수 있게 하였다. 안주극장은 안주중심거리의 북쪽에 놓인 두드러진 건축물의 하나로서 옛 성벽 및 백상루와 함께 거리의 민족적 특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살 려 표현한 건축물로 꼽힌다. 이 극장은 북한의 시․군급 극장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가무를 비롯한 전문예술단체들의 여러 가지 예술공연과 부문별 예술축전, 회의와 영화감상 등 각종 공연과 관람,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안주극장은 안주중심거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옛 성벽 및 백상루와 함께 거리의 민족적 특성화 현대성을 동시에 살려 표현한 건축물로 시,군급 극장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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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립연극단에 의해 공연된 ‘혁명연극’ <성황당>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까지도 북한연극을 대표하는 본보기 작품이다. 이 작품의 상연을 계기로 김정일 주도의 북한 ‘연극혁명’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후 새롭게 창조되는 북한 연극은 모두 <성황당>의 성과를 이어받아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형식과 미학의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북한연극이 ‘<성황당>식 연극’으로 통일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북한연극의 이해는 ‘<성황당>식 연극’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또한 거기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공연된 <성황당>은 북한극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상연을 계기로 북한 '연극혁명'이 이루어졌으며, 북한연극이 <성황당>식 연극으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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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연시설은 다장르 공연이 가능한 다목적 홀을 기본으로 하되, 장르에 따라 음악무용서사시(대공연), 가극극장, 연극극장, 인형극 극장 등 장르전용극장이 함께 발달해 있다. 북한에서는 공연 규모에 따라 극장의 규모도 달리 설정하고 있는데, 그 크기의 순서는 대체로 음악무용서사시→가극→연극→인형극의 순이다. 다만 대부분의 극장은 음악무용서사시와 가극이 모두 가능한 대형극장과 연극을 하는 중간크기의 극장으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주체사실주의에 입각한 재현주의 미학이라는 북한 공연예술 장르의 특성과 관계된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극장 구조는 프로시니엄 아치무대로 되어 있다. 다만 교예극장은 원형무대를 기본구조로 하고 그 한쪽에 프로시니엄식 ‘일면무대’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가극이나 연극 공연장의 경우 모두 프로시니엄 아치무대를 기본구조로하여 그 구조와 형태는 유사하고, 규모나 설비의 차이만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정도이다. 대부분의 극장에 주무대 외에 뒷무대와 좌우 옆 무대, 앞무대와 오케스트라피트(북한 용어로 ‘악사연주실’)가 구비되어 있다. 다만 우리와 아주 다른 점은 무대 옆에 설치된 방창무대(계단식으로 된 합창대석)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장르에 방창이 활용되는 북한 공연예술의 특성에서 온 것이다.
북한의 공연시설은 다장르 공연이 가능한 다목적 홀을 기본으로 장르에 따라 음악무용서사시, 가극극장, 연극극장, 인형극 극장 등 장르전용극장이 함께 발달해 있다. 대부분의 극장 구조는 프로시니엄 아치무대로 되어 있고 우리와 다른 점은 북한 공연예술의 특성상 무대 옆에 설치된 방창무대가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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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연예술은 기술적인 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배경에는 상당한 수준의 설비를 갖춘 공연장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북한 극장의 무대평면만 보더라도 주무대 외에 뒷무대와 옆무대, 앞무대를 고루 갖추었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흐름식 입체무대미술’과 같은 무대장치 기법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지난 1970~8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남한보다 극장 조건은 더 나아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연 관련 기자재가 날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보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북한은 남한에 비해 낙후한 설비로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남한에서는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어 지금은 상당한 수준의 공연장을 다수 보유하게 되었다.
'흐름식 입체무대기술'과 갗은 무대장치 기법이 발달하여 북한의 공연예술의 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지만 남한에 비하여 낙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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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북한의 공연장 조건에 대한 정보가 우리에게는 너무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공연장 분야의 남북교류․협력 사업이 추진된다면 제일 먼저 추진되어야 할 사업은 바로 남과 북의 공연장의 기본적인 구조와 설비 시스템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남과 북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조사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제1차적 사업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남북 공동공연과 교류사업 시 공연에 참가하는 스탭진의 교류도 동시에 추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의 ‘무대기술인’에 해당하는 극장 스탭 사이의 워크숍 같은 것도 적극 준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연예술 제작시스템 전반에 대한 상호 교류, 공동 작업을 위한 무대용어의 통일 작업, 각종 현대적 설비의 교류 및 지원 등이 주요사업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공연장 조건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다. 따라서 공연장 분야의 남북교류․협력 사업이 추진된다면 남북 공연장의 구조와 설비 시스템 등을 먼저 조사 및 파악을 한 뒤 스탭들의 인적 교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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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좀더 진전되는 단계가 되면 북한에서 극장경영에 관계하는 스탭들과 남한의 공연기획자 사이의 워크숍 등을 통해 ‘상업적 공연유통’ 방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가능하다면 북한에서 공연예술 및 극장운영에 종사하던 인력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적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 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의 공연장 건축 전문가들이 만나서 공연장 건축의 표준안을 만들어 보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다. 각 공연 장르에 적합한 표준값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건축음향이나 기계 설비 등에서 서로의 기술적인 장점들을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관광지구나 개성공업지구에 공연장을 짓게 되는 경우가 오면, 그 때는 남북 공연장건축 전문가의 기술적 교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공연예술의하드웨어인 공연장 교류가 이루어져야 그를 토대로 진정한 의미의 남북공연예술 교류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의 건축 전문가들이 공연장 건축의 표준안을 만들어 서로의 기술적인 장점들을 교환하고 금강산관광지구나 개성공업지구에 공연장을 지어지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남북공연예술 교류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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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만큼 변화가 심한 분야도 없는 듯하다. 쉴 새 없이 개었다 흐렸다 하는 것이 남북관계이다. 그 주된 이유는 남북관계에 작용하는 변수가 너무나 다양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사자인 남과 북은 물론이고 미․일․중․러 등 주변 4대국의 이해가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에 결정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되는 듯싶다가도,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9.11테러 등으로 인해 ‘1994년의 위기’가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 정도로 경색 국면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마침내 북한측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북일정상회담 개최․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착공식․북한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여․미국의 대북 특사파견 등이 연속되면서 남북관계에 더 이상의 후퇴는 없을 것처럼 진전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 북한의 ‘핵개발 계획’이 전격적으로 노출됨으로써 다시 남북관계는 전면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남북관계의 변화가 심한 이유는 남과 북은 물론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크기 때문이다. 임동원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분위기가 조성되며 남북관계에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북한의 ‘핵개발 계획’이 전격적으로 노출되면서 남북관계는 전면적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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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상황은 전혀 상반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제네바합의’의 파기와 함께 남북관계 및 북한의 대외 관계가 1990년대 초반 상황으로 원점회귀하여 ‘한반도 위기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북미간의 전면적인 재협상에 의해 클린턴 정부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방식으로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나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핵폭탄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되려면 북한이 핵 문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투명성을 제고하여 국제사회의 불신과 의혹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납치문제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된 북일 국교정상화 방식은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안정적인 방식으로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이 이루어지려면 핵 문제를 비롯, 문제들의 투명성을 제고하여 국제사회의 불신과 의혹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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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심한 남북관계이기에 남북 공연예술 교류 또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교류 상황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 따라 교류의 방향이나 속도, 규모 등에 있어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이나 방법을 세우지 못하고 전반적인 남북관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 온 것이 남북 공연예술 교류의 현상이다. 이는 공연예술 교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 문화교류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변화가 심한 남북관계를 안정적인 화해․협력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현 단계 문화교류 및 공연예술 교류의 역할이 일정하게 주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변화가 심한 남북관계를 안정적인 화해 협력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현 단계 문화교류 및 공연예술 교류의 역할이 일정하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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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남북관계 진전의 흐름에 따라 남북 공연예술 교류의 역할과 방법도 일정하게 달라지고 있고, 또 마땅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적대적 대결단계에서 공연예술 교류는 남북 사이의 대결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역할을 전면에서 담당하게 된다.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도 공연예술은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펼쳐지므로 하나하나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상징적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동안의 남북 공연예술의 역할은 그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남북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느냐에 따라 공연예술 교류의 방향과 속도도 조절될 것이다. 다만 전체적 거시적 흐름이 적대적 대결에서 화해․협력으로, 나아가 화해․협력에서 평화․공존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대 전제 아래 이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적대적 대결관계에서는 남북간의 대결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역할을 했다.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공연 예술 교류의 방향과 속도도 조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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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는 남북 공연예술 교류가 과연 남과 북의 문화적 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나아가 과연 동질성 회복이 공연예술 교류의 지상 목표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특히 1985년의 사례처럼 교류 자체가 무조건 남북 문화교류 및 문화적 동질성 회복에 기여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조건적 교류가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교류를 진행할 것인가 하는 교류방식의 문제가 보다 중요해진다. 좀더 섬세하게는 남과 북 사이의 동질성 회복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이질성의 확인 속에 공존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남과 북 사이의 동질성 회복의 필요성 또는 이질성 가운데 공존문화가 중요한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확인하고 남북 공연예술 교류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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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북한연극의 미학을 논한다고 하면서도 주로 연극형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 것은 1978년 <성황당> 이래의 ‘연극혁명’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기 위한 것이면서, 이후 남한 연극과의 구체적 비교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내용면에서 북한연극이 가지고 있는 특질은 연극만이 아니라, 영화나 가극, 나아가 문학에 이르기까지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또 항일혁명연극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혁명의 결과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형식면에 있어서까지 통일성이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연극의 내용과 형식, 창조체계와 창조방법의 네 범주에 걸쳐 있는 연극혁명의 구체적 내용이 모두 1978년에 현대화된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구현되고 있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황당>식 연극’이야말로 김정일 주도의 ‘연극혁명’의 실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혁명연극 <성황당>은 주체시대의 새로운 인간형인 ‘자주적 인간 전형’을구축하고 있고, 그들이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워나가는 것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관객이 극중 세계를 실제의 생활처럼 느낄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연기, 자연스러운 흐름식 장면의 연결과 전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실주의’의 교의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혁명연극 <성황당>이 ‘항일혁명연극’에 그 시원을 두고서 재창조된 작품이고, 또 영화혁명․가극혁명에서 구축된 공연예술적 미학이 <성황당> 무대 창조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므로 장르간의 특성 차이는 있을지라도, 미학적으로는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극혁명의 결과 형식면까지 통일성이 구축되었다. 연극의 내용과 형식, 창조체계와 창조방법에 걸쳐 있는 연극혁명의 내용이 모두 1978년에 현대화된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구현되고 있으며, ‘<성황당>식 연극’이야말로 김정일 주도의 ‘연극혁명’의 실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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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르는 남과 북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북한이 우리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교예를 공연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켜 왔다는 점만이 눈에 띄게 달라 보이는 부분이다. 그런데 각 장르의 하위 장르나 혼합 장르에 가면 남과 북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남한에는 연극 장르에 전통연희를 현대화한 양식으로서의 마당극․마당놀이가 발달되어 있고, 음악극 분야의 뮤지컬이나 다양한 형태의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발달해 있다. 북한에는 우리의 오페라와 뮤지컬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가극(혁명가극과 민족가극)이 대표 장르로 발달해 있고, 여러 장르의 혼합 장르인 음악무용서사시, 음악무용서사시극, 음악이야기, 무용이야기 등이 발달해 있다. 특히 북한의 경우 공연예술 장르의 대형화․종합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의 경우에도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하였던 노래판굿이나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대형 가무악극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양에 있어서 북한이 압도적인 상황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북한식 총체장르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남과 북은 세부 장르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남한에는 전통 연희가 현대화 양식으로 여러가지가 발달되지만 북한은 가극이나 무용이 발달한다. 또 북의 가무악극의 양이 압도적이며 대형화, 대집단 체조 등은 북한 예술공연의 총체장르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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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한에서는 국악(판소리 포함), 탈춤, 한국무용 등 전통예술이 원형 그대로 공연되고 있는데 비해, 북한에서는 전통적(민족적)인 것과 현대적(서구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체계로 재편됨으로써 원형 그대로의 공연이 거의 없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의 공연예술은 남한 예술가의 시각으로 보면 민족적인 것도 서구적인것도 아닌 ‘국적 불명’의 것으로 느껴지기 십상이며, 반대로 남한의 공연예술은 북한 예술가에게는 지나치게 복고주의적이거나 서구편향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 즉, 남한에는 아주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초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공연예술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데 비해, 북한에서는 ‘항일혁명예술’을 근간으로 주체사실주의에 의해 재창조된 일련의 체계적인 공연예술 장르를 구축하여 ‘주체문예’로서의 단일성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남한에서와 달리 북한에서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하나의 체계로 재편되어 원형 그대로의 공연이 거의 없다. 즉, 남한과 달리 북한의 공한예술은 주체사실주의에 의해 재창조된 단일성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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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아 19세기말까지의 전통문화와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남과 북은 20세기 후반기의 분단체제 하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민족문화의 계승 및 재창조, 식민지 문화의 극복을 추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분단문화의 길을 걸어온 셈이 되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공연예술은 공통의 지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50년 동안 미학적으로 미감적으로 정서적으로 공연기술적으로 이질성이 심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리적 시간으로 보면 1945년 이전의 전통문화, 근대문화는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있는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가 지속됨에 따라 현재의 문화구조에 각기 다른 형태로 전승 내지는 수용되어 문화의 전분야에서 이질성이 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남과 북은 공통의 지반은 없지만 전통문화와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문화를 공유하고 식민지 문화의 극본을 추진함으로써 분단문화의 길을 걸어왔디 때문에 정서적, 공연기술적으로 이질성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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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연예술 교류의 시기별 변화 양상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제6공화국과 국민의정부 시기에 교류사업 건수가 집중되어 있고, 제5공화국과 문민정부 시기에는 교류 건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 따라 남북공연교류 사업 건수가 증감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동안의 남북 공연예술 교류에서 정부의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17년간의 공연예술 교류 기간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 시기는 1980년대, 둘째 시기는 1990년대 초반, 셋째 시기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남북 공연예술 교류사업은 제6공화국과 국민의정부 시기에 많았고, 제5공화국과 문민정부 시기에는 거의 없었는데 이는 남북 공연예술 교류에서 정부의 역할이 크다는 걸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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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시기에는 1985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이 성사되었지만,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발성으로 그치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북측에서 예술단 교환에 관심이 높았고, 상대적으로 이산가족상봉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기 위하여 예술단 교환공연을 패키지로 받아들인 감이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술단 교류에 목적이 있지 않았으므로 지속적 공연예술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 시기는 남과 북 사이에 최초로 예술단 교환이 성립되었다는 것자체가 중요한 성과이며,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방문자 수나 공연 횟수를 사전에 치밀하게 확정하였다는 데서 특징을 보인다. 1989년에 제2차 고향방문 및 예술단 교환 공연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것은 엄격한 상호주의가 갖는 경직성에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분단 이후 최초로 1985년 남북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이 성사되었지만, 남북한 각국의 예술단 교류 의지가 달라 지속적 공연예술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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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시기에는 6건이나 교류사업이 성사되는데, 이는 제6공화국이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과 관계가 깊다. 7.7선언을 비롯한 전향적인 대북정책 수립으로 공산권 자료를 개방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의 기본틀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1990년 말 평양과 서울에서 차례로 펼쳐진 통일음악회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남북 공연예술 교류로서,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주체가 되어 교류사업을 펼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시 교환’이라고 하는 경직된 형태의 상호주의에서 벗어나 ‘순차적 교환’의 형태로 교류를 한 것도 새로운 경험의 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음악회 행사는 이후 남북공연예술 교류의 원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 때의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 관련 교류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1990년 말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통일음악회는 이후 남북공연예술 교류의 원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때의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 관련 교류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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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음악 공연 때 사용된 주요 레퍼터리를 보면 크게 전통음악 분야와 기악, 그리고 대중가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전통음악은 남북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며, 기악은 가사가 있는 노래에 비해 이념의 직접적 표출이 없기 때문에 상호 이해가 용이하기 때문이며, 대중가요 역시 정치성이 비교적 약할 뿐만 아니라 상대 주민들에게 정서적 친화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남북 공연예술 교류가 아직은 초기 단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아직은 본격적인 남북 문화 교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비교적 내용성이 강한 연극이나 가극, 노래 분야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고, 그러한 차이의 인식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의미의 동질성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과 북 사이에 상호신뢰 기반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며, 결론적으로 훨씬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할것으로 보인다.
음악 공연 때는 크게 전통음악 분야와 기악, 그리고 대중가요가 주를 이루는데 이념의 직접적 표출이 없기 때문이다. 남북은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내용성이 강한 노래 분야의 교류고 문화적 차이의 인식 과정을 통해 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나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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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나치게 성사 자체에 목표를 둔 관계로 남과 북을 대표하는 공연예술(이는 상당부분 이질성이 심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음)의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질성이 많이 나타나는 전통예술이나 이념성이 약한 기악 분야를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짐에 따라 음악과 무용 장르에 교류 사업이 치우치게 되고, 또한 북한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혁명가극 <피바다>나 <꽃 파는 처녀>, 혁명연극 <성황당>이나 민족가극 <춘향전> 등은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상황이다. 남한의 주요 공연 작품 역시 북한에 소개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남북은 아직 상대방 예술의 진수를 제대로 접해 보지도 못한 셈이다. 남과 북 사이에 상호 신뢰 기반 구축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단계 남북관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생각되지만, 향후 중점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북측에서는 공연예술 교류를 경제적 수입원의 하나로 볼 뿐 예술 분야의 교류 사업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 부분이 많다.
성사 자체에 목표를 두어 남과 북을 대표하는 공연예술은 동질성이 나타나는 전통예술이나 이념성이 약한 기악 분야를 중심으로 음악과 무용에 치우치고 주요 공연 작품은 소개되고 있지 못해 상대방 예술의 진수를 제대로 접해 보지도 못한 것은 향후 중점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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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남한측의 일방적 교류 추진으로 공연예술 교류의 실질적 효과가 중요 목표가 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남한 공연단이 방북하여 공연을 진행하는 경우 북한지역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 공연이 북한 주민에게 문화적으로 미치는 효과는 극히 적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KBS교향악단 평양공연과 MBC 평양 특별공연에서 남과 북의 방송매체를 통해 중계방송 또는 녹화방송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상황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 공연예술 교류 방식의 새로운 진전이라 할 만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2회에 걸친 가수 김연자의 평양공연의 의미도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KBS교향악단 평양공연, MBC 평양 특별공연에서 남북의 방송매체를 통해 중계방송과 녹화방송을 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상황변화이며 남북 공연예술 교류 방식의 새로운 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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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공연예술 교류 때 제공하는 북측에 대한 지원금의 문제이다. 지원금은 북측예술단을 서울에 초청할 때나 반대로 남한 예술단이 북한지역에서 공연을 할 때도 모두 남측이 북측에 제공하는 방식이 관행화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퍼주기’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실질적인 남북 공연예술 교류가 가능하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본다. 문제는 그것이 예술 교류의 한 과정이 되지 못하고 단지 과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사의 하나로 치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데 있다. 또한 그러한 교류의 질에 비해서 지원금 액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도 문제라 할 수 있다.
공연예술 교류 때 남한이 북측에 대한 지원금을 모두 부담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 교류 기능을 상실한 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거나, 지원금 액수가 과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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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다양한 유파들에 의한 자발적인 ‘운동’에 의해 상향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의 ‘지도’에 의한 하향식 ‘혁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북한의 ‘연극혁명’은 하나의 통일적인 연극양식을 창출하는 데 속도면에서 대단한 성과를 보인 반면, 북한연극의 다양성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연극의 이러한 통일성은 북한연극만의 독자적 연극 양식의 창조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겠지만, 북한에서 전개되는 모든 연극이 ‘<성황당>식 연극’으로 창조되는 한 북한연극의 다양성은 싹틀 길이 없게 된다는 점에서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도적 양식이 없이 다양한 연극양식이 얼크러져 있는 남한 연극에 비할 때 두드러지는 북한연극의 장점이, 역으로 북한연극 발전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통일성은 타의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적인 연극향식과 속도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다양성을 잃게 되었다. 이는 북한연극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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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의 평양교예단 공연 유치가 실패한 직접적 이유 중 하나가 50만 달러로 책정되었던 지원금 문제였고, ’99 평화를 위한 국제음악회 서울․평양공연은 100만 달러를 이미 지불해 놓고도 나머지 100만 달러 문제로 공연이 성사되지 못한 경우이다. 이처럼 지원금이 과다해진 것은 남측의 과당경쟁이 부추긴 부분도 없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기획회사나 방송사 등이 끼지 않으면 일반 예술단체는 교류 사업의 추진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 상황이 되었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는 1990년대 초보다 교류 여건이 더 나빠진 상황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원금 문제로 평양교예단 유치 실패, 서울 평양공연이 취소되었다. 또 기획사, 방송사가 없으면 일반 예술단체는 교류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교류 여건이 나빠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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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체제의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 추세로 보인다. 단기 정세에 굴곡이 있고, 또 전문가에 따라 의견이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신의주․개성․금강산 지역의 경제 특구 설정계획만으로도 그러한 추세를 굳이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실용주의 노선으로 경제개방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 아무리 경제적으로 실용주의적 노선을 확고하게 선택한다하더라도 정치와 밀착되어 있는 문화예술 부문에 있어서는 경제 분야와 같은 ‘실용주의’가 성립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화예술 부문의 교류는 경제 부문의 교류보다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소위 ‘모기장론’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공연예술 교류의 대부분도 ‘문화’로서보다는 ‘경제’의 일부로 다루어진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정일 체제의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경제개방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에 문화예술에서까지 실용주의를 성립시키긴 어려우므로, 문화예술 부문의 교류는 경제 부문보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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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만 하더라도 남북회담에서 공연교류 제안을 곧잘 내놓았던 것이 북한측이었다. 혁명가극이나 혁명연극, 교예 등 북한 스스로 ‘자랑’할 만한 작품들이 많았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정치선전의 의도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국민의정부 출범 이후에는 오히려 남한이 적극적이고 북한은 소극적으로 대응해 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태도 속에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 공연예술 교류가 남북관계 일반의 진전 정도를 지나치게 앞서나가 ‘역효과’를 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북한 당국의 입장인 것 같다. 2002년 아리랑 축전에 당초 예상과 달리 남한 관중을 적극 초청하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남남갈등이나 거기에서 파생할 남북관계의 후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적어도 남과 북 사이에 평화․공존의 단계가 와서 상호 신뢰기반이 굳건해지기 전까지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교류’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계의 진전을 위해 공연예술 교류가 남북관계 일반의 진전 정도를 앞서나가 ‘역효과’를 내서는안 된다는 북한 당국의 입장은 공연교류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앞으로도 남과 북 사이에 평화․공존의 단계가 와서 신뢰기반이 굳건해지기 까지는 ‘조심스러운 교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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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연예술 교류 역시 ‘조심스러운 교류’의 기조 위에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남과 북 사이에 ‘평화협정’에 준하는 안보적 협약이 체결된다든지, 경의선과 동해선이 개통되어 남북 통행협정이 체결된다든지, 지금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특구에 남한 기업이 대거 진출해있는 상황이 온다든지 하면 남북관계 개선은 상당한 수준에서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고, 그 경우 남북 공연예술 교류는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단계에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즉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역할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남북 공연예술 사이의 교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공연예술 교류는 남북한 관계가 진전된 후 새로운 단계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 전망되며, 그 전에는 '조심스러운 교류'의 기조 위에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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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일방적 행사성 교류가 아닌 일상적이면서도 공연예술 내적인 교류가 활성화되고, 자연스럽게 기획사 및 방송사 중심의 대형 프로젝트 교류가 아닌 예술단체 사이의 소규모 일상 교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와 함께 남북 공연예술 교류는 통일 이후 남과 북의 ‘문화적 통일’에 대한 충실한 준비자로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서독의 사례에서 보듯이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의 방식으로 ‘통일독일’이 되었음에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통일 이전 단계에서부터 충분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일단 많은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상생의 문화’를 만들어나갈 때 ‘통일문화’가 남과 북이 함께 삶의 길을 찾아가는 구원의 문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 내적인 소규모 교류가 가능해지며 통일 이후 문화적 통일의 충실한 준비자로 기능할 수 있다. 여전히 문화적 갈등에 놓인 독일을 볼 때 통일 이전부터 충분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이해와 존중으로 상생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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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문화교류의 기본 목표가 민족문화의 동질성 회복에 있다고하여 우리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문화적 통합’을 기도하는 ‘문화적 흡수통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동질성 회복이 남과 북의 문화적 ‘동일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북 문화의 이질성 극복 과정이 단순히 차이를 없애서 ‘하나’가 되게 하기보다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는 역동적인 ‘통일문화’ 구축의 방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공연예술 교류 사업이 남북 사이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 유력한 수단이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일체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각각의 문화적 특성을 가장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작품들, 북한의 체제 선전 작품이든 남한의 체제 비판적 작품이든 가리지 않고 교류 대상 작품으로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까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 공연예술교류가 성립되고, 바로 그러한 차이의 확인 과정이 선행되었을 때 동질성 회복의 가능성도 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교류의 기본 목표가 '문화적 흡수통합'이 되어서는 안되며,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창조의 원동력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민족문화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는 남과 북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화를 함께 보고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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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교류 장르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음악, 무용, 교예 등이 될 것이고 연극이나 가극의 본격적인 교류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세부적인 레퍼터리를 보면 교향악단이나 기악 연주, 무용 등이 우선적으로 교류될 수 있을 것이고, 노래 분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북한에서는 계몽기가요로 부름)가, 가극에서는 민족가극이 우선적으로 교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예술(음악과 무용, 연극 등) 분야는 지속적으로 교류 대상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집중 추진해야 할 부분은 ‘민족가극’ 분야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에 상응하는 남한의 작품으로는 창극이나 뮤지컬, 오페라 등에서 민족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이면 될 것이다. <춘향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작품을 남한의 예술단이 제작하여 상연해보는 방식이나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해서 남북 예술인이 공동 출연하는 합동공연 같은 것도 기획해 볼 수 있겠다.
주요 교류 장르는 음악, 무용, 교예 등이 될 것이고 연극, 가극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교향악단, 기악 연주 등과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 민족가극이 우선 교류 대상이 될 수 있다. 남한은 창극, 뮤지컬, 오페라 가운데 민족적 소재를 다룬 작품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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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식의 교류 형태를 고려할 수 있는데, 기존의 방식처럼 남북의 예술단이 상대지역을 친선 방문하여 공연하는 식과 해외에서 남북합동공연을 하는 방식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한편으로는 규모를 확대하여 남북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하는 것도 적극 고려해 보아야 하고, 반대로 공동 워크숍이나 상대지역 유학 및 연수 등 남북 예술단 사이의 소규모의 일상 교류 활동도 새로운 형태의 교류 사업으로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상설적인 교류 공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한의 평양교예단이 1년의 일정 기간을 할애하여 남한에서 순회 공연을 하는 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생산된 우수한 공연 ‘상품’을 남한 관객의 높은 ‘구매력’과 연결하면 일종의 경제 교류의 효과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신의주 특구나 개성공단지역, 좀더 나아가서는 경의선 벨트와 동해선 벨트를 통해 상설극장을 지어서 남한 예술단 또는 남북 예술단이 상설 공연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교류 형태로는 기존의 상호 방문식 합동공연을 유지하면서 공연예술축제, 공동 워크숍, 상대지역 유학 및 연수, 상설 교류 공연 등을 추가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남한의 구매력과 북한의 공연 상품이 결합되면 경제 교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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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남북 공연예술 교류는 주로 공연이벤트 기획회사나 방송사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어 왔다. 외형적으로는 민간 교류의 형태이지만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서 진행하는 방식이므로 모든 사업에 정부가 직․간접으로 관계되어 있다. 남북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방식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중계인을 통해 접촉하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거래’ 방식으로서도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 진정한 공연예술의 프로그램 구성도 쉽지 않다. 따라서 ‘남북문화협정’과 같은 남북 문화당국간 협약을 통해 남과 북의 예술인 및 예술단체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연예술 교류사업 주체도 좀더 다양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문화협정'과 같은 남북 문화당국간 협약을 통해 남과 북의 예술인 및 예술단체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이 강구되어야 공연예술 교류사업 주체도 좀더 다양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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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과 북의 정권 수립,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사적 차원의 체제 대결 속에서 이념갈등→전쟁→이념갈등의 강화의 악순환이 이어져 왔다. 1980년대까지 남과 북 사이의 체제경쟁은 오로지 갈등과 대결로만 치달아 악순환을 거듭했고, 전쟁의 상흔을 안은 채 서로의 체제에 대한 적대 의식이 이념화되어 개개인의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었다. 그러한 내면 의식은 어지간한 정신치료 과정으로는 쉽사리 걷어낼 수도 없는 새로운 상처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다른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원천으로 작용해 왔다. 2000년 6월, 말 그대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 형해만 남은 이념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는 지난 1990년대 이미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어 이념 갈등의 배경이 거의 사라졌지만, 한반도에서는 화해와 협력의 걸음은 더디게 나아가고 갈등의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냉전적 분단 의식이 치유되지 않은 채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남과 북 사이의 체제경쟁은 갈등으로 악순환을 거듭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사회에는 이념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는 아직 한반도에서는 화해와 협력의 걸음은 더디고 갈등의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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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문화교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여러 방면에서 남북문화교류․협력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교예단이나 교향악단, 대중가요 가수들의 공연이 교환되고, 남북 문화장관 회담이 있었으며, ‘남북문화교류․협력에 관한 의정서’ 문제도 조심스레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1년 들어서도 남원의 창극 <춘향전>이 평양의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바 있고, 또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가수 김연자의 북한 공연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연극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남북연극 교류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더불어 북한연극에 대한 연구도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다. 연구자들의 자료 접근이 훨씬 용이해졌으며, 또 냉전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형성됨으로써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난 1980년대 말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를 계기로 카프 및 북한 문학에 대한 국문학계의 연구가 활발했던 것에 비하면, 북한연극과 희곡에 대한 저간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주로 정부기관의 요청으로 쓰여진 몇 권의 개설서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개설서들은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던 시대에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발견할 수 있지만, 남북한이 격하게 대립 충돌하고 있던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는 약점에서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남과 북이 교류․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제부터라도 냉전적 사고를 털어 내고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제기된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문화교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남북문화교류․협력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더불어 북한연극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동안 북한연극과 희곡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남과 북이 교류․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냉전적 사고를 털고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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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세계사적으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우리 정부의 ‘햇볕정책’에 의해 남과 북 사이에 화해․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다 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남남갈등’의 심화라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남북 관계는 물론이고 국내적인 문제에까지 북한 체제와 연관 지어 이념의 꼬리를 붙이는 현상은 단지 일부 정파나 언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 내재화된 분단의 뿌리가 무척 깊고 단단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급선무는 통일 이전에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정치적 일정의 선후를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지만, 남과 북 사이에 실질적으로 통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분단의 극복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인 철조망이 철거되고, 남과 북이 지루한 이념 대결을 끝내고 하나의 정치․경제 체제로 통합된다 해도,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상처와 갈등이 치유되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와 평화, 나아가 민족의 발전은 꿈꾸어볼 수 없다.
남과 북 사이에 놓여진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통일 전에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간의 상처와 갈등이 치유 되어야 이후 과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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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화에 있어서 인위적인 동일성 추구는 전형적인 파시즘 문화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수용될 수도, 실현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념적 갈등과 대결의 문화는 사실 자신이 속한 문화를 중심으로 상대 문화를 통합시켜 동일성의 문화를 구축하겠다는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경우 북한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나 대안을 논의하기보다 원초적 적개심을 바탕으로 상대문화의 자투리마저 우리 안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꿈틀대는 것은 신체에 각인된 분단의 상처가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탈이념의 시대에 자꾸 과거를 끄집어내어 국민들의 머릿속에 이념 대결을 환기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된다면, 문화의 통일은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 아니라 문화의 동일화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분단의 상처로 인해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나 적개심을 가질수 있지만, 탈이념의 시대에 이념대결을 국민에게 주입시킨다면 문화통일은 문화 동일화로 귀결되고 이는 파시즘 에서나 실현될법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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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통일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교류이다. 문화 교류란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상대 문화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상호 이해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 만나고 나누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자기안에 상대 문화의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로 문화 교류이다. 문화 교류의 출발은 문화 다양성의 인정에 있다. 문화의 다양성이란 인종이나 언어, 사회계층, 지역에 따라 다르게 형성․발전되어 온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기반 위에 다른 문화가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이러한 교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가 서로의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 거듭 태어나는 상생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통일 이전에 교류가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 교류란 다른 문화가 만나서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교류 과정을 겪어야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 결합하는 상생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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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과 북의 문화를 과연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문화 교류, 국가 간 또는 체제 내의 문화적 다양성과는 다른 특수한 관계에 처해 있는 것이 남과 북의 문화이다. 왜냐하면 민족이나 언어 등에서 보면 원천적 동일성이 존재하고 있지만 정치, 경제, 군사의 차원에서 인위적인 갈등과 대결, 심지어 전쟁과 이산의 상처를 바탕으로 형성된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문화가 통일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원천적 동일성을 회복하든지, 아니면 어느 한쪽의 문화를 파괴하고 다른 한쪽의 문화로 통합하든지 간의 양자택일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는 과연 원천적 동일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부터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원천적 동일성의 기반이 있다 해도 그 위에는 50년 이상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북 문화 사이의 이질성이 켜켜이 쌓여 있어 그것을 원심 분리하듯 걷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동질성의 회복’이란 구두선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느 한쪽을 중심으로 통합한다는 후자의 길은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통일이라 할 수 있으나, 결국 적대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분단과 분열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통일이라 볼 수 없다.
남과 북의 문화는 국가 간 또는 체제 내의 문화적 다양성과는 다른 특수한 관계에 처해 있다. 문화가 통일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원천적 동일성을 회복하든지, 아니면 어느 한쪽의 문화를 파괴하고 다른 한쪽의 문화로 통합하든지 간의 양자택일을 생각할 수 있으나 두 방법 모두 분명한 단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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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적대적 문화 관계 때문에 일반적인 문화적 다양성의 논리에 기대어 남북의 관계를 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황 때문에 문화의 통일이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현실적인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다. 다만 정치, 경제, 군사의 각 영역에서 다양한 차원과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그 성과가 더디게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앞서 나가던 경제교류협력사업마저도 정치적 상황에 발목을 잡혀 주춤거리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문화 교류에서도 몇 가지 상징적인 교류사업이 추진되어 왔지만, 여전히 상호 교류의 원칙조차 마련되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도 경제협력사업의 실리는 받아들이되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자본주의 문화의 ‘독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모기장을 치자는 이른바 ‘모기장론’을 기반으로 문화 분야의 빗장을 풀지 않고 있다. ‘모기장론’은 북한의 경제 개방이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문화적 다양성의 논리로 남북관계를 논할 수는 없다. 물론 문화 교류에서도 몇 가지 상징적인 교류사업이 추진되었지만, 여전히 상호 교류의 원칙조차 마련되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모기장론’을 바탕으로 문화 분야의 빗장을 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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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서도 틈틈이 김연자에서 이미자, 조용필, 윤도현에 이르는 남한 대중가요의 소개를 북한의 지도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남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교류는 당국자 간의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과 북 사이에 다양한 교류 채널이 형성되는 순간, 즉 그것이 경제협력사업이든 군사 교류이든 그 어느 공간에서든 접촉면이 형성되는 곳에서는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다. 분단의 문화를 극복하고 통일의 문화를 형성하자는 당위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과 경로에 대해서는 수많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통일이라고 하는 멀리 있는 당위를 얘기하기 전에 상호 간의 차이의 인정에서 출발하는 상생과 공존의 문화 인식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한 기본 방향을 바탕으로 다양한 채널을 통한 남과 북 사이의 접촉면의 확대를 꾀하고, 그러한 접촉과 교류의 과정이 쌓여 비로소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통일문화론의 핵심은 상생과 공존의 문화 논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 교류는 어느 분야, 어느 공간에서든 접촉면이 형성되면 이루어진다. 통일의 문화 형성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방법과 경로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상생과 공존의 문화 인식을 먼저 형성한 후 접촉면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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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분단 이전까지는 남과 북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문화적으로도 공통의 기반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세기 말까지의 전통문화는 현재의 남과 북 어느 쪽에서나 공유하고 있는 ‘민족문화유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남과 북의 인식과 수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남한에서는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 원형을 보존하는데 주력해 온 반면, 북한에서는 봉건시대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의 입장을 견지하여 원형 보존보다는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남한에서는 판소리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성과를 보였다면, 북한에서는 민족악기 개량사업을 통해 전통악기를 현대화하는 데 큰 성과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남과 북의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인식과 수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남한은 그 원형을 보존하는데 주력해 온 반면, 북한은 원형 보존보다는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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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차이를 향하여 달려온 분단 체제의 남북 문화는 이제 그 다른 것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제3의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길목에 서 있다. 통일문화란 21세기 우리 민족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문화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려온 남과 북의 문화가 그 이질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공존의 미학을 발견하는 일이 문화 분야의 통일, 통일문화의 실체일 것이다. 통일문화 형성의 가능성은 남과 북이 지난 5,000년 역사를 통해 문화적공통분모와 혈연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점,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이념 대립의 냉전시대가 종식되는 등 시대적 분위기가 분단구조를 약화하는 쪽으로 이행하고 있는 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 민족 내면에 형성된 원초적 적대 감정, 남과 북의 격차심화 등은 통일문화 형성에 작지 않은 장애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 문화는 대화를 통해 통일문화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북의 이질화 속도를 조절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일문화는 형성될 가능성이 있으나 장애 요인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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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분야에서 교류협력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체육 분야이다. 이념적 충돌이 가장 적고 대중적 반향이 크기 때문에 남북 당국은 체육 분야의 교류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여 왔다. 2000년 이후 성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 분야도 바로 체육 분야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막식의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668명의 대규모 선수단 및 응원단 파견,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524명의 선수단 및 응원단 파견, 2003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및 통일축구대회에 800여 명 참여, 제주민족평화축전에 북한 선수단 190명 참여 등 국내외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많이 축적되었다. 2006년 현재 2008년 북경올림픽 단일팀 문제가 의제로 제기되어 있다.
문화분야의 교류협력역사 에서는 이념적인 충돌이 가장 적고, 대중적 반향이 커서 일찍부터 체육분야 교류에 관심을 보여왔다. 2006년 현재 2008년 북경올림픽 단일팀 문제를 의제로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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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분야는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금강산 관광의 상징성이 말해주듯 남북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 왕래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 논의 중인 개성 관광, 평양 관광, 백두산 관광 외에도, 내금강 지역, 칠보산 지역 등의 주요 명승지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경의선․동해선 개통과 함께 본격적인 육로 관광 시대를 내다볼 수도 있다. 남북 관광교류협력사업은 남과 북 양측의 이해관계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가치와 함께 문화 교류의 효과 또한 매우 큰 분야이다. 문화산업 역시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디지털 애니메이션 분야를 비롯하여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남한의 ‘한류’가 보여준 성과를 북한과 나누어 가진다는 이점이 있다. 북한의 관심도 매우 높아 앞으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관광분야는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추진돼 상호왕래에 크게 기여했다. 문화산업 역시 디지털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남한의 ‘한류’가 보여준 성과를 북한과 나누어 가진다는 데 의미가 있어 앞으로 가능성이 높은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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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바뀌었을지언정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남과 북이 군사적 대결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우리 사회의 법 체계로 보아도 북한 연구가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한 형편이다. 1980년대 말의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한 정보 및 자료가 극히 제한적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원초적 장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한 객관적 정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정한 방법론을 정립하여 접근하기란 더욱 어려운 과제가 아닌가 한다. 북한연극 및 희곡에 대한 연구 성과의 축적이 미약한 현 시점에서는 북한희곡에 대한 논의도 여전히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접근에서 출발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연구는 1990년대 북한 희곡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개관하는 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자 한다.
여전히 남북이 군사적 대결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법적으로도 북한 연구가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북한 연극 및 희곡에 대한 정보 및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연극 및 희곡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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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프라, 특히 방송 등 언론 분야의 교류사업은 그동안 남북문화교류를 도맡아오다시피 한 분야이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예술 교류 공연 등은 대부분 방송사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다만 전면적인 형태의 방송 개방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멀리 내다보아 준비 과정으로서 방송사 간의 교류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 분야는 그 보존과 활용 면에서 상호 공통의 기반이 강한 영역이므로 이 분야의 교류사업도 매우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개성공업지구 개발 관련 문화지표 조사,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등에서 이미 남북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이 있었고, 특히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관련해서도 협력이 이루어진 바 있다. 또한 문화재보존사업이 이루어지면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분야에 서 남북협력사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다.
문화 인프라 교류사업은 그동안 남북문화교류를 도맡아왔지만, 전면적 방송 개방은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므로 방송사 간의 교류를 지속해야 한다. 문화유산 분야는 상호 공통의 기반이 강한 영역이므로 사업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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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분야의 교류사업은 그 상징성이 가장 큰 분야로서 그 동안 남북문화교류에서 큰 역할을 해왔지만, 실질적 교류는 가장 더딘분야이다. 북한에서도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모기장론’을 펴는 것도 커다란 장애 요인 중 하나이다. 2005년 민족작가 대회와 같은 예술계 내부의 작은 교류사업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문화 교류의 영역별로 그 규모나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 또한 여태까지 남북 관계의 중심적인 영역은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화 분야의 교류협력 사업은 차분하게 더 먼 미래를 준비하면서 실질적인 교류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남북문화교류에서 실질적인 교류가 더딘 분야가 문화 예술 분야인데, 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예술계 내부의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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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대결 단계에서 문화교류의 역할은 주로 단발적인 형태의 행사를 통해 상호 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긴장 관계를 완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주요 예술공연, 전시회 등의 행사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부분의 역할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현 단계는 화해․협력의 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단순한 이벤트성 행사를 넘어 상호 이해 심화를 위한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강화되어야 하는 단계이다. 특히 상대 문화의 접촉을 통해 상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정서적 이해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념 대결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며, 각 분야별 접촉에 의한 성과의 공유 및 상대 문화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교류는 적대적 대결 단계에서 단발적 적대감 해소의 역할을 해 왔으나, 현재는 이벤트성 행사를 넘어 상호 이해를 위한 실질적 교류협력이 강화되어야 하는 단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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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북연합 단계에서는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활동 지원체계가 구축되어야 하며, 필요시 남한의 문화정책의 한 영역으로 북한지역에 대한 정책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각종 문화 관련 기구나 기관의 정비, 운영체계의 표준화 등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며, 남한지역과 북한 지역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격차의 해소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단계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화해․협력의 단계를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통일 이후 사회통합을 원활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산술적인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남과 북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상호 간의 교류와 협력의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의 바탕 위에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통일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남북연합 단계에서는 국가 차원의 문화활동 지원체계 구축, 남한의 북한지역에 대한 문화정책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화해, 협력 단계를 충분히 유지하는 것이 원활한 통일 문화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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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문화에서 통일문화로 나아가는 길은 여러 경로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문화 분야로 제한해서 본다면 일단 남북 사이의 문화 교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교류의 대원칙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대화’이다. 남북문화교류는 이벤트성 교류와 실질 교류의 2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의 남북문화교류는 주로 이벤트성 교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는데, 50년 이상 지속된 분단 상황에서 형성된 적대감의 해소와 화해 분위기의 조성에 기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전후하여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북한 예술단들의 방문 공연이 대표적인 예이다.이러한 교류행사들은 적대적 대결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통일문화로 나아가는 문화 해법은 서로 다름 사이의 대화라는 대원칙하의 남북간의 문화 교류에서 시작된다. 남북문화교류는 이벤트성 교류와 실질 교류의 2단계로 나뉘는데 그동안은 이벤트성 교류가 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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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남북 교류 공연이라 할 수 있는 1985년 남북예술단 동시 교환 공연(1985.9.20~23)을 필두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전후 수많은 교류행사들이 거행되었다. 1985년의 교환 공연에서는 서로 동질성을 확인하고자 노력한 행사였으며 프로그램 구성에서도 전통연희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차이만 확인한 채 지속성을 갖지 못했고 사후 평가에 있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운 채 상대 프로그램에 대한 비방으로 일관한 한계를 노출했다. 이후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의 기조 아래 수많은 정치적 노력이 있었고, 그러한 흐름을 타고 1990~1992년 서울, 평양, 일본, 사할린 등지에서 음악회나 전시회 등의 문화예술행사를 갖게 되어 남과 북 사이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크게 완화시켰다.
1985년 남북예술단 동시 교환공연은 결과적으로 차이만 확인하고지속성 없이 불신과 비방으로 일관한 한계가 있었지만 92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전후 수많은 교류행사들은 적대적인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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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대형 이벤트 중심으로 남북 교류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이나 올림픽 공동입장, 부산아시안게임이나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단 남북정상회담이라고 하는 대형 이벤트가 펼쳐진 뒤였기 때문에 그만큼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문화행사를 만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이벤트성 행사는 회를 거듭할수록 그 효과가 반감되었고, 더 큰 규모나 눈에 띄는 어떤 것을 보여 주지 못하면 성공하기가 어려워졌다. 앞으로 예상되는 이벤트로는 북핵문제 완전 해결, 평양․백두산관광의 전면화, 신의주지구의 개발, 경의선․동해선 개통, 「평화협정」 체결, 북미․북일 수교 정상화 등 정치 일정과 경제협력사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 단계에 있어 이벤트성 행사는 문화 분야의 교류 사업으로서 효과적 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대형 이벤트를 벌여 왔지만 그것이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이벤트도 정치 일정과 경제협력사업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벤트성 행사는 문화 교류사업으로 효과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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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현 단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문화 교류 정착을 통해 상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정서적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다. 대형 이벤트가 주는 분위기 형성의 역할은 정치 일정이나 경제협력사업, 군사협력 등에 맡겨두고, 문화 분야에서는 오로지 남북한 주민 사이의 실질적 상호 이해의 기반을 넓혀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에서 지속적으로 개최된 대중가요 공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1․2002년 김연자 평양 공연, 2002년 이미자․윤도현 밴드 평양 공연, 2005년 조용필 평양 공연 등은 자본주의 상업문화의 상징격인 대중가요 공연을 평양에서 개최함으로써, 전면적 문화 수용은 아니라 하더라도 북한 당국이 남한의 문화를 정면으로 수용하는 포즈를 취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체제 특성을 고려할 때 상당한 실질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도지원사업이나 경제협력사업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남북 격차의 현실을 수용하는 과정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금강산관광지구나 개성공업지구처럼 북한 주민과 격리된 특정 공간에서의 사업조차 북한 주민과의 접촉이 일상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머지않아 전개될지도 모르는 ‘전면 개방’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즉, 문화 분야의 ‘실질 교류’란 보다 일상적인 교류 프로그램, 그리고 북한 주민이 남한의 문화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전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문화 교류 정착을 통해 상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정서적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상업문화의 상징격인 대중가요 공연을 평양에서 개최함으로써, 북한 당국이 남한의 문화를 정면으로 수용하는 포즈를 취한 셈이다. 문화 분야의 ‘실질 교류’란 보다 일상적인 교류 프로그램, 그리고 북한 주민이 남한의 문화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전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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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측면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사례는 2005년 <아리랑> 공연을 계기로 한 평양 관광이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고 평양 시내 유적지 등을 관람하는 관광 코스가 개발되어 8,000여 명의 남한 주민들이 단기간에 대거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남한 주민의 북한문화의 접촉 면적의 확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체제 선전물에 대한 관람 여부로 논란이 있었던 <아리랑> 공연, 북한 체제의 선전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만경대․개선문․주체사상탑․국제친선전람관(묘향산), 민족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동명왕릉․보현사(묘향산), 북한의 현대예술을 보여줄 수 있는 만수대창작사 등의 방문은 열악한 교통수단으로 인해 대부분 도보로 움직이는 평양시민의 일상생활과 함께 북한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단번에 ‘실상’ 그대로 노출한 셈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축적이야말로 남북한 주민 사이의 상호 이해를 넓혀나가는 실질 교류의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평양 관광, 백두산 관광 등 북한 주요 지역의 ‘관광 개방’은 실질적 문화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2005년 <아리랑> 공연을 계기로 8천여 명의 남한 주민들이 단기간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문화와 접촉하게 됐는데, 이러한 과정의 축적이 남북한 주민 사이의 상호 이해를 넓혀나가는 적절한 교류의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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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문가 집단 사이의 학술 교류 등은 당장에 대중적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문화의 형성에 직접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국어 분야의 학술회의가 지속되고 있고, 최근 추진되고 있는『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나 2005년 평양, 백두산 등에서 개최된 민족작가대회 등은 하나의 이벤트이기보다는 남과 북의 예술인 사이의 실질 교류로서의 의미가 더 큰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활동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지만, 앞으로 공동학술대회, 워크숍, 상호 연수 등 보다 실질적으로 남과 북의 예술인과 문화 분야 전문가들이 접촉하여 문화예술계 내부의 문제를 가지고 상호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학술 교류 등은 당장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지만 통일문화의 형성에 직접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앞으로 실질적으로 남과 북의 예술인과 문화 분야 전문가들의 접촉 기회가 더 많이 형성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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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외적 변화가 거의 없이 전개되어 온 북한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1990년대 북한 사회는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보면 북한으로서는 가장 커다란 ‘위기의 시대’였다고 할 수도 있다. 외부적으로 1980년대 말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해체는 북한을 국제적 고립 상태에 처하게 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김일성의 사망과 자연 재해까지 겹쳐지면서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였던 것이 바로 1990년대의 북한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의 경우 동구권의 여러 나라들처럼 ‘개방’과 ‘개혁’ 속에 사회주의적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와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990년대 북한은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해체 및 김일성의 사망과 자연재해를 겪으며 가장 위기의 시대였다. 최악의 경우 사회주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와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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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수많은 노력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과 북은 정치적․군사적 긴장관계 하에 놓여 있으며, 미국의 부시 행정부 역시 긴장 완화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의 핵심에 북핵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역설적으로 핵 문제의 해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핵 문제의 배경에는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가 얽혀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세계사회주의 붕괴 이후 북한의 진로 문제와 그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방식, 그리고 남한의 대응 노력이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새로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비상하려는 중국이나 오랜 경제 침체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일본, 멀리는 러시아나 유럽연합의 입장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변화하는 중동 정세도 북핵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6자회담의 성사로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열렸음에도 그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여러 이해관계 당사자들 간의 조정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자회담의 결정이 어떤 형태로든 일괄타결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러한 역학 관계의 구조가 주는 역설이라 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아직까지 남과 북은 정치적․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여 있으며, 미국 역시 긴장 완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6자회담의 성사로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열렸으나 그 성과가 없는 것은 그만큼 여러 이해관계 당사자들 간의 조정이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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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자회담의 방향 혹은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야한다. 즉, 북한에서 완벽하게 핵을 제거하여 한반도를 핵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며, 궁극적으로 남북이 긴장관계를 해소하여 협력의 수준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6자회담이 실패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경우에 예상되는 한반도 정세는 매우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북한 경제의 연착륙 실패로 인해 북한 내부의 ‘긴급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며,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지난 10년간처럼 문제 해결 없이 긴장만 고조시킨 채 지루한 외교 전쟁만 펼쳐질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다양한 선택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남과 북이 선택해야 하는 최선의 길은 단 하나일 뿐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생존과 번영의 문제일 것이고, 남한의 입장에서는 평화의 정착과 통일, 그리고 공동번영의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6자회담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대북 경제 제재→경제협력사업 중단→북한 봉쇄→군사 행동으로 이어지는 강경 시나리오는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남한의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조그마한가능성만 있다면 제2, 제3의 평화노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한의 처지이다. 물론 북한에서 ‘긴급사태’가 발생하거나 북한 지도부가 군사 행동으로 나오는 경우에 군사 대응은 피할 수 없을 것이나, 그러한 상황 자체를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곧 남한의 승리라 평가될 수 있다.
6자회담의 방향은 북한에서 완벽하게 핵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고, 6자회담이 실패할 경우 한반도 정세에 긴급사태가 발생해 이에 대응해야 할 경우의 수도 생기겠지만 이러한 상황 자체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남한의 승리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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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져 50년 이상 두 개의 체제 문화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남과 북이 각자의 문화를 버리고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 남과 북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 제3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구체적인 상은 통일문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남과 북의 문화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아름다운 통일문화의 꽃밭을 가꾸는 일은 향후 모든 과정에서 어떻게 씨를 뿌리고 가꾸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남북 관계가 가장 긍정적인 경로를 거쳐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강한믿음 속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통일문화의 씨앗도 새싹을 틔울 것이다.
통일문화는 남북이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두 문화의 가능성으로 제3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남북관계가 잘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꽃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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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각 생산 현장이나 생활 현장에 여러 형태의 예술소조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중문화사업’이라 하여 일반 대중의 문화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학교, 기업소, 협동농장, 군대 등에 아마추어 공연 예술집단이 광범하게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의 활성화는 북한연극 및 공연예술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현실 과제에 대한 선전선동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항들은 우리 경우와 비교하여 장단점을 가릴 수 있는 것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체제가 다르고, 또 예술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나 기능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나오는 ‘차이’이므로, 우리의 시각으로 북한의 연극을 평가한다든지 아니면 남과 북의 연극을 서로 직접 비교하여 서술하는 데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과 북이 근원적으로 사회체제가 다르다는 점을 대전제로 하여 북한의 연극에 대해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북한연극에 대한 본격적 평가의 시각을 일단 유보하고, 북한 연극의 공연방식 및 미학에 대한 북한의 관점을 정리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자 한다. 물론 그러한 관점을 유지한다 해도 순수 객관적인 북한식 관점만으로 서술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남한 연극문화의 자장권 속에 위치하는 한, 끊임없이 남한 연극계의 코드 속에서 형성된 연극관이 서술과정에 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관점의 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북한연극의 공연방식이 어떠한지, 그리고 북한연극의 주된 특성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해 보고자 한다. ‘차이’의 인정이야말로 ‘동질성’을 향해 가는 진정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의 활성화는 북한연극 및 공연예술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현실 과제에 대한 선전선동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점을 우리와 비교하여 장단점을 가릴 수는 없다. 남과 북이 근원적으로 사회체제가 다른 점을 대전제로 하여 북한의 연극에 대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에 평가전에 북한 연극의 공연방식 및 미학에 대한 북한의 관점을 정리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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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적으로 보건대 북한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일성의 사망은 역으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른바 ‘유훈통치’가 김정일 체제 구축의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권력 승계와 김정일 체제의 구축 과정에 연극을 비롯한 문학예술의 역할이 작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학예술사적으로 보아 북한의 1990년대는 1960년대 말 이래 추진되어온 김정일 주도의 ‘문예혁명’(‘영화혁명’, ‘가극혁명’, ‘연극혁명’등)이 완수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90년대 초반의 ‘제2차 문예혁명’이 수십 년에 걸친 ‘문예혁명’의 대단원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는 문예혁명이 완수되는 시기로, 문학예술은 유훈통치를 통한 권력승계와 김정일체제의 구축과정에서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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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문예부문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준 바 있는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단계로 들어가면서, 문예부문에 대해 갈무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제2차 문예혁명’이다. ‘제2차 문예혁명’의 명목은 북한 문예인들의 무사안일과 나태에 대한 비판으로 되어있다. 문학예술혁명은 문학예술의 모든 부문이 주체사상의 요구에 맞게 완전히 개조될 때까지 중단 없이 수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한 문예인 대다수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어 대중들로부터 유리된다는 것이 문예혁명을 추진한 주된 근거이다. 김정일은 이에 대해 일부 창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문학예술혁명이 이미 1970년대가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일부 창작가들은 지난 시기에 쓰던 창작방법과 창작태도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면서 우리시대 주인공들이 지니고 있는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진실하게 그리지 못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단계로 들어가면서, 문예부문에 대해 갈무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제2차 문예혁명’이다. 모든 부문이 주체사상의 요구에 맞게 완전히 개조될 때까지 중단 없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