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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국제적인 상황과 정보에 능통한 영화 인력을 양산하는 곳이다. 때문에 이들은 국내의 제작 여건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이동한다. 그 곳은 할리우드도 가능하고 중국도 가능하다. 위에서 언급한 할리우드에서의 중국계 감독들의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이 역사적 문화적 조건상, 어느 지역의 다른 상황에도 적응하는 순발력과 인내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홍콩의 영화 산업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해외시장이기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각 지역의 전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 될 것으로 판단된다.그리고 세 번째, 아직 영상 산업이 제대로 육성되지도, 그리고 그 규모가 크지도 않지만 중국 본토가 남아있다. 할리우드의 영화를 미국 문화의 침투로 규정하면서 자국 문화와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지닌 행정부를 중심으로, 중국 내에 영화 산업적 기반을 확립하고 국내외 시장을 넓혀 나가겠다는 중국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여러 가지 현황들이 이 연구의 주제였으므로 나는 이러한 부분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생략하겠다.
홍콩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여 국제적인 영화 인력을 양산하고 있다. 중국 본토의 경우 자국 문화와 산업 보호에 기반을 두고 시장을 넓히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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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예술 영화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지구상에는 흔히 할리우드에 대한 일종의 대항 개념으로 쓰이며, 비주류 영화의 범주로 묶여지기도 하는, 또 다른 문화 써클이 존재하고 있다. 최초의 노력과 시도는 물론 서구인들(특히 유럽인)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시도의 기획자들은 실험적이며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다양한 지역의 영상 언어를 발굴하고/ 배급하고/ 만드는데 기여하기 위하여, 영화제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영역에 포함될 만한 창작자 및 비평가, 그리고 국제적 예술 영화 시장의 배급자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국제적 네트워크는 80년대 중반 이후, 서구에서 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관심을 아시아 지역으로 돌리며 많은 작가들을 중국 외부로 불러내었다.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이 중국의 제5세대 감독이며, 그 뒤를 잇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의 중국의 젊은 작가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 열리는 부산 국제 영화제는 바로 이러한 영화계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인식한 사람들이 부산이라는 특수한 문화 소비 도시에, 아시아 그리고 영화라는 이름으로 세계 영화계에 이슈가 되고 있는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과 위에서 언급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끌어들임으로써 마침 퇴조하는 양상을 보이는 동경 국제 영화제와 홍콩 영화제를 대신하여 부산을 ‘변화, 발전하는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거점’으로 확인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는 케이스이다.
비상업 영화 관련자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초반에는 서구에서 형성하려 했으나 8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중국은 그 최고 수혜자로 현재의 작가들도 덕을 보고 있다. 최근 부산 국제 영화제 또한 이 네트워크를 겨냥하여 구성 된 것으로, '변화, 발전하는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거점'을 노리고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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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에 포함되는 영화인들 역시 국경을 초월하여 공동 작업의 형태로 영화를 제작한다. 앞에서도 중국의 지하영화를 언급하면서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로 다국적 기금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특정 작가 및 작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주류건 비주류건 세계 영화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고 있으며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화 시장을 확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작업들이 국제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계를 시장으로 규정하는 한, 영화인들 간의 협력 관계에는 국적보다 날로 변화하는 시장 경제의 논리에서 살아남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고 본다. 그 개인은 국가의 배경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 개인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이 한국인인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어떠한 문화 상품(혹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하면, 그것은 한국 영화계에 직간접적인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한국이건 어느 나라이건, 아니면 초국가적 단체이건, 결국 문제는 어떻게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잘 펼칠 수 있도록 그 배경 주체가 불편함을 덜어주고 지원해주는가, 어떻게 현대의 변화하는 국제적 추세에 잘 적응하고 경쟁할 수 있는 개인들을 육성하고 이를 구조화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결국 한국 영화계가 함께 한 가지를 전술로서 채택할 바란 없다.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최근의 현실을 감안하여 이러한 부분에 유념하라는 구체적인 정보와 지형도를 정리하는 것으로 내 글의 임무는 완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모든 지형도 앞에서 어떠한 판단과 선택을 내려야 할지는 모두 영화인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국적 기금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특정 작가와 작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써, 영화인들 역시 국경을 초월하여 공동 작업의 형태로 영화를 제작한다. 이는 세계 영화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며, 자신들의 영화시장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영화인들 간의 협력관계는 국적보다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인다. 결국 개인들의 의지를 펼치기 위한 지원과 변화의 국제적 추세에서 경쟁력있는 개인들을 육성하고 구조화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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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는 한국 영화계를 바라보는 외국 영화계 인사들의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조언을 전하겠다. 이는 한국의 영화 산업계가 비록 현재의 국제적인 편재에서는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고 하여도,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서 여전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고무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이번 홍콩 방문기간에, 나는 많은 홍콩의 영화 관련 인사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평론가이자 전 홍콩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제이콥 웡(Jacob Wong)에게 지금 한국에는 몇몇 스타가 너무 바빠서 자금이 있어도 영화를 들어갈 수 없는 사례도 있다고 최근의 한국 분위기를 전하자, 꼭 예전의 홍콩 같다며 한국의 상황이 부럽다고 하였다. 왕 가위, 푸르트 첸 등 한국을 방문한 감독들과 이야기해 보았고 자신도 최근의 한국 영화들을 보면 대단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슨 잎 역시 최근의 국제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한국 영화가 많이 발전하고 있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영화의 제작에 있어서나 아시아 지역에 시장을 가지고 있는 홍콩과 꼭 잘 협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번 홍콩 방문 기간에 만난 해외 영화계 인사들의 한국 영화에 대한 반응을 통해 한국의 영화 산업이 국제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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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 개봉한 한국의 영화 <쉬리>, <8월의 크리스마스>, <텔미썸딩 >이 할리우드를 제외한 외국영화치고는 흥행 성적이 괜찮았다고 하면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쉬리>의 경우 전체 극장 수입 600만 홍콩 달러인데 비록 한국 영화의 홍콩 내 흥행 수입 전체가 1999년도를 기준으로 해서 홍콩 극장 수입(약 10억 홍콩 달러)의 1%에 못 미치고 있지만 이미 프랑스 영화에 비교하면 아주 높은 수준이라고 MPIA(홍콩 영화업 협회)의 간사, 우디(Woody)가 전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 한 번도 없던 것으로 한국 영화의 힘에 홍콩 영화인들도 놀랐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2000년 5월 15일에서 21일 사이에 열린 [한국 전영 학술 토론회]는 98년도 작품 12편을 상영한 결과 현지 영화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중국인들은 한국 영화가 재미있으면서 중국인의 정서와도 잘 부합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한편 서창술에 의하면 한국이 앞으로의 몇 년 동안 중국 영화계와 좋은 성과들을 공유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즉, 한국 드라마가 선전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중음악이 북경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한국 영화가 중국에서 시장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조금 더 있으면 할리우드 영화에 시장 다 빼앗기고, 중국, 홍콩도 다 가만있지 않을 텐데 왜 한국은 가만있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편 이러한 긍정적 신호와 더불어 그는 지금 중국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 한국 사람들이 허풍이 심하고 서로 단결하지 못하며 약속도 잘 안 지킨다고 욕을 하기도 한다면서 한국 사람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기도 하였다.
1999년 기준 홍콩 내 한국영화의 극장수입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프랑스 영화에 비하면 높은 편이기에 한국영화의 힘에 홍콩 영화인들도 놀랐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한국영화에 대한 현지 영화인들의 평가가 좋은데, 영화가 재미있고 중국인의 정서와도 잘 부합한다며 양국의 영화계가 성과들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긍정적 신호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가 나쁘게 바뀌고 있다는 우려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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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중국의 영화 산업 현황과 고려하여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 중의 하나로 작년과는 상황이 또 달라져서, 최근에는 중국 영화계가 현물 투자가 아닌 직접 투자의 방식으로 해외 시장을 겨냥하는 합작 영화의 제작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겠다. 영화 제편창이나 제작사의 관계자들이 모두가 한국 영화의 시장 규모를 알고자 노력했으며 내가 한마디 질문을 던지면 자기도 꼭 나에게 한국의 실정을 되묻는 등 이전보다 이들이 한국의 영화 시장이나 산업계 전반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제편창이 개별 사정에 따라 재정 상황이 조금씩 바뀐 것과 함께 중국 내부에서도 자본주의식 시장경제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최근 한국 영화계가 중국에서 제작을 하면서 보인 자본적 역량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에는 중국 영화계가 직접 투자의 방식으로 한국과의 합작 영화 제작을 고려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중국 내부에서도 시장경제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배경 아래 한국영화계가 보인 자본적 역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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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에 걸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결과 현재 일본 영화는 18세 미만 관람불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화가 개방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본영화가 개방되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일본 영화가 개방되어 한국 영화 시장에 끼칠 영향에 대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시장 경제적으로 볼 때 일본 영화의 유입으로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하락할 것이라는 점과 정서적으로 일본영화가 지닌 식민지성, 폭력성, 선정성 등의 악영향이 가장 크게 우려되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가시화되면서 이와 같은 우려가 기우였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8년 나온「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경제적 효과 분석」은 일본영화 개방으로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2-3% 떨어지고, 이로 인해 40-100억 정도의 수입 감소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수입 감소분은 일본영화시장에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0.5%만 돼도 보전할 수 있는 액수라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영화가 개봉되면서 일본영화 개방의 우려 정도는 더욱 약화되었다. 2000년 11월 현재까지 한국에서 개봉된 일본 영화는 모두 25편 정도이다. 물론 수입 추천 받은 일본 영화중에는 그 폭력성과 선정성 때문에 수입 불가 판정을 받았거나, 상영 불가 조치를 받은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일본 영화의 선정성이나 폭력성을 우려하기 전에 일본영화의 한국 시장 내의 파급효과 자체가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한국 시장에 공개된 <HANA-BI>, <가게무샤>는 각각 7만, 9만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으며, 이어 세계 영화제의 수상경력과 함께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일본영화로 소개된 <우나기>와 <나라야마부시코>도 각각 5만, 4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물론 1999년 말 개봉되어 약 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철도원>, <춤추는 대수사선> 등의 영화가 흥행에 호조를 보이며 일본영화 관객몰이에 나섰지만 한국에서 일본영화의 붐을 조성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3차에 걸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결과 현재 일본 영화는 거의 모두 개방되어 있다. 일본영화가 개방되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일본 영화가 한국 영화 시장에 끼칠 영향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가시화되면서 이와 같은 우려가 기우였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8년 나온「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경제적 효과 분석」에 따르면 일본영화 개방으로 인한 수입 감소분은 매우 작았다. 물론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문제되긴 했지만 어쨌든 한국 시장 내의 파급효과 자체는 적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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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일본영화의 예상 밖 저조한 흥행실적과 2000년 일본에서의 한국영화 <쉬리>의 성공 소식은 일본영화 개방의 화제를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의 일본영화 시장 진출문제로 옮겨 놓았다. 이와 같은 현상을 부추기듯 최근에는 일본영화 개방정책이 일본 시장 접근에 유리하다는 긍정적인 분석의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6월7일 문화부 산하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발표한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의 심사분석」에 따르면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모든 영화와 비디오를 전면 개방했을 때, 영화는 국내시장이 2% 잠식되는 대신 시장 확대 효과는 2-3%, 비디오는 시장잠식 4-5%에 시장 확대 효과 3-6%로 일본대중 문화의 개방이 전반적으로 한국 문화산업 영역에 끼치는 부정적인 효과가 우려할 만큼 큰 것은 아니라고 추정되며 오히려 한국시장보다 6-10배 큰 일본시장에의 접근이 쉬워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특히 <쉬리>성공 이후 일본 내 한국영화 마니아층이 형성될 만큼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 내 인지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다양한 한국영화가 꾸준히 수출되고 있어 이와 같은 일본대중 문화 개방정책의 긍정적인 효과가 가시화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효과는 수치로도 확인되는데 <쉬리>가 한국영화 대일 수출 사상 최고의 판권가인 130만 달러에 수출된 이후 <섬>이 10만 달러, <단적비연수>가 70만 달러, <텔미썸딩>이 50만 달러, <비천무>가 50만 달러에 수출되는 등 2000년에만 250만 달러 이상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근 일본에 200만 불에 판매된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더하면 2000년 한국영화 대 일본 수출액은 450만 불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99년 대일 수출 총액이 150만 달러였음을 생각할 때 그 액수가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한국영화 <쉬리>의 성공으로 일본영화 개방정책이 한국시장보다 6-10배 큰 일본 시장 접근에 유리하다는 분석의 연구들이 나왔다. <쉬리>가 한국영화 대일 수출 사상 최고의 판권가인 130만 달러에 수출된 이후 2000년에만 250만 달러 이상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최근 200만 불에 판매된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더하면 2000년 한국영화 대 일본 수출액은 450만 불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99년 대일 수출 총액에 비해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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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시장에 대한 한국영화의 대거 진출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쉬리>에 이어 개봉된 <텔미썸딩> 등이 예상외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11월 일본에서 개봉된 <텔미썸딩>의 경우 150만 불의 막대한 선전비를 사용하고도 상영 3주 동안 7천만 엔 정도의 흥행기록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시네콰논의 이봉우 대표에 의하면 <쉬리>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시네콰논 측에 한국영화의 개봉소식을 묻는 한국영화 팬들의 수가 확실히 많아졌으며, 한국영화와 배우에 관한 인터넷사이트를 찾는 일본인의 수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 밖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잡지인 《키네마 순보》는 2000년 10월 하순호에서「CINE KOREA<한국영화>2001:한국영화계는 지금」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영화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며, 키네마 순보 주최로 "코리안 시네 클럽 Korean Cine Club"이라는 한국영화 팬클럽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실제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연결되는지가 문제이다.
<쉬리>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지만, 일본 시장에 대한 한국영화의 대거 진출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실제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연결되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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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시네콰논 주최로 열린 “네오코리아 영화제”는 진일보한 한국영화의 면면을 소개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에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소극적인 방법 이상의 전략이 요구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CJ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시작된 일본 영화 직배이다. 한국 배급사로는 처음 일본에 영화직배를 시작하는 CJ엔터테인먼트는 일본영화사 시네콰논과 비디오 배급사인 어뮤즈 등과 함께 1천만 달러 규모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드림웍스 제작 작품들과 직접 투자 지원한 한국영화들을 일본에 직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한일교류는 배급에만 머물지 않는다. NHK에서 1천5백만 엔의 지원금을 받아 만든 <박하사탕>을 비롯해, 최근 쇼치쿠로부터 일본현지 촬영시의 제작비를 지원 받고 일본 내 배급권을 일본 측이 갖는 조건으로 한일공동 제작된 <순애보> 등 양국 간의 공동제작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관객과 일본영화시장이 원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제2의 <쉬리>가 또 다시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이에 본 연구는 일본영화 개방시대를 맞이하여 한․일 양국의 영화산업 교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일본영화산업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속적인 양국의 교류를 위해 일본영화 시장이 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영화 시장이 한국영화와 한국영화 시장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소극적인 방법 이상의 전략이 요구된다. 일단 CJ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한 일본 영화 직배와 <박하사탕>, <순애보>등의 한일 공동제작이 진행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일 양국의 영화산업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현재 일본영화산업이 처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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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우리의 대응책을 모색해보자. 먼저 국내 영화산업의 현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1996년 405편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던 외화 수입은 IMF 구제금융 한파가 몰아닥친 1998년 271편으로 크게 줄었다가 1999년엔 297편(상영 233편)으로 늘어나 회복 기미를 보였다. 2000년의 외화 상영편수는 240여 편으로 1년 전과 비슷한 수치를 보일 것 같다. 1999년에 1편 이상의 영화가 수입된 나라 수는 22개, 이 중에서 미국영화가 200편(직배영화 77편)으로 67.3%의 비율을 보였고, 중국(홍콩 포함) 30편, 영국 13편, 프랑스 12편 등 10편 이상 수입된 4개국이 수입영화의 86%를 점하는 편중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1998년 논란 속에 개방된 일본영화는 2000년에는 25편이 상영되었고, 매년 20~30편이 꾸준하게 상영될 것으로 보인다. 1998년 40편대로 떨어진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1999년에도 50편을 밑돌았지만 2000년에는 57편으로 늘어났다. 2000년의 한국영화 수출실적은 7백만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사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지만 편수, 편당 가격, 수출액, 수출지역 다변화,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 등을 종합하면 수출실적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과거에는 무시되던 다양한 판로(창구)를 대상으로 한 특정분야 판권 판매와 단편영화의 수출이 활발한 것도 새로운 특징이다.
국내 영화산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1996년 역대 최고를 기록했던 외화 수입은 IMF 이후 크게 줄었다가 99년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다.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에 수입영화 편중 현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일본영화는 매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1998년 40편대로 떨어진 한국영화 제작편수도 회복세이며, 2000년 들어 한국영화 수출실적은 개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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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간의 일본영화 배급수입 베스트5와 키네마 순보가 뽑은 일본영화 베스트 5를 비교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도라에몽>, <포켓몬스터>, <남자는 괴로워> 그리고 <고지라>처럼 고정된 인기를 기반으로 매년 계속해서 제작되는 시리즈물이다. <귀를 기울이면>과 <원령공주>는 시리즈물은 아니지만 두 편 모두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으로 같은 스텝들이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리즈물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작품도 첫 번째 부류로 분류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영화들은 고정적인 팬을 확보하고 있어 흥행에 있어 아주 안정성이 있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실락원>, <철도원>, <THE END OF EVANGELION>, <춤추는 대수사선>, <김전일 소년사건부>, 그리고 <링>처럼 인기 있는 소설, 만화 또는 TV 드라마를 원작으로 원작의 인기를 영화로 이어간 경우이다. 이와 같은 다른 매체와의 관련은 작품의 소재 제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영화제작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현재 일본영화 산업의 한 축을 이룬다. 세 번째 특징은 제작비 3억 엔을 넘는 작품들의 출현이다. 제작비 23억 엔의 <원령공주>를 비롯해, 4억5천 엔의 <Shall we dance?>, 6억 엔의 <철도원>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와 같은 대작 영화의 제작 붐은 두 번째 특징인 다양한 매체들의 영화 진출과 짝을 이루어 현대 일본 영화의 한 부류를 이루어 가고 있다.
최근 5년간의 일본영화의 특징은 첫째로 고정된 인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물, 둘째로 인기있는 소설, 만화, TV 드라마 원작의 영화, 셋째로 제작비 3억 엔을 이상의 대작의 출현이 있다. 이와 같은 대작 영화의 제작 붐은 다양한 매체의 영화 진출과 짝을 이뤄 현대 일본 영화의 한 부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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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특징은 배급수익 상위 순위의 영화들과 《키네마 순보》 상위 순위들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센토 다케노리는 오히려 이와 같은 갭이 일본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예술 지향적인 영화는 해외 시장을 겨냥해서 만들고, 대중적인 상업 영화는 국내 시장을 겨냥해 제작함으로 해서 관객의 다양한 작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영화들이 일본 영화의 해외 시장을 넓히는 역할을 했으며, 이는 일본 독립 영화들의 꾸준한 제작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과 상대적으로<Shall we dance?>나 <철도원>처럼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영화들은 일반적인 독립영화들이 단관 개봉에서 성공한 후 확대개봉을 한 것과 달리 처음부터 메이저 계 극장에서 개봉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단관 개봉으로 1억6천만 엔 이상의 배급수익을 낸 <오후의 유언장>이나 <러브레터> 등도 이와 같은 메이저 계의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할 때 이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화들의 메이저 배급망 진출은 시네마 콤플렉스(복합영화관)의 등장으로, 변화하고 있는 일본 영화 흥행 형태의 변화와도 관련을 맺는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실락원>, <Shall we dance?>, <철도원> 등의 영화가 중, 노년층의 관객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잠재적인 관객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본 영화가 어떤 제작, 흥행, 배급의 전략을 써야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영화계 네 번째 특징은 배급수익 상위 순위의 영화와 작품성을 중시하는 '키네마 순보' 상위 순위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Shall we dance?>나 <철도원>처럼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실락원>, <Shall we dance?>, <철도원> 등의 영화가 중·노년층의 관객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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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의 일본영화계 특징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일본 3대 메이저의 하나인 쇼치쿠가 영업부진의 문제로 98년 새로운 사장을 영입하면서 신체제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쇼치쿠는 본사를 매각하고 채산성이 맞지 않는 가마쿠라 시네마월드를 폐쇄하는 등 경영재건을 위한 3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99년 5월, <39 형법 제39조>를 마지막으로 블록 부킹 시스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쇼치쿠의 변화는 이제 일본영화계가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메이저 시스템에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들이 제작에서 멀어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배급과 상영은 여전히 메이저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쇼치쿠의 블럭 부킹 포기는 독립영화들의 배급, 상영 기회의 증가를 의미하며, 앞으로 새로운 일본 영화 판도를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형 영화사인 쇼치쿠의 경영 개선 노력과 블록 부킹 시스템의 종료는 독립영화계에 성장의 기회를 부여하고 향후 일본 영화계의 추이를 암시하는 커다란 변화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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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99년 일본영화계를 수치로 되돌아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99년 연간 영화 관람객은 1억 4476만 2천명으로 98년보다 834만명 감소했는데, 이는 비율로 보면 전년에 비해 5.4% 정도 하락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객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것은 일본영화의 배급수입이 98년보다 0.1%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97년의 <원령공주>나 98년의 <춤추는 대수사선>과 같은 흥행적 대 성공작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배급수입이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주목할 만하다. 위와 같이 1999년에 일본영화의 흥행대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영화의 배급수입이 증가한 이유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999년 한 해동안 제작된 일본 영화는 270편이다. 이는 1998년의 249편에 비해 21편이나 증가한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작편수의 증가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본 독립제작영화의 선전이다. 1999년 제작된 270편의 영화 중 메이저가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29편에 불과하다. 총 270편중 성인영화 101편을 뺀 169편 중 140편이 독립프로덕션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극장망의 확대이다. 특히 외국회사들의 적극적인 시네마 콤플렉스 건설은 일본의 흥행기반을 확충 강화시켜 개개 작품의 흥행성적을 올리는데 일조했다. 이와 같은 외국 회사들의 시네마 콤플렉스 건설은 국내 극장들을 자극하여 메이저 회사들이 극장을 재개발하거나 새로운 극장을 오픈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2000년 1월 현재 일본의 스크린 수는 98년보다 228개가 증가한 2,221개가 되었다.
1999년 일본영화의 관람객 감소 및 흥행대작이 없었음에도 일본영화의 배급수입이 증가한 이유는, 독립제작영화의 선전을 비롯한 제작편수의 증가, 외국회사들의 시네마 콤플렉스 건설과 이에 자극 받은 국내 극장들의 재개발 및 새로운 극장 오픈 등 극장망의 확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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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99년 일본영화계는 한마디로 메이저의 하락과 독립제작 영화들의 고군분투한 한 해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일본의 메이저가 제작에서 멀어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블록 부킹의 포기(물론 도호와 도에이는 여전히 블록 부킹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시네마 콤플렉스의 등장 등을 통해 배급과 상영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메이저의 역할 변화가 TV 등 새로운 매체의 영화제작 참여, 독립제작영화의 활성화 등 새로운 일본영화 판도 형성에 기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영화의 새 지도는 95년 이후 일본 영화들의 특징들을 살펴본 앞의 글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럼 나아가 이처럼 1999년을 포함한 최근 5년간의 일본영화계의 특징들을 통해, 실제로 일본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의 시스템 속에서 메이저 영화와 독립제작 영화들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의 메이저는 TV 등 새로운 매체의 영화제작 참여, 독립제작영화의 활성화 등 새로운 판도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일본영화계의 특징들을 통해 일본영화 시스템 속 메이저 영화와 독립제작 영화들의 역할 분담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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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제작형태는 크게 메이저사 제작과 독립영화사 제작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형태 외에도 일본에서는 다양하게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저사와 독립영화 제작사들이 영화를 상업적인 상품으로 생각하고 제작하고 있다면, 이와 달리 영화를 문화상품으로 여겨 영화제작에 참여, 지원하는 제도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 사업으로서의 일본영화제작에 대한 지원은 다시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정부차원의 지원이고, 또 하나는 공영방송 NHK를 통한 간접적인 문화 사업 지원책이다. 문부성 산하의 문화청은 일본우수 영화 제작활동을 장려하고 영화예술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영화의 제작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시나리오 심사를 통해 선정한 장편 10편에 대해 2,500만 엔의 제작 지원금을 지원한다. 통산부가 후원의 형식으로 5천만 엔에서 1억 엔 정도를, 무역진흥위원회가 500만 엔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케이스도 있다. 또한 일본영화진흥기금에서는 영화제작자금에 대한 장기저금리융자제도와 영화 투자의 감면세 조치, 로케 촬영 시 규제의 완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화제작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중앙정부차원의 지원은 아니지만 오구리 고헤이의 <잠자는 남자>의 경우처럼 군마현이라는 지방이 제작비 지원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지방 차원의 영화제작 지원은 최근 기타큐슈, 오사카, 요코하마 등에서 지방 특성에 따른 영화위원회의 설립을 통해 영화를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치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영화 제작사 외에도 문화로서의 제작지원 제도가 있다. 이는 정부 지원과 공영방송을 통한 간접 지원으로 나뉜다. 문화청은 2500만 엔을, 통산부가 약 5천만 엔에서 1억 엔을, 무역진흥위원회가 500만 엔을 지원한다. 또 일본영화진흥기금에서는 제작비 장기 저리융자와 투자 감면세, 로케 촬영 규제 완화 등으로 간접 지원한다. 이외에도 최근 지방에서 영화를 관광사업 일환으로 유치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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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3사가 영화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 되었다. 제작에 참여한다고 해도 대부분 전액출자보다는 부분적인 출자만 하고 있을 뿐이다. 1999년 메이저 3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총 29편이 중 쇼치쿠는 7편을 제작했는데 쇼치쿠의 간판영화인 <에도낚시광일지>를 100% 출자로 제작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분 출자하고 있다. 도호도 10편의 영화 중 늘 제작해오던 괴수영화 <모스라3>와 <고지라 2000>을 100% 출자로 제작했을 뿐, 나머지 8편에는 부분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도에이의 경우도 12편 중 자사 전액 투자 영화는 <나일> 단 한편뿐이었다. 특히 1998년도와 비교해 메이저 3사의 전체 제작편수는 26편에서 29편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자사제작 영화가 1998년의 10편(쇼치쿠 5편, 도호 2편, 도에이 3편)에서 5편으로 현저하게 감소했음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선 메이저 회사들이 위험이 큰 제작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에 참여한다고 하더라고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는 공동출자로 방향을 바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일본영화계의 제작형태는 독립영화제작사가 기획하는 영화를 메이저 3사 이외의 회사들이 공동출자로 제작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메이저 3사가 배급한 일본영화는 총 66편, 이중 메이저 3사가 어떤 형태로든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29편뿐이다. 메이저가 배급한 66편의 영화 중 메이저가 참여한 영화 29편을 제외한 37편의 영화가 독립제작사 프로듀서들의 기획과 메이저 3사 이외의 출자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독립제작사가 배급까지 담당한 영화들을 합하면 1999년 제작된 일본영화 169편중(총 270편중 성인영화 101편을 제외한) 80%가 넘는 140편의 영화가 메이저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저 3사(쇼치쿠, 도호, 도에이)가 영화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 되었다. 이들의 전액 출자한 경우는 1998년에는 10편(쇼치쿠 5편, 도호 2편, 도에이 3편)이었지만 1999년에는 5편으로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들은 위험부담이 큰 제작에는 되도록 공동으로 투자하고 있다. 1999년 제작된 일본영화는 80%가 이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만들어 졌다. 현재 일본은 독립영화제작사가 기획한 영화를 메이저 3사 이외의 회사들이 공동출자하여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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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영화계 활성화에 있어 TV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메이저사들의 제작이 줄어든 이후 일본 영화계에는 단독출자에 의한 제작보다는 공동출자에 의한 제작이 늘어나고 있다. 한 회사가 부담하는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이다. 물론 이와 같은 공동제작의 증가에는 위험분산이라는 목적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포함되어있다. 최근 영화의 부가가치가 크게 변했다. 이제는 극장만으로 돈을 버는 시대가 아니다. 위성방송, TV, 비디오, 나아가 Perfect TV등의 다채널 CS 방송 등 다양하게 영화가 활용된다. 그러므로 이제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각자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영화에 참가하는 회사들이 다양해졌다. 이제 TV방송국이든 비디오 회사든 그들의 필요가 영화를 만드는데 언제나 반영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TV 방송국의 영화 제작 참여는 주목할 만하다. 1999년도는 TV방송국이 활약한 한 해였다. 최근 몇 년간 일본영화 배급수익 상위권 작품들을 제작해온 후지TV와 일본TV를 비롯하여, 99년에는 TBS도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99년, 방송국이 전액출자 또는 부분출자의 형식으로 제작에 참여한 작품은 총 20편이다. 이중 7편을 제외한 13편이 배급수입 베스트 20위에 랭크되었으며, 배급수입 10억 엔 이상의 히트작 6편중 가도카와 출판사가 제작한 <링2/사국>을 제외한 5편이 TV방송국이 제작에 관여한 작품이다. 이와 같은 TV방송국의 영화참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기획된 영화에 제작비만을 출자하는 경우(대체로 제작위원회가 구성되면 위원회에 출자하는 형식)와 인기 있는 TV드라마 영화화에 TV가 기획과 제작출자 모두에 참여하는 경우이다.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는 단독출자보다는 위험 분산과 극장 외의 다양한 매체를 통한 수익 증대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출자에 의한 제작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TV방송국에서 영화의 기획과 제작출자에 참여하는 경우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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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왈로테일>은 1996년 극장 개봉되어 1억엔 정도의 수익을 올린 성공작이다. 처음 이 영화 제작에 대한 생각은 1993년 이와이 슌지가 가와이 프로듀서에게 <스왈로테일>의 영화화를 의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TV에서의 활동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이와이 슌지이긴 하지만 영화에 첫 데뷔하는 감독으로서 5억 엔의 제작비를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가와이 프로듀서는 우선 93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언두>, <피크닉>, <러브레터>를 연이어 제작했다. 5억 엔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와이 감독에게 실적을 쌓게하는 것이 가와이 프로듀서의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프로듀서의 생각대로 이와이 슌지의 전작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전작에 투자했던 후지TV를 <스왈로테일> 제작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5억 엔이라는 거액을 후지TV가 모두 출자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우롱사 2억 엔, 포니캐년 1억 5천만 엔, 일본헤랄드 2천5백만 엔, 에스픽쳐스 2천5백만 엔, 후지TV 5천만 엔을 공동 출자한 “스왈로테일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총 4억5천만 엔의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제작은 <스왈로테일>은 최종적으로 5억 엔을 훨씬 웃도는 수입을 올렸고 이중 제작비를 제외한 1억 엔에 가까운 순수익을 올렸다.
93년 이와이 슌지가 가와이 프로듀서에게 <스왈로테일>의 영화화를 의뢰했다. 5억엔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가와이는 슌지가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실적을 쌓게 했고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후지TV를 포함한 여러 업체로부터 자금 조달에 성공했고 96년 개봉돼 1억엔의 수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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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시리즈의 총 편집편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거나, 특별판을 만들어 극장공개 하는 방식의 TV드라마 영화화는 최근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제작은 이미 1977년 TBS를 선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다시 이와 같은 바람을 일으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영화는 1992년 공개된 <파★테★오>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당시 쇼치쿠의 간판 프로듀서였던 오쿠야마의 기획으로 전체를 3부작으로 구성하여 그중 1,2부는 TV드라마로 후지TV에서 방영하고, 마지막 완결편인 제3부를 극장 공개했다. 이와 같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이 영화는 당시 배급수입 9억 엔의 히트를 기록했었다. <파★테★오> 이후에도 1993년 <고교교사>가 11억 엔의 배급수입을 올리면서 대히트를 기록하는 등 TV드라마는 꾸준히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와 같은 형태의 영화제작을 활성화하는데 기폭제가 된 작품이 1998년 53억 엔의 배급수입을 올린 <춤추는 대수사선>임엔 틀림없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대히트에 힘입어 <GTO>, <샐러리맨 긴타로>, <쇼무니>, <게이조쿠/영화>, <최면>등 많은 드라마들이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드라마의 영화화가 모두 <춤추는 대수사선>과 같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최면>과 <김전일소년사건부2>, <게이조쿠/영화> 정도가 흥행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TV시리즈의 총 편집편을 영화로 만들거나, 특별판을 만들어 극장공개하는 방식인 TV드라마 영화화는 1977년 TBS를 선두로 시작되었고 이는 다시 90년대 9억 엔의 히트를 기록한 <파★테★오>로부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다음 1998년 <춤추는 대수사선>이 이와 같은 형태의 영화제작을 활성화하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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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시장 확보 및 확대에 관한 방법을 살펴보자. 우선 시장을 확대하는 수요창출을 한 뒤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라는 제약조건을 갖고 있는 우리의 경우, 수요창출은 언어권 시장보다는 문화권 시장에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화권이 유사한 아시아시장 특히 일본과 중국(또는 중국어권)을 목표로 한 뒤 공공재라는 경제적 속성 즉 규모의 경제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할리우드 등 서방 미디어기업들에 대한 상대적인 경쟁력을 제고한 뒤, 그 다음 단계로 세계시장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목표 시장 선정에 대해 살펴보자. 과연 수출 가능한 시장이 어디인가, 미래 한국경제의 주력 상품시장은 어디인가를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 일제의 조선 강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 경험은 길고 폭 넓다. 일본에 대한 한국영화 수출액이 2000년도 총 수출액의 79%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경험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진출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실제 사례이다. 중국 또한 가능성이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1998년 11월, 중국은 미국과 WTO가입 상호협정서에 서명하였다. WTO 가입 후 중국은 현재 외국영화를 연간 10편 정도 수입하는 수준에서 20편으로 늘리고, 3년 이내에 다시 50편으로 늘릴 예정이다. 차차 다루겠지만 극장에 대한 외국투자와 외국인 소유가 허가될 예정이라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 한국 미디어상품은 단순한 상품과는 달리 문화상품이기 때문에 미디어 무역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의 거래를 감안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특히 영화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또는 대한민국 원산지에 대한 이미지 개선 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쉬리>의 흥행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영화 속에 회사 ‘로고’가 선명한 ‘삼성그룹’이다”는 평가를 얻었듯이 말이다.
문화권이 유사한 아시아시장(일본과 중국)을 목표로 시장을 확대하여 수요창출을 한 뒤, 규모의 경제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미디어상품은 단순한 상품과는 달리 문화상품이기 때문에 미디어 무역뿐 아니라 다른 상품의 거래를 감안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특히 영화 '쉬리'로 큰 이익을 본 '삼성그룹'처럼 영화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또는 대한민국 원산지에 대한 이미지 개선 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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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TV드라마가 영화로 성공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를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춤추는 대수사선>은 1997년 1월 14일부터 3월 18일에 걸쳐 후지TV에서 같은 제목의 TV드라마로 방영되어 평균시청률 18.3%를 기록했었다. 이는 후지TV의 골든타임에 방영되는 다른 드라마들과 비교해 주목받을 만큼 높은 시청률은 아니었다. 이처럼 드라마로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춤추는 대수사선>이 영화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일본 형사물 영화가 보여주었던 정의감 넘치는 영웅이 아닌 리얼리티가 넘치는 공무원으로서의 경찰관을 내세운 점 등이 업계 내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성공한 데에는 드라마가 형사물에 대한 기존의 영화와 다르게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TV드라마를 영화 인기몰이에 잘 사용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드라마가 이미 끝난 97년 말부터 영화가 공개되기 직전인 98년 1월까지 총 3편의 스페셜 판을 방영하여 평균 시청률 25%를 기록하면서 그 여세를 영화로까지 몰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춤추는 대수사선>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방송 중 계속되는 인터넷 홍보를 통해 팬들의 관심을 확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두터운 열성 팬 층의 확보는 TV드라마 영화의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된다.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한 <게이조쿠/영화>의 성공에서도 이와 같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게이조쿠/영화>는 방송 당시 대단한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를 거듭하면서 착실히 고정 팬을 확보하여 결국 방송 종료 후 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사건 해결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드라마 방송 때부터 사건의 해결과정에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컬트적인 팬들을 확보함으로써 영화 흥행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TV드라마가 영화로 성공하기 위한 전략을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춤추는 대수사선>은 타 드라마에 비해 시청률이 높지 않았지만, 현실감 있는 주인공을 내세우는 등의 새로운 접근 방식 뿐만 아니라 TV드라마를 이용해 인기를 얻거나, 인터넷 홍보로 팬들의 관심을 확보하여 영화화될 수 있었다. <게이조쿠/영화> 또한 대단한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매회마다 고정 팬을 확보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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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실패의 예로 <GTO>, <샐러리맨 긴타로>, <쇼무니>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GTO>는 평균시청률 28.5%로 후지TV드라마 사상 평균 시청률 3위였으며, 최종회의 시청률은 35.7%를 기록했다. 그러나 극장 공개 첫날 마루노우치 도쿄에서 주인공인 인기스타 소리마치와 후지와라 노리코의 무대인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860명밖에 들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TV시리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세가 영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TV시리즈의 인기만을 믿고 경솔하게 영화화를 결정한 제작자들의 안일한 태도와 아이디어의 부재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원작만 빌려오고 TV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어서 실패한 경우도 있다. <쇼무니>의 경우 원래 드라마를 제작한 후지TV가 영화제작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에선 드라마와는 완전히 다른 스텝과 배우들을 기용해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결국 <쇼무니>는 드라마의 시청자들을 영화관에 끌어들이지 못하고 배급수입 1억 엔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패작으로 끝났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집에서 TV드라마를 보는 것과 다르다. 영화는 유료관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패작들은, 돈 안내고 볼 때는 재미있는 드라마가 유료화 되었을 때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으면 관객은 굳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는 기본상식을 무시했던 것이다.
TV시리즈의 높은 시청률만을 믿고 성급히 영화화를 결정하는 제작자들의 태도는 <GTO>의 사례처럼 실패를 가져왔다. 제작과정에서 원작을 훼손하여 실패한 <쇼무니>의 사례같은 경우도 존재한다. 브라운관과 영화관을 소비하는 태도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들은 가치 없는 작품을 보기 위해 영화관까지 가서 돈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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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계에서는 이처럼 TV드라마가 영화화되는 경우 이외에도 영화와 드라마가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개봉하는 새로운 상영형식이 시도되었다. 한 팀의 젊은 형사와 고참 형사가 연쇄 엽기 살인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린 <언아더헤븐>이다. 이 영화는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공개함으로써, 영화와 드라마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배우를 통해 보여주도록 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이외에도 TV드라마의 영화화는 TV의 스텝들이 영화로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창조하고 있다. 2000년 일본판 블록버스터로 현재까지 약 27억 엔 정도의 배급수입을 올린 <화이트아웃>의 와카마츠 세츠로 감독을 비롯해 많은 TV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활약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TV 출신의 이와이 슌지가 일본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최근의 이와 같은 방송과 영화계의 교류가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음은 확실하다.
일본영화계에서는 영화와 드라마가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우선, 두 채널이 동시에 개봉하는 새로운 상영형식이 시도되었다. 이외에도 스텝들이 영화로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방송과 영화계의 교류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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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카와 출판사와 영화와의 인연은 1976년 <이누가미가 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는 TV 방송국이나 출판사가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것을 미디어 믹스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미디어 믹스의 시초가 가도카와 출판사라고 할 수 있다. 출판과 영상을 연결시켜 그 상승효과를 통해, 구태의연한 당시 영화계의 상식에 도전했던 가도카와는 해외 로케 촬영이나 해외 스타들을 과감히 기용하면서 일본영화의 대작 붐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1980년에는 일본 최고 남극 현지 촬영의 <부활의 날>을 제작하여 23억 9천5백만 엔의 배급수입을 올렸으며, 1990년 가도카와 15주년 기념작으로 <하늘과 땅>을 제작하여 52억 엔의 배급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감과 모험심으로 새로운 영화에 도전하면서 일본영화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던 가도카와는 대량선전, 전매관객동원, 작품 질의 문제 등 여러 비판들이 난무한 가운데 1993년 대표의 구속으로 일단 영화제작을 중지한다. 그 후 1995년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작으로 5년 간 <실락원>, <불야성>, <금융부식열도(주박)>, <링> 시리즈 등 잇따른 흥행작을 내면서 제2의 “신가도카와”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새로 시작된 신가도카와의 전략은 관객이 열망하는 비사회적인 금기사항을 영화 속에서 만족시켜주자는 것인데 이와 같은 새로운 전략이 일본 영화 시장 공략에 성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디어 믹스의 시초가 가도카와 출판사라고 할 수 있다. 출판과 영상을 연결시켜 그 상승효과를 통해, 구태의연한 당시 영화계의 상식에 도전했던 가도카와는 일본영화의 대작 붐을 일으켰다. 1993년 대표의 구속으로 영화제작을 중지한 이후 관객이 열망하는 비사회적인 금기사항을 영화 속에서 만족시켜주자는 전략으로 제2의 “신가도카와”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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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출판사로는 가도카와 외에 도쿠마 서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전의 메이저인 다이에이를 인수하면서 영화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한 도쿠마 그룹은 도쿠마 서점을 비롯해 애니메이션 영화사인 스튜디오 지브리, 레코드사인 도쿠마 재팬, 디지털 위성방송인 디렉트 TV를 거느리고 있는 대회사이다. 가능하면 장기간 상영할 수 있는 대작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과감하게 영화에 투자하고 있는 도쿠마의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일본영화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처음 도쿠마는 50억 엔의 제작비와 30억 엔의 선전비를 들인 <돈황> 등 3편의 대작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 없이는 내용있는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계속 제작에 전념하여, 결국 1997년 <원령공주>와 1995년 <Shall we dance?>를 만들어냈으며 두 영화의 대성공으로 일본 국내뿐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그 입지를 굳히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와 같은 성공은 17년 간 스튜디오 지브리에 매달 1천만 엔씩을 투자하면서 <원령공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그 끈기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쿠마 그룹은 메이저제작사 다이에이를 인수하였으며, 스튜디오 지브리와 음반사, 위성방송채널까지 갖춘 대회사이다. 과감한 투자로 일본영화에 활력소를 주고 있으며, 몇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원령공주>와 <Shall we dance?>의 성공으로 일본 등 세계시장에서 입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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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일본의 독립영화 제작사는 상영후원인/단체를 확보하고 있는데 시구로의 경우 전국적으로 5천 단위의 상영 후원인/단체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제작비를 대주기도 하고, 영화가 완성된 후에 그 영화를 상영(독립영화만의 독특한 배급방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일부분의 제작비 환수가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보통 한 편의 영화는 2-3년에 걸쳐 1,000회의 ‘자주상영’(배급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기획되는 상영)을 하게 된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4천만 엔에서 6천만 엔의 제작비가 들고 극영화는 1억5천만 엔이 든다. 젊은 감독들은 2천만 엔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비디오로 자기 주변 이야기를 찍는 경우는 1백만 엔에서 2백만 엔 정도로도 영화가 된다. 그러니까 시구로는 제작비를 많이 쓰는 편이다. 제작비의 60%는 인건비다. 제작기간은 보통 1년 정도이다. 야마가미는 작품 완성 후 6개월에서 1년까지 감독에게 반드시 월급을 지급한다고 한다.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감독이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하기 위해서다.
일본 독립영화 제작사는 상영후원인 혹은 단체를 확보하여, 제작비 및 상영 지원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일부 제작비 환수가 가능하며, 지속적인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자 작품 완성 후 감독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곳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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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중에도 월급은 지급되고 영화 상영 중에도 지급되는데 상영 중의 월급은 제작할 때의 절반가량이다. 감독은 상영회에 참가하여 강연을 하도록 되어있다. 특히 지방 상영과 극장이 없는 지방의 ‘시민홀’ 등에서의 상영 때가 그렇다. 필름 렌탈 비는 5만 엔에서 20만 엔 사이다. 16밀리나 35밀리에 차이가 없다. 1편 당 2년 동안 1천 회의 상영을 목표로 한다. 평균 500에서 600회 가량 상영이 이뤄진다. 1천 회 상영이라는 목표가 달성되면 제작비 회수가 가능하다. 강연회 사례는 3만 엔에서 5만 엔 정도로 따로 받는다. 규모가 적은 단체는 렌탈 비를 할인해 주기도 한다. 기록영화 감독이 상영회에 참가하면 관객들이 참 좋아한다. 상영회가 활발해지는 것이다. 가장 큰 광고의 수단은 감독이다. 따라서 모든 명예는 감독이 갖고 돈은 프로듀서가 갖는다. 상영회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테마를 정할 수 있고 후원자도 구할 수 있다. NHK 자회사인 NHK Enterprise와 공동제작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상영 중 지급되는 월급은 제작 때의 절반 정도다. 1편 당 2년 간 1천 회의 상영을 목표로 하며 이에 성공하면 제작비 회수가 가능하다. 감독은 상영회에서 강연을 할 경우 3만 엔~5만엔 정도를 받으며, 다큐멘터리는 상영회에서 테마를 정하거나 후원자를 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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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위성방송 WOWOW의 100%출자로 발족된 선센트 시네마 웍스는 영상상품의 기획, 자금조달, 제작, 배급, 선전, 저작권관리까지 모두 담당하는 종합영상프로듀스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사업은 영화제작으로 저예산의 개성적인 아트계 영화에서부터 많은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오락영화까지 폭넓게 관여하고 있다. 연평균 10편 정도를 목표로 하지만 현재는 5-6편 정도를 프로듀싱하고 있다. 일본영화라는 생각보다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일본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국제영화제에 참가하고 있다. 선센트 시네마 웍스의 센토 다케노리 프로듀서는 92년 WOWOW에서 J․MOVIE․WARS 기획을 시작으로 99년까지 31명의 감독과 38편을 제작하며 일본독립영화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은 “양이 질을 낳는다.”는 자신의 영화제작 신조를 적극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지금까지 칸느, 베를린 등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에서 42번이나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WOWOW의 100%출자로 발족된 선센트 시네마 웍스는 종합영상프로듀스기업이다. 핵심 사업은 영화제작으로 저예산의 개성적인 아트계 영화에서부터 오락영화까지 폭넓게 관여하고 있으며, 칸느, 베를린 등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에서 42번이나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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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토 다케노리의 이와 같은 성공적인 영화제작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영화는 비즈니스라는 사고방식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철강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그의 과거 경력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영화를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성공을 위한 전략은 간단하다.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고 적은 예산으로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영화를 5,6편 묶어 한꺼번에 제작비를 조달하는 방법을 쓴다. 그 중 1편이 실패하더라고 다른 1편이 성공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를 철저히 비즈니스로 생각하고 있음은 회사의 구성원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센트의 직원 7인은 모두 과거 은행원, 생명보험영업소장 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영화나 TV관계자는 한 명도 없다. 또한 그는 원가를 공개하는 산업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영화의 제작비를 절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수자쿠>의 경우 현재 도쿄 근교의 맨션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제작비가 들었다는 정도로만 제작비를 밝히고 있다.
영화는 비즈니스라는 사고방식을 철저히 실천하며, 선센트사는 성공했다. 철저한 품질관리와 저예산 고품질 영화 제작과 함께, 여러 영화 중 1편만 성공해도 수익이 나는 묶음식 제작비 조달 전략을 사용했다. 또한, 영화 관계자가 아닌 회사 구성원들과 영화 제작비의 철저한 비공개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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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영화기획에서 자금조달, 제작, 배급, 홍보 등을 모두 하나로 일원화하여 모든 책임을 자신의 회사가 지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회사는 책임을 지는 만큼 권리도 행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경우 작품의 저작권은 출자자에게 있었는데 선센트는 프로듀스한 작품의 저작권을 자사가 갖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할리우드에서는 상식적인 것인데 일본에서는 센토가 처음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일본영화계는 분업화되어있어 홍보나 배급은 외주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가 하나의 상품으로써 최대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제작에서 배급, 홍보까지를 일원화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양일 감독의 <돼지의 보은>의 경우 배급을 다른 회사에 맡겼다면 전국에서 모두 단관 개봉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에서부터 모든 과정에 참여한 선센트의 경우 이 영화가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촬영 현장에서의 반응 등을 종합하여 동경에서는 단관 개봉을, 오키나와에서는 로드쇼관에서 상영하는 방법으로 차별화함으로써 관객 동원에 상승효과를 낳았다.
지금까지 일본 영화계는 제작, 배급, 홍보가 분업화되어 있어 홍보나 배급은 외주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센토는 영화가 하나의 상품으로써 최대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일원화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처음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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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수요조작 분야. 수요를 창출하고 확대하려면 언어시장이 크지 않은 우리로서는 언어에서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아시아시장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 뉴미디어에 따라 채널이 급증하고 있는데다 한국은 이들 지역에 경제성장의 모델이 되고 있어 좋은 조건이라고 본다. 따라서 처음에는 수익성보다는 한국 영상상품에 대한 시장을 창출하는데 주력하고 다음으로 이를 상업화하려는 방안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가격정책과 윈도잉의 다양화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상대방 국가의 관객들이 양국 간의 문화적인 차이를 점진적으로 극복하는 일정한 기간 동안은 ‘부수시장’ 가격 책정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 때에 따라서는 큰 작품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작은 작품을 끼워 파는 것도 미래를 대비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 보다 한 발 앞서 다양한 매체(창구)를 상용화한 일본의 산업 현황을 감안하면 일본을 상대로 한 윈도잉 전략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중국은 어떤가? ‘광대무변’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는 자연환경 때문에 뉴미디어의 도입 가능성이 큰 시장이다. 특히 해적판으로 인한 기회수익 상실의 위험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더 그렇다.
한국에 대한 수요를 늘리려면 문화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특히 아시아 지역을 노려 처음에는 수익성보다는 시장 장악을 위해 노력한 뒤에 나중에 상업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양한 가격정책과 윈도잉의 다양화는 주요 정책이 될 것이며 주변국과의 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 및 뉴미디어 시장 공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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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일본영화가 아닌 영화를 만든다는 자세로 영화제작에 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일본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150개관에서 공개하기보다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 더 큰 시장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서 그는 유수 해외영화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새로 시작한 “J-WORKS󰡓는 그의 이와 같은 해외영화제를 통한 해외시장 개척을 실천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00년 아오야마 신지의 <EUREKA>를 시작으로 가와세 나오미, 수와 노부히로, 도시시게 츠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해외 영화제 수상 감독들을 패키지로 묶어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국내적으로는 일본영화의 혁신을, 해외적으로는 흥행진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유럽 최대의 유로 TV방송국인 카날 프리즈와 세계배급권 판매계약을 체결하는 등 해외를 향한 적극적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일본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않으며,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 더 큰 시장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유수의 해외영화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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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일본 독립영화의 제작과 해외 배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창구로 독특한 활동을 하고 있는 PIA와 New Cinema From Japan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에게 피아영화제로 잘 알려져 있는 피아는 현재 영화제, 영화강연, 영화제작, 잡지발간, 영화배급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일본영화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이다. 피아는 1972년 영화정보지 발간으로 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는 낮은 입장료로 좋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명화좌’라는 영화관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정보지가 없어 좋은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워한 영화를 사랑하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피아를 만들게 되었다. 77년 피아는 메이저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8mm로 만들기 시작한 모리타 요시미츠, 구로사와 기요시, 이시이 소고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작은 이벤트를 시작으로 아마추어 감독들의 영화제를 실시하면서 영화제를 열게 된다. 84년부터는 영화제를 통해 발굴된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300만 엔 정도의 제작비로 16mm 영화를 제작하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현재는 방송국이나 메이저로부터도 지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2000년으로 22회를 맞는 피아 영화제로 만여 명의 감독들이 소개되었는데 이중 현재 50명 정도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수상작들은 나고야, 오사카, 고베, 오이타, 후쿠오카 등 5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되는데 이는 지방의 젊은이들의 영화 제작의욕을 자극하는 효과가 크다고 한다. 이외에 피아는 핑크영화를 제외한 일본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영화정보지 “피아”와 공연 표 예매를 주로 하는 “티켓피아”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일본영화 관객을 넓히는데 공헌하고 있다.
피아영화제로 잘 알려진 피아는 현재 일본에서 영화제, 강연, 제작, 잡지 등의 활동을 통해 일본영화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1972년 영화정보지 발간으로 시작된 피아는 영화를 사랑하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로, 각자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면서 아마추어 감독들의 영화제를 열기 시작,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영화제작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정보지 "피아"와 예매를 위한 "티켓피아"는 일본영화 관객 증가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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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시네마 프롬 재팬은 1997년 2월 일본영화의 공동프로모션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작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영화를 해외에 알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뉴 시네마 프롬 재팬은 탄생했다. 뉴 시네마 프롬 재팬은 주로 경비 부담 때문에 단독으로 해외영화제에 부스를 만들지 못하는 일본 영화들을 일괄적으로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한번에 20-30편 정도를 소개하는데 기본 참가 분담금은 10만 엔이며 한 작품 추가 시 5만 엔을 더 부담하면 된다. 지금까지는 가능한 많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참가를 신청하는 영화는 모두 참가가 가능하도록 했으나 앞으로는 작품을 선별할 예정이다. 국제 교류기금, 도쿄영화제, 코닥 등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본 영화 해외 소개와 시장 개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97년 베를린 영화제에 28편을 소개하여 <Focus>, <꿈의 미로>, <포스트맨 블루스>등 6편 정도의 해외 판매를 도왔다.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다양한 영화제에 참가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영화를 홍보, 소개하는 일만 하고 있으며 실제 매매는 배급사가 직접 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매 통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1년에 30편 이내의 작품을 홍보해서 10% 정도(액수로는 3000만 엔 정도)의 판매 성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뉴 시네마 프롬 재팬은 일본영화의 공동프로모션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영화를 해외에 알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는 데서 탄생한 것으로, 일본 영화들을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한번에 20-30편 정도를 소개하며 앞으로는 작품을 선별할 예정이다. 일본 영화 해외 소개와 시장 개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대체로 10% 정도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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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관 수는 1961년 절정기 7,457관에서 매년 조금씩 줄기 시작하여 1989년엔 급기야 2000관에도 못 미치는 1912관이 되었다. 한편 86년에는 비디오대여 대형점인 CCC가 오픈하고 갸가 커뮤니케이션즈가 비디오 대리점을 설립하면서 비디오 대여점은 순식간에 2만점 이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영화관 관람료 1800엔, 비디오 대여료 300엔이라는 차이는 영화관을 찾는 관객의 수를 감소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일본영화계에는 영화관 비즈니스는 이제 거의 장래가 없는 사업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1993년 일본 최초의 시네마 콤플렉스인 워너 마이클 시네마즈가 에비메이에 오픈하면서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어 AMC, UCI, 버진시네마즈 재팬 등의 외국자본 시네마 콤플렉스 뿐 아니라 쇼치쿠, 일본 헤럴드 엔터프라이즈, 도호, 도에이 등의 일본자본의 시네마 콤플렉스들도 생겨나면서 2000년 5월 현재 일본의 시네마 콤플렉스는 전국 70여 곳에서 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하게 되었다. (1999년 현재 일본의 영화관 수는 2221개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시네마 콤플렉스의 갑작스런 증가는 지금까지 잠재해있던 일본영화계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는 현상인 동시에 기존의 일본 영화계가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럼 이 같은 시네마 콤플렉스의 등장으로 변화하고 있는 일본영화의 흥행, 배급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의 영화관 수는 감소했고 비디오 대여점은 증가했다. 그래서 일본 내 영화관 사업의 전망이 어두웠던 적도 있었지만, 시네마 콤플렉스가 전국 각지에서 생겨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네마 콤플렉스가 빠르게 증가한 현상은 일본 영화계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한편, 일본 영화계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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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 상영 형태는 크게 블록 부킹과 프리 부킹으로 나눌 수 있고, 프리 부킹은 다시 확대상영과 단관 상영, 그리고 시네마 콤플렉스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블록 부킹이란 영화의 첫 상영 일부터 마지막 상영 일까지를 미리 정해 놓고 상영하는 형태를 말하며, 프리 부킹이란 이와 반대로 영화의 흥행에 따라 상영 일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상영형태를 말한다. 블록 부킹은 주로 메이저 3사들이 자사의 전국 극장 망을 통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상영형태인데 1999년 쇼치쿠가 블록 부킹을 포기함으로서 현재는 도호와 도에이만이 블록 부킹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블록 부킹 시스템은 <고지라>나 <도라에몽>, <남자는 괴로워>처럼 관객층이 안정된 경우에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이미 정해진 시장 이상의 관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일본영화가 일정한 관객을 확보하고 있던 시기에는 효과적이지만, 한 편 한 편 새로운 기획을 통해 영화가 제작되는 현재 1년 간 상영할 안정된 영화 프로그램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앞에서 이봉우씨가 말한 52주 구멍 메꾸기 영화 만들기도 이와 같은 블록 부킹 시스템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영화 상영 형태는 크게 블록 부킹과 프리 부킹으로 나눌 수 있다. 블록 부킹이란 상영일자를 미리 정해 놓고 상영하는 형태를 말하며, 프리 부킹이란 영화의 흥행에 따라 상영 일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상영형태를 말한다. 블록 부킹 시스템은 정해진 시장 이상의 관객을 받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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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와 같은 블록 부킹은 상영작품이 대히트를 할 경우에도 다음 작품의 상영일이 잡혀져 있기 때문에 일찍 종영해야하는 단점도 지닌다. 물론 이런 경우 무브 오버라고 해서 다른 영화관으로 옮겨 상영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영화관 이동은 계속되는 영화 흥행의 열기를 식혀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Shall we dance?>처럼 일본영화 전문관에서 블록 부킹으로 상영되어 다른 외화들과 경쟁하지 않고 당당히 대 히트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블록 부킹은 일반적으로 메이저사의 일본영화 전용관들이 대체적으로 가족중심 또는 중년층의 관객을 흡수하기 좋은 곳에 입지하고 있어 일정한 일본영화 관객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지방관객의 취향에 맞지 않는 획기적인 영화제작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영화발전의 걸림돌로 취급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블록 부킹은 일찍 종영해야 하거나, 다른 영화관으로 옮겨 상영해도 흥행을 식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Shall we dance?>처럼 일본 영화 전문관에서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블록 부킹은 영화제작의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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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도쿄에는 미니 씨어터 단관 극장이 30-40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년대 말 소위 예술영화들을 일본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시작된 미니 씨어터들은 현재 해외의 예술영화 뿐 아니라 일본 독립영화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오후의 유언장>이나 <러브레터>, <잠자는 남자>나 <HANA-BI>같은 영화들이 미니 씨어터 장기 롱런을 통해 흥행에 성공을 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화들이 처음부터 조금 더 많은 영화관을 통해 상영되었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단관극장 개봉이 적합해서 단관개봉을 해야 하는 영화들을 위한 단관극장의 존재는 정당하다. 그러나 단관개봉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단관개봉을 해야 하는 독립영화들을 위한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든 독립 영화 제작사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서의 시네마 콤플렉스 붐은 의의가 있다.
도쿄에 30-40개의 미니 씨어터 단관 극장은 일본 독립영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더 많은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독립영화들을 위한 개선책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시네마 콤플렉스 붐은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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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워너 마이클 시네마즈 에비메이의 탄생으로 시작된 일본의 시네마 콤플렉스는 기존의 영화관이 갖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면서 일본 영화 시장 내에서 빠른 시간 안에 붐을 조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네마 콤플렉스 붐은 일본영화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크린 수의 증가로 인한 영화의 수요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영화흥행은 한정된 영화관으로 인해 배급사보다는 흥행 측인 극장이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블록 부킹이라는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융통성 있는 흥행전개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시네마 콤플렉스의 증가는 이와 같은 고정적인 배급과 흥행관계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시네마 콤플렉스의 등장으로 이제 일본영화는 단관 개봉 또는 전국 극장 체인 개봉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보다 자유로운 흥행형태의 선택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개봉기회를 부여받을 수 없었던 제작자들은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고, 이는 영화제작 분야를 활성화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시네마 콤플렉스는 영화관이 없었거나 그 수가 적었던 지방에 새로운 관객을 창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는 9대 도시와 지방의 관객동원 비율의 변화로 확인된다. 과거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삿포로, 요코하마, 가와사키, 고베, 교토의 9대 도시와 그 외 지방의 관객동원 비율은 50대 50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 35대 65정도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검은집>의 경우 도시에서는 거의 참패를 했지만 시네마 콤플렉스의 덕으로 지방에서 어느 정도 흥행을 회복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1993년 이후 일본 시네마 콤플렉스 붐이 일본영화계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우선 스크린 수의 증가로 자유로운 흥행형태의 선택이 가능해서 제작자들은 기회를 얻어 영화제작 분야가 활성화됐다. 9대 도시와 지방에 새로운 관객을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도시와 지방 비율이 50대 50이었다면 현재 35대 65정도로 변화를 보였는데, <검은집>이 시네마 콤플렉스 흥행의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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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네마 콤플렉스는 경직되어 있던 일본의 요금제도를 자율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네마 콤플렉스는 다수의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을 활용해 각 스크린에 따라 아침, 점심, 저녁, 혹은 점심, 저녁, 밤 등 상영시간을 자유롭게 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응이 좋은 영화를 2, 3개의 스크린에서 동시 상영하는 등 다양한 상영 패턴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요금 제도를 시도하고 있다. 레이트 쇼, 퍼스트 데이, 그리고 21시 이후에 시작하는 마지막 회 할인 등 다양한 요금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융통성 있는 요금체계는 시네마 콤플렉스가 원칙적으로 전매권을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요금의 변화를 시네마 콤플렉스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1995년 <당신을 잊지 못해>는 일본헤럴드영화사가 전매 1000엔, 당일 1200엔이라는 입장 요금 가격파괴를 통해 4억5천만 엔의 배급수익을 올린 적도 있다. 또한 레이디스 데이라고 해서 한 달에 한번 첫째 수요일 여성입장객에게만 1000엔의 요금을 받는 할인혜택을 다른 극장들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주 극히 특수한 경우이며 일반적으로 일본에는 전매권제도(1500-1600엔)가 있어 그 이하로 요금을 책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시네마 콤플렉스는 일본의 요금제도를 다양하게 자율화시기키고 다양한 상영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연성 있는 요금체계는 전매권을 취급하지 않아 가능하다. 일본헤럴드영화사가 1995년 <당신을 잊지 못해> 상영 시 전매와 당일의 요금 가격파괴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타 극장들도 레이디스 데이 요금제 할인혜택을 시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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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시네 콤플렉스의 장점 때문에 시네 콤플렉스에 대한 지지는 계속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지금까지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시네 콤플렉스는 중심부로 진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심부 진출 예정인 시네 콤플렉스들은 대부분 10개 이상의 스크린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시네마 콤플렉스를 넘어 메가 플렉스급 영화관의 등장이 예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네마 콤플렉스의 증가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같은 지역에 경쟁하듯 생기는 시네마 콤플렉스가 서로 얼마나 상호 보완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실제로 현재 시네마 콤플렉스는 대부분의 경우 확대공개 체인극장, 도호, 도에이의 일본영화2계 극장, 단관극장의 히트작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화제작이 아니고는 현실적으로 시네마 콤플렉스에서 상영되기가 힘든 상황이다. 계속 늘어가는 스크린 수를 다양한 영화들로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 편성을 얼마나 개성화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시네마 콤플렉스가 일본영화계에서 담당할 역할이 변화될 것이다.
시네콤플렉스의 장점으로 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며, 더욱 거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상호 보완적인 다양한 프로그램의 편성이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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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규모의 확대와 관련하여 실질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국제공동제작이다. 국제공동제작이 갖는 장점은 자본조달의 용이성, 참여자 각각의 장점과 노하우의 결합, 시장의 공유, 새로운 시장의 공동개척과 그 결과의 공유이다. ‘제작비(경제적 측면)’, ‘인력과 노하우’, ‘정보와 소재’ 그리고 ‘제작기술’을 공유하면서, 이런 요소 중의 하나 또는 둘 이상을 분담하여 결합함으로써 한 주체의 능력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질 높은 또는 대규모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공동제작의 목적이자 의의인 것이다. 물론 급증하는 영상물 수요와 제작비 상승에 따른 위험부담을 줄이는 것도 공동제작의 중요 요인이다. 공동제작은 더 구체적으로는 공동제작, 공동출자, 공동 사전구매로 구분할 수 있고, 이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합작(co-venture)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아울러 개념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좁은 의미를 담고 있는 co-production을 공동작업(co-production)이나 공동개발(co-development)이라는 다른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합작, 공동작업, 공동개발이라고도 불리는 국제공동제작은 시장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이다. 이는 질이 높고, 대규모의 영화를 제작하는데에 따르는 영상물 수요와 제작비 상승의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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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제1차 일본영화개방이후 처음 일본배우를 등장시킨 <가족시네마>의 상영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순애보>까지 이제 한국과 일본의 영화는 따로 떼어내어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1월 현재 일본영화 <인랑>과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가 개봉되어 있는 상태이며, 일본에서는 한국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박하사탕>, <텔미썸딩> 등이 개봉된 상태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영화교류 뿐 아니라 공동작업도 적극 추진중이다. 이미 <순애보>는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는 상태이며, 지난 8월 한국 프라임벤처캐피탈의 프라임펀드에 1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한 일본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인 오메가 프로젝트는 이를 통해 한일 공동제작 영화를 계획하고 있으며, 싸이더스는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 양산박’, 일본출판사 ‘아통’과 함께 재일교포 감독 김수진의 <밤을 걸고>를 한일합작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이와 같은 양국의 교류러시에 대해 최근 한국에 들어온 일본영화사 어뮤즈 코리아 대표 김용범씨는 한일양국의 교류가 작품의 물물교환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기획 및 합작을 통해 아시아영화가 서방정벌의 원대한 꿈을 이룰 초석이 되어야한다는 한일 영화 교류의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일본 원작을 한국의 감독이, 홍콩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배우를 기용해 제작한 아시아권 다국적 영화로, 유럽과 할리우드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과 일본은 영화교류와 공동제작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어뮤즈 코리아의 김용범 대표는 이런 흐름에 대해 공동기획 및 합작을 통해 제작한 아시아권 다국적 영화로 유럽과 할리우드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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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국이 서로의 장, 단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서로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본 연구는 지금까지 제작, 배급, 상영의 세 부분을 통해 일본영화산업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는 일본 영화 산업의 현재를 조명함과 동시에 일본 영화계가 바라는 것과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영화계의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었다. 제작을 그만둔 메이저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극장을 채울 영화들을 찾고 있다. 게다가 최근 시네마 콤플렉스 건립으로 스크린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극장을 채울 영화가 부족하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내에서 만족할 만한 배급과 상영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좋은 독립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영화를 상영할 공간이 없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남는 일본의 극장을 채우기 위해 어떤 영화를 제공할 것이며, 상영공간을 찾고 있는 좋은 일본영화들에게 어떻게 상영공간을 제공할 것인가이다.
일본 영화계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메이저 영화사는 소유한 극장을 채울 영화를 찾는다. 그러나 독립영화 등의 마이너 영화는 공간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 극장에 어떠한 영화를 판매할 것이고, 높은 완성도의 일본 마이너 영화에게는 어떤 플랫폼을 제공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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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본영화계의 수요 공급의 불균형은 왜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극장들이 원하는 영화는 대작영화들인데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저예산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현재 일본에서 흥행적으로 성공한 일본영화들을 살펴보면 <화이트아웃>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형 대작들이 눈에 띈다. 일본의 영화 평론가 켄 오쿠보는 “일본 내 한국 영화의 성공은 할리우드 영화를 선호하는 일본 관객들에게 <쉬리〉의 액션과 다이나믹한 스토리 전개가 비슷한 느낌을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의 답습만으로 일본의 관객을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현재 일본이 원하는 영화는 버블경제 이후 제작이 어려워진 대작영화들이다. TV와 출판사들이 이와 같은 요구를 채우고 있지만 여전히 모자라다. 단관 극장에서 입소문을 통해 차근차근 흥행을 쌓아갈 영화들은 일본 독립영화들 가운데도 많이 있다. 운 좋게 요즈음 한국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대작들이 제작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을 잘 활용할 기회라고 생각된다. 물론 대작 영화라고 해서 다 성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이 현재 원하는 영화는 많은 수의 스크린을 채울 수 있는 화제가 될 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남북문제를 다룬 <쉬리>와 <공동경비구역JSA〉는 이런 점에서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좋은 일본영화들이 일본 내에서 충분히 관객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영화를 접하지 못하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일본 영화가 그런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극장이 원하는 영화는 블록버스터형 대작영화인데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일본영화계의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진출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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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양국의 교류를 통해 김용범씨의 말대로 수년간 내림세를 걸어오며 동아시아권에서의 새로운 시장 창출이 시급한 실정인 일본영화계에는 성장을 거듭하고있는 한국영화시장이 탄탄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대신 한국영화에게 일본은 세계 배급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좋겠다. 미진하지만 현재 일본영화 산업현황을 토대로 양국이 상부상조할 수 있는 협력방안을 제안해보았다. 연구자의 부족한 능력과 자료의 한계로 충분한 연구가 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추후 더 좋은 연구가 나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은 한국영화를 위해 세계 배급 기회를 창출하고, 한국영화시장은 일본영화계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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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언급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이미 아․태 지역 영상공동체 창설방안 등이 나오긴 했지만, 이와 관련된 사전 준비 즉 기업 간 공동제작 및 교류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라 당분간은 선언적인 방안에 그칠 공산이 크다. 특히 일본과 중국에 대한 기초자료 조사조차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본 연구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국제교류의 상대국으로서 일본과 중국이 갖고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심도 있게 점검해보자는 뜻에서 쓴 기초조사 보고서이자 이들 국가와의 상호교류 방법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자 시안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일본과 중국을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연구보고서의 연구와 집필은 일본 부분은 정수완 씨가, 중국 부분은 도성희 씨가 각각 담당하였다. 아울러 중국 관련 통계를 정리하고 법령을 번역하는 데는 권재현 씨의 수고가 컸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분께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촉박한 시간, 부족한 연구지원 등에도 불구하고 알찬 연구성과를 내놓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신 객원 연구자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연구과정에서 얻은 많은 성과를 본 보고서에 담지 못해 못내 아쉽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위원회에서 곧 내놓게 될 ‘일본 영화산업 백서’와 2001년말까지 내놓으려 하는 ‘중국 영화산업 백서’에 정리해서 담게 될 것이다. 위원회는 또 양국 영화산업의 변모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정리해 나갈 것이다.
아 태 지역 영상공동체 창설방안을 비롯한 일본, 중국, 우리나라의 상호교류 방안에 대한 연구는 사전 준비의 부족과 체계적인 기초자료 조사조차 어려운 환경 때문에 가설이나 시안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아쉬우나마 '일본 영화산업 백서'나 '중국 영화산업 백서'에 그간 연구의 성과를 담아 내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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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이후 11월에 이르는 다섯 달 동안에 걸쳐 본 연구는 진행되었다. 그간 각기 한차례에 걸쳐 중국과 홍콩을 방문하여 다양한 영화계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중국 현지 촬영을 경험한 제작사의 관계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귀중한 경험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아시아권의 국가로서 그 교류의 양과 질이 심화, 확대되고 있는 현황에 비하여, 막상 중국 지역과 한국과의 영화 산업에 대한 상호이해는 일천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효과로 말미암아 서로가 상호 교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만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대와 욕구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재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연구는 본래, 정보가 취약한 중국어권 국가들의 영상산업 현황을 파악하고, 한중간 및 다자간(지역 내) 협력 방안과 한국 영화의 진출 방안을 모색한다는 다소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여, 협력과 진출이라는 상황에 접근함에 있어 이해가 필수적인 부분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결정은 한․중 양국 간의 영화 산업 부문에 교류가 막 시작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영화계가 이해하고 있어야할 실질적인 정보를 우선 제공하여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의 중지가 모여야만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고 추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이 연구는 본래 중국어권 국가의 영상산업 현황 파악, 한중 협력 방안 및 한국영화 진출 방안 모색을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영화계 인사와 영화 제작사 관계자들과 대화한 결과 한중이 서로의 영화산업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고, 그에 따라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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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다음 장에서 중국 영화 산업계의 전반적인 상황을 기술한 다음, 중국 영화 산업의 시스템이 그동안 어떠한 변모를 하여왔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중국 영화 산업의 특징과 관련하여, 1948년 이후 중국의 영화 산업은 한국과는 현저한 이질성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현재의 중국 영화 산업은 급격한 변화의 추이를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역사적 상황은 현재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산업 토대의 기반을 이룬다. 여기서는 중국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현재의 영화산업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존재하며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소하려 하는지에 대한 정책의 입장이 설명된다. 생산과 소비 활동을 통해 이윤이 창출되는 산업적 측면보다는, 영화를 통한 전 인민의 단결과 당의 관점을 교육한다는 정치적 측면에 더욱 충실해야했던 중국의 영화계에 대해 단순한 통계의 수치를 가지고 그 본질과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는 중국 영화 산업의 대외 합작 시스템과 그 성과들을 다루게 되는데, 99년 한국 영화들 중 중국에서 로케이션을 하거나 합작의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와 <비천무> 제작진의 경험이 언급될 것이다. 이 부분은 가능한 인터뷰를 통해 전해들은 정보를 세세하게 상술하면서 이후 한국 영화가 중국에서 합작을 진행할 경우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제3장에서는 아시아 영화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논의들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대처 방안 및 준비에 대한 초보적 모색을 한다.
중국 영화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산업 사이에서 갈등이 있어 왔는데 중국의 영화는 산업적 측면보다 전 인민의 단결과 당의 관점을 교육하는 정치적 측면이 있어서 나타난 수치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한국 영화가 중국과 합작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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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연구가 그 현실적인 한계성과 관련되어 가지게 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지역의 영화 산업에 대한 연구와 정보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것과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특수성이 제반 국가와는 현저히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러한 차이들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설명하는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지역적 범위가 넓고 각각의 특성도 다양하여 이를 개별적으로 분석, 종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기본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정보가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중국 본토의 산업 현황을 중심으로 홍콩과 대만은 부수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 둘째, 중국의 경우 국가 이데올로기의 특성상, 국가가 영화 산업을 독점적으로 장악,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통계자료가 빠른 시일 내에 도출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할 때, 최근 2년 간의 현황은 개별적인 인터뷰에서 확인하거나 그 이전의 자료를 근거로 한다. 셋째, 고유명사는 원어와 한국말을 함께 표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인명의 경우에는 중국의 표준어 발음에 근거하고, 단체의 경우에는 한국식 한자 표현이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 한자식 표현으로 전환하여 사용하였다.
이번 연구는 중국이 제반 국가에 비해 다른 측면들을 중점에 두어 설명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폐쇄적인 중국의 최근 현황은 개별 인터뷰나 그 이전의 자료로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고유명사는 원어와 한국말을 최대한 함께 표기하고, 인명은 중국 표준어 발음에 근거하고, 단체는 한자식 표현으로 전환한다.
자료 요약 부탁드립니다.
78년, 중국의 개혁과 개방 이후, 국제 사회는 중국의 모든 현실들에 바짝 주목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그 어느 방면에서도 이제 막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이 낯선 국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 분야의 산업이 중국 시장이라는 가능성에 매료되었듯이, 영상 산업에 있어서도 잠재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12억의 인구, 동북아시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제 성장률), 더욱이 아시아의 금융위기 이후에 주춤하긴 하지만, 매년 약 10%에 달하는 빠른 경제 성장률만으로도 이미 그 가능성에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전국적으로 36개에 달하는 영화제작소가 있고; 1905년부터 1996년까지 4600편의 극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영화계 종사자가 36만여명; 3천개가 넘는 배급 단위와; 70,000여개의 상영 단위 및; 9000여 개의 상영관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산업적 규모에 대하여 어쩌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 동안의 중국 영화계가 세계 영화제를 통해서 이루어 낸 눈부신 성과들의 후광까지 가세하면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 영화산업의 규모에 들어가 보면 우리는 이러한 외관과는 상이한 현실들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96년부터 현재까지 연간 100편을 밑도는 국산 영화의 제작 편수와 200만 위엔(元, 환율 140을 기준으로 한화 2억 8천만 원 상당)에 불과한 평균 제작비, 매년 10억 위엔(1400억 원)을 밑도는 상영 수입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개방 개혁 이후의 영화 산업 관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다보면 중국의 모든 산업이 빠른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영화 산업만이 급속히 쇠퇴하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국제 사회는 중국에 주목하였고 영상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적으로 36개에 달하는 영화제작소, 9000여 개의 상영관, 세계 영화제로 이루어 낸 성과들까지 중국의 영화 발전을 기대하게 되었으나 현실은 달랐다. 96년부터 현재까지 연간 100편을 밑도는 국산 영화의 제작 편수, 200만 위엔에 불과한 평균 제작비 등, 개방 개혁 이후 중국의 영화 산업은 급속히 쇠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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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이긴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의 노력도 적극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어권 국가로서 미국의 현지투자가 상당히 중요한 산업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국이 변수이긴 하나, 유럽공동체 차원의 유럽영화 진흥책 운용은 주목할 만하다. 유럽도 영상․방송․통신의 융합에 착안하여 유럽영화의 활로를 찾고 있다. 유럽 안에서는 방송의 영상산업에 대한 지원 역할을 강화하는 한편, WTO체제 내에서의 시청각서비스 분야 협상에서는 문화적 예외를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한다. 갈수록 영상산업의 중요성이 커지기 때문에, 각국이 이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최선을 다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국내시장을 활성화하는 이상의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은 영화 진흥을 위해 영상, 방송, 통신의 융합에 착안하여 활로를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국내 시장 활성화 이상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점들만 간추려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우선 1979년부터 199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화를 관람한 총 인원 수는 반으로 줄어들어 293억 명에서 144억 명으로 급감하였으며 상영 횟수 역시 20%정도가 줄어들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1992년에 이르러 다시 관객 총 동원 105억 명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배급 수입은 17.9%, 극장 수입은 15.7%가 감소하였다. 이러한 위축은 결국 중국 영화의 생산력 저하로 이어져 92년 166편에 달하던 중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95년까지 대략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96년 110편, 97년 약 80편에서 이듬해인 98년 약 60여 편으로 매해 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상황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찾고자함이 이 연구의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많은 설명을 생략하지만 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거론된다. 첫째, 90년도 이후 급속히 늘어난 TV의 보급과 싼값에 공급되는 VCD, DVD 등을 통해서 관객 층이 빠져나가고 있다. 둘째, 현재 중국 영화관의 시설이 낙후하여 관객에게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 셋째, 중국의 영화 관객들이 그간 다양한 영상물을 접하면서 템포가 느리고 구태의연한 방식의 국산 영화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 이에 덧붙여 중국의 영화 관계자들이 스스로 밝히기는 매우 꺼리지만, 연구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개방과 개혁의 와중에서 겪게 되는 중국 영화 산업계의 재편과 정책적인 변화들이 중국 영화계에 혼란을 초래하면서 기존의 시스템은 무너지고 새로운 시스템은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모순들이 누적되면서 중국 영화산업의 급격한 위축이라는 상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 총 영화 관객수는 293억 명에서 144억 명으로 급감했고 상영 횟수도 약 20% 줄었다. 92년에는 관객 105억 명, 배급 수입 약 18%, 극장 수입 약 16%가 줄었다. 그 결과 95년 이후 영화 제작 수도 매해 줄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TV와 저가 VCD, DVD 등으로 인한 관객층 이탈, 영화관 시설 낙후, 개방과 개혁에 따른 국산 영화에 대한 싫증과 영화산업의 위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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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반적 침체의 분위기 속에서 최근 들어 중국 영화계는 다시 한번의 개혁 작업을 통해 현재의 부진에서 벗어나 앞으로 다가올 본격적인 문화시장 개방에 대비하려는 일련의 변화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눈에 띤다. 실제로 거의 매년 중국을 방문하여 영화계의 인사들과 접촉하는 지난 10여 년의 과정에서 올해와 같이 새로운 움직임들이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판단에, 그 추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중국전영공사(中國電影公司)라는 중국 최대의, 그리고 중국의 유일한 공식적 영화 수입, 수출사를 중심으로 북경영화제편창(北京電影制片廠), 아동영화제편창, 영화합작공사(電影合作公司), 북경영화현상녹음기술(北京電影洗印錄像技術), 영화 TV 채널, 중국영화기자재공사(中國電影器材公司) 등이 99년 2월에 중국전영집단공사(中國電影集團公司, 혹은 중국전영그룹)로 통합 재편되면서, 영화의 제작과 기술지원에서부터 배급 및 상영까지, 이른바 한 마리의 용(一條龍)과 같은 일관된 라인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은행 및 정부, 민간 자본이 함께 1억 위엔을 투자해서 설립한 화용디지탈공사(華龍數碼公司)를 앞으로 더욱 다양해지는 영상의 시청각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술 개발을 한다는 취지에서 중국전영그룹이 이 회사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중국전영그룹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러한 움직임은 모두가 할리우드의 영화로부터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 시장 개방의 압력이 다가오는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더욱 확산될 것에 대비하여, 미국 영화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분산되어 있는 기술적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자금을 통일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중국 영화를 육성하고 전국적인 배급망을 개조하는데 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대 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중국은 할리우드 등 문화 시장 개방의 압력으로부터 자국의 영화를 지키고자 개혁을 맞이했다. 99년에 중국은 자국 유일의 공식적 영화 수입 및 수출사인 중국전영공사를 중심으로 많은 영화 사업체 및 기관을 통합해 중국전영그룹을 세워 영화의 제작, 기술지원, 배급, 상영 전체의 일관된 운영을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해당 그룹은 화용디지탈공사까지 수용하려 하고 있다. 이렇듯 분산되어 있는 기술적 역량과 자금을 모으는 것이 중국 영화계의 발전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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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해영화제편창에서는 2000년 8월 현재 <生死決戰>이라는 영화가 400만 위엔(5억 6천만 원)을 투자하여 전국 상영 2주 만에 1200만 위엔에서 1500만 위엔 정도의 흥행 수입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중국 관료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다루고 있는데, 현재의 세태를 통해 일반 중국인들의 심정에 효과적으로 호소한 것이 흥행 성공 요인으로 보인다. 이는 연속되는 중국 영화 흥행의 부진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중국 영화 제작자들을 고무시켰다. 중국 영화계에서 새로운 건설을 향한 구호와 모색이 제기되어 온 것은 지난 78년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 거듭되었으나, 혼란과 지지부진한 성과 앞에서 중국 영화인들은 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2000년도에 들어서 중국은 새로운 자신감으로 영화 산업 전반을 재정비하는 한편, 내년에는 영화 제작에도 활기가 붙으리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돌고 있다. 중국의 3대 영화 제작소인 북경, 상해, 장춘의 영화 제편창에 소속된 제작 분야의 책임자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중국 영화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확언하고 있으며, 올해를 중국 영화 산업의 난국을 타파하는 그 기점으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점 또한 인상적이라 하겠다. 과연 동양의 할리우드를 건설하겠다는 중국 영화계의 희망이 과연 그 일보를 내딛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쳐 끝없는 혼란의 와중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홍콩 영화계의 평론가인 리 척토(李卓桃)의 말처럼 현재의 상황이 어찌됐던 “대륙은 영원히 관심을 늦출 수 없는 그런 지역...”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까이 다가오는 요즘이고, 중국이 개방의 확대와 영화 산업의 건설이라는 명제 쪽으로 그 방향을 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2000년 8월 <生死決戰>이라는 영화의 흥행은 그동안 부진해왔던 중국영화가 영화 산업 재정비, 개방 확대, 영화 산업 건설 등에 힘입어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하게 한다. 이 전망이 실현될 것인지, 아닌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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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중국 영화 산업에 있어 과연 온전한 의미의 “시장”이라는 개념이 타당할 지 의문이 앞선다. 사실 중국에 있어 영화는 그 생산자(제작)와 상품을 유통(배급, 상영)하는 자들이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제작과 배급이 엄격히 분리된 채, 정치와 행정에 있어서의 편의와 목적성에 맞추어 제작되고 상영되어왔기 때문에 문화 상품으로서의 정상적인 유통과 합리적인 경쟁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가 오래 지속되어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왜 오늘날까지도 영화 산업의 개혁과 혁신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며, 외국의 투자자들은 중국에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말을 하는가? 이는 결국, 계획경제 시스템을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겪는 몸살이며 정치에 복무하는 예술과 상업적인 영화 모두를 얻고 싶은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의 갈등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중국 공산당은 그 성립 시기부터 영화를 인민과 당의 중요한 매개물로 간주하였다. 레닌이 영화를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고 말한 의미의 연장선에서 중국의 혁명 세력들도 영화가 지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과 항일 투쟁의 선동에 있어서의 효과적인 기능에 주목하였다.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영화에 대한 당의 각별한 관심은 곧 새로운 영화산업을 건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이후 중앙인민정부는 문화부 산하에 전영국(電影局)을 발족시켰다. 30년대 말,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주에 세워진 영화 제작소는 동북영화제편창(東北電影制片廠, 현재의 長春電影制片廠)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같은 무렵 상해영화제편창과 북경영화제편창이 건립되었다. 이들 영화 제작소에서는 건국 초기의 어려운 경제 상황 하에서도 49년에서 50년에 이르는 한 해 동안에만 35편의 극영화와 280편의 보도용 다큐멘터리, 그리고 6편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왕성한 제작 활동을 해낸다.
중국에서 영화는 생산자들이 상품 유통을 위해 경쟁하는 “시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치와 행정 편의에 따라 제작되므로, 제작과 배급이 분리되어 합리적인 경쟁이 불가능한 구조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의 혁명 세력들은 오래전부터 영화를 항일투쟁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 도구로 인식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정권 장악 이후부터 전영국을 발족하고 일본인들이 만든 영화제작소인 동북영화제편창을 재편하는 등 영화산업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초기 영화제작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왕성하게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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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산업은 이미 30, 40년대에 상해를 중심으로 아주 발전했던 전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른바 인민 해방전쟁의 승리 이후인 50년대에 들어와서는 소련의 영화 관리 시스템을 근간으로 하여 재 건립되었다.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 직후 개별 영화사들은 그래도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지만 곧 위의 제편창으로 흡수, 통합되거나 사라졌고, 이제 새로운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운용 방식은 정부와 기업이 하나로 묶여지는 양상을 취하며 행정 지침에 따라 영화를 생산하고 배급할 것을 각 제편창에 요구하게 되었다. 1953년, 소련의 영화 전문가들의 도움과 지도하에, ‘제1차 중국 영화 5개년 관리 계획’을 수립한다. 곧이어 각 영화 제편창에 대하여 정부가 일률적인 영화 제작 사업 제도와 제작주임 제도 및 영화 생산에 관련된 모든 규정이 전달되어졌으니, 이는 곧 모든 영화 제작 단위가 행정 조직으로 변화함을 의미한다. 영화의 배급에 있어서도 중국영화경영공사(中國影片經理公司)를 중국영화배급상영공사(中國電影發行放映公司)로 재편성하면서 각 성(省)과 시(市)에 영화를 배급하는 단위를 건립하고 이에 필요한 제반 제도를 정비하였음은 물론, 영화국 산하에 영화상영관리처(電影放映管理處)를 두었으며 각 성과 시 및 자치구의 문화 관리 부처 산하에도 이와 유사한 부서를 설립하여 중앙 정부의 의지가 전국의 각 지역에 전달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일률적이고 통일적인 관리 시스템을 만들어내었다.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직후 개별 영화사들은 곧 위의 제편창으로 흡수 통합되어 사라졌고 영화 제작과 배급의 운용방식은 정부와 기업이 함께 행정 지침에 따라 영화를 생산하고 배급하게 된다. 1953년 '제1차 중국 영화 5개년 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영화 제작 단위가 행정 조직으로 변화하였다. 배급도 국가가 제도를 정비하고 관리 부처를 두어 일률적이고 통일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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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소련을 방문한 중국의 영화계 인사들이 소련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보다 형식을 갖춘 영화 생산 시스템이 제안되고 이를 당 중앙이 비준함으로써 1956년 중국에서는 영화의 생산과 경영 및 관리에 이르는 영화 사업 시스템(電影事業體制)이 그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가 50년대의 중국 영화계에 많은 변화를 몰고 왔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영화 산업연구자인 니이 쩐에 따르면, 새로운 영화 산업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작용을 해내게 된다. 첫째, 신생의 인민 정권이 건립한 초기에, 신속하게 영화의 생산력을 추동, 운용하여 농,공,병(農,工,兵)이 주인공이 되어, 인민을 단결시키고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고, 둘째, 국유화된 영화 기업체가 영화의 생산을 빠른 속도로 규범화하면서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엄격한 질서가 확립되어 제3세대에 속하는 영화 창작자들로 하여금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셋째, 행정 구역에 의해 영화가 배급, 상영되도록 조치함으로써 그 동안 영화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낙후한 지역에까지 급속하게 영화가 보급되었다. 넷째, 엄격한 민족 영화 보호정책으로 외국 영화의 수입을 제한하여 효과적으로 미국 영화의 패권주의와 시장침략을 저지함으로써 50년대의 민족 영화가 자주적인 창작 방향을 채택할 수 있도록 촉진하였다.
중국 관계자들의 소련 방문 후인 1956년에 영화제작 전반을 포괄하는 영화산업 시스템의 근간이 마련되었다. 동 시스템의 주요 효과는 민중의 단결과 교육, 영화산업의 조속한 발전, 영화 보급 속도 개선, 민족 영화의 자주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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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한 견해는 현재의 중국 영화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그 첫째는 중국 정부에 의한 영화 관리 체제가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영화 시장의 위축과 산업의 부재’라는 오늘날의 결과를 낳기 이전에는, 매우 유효한 제도로서 중국 영화계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으며 현재까지도 영화계 전반에 걸쳐 많은 여파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중국의 영화계는 지난 30년대, 상해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실주의 영화들의 부흥으로 한 차례의 전성기를 맞았다가, 50년대 초와 후반에 각기 또 한차례의 중국 영화 부흥기를 일으키게 된다. 즉, 50년대 초에 중국 영화계는 <다리(橋)>, <백모녀(白毛女)>, <중화여아(中華女兒)>와 같은 우수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면서 해외 배급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국내의 관중들을 영화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중화여아>, <백의전사>와 같은 작품들은 인도네시아에 수출되어 반년동안 2000여 차례에 걸쳐 상영되며 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바 있고, 1951년에는 소련의 30개 도시에서 ‘중국 영화 전람회’가 개최되어 <백모녀>, <강철전사> 등의 작품들이 각기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례가 있다. 물론 정치 투쟁의 와중에서 그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 영화계는 59년을 전후해서도 다시 한번 예술적인 발전기를 맞기도 했다. 한편, 오늘날 중국전영공사의 선전 책자에 언급된 전국 7만개에 이르는 상영 단위, 농촌의 5만여 개에 달하는 상영단이 있다는 언급은 바로 이러한 제도의 건설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의 영화 관리 체제가 오늘날의 결과를 낳기 전에는, 소련의 30개 도시에서 ‘중국 영화 전람회’가 개최되는 등, 50년대 초 중국 영화계의 <백모녀> <다리>같은 우수한 작품들은 해외 배급에 큰 성과를 내며 중국 영화계를 발전시켰으며 현재까지도 전국 7만개에 이르는 상영 단위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많은 여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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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시장경제체제에 단련된 영화 인력을 양성하지 못하였고 비대한 기구와 엄청난 숫자의 영화 종사자들만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계획경제체제 하의 중국에서는 건국 초기에 혁명을 다룬 영화들이 '승리의 감격에 도취'한 관객들을 끌어 모은 데다, 외국 영화 및 TV와의 특별한 경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흥행이 양호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매년 필요한 영화의 생산은 국가의 자금 계획에 맞추어 진행되었고 필요한 돈은 모두 국가가 공급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만들어진 영화는 통일적으로, 유일한 배급기구인 중국전영공사에게 투여된 제작비의 110%를 받고 넘겨준 후 그 나머지 이윤이 발생하면 이는 국가에 귀속되었다. 때문에 50년대와 60년대에 기록된 화려한 흥행의 기록들은 사실 영화 산업이 시장 경제 운용법칙에 따라 튼튼하게 발전했다기보다 당시의 특수한 정치 문화적 환경이 조성한,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겠다. 56년, 서유럽과 동유럽에 파견되어 반년간 영화 산업을 연구하고 돌아 온 중국의 영화계 인사들이 감독 중심의 창작을 하여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영화 제작과 배급의 비준권을 부분적으로 제편창에 주어야 한다는 견해 및 배급사와 제작사가 그 이윤을 나누는 새로운 방식을 제기하였다가 문화혁명 기간에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다. 객관적이고 현실에 입각한 모든 논의들은 정치투쟁의 구호 하에 삭아 들었으며, 이렇게 국가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영화의 관리 시스템이 시장과 흥행의 논리에 앞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목적에 맞추어 재편성된 이래, 중국에서는 그 후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술한 제도와 원칙이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유지된다.
중국은 계획경제체제하에 높은 흥행 실적을 얻었으나, 시장경제체제에 단련된 영화 인력을 양성하지 못하고 양적 확장만 이루었다. 5~60년대의 중국 영화 산업은 시장 경제 운용법칙이 아니라 국가 주도하의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의 목적에 맞추어 편성되어 왔다. 유럽에 파견되었던 영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식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국가 중심의 영화 관리 시스템은 그 후로도 30여년 간 계속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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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중국의 영화계는 이후 진행되는 정치적 경색과 함께 50년대의 활발한 창작의 시대를 마감하게 되고, 60년대와 70년대에 걸친 영화 산업은 그 후 침체의 길로 치닫게 된다. 문화 혁명 10년 동안의 중국 영화계를 떠올리면 '공백, 초토화, 동결...'과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중국 영화계는 황폐했다. 단순한 예가 되겠지만 66년부터 73년에 이르는 7년의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극영화도 만들지 않았으며, 73년도부터 재개된 영화 제작 활동으로 사인방(四人幇)이 물러나는 76년까지 76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그나마 모두 과거의 영화(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들을 리메이크 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를 맞이하며 사회 전체의 거대한 변화의 물결과 함께 영화계도 이제는 자기 변신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혁과 혁신의 과정은 지난한 토론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어쩌면 오늘날의 새로운 시도 역시, 훗날의 역사에는 이러한 시행착오의 연장으로서 기록될 지 모른다. 그러나 사안을 단순한 1-2년의 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현대사와 세계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점철되는 전 과정으로 파악하다보면, 산업을 건설하기 위한 중국 영화계의 변화는 시간의 문제일 뿐 기정사실이라는 결론이 명확해 질 것이다.
중국 영화계는 정치적 경색으로 50년대의 창작의 시대를 마감하고 ,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영화 산업은 침체의 길로 치달아 황폐해졌다. 80년대 영화계도 사회 전체의 거대한 변화의 물결과 함께 자기 변신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변혁과 혁신의 과정은 지난한 토론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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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에 중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를 들썩이게 한 이래, 아직까지도 중국의 영화는 국제적인 예술 영화 시장에서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고, 당시의 청년 작가들은 이미 국제적인 영화 감독들로 성장했다. 중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은 우선 예술영화 배급업자와 TV 방영물의 구매자를 배후에 두었던 국제적인 서구 영화제의 네트워크에 우선 포착이 되었는데, 국제 영화제를 통해 해외, 특히 구미에 소개되었던 중국의 새로운 영화들은 서구의 영화 이론가들로부터 과거의 중국 영화보다 우수하고, 국제적 배급구조 내의 다른 우수한 영화들보다 더욱 깊이 있고 상상력에 충만해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 동안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영화의 존재를 세계화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바로 이 시기, 이들 우수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작가군의 개인적 역량과 영화 교육의 힘도 큰 작용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던 것은 막 고삐에서 풀려난 사회가 지닐 수 있었던 자유로움과 활력이 영화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79년에 소집된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 인민회의’에서 사상을 해방시키고, 두뇌를 쓰며,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일치단결 하여 앞을 보라(解放思想, 開動腦筋,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는 방침이 제창되면서 비로소 영화인들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자유로움을 획득하고는 새로운 방법론과 고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 중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를 들썩이게 한 이래, 중국의 영화는 국제적인 예술 영화 시장에서 주목을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고 당시 청년 작가들은 국제적인 영화 감독들로 성장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중국 영화를 세계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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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역과 관련한 영상물의 경쟁력을 이야기함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국제화의 추세와 함께 세계 문화시장이 층화(Stratification)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층화는 보다 큰 지역을 포괄하는 ‘Global Culture’와 ‘Regional Culture’가 점점 더 강화되는 변화를 보인다. 물론 자본간 경쟁을 중심으로 한 맨 위층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다른 한편에선 ‘Glocalization'이라는 상반된 두 경향의 동시 출현으로 가장 아래층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이런 층화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경제력과 문화의 차이가 함께 작용하는 영상물 시장 규모의 차이 때문이다. 사유재와 공공재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미디어 생산물의 교역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미디어상품(영상물)은 기본적으로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 다른 사람이 소비한다고 해서 상품 자체가 줄어들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한 번 프로그램을 만들면 약소한 프린트 제작비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비용이 추가되지 않는 상품이다. 결국 일정 판매분부터는 판매액의 전부가 순이익이라는 경제논리가 작동한다. 따라서 영상산업에 있어서도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영상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것이 상품 자체의 코스트를 낮추는 방안이다.
국제교역에 있어 영상물의 경쟁력을 논할 때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세계문화시장의 층화이다. 층화는 경제력과 문화의 차이가 함께 작용하는 영상물 시장 규모의 차이에 기인한다. 미디어상품은 공공재이 성격이 강해 다른 사람이 소비했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없다. 결국 손익분기점 이후의 판매액 전부가 순이익이고 따라서 한사람이라도 더 소비해야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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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 국제적인 감독들의 예상외의 성공이 아닌, 당시 중국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이 역시 79년도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놀라운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한 해에 모두 65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이 영화들과 문화 혁명 기간에 상영이 금지되었던 옛 영화들이 함께 상영되면서, 중국 영화 관객 총수는 293억 1천만에 달하고 있다. 이 기록은 중국 영화사 이래의 최고기록이며 이에 따르면 중국인 한 명당 이 한 해 동안 28차례 영화를 관람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해빙기에 봇물이 터지듯이 일어난 일시적 현상으로 과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숫자들에 현혹되어 중국의 영화 시장이 다시 한번 부흥기에 접어든다는 오판을 해서는 안 된다. 80년도에 들어와 중국의 영화 관객 총 수는 해마다 10억 명씩 줄어들었고, 79년도에 1억1천만 위엔을 벌어들였던 전국의 흥행 수입도 80년도부터는 감소하기 시작하여, 대도시의 흥행수입은 83년에 이르는 4년의 기간 동안 1억 위엔이나 감소하였고 84년 1월의 흥행 수입은 다시 83년 12월에 비하여 다시 1천3백만 위엔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외국에서의 중국 영화들에 대한 호평과는 상관없이 중국 관객들은 점차 영화와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중국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79년도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놀라운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은 해빙기에 봇물이 터지듯이 일어난 일시적 현상으로 다시 부흥기에 진입한다는 것은 오판이다. 외국에서의 중국 영화들에 대한 호평이있지만, 독립적으로 중국 관객들은 점차 영화와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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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와중에도 중국 영화계는 전국적으로 몰아친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큰 물결 앞에서 80년대 들어 대략 세 단계에 걸친 개혁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80년대 초에 이루어진다. 79년 국무원에서는 문화부와 재정부에서 올라온 「영화 배급과 상영의 시스템에 관한 보고서(關於改革電影發行放映管理體制的淸示報告)」에 의거하여 문화 혁명으로 파괴된 이전의 영화 시스템을 회복하고, 배급 수입의 배분에 관한 비율을 조정하여, 영화의 배급과 상영에 필요한 설비 기금을 늘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각 단위의 영화 배급사는 자신이 배급을 위해 지출한 비용을 제한 이윤 중에서 20%를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 80%는 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위한 설비 보수와 발전 기금 명목으로 남겨둘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영화 상영 단위에는 유리한 반면 영화제편창에 돌아가는 몫은 너무 적다는 불만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전영공사는 제편창에서 만들어진 어떤 영화든지 일률적으로 90만원의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였는데 이들이 취한 이윤과 각 제편창의 소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1980년 7월 당시 북경영화제편창의 창장(廠長)인 우앙 양쯔(汪洋直)가 직접 중공중앙서기처(中共中央書記處)에 중국의 영화 시스템에 관한 개혁의 필요성을 서신으로 제출하면서 80년대 영화계 개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여기서는 영화 제작업을 하는 각 영화 제편창의 입장이 반영되어 현 영화 사업의 분포와 중점 투자 및 배급 시스템의 개혁과 영화제편창에 자주적인 권한을 확대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중국 영화계는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 앞에서, 80년대 들어 삼단계에 걸친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첫 단계는 80년대 초로, 79년 국무원의 결정( 문화혁명으로 파괴된 영화 시스템 회복, 영화배급과 상영에 필요한 설비기금 증진)과 1980년 북경영화제편창의 우앙 양쯔(汪洋直)의 중국영화 시스템의 개혁 필요성(각 영화 제편창의 입장이 반영) 언급으로 80년대 영화계 개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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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8월, 중앙 선전부에서는 영화 시스템의 개혁에 관한 좌담회를 여는 등의 작업을 통하여 각계의 의견을 구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부의 1588호 문건으로 중국전영공사는 배급에 필요한 영화의 구매에 있어 프린트의 숫자에 따라 정해진 가격을 각 제편창에 그 비용으로 지불하라는 규정이 정해졌다. 사실 프린트의 숫자에 의거한 계산 방식은 90만 위엔에 사들이던 영화의 가격을 99만 위엔 정도로 상향 조정 한 것에 불과했다. 통계에 의거해 일률적으로 99-120개 정도의 프린트를 만들도록 규정되던 때였기 때문에 정해진 바대로 개당 9000 위엔으로 사들이면 90만 위엔에서 108만 위엔 정도의 가격이 된다. 이를 평균적으로 계산해보면 원래의 90만 위엔에서 99만 위엔으로 약 10만 위엔 정도가 오르게 된 것뿐이며, 이러한 방식 역시 영화 제작과 배급 단위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보다는 진일보한 개혁 작업이 84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지니, 이는 두 번째 단계로 중국의 영화 산업 연구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984년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79년 이래 진행한 농촌의 개혁 작업에 이어 전면적으로 도시의 경제 체제를 개혁하라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중국의 전 사회는 더욱 변혁의 길로 매진하게 되며, 각 기업들은 폭넓은 자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확대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84년 5월 문화부에서는 중국전영총공사의 체제 개혁 방안을 정식으로 제출한다. 1985년 1월 전영국(電影局)은 광주(廣州)에서 중국 영화의 체제 개혁에 관한 좌담회를 열었고 여기서 정부와 기업이 분리되어야 하며 영화 제작업과 배급에 관여된 기업들의 자주권을 확대해야 된다는 의견들이 수렴되었다.
문화부의 1588호 문건에 따른 '프린트의 숫자에 의거한 계산 방식'은 실질적으로 영화 제작과 배급 단위의 '시장경제로의 전환'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 제작업과 배급에 관련한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도시 경제 체제 개혁이 결정된 1984년 전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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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계속 이어진다. 1985년에 들어 중국 정부는 특정한 지역의 영화 관람료를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인정함으로써 급격한 관객 감소추세를 저지하고자 했다. 50년대 이후 중국의 영화 관람료는 0.20 위엔에서 0.35 위엔으로 35년간 큰 변동이 없었는데 이로써 시장의 원칙에 따른 경쟁의 논리에 입각한 초보적 단계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당시의 변화된 문화 환경에서 영화가 이전에 비해 관객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80년대에 들어와 매해 감소하던 관객 수와 흥행 수입은 다시 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일 년 동안 또다시 총 관객 수에서 52억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에 이르러 어떤 영화관들은 상영관을 가라오케나 커피숍으로 바꾸어 운영할 정도로의 상황으로 계속 이어진다. 85년 정도에는 영화로부터 이탈하는 관객들의 심리 행태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는데 다가오게 될 영화 산업 전반의 침체를 미리 예상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하다. 이들 연구들은 이미 중국의 영화는 여러 매체와 경쟁하며 변화하는 도시인들의 오락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뒤쳐지고 있다는 조심스런 결론을 내고 그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개혁과 개방의 속도가 가속화 되고 있는 중국에서 시대의 논리와 시장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으로, 영화업계가 그 자주권을 주장했다는 의의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 역시 특별한 계획과 대책을 가지고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중국의 영화 제편창들은 가치관의 변화나 시장 상황 등에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제도 역시 이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 상황은 이후로도 더욱 심화된다.
80년대 관객 수와 흥행 수입은 지속 감소하였으며 정부는 특정 지역의 영화관람료를 조정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관객 감소를 막고자 하였다. 영화에서 이탈하는 관객들을 분석한 연구들은 영화는 다른 매체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이러한 변화는 개방이 가속화되던 중국의 시장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이후로도 영화산업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상황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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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에 각 영화 제편창에서는 자주적 경영권의 확대와 생산량의 증가라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한번 독자적으로 각 지방의 상영단위에 영화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 하면서 나름대로 이에 대한 기초적 시장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당시의 이해관계에 얽힌 반대와 중국의 영화 시장 체계가 시장 경제에 합당하도록 정비되어있지 않은 조건의 미비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게다가 지방 단위의 상영 단위에서 주장한 독자적 영화 구매와 결산을 통한 자주적 경영권에 관한 요구도 좌절되었다는 데서 구체제와 개혁의지 간의 팽팽한 긴장과 모순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주장과 논의는 87년부터 영화 제편창과 중국전영공사 간에 거래되는 영화 판매의 대금을 한정된 범위의 프린트 숫자로 제한하고 있는 신 규정의 제한선을 폐지하고, 제작된 영화의 판매를 중국전영공사 및 다른 배급사에 위임하여 한번에 모든 판권을 팔던가, 아니면 그 흥행 수입에 따라 비율에 입각해 이윤을 배분하는 방법 등을 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많은 혼란만을 초래했고 독자적으로 각 지방의 배급, 상영에 관련된 단위와 연결고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던 각 제편창으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결국 흥행 수입을 집계하는 방법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서로의 불만과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89년에는 다시 프린트의 숫자에 의거하여 개당 10,500원 정도의 가격에 결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93년에 들어 다시 영화계의 개혁과 개방에 관한 논의들이 중심적으로 부각되며 새로운 영화 관리의 체계가 수립되는데, 87년의 제편창과 각 성급 배급사들이 주장한 대부분의 요구가 수용된 상황에서도 이윤을 배분하는 제작사와 배급사 및 영화관 측과의 이해가 달라, 제작사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일일이 극장 앞에서 관객의 숫자를 세는 촌극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87년에 겪었을 혼란과 막연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하겠다.
87년 각 영화 제편창에서 자주적 경영권의 확대, 생산량 증가 이유로 독자적으로 각 지방 상영단위에 영화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며 기초적 시장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시 이해관계에 얽힌 반대와 중국의 영화 시장 체계가 시장 경제에 합당하도록 정비되어 있지 않은 조건 미비로 실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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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편에서도 변화와 이에 따른 갈등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86년 들어 영화국은 문화부에서 광전부(현재의 國家廣電總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산재한 영화 관련 행정 조직을 단일화된 관리체계 안에 통합함으로써 다양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몇몇 성(省)산하의 시, 현 등에 산재한 영화의 배급과 상영 단위에서는 여전히 지방 문화부의 관리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어 그 상급기관과의 통일된 연락망과 사안의 처리에 혼선과 중복을 가져오는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 2000년 현재까지도 해소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예를 들어 지금의 국가광전총국이 그 관리의 최상급 단위로 존재하는 영화의 경우, 지방에 따라 성광전국(省廣電局)에서 관리를 맡기도 하고 혹은 성문화청(省文化廳)에서 관리를 맡는 등 매 지방의 실정에 따라 다르다. 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사항은 일괄적으로 성광전국에서 처리하고 있지만, 영화의 배급을 담당하는 전영집단총공사 유관 업무를 성광전국 혹은 성문화청에서 처리하게 되며 대학에서 영화를 상영할 경우는 성문화청의 관리에 따르게 되어있는 것이다.
86년 들어 영화국은 문화부에서 광전부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관리체계 안에 통합함으로써 다양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사항은 성광전국에서 처리, 영화의 배급은 성광전국 혹은 성문화청에서 처리, 대학에서 영화를 상영할 경우는 성문화청의 관리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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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장춘시에 위치한 길림성 영화배급공사(吉林省 電影發行公司)의 경우는 성문화청의 관리를 받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30년 가까이 영화 배급업에 종사한 이 회사의 사장, 런 쯔푸(任智富)는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한다. “차라리 예전에 문화부가 다 관리하던 때가 일하기는 더 쉬웠다. 지금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문화청도 가야되고 광전국도 가야되니까 불편해졌고, 모든 단위가 위계적 질서와 철저한 층차에 입각해서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아야할 중국의 특수상황에서 본다면, 행정적 일 처리도 더욱 복잡하게 얽혀들어 모든 것이 각자 따로따로이니, 나도 종잡을 수가 없을 때가 많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중국 영화에 있어 지방에서의 배급이 제작사와는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고 (제작)→(중국전영공사)→(성급전영공사)→(시급전영공사)혹은 (현급상영공사)→상영관에 이르는 단순한 시스템이었는데, 93년부터는 새로운 체계에 입각해 배급방식이 다양한 경로로 나뉘었으며 이러한 개혁과 일련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본이 극장업에 진출하도록 허용된 것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과 같은 성급 단위의 배급사들은 퇴출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길림성 영화배급공사는 성문화청의 관리를 받는데 이 회사 사장은 예전처럼 문화부가 다 관리하던 때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과거에 비해 행정적으로 불편한 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중국 영화는 지방에서의 배급 시스템이 단순했는데, 지금은 체계가 너무 복잡해져서 성급단위의 배급사들은 퇴출 위기까지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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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계에 있어 새로운 개혁의 핵심은 그 배급의 경로를 다양화하여 국산 영화나 외국 영화의 독점적 배급권을 가지고 있던 중국전영공사 외에도 각 제편창이 직접, 지방의 성급 배급상영공사 혹은 다른 상영 단위에 배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그 흥행 수입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두 가지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개혁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중국 사회 전체가 그 방향을 개방과 개혁의 가속화에 맞추고 있다는 데서 더욱 힘을 얻어 추진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92년 떵 샤오핑이 남방을 순시하며 언급한 바도 있거니와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라는 당면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또한 1979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영화업계의 불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이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여태까지 80년대를 통해 계속 적응에 실패했듯이 90년대 내내 역시 많은 혼란을 야기했고, 중국 관객들이 중국 국산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심화되는 가운데 영화 제작의 감소로 이어지는 추세를 보여왔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끊임없는 법령의 수정을 통해 세부 수칙을 보완, 정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외국영화의 쿼터를 20여 편까지 늘린 것과 함께, 외국 자본의 중국 내, 극장업을 허용하는 조치까지 취함으로써 지난한 과정이나마 개혁과 개방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영화계에 있어 새로운 변화는 기존 배급을 독점하던 중국전영공사 외에 각 제편창이 지방에 직접 영화를 배급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그 흥행 수입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최근 외국영화의 쿼터를 20여 편까지 늘렸으며, 조금씩이나마 개혁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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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중국 영화계에 이러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을 무렵인 92년과 93년 사이에 중국의 북경전영학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시의 영화 전공을 하는 다른 중국인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는 93년 1월 5일 광전부에서 발표한 제3호 문건 즉, 「현재의 영화업계시스템의 개혁 심화에 관한 간략한 의견(關於當前深化電影行業機制改革的若干意見)」이라는 정책 방안의 파장으로 심각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TV에서조차 연일 영화업계의 개혁토론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희망과 두려움이 겹쳐있던 당시의 그 격앙된 목소리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문건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상기한 제작업과 배급, 극장업의 경계를 허무는 것 외에도 각 지방 정부의 지침에 따르되, 극장이 자율적으로 관람료를 책정하게 허용함으로써 그 상․하한선을 모두 철폐하였으므로 이러한 전면적 개혁의 선포와 실행이 중국 영화업계에 전대미문의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제3호 문건은 78년 이후, 반복적으로 거듭되는 영화업계의 개혁에 관한 논의를 더 한층 발전시키고 개혁의 의지를 명확히 한 최초의 괄목할 만한 결정으로 생각된다.
중국 영화계에 개혁의 바람이 불던 시기에 광전부에서 제3호 문건 즉, 「현재의 영화업계시스템의 개혁 심화에 관한 간략한 의견(關於當前深化電影行業機制改革的若干意見)」은 전면적 개혁의 선포와 실행으로 영화업계 개혁에 관한 논의를 더 한층 발전시킨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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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지는 곧이어 1993년 5월에 「영화업계 시스템 개혁방안 실시세칙(電影行業機制改革方案實施細則)」과 「중국영화 배급 상영 수출 수입사의 매매에 관한 임시법(中國電影發行放映輸出輸入公司影片購銷暫行辦法)」으로 이어져 중국 영화 전 업계를 새로운 구도로 조직하는 대수술의 시작을 알린다. 이 세칙은 중국 영화의 전국 배급을 중국전영공사로 일원화하고 있는 과거의 제도를 다양한 통로로 수정하면서 90년도에 집계된 중국전영공사의 배급 수입을 기준으로 하여 영화 매매의 참고 가격을 제시하였지만 극장업계와 제작업계 양편으로부터 모두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삭제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개혁 조치들은 96년 6월19일, 국무원령(國務院令)으로 현행 중국 영화법인 「전영관리조례(電影管理條例)」가 발표되면서 통합된 법령의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그 동안은 정무원이나 문화부에서 제정, 공포한 잠정적 조례를 통해 시행되고 있었던 영화법이 최초로 정리, 통합되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93년 5월에 「영화업계 시스템 개혁방안 실시세칙」과 「중국영화 배급 상영 수출 수입사의 매매에 관한 임시법」으로 중국 영화 전 업계를 새로운 구도로 조직한다. 개혁 조치들은 최초로 정리, 통합되어 국무원령으로 현행 중국 영화법「전영관리조례」가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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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정책적 개입이 없는 자유교역은 교역상품에 대한 단일한 국제가격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사유재’ 상품 소비의 배타적 성격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 간에 철강가격이 다를 경우,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국가의 소비자는 자국의 철강가격이 떨어지거나, 저렴한 국가의 가격이 올라서 수출에 따르는 이윤이 생기지 않을 때까지, 가격이 낮은 국가로부터의 수입을 늘릴 것이다. 하지만 영화․텔레비젼 프로그램과 같은 영상산업 생산물(영상물)의 무역에서는 이와는 다른 원리가 작동한다. 바로 ‘공공재’이기 때문이고, 근본적으로는 한계생산비를 영(제로)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 복제성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1억 달러(1,200억 원)를 들인 고가의 영화나 수억 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나 프린트를 뜨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2백만 원에 못 미치는 비슷한 수준이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로 과연 몇 편의 프린트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즉 시장규모를 얼마나 키울 수 있느냐에 따라 고매출의 전제조건인 제작비 규모를 조절할 수 있다. 한편 영상 상품은 다른 상품의 수요 및 영향력을 조작할 수 있어 거대한 파생시장을 가지고 있다. 유명 스타나 농구선수의 경우 의복, 로고, 신발 등 수많은 파생상품을 창출해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종종 정치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등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상산업 생산물은 무역에서 공공재의 원리와 복제성의 특성으로 고가 영화와 저예산 영화를 프린트 뜨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엇비슷한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영화로 몇 편의 프린트를 만들어 얼마나 시장규모를 키울 수 있느냐에 따라 고매출의 전제조건인 제작비 규모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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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90년대 중 후반에 걸쳐, 나는 중국의 영화인들과 만나면 상황을 묻곤 하였는데 그 당시에도 중국 영화인들에게 눈앞의 상황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의 막막함은 94년 문회보(文滙報)가 주최한 “국산 영화를 위한 좌담회” 중에서 ‘팔을 잘리운 상태에서 생존을 도모한다’라는 극단적인 위기의식으로까지 표현되기에 이른다. ‘이제 중국 영화에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고까지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다들 지쳐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북경 영화제편창의 창장이면서 중국전영집단공사의 부사장인, 한 산핑(韓三平)은 94년 막 창장의 자리에 취임하여 적자로 허덕이는 북경영화제편창의 살림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는 북경영화제작소의 우수한 창작 전통과 전문화된 인력의 필요성을 확신하면서도, ‘시장 경제체제 하에서 이제는 국가의 지원 없이 제편창 스스로가 자신의 밥그릇에 담을 쌀을 벌어 와야 하지만 많은 직원을 먹여 살릴 길이 지금은 뾰족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걱정을 하기도 하였다.
90년대 중 후반에 중국의 영화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북경영화제작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나 전문화된 인력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시장 경제체제 하에서 국가의 지원 없이 생존해나갈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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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처럼 영화업에 대한 전면적 개혁으로 인해, 진행되던 영화제편창의 독립채산제와 영화업에 대한 투자개방정책은 기존의 안일했던 영화업 종사자들과 영화 관련 행정가들을 긴장시키면서 이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펼치도록 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협상의 권한과 이윤을 각 영화제작소에 돌림으로써 중국 영화의 제작의욕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들은 국산 영화의 제작편수와 관객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도 활발한 외국 자본의 유치 및 투자비를 많이 투자하는 대작 영화의 제작 붐으로 이어진다. 중국 영화에 있어서의 외국 자본과의 관계는 제2장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투자 규모의 확대라는 부분만을 설명하겠다.
영화산업에서 투자개방정책으로 협상 권한 및 이익은 각 영화제작소의 몫으로 하게 하며, 외국 자본 유치를 허용하므로써 투자규모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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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중국 영화계의 불황 속에서도 95년 한 해를 통 털어 한화 10억에서 30억(당시 환율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지금 환산하면 약 14억 원에서 4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정도의 예산이 투자된 작품이 여덟 편 내지 아홉 편정도 제작된다. 이러한 액수는 당시 1억 2천만 원에서 2억 원 미만으로 추산되는 평균 제작비와 중국 내의 값싼 인건비 및 기자재 대여료를 생각하면 대단한 규모의 투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중국 국내 시장의 규모에서 관객이 잘 든 영화의 경우, 거둬들이는 극장 수입의 최대 이윤은 한화 13억 원 정도에 상당하기에 이러한 투자는 위험부담을 안고 시작하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대양영업공사(大洋影業公司)에서 4천만 위엔(현재 환율 기준, 56억 원)이 투자된 <진송(秦頌)>, 중국상해인민정부에서 140억원을 출자하여 만든 <아편전쟁>으로 한국에도 수입된 바 있다. 영화업계의 고질적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중국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해외의 자본(특히 홍콩)과 중국 내의 다른 산업계의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대작 영화들을 양산해 내고 있었는데, 이는 85년 이후 국제 영화제를 통해 보인 중국 영화의 놀라운 성과 및 중국이라는 잠재적 시장의 가능성에 매료된 투자자들이 앞서 설명한대로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는 중국 영화 제작업계와 만나면서 이루어진 합작품으로, 중국의 특수한 정치적 환경과 거대 영화 산업의 꿈이 교묘하게 버무려져 있는 당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불황 속에서도 95년 한 해에만 한화 10억에서 30억 정도가 투자된 작품이 8~9편 제작된다. 이는 중국이라는 시장의 가능성에 매료된 투자자들과 불황을 돌파하고자 고심하던 중국 영화 제작업계가 만나 이루어진 합작품으로, 중국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거대 영화 산업의 꿈이 교묘하게 버무러진 당시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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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시장에 대한 할리우드의 관심은 90년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표명되었다.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미국의 전략적 산업, 영화가 유독 이 큰 시장에서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에 미국은 일찍이 주목하였던 것 같다. 올해 클린턴 미합중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도 중국 영화시장의 개방, 즉 쿼터제의 철폐 또는 확대가 중요한 사안이 될 만큼 이 문제는 양 대국이 민감하게 대결하는 쟁점사항이기도 하다. 이미 93년부터 격년제로 열리고 있는 중국 최초의 국제 필름 페스티벌인 상해 영화제의 경우, 95년에 미국은 상공부 장관을 필두로 8개 메이저 회사의 대표 및 직배사 인사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약 200명 규모의 파견단이 중국의 영화계 인사들과 두루 접촉을 하고 돌아갔으며, 지금 현재는 이러한 외부적 압력과 흥행이라는 시장 내부의 논리에 밀려 점차 그 개방의 폭을 확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향과 실정에 대한 중국 영화계의 두려움과 반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더욱이 WTO 가입 이후로 중국은 더욱 거센 개방의 물결을 타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가운데, 패권적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국의 문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러한 쿼터를 풀고 있지 않지만, 향후의 사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다만 그간의 90년대 내내 10편 미만으로 묶여있었던 해외 영화의 수입이 95년 들어 10편까지 확대되고 있으며, 이러한 숫자는 현재 20편 내외로 더욱 늘어난 상태인데, 이 숫자가 더욱 늘어나리라는 데는 중국 영화계 인사의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중국 영화의 최대 불황기였다는 90년대를 통해 증명된, 미국 영화의 위력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른 국산 영화에 비한다면 괄목할 만한 것이다.
할리우드는 일찍이 중국 영화 시장의 폐쇄적이고 보호주의적인 특성에 주목하였다. 영화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만, 중국에서 해외 영화 수입 편수가 증가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결국 개방의 물결을 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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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90년 대 초반, 중국에 자국 영화를 배급하려는 해외의 영화 사업가들과 중국 영화 관련 행정부 간의 가장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외화의 판권을 둘러싼 매매 형식의 문제였다. 영화업계의 개혁에 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92년, 중국 정부는 12월 10일 자의 광전부 영화 사업 관리국의 명의로 「수입 영화의 진일보한 관리 작업에 관한 통지(關於進一步加强進口影片管理工作的通知)」를 발표하면서 제1항으로 중국전영공사 외에는 다른 어떤 단위나 개인도 홍콩과 대만, 마카오를 포함한 외국의 영화를 수입하거나 중국 영화를 수출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이러한 결정은 곧 현행 영화법인 「전영관리조례」 제4장을 통해서도 나타나듯이, 광전부가 허가한 영화수입경영단위라는 이름으로 외화의 수입 자격에 제한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93년에는 제3호 문건의 정신에 의거하여 「중국전영공사의 영화 매매에 관한 임시법(中國電影發行放映輸出輸入公司影片購銷暫行辦法)」을 통해 외화(홍콩, 대만, 마카오를 포함)는 중국 전영에서 중국 내 극장 상영에 관한 판권을 모두 사들인다고 명시하고 이에 적합한 가격까지 제시하면서 외화 판매자들의 원성을 샀다. 즉, 외화를 그 질에 따라 갑, 을, 병의 3가지 등급으로 나누고, 중국의 지역을 문화 소비 수준에 따라 다시 일류, 이류, 삼류...등의 5등급으로 나누어, 프린트 개당 해당 영화는 해당 지역에서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 라는 규정을 예시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물론 프린트 개수의 상하선까지 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90년대 초반, 외화 판권 문제는 중국 영화 관련 행정부와 해외 영화 사업가 간의 민감한 사안이었다. 92년 중국 정부는 중국전영공사 외에는 홍콩, 대만, 마카오를 포함한 외국의 영화를 수입하거나 중국 영화를 수출할 수 없음을, 93년에는 중국 전영이 외화(홍콩, 대만, 마카오를 포함)의 국내 판권을 독점할 것임을 발표한다. 심지어는 외화의 가격까지 일방적으로 제시하면서 외화 판매자들의 원성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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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과 배급업자의 사정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고는 하였지만, 여기에도 프린트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명확한 한계가 있었으며, 이러한 규정들이 할리우드의 흥행 대작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중국에 자유롭게 수출을 될 수 없도록 쿼터제에 묶여있다는 것과 중국전영공사를 통한 일방적 단매 형식의 판매에 당연히 불만을 토로하였다. 할리우드의 의견은 중국에 수입된 흥행 대작들은 중국 내에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중국 내 상영권을 중국 전영에게 넘긴다는 것이며 이러한 불만은 결국 해외의 영화사가 중국전영공사에 의해 배급을 하되, 그 이윤을 나누는 방식도 가능하도록 점차 조정되어졌다. 이러한 결정은 95년 이후, 차츰 일반화 되었는데 이 당시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열정적인 관심과 노력을 투여 한 해외 제작사는 다름 아닌 홍콩의 제작사였다. 94년, 중국 국내의 순순한 기술과 인력만으로 <중 러 열차 대작전(中俄列車大劫案)>을 제작하며 중국의 국산 영화로 인정을 받은 마이 땅지에(麥當傑) 감독은 이 영화의 배급을 위해 중국 전역을 2년 간 직접 돌며, 중국 현지의 상황을 파악하였는데, 중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중국의 30개 성에는 각 성마다 최소한 수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각 성의 극장 수입이 140억 원(현재 환율 적용) 정도에 이르는 흥행작들이 나오기만 한다면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을 때 1400억 원 정도에 이른다는 계산을 뽑고, 만약 중국의 국내 흥행에 대한 배분제로의 전환이 확실히 가능해 지기만 한다면 중국 영화는 대규모의 투자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언급하였다.
쿼터제에 묶여 중국전영공사를 통한 일방적인 단매 형식의 판매에 불만이었던 할리우드의 의견은 ,중국에 수입된 흥행대작들은 많은 수입을 올리면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전영공사에 넘기는 것이었는데, 95년 홍콩제작사의 노력으로 배분에 의한 이익이 가능게 되었으며, 94년 중국 국내기술과 인력만으로 제작된 '중러 열차 대작전'의 상영과 배분으로 유추하여보니 국내흥행의 배분제로의 전환이 가능해 진다면 대규모투자도 가능하다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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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에서 97년에 이르는 시간은 바로 93년 이후의 개혁이 심화되는 해라고 파악해도 좋을 것이다. 96년 상해의 극장 흥행은 전해 대비 약 20-30%의 성장률을 기록하였고 북경시의 경우에도 이 한해에 총1억 위엔(140억 원 상당)의 극장 수입을 올렸으며, 절강성의 경우에는 전년도 대비 10% 상승하면서 2억 위엔(280억 원 상당)의 극장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전국에 배급되었던 174편의 영화 중 57편이 모두 외화였고(이중 15편은 홍콩 영화) 이들 외화의 흥행이 전체 흥행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던 것이다. 국산 영화를 배급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정부의 지침이 내려졌던 장사(長沙) 회의 이후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하는 96년의 상황에서도, 전체 상영 일자의 1/3을 넘을 수 없으며 국산 영화에 비해 적은 숫자가 상영되었던 외국 영화의 전체 흥행 성적이, 전체의 47.69%를 차지하면서 중국 영화를 압박하고 있다. 특히 북경과 상해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전체 흥행 수입의 70-80%를 점유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극장의 흥행 수입 상승률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96년에서 97년은 93년 이후 개혁이 심화되는 해인데, 전국에 배급되었던 174편의 영화 중 57편이 외화였고 외화의 흥행이 전체 흥행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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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중국 영화 시장의 전체적 침체와 외화의 흥행 호조라는 상황 하에서, 프린트 숫자에 의해 일정한 금액으로 매매되던 종래의 영화 구매 방식은 중국 시장의 개방에 대한 해외 자본의 요구가 중국 내부의 개혁 작업과 맞물려 다시 수정되면서 현재는 제작사와 배급사 및 극장이 흥행 수입을 기준으로 이를 나누어 가지는 형식의 이윤 배분 즉 분장제(分帳制)가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런 쯔푸 사장에 따르면 판권료는 대략 33% 정도를 차지하고, 배급사가 17-27%, 극장에 40-50% 정도의 배당이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 신빙성 여부에 대하여는 확인하지 못하였고(언급한 사람이 해당 지역의 관련 정보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는데 폐쇄되어 있는 정보를 과연 누구에게 다시 확인하겠는가?), 아무튼, 상해 쪽에서는 제작사가 30%, 혹은 그 이상을 받는다고 전하고 있어 지역과 계약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인 수준은 이와 상응한다고 보여진다.
중국 영화 시장의 침체와 외화 흥행 호조라는 상황 아래 일정한 금액으로 매매되던 종래의 영화 구매 방식이 수정되었다. 현재는 제작사와 배급사 및 극장이 흥행 수입을 나누는 형식 이윤 배분 즉 분장제가 일반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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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개방의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도 중국은 강렬한 국산 영화 보호 정책과 외국 영화의 수입에 있어서의 다양한 형식의 규제를 은연 중에 시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다음은 현재, 광전국 국장으로 있는 류우 지엔쭝(劉建中)이 96년 5월에 발표한 글의 한 단락이다. “외화의 수입과 중국전영공사의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하는 것인데 중앙 지도자 동지의 담화 및 각 부 지도자들의 요구에 의거하여 영화를 수입 시에는 반드시 그 표준을 명확히 하고 높은 수준의 예술성과 기술적 수준을 보여주는 우수한 영화를 들여오는 동시에, 외화의 전체적 구조, 소재, 국적 등의 선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발언이 류우 지엔 쭝의 글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고 하겠다. 그는 당시 광전부 시절의 영화국 국장을 담당한 사람이기도 한데, 중국의 현, 영화 행정 분야의 수장이면서 영화 제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수입에 있어서도 상업적인 목적의 이익에 못지않게 중국 정치 지도자의 의견을 알아서 잘 파악하라는 것과 함께, 특정한 국가(미국)의 영화만 편중되게 수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용은 쿼터제로 제한되어있는 중국의 영화시장이나마 수입의 기회에 있어서는 한국 영화가 미국 영화와 동등한 기회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중국에서도 개방의 추세가 확산되고는 있지만 광전국 국장으로 있는 류우 지엔쭝이 96년 5월 발표했던 글로 유추해보면 국산영화의 보호와 외국영화 수입에 있어서의 규제를 은근히 시사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으며, 어느 한 국가의 영화만 편향되게 수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대한민국도 미국과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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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요인, 또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크게 보아 언어 및 문화시장의 크기, 소비자의 구매력, 그리고 창구(windowing) 등이 그것이다. 영상상품의 소비는 언어 및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는 인구수가 중요한 변수이다. 미디어산업은 명확하게 구분된 언어 및 문화시장 속에서 움직인다. 같은 조건이라면 소비자(관객)은 다른 언어보다는 모국어로 된 생산물을 선호한다. 언어․스타일․가치․행동양식 등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국 영상물과 수입 영상물의 규모와 완성도가 비슷할 경우 수입 영상물의 소구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이라는 용어다. 한국어 프로그램의 시장은 한국인, 영어 프로그램의 시장은 영어권이 중요한 시장이다. 자국어로 된 영상물에 대한 소비자의 자연스러운 선호는 일종의 무역장벽이 될 것이다. 한편 언어시장이 큰 나라에서는 경쟁적으로 많은 사업자들이 영상산업에 뛰어들게 마련이다. 이는 다시 더욱 많은 예산투입, 더욱 질 좋은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상승효과를 갖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언어보다 문화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는 브라질 방송 프로그램이 스페인어가 국어인 인근 나라들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문화가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디어산업은 명확하게 구분된 언어 및 문화시장 속에서 움직인다. 같은 조건이라면 소비자는 모국어로 된 것을 선호한다. 즉 문화적 할인이 발생한다. 때에 따라서는 언어보다 문화가 중요하다. 예로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는 브라질 방송 프로그램이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주변국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은 문화가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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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제(分帳制, 상호 계약에 의한 비율에 따른 전체 이윤의 분배)의 실시와 함께, 중국 영화계 개혁의 흐름에 있어 꼭 짚어야 할 한 가지 문제는 중국 내에서의 극장 사업이다. 중국의 영화 시장이 시장 경제의 운용 법칙에 따른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정했으면서도 영화의 유통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전국적으로 이를 뒷받침할만한 배급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있지 않으며 이를 통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극장 네트워크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중국전영공사 외에는 전국 배급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제작 및 배급사가 없었을 뿐더러 전국적 극장 사업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관리로 흥행을 창출하는 극장은 건설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업은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요하지만 중국의 독특한 풍토인 정치와 영화의 관계, 또한 지역적인 방대함 등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타 산업계의 자본과 외자를 유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장 네트워크를 한문으로는 원선(院線)이라고 표기하는데, 원선에 대한 본격적인 구상은 이미 96년을 전후하여 중국 영화계 내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며 급격한 속도로 건설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 영화시장에 시장경제를 도입했음에도 영화 유통이 잘 되지 않은 것은 전국적인 배급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규모의 투자가 요구되지만 중국의 정치와 영화의 관계와 지역의 방대함으로 어려움이 있었는데 96년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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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하베스트는 97년 10월, 4개의 스크린을 가진 영화관 가화(嘉禾: 골든 하베스트의 중국식 이름)를 상해에 설립하였으며 98년에는 2번째 영화관, 가화우의(嘉華友誼, 3개의 스크린)를 호남성의 장사(長沙)에 설립하였다. 나는 마침 부산 영화제의 PPP에 참석한 이 회사의 중국 사업담당 매니저, 코라 임(Cora Yim)과 장시간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골든 하베스트에서 97년 극장 건설을 위해 중국에 파견된 이래, 지금까지 중국의 상해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녀에 따르면 골든 하베스트는 92년 이래 북경에 상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그 동안 중국의 영화 산업의 변화 추이를 지켜보았고 최근 북경에도 제3의 영화관을 지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골든 하베스트는 중국 내 제작에서부터 자사의 영화를 배급하고 상영하는 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며, 기존의 영화관들은 15년 대여의 형식으로 빌린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전체 흥행 수입의 50%를 가져가기로 했으나 영화발전기금으로 5%의 세금을 내고 나면 대략 42% 정도의 수입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녀는 중국의 시장이 지금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나의 의견에 견해를 같이하면서 중국의 개방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라지고 있으며 2년 내에 영화 산업계에 큰 변화가 일 것 같다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외화의 수입 확대와 함께 극장 사업 부분에 외국 자본이 들어올 것 같다는 것이다.
골든 하베스트는 97년 영화관 가화를 상해에, 98년에는 영화관 가화우의를 호남성의 장사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 중국 사업담당 매니저, 코라 임은 골든 하베스트가 북경에 세 번째 영화관 설립 계획을 추진하고 중국 내 제작과 자사 영화 배급 및 상영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이라 했다. 외화의 수입 확대와 극장 사업에 외국 자본의 유입은 중국 영화 산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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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국의 인구가 14억에 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 시장의 전체적인 규모는 대략 20억 위엔(2800억 원)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97년의 한국 영화의 극장 수입이 2000억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닐뿐더러 그 수입구조로 볼 때, 극장 흥행이 전체 수입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시장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사실 중국의 영화시장은 현재 그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다만 중국의 규정은 법으로 외화의 상영일수를 1/3로 제한하고 있는데 코라 임에 의하면 따로 조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정에 따라 약간씩은 변칙운영도 가능하고 WTO 가입 이후에는 장기적으로 규제가 완화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상해만 하더라도 이미 중국 국내의 자본이 설립한 멀티 플랙스 극장 상해영성(上海影城)이 다른 낙후된 시설의 극장에 비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다, UA(홍콩)에서 1년에 500만 위엔의 대여료를 지불하고 빌린 극장 환예(寰藝)도 있으며 이제는 미국의 자본, 즉 AMC나 코닥 등이 전국적인 배급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손대려는 조짐이 보인다며, 이미 그 준비가 시작된 것 같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나, 오히려 중국의 영화 시장건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해적판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가격 경쟁 때문이 아니라, 그 속도가 문제이다. 영화가 심의를 거쳐 수입되는 시간보다 VCD로 들어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렇게 영화가 널리 유통될수록 막상 극장에 오는 사람은 줄어든다. 둘째, 중국의 영화 정책이 불안정하다. 예를 들어 지앙 원(姜文) 감독의 <귀신이 왔다(여기서 귀신은 일본군을 뜻함. 鬼子來了)>와 <와호장룡>은 투자자가 같은데 지앙 원 감독이 이 영화를 심의 통과도 하지 않고 국제 영화제에 내보내는 바람에 애꿎은 <와호장룡>만 상영을 못하게 된 것이다.
중국 시장의 규모는 약 20억 위엔보다 살짝 높은 것으로 측정된다. 97년 한국 영화 극장 수입과 비교했을 때 큰 액수는 아니며 중국의 특성을 고려하면 해당 시장은 만들어 나가는 이들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 중국은 외화의 상영일수를 제한하는데 코라임에 의하면 별도의 조사가 없어 변칙 운영이 쉬우며 규제 완화 준비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중국 시장의 장애 요인으로 해적판 문제, 영화 정책의 불안정성 등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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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정은 최근 내 수업을 수강했던 한 학생이 지금은 중국에 있는 한국 기업체에 근무하면서 내게 보내 온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 수입된 할리우드의 영화는 일단 극장에서 미국과 거의 동시에 상영이 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비디오테이프 등의 형태로 시장에 나오는 것이 상례일 텐데, 중국은 현지와는 많은 시차를 두고 상영하면서도 희한하게 거리의 상인들은 상영도 되지 않은 영화의 VCD를 팔고 있습니다. 이런 해적판(盜盤)의 신속함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서 미국 현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들이 거리에서 자막처리까지 된 채 팔려 나가고, 지난 여름 북경에서는 미국에서 막 상영이 시작된 <미션 임파서블2>의 해적판이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경이니 중국 인민들은 굳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극장을 찾지 않게 됩니다.” 위의 언급들이 바로 오랜 기간 외국의 투자자들이 중국 시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투자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 정부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아직 실효를 거두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합작공사의 한국 담당업무에 많이 관계했던 서창술씨는 중국 정부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런 문제를 타결하려고 한다면서 첫째, 정품 VCD의 가격을 종전의 60-70 위엔에서 25-30 위엔으로 낮추었으며 둘째, 경찰을 통한 단속강화라고 전하였다. 지금 정부에서도 해적판에 대한 규제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가시화되지는 않았으므로 확실히 말할 수 없고 다만 정부에서 특히 이 문제에 무척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한국에 수입된 할리우드의 영화는 미국과 동시 상영 후, 일정 기간이 지나서 시장에 나오는데, 중국은 현지와 많은 시차를 두고 상영하면서도 거리에서 상영 되지 않은 영화의 해적판이 팔고 있어 중국 인민들은 굳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극장을 찾지 않게 된다. 외국의 투자자들이 중국에 선뜻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정품 VCD의 가격을 낮추고 경찰을 통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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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업계의 변화는 93년의 개혁 조치 이후, 이미 예고되었던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영화 관련 사업이 중시하고 있는 사안 중의 하나가 낙후한 극장 시설의 수리와 개조, 즉 현대화라는 과제였다. 이에 극장 내의 사운드 설비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작업이 이루어져 통 깡 중국전영집단 회장에 의하면, 90년대 중반에는 전국의 천여 개 극장이 돌비(dolby)A형의 사운드 시설을 도입하였고, 이마저 돌비SR형으로 다시 상향 조정되는 추세를 보여 40-50개 극장이 사운드 시스템을 도입하였는데 최근에는 SR 디지털형으로 다시 그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 작업은 북경과 상해 등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도시 지역에 국한된 현상으로써 이러한 비용을 감당하기에 중국의 극장 사업이 원활치 않다는 난제가 남는다. 일례로 수입은 늘었지만 이윤은 내려갔다고 주장하는 96년의 북경 14개 극장 상황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96년 천만 위엔의 흥행 수입을 창조한 북경 최대의 극장, 수도전영원(首都電影院)의 경우, 지출을 제외한 실제 수입은 81만 위엔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현재 몇몇 선도적인 외국 투자의 현대식 극장 경우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는 듯하다. 위에서 언급된 환예의 경우, 올해 들어 가장 좋은 흥행 성적은 8월분 250만 위엔인데, 그나마 <다이너스티>, <미션 임파서블2> 등의 흥행 호조로 가능했으며 평균적으로는 한 달에 100만 위엔 이하의 흥행 수입을 거둔다.
극장업계는 93년의 개혁 이후 현대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중국전영집단 회장에 의하면 90년대 중반 중국의 천여 개 극장의 사운드 시설이 돌비형으로 상향됐으며 현재는 SR디지털형으로 상향되고 있지만 이는 도시 지역의 이야기일 뿐 극장 사업의 침체로 인해 비용 감당이 어렵다. 수입은 올라도 이윤은 없는 상황은 96년, 수도전영원 등 대극장에서도 나타났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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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약 외국 자본이 중국 내에 극장을 설립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타당한 지역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각 지역의 인사들에게 해보았는데, 중국 북경영화제편창의 창장 비서장은 지금 현재의 조건으로 보아서는 북경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중국의 정치와 문화가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외국 자본에게는 아무래도 중앙 정부와의 협조가 용이한 북경이 유리하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코라 임과 니이 쩐의 경우에는 상해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상업적인 활력은 북경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라고 들면서 앞으로 2-3년 내에는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판단하고 있다.
외국 자본으로 중국 내 극장을 설립할 경우 많은 이들이 정부 협조가 용이한 북경을 추천하였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와 상업적 활력을 이유로 상해가 낫다는 의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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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 외국 영화의 수입권에 관한 문제인데, 96년 정부에서는 시험적으로 중국의 북경, 상해, 장춘 영화제편창에 외화 배급권을 주어 각기 <워터 월드>, <쥬만지>, <토이 스토리> 등을 배급하도록 시험 조치를 취한 바 있었는데, 이는 제편창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외화의 수입권은 중영집단에 귀속해 놓고 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큰 불만을 가진 곳은 상해의 영락주식회사라고 판단된다. 양 위삥 이사장은 중영집단의 외화 수입권 독점에 관하여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공정한 무역 거래를 위반하는 특혜이며, 곧 시정될 것이라는 게 단호한 그의 의지이자 판단이라고 보여진다. 그들은 93년 이후, 제작업과 배급업, 극장업의 뚜렷한 경계와 구분이 허물어지면서 영화 제작에 참여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90년대 중반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2000년 현재에 들어와서, 새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즉 98년부터 영화의 출품권을 얻어, 99년부터 영화 제작업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 <黃河絶戀>으로 그 해의 금계장(金鷄獎)영화제 여우주연상, 특별상, 최우수 음악상, 최우수 특수 효과상을 휩쓴 것이다. 영락주식회사는 제작을 담당하는 영락영화텔레비젼그룹(永樂電影電視集團公司)을 설립하였는데 이들의 모체인 영락그룹은 상해시에만 36개에 달하는 극장을 가지고 있으며 전국 흥행 수입의 8분의 1을 차지하는 전국 제2위의 제작, 배급사로서, 98년 영화 제작업에 참여한 이래 99년 첫 작품을 내놓았고, 올해에는 6편의 영화를 제작 중이다.
96년 정부에서 중국 북경, 상해, 장춘 영화제편창에 시험적으로 외화배급권을 주었는데, 상해 영락주식회사에서는 외화 수입권이 중영집단에 독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공정한 무역거래를 위반하는 특혜라며 불만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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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중국의 영화법 「전영관리조례」의 제2장 19조부터 22조까지가 중외합작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규정이다. 이 규정에 의하면 중외합작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중국 측 합작자는 먼저 광전국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일회성의 「합작 허가증(中外合作攝制電影片許可證」을 발부 받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본다면 외국 자본과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합작은 중국내의 제작 허가를 받은 제작사라면 비준을 통하여 모두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때문에 이전 전영합작공사(中國電影合作制片公司)의 기능이 현재는 애매모호하게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1979년 광전부는 그 산하에 전영합작공사를 설립하면서 영상 산업 분야의 대외 합작을 전담시킨다. 이후 중국의 합작 영화 제작의 유형은 시기에 따라 대략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79년 이후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진행되었다. 최초의 외자 합작영화는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79년 <불타는 원명원(火燒圓明園)>이 제작되어 중국에서만 500여개의 프린트가 배급된 이래, 81년 <소림사(少林寺)> 등이 연이어 제작되었다. 이 단계의 특징은 홍콩의 자본과 주요 창작 인원들이 중국에 들어와 값싼 노동력과 장소를 제공받는 합작 방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서구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86년, 베르톨루치 감독이 <마지막 황제>를 북경 등지에서 촬영한 바 있고, 87년에는 <태양의 제국>, <돈황> 등이 중국 로케이션으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들은 국제적으로는 큰 영향을 끼쳤으나 중국과의 합작 방식은 이전과 다름없이 중국 쪽에서 인력과 장소를 제공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영화 제작 방식을 시에파이(協拍)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방식의 합작 형태는 89년을 전후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중외합작 영화는 중국내의 허가 받은 제작사만 가능하다. 1979년 광전부는 산하에 전영합작공사를 설립하며 영상 산업 분야의 대외 합작을 전담시켰다. 이를 시에파이(協拍)라고 부르며 이러한 방식의 형태는 89년을 전후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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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현재의 중국과 외국의 합작에 있어서 첫 번째 유형에 들 수 있는 해외 자본이 투자되어 중국의 감독이 연출하고 주요한 창작인원도 중국인이 담당하거나 다국적으로 구성된 스텝들이 영화를 함께 제작하는 경우이다. 바로 짱 이모우의 <국두(菊豆)>와 <홍등(大紅燈籠高高掛)>은 이러한 국면을 여는 시발점이 된다. 85년 이후 제5세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국제 영화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젊은 감독들에게 홍콩과 대만의 자본이 투자를 시작하였고, 이렇게 하여 제작된 영화들이 우리 귀에도 익숙한 <국두>, <귀주이야기>, <인생>, <상하이 트라이어드>,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등 짱 이모우의 전 작품들이며, <아이들의 왕>(’87) 이후에 만들어진 첸 카이꺼의 <패왕별희>, <현 위의 인생(邊走邊唱)>, <풍월> 및 최근 일본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징기스칸(荊軻刺秦王)>이다. 이 합작 방식을 통해 제작되는 영화들은 대부분이 국제영화제를 통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감독들이며, 그 중에서도 첸 카이꺼와 짱 이모우는 다국적인 합작을 통해, 일반적인 중국의 국산 영화들은 생각도 하지 못한 규모의 풍부한 자금을 유치 할 수 있었다. 한편 90년대 이후에는 중국에도 새로운 경향의 창작 그룹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지하전영(Underground Movie의 중국식 표현, 地下電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른바 제6세대 감독들이다. 이들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무렵을 전후해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거나 문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졸업 후에도 제편창에 취직하지 않고, 검열을 거부한 채 독자적인 노력이나 해외 예술영화 기금(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의 허벌트 발스 기금-Hubert Bals Fund-이 대표적이다)을 받아서 근근히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이런 영화들의 시장은 (중국 국내에서는 상영될 수가 없으므로) 당연히 해외의 예술 영화 시장이 된다.
해외 자본이 투자되어 중국의 감독이 연출하고 중국인이나 다국적 스텝들이 함께 제작한 영화 짱 이모우의 국두, 홍등은 새로운 국면의 시발점이 되었다. 85년 이후 제5세대 젊은 감독들에게 홍콩, 대만의 자본이 투자되어 국두, 귀주이야기, 아이들의 왕, 패왕별희 등이 만들어졌다. 국제영화제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첸 까이꺼와 짱 이모우는 다국적 합작으로 풍부한 자금을 유치받았다. 90년대 이후 제6세대 지하전영 감독들은 독자적 노력이나 해외 예술영화기금을 통해 작업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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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세대는 자신들의 낭만적이고 다분히 사색적인 중국 역사와 문화에의 집요한 질문이 중국의 국내 영화계의 사정과 맞물려 그 생명을 다하자, 89년 이후부터 새로운 방법으로 외국과의 합작을 시도했다. 결국 이들의 영화가 대규모의 자본을 끌어들이며 정치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소재로 타협(?)을 하기 시작할 무렵, 해외 영화제들은 바로 이들 중국의 지하전영 감독들을 발굴해 내었던 것이다. 중국의 현대화와 갈등에 대한 개인적인 진술들과 그들의 새로운 표현 방법들이 곧, 미지의 감독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작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유럽 등지의 예술 영화 기금의 눈길을 끌게 되었고,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독립영화 작가들의 영화는 중국의 지독한 영화 검열 정책에 대한 비판의 장이 열리는 포럼들과 함께 국제무대의 일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94년 4월, 당시 광전부(현 광전총국)에서는 일명, 7군자(七君子)로 통하는 7명의 감독들에게 영화제편창과 방송국, 현상소등 중국 내의 어떤 영화 제작 관련 단위도 이들과 작업을 도모하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려 이 감독들의 활동을 원천 봉쇄하였다가 96년 말 이러한 결정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내의 검열제도 때문에 불가능하다기보다 현재로서는 자본의 조달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7군자라고 불리는 7명의 감독들은 중국의 검열 정책을 비판하여 영화 제작 관련 활동을 모두 금지당했었다. 약 2년 후 그 금지는 풀렸지만, 현재는 검열이 아니라 자본 조달 문제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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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같은 ‘문화적 할인’ 요소도 잠재 소비자의 수와 그들의 소득(문화비 지출 규모)으로 구성되는 시장요인에 비하면 영향력이 약하다. 영상물이 시장규모가 작은 국가 쪽으로 수입될 때, 더 높은 예산(제작비)을 통한 제작의 질적 향상은 시장규모가 큰 쪽 제작자들의 언어 및 문화적 한계를 어느 정도 상쇄할 것이다. 반면 작은 시장을 가진 국가에서 제작된 영상물은 시장규모가 큰 시장으로 수입될 때, 언어 및 문화적인 한계와 더불어 더 적은 예산(제작비)으로 인한 불이익 모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관찰하기 어려운 ‘취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영상물에 대한 수요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장규모이다. 미국이 영상물의 국제교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과 호주산 미디어 생산물이 그나마 국제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도 영어권 시장의 규모라는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어권은 인구수가 막대한데다가 구매력 있는 소비자의 규모가 그 어느 언어권보다 크다.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동일한 예산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더욱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인구수에 있어서 중국은 최대 규모이지만 구매력이 약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 할인율이 40%로 같고, 제작비도 100억 원으로 같을 때 두 영화가 거래되었을 경우의 수입을 가정해서 비교해보자. 양국 간의 시장규모의 차이를 적게 잡아 10대 1(실제로는 30대 1)로 보면, 한 쪽은 6억 원이 이익인 반면 다른 쪽은 30억 원이 손해다. 이 36억 원의 차이는 서로 다른 시장규모와 ‘문화적 할인’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효과이고, 시장규모가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의 영화 수출이 그 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시장규모에 따라 영상물에 대한 수요가 달라지는데 영어권은 인구수와 구매력 있는 소비자의 규모가 그 어느 언어권보다 크기때문에 미국이 영상물의 국제교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인구수에 있어서 중국은 최대 규모이지만 구매력이 약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시장규모가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의 영화 수출은 그 만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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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영화 당국과 독립영화 작가들의 관계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가들이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 자식놈쯤 되고, 이 감독에게는 완고하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무거운 짐...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쯤 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다. 96년 경, 부산 영화제에 협조를 요청할 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동호 위원장 일행이 광전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나온 류우 지엔쭝과 만나는 자리에서 마침 나는 통역을 의뢰 받아 합석한 적이 있는데, 이 때도 류우 지엔쭝은 이들 젊은 감독과 부산 영화제의 결탁을 매우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영화도 제대로 완성도 있게 못 만들면서 중국 국내에서는 자본을 구할 수 없으니까 중국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으로 중국 정부에 적대적인 외국인들과 결탁했다. 돈 많이 줘도 영화 잘 못 만들 것이다.’라는 요점의 논지를 폈다. 한편 이러한 정부의 관점에 대하여 감독들 역시 중국 사정에 정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2000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중국 내 유명한 현대 소설 작가이자 최근 <부친(父親)>이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한 우앙 쑤어(王朔)를 만났다. 그에게 ‘<귀신이 왔다>를 만든 지앙 원이 허가 없이 영화제에 출품하여 난처해지지 않았는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라고 물어봤더니,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왜 못 만들어? 중국에서 영화 만들지 말래서 다 못 만들었나? 그리고 높은 어른들 만나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다 용서해 주잖아. 잠깐이야, 잠깐.’이라고 대답하여 웃은 적이 있다. 짱 위엔 역시 최근에 그에게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중국 국내에서도 상영될 수 있을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본을 구하고 있었다.
중국의 영화 당국과 독립영화 작가들의 관계는 일종의 굴레와도 같다. 류우 지엔쭝은 중국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돈이 없으니 중국을 나쁘게 그리는것으로 중국에 적대적인 외국인들과 결탁했다며 중국 감독들과 외국인의 관계를 마뜩찮아 했다. 한편 우앙 쑤어 감독은 중국 당국에서 맘에 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도 높은 관료들을 찾아가 빌면 용서해준다고 하며 개의치않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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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의 합작 유형은 시에파이, 즉 해외의 자본과 감독, 배우가 투입되고 중국 측에서는 노동력과 장소를 제공하는 방식의 이전 합작 패턴으로써 이러한 방법의 합작 형식은 그동안 주로 홍콩의 영화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황비홍>시리즈, <방세옥>, <청사>, <신용문객잔>, <서초패왕>, <동사서독> 등의 중국 무협과 사극을 혼합한 형태의 상업 영화들이 포함되는데, 평균 2천만 홍콩 달러가 투자되며 홍콩과 중국 이외에도 동남아시아나 세계 배급망을 통하여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극의 <신용문객잔>의 경우 홍콩, 대만, 중국에서만 6천만 홍콩 달러의 극장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99년 중국에서 시에파이의 형식으로 현지 촬영을 하였거나, 중국의 영화제편창과의 합작을 통하여 중국에서 제작된 <아나키스트>, <비천무>, 또한 현재 중국에서 촬영이 진행되고있는 <무사>의 경우가 바로 이 유형에 해당된다. 다음에서는 이 작품들의 사례 연구를 통하여 중국 현지 제작의 여러 면면을 알아보도록 한다.
두 번째의 합작 유형은 해외의 자본과 감독, 배우가 투입되고 중국 측에서는 노동력과 장소를 제공하는 방식의 시에파이이다. 주로 홍콩의 영화사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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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인 씨네월드의 대표 이준익 사장에 의하면 이 영화는 영화가 제작되기 6-7년 전부터 이미 기획되었고 중국 측과도 접촉을 가져왔다고 한다. 기획자인 그는 우선 이야기와 드라마의 보물창고 같은 것을 찾아서 이를 통한 끊임없는 반복 재생산이 가능한 장르를 성립시키는 것은 중요한 산업적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에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영화를 기획하게 되었으며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의혈단이라는 소재에 접하게 되자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상해 영화 제편창의 인사들과도 93년 이후 사적인 유대를 지속하고 있었지만 이런 관계가 협의과정을 용이하게 한 바는 없으며, 다만 개방과 개혁이후 중국 영화 산업의 제작 기반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중국의 영화제편창으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해외의 자금이나 작업을 유치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이러한 중국 측의 상황이 이번 <아나키스트>의 합작을 성사시키는데 큰 작용을 했다고 전했다. 여기서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앞에서 언급한 중국 영화 산업계의 급격한 시스템 개조와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영화제편창의 노력이라는 부분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교류 활동과 함께, <아나키스트>의 기획과 제작에 있어 공식적인 접촉은 영화진흥위원회의 국제 진흥부를 통한 경로와 상해시와 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부산시의 국제 교류 부서를 통하여 상해 제편창의 대외합작부(對外合作部)와 접촉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는 협조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전혀 진행이 되지 않았다고 이창준 프로듀서가 밝히고 있다.
이준익 사장은 영화 <아나키스트>가 제작되기 6-7년 전부터 중국 측과 접촉을 가져왔다. 개방과 개혁이후 제작 기반이 붕괴되고 있는 중국의 영화제편창으로서도 해외의 자금이나 작업을 유치하기 위해 이번 합작이 필요했다.